[clearfix]
1. 개요
김동엽의 지도자 경력을 다룬 문서.2. 아마추어 지도자
대한체육회에서 개설한 코치 아카데미를 수료한 후 1971년 창단한 건국대학교 야구부 초대 감독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건대 감독이 된 그해 겨울 학교 운동장에 비닐하우스 훈련장을 만들어서 선수들에게 엄청난 스파르타 훈련을 시키며 창단 1년만에 학교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당시 에피소드로 김동엽이 학교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관계자가 "이 겨울에 채소라도 키우려고 그러느냐"고 물었고, 김동엽은 "그렇소. 건국대를 건강하게 키울 야구 채소입니다" 라고 답했다는 얘기도 있다. 덕분에 그 해 건국대는 전 해에 비해 입시원서가 3배 넘게 팔리며 학교의 인기가 상한가를 쳤다고 한다.이후로 공군 야구팀인 성무[1], 실업 롯데, 성균관대, 한양대 등의 감독을 역임하며 특유의 카리스마 넘치는 스파르타 식 훈련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집불통에 직설적이고 불같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던 탓에 구단 고위층과의 충돌이 잦았고 선수들과의 마찰도 적지 않아 한 팀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고 서두에서와 같이 13번의 해임이란 흑역사를 남기기도 했다.[2] 평소 김동엽은 자신의 의견과 부딪히거나 옳지 않다고 생각되면, 선후배는 물론 지위고하도 안가리고 걸쭉한 황해도 사투리가 섞인 "제-에-미~"로 시작하는 투박하고 직선적인 말투로 마구 따지고 대들었다고 한다.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의 창단감독으로 취임한 1975년 12월, 부산 전지훈련에서 연세대학교 야구부와의 연습경기때 선수들이 무기력한 플레이를 보이자, 이에 격분한 김동엽 감독이 서울까지 전 선수단을 13일간 하루 50km 구보로 복귀시킨 사건은 유명한 일화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신생팀의 홍보 효과를 노리고 사전에 김동엽이 혼자서 구상한 이벤트였다고 한다. 때마침 선수들이 연습경기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김동엽이 기다렸다는 듯 즉흥적인 결정인양 자연스레 준비해 둔 카드를 꺼내든 것. 이때부터 보름간 롯데 선수들은 구간 마라톤 형식으로 서울까지 뛰어야 했다. 그리고 이것이 이현세 작 '공포의 외인구단'의 지옥훈련의 모티브가 되었다. 당시 롯데 관계자가 펄쩍 뛰면서 한 겨울에 선수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반대하자, 이미 전문의의 협조[3] 하에 안전하게 뛰게할 조언까지 받았다면서 오히려 엄청난 홍보효과가 계획대로 나타날 거라 장담했다. 실제로 롯데 야구단의 구보 복귀 이벤트는 언론의 관심을 끌면서 당시 신생팀이던 롯데 자이언트의 인지도는 확 치솟았다. 당시 실업 롯데 소속으로 구보에 참여했던 천보성, 정현발(이상 삼성), 차영화(해태), 계형철(OB) 등의 선수들은 대부분 국가대표를 거쳐 한국프로야구의 원년 창립멤버로 활약했다. 본인은 행군하는 선수들에게 솔선수범을 보인 것이 아니라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선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4]
이 때 생긴 에피소드로, 부산~서울간 구보 종료 당일 구단에서 선수들을 위해 불고기 회식을 마련 했는데 투수 양한철이 맥주를 원샷했다가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간 일이 있었다. 장거리 구보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알콜이 들어오는 바람에 탈이 난 것인데, 그 일로 양한철은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그리고 김동엽은 1977년 1월 18일 부터 1월 31일 까지 13일 동안 이른바 통일염원의 대행군이라는 명목으로 또다시 롯데 선수단을 전남도청에서 임진강 자유의 다리까지 총 480km를 행군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5]
3. 프로 지도자
3.1. 해태 타이거즈 창단 감독
불과 13게임 만에 유니폼을 벗은 해태 감독 시절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 해태 타이거즈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야구계에서 김동엽의 위상은 대단했는데 이는 해태그룹이 KBO 측에 감독 김동엽을 창단 조건으로 요구한 것에서 드러난다. 다른 기업들이 창단 조건으로 서울을 연고지로 달라거나 실업팀의 소속 선수들에 대한 보유권을 인정해 달라거나[6] 하는 예는 있었지만, 특정 감독의 영입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김동엽의 사례가 유일무이 하다. 김동엽의 인지도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는 한데...
사실 인지도라기 보다는 광주라는 연고지 적인 이유가 컸다. 1980년 4월에 방송을 개시한 MBC 라디오 홈런출발의 구성작가 김광휘씨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진행자이던 김동엽(당시 한양대 야구부 감독)의 입을 빌려 "지금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의 진실이 객관적으로 밝혀지길 바란다"는 직설을 내뱉는 사고를 치며 김동엽도 김광휘씨와 같이 신군부 정권의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이런 상황 이었기에 해태그룹은 프로야구 창설 준비팀과 협상하면서 "창단은 하겠지만 대신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 하더라도 양해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김동엽은 MBC 프로그램에 출연 중인 데다가 MBC 프로야구단 창단 작업에도 깊숙히 개입해 있었는 바, 공공연히 MBC의 초대 감독은 김동엽이라고 사실상 인정받고 있는 상황에서 해태는 김동엽이 필요하다는 의사를 표시했고,[7] 호남 연고팀을 유치하는 데 혈안이 돼있던 프로야구 준비팀과 청와대에서 이를 받아 들이면서 해태 타이거즈 창단과 김동엽의 영입이 이루어진 것이다.[8]
해태 구단 창단 후 광주에서 열린 환영회 때 김동엽이 무등구장의 관객석을 꽉 채운 광주 시민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 김동엽이가 호남인 여러분들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왔습니다~!!"라고 부르짖자 시민들은 불같이 환호했는데, 행사 후 김동엽의 경복고 동창인 광주일보 사장 김종태가 "시국이 어느 때인데 그런 발언은 위험하니 자제해 달라"며 충고했다고 한다. 하긴 신군부가 석연치 않은 과정을 거쳐 집권한 지 불과 1~2년 남짓한 시기였으니...
그러나 이런 엄청난 기대를 받으면서 출발한 김동엽의 해태 초대 감독 시절은 시즌 개막 후 13게임 만에 느닷없이 "총감독"이라는 직책으로 보직이동되면서 실제 구단의 지휘권이 있는 감독대행을 조창수 코치가 맡으면서 사실상 해임당했다. 당시 이런 총감독이라는 직책으로 해임을 포장한 것은 인지도 있는 김동엽을 자를 때 벌어질 수 있는 구단 이미지를 고려한 듯 하다. 이로서 해태 감독으로서는 5승 8패의 성적만 남기고 허무하게 종지부를 찍었다.
나중에 스포츠 주간지의 후일담 기사로 이 보직이동은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로 인한 것임이 밝혀졌다. 이것은 단순한 불화가 아니라 김동엽 감독의 과도한 알콜 사랑이 빚어낸 촌극이었는데...[9] 자세한 내용은 조창수·유남호 코치 잠적 사건 항목에 나와 있으니 참고 바람. 이 불화사건은 김동엽의 지도자 생활 중 가장 큰 흑역사였다. 다만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의 내막은 당시에는 대중에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으며[10], 결과적으로 1년후에 김동엽은 다시 MBC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3.2. MBC 청룡 감독 1기
이후 약 1년 간 MBC의 야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백인천이 시즌 초반 감독직에서 이탈한[11] MBC 청룡의 콜업을 받고 후기리그 부터 감독으로 취임하여 특유의 선수 장악력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 MBC를 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1983년 한국시리즈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다. 때마침 시리즈 상대는 전해 자신을 자른 해태 타이거즈였고 김동엽 감독은 누구보다도 전의를 불태우며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그러나 하필 한국시리즈 개막을 며칠 앞둔 10월 9일 아웅산 사태가 터지며 개막이 일주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사이에 보너스 지급 문제가 불거지며 선수단 분위기가 와해되는 바람에 해태에 1무 4패로 속절없이 주저앉고 말았다.그 해 후기리그 막판, 김동엽 감독은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후기 우승시 선수들에게 1인당 5백만원[12] 씩 보너스를 주겠다"라고 발언했고 이에 고무된 선수들이 결국 우승을 실현시켰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후기리그 우승 축하연에서 모 고참급 선수[13]가 MBC 구단 관계자에게 보너스 지급 여부를 물었다가 무슨 소리냐며 면박만 당했고, 이에 선수들의 사기는 급전직하 하고 말았다. 당황한 김동엽은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주겠다"라고 선수들을 달랬지만, 당시 해태는 우승 시 보너스로 1억원을 푼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14] 기가 죽을대로 죽은 선수들에겐 무소용이었다. 당시 구단주이던 이웅희 MBC 사장이 벼랑 끝에 몰린 5차전 전날 밤 김동엽 감독을 찾아가 "우린 2억원을 풀겠다"고 전하라 했지만, 이미 해태에 1무 3패로 밀리고 있던 상황인지라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 였다. 결국 한국시리즈 제패에 실패한 김동엽은 준우승 감독임에도 불구하고 또 잘렸다.
시리즈 당시 MBC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에 김동엽의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작전이나 선수 기용[15]으로 인하여, 항간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으로 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 큰 광주의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5공 정권에서 MBC가 해태에게 우승을 양보하도록 압력을 넣은게 아니냐"는 루머까지 돌 정도였다. 후일 김동엽은 "결전을 앞두고 선수들과 돈 때문에 승강이를 벌여야 하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승리에 대해 전혀 의욕이 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런 식의 경기 운영은 감독으로서 태업이자 직무유기임에 틀림없다...
이후 약 2년 정도 야인 시절을 보내던 중, 육영재단 산하 어린이회관[16]의 어린이 야구교실 감독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국민학교(현재는 초등학교) 아이들을 상대로도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악명을 떨쳤고, 그 넓은 어린이회관을 몇 바퀴 돌리는 식의 체력훈련을 시켰다고 한다.[17]
3.3. MBC 청룡 감독 2기
1985년 시즌 어우홍이 이끌던 MBC가 전기리그 5위(당시는 6개 구단 체제)로 추락하자, MBC는 어우홍을 감독직에서 중도해임 시키고 후임 감독으로 김동엽을 재영입했다. 이당시 계약 연봉이 3천만원으로, 7개구단 중에서 최고였다는 점에서, 그가 두번의 실패를 겪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그래도 한국 최고의 명감독으로 추앙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해 후기리그 부터 사령탑에 오른 김동엽은 흐트러진 팀 분위기를 다잡으려 했지만 MBC는 후기리그 6위로 떨어지며 종합 5위로 당시 기준으로는 창단 이래 최악의 성적을 기록했다.[18]하지만 오프 시즌에서 절치부심한 김동엽은 1986년 시즌 혜성같이 떠오른 슈퍼 루키 김건우를 앞세워 전기리그는 4위에 그쳤지만 후기리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OB 베어스와 정규시즌 막판까지 치열한 플레이오프 진출 경쟁을 벌였다.
시즌 최종전인 9월 17일[19] 해태 타이거즈와의 전주 경기를 9대 4 승리로 이끌고 1983년 한국시리즈 이후 3년 만의 가을야구를 확정짓나 싶었지만, 같은 날 잠실에서 OB 베어스가 롯데 자이언츠에게 9회초까지 1대 3으로 뒤지다가 9회말 최동원을 상대로 동점 투런홈런을 뽑아낸 김형석과 3루타를 치고 중견수 홍문종의 송구 실책[20]으로 끝내기 득점까지 올린 신경식의 활약으로 극적인 4대 3 역전승을 거두며 후기리그 2위로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낚아챘고,[21] MBC는 3위로 미끄러지며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덧붙여 이 시즌에 부정위 타자 문제로 시비가 있자 일부러 부정위타자를 만든 사건도 있었다.
이쯤 되자 MBC 구단 측은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책임도 물을 겸 그동안 잦은 구설수로 팀 내외로 여러 말이 많던 김동엽을 경질하고 삼성과의 계약이 만료된 김영덕을 감독으로 데려올 생각을 한다. 그런데 김영덕이 당시 모 언론지 기자를 다리삼아 MBC 감독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MBC에서는 "기자한테 기대서 감독으로 오려는 사람은 필요없다." 라며 김영덕 영입 의사를 철회해버린다.[22] 대안이 사라진 MBC는 결국 김동엽을 한번 더 유임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해 MBC는 자매 구단인 주니치 드래곤즈에 요청하여 일본인 코치 미즈타니 히사노부를 영입했는데, 김동엽과는 야구관이 극단적으로 달랐던 탓에[23]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24] 그러나 MBC 구단 측에서는 김동엽보다 미즈타니를 더 신임했고, 1987년 시즌부터는 김동엽의 투수 기용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수단 운영 권한을 미즈타니에게 부여하였다.[25] 여기에 선수들의 감독 불신임 여론까지 겹치면서 결국 김동엽은 그 해 후기리그 개막 직전 유니폼을 벗고 말았다. 감독 불신임을 놓고 공식적으로 투표를 한 건 아니었고, 구단 고위층에서 몇몇 고참급 선수들을 비밀리에 불러 김동엽의 재신임에 대한 의견을 물었는데, 전부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 이런 고약한 전통은 1989년 시즌 감독이던 배성서의 퇴진시에도 재연된 바 있다.
그것으로 김동엽의 감독 인생은 끝이었다.
1987년 올스타전에서 김응용 감독과 함께.[26] 이것이 그라운드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동엽의 덩치에 주목. 김응용은 젊은 시절 190cm에 달했던 장신이고, 김동엽도 180cm는 되어 보인다. 1940년대생 한국남성 평균신장이 166cm 정도였으니 김동엽도 엄청난 거한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정규시즌은 전후기로 구분하여 전기리그와 후기리그 각 1위팀이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전후기 1위가 같은 팀이라면 2위 팀끼리 플레이오프를 통해 시리즈 진출을 결정하는 형태였는데,[27] MBC 측에서는 후기리그부터의 분위기 일신을 위해서 올스타 브레이크 도중 김동엽의 해임을 결정했다고.
[1] 김동엽은 1974년 성무 야구단 창단 감독을 지냈다. 이때는 각 종목별로 대한민국 육군,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공군, 대한민국 해병대 등이 서로 경쟁하던 시대였다. 당시 성무뿐만 아니라 육군중앙경리단(약칭 경리단)도 야구단을 운영하여 선수들이 병역과 야구를 병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육군의 경우는 종목별로 운영 부대가 달랐다.). 차범근도 분데스리가 진출 직전 성무 축구단에서 병역의무를 마쳤다. 군팀이 전부 상무로 통합된 것은 5공 때인 1984년의 일이다.[2] MBC 시절에는 이광은, 한양대-해태 시절에는 김일권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3] 실제로 겨울에 선수들이 장거리 구보를 하면 어떤 영향이 있을 지 친분이 있던 의사에게 문의를 했고, 그 의사 또한 처음엔 말도 안된다고 말리려 했지만 김동엽의 계획을 듣고는 그럴싸 하다고 생각하여 "겨울 바람에 선수들 내장이 상할 수도 있으니 구보 시에는 비닐 복대를 차게 하라"고 권유했다 한다.[4] 당시 30대 중후반이었기 때문에, 선수와 같이 뛰기는 무리였을 듯 하다. 당시는 체계적인 선수관리, 과학적인 피지컬 트레이닝 같은게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종목을 막론하고 선수생명이 지금보다 10년이상 짦았다. 그래서 실업야구 선수들은 대체로 20대 후반이 되면 급격하게 폼이 떨어지기 시작해서 30살을 전후로 해서 은퇴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실업선수들은 대체로 은퇴하면 본사에 입사해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기 때문에(특히 은행팀), 굳이 월급도 일반 직장인과 비슷한 선수생활을 오래 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래도 오대산 극기훈련 당시 따뜻한 숙소 방에 머물러계셨다던 누구보다는 낫다[5] 그리고 27년이 지난 뒤 비슷한 광경이 펼쳐지게 된다. 2004년 1월 KIA 타이거즈가 당시 감독이던 김성한의 주도로 군산 월명야구장에서 광주 무등야구장까지 걸어서 종주하는 행군 행사를 진행했다.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 이어오던 타이거즈 정신을 강화하겠다며 강행한 행사였는데 결국 이 행군으로 인해 주축 투수였던 김진우의 무릎이 아작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 인해 김진우의 커리어는 나락으로 떨어져 완전히 2003년 같은 좋은 모습을 더는 보여주지 못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 김성한이 말하길 원래는 지리산 종주를 하려고 했으나 음식물 공급이 힘들다는 프런트의 말에 군산~광주 종주로 바꿨다고 했다.[6] 대표적인 사례가 한국화장품이었다. 현대그룹, 대한항공 등 유수한 기업들이 고사한 인천 및 경기·강원 연고지의 사례였다. 한국화장품 오너 임광정 사장은 경기도 개성 출신이었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은 강원도 통천 출신이었으며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은 서울 태생이지만 사업을 인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인천·경기·강원 연고를 맡아달라 요청했지만 현대는 정주영이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서울올림픽 준비에 올인 중이었고, 대한항공은 누적된 적자가 심하여 주주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모조리 프로야구 참가를 거부했다. 특히 당시 대한야구협회 회장으로 1982년 서울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에 주력하던 임광정 사장으로서는 프로야구의 출범이 상당히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건 조건이 서울 연고에 한국화장품 선수단을 그대로 프로에서도 끌고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이었다. 김봉연, 김재박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만 모인 거의 국가대표급 라인업을 자랑하던 한국화장품 이었기에 질러 볼 만한 조건이었지만 프로야구 준비팀 측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 말라며 당연히 거절했다. 그랬던 한국화장품은 1995년 초에 선수 스카웃까지 해 놓고 팀을 해체하면서 야구인들의 분노를 샀다.[7] 추가로 해태는 프로야구 팀을 운영하기에는 자금 상황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재무부의 특별 금융지원도 요구했다. 청와대에선 이것도 흔쾌히 받아 들였다.[8] 당시 청와대에선 지역연고제로 가는 마당에 호남만 빠지면 프로야구를 하는 의미가 없다고 우려했다. 호남만 빼고 다른 지역들만 프로야구로 들썩이면 호남 홀대론, 호남 차별론이 불거져서 오히려 민심 이반이 심각해진다는 정치적 판단이었다. 이때문에 호남 연고팀을 유치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9] 감독이란 자가 매일 밤 코치들을 때리거나 괴롭히는데, 계속 버티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10] 사실 이정도의 문제라면, 다른 구단에서는 절대로 물망에 오를 수준이 아님에도 MBC 구단의 경영진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듯하다.[11] 간통사건 직후 불명예 퇴진하고,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 겸 타격코치로 이적했다.[12] 당시 대기업 신입사원 초봉이 3십만원 정도였다. 5백만원이면 대기업의 대리급 연봉과 맞먹었고, 웬만한 프로야구 선수 반 년치 연봉 수준의 거금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4백~5백원 정도 하던 시절이다.[13] 평소 쓴 소리를 거리낌없이 했고 동료들의 이해관계를 잘 챙겨줘서 별명이 야구계의 바웬사였다.[14] 단 이 1억원이 1인당 1억원이 아니라, 감독+코치+선수+프런트 전체 명의로 1억원을 받고 그 1억원을 n분의 1로 다같이 나눠가지던 것이었다. 결국 MBC에 이어 해태도 돈 문제 때문에 홍역을 치르게 된다. 우승 보너스 문제에 다음 시즌인 1984년 선수단에 대한 처우가 오히려 악화되면서 선수단 분위기가 흉흉했는데 이때 터진 사건이 바로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 사건이었고 이를 주도한 선수는 따로 있었지만 평소 저항적인 성격이 강한 김일권이 주모자로 오해를 받으면서 김응용 감독에게 따귀를 맞고 눈밖에 나게 되었다. 이후 김일권은 1986년 OB 베어스의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해태 유니폼을 입으면서 3루수에서 자리를 옮긴 이순철에게 중견수 주전을 내주고 1988년 태평양 돌핀스로 이적했다...[15] 예컨대 1차전 5회까지 0대 7로 난타당하는 데도 오영일을 계속 마운드에서 버티게 했고, 2차전에선 1대 5에서 4대 5까지 따라 붙었지만 선발 유종겸으로 계속 밀어붙이다 4대 8로 패배한 점이나 1무 3패로 몰린 5차전 선발투수로 그 해 정규시즌 1승 1패에 불과한 이원국을 올린 점 등등 미심쩍은 점이 너무 많았다.[16]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있던 그곳이 맞다.[17] 프로선수도 아닌, 아직 성장이 활발하게 이뤄지는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프로에 맞먹는 훈련을 했는데, 아까 말했듯 어린이회관을 중심으로 기본 열 바퀴씩 돌리고, 어린이들에겐 아직 어려운 훈련인 펑고를 시켜서 자기 만족 기준에 못 미치는 아이들을 오리걸음을 시키는 등 아이들이라고 봐주는 것 없이 굴렸다(...) 투수를 하고 싶다는 아이에게 한 번 공 원없이 던져보라며 제구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100구 이상씩 던지게 했다.[18] MBC는 1990년 LG 트윈스로 바뀐 후 2006년까지 정규시즌 꼴찌를 기록한 역사가 없다.[19] 그 해 9월 20일 개최된 서울 아시안 게임 일정에 쫓겨 정규시즌 일정을 평소보다 한달 가까이 앞당겨 마쳐야 했다.[20] 이 때 최동원이 3루 뒤쪽을 커버했으면 신경식의 득점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김형석에게 동점 홈런을 맞고 멘붕한 상태였는지라 평소 그답지 않게 멍하니 마운드에 서 있었다.[21] 만약 이날 롯데가 승리했다면 MBC의 플레이오프 진출은 제쳐두더라도, 최동원은 3년 연속 20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는 선동열도 이루지 못했던 꿈의 기록이며 KBO에서 지금까지 아무도 달성하지 못했고 시즌 20승 투수도 보기 힘든 현재로서는 상당히 달성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날 OB의 선발 투수였던 최일언은 팀이 역전승한 덕분에 패전이 아닌 노 디시전을 기록하며(이날 승리투수는 9회초 구원 등판한 박노준이었다) 19승 4패를 유지하여 승률 0.826로 한국 데뷔 후 첫 타이틀을 따낼 수 있었다. 한편 24승에 평균자책 0.99로 투수 3관왕을 바라보던 해태의 선동열은 승률(0.800)에서 최일언에게 밀리며 2관왕에 만족해야 했지만, 그해 MVP를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9년 승률까지 포함한 투수 부문 3관왕을 원년의 박철순 이후 처음으로 차지했다.[22] 이후 김영덕은 1년을 야인으로 지내다 1988년에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한다.[23] 미즈타니는 그 당시 아시아 야구인으로는 보기 드물게 한계투구수 개념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하고, 김용수를 전업 마무리 투수로 전향시키는 등 미국식 투수분업제도를 신봉했다.[24] 같은 잠실팀 OB 베어스의 경우, 감독 김성근과 코치 이광환이 야구관 차이로 인하여 의견 충돌이 잦아지자 두 사람 모두를 아끼려 한 구단 측에서 이광환이 사표를 내고 해외 연수를 가는데 금전적으로 지원해 주고 연수 종료 후 이광환을 2군 감독으로 취임시키는 식으로 교통정리를 해 주었다. 이 당시 OB는 2군에서 아무리 잘해도 1군으로 콜업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는 김성근과 이광환 사이의 보이지 않는 파워 게임 탓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김성근과 이광환의 사이는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25] 그 해 김동엽은 경기 시작 30분 전에야 헐레벌떡 운동장에 도착해서는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식사를 하며 주변의 기자들에게 무심결에 "오늘 우리 선발투수 누구래?"라면서 물어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26] 김응용 감독과는 인연이 남다르다. 우선 실향민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둘 다 6.25 전쟁 당시 피난 온 부산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김동엽 감독이 잘린 이후 해태 타이거즈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 이가 김응용이었다. 특히 이 두 사람은 MBC 감독과 해태 감독으로서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은 바 있다. 김응용은 김동엽이 작고한 후 "그 형님, 참 대단한 양반이었죠"라고 그에 대해 긍정적으로 회고한 바 있다.[27] 2위도 같은 팀이면 그 팀이 한국시리즈 직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