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08 00:15:53

튀르키예-이란-아랍권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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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이란 아랍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서기 6세기 ~ 정통 칼리파 시대2.2. 중세2.3. 근세2.4. 19세기2.5. 20세기2.6. 21세기
3. 관련 기사4. 관련 문서

1. 개요

튀르키예, 이란, 아랍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튀르키예와 이란, 아랍권은 이슬람 협력기구에 속해 있고 아랍권 국가들은 아랍 연맹과 이슬람 협력기구에 속해 있지만, 튀르키예와 이란, 아랍권은 종교, 민족, 종파 문제로 인해 갈등이 존재한다.

2. 역사적 관계

2.1. 서기 6세기 ~ 정통 칼리파 시대

이슬람이 발흥하기 이전 아라비아 반도는 사산 왕조의 영향력이 강하던 지역이었다. 사산 왕조는 위성 국가 라흠 왕국을 이용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베두인 유목민들을 압박하였으며, 동시에 예멘 일대의 에티오피아 세력을 격파하고 예멘인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 주민들과 페르시아와의 상호 관계를 비교하자면 칭기스칸 시대 직전의 몽골고원의 유목민들과 금나라의 관계와도 유사하였다.
왜 하필 7세기에 무함마드라는 지도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일까? 왜 하필 아랍 부족의 통일과 군사적 성공이 7세기에 일어나고 가능했던 것일까? 패트리샤 크론(Patricia Crone)은 바로 6세기 말과 7세기 초 전례 없는 수준에 도달했던 외세의 영향과 침투, 개입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이르러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력은 동부 아라비아 반도와 예멘 그리고 시리아 사막에서 히자즈까지 이르렀으며, 비잔틴 제국 또한 시리아 사막을 통해 서부 아라비아에 손을 뻗치는 동시에 동맹인 에티오피아를 통해서는 예멘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론은 "근대에도 아라비아 반도가 이처럼 외세의 영향력에 잠식된 적은 없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이슬람은 침투해오는 외세에 맞서 그들 고유의 가치와 정체성,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아랍인들의 저항이었다.
출처

7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슬람교가 발흥한 이후, 정통 칼리파 시대 무슬림들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슬림들은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 세력들과 경계를 마주하게 되었다.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하기 이전 아라비아 반도의 무슬림들은 투르크인들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대신 예언자 무함마드가 투르크인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는 하디스가 남아있다.
حَدَّثَنَا سَعِيدُ بْنُ مُحَمَّدٍ، حَدَّثَنَا يَعْقُوبُ، حَدَّثَنَا أَبِي، عَنْ صَالِحٍ، عَنِ الأَعْرَجِ، قَالَ قَالَ أَبُو هُرَيْرَةَ ـ رضى الله عنه ـ قَالَ رَسُولُ اللَّهِ صلى الله عليه وسلم ‏ "‏ لاَ تَقُومُ السَّاعَةُ حَتَّى تُقَاتِلُوا التُّرْكَ صِغَارَ الأَعْيُنِ، حُمْرَ الْوُجُوهِ، ذُلْفَ الأُنُوفِ، كَأَنَّ وُجُوهَهُمُ الْمَجَانُّ الْمُطَرَّقَةُ، وَلاَ تَقُومُ السَّاعَةُ حَتَّى تُقَاتِلُوا قَوْمًا نِعَالُهُمُ الشَّعَرُ ‏"‏‏.‏
하나님의 사도(ﷺ)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심판의 날은 그대들이 투르크인들과 싸우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 투르크인들은 눈이 작으며 피부색이 붉고 코가 낮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안면은 가죽이 덮인 방패와도 유사합니다. 심판의 날은 그대들이 털신발을 신은 사람들과[1] 싸우기 전에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힛 알 부카리에서 발췌#

후대의 하디스 학자들은 해당 하디스를 13세기 몽골 제국의 이슬람권 침략 및 칼리프 시해로 해석하고 있지만, 마흐디 운동 등등 반튀르크 성향 아랍인들은 종종 해당 하디스를 확대해석해서 무슬림 투르크인들까지 모조리 적대해야 한다는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아랍 무슬림들은 사산조 페르시아를 정복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 샤리아에는 페르시아의 행정 및 법률이 흡수되었다.
히즈라 15년(서기 636년) 당시 칼리파인 우마르는 정복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페르시아 군주들의 재산들이 무슬림들의 창고에 쌓이자, 이를 어떻게 분배해야 공정한 분배가 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 ‘마르주반’이라는 이름의 한 페르시아인 관료가 그에게 간언했다.
신앙인들의 지도자이시여. 페르시아 황제들에게는 "디완"이라는 회계 체계가 있는데, 여기에는 세입과 세출 내역이 빈틈없이 기록되고 봉급에 대한 내역과 명단이 계급별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 알 파크리 Al Fakhri

2.2. 중세

우마이야 제국서아시아, 북아프리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했다. 그러나 우마이야 칼리프조의 페르시아인 차별은 호라산 지역에서 대대적인 봉기의 원인이 되었고, 이후에는 아바스 왕조가 북아프리카, 서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정복했다.

이슬람 제국의 정복 이후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종교-법률-행정 용어로는 아랍어가 기타 학술 용어로는 중세 페르시아어가 사용되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광활한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이슬람화 이전에는 박트리아어, 토하라어, 호라즘어, 소그드어 등등의 다양한 이란어군 언어가 사용되었으나 이슬람화를 계기로 중세 신페르시아어가 공용어가 되면서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페르시아어권의 저변이 오히려 아랍의 정복 이후 과거보다 더 크게 확대되었다. 아바스 칼리프조의 동방 영토에 페르시아계 군벌 왕조인 사만 왕조가 들어서면서 중세 페르시아어는 투르크인들에게도 폭넓게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계기로 카라한 칸국 등 투르크인들이 본격적으로 이슬람화하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여러 투르크계 민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터키인들은 순니 이슬람 중에서도 하나피파 마드하브에 속하는데 원래 하나피파는 (당시 새로 페르시아어권에 편입된) 카불 출신이었던 아부 하니파가 정립한 학파이다. 하나피파는 지역 관습법을 중시하는 학파로 특히 중세 페르시아인들에게 호응이 좋았다.[2] 같은 맥락에서 튀르크인들이 중앙아시아에서 중동으로 유입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도 하나피파를 받아들였다. 후대 페르시아인들이 시아파로 개종하는 와중에도 투르크계 무슬림들 중앙아시아의 타지크인들은 하나피파 법학파를 따르는 사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우마이야 제국 시대에는 무슬림 군대의 주력이 아랍인이었다면 압바스 제국 시대에는 칼리파 알 무타심 치세 들어서 이슬람 제국 군대의 주력은 투르크인 노예병으로 변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압바스 칼리프조 문서의 해당 항목 참조 이를 계기로 점점 병권을 상실한 아랍인들은 점점 이슬람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투르크인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칼리프조 시기 아랍인들이 병권과 정치 권력을 모두 장악했을 시기에는 무슬림 정권이 관료들에게 봉급을 주는 관료제로 운영되었다면, 중동의 투르크계 군벌 왕조들은 군인들에게 돈으로 봉급을 주는 대신에 토지의 수조권을 주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무슬림 사회의 화폐 경제와 기업적 농업 경영이 쇠퇴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중세 당시에는 아직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순니파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반아랍-반이슬람 성향의 호람딘 세력이 무슬림들과 대치하고 있었고 이 외에도 페르시아계 시아파 세력 군벌 왕조인 부와이흐 왕조가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를 보호 명목으로 압박하였다. 부와이흐 왕조는 동쪽의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의 공격을 받았고, 이후 투르크계 셀주크 제국에게 최후의 일격을 받아 멸망하였다. 부와이흐 왕조와 셀주크 제국 사이의 대치는 후대 시아파 사파비 제국과 순니파 오스만 제국 사이 이라크를 두고 벌어진 전쟁의 복선이 되는 셈이었다.

중세 아랍-페르시아-투르크 관계를 상징하는 인물로는 셀주크 튀르크의 명재상이자 페르시아인이던 니잠 알 물크를 들 수 있다. 이슬람화 이전 돌궐 제국의 괵튀르크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소그드인들과 공존하던 상황이었는데[3] 이러한 구조는 중세 셀주크 제국의 투르크인과 페르시아인들의 공존 관계로 그대로 이어졌다. 니잠 알 물크는 한편으로는 무역로를 정비하고 내치를 다져서 세입을 증대시켰으며, 조폐국들을 정비하여 물가를 안정시켰다. 니잠 알 물크가 내치에 전념하는 동안 셀주크 제국의 군주 알프 아르슬란은 대외 정복전쟁 등에 전념하면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로마노스 1세의 동로마 제국 군대를 섬멸하였고 셀주크 제국은 중동의 패자로 거듭났다.

다른 한편으로 니잠 알 물크는 그동안 페르시아인들과 투르크인들에게 인기가 있던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견제하고 대신 중동 아랍인들에게 호응도가 높았던 샤피이파의 아슈아리 신학파를 후원하였다. 당시 니잠 알 물크는 시아파를 집중 견제하는 정책을 펴던 상황으로 시아파에 대해서 온건한 입장이었던 하나피파 대신에 좀 더 보수적인 순니 법학파인 샤피이파가 더 적합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니잠 알 물크의 지원을 받았던 보수파 신학자 알 가잘리는 종교적 전통에 충실한 동시에 정치적 현실을 중시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았는데, 당시 칼리프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투르크계 군인들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상세한 지침과 율법해석을 남겼다. 후원자였던 니잠 알 물크가 사망한 이후 한 때 후원이 끊기고 슬럼프에 빠졌던 알 가잘리는 다시 관변 신학자로 복귀하였는데, 수피즘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중동으로 이주해오는 당시 상황에서 필요한 율법해석 즉 이슬람 정통파 관점에서 수피즘을 포용하는 종교 해석을 내렸다. 알 가잘리의 수피즘 포용은 이후 수피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중동 이슬람권 각지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3. 근세

튀르크족들이 중동과 아나톨리아에 정착 및 정복하면서 아나톨리아에는 룸 술탄국을 포함한 여러 튀르크계 왕조가 세워졌다. 십자군 전쟁때에는 십자군이 룸 술탄국 세력을 격파하였으나 이후 아이유브 왕조를 계승한 맘루크 왕조에게 격퇴되었다. 레반트 지역에서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몽골 제국이 중동을 침략하여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파를 시해하였고, 이를 계기로 이슬람권은 카오스에 빠졌다. 한동안 맘루크 제국의 칼리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다가 이후 룸 술탄국의 후신 오스만 제국이 16세기 초반 맘루크 왕조를 격파한 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칼리파를 겸하게 되었다.[4]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는 오우즈 투르크 계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흥기하여 이란을 정복하고 시아파 근본주의 국가인 사파비 제국을 건국하였다. 사파비야 수피 광신도들이 주축이 된 키질바시들은 순니파 이란인들을 강제로 시아파 12이맘파로 개종시키는 정책을 취하는데, 순니파들이 이에 저항하여 봉기하였다. 사파비 제국은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체르케시아 일대에서 기독교인들을 납치하여 강제로 시아파 무슬림으로 개종시킨 이후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순니파 봉기군들을 진압하였고 동시에 광신적인 사파비야 교단 대신에 시아파 중에서 보다 온건한 성향이었던 12이맘파(자파피파)를 국교화하였다. 아랍인 시아파들이 사파비 제국으로 이주하고 이란의 순니파들이 동서로 이주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시아파 이란이 주변 순니파 국가들과 대치하는 구도가 완성되었다.

오스만 제국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를 정복했다. 오스만 제국은 이란을 중심으로 한 시아파 사파비 제국으로부터 순니 이슬람 세계를 보호한다는 기치를 내세웠으며 이라크에서 사파비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사파비 제국 동쪽 영토의 투르크계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을 지원하였다. 같은 맥락에서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아 반도의 히자즈예멘 정복하면서 메카, 메디나, 그리고 예루살렘을 아우르는 성지의 수호자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그러나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서 그리스인이나 유대인만도 못한 2등신민으로 차별받았고, 이는 근대 아랍 민족주의의 반투르크 성향으로 이어졌다.

아랍의 억압자 또는 이슬람의 보호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적 기억의 대립

2.4.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자 아라비아 반도에선 와하브파가 발흥하며 독립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오스만 제국은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다. 와하브파 운동은 반터키 아랍 민족주의 운동 이외에도 아니 오히려 반시아-반이란 성향이 더 강했고, 영내 여러 시아파 성묘들을 파괴하였다. 후대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대치 상태의 복선인 셈이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 일대에는 영국,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각각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령 튀니지, 프랑스령 모로코 등이 생겨났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수단에서는 강경 반투르크 성향의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인 마흐디 운동이 일어났다. 마흐디즘은 이란의 시아파들로부터 마흐디(구세주) 강림 이론을 흡수하였으며, 자신들을 데르비시(수피승)이라고 불렀다는 점에서 이란 시아파 문화와 연결점이 없지 않았다. 마흐디국은 오스만 제국을 극단적인 반투르크 정서를 가지고 아예 불신자 정권, 적그리스도의 무리로 간주하며 오스만 제국이 메카메디나를 장악한 이상 성지순례는 의미가 없으며 투르크족을 모조리 타도해야 심판의 날이 시작된다는 이론을 내세웠다.[5]

다른 한편으로는 이란은 당시 카자르 왕조 치하에서 외세의 갖은 침탈을 겪기 시작했다. 카자르 왕조의 지배층들은 중세 유목제국(...) 지배층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서구 열강에 대해 무력하게 대처하였다. 19세기 초반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가 러시아 제국에게 점령된 것을 계기로 오늘날의 이란 영토 국경선이 대강 완성되었다.

2.5.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고 오스만 술탄이 겸임하던 칼리파 직위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시리아레바논 일대는 시리아-레바논이란 프랑스령이 되었다. 아라비아 반도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고 사우드 왕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시초가 되었다. 리비아는 이탈리아령 리비아가 되면서 이집트는 이집트 왕국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지역들이 독립국이 되었다.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고 중동전쟁을 치렀다.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관할하고 있었지만[6], 미국소련이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에 압력을 주면서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의 관할이 되었다.[7]

이란은 1920년대에 카자르 왕조가 몰락하고 팔레비 왕조가 들어섰다. 팔레비 왕조는 근대화 정책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독재정치를 실시했기 때문에 팔레비 왕조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79년에 이란이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공화정이 들어서자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란을 견제했다. 특히, 사우디는 1970년대에 메카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가 일어나자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오일 쇼크 이후 산유국들이 경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이슬람권에는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이 후원하는 와하브파 그리고 이슬람주의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계기로 이슬람권은 급격하게 우경화되었다. 터키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투르크어권의 하나피파-세속주의자들은 입지가 대폭 약화되었음은 물론이다.

2.6. 21세기

터키는 에르도안정의개발당 정권은 집권 이후 세속주의 정책을 서서히 폐지하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회귀하면서 신오스만주의를 내세우는 상황이었다. 에르도안의 입지가 커진 이유는 2010년대초에 아랍의 봄의 파국적인 결말에 있다. 아랍권 국가 중 시리아나 리비아 같은 아랍사회주의 국가 그리고 이집트 같은 군사독재 국가들에서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정권을 잡은 무슬림 형제단무함마드 무르시 정권 시절에 이슬람 근본주의 정책에다가 낙하산 인사 정책으로 몰락하였고, 이집트 국민들은 차악으로 군부 엘시시 정권을 선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터키에서도 2010년대 중반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실패했다. 터키인 청년층들은 에르도안의 근본주의 정책에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다. 그럼에도 에르도안이 2021년 말 인플레이션 전까지는 나름 입지가 탄탄했던 것은 이유가 있는데, 터키는 경제 기반이 선진국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으로 아랍권과 유럽연합을 중재해주는 방향으로 외교적 실리를 챙기는 방향으로 국력을 신장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에르도안이 내치에는 노답으로 보여도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 보듯 외교력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고 이것이 에르도안 정권 지지로 이어진 것이었다.

시리아의 아랍의 봄은 이집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참혹한 방향으로 일어났다.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이 봉기군들을 무참히 진압하면서 시리아 순니파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하고, 러시아와 이란이 시리아 아사드 정권을 대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시리아 내전이 끝도 없이 장기화되었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라는 타이틀과는 별개로 시리아에서 세속주의-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봉기 세력은 소수에 불과하였고,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는 알 누스라 전선 같은 근본주의 세력을 후원하였다.이 과정에서 다에쉬가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 각지에서 반달리즘을 행했다. 이는 유럽 난민 사태로 이어졌다.

아랍의 봄 이전까지 터키는 아랍권에서 따돌림을 당하던 입장이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에 의한 유럽 난민 사태 과정에서 내전을 악화시킨 장본인에 해당하는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은 난민 문제 책임을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회피한 반면[8] 에르도안 정권 치하의 터키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을 적극 수용하면서 아랍권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에르도안 정권의 터키는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출신 난민들을 무기 삼아서 유럽연합과 딜을 하였고, 유럽 연합은 터키가 시리아인,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인 난민들의 유럽 입국을 통제해주는 대가로 터키 측에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는 상황이 되었다. 부유한 산유국도 아닌 터키가 수용한 시리아인과 아프가니스탄인 난민은 이미 유럽에 유입된 난민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백만 단위였기 때문에 원조는 당연했다.[9]

사우디아라비아는 시리아 내전 난민 구호나 ISIS 토벌전 대신에 예멘 내전에 개입하여 유럽 난민 사태를 더 심화시켰다. 어차피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유럽 난민 사태가 심각해져도 사우디가 유럽이 아니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는 상황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입장에서는 예멘의 시아파 세력이 이란과 연계되는 것이 더 신경쓰였다. 살레 전 대통령은 내전 도중에 후티 반군에 의해 사망했고 북예멘남예멘으로 나뉘어질 위기에 놓여 있다. 여담으로 무함마드 빈 살만신장 재교육 캠프로 대표되는 위구르 인권 탄압에 침묵하는 것은 물론... 2020년 3월 30일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기자가 터키에 체류하는 시리아 난민이 생물학 무기라는 논지의 기사를 올릴 정도로 터키 저격에 열을 올리고 있다. 아랍어 주의(한국어 번역기 사용 가능) 다른 나라 기자였으면 기레기 한 마리의 일탈(...)이라 생각할 수 있는 문제지만 난민 문제에 이중 잣대로 악명 높은 사우디 출신 기자가 이런 내용을 기고했다면 엄청난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여태 시리아 난민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시리아 난민 수를 제한한 유럽 국가들은 어용 선교단체들을 동원하여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맹비난하기를 서슴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란은 다에쉬를 견제하면서 미국과도 잠시 협력했다. 2010년대 중반 이후에 다에쉬가 몰락하고 미국에 트럼프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다시금 냉각되었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이스라엘을 꾸준히 적대해왔던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 견제를 위해 2010년대 후반부터 이스라엘과 친교 관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이스라엘·사우디·UAE·바레인, 대이란 '방위동맹' 논의 그리고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모로코, 차드, 수단 공화국 등이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3. 관련 기사

4. 관련 문서



[1] 당시 아랍인 등 중동 사람들은 샌들을 신었다.[2] 하나피파의 시조이자 압바스 칼리프조 초창기 인물이었던 아부 하니파는 한 번은 쿠란을 페르시아어로 낭독하면서 예배를 보았다가 뒤에서 함께 예배보던 사람 중 한 명이 "(쿠란을 아랍어 그대로 낭독하지 않고) 그렇게 예배하면 예배가 무효화됩니다."라고 말하자 다시 쿠란을 아랍어로 낭독해서 예배를 보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3] 내정과 상업은 소그드인이 맡고 군사 분야는 주로 괵튀르크인들이 맡았는데, 일방적으로 괵튀르크인들이 소그드인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아니라 양자가 상호 평등한 상황에서 공존하던 상황으로 보인다. 당시 돌궐 제국 유적지에서 나온 결혼 관련 문서를 보면 괵튀르크인과 소그드인 사이의 통혼도 흔했고, 결혼은 양자 사이에 상호 평등한 관계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4] 오스만 술탄의 칼리파 겸임은 원래 명목상 겸임이었으나(오스만 술탄은 동로마 제국 황제를 계승한다는 입지가 더 강했다.) 근대 들어서 오스만 제국에서 이런저런 개혁이 실패하자 최후의 수단으로 오스만 술탄들은 칼리파로서의 권위를 더 강조하게 되었다.[5] 이는 와하브파 중에서도 극단주의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알 카에다의 타크피르주의 즉 개인이 사회적 합의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타크피르와 지하드를 행할 수 있다는 주장에 영향을 주었다.[6] 원래 이집트와 프랑스가 돈을 들여서 건설했는데 나중에 영국이 주식을 전부 사들이면서 사실상 영국 소유나 다름없게 되었다.[7] 이집트 정계를 반영파 청년 장교들이 장악하면서 그 수장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고 이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손잡고 이집트를 공격해 이집트가 크게 손해를 봤지만 상술했다시피 미국과 소련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이집트의 나세르도 세계에 호소하면서 전쟁은 영프이가 이겼지만 정치적으로는 이집트가 승리한 구도가 되었다.[8] 특히 카타르의 경우는 시리아인 난민을 사실상 단 한 명도 받지 않았다.[9] 유럽연합 내에서도 에르도안이 독재자이긴 하지만 유럽 난민 사태를 막아주는 사람이니까 이상한 짓 하고 다녀도 좀 봐주자 하는 기류가 형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