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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15대 국왕 기림 이사금 | 基臨 尼師今 | |||
출생 (음력) | 연대 미상 | ||
사로국 서라벌 | |||
사망 (음력) | 310년 6월 | ||
사로국 서라벌 | |||
능묘 | 미상 | ||
재위기간 (음력) | 신라 제15대 국왕 | ||
298년 12월 ~ 310년 6월 (12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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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기림(基臨) / 기립(基立) | ||
부모 | 부친 석걸숙 | ||
왕호 | 기림 이사금(基臨 尼師今) | ||
기립 이사금(基立 尼師今) | }}}}}}}}} |
1. 개요
신라의 제15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제14대 유례 이사금부터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6대 흘해 이사금까지 세 명의 자세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13대 미추 이사금 이후에는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석씨 왕실이 무너지며, 김씨가 왕실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석씨 왕실의 계보가 실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림 이사금은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나이 차이로 보아 아들일 가능성은 적고, 일반적으로 《삼국유사》가 석걸숙을 누락한 것으로 본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을 따르면 아버지는 이찬 석걸숙인데 《삼국사기》에는 석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주장도 함께 싣고 있다.
2. 생애
기림 이사금(基臨尼師今)[기립(基立)이라고도 한다.]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 이사금(助賁尼師今)의 손자로 아버지는 이찬 걸숙(乞淑)이다.[또는 걸숙은 조분왕의 손자라고도 한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송하였다.2년(서기 299) 봄 정월, 장흔(長昕)을 이찬으로 삼고 겸하여 중앙과 지방의 병마의 일을 맡겼다. 2월, 시조묘에 제사 지냈다.
3년(서기 300) 봄 정월, 왜국과 사신을 교환하였다. 2월, 비열홀(比列忽)을 두루 돌아보며 나이 많은 사람과 가난한 사람들을 몸소 위문하고 어려운 정도에 따라 곡식을 차등을 주어 나누어 주었다. 3월, 우두주(牛頭州)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두 나라가 항복하였다.
5년(서기 302),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다.
7년(서기 304) 가을 8월, 지진이 일어났고 샘물이 솟아올랐다. 9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 민가가 무너지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10년(서기 307),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新羅)로 하였다.
13년(서기 310) 여름 5월, 임금이 병이 들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수를 사면하였다. 6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2.1. 해석
기림 2년(300) 정월 왜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해 노인과 빈민들을 위문하며 식량을 하사했다. 비열홀이 현재 비정되고 있는 함경남도 안변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고 있는데 경상도 지역도 제패하지 못한 3~4세기 신라의 상태에서 그 정도 북쪽까지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근방인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고, 그 해 음력 3월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고 한다. 다만 낙랑과 대방이 이 시기에 항복해왔다는 기록은 다소 믿기 어렵다. 신빙성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봐도 낙랑과 대방의 항복 기사는 진짜 항복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수교 요청일 가능성이 높은데[1] 바로 직전에 고구려와 맞대고 있는 지역인 비열홀에 순행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신라가 비열홀까지 갔을 가능성도 드물어서 기사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일단 낙랑군의 멸망은 313, 대방군의 멸망은 314년인데 후술하겠지만 기림의 추정 연령을 고려하면 기림보다는 기림의 선대에 낙랑과 대방이 망했을 것이다.흘해 9년(307), 탈해 이사금(제4대)이 '계림'으로 바꿨던 국호를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 신라로 확정한 것은 후대의 지증왕(제22대) 대의 일이다. 서라벌의 음차인 신라, 사로, 사라 등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고 국호를 확정했다는 언급은 지증왕 대에 나온다.
3. 재위기간 문제
기림 이사금의 행적은 동시대의 다른 신라 왕들과 비교해봐도 기이하며, 위와 같이 시기적으로 모순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 때문에[2] 미추 이사금(제13대), 유례 이사금(제14대)과 더불어 후대의 기록이 앞당겨졌다는 설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기림 이사금이 충주 고구려비(480년 건립 추정)에 나오는 매금 기(忌)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내물 이사금의 재위 중기 이전은 전부 인상했다는 것이 정설이다.[3]최근 신라의 박석김 왕계가 사실 동시대에 존재한 군주들을 순서대로 재위한 것처럼 왜곡한 것이라는 견해가 떠오름에 따라 이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경우, 앞에서 개연성을 지적받은 행보들의 상당수를 설명할 수 있다. 신라 왕위는 6세기 초까지 6부 간(干)의 수장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6세기 초 금석문에서 7명의 왕이 모여 국내 사건을 논의했다는 기록을 보아, 6부의 수장뿐만 아니라 일정 이상을 세력을 가진 유력자도 간이자 왕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추 이사금의 실제 생년은 310~320년대로 추정되고, 흘해 이사금은 320년 전후로 추정되는데, 벌휴 이사금이 사망했을 때 장손인 조분 이사금이 어려서[幼少] 내해 이사금이 즉위했고 내해가 자신의 4촌이자 사위인 조분 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라 유언한 것을 보아 벌휴~흘해까지의 배치는 나이순으로 보인다. 미추와 흘해의 나이 차이가 10살 이내로 보이는 데다 기림과 흘해 둘 다 조분의 손자라는 점, 유례는 조분의 아들 또는 우로의 형 내음의 외손자로 전해지고 미추와 그 동생 말구와 꽤 친했다는 정황이 있기 때문에[4] 미추, 유례, 기림, 흘해 모두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났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굳이 순번을 미추-유례-기림-흘해로 배치한 것을 보아 기림이 미추와 유례보다 연하고 흘해보다 연상이었던 듯하다.
구도의 딸 옥모부인은 미추의 추정 생년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흘해의 어머니 명원부인과 동세대로 보인다. 골정-조분-광명부인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고려하며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실제로 4세기 초반에 혼인한 건 사서에서 부인의 이름이 없는 걸숙이고, 미추의 처 광명부인은 걸숙의 친손녀인 기림의 딸로 보인다. 이 경우 사서에서 기림 이사금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기록이 없는 건 사서에서 신라 김씨 왕조의 기년을 인상하는 과정에서 세대도 인상하다 보니 자연히 없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광명부인의 기림의 딸이 맞다면 신라 김씨 왕조는 기림의 후손이 된다.
4. 기타
《북사》와 《수서》에 기록된 다소 뜬금없는 신라 건국설과 연관이 있을지 모른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과의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한 동천왕을 따라 옥저로 이동한 고구려의 유민이 훗날 동천왕이 고구려로 돌아갈 때 돌아가지 않고 남아 세운 나라로, 백제 사람을 왕으로 세웠으며 한 / 예 / 옥저 / 불내에 걸쳐 있다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비류수 전투는 244년에 있었고 동천왕은 248년에 사망했는데, 김씨 족단의 전신인 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이 건국된 시기가 고고학적으로 3세기 중반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시기가 겹친다.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은 전형적인 마한 국가이며 마지막까지 친목지국 성향을 고수해서 4세기 초반 분노한 백제에게 목지국 본가와 함께 완전히 초토화되고 신라로 도망쳐 김씨 족단이 되는데, 고구려 일부 세력이 금릉동 마한 소국을 건국했을 당시 합류했을 개연성은 있다.[5] 다만 금릉동과 사로국 사이의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면 강을 건넜다기보다는 육로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에, 바다를 건넜다는 건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3세기 중후반에 낙동강 유역에 갑자기 오환 양식의 유물이 나타나고, 사서의 비류수 전투에서 동행했다는 오환군에 대한 기록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는 점을 들어 비류수 전투 도중에 고립된 오환군을 위군이 버리고 갔고, 오갈 데가 없어진 오환군이 진한으로 이주한 것이 후대에 와전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후에도 342년 전연(모용선비)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1,5000명의 별동대가 고구려에게 패배하자 모용황의 본대는 별동대를 버리고 귀국하는데 이후 사로국에서 선비족 양식이 나타나거나 유례 14년조에 유례가 이서고국과 전쟁하다 패할 뻔하자 미추가 '특별한 군대'를 보내 유례를 구해주는 등 고구려가 중원 북조 국가와 전쟁하다 북조 병력이 낙오되면 신라로 남하하는 듯한 정황이 있다. 신라 김씨 왕조는 흉노의 김일제의 후손을 자칭했고 유전적으로 고대 신라 지배층과 스키타이의 연관성이 나타나는데 오환의 전신인 흉노의 피지배층에는 서아시아에서 이주한 스키타이, 사르마티아가 포함되어 있던 점과 신라 지배층의 유골이 현대 기준으로도 장신이 많이 나타나는데 신라 지배층에 오환-선비 일파가 지속적으로 합류하고 그 영향을 받았던 것이 후대에 와전된 듯하다.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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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기림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二月 기림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장흔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三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七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 샘물이 솟아오르다
七年秋九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
十三年夏五月 죄수들을 사면하다
十三年夏六月 왕이 죽다
6.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85em; letter-spacing: -1.5px" | ||||||||||||||||||||||||||
선도성모 | 은열왕 | 문열왕 | 감문왕 | 문의왕 | 장무왕 | 장렬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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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1 시조 혁거세왕 | 알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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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2 남해왕 | 운제 | 청평군 | 박민 | 세조 알지왕 | 사요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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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3 유리왕 | 아효 | 昔4 시조 탈해왕 | 지소례왕 | 일지왕 | 태조 성한왕 | 사요왕의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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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7 일성왕 | 朴5 파사왕 | 석구추 | 김아도 | 허루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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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8 아달라왕 | 朴6 지마왕 | 昔9 벌휴왕 | 김수류 | 마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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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왕 | 세신왕 | 이칠왕 | 김욱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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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1 조분왕 | 昔12 첨해왕 | 昔10 내해왕 | 술례부인 | 구도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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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4 유례왕 | 석걸숙 | 내음왕 | 석우로 | 광명부인 | 金13 미추왕 | 김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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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15 기림왕 | 昔16 흘해왕 | 金17 내물왕 | 김대서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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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19 눌지왕 | 파호왕 | | 김미사흔 | 金18 실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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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20 자비왕 | 습보왕 | | 김내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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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21 소지왕 | 金22 지증왕 | | 선혜부인 | 김물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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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3 법흥왕 | 입종왕 | | 김거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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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4 진흥왕 | 김숙흘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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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승왕 | 동륜왕 | 만천왕 | 聖25 진지왕 | | 김만명 | |||||||||||||||||||||
| 장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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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부인 김행의 | 聖26 진평왕 | 진정왕 | 진안왕 | 문흥왕 | 김마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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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27 선덕왕 | 김천명 | 비담 | 聖28 진덕왕 | 김알천 | 眞29 태종 무열왕 | 현성왕 | 흥무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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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0 문무왕 | 김인문 | 무열왕의 딸 | 신영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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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1 신문왕 | | 흥평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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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2 효소왕 | 眞33 성덕왕 | | 명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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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 | 김사소 | 효상태자 | 眞34 효성왕 | 眞35 경덕왕 | 김주원 | 眞38 열조 원성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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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7 선덕왕 | 眞36 혜공왕 | 김헌창 | 혜충왕 | 헌평태자 | 혜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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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39 소성왕 | 眞41 헌덕왕 | 眞42 흥덕왕 | 선강왕 | 익성왕 | 성덕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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眞40 애장왕 | 헌덕왕태자 | ? | 眞44 민애왕 | 眞43 희강왕 | 眞45 신무왕 | 眞47 헌안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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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공왕 | 眞46 문성왕 | 궁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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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무왕 | ─ | ? | 眞48 경문왕 | 혜성왕 | 문성왕태자 | 문성왕의 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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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성왕 | 흥렴왕 | 박정화 | 眞49 헌강왕 | 眞50 정강왕 | 眞51 진성왕 | 의흥왕 | ||||||||||||||||||||
| 양부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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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53 신덕왕 | 김의성 | 김계아 | 眞52 효공왕 | 김억렴 | 신흥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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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54 경명왕 | 朴55 경애왕 | 眞56 경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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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창 | 박언침 | 마의태자 | ||||||||||||||||||||||||
{{{#!wiki style="margin:-5px -10px" | [왕조 보기] | |||||||||||||||||||||||||
[朴] 밀양 박씨 왕조 |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 |||||||||||||||||||||||||
[昔] 경주 석씨 왕조 |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 |||||||||||||||||||||||||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 추존 국왕 및 왕족 | |||||||||||||||||||||||||
[범례] | ||||||||||||||||||||||||||
세로선(│): 장인·사위 관계 / 가로선(─): 형제자매 관계 / 적색 두 줄 선(=): 혼인 관계 | }}} | }}}}}}}}}}}} |
[1] 비슷한 사례로 중국 측 사서에 몇 번이고, 현도군에 귀속을 청하는 고구려가 있다. 이것 또한 현대적인 관점의 항복이 아닌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 강화를 맺은 것으로 본다.[2] 조분 이사금(제11대)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증손자인지 기록마다 전부 다른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3] 내물 마립간의 재위기간이 45년 10개월로 흘해 이사금과 고의적으로 같게 조정되어 있고, 353년은 330~340년대생인 내물 마립간이 아주 젊었던 시절인 데다 370~3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황이 있다. 내물 마립간이 미추 이사금의 딸 보반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가진 기간이 380년대~393년임을 고려하면 보반부인은 내물의 딸뻘 정도 되는 나이이며 370~380년대 초에 내물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4] 8년 말구가 이벌찬이 되었는데 유례가 말구에게 의지했다거나, 14년 이서고국과 전쟁하다가 패배할 뻔하자 미추가 '특별한 군사'를 보내 유례를 구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5] 당시 충북 일대는 친목지국 성향의 마한 소국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사군, 동예, 옥저, 마한, 진한의 영향력이 모두 투사될 정도로 복잡한 환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