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26 12:00:34

첨해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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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이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인물만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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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12대 국왕
첨해 이사금 | 沾解 尼師今
출생
(음력)
180년대 이후[1]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262년 2월 5일[A] (향년 70~80대 추정)
사로국 서라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12대 국왕
247년 5월 ~ 262년 2월 5일[A] (14년 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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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석씨
첨해(沾解) / 치해(治解)
부모 부왕 세신 갈문왕[4]
모후 옥모부인 김씨
형제 석조분
왕호 첨해 이사금(沾解 尼師今)
별호 치해 이질금(治解 尼叱今) }}}}}}}}}

1. 개요2. 생애3. 기년 인상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1. 개요

신라의 제12대 군주로 칭호는 이사금.

성씨는 석씨로 아버지는 벌휴 이사금(제9대)의 장남 석골정, 어머니는 구도 갈문왕의 딸인 김씨 옥모부인이다. 전왕 조분 이사금(제11대)의 친동생.

2. 생애

첨해 이사금(沾解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 조분왕(助賁王)의 친동생이다.
沾解尼師今立 助賁王同母弟也
원년(서기 247) 가을 7월, 시조묘에 참배하고, 아버지 골정(骨正)을 세신갈문왕(世神葛文王)으로 봉하였다.
元年 秋七月 謁始祖廟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즉위하고 두 달 만인 247년 7월에 아버지 석골정을 세신 갈문왕에 봉했다. 그런데 신라시호 개념은 진흥왕(제24대) 때나 들어오는지라 이전까지 모든 갈문왕명은 물론, 왕명은 모두 실명+이사금/갈문왕의 형태였다는 점에서 별도의 시호를 부여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만약 '세신'이 음차가 아닌 훈차라면 세상의 신이라는 뜻이 되는데 사실일 경우 자신을 신격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유례 이사금(제14대)을 [ruby(世, ruby=누)]리지 이사금이라고도 하고, 혁거세 거서간의 이름이 [ruby(赫, ruby=붉)]어[ruby(世, ruby=뉘)]로 해석되는 걸 보면 '세'(世)는 음차가 아닌 훈차로 쓰인 것이 맞는 듯 하다.
사관이 논평한다.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즉위하니 담당 관리가 아뢰었다. “다른 사람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낮추어야 하고 제사 지낼 수 없습니다. 이는 조종(祖宗)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런 까닭에 황제의 생부를 친(親)이라 하고 시호를 '도'(悼)라 하며, 생모를 '도후'(悼后)라 하여 제후나 왕의 지위에 맞게 하여야 합니다.”
이는 경전의 뜻에 맞는 것으로 만세(萬世)의 법이 되었다. 그러므로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영종(英宗)은 이를 본받아 그대로 행하였다. 신라에서는 임금의 친척으로 왕통을 이은 임금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받들어 봉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뿐만 아니라 자기의 장인까지 왕으로 봉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예법에 맞지 않는 일이니, 절대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된다.
論曰 漢宣帝卽位 有司奏 爲人後者爲之子也 故降其父母不得祭 尊祖之義也 是以帝所生父稱親 諡曰悼 母曰悼后 比諸侯王 此合經義 爲萬世法 故後漢光武帝宋英宗 法而行之 新羅自王親入繼大統之君 無不封崇其父稱王 非特如此而已 封其外舅者亦有之 此 非禮 固不可以爲法也

같은 석골정의 아들인 조분 이사금은 아버지 골정을 갈문왕에 봉하지 않았다. 이는 조분이 골정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사촌 내해 이사금(제10대)의 사위로서 왕위를 상속했음을 의미한다. 형 조분은 아버지를 갈문왕에 봉할 필요가 없었고, 동생 첨해는 그럴 필요가 있었다는 말이다. 조분의 사후에 왕위를 이을 수 있었던 사람은 조분의 동생 석첨해, 아들 석유례, 맏사위 석우로, 둘째 사위 김미추였다. 석유례, 석우로, 김미추는 석조분보다 한 항렬이 낮지만 석첨해는 석조분과 항렬이 같았고, 그렇다면 석첨해가 석유례, 석우로, 김미추보다 나이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에서는 유리 이사금(제3대)의 유언에 따라 아들들과 사위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군주가 되었기 때문에 석첨해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첨해는 군주의 아들이나 군주의 사위가 아니었기에 아버지를 갈문왕으로 추증한 것이고, 형 석조분은 이미 내해 이사금의 사위였기에 그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고려 왕조의 관점에서 논평한 것으로 벌휴 이사금은 즉위한 후 아버지 석구추를 별도로 추봉하지 않았고, 석이매의 아들인 내해 이사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첨해 이사금이 부친인 석골정을 추봉한 것은 아버지여서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고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초기 신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시호 개념이 적용된 명칭이라 단순한 추봉 목적이라고 보기에는 여러모로 전형적이지 않은 측면이 있다.

첨해 이사금 즉위 초기에 있었던 명장 석우로의 죽음에는 매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존재하는데 당시 신라 최고의 왕족인 석우로가 의 사신에게
"너희 왜의 임금을 붙잡아다 소금굽는 노비로 삼고 왕비는 짓는 노비로 삼겠다."
는 말을 술김에 한 탓에 분노한 왜군이 쳐들어와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을 갈 정도로 신라군이 패배했고 이에 석우로가 실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왜군 진영에 별다른 호위도 없이 단신으로 가서 사과를 하는데 왜에서는 석우로를 붙잡아다 화형시켰다고 한다. 왜군들이 석우로를 붙잡아다 장작에 올려놓고 태워 죽여서 아주 재로 만들어버렸는데 신라의 병권을 책임졌던 장수에다 왕위에 매우 가까웠던 최고 석씨 왕족이 왜군 진영에 단신으로 갔다가 불에 타 죽고 말았는데도 문제는 첨해 이사금이 왜에 대해 따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첨해 이사금은 군공 등 업적이 뛰어나고 힘도 자신을 위협할 정도로 크며 왕위 계승권 측면에서도 자기보다 정통성이 높은 석우로가 왜인이라는 제3자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다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다른 문제로 《삼국사기》 <석우로 열전>에는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손님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에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于道朱君)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우유촌(于柚村)(현재의 울진으로 추정)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석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데서...(중략) 석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했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으로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라고 되어 있으며 《일본서기》에도 유사한 기록이 있는데
신라 왕을 포로로 삼고, 해변으로 와서 무릎을 뽑고 돌 위에 포복시켰다. 조금 있다가 베어서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신라에 있는 대사로 하고 돌아갔다. ... 죽은 왕의 처와 신라인이 공모하여 대사를 죽이고 왕의 시신을 꺼내 다른 곳에 묻었다.

라고 되어 있다. 문제는 왜군이 신라를 쳐서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나가 있어야 할 상황까지 몰렸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간 것을 출거(出居)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때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이 패전했거나 상황이 열세에 몰리자 첨해 이사금이 우유촌으로 피난을 갔고, 석우로가 개전의 책임을 지고 살해당했을 수 있다. 《일본서기》기록에서는 '신라 왕'이라 적혀 있으나 석우로의 지위 이후[5] 기록의 유사성으로 보아 실제로는 석우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첨해 이사금 때의 일은 아니고, 다음 왕 미추 이사금(제13대) 시대의 일화지만 석우로가 왜인들의 손에 살해당한 후 석우로의 아내와 아들이 왜국 대사가 신라에 와 있을 때 에 취하게 만들고 불태워 목숨을 빼앗음으로써 원수를 갚았지만 분노한 왜군이 다시 대대적으로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가 소득없이 돌아가기도 했다.

첨해 이사금의 재위 기간은 14년 정도인데 신라의 초기 왕치고는 짧은 편이다. 그의 재위 기간에 기근이 심해서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고, 도적이 들끓었다. 가 내릴 때는 또 큰 비가 내려 이 40군데나 무너졌다는 기사도 있다.

외국과의 관계에서, 선왕 조분 이사금 때 최초로 맞붙었던 고구려와는 일단 사신을 보내 화친했다. 그러나 백제와는 자주 충돌했는데 즉위 9년(255년)에 백제가 변경에 침입했지만 격퇴했으며 즉위 15년(261년)에는 달벌(현재의 대구광역시)에 성을 쌓았다고 되어 있다.

다만 백제 충돌 및 달벌성 구축은 고고학적 분석 결과로 인해 기년 자체는 정면 부정된 상황이다. 일단 서기 255년 백제는 겨우 한강 유역이나 추스르는 단계로 경기도도 아직 제패하지 못하고 허덕이던 단계였기에, 백제가 충북 일대 진한 혹은 신라 변경에 침입하려면 목지국을 수장국 자리에서 끌어내린 기원280년대 이후에서나 가능하다. 한편 달벌성 구축은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이 유력한데, 일단 《삼국사기》 신라 관련 기록은 후대 임금들 기록을 가져다가 앞선 임금들에게 갖다붙인 게 많은 걸로 의심되는 초기 백제 관련 기록과는 달리, 기년만 문제 있을 뿐 해당 임금들에게 배치된 기사들의 신빙성 자체는 높게 평가된다. 때문에 첨해 이사금의 실제 재위기간은 고고학적으로 진한 일대에 대한 장악력이 이전 시기보다 꽤 높아지는 3세기 후반 ~ 4세기 초반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경주 월성의 남쪽에 따로 남당(南堂)을 세우고, 정사는 여기에서 보았다고 한다. 한편 부도(夫道)라는 사람이 집이 가난했지만 아첨하지 않고 글쓰기와 계산을 잘 해 그에게 왕실 보물 창고인 물장고(物藏庫) 관리를 맡겼다고 한다.
冬十二月二十八日 王暴疾薨
겨울 12월 28일, 임금이 갑자기 병이 나서 돌아가셨다. - 《삼국사기
 
보통 《삼국사기》에서는 왕의 사망 기사에서 '왕이 죽었다[王薨]'라고 끝내는 경우가 다반사지만[6] 첨해 이사금은 굳이
'왕이 갑자기 병에 걸려 죽었다[王暴疾薨]'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말로 돌연사일 수도 있겠지만 다음 왕이 본인의 사위가 아니라 형 조분 이사금의 사위인 김미추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석우로가 왜군에게 잡혀 화형당해 죽도록 방치하고, 왜국에 별달리 항의나 보복하려고 하지도 않은 첨해 이사금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분개한 석씨 왕족과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던 김미추가 힘을 합세해 반정을 일으켜 첨해 이사금을 제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아니면 왜와 백제의 공격이 거세지는 와중 첨해 이사금의 책임론이 부각되어 이를 근거로 원래 조분 이사금 사후 왕위 계승 서열 2위였던 김미추 등의 김씨 계열이 반정을 주도했을 여지도 있다.

3. 기년 인상

신라의 고고학적인 건국 기년은 기원후 2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며, 내물 마립간 재위 중기 이전은 인위적인 기년 인상이 매우 유력하다. 고로 첨해 이사금 또한 삼국사기상 기년보다는 훨씬 후대 인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흘해 이사금은 320년생인데, 학계에서는 정황상 흘해 이사금이 4세기 초반에 태어났다고 보고 있다.

첨해-미추-유례-기림-흘해-내물로 즉위했다는 기사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6세기까지 신라의 왕은 6부 대표를 포함한 여러 간=왕들의 대표에 지나지 않았으며, 6세기 중반 국내 문제 해결을 위해 7명의 왕이 모여 논의했다는 금석문으로 보아 6부의 대표뿐만 아니라 일정 이상의 세력을 가진 간 등도 왕이라 불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분과 첨해가 친형제라 하더라도 조분과 첨해는 동시대에 왕이라 불리며 같이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에는 320년 우로와 파사 이사금이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 신라왕 파사매금으로 나오는데,[7] 학계에서는 파사 이사금의 활동이 고고학적으로 4세기 초중반에 일어난 일이라 보고 있기에 파사-지마, 일성-아달라 또한 4세기 초반~중반에 활동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리고 미추의 친동생 말구의 아들이 내물 마립간으로 330~340년대생이라 미추는 310~320년대생일 가능성이 높다. 즉 미추는 흘해와 가까운 나이이며, 기림의 아버지 걸숙이 명원부인의 형제이므로 기림 또한 흘해와 비슷한 나이일 가능성이 높다. 고고학적으로 김씨 족단이 사로국에 출몰한 시기는 4세기 초반 이전으로 올라가지 않으며, 미추의 주 활동은 4세기 중반임이 유력시되기 때문에 미추는 4세기 초반에 태어나 4세기 중반에 활동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4세기 초반에서 후반까지 파사-지마, 일성-아달라, 유례, 기림, 우로-흘해, 미추-내물의 3성 왕조는 동시대에 병존했으며, 이들이 모두 왕이라 불린 점에서 4세기 신라에서 왕이라 불릴 수 있는 인물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박제상이 삽량주(양산)를 근거지로 둔 간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사로국 내가 아닌 지방이 근거지라도 간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 초기 기사에는 '이벌찬 누구누구가 활동했다'가 매우 강조되는데 신라 초기 왕들이 직접 친정을 나서는 모습도 많기 때문에 내물 이전 16왕 외에도 이벌찬 관등이었던 사람들도 다 왕이었던 걸로 보이며, 신라 초기 이찬, 잡찬, 파진찬, 아찬, 일길찬, 사찬, 급찬도 찬(飡)이 간(干)으로도 불렸다는 기사를 고려하면 이들도 간이 맞았던 걸로 보인다.

벌휴가 사망했을 때 장남 골정과 차남 이매가 먼저 죽었고 골정의 아들이 어려서[幼少] 이매의 아들 내해 이사금이 대신 즉위했다고 굳이 서열을 꼬아놓은 것으로 보아 첨해~흘해까지는 나이순으로 배치한 것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 김씨 족단이 금릉동에서 서라벌로 이주한 시기가 4세기 초반인데, 미추 이사금은 어머니가 이칠 갈문왕의 딸 휴례부인이라 명시된 것을 보아 서라벌 이주 이후에 태어난 것이 확실하고 동생 말구(末仇)의 아들 내물 마립간이 330~340년대생임을 고려하면 미추의 생년은 310~320년대생이라 추정 가능하다. 유례 이사금은 8년 말구를 이벌찬으로 삼아 총애하였고 14년 이서고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할 뻔하자 미추가 '특별한 군사'를 보내 유례를 구해주는 등 미추-말구 형제와 친했던 것으로 보이고, 유례는 조분의 아들 또는 내음 갈문왕[8] 기림은 조분의 친손자(또는 친증손자)고 흘해는 우로의 아들이자 조분의 외손자이므로 흘해를 320년생이라 가정할 경우 이들간의 나이 차이는 10살 이내일 가능성이 높다.

첨해가 우로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났을 가능성이 있다. 내해는 골정의 아들이 어려서 먼저 즉위했다고 기록했는데, 내해의 처가 조분의 여동생[妹]이라 표기하기는 했지만 내해가 사망했을 때 '사위인 조분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표기되는 것과 달리 골정의 사위라서 즉위했다는 서술은 없고 조분의 처인 아이혜부인의 어머니가 조분의 여동생이라는 서술은 나오지 않는다. 상식적으로 후대에서 굳이 순번을 꼬아서 기술했고 조분이 어리다는 이유로 내해가 먼저 즉위할 정도였다면 조분은 내해보다 상당히 연하였다고 봐야 한다. 또 <내해 조>에서 우로는 14년 포상팔국의 난 1번만 등장하는 반면 <조분 조>에서는 18년 재위기간 중 2~16년까지 지속적으로 출몰하고, 첨해 3/7년에 사망하는 등 조분과 활동 시기과 완전히 겹치는 것을 확인 가능하다. 후대 눌지 마립간의 손자인 소지 마립간자비 마립간의 늦둥이로 태어난 탓에 눌지의 동생 김복호의 손자인 지증왕이 소지보다 20살 넘게 연상이었음을 고려하면 조분, 첨해가 5촌 조카인 우로와 나이가 가까운 게 가능하다. 조분의 여동생과 아이혜부인의 어머니를 별개로 두고 조분의 나이를 우로에 가깝다고 가정한다면 조분과 아이혜부인은 5촌지간이라도 나이가 가까웠을 것이고, 조분의 아들/내음의 외손자인 유례 이사금과 조분의 외손자+우로의 아들인 흘해 이사금의 나이가 비슷한 것도 명원부인을 아이혜부인의 딸로, 유례의 어머니를 내음의 딸로 가정하면 맞아떨어진다. 덤으로 기림의 아버지인 이찬 걸숙은 사서에서 이벌찬이 아니라 '이찬'이라 나오는 것을 보아 제법 빨리 죽은 듯하다.[9]

가족관계가 기록에 남지 않은 첨해를 굳이 제12대 국왕으로 서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첨해 5년 1월 한기부 사람 부도(夫道)가 집이 가난했지만 일처리가 좋다는 소문이 돌아 첨해가 그를 아찬으로 삼고 물장고(物藏庫)의 사무를 맡겼다고 한다. 사서에서 구도갈문왕과 이름이 유사해서 동일인물 가능성이 있는 건 부도 외에 딱히 없는데, 구도의 후손인 내물 마립간실성 마립간이 한기부가 아니라 탁부 소속인 것, 구도-미추 이사금조분 이사금과 인척관계였던 것, 조분의 아들/이음의 외손자인 유례 이사금이 미추&말구와 친했다는 정황을 통해 구도-미추 부자가 첨해의 형인 조분 이사금 및 그 직계와 가까운 사이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집이 가난했다'고 표현될 정도로 한기부 내에서 입지가 좋지 않았던 구도가 첨해의 스카우트가 계기가 되어 출세한 끝에 신라 김씨 왕조로 이어졌다 가정하면, 첨해는 김씨 왕조 입장에서 조상 출세의 계기를 제공해준 은인이 된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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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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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고장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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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부여의자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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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첨해 이사금 본기>

一年夏五月 첨해 이사금이 즉위하다
一年秋七月 시조묘에 배알하고 아버지 골정을 세신 갈문왕으로 봉하다
二年春一月 이찬 장훤을 서불한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다
三年夏四月 왜인이 서불한 우로를 죽이다
三年秋七月 궁의 남쪽에 남당을 짓고 양부를 이찬으로 삼다
五年春一月 남당에서 첫 정무를 보고 부도를 아찬으로 삼다
七年夏四月 용이 궁의 동쪽 연못에 나타나다
九年秋九月 일벌찬 익종이 백제와 싸우다가 죽다
九年冬十月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다
十年春三月 동해에서 큰 물고기 세 마리가 나오다
十年冬十月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秋七月 가뭄과 흉년으로 도적이 많다
十四年 큰 비가 내려 산이 무너지다
十四年秋七月 살별이 동쪽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다
十五年春二月 달벌성을 쌓고 내마 극종을 성주로 삼다
十五年春三月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十五年冬十二月二十八日 왕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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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0px"[왕조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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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 경주 석씨 왕조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장인·사위 관계 / 가로선(─): 형제자매 관계 / 적색 두 줄 선(=): 혼인 관계 }}} }}}}}}}}}}}}




[1] 다만 추측할 뿐이다. 형인 조분 이사금의 생년이 불분명하므로 이도 추측이다.[A] 음력 261년 12월 28일[A] [4] 벌휴 이사금(제9대)의 장남 석골정이다.[5] 당시 석우로의 지위는 최고위직인 '서불한'(이벌찬)에 왕족이자 선왕 조분 이사금의 사위였다. 왕과 가까운 왕족들이 갈문왕의 칭호를 받는 경우가 많았던 점을 미루어보면 기록에 안 남아있을뿐 석우로도 왕의 칭호를 받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단순히 일본 측에서 왕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6] 이후 '왕의 시호를 뭐라 정했고 어디다가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이어진다.[7] 파사는 200(320)년 10월 3일, 우로는 12월 14일 기사라 달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8] 내해의 장남이자 흘해의 큰아버지. 사서에서는 박씨(朴氏)라 나오지만 오기로 추정된다. 유례가 유리 이사금과 동명이인이라 삼국사기에도 명시되기 때문에 혼선이 온 듯하다.(신라에서 성을 사용한 것은 진흥왕 대부터다)[9] 17관등이 완성된 것은 진흥왕~진평왕 대에 가서지만 후대에서 소급할 때 '누구누구가 ~관등이 되었다'고 굳이 강조하는 것을 보아 모종의 기준은 있었을 것이다. 걸숙이 이찬(2등)이라는 건 제법 빨리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