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2. 배경
2.1. 합스부르크 가문의 헝가리 국왕 선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사이의 기나긴 역사를 알려면 중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세 시대 오스트리아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영방국가였다. 반면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합스부르크 가문과도 상관이 없는 별개의 주권국으로 라슬로 1세부터 크로아티아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었다.합스부르크 가문의 초대 독일왕 루돌프 1세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라슬로 4세의 도움을 받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보헤미아 왕국 국왕 오타카르 2세를 패사시켰으나, 라슬로 4세가 어린 나이에 후사 없이 암살당하자 자신의 맏아들 알브레히트를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옹립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마차시 1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는 마차시 1세가 오스트리아를 일방적으로 털어버리며 프리드리히 3세를 린츠까지 도망치게 만드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마차시 1세 사후 보헤미아 왕국의 국왕이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 및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 블라디슬라프가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선출되면서 상황이 역으로 뒤바뀌는데 무능한 예스맨이었던 울라슬로 2세는 보헤미아에 이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까지 말아먹기 시작한 반면 프리드리히 3세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1세는 이러한 상황을 영민하게 이용하였고, 울라슬로 2세의 자녀들이 자신의 손자손녀들과 나이대가 비슷한 점을 이용해 양쪽을 결혼시키면서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군이 오스만 제국군에게 대패하면서 헝가리를 향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랜 야망이 목전에 놓였다.
| | |
| 페르디난트 1세 | 모하치 전투 |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들이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국왕을 겸했지만 오래 전부터 독립 왕국으로써 독자적인 정치 체제가 완전히 굳어져있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군주들이 헝가리를 마음대로 통치하는 건 불가능했고, 보헤미아 왕국과 달리 빈 정부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했다. 헝가리는 아르파드 왕조 중기부터 왕권을 제한하고 귀족의회 권력이 강했기 때문에 선출 국왕이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왕권은 제한되었고, 심지어 헝가리 의회는 합스부르크 가문 국왕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오스트리아가 일으킨 전쟁에서 헝가리의 휴전을 선언할 권한까지 있었다. 반대로 합스부르크 국왕들은 아예 헝가리 의회 개회를 막거나 궁정백의 권한을 억제하면서 헝가리 귀족들을 제어해나갔다.
오스만 제국과 에르데이 공국으로 3분할 되었던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재 헝가리의 서부와 오늘날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상헝가리(Felvidék)만 점유하였고 이 지역을 왕령 헝가리라고 불렀다. 왕령 헝가리의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나 대 오스만 문제로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헝가리 귀족들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겠다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국왕으로 선출했지만, 정작 합스부르크 국왕들은 강대한 오스만 제국과의 평화를 유지하려 했고 헝가리 귀족들은 합스부르크 국왕들이 나약하다고 여겨 왕권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특히나 동부에 있는 헝가리인의 자치 공국인 에르데이 공국에 대한 오스만 종주권의 인정한 것은 헝가리 귀족들을 크게 자극했고 몇몇 귀족들은 외국인의 통치와 외국인 수비대가 헝가리에 상주하는 것조차 불평했다. 또한 이 시기 왕령 헝가리의 수많은 귀족들이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가톨릭을 신봉한 합스부르크 가문과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1682년, 오늘날 슬로바키아인 상헝가리를 기반으로 하는 반 합스부르크 귀족 퇴쾨이 임레의 봉기가 일어났고 이로 인하여 이듬해 제2차 빈 공방전이 벌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구원군에 힘입어 빈 포위는 풀렸고 이어진 대튀르크 전쟁을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승리해 카를로비츠 조약과 파사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전역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놓였다. 이에 과거 에르데이 공국에 속했던 동부 지역의 귀족들은 퇴쾨이 임레의 양자[2] 라코치 페렌츠 2세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일으켰지만 주력군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다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팔피 야노시(Pálffy János 1664~1751) 등을 중심으로 한 친 합스부르크 헝가리 귀족들이 이끌고 온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민병대에 격파당하며 한동안 독립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에 복속된 지 300년이 가깝게 지난 1804년,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설립하였고 2년 뒤에는 아예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또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로서 그 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워낙 헝가리의 독자성이 강해서 융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란츠 2세가 새로 얻은 '오스트리아 황제'라는 칭호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어떠한 법적 권위도 없었고 오직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권력만이 유효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까지 독자적으로 운영됐다. 포조니의 '헝가리 위원회'와 빈의 '헝가리 왕실궁정위원회'가 따로 존재했고 이 기관들은 오스트리아 제국 궁정과는 별개의 조직이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 내의 또 다른 하나의 나라였다. 헝가리는 1851년까지 자체적인 관세 국경을 유지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의 다른 행정구역들과 관세 시스템마저 달랐으며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주요 업무는 헝가리-크로아티아와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귀족들 상대였다. 메테르니히의 주요 보직이 '외무장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군주만 같지 아예 다른 나라였다는 말이다.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다른 나라들은 전임자가 죽으면 바로 새 왕의 임기가 시작되는 반면, 헝가리 왕국의 경우 포조니[3]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후에야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법률을 공포하거나 칙령을 내릴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면 원칙적으로 헝가리 내에서 법적 권한 행사가 불가능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300년 동안 한 가문 아래에서 공동 통치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융화되지 못하고 하나의 가문 아래 2개의 나라가 있었던 것과 똑같았다.[4]
2.2. 헝가리의 독립 운동과 탄압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1848년 헝가리 혁명#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1848년 헝가리 혁명#|]]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1848년 헝가리 혁명 |
나폴레옹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공화주의와 민족주의, 계몽주의가 널리 퍼져나갔지만 정작 오스트리아 황제들은 전혀 이를 수용할 의사가 없었다. 민족주의는 오스트리아 아래에서 불만이 많던 헝가리인에게 잘 먹혀들어갔다. 그와중에 합스부르크 군주들은 세금을 거둬들이려 할 때 빼고는 헝가리 의회조차 잘 열지 않으면서 헝가리인의 불만은 갈수록 쌓여만갔다. 1811년 이후부터는 아예 의회도 열리지 않았고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강력한 전제주의적인 정책이 헝가리인을 억압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며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고 새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즉위하자 헝가리인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다페스트와 데브레첸, 지벤뷔어겐 대공국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5]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실패했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왕국의 행정 구역을 오펜, 외덴부르크, 프레스부르크, 카샤우, 그로스바르다인의 5개 군구로 개편하고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지벤뷔어겐 대공국과 보이보디나 공국, 크로아티아 왕국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오스트리아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왕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상당한 수준이었던 헝가리의 자치권은 아예 박탈당했다. 독립 관세권은 사라졌고 심지어 헝가리 의회를 이참에 폐지하려 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참에 헝가리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다른 행정구역과 똑같이 격하하려 했다.
3. 대타협과 이중제국의 형성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타협#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대타협#|]]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헝가리 국왕 대관식을 치르는 프란츠 요제프 1세 |
일단 오스트리아는 외교적, 군사적으로 연달아 패배를 거듭했다. 크림 전쟁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지원해줘야 프랑스가 나중에 이탈리아반도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프랑스와 싸우던 러시아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몰다비아 공국과 왈라키아 공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프랑스가 뒤통수를 치고 되려 1859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이탈리아 내 오스트리아 영토를 빼앗는 것을 지원해주었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6]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통치하는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에서 반외세 민중 봉기가 일어나 파르마 공국, 교황령의 볼로냐 일대와 더불어 중앙이탈리아 연합주를 형성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합병되자 이탈리아반도 북부와 중부에서 영향력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권위는 수직낙하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프로이센 왕국과 벌어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었다. 독일 연방에서 북독일의 프로이센을 무시하다가 결국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터졌는데, 여기서 완벽하게 패전해버린 것이 엄청난 타격이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라하 조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했고[7] 동시에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 편에 가담한 신생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베네토까지 상실하며 이탈리아반도와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배제당했다.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에게 연패를 당하고 이탈리아와 독일에서의 영향력을 잃어버리자[8] 합스부르크 황실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연달아 벌어진 전쟁으로 인해 제국은 재정 위기에 직면했으며 신 절대주의 체제 아래에서 억눌려 있던 소수민족들이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제국이 공중분해될 것을 우려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국과 황실을 보전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종전의 신 절대주의 체제를 철회하고 이때까지 가장 강력한 저항 세력이자 제국 안에서 2번째로 많은 인구 비중을 차지하는 헝가리인과 대타협(Ausgleich)을 맺고 이중 제국 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황제의 제안을 받은 헝가리인 지도층 사이에서는 제안의 찬성 여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일어난다. 헝가리의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던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황제의 제안에 반발했고 헝가리인들 대다수 역시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정신에 대한 배신이라며 반대하는 모양새였다. 반대로 친 합스부르크 성향의 헝가리 자유주의자들은 제안에 찬성하였는데, 헝가리 자유주의자의 대표격이며 훗날 자유당을 창당하는 데아크 페렌츠는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에는 헝가리의 독립을 열렬히 지지하던 민족주의자였으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극단주의자들과 결별하고 합스부르크의 지배 아래에서 오스트리아와 연합을 추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바꿨다. 더 부유하고 산업화가 잘 된 오스트리아와 동행하는 것이 헝가리에게 이득이라는 경제적 계산과, 대타협을 통해 피지배자에서 지배자로 헝가리인들의 정치적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오스트리아의 지지를 통해 헝가리 내 소수민족들을 견제할 수 있다는 정치적 계산이 동시에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은 대타협 유지파 정당인 데아크당에게 표를 주지 않았고 중도좌파나 극좌파에만 표를 주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데아크당은 트란스라이타니아의 비(非)헝가리인 소수민족들이 몰표를 던져줘서 간신히 절반 이상의 의석을 점할 수 있었다. 헝가리인들이 갈망했던 독립은 오히려 그들이 무시하던 소수민족에 의해 실패하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외무부 장관이 된 반프로이센파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9]이 재상으로 재직중인 오스트리아 역시 프로이센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교착상태에 빠진 헝가리 문제를 빠르게 끝내야 했기에 협상에 적극적이었고, 이렇게 양측의 계산이 일치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자유주의자들 간의 협상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헝가리의 지도자들은 첫번째 조건이 오스트리아의 황제가 성 이슈트반 왕관령의 사도왕으로써 즉위해야 한다고 통보를 하였다. 그리하여 1867년 6월 8일,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부다페스트에서 대관식을 치르는 동시에 공식적으로 이중제국을 탄생시킬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표하였다. 헝가리 대표 데아크 페렌츠가 서명하고 새로 구성된 헝가리 의회가 이를 비준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다.
대타협은 본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황제가 가지고 있던 헝가리 왕위를 분리해서 헝가리 왕국과 의회를 독립시키되, 헝가리의 왕위만은 계속 합스부르크 황제가 차지하는 일종의 동군연합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에는 공동의 중앙 정부 조직이 있었으므로 단순히 칭호만 공유하는 인적 동군연합(personal union)이 아닌 물적 동군연합(real union)으로 간주된다.
이 타협에 의거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는 헝가리 왕의 자리에 올랐으며, 제국의 중요한 업무인 국방, 재정, 외교는 동일한 대신이 관장하기로 하였다. 나머지 사항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따로 내각과 각료를 두어 처리하기로 하였고 재정 분담금과 관세 등의 사안은 10년마다 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헝가리의 불만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서는 독일어를 공용어로 채택하였다.[10]
하지만 헝가리 왕국 내에서조차 슬로바키아인, 세르비아인 등 다수의 민족 집단이 있었고 심지어 독일계 역시 소수민족으로 존재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도 이탈리아인,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이 소수민족으로 있었으며, 양국 공통의 소수민족은 유대인과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이었다.
4. 발칸으로의 확장과 보스니아 위기
4.1.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의 상황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가 온갖 소수민족들로 시끄러운 상황에도 제국은 발칸 지역으로의 팽창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주요 국가가 1884년~1885년의 베를린 회담 뒤에 아프리카로 급속히 팽창했던 반면에 해군력이 뒤떨어졌던[11]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가까운 발칸반도를 식민지로 삼고자 했다. 이런 발칸 식민화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진 정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과 충돌했다.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많은 국민은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지지했고, 프랑스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한 독일 제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지해줬기 때문에 정복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있는 서쪽과 남쪽으로는 판로를 확장할 수 없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입장에서는 동쪽의 발칸반도로 확장하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결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벗어난 발칸 국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 하에 쉽게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또한 1890년대를 전후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주도해 온 독일계가 독일 민족 국가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떠나 독일에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분리 세력으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방침도 변경되어서 원래는 제국 소속의 소수 민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발칸반도의 현상 유지 정책을 펼쳤지만, 이 시기부터는 제국을 이득으로 다시 하나로 묶기 위해 무력을 과시하고 영토 확장을 계획했다. 이런 팽창 정책으로 발칸반도를 노리던 다른 주요 국가였던 러시아와 협력하려고 했다.
4.2. 당시 국제 정세
| |
| 산 스테파노 조약 직후에 비해 3분의 1토막 난 베를린 회의 직후 불가리아의 강역 |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산 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 제국 땅에서 불가리아를 거대하게 쪼개내어 독립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신생 불가리아가 사실상 러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해 발칸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우려한[12]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에 극렬히 반대했고 벤저민 디즈레일리 영국 총리는 지중해로 군함을 이동시키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결국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중재 하에 베를린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불가리아에게 배당된 영토는 3분의 1토막 났으며, 그마저도 완전 독립은 금지된 채 명목상으로는 오스만의 종속국으로 유지됐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주어졌다. 다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군의 '점령'은 가능해도 완전한 '합병'은 불가능한 기묘한 상태였다.
베를린 회의 후에도 발칸반도의 긴장은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13] 슬라브 민족주의와 더불어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오스만 이렇게 3개 제국 간의 첨예한 수싸움이 펼쳐지며 불안정이 지속되었기 때문.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1879년 독일 제국과 동맹을 맺었고, 1883년에는 루마니아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으며 1887년에는 영국, 이탈리아와 함께 지중해 협정을 맺어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틀어막았다. 결정적으로 보스니아는 물론 라슈카와 노비파자르 등 핵심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켜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통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는 것을 차단한 국가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였다.[1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와 오스만 제국이 전쟁을 하면서 상황이 좋지 않아졌을 때 발칸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하였으며, 이후에는 불가리아, 세르비아와 전쟁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연달아 일어난 두 전쟁을 빠르게 승기를 잡아서 큰 손실을 얻지 않았고, 원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향력을 받던 루마니아마저 세르비아와 동맹을 맺은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자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력을 거부했다.
| | |
| 1878년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점령에 반발하는 보슈나크인들 | 1908년 보스니아 합병을 알리는 공고문을 읽는 세르비아인들[15] |
보스니아에게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자치권만이 주어졌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스니아 병합은 같은 슬라브계인 보스니아인들을 민족 공동체로 간주하던 세르비아의 극렬한 반발을 불러왔다. 범슬라브계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도 급속도로 얼어붙었다.[17] 보스니아 합병은 결과적으로 사라예보 사건과 제1차 세계 대전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당시 제국을 도와준 국가는 오스만에 영향력을 얻으려는 독일뿐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동맹은 독일만 남게 되었다.
당시 발칸 정계의 중심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과 러시아의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가 있었다. 에렌탈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병합해 오스트리아의 입지를 확고히하려 했고, 이즈볼스키는 다르다넬스 해협 통행권을 얻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병합을 묵인하는 비공식 합의를 추진했지만 국제 여론의 반발로 처참히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은 전쟁 직전까지 몰렸고, 보스니아 합병 이후 유럽 세계는 크게 러시아, 프랑스, 영국의 협상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의 동맹국으로 갈라졌다.
에렌탈 외무장관은 발칸 정책에서 몇 가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하나는 슬라브계 민족들이 서로 단결하지 못할거라 믿었던 것이고, 둘째는 오스만 제국이 제안한 오스트리아-오스만-루마니아 동맹안을 거절하는 동시에 불가리아를 소외시켜 불가리아가 러시아와 세르비아 쪽에 붙도록 만든 것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실제로 발칸으로 더 남하할 생각이 없었음에도 발칸 국가들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오스트리아가 더 남하할 것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는데, 이는 오히려 발칸 국가들끼리 대오스트리아 동맹을 맺게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결국 에렌탈이 죽고 2년 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슬라브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하는 초대형 사건이 터지며 해묵었던 발칸의 갈등은 마침내 폭발하고야 만다.
4.3. 대외 영토 및 식민지 확보
당시 제국주의 열강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해운 및 대외 식민지의 운영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엄연히 열강이면서도 다른 열강이나 식민제국들과는 달리 대규모 대외 식민지를 경영하지 않았다. 다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오스트리아인 외에 다양한 소수민족의 비중이 높은 다문화 제국의 특성상 본국과 식민지의 구분과 경계가 모호한 사례로 보기도 한다. 간혹 제국 내 타 영토들에 비해 이질적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을 식민지로 보기도 하지만 대체로 사학자들에게 보스니아는 식민지로 간주되지 않는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중제국이 대외 확장에 아예 무관심한 건 또 아니었다. 1858년[18]부터 니코바르 제도에 원정을 보내면서 식민지화 가능성을 검토했다. 하지만 1886년 원정에서 영국의 점유를 확인 후 포기했다. 1898년에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패하며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어버린 스페인이 스페인령 사하라를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매각하려고 시도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해군력 증강의 명분이 될 대외 식민지 확보의 일환으로 여기에 관심을 보였으나 식민지 확보에 미온적인 헝가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또한 의화단 운동 당시 다른 열강들과 함께 진압에 참여하여[19] 톈진 조계의 일부를 (오스트리아-헝가리령 톈진) 획득했다. 톈진 조계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5. 사라예보 사건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라예보 사건#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사라예보 사건#|]]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
| 사라예보 사건 |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외무부장관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육군 사령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등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해 예방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했지만, 정작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티서 이슈트반 헝가리 총리는 반대했다. 하지만 대세르비아 유화파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죽어 없어진 상태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결국 전쟁론자들의 입장이 더 힘을 얻는건 당연했다. 오스트리아는 이 전쟁으로 단순히 황태자의 복수 뿐만 아니라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마저도 오스트리아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고 나서면서 오스트리아 입장에선 세르비아와의 전쟁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가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만한 10가지 요구를 '7월 최후통첩'이라고 만들어서 날렸다. 세르비아는 이 중에 9가지를 수락하고 1개는 부분적으로 수락했는데, 어차피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오스트리아는 이 1개를 빌미로 전쟁을 일으켰다. 1914년 7월 28일 결국 세르비아 침공이 일어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올랐다.
역시 발칸반도 진출을 노리며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던 러시아 제국이 총동원령을 선포하며 세르비아 편에 서서 참전하자 독일 제국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편을 들어 맞섰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일 제국의 발칸 지배를 경계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참전했고, 결국 이는 전 유럽이 참전하는 '세계 대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6. 대전쟁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제1차 세계 대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제1차 세계 대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6.1. 개전까지의 과정
| | |
| 암살 직후 끌려가는 가브릴로 프린치프 | 사라예보의 반세르비아 폭동 |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사라예보 사건을 빌미삼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엘리트층들을 대거 쓸어버렸다. 총 5,500명이 투옥, 추방되었고 개중 700~2,200명이 옥사했으며 460명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또한 보슈냐크인들로 하여금 '슈츠코르프'라는 민병대를 조직해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감시, 체포, 처형하는 역할을 맡기고선 사실상의 인종탄압기구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보스니아 내의 전통적인 가톨릭-정교회-이슬람 간 갈등은 폭발적으로 증폭되어 서로를 원수 보듯이 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는 서로를 완전한 적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암살된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에서는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전쟁을 벌여야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미 몇 년전부터 대세르비아 전쟁을 주장해온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외무장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총참모장 등은 세르비아가 발칸에서 슬라브 민족주의를 더 부추지기 전에 공격해 싹을 잘라야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티서 이슈트반 총리는 전쟁이 전 유럽으로 확산될 것을 우려한 신중론을 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독일이 어떻게 나올지 알아보기 위해 1914년 7월 포츠담으로 대사를 파견했고, 빌헬름 2세가 직접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면서 든든한 뒷배가 생기며 군사행동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에 10개 조항으로 된 최후통첩을 보냈다. 오스트리아 관리들이 직접 세르비아 내의 조사에 참여해야한다는 등 사실상 세르비아의 주권을 침해하는 요구사항으로, 애초부터 세르비아가 거부하기를 바라고 보낸 요구안이었다. 그러나 전쟁만은 피하고 싶었던 세르비아는 10개 요구안 중 9개를 수용, 나머지 1개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불충분한 답변'으로 규정, 1914년 7월 28일 마침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대전쟁의 서막을 열어젖혔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보호하기 위해 7월말 전면동원령을 내렸고, 독일은 8월 1일 러시아에게, 8월 3일에는 프랑스에게 선전포고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8월 6일 러시아에게 선전포고했고 영국은 이미 독일의 벨기에 침략을 명분삼아 8월 4일 도미노처럼 선전포고했다.[22]
전쟁이 길어질수록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적 주도권은 점차 사라졌고 독일 제국에게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초기 목표는 괘씸한 세르비아를 징벌하고 발칸의 슬라브 민족주의를 억누르는 것 뿐이었으나 양쪽 모두 실패하며 수렁 속에 빠져들었던 것이다.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사망하자 즉위한 카를 1세는 전쟁 종식을 모색하며 친독파 대신 온건-비독일계 인사들을 기용했다. 1917년부터는 영국, 프랑스 등과 비밀리에 단독 강화를 시도했지만 이미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를 떼먹기로 약속받았던 이탈리아가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실패했다. 이슈트반 부리안 외무장관은 이탈리아가 일전에 요구한 토렌티노, 이스트리아의 이양에 대해 관심을 보였지만, 이탈리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기에 협상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 채 결렬된다.
6.2. 세르비아 전역
| |
|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첫 타겟이 된 세르비아의 도시 샤바츠 |
그러다가 1915년 가을 막강한 독일 제국군이 개입하며 전세가 바뀐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군이 한꺼번에 세르비아를 공격했고, 결국 세르비아군은 10월~12월에 걸쳐 완전히 밀려났다. 수도 베오그라드가 점령됐고 세르비아군은 괴멸을 피하기 위해 알바니아 산악지대를 통해 필사적으로 후퇴했다. 발칸반도 전체가 동맹국에게 장악당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와 영국, 이탈리아 등 협상국은 1915년 말 무려 1,000회 이상 수송선을 왔다갔다시키며 26만 명의 세르비아 군인과 피난민들을 이탈리아 브린디시와 그리스의 코르푸로 긴급대피시켰다.
세르비아 망명정부가 눌러앉은 코르푸는 세르비아의 임시수도가 되었다. 코르푸는 그리스 전선으로 병력을 보급하는 전략적 해군 기지를 하는 동시에 세르비아가 세를 추스르고 끈질기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저항하는 근거지로 변모했다. 결국 1916년 4월 영국과 프랑스의 수송선들은 코르푸에 주둔 중이던 세르비아군 12만 명을 그리스 본토 테살로니키에 상륙시켰고, 이 부대는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영국과 프랑스군과 함께 싸우며 1918년 후반부에 세르비아 전체를 해방하는 데에 성공한다.
6.3. 러시아 전역
| |
| 프셰미실 공방전 |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는 결국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의 제안을 수용했다.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세운 '최고국가위원회'를 제국 내 폴란드인들의 자치기구로 인정하고, 대신 이들이 폴란드 군단을 조직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함께 싸우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소속된 보조전투부대로 활동하며 훗날 폴란드 독립운동의 핵심 세력으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1915년 5월부터 독일이 러시아의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조금씩 도움을 주기 시작하며 전세가 바뀐다. 동맹국 전체가 합동작전을 펼치면서 수십만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군 전선이 완전히 붕괴했고, 러시아 제3군이 무너졌으며 러시아는 100km 이상 후퇴했다. 이 덕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렘베르크와 갈리치아를 되찾을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철저히 독일의 지휘 아래 이뤄낸 승리였고, 주도권은 완전히 독일에게 넘어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독일 제국에 종속된 전력으로 전락했다.
| | |
| 브루실로프 공세 |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
러시아 전역이 갈수록 질질 끌리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모두 극심한 인력부족에 시달렸다. 그래서 나온 비책이 바로 러시아 아래에 있던 폴란드인들을 활용하자는 계획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령 폴란드의 폴란드인들을 선동해 폴란드 섭정왕국을 세워 폴란드를 독립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실제로는 독일의 괴뢰국으로 국왕 대신 독일의 꼭두각시인 섭정회의가 대신 지배했다. 폴란드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지만, 법적 정치적 토대는 남아 전후 폴란드 제2공화국의 기반으로 작동했다. 오히려 폴란드에 기만적인 괴뢰국을 세우려 했던 시도가 폴란드 독립국가의 씨앗이 되었던 셈.
반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의 민족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맞섰던 사례도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참전한 1917년 7월의 주보로프 전투가 바로 그것.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의 포로들로 구성된 군단으로, 러시아 편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맞서싸웠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은 주보로프 전투의 승리에서 핵심인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군과 협력하며 1918년 제국이 붕괴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성립의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6.4. 이탈리아 전역
| |
| 1917년 이손초강을 도하하는 오스트리아군 |
이탈리아의 루이지 카도르나 참모총장은 북동부의 이손초강을 돌파해 류블랴나를 점령하고 빈까지 진격하려 들었다. 6월 23일부터 12월 2일까지 불과 5개월 간 무려 4차례나 이손초강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양측 모두 극심한 인명피해에도 불구하고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산악 지형을 활용해 이탈리아군을 저지했고, 이탈리아군은 전술과 보급 문제에 발목이 잡혀 끝끝내 돌파에 실패했다. 수 십만의 사상자가 나왔기에 '제1차 세계 대전의 미니 서부전선'이라고도 불릴 정도다.
오스트리아의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은 세르비아와 러시아 전선에서의 손실에 대한 복수로 이탈리아에 대한 징벌적인 공세를 시도했다. 1916년 5월 15일 티롤에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고 오스트리아군이 아시아고 고원을 돌파, 일시적으로 점령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8월 9일 고리치아를 탈환했고, 전선은 카르소 고원 인근에서 정체됐다. 이탈리아 전선은 서부전선처럼 질질 끌리고 지루한 참호전으로 빠져들었다. 이 대치전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러시아 전선이 붕괴하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부전선의 병력을 이탈리아쪽으로 이동시킬 여유가 생겼고, 결국 이듬해 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대참패하며 급변한다.
| | |
| 피아베강 전투 |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의 이탈리아군 |
이탈리아가 밀리는 모양새가 되자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이탈리아를 위해 막대한 물자와 병력을 지원했다. 영국과 프랑스군 일부가 직접 이손초강 전선에 파견되었고 미군 부대도 소규모로 참전했다. 이탈리아군은 무능한 루이지 카도르나 대신 아르만도 디아츠를 기용하며 군대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이탈리아는 방어력 강화와 병참 재조정으로 역습의 기회를 노렸다. 결국 1918년 6월 피아베강 전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마지막 대공세를 퍼부었지만, 오스트리아군 6만 명이 전사하고 전선 유지에 실패하며 이탈리아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전세를 되찾은 이탈리아군은 1918년 10월말 베네토 지방에서 최종 공세를 퍼부었다. 이미 피아베강 전투의 패배로 사기가 바닥을 친 오스트리아군은 무너져내렸다. 부대 탈영과 내부 민족들의 반란이 속출했다. 본토에서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체코 및 슬로바키아 등이 독립을 선포하는 지경이었고 실질적으로 제국이 갈기갈기 쪼개지기 시작했다. 결국 1918년 11월 3일 이탈리아 파도바 근교의 빌라 주스티에서 빌라주스티 휴전이 체결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사 활동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사실상 완전히 패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6.5. 루마니아 전역
| |
| 1917년 마라세스티의 루마니아군 |
그러나 곧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가 함께 반격작전을 개시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이끄는 독일군이 다뉴브 전선을 돌파했다. 불가리아군은 남쪽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흑해 방면에서 진격해 올테니아, 문테니아, 도브루자 등 루마니아의 3개 지역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1916년 12월 6일에는 수도 부쿠레슈티가 동맹국에게 점령당했고 루마니아 왕실과 정부는 몰다비아 공국의 수도였던 이아시로 도망쳐 망명정부를 꾸렸다. 루마니아는 3개월 만에 국토의 절반을 잃었으며 동맹국들은 루마니아 점령지에서 식량과 물자를 강제징발했다.
이아시로 도망친 루마니아 정부는 마라슈티 전투, 마라셰슈티 전투, 오이투즈 전투 등 3번의 주요 방어전에서 연달아 승리하며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가 이탈하자 동부 전선에 혼자 둥그러니 남은 루마니아도 도저히 버틸 여력이 없었다. 결국 전선을 유지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루마니아는 1918년 초 협상국과 휴전을 체결해 전쟁에서 이탈했다.
7. 해체
||<-7><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tablealign=center><bgcolor=#000> 제1차 세계 대전의 평화 조약 ||
| | | | | |||
| 독일 제국 | '''[[오스트리아 제국#s-5| 오스트리아 제국 ]]''' | 헝가리 왕국 | 불가리아 왕국 | |||
| '''[[베르사유 조약| 베르사유 조약 ]]''' | '''[[생제르맹 조약| 생제르맹 조약 ]]''' | '''[[트리아농 조약| 트리아농 조약 ]]''' | 뇌이 조약 | |||
| {{{#!wiki style="margin: -16px -11px" | | | | |||
| 오스만 제국 |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 루마니아 왕국 | ||||
| 세브르 조약 → 로잔 조약i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ii | 부쿠레슈티 조약ii | }}} | |||
| i : 튀르키예 독립 전쟁을 통해 재협상 ii : 협상국의 일원이었으나 단독 평화 협정을 맺음 같이 보기: 파리 강화 회의, 베르사유 조약, 빅4 | ||||||
4년 간의 치열한 전쟁으로 인해 1918년에 이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의 식량과 자원이 모두 고갈됐다.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으로 도시에는 기근이 돌았고 민중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군수산업은 마비되었으며 농부들이 군대에 동원되어버린 탓에 농업 생산량은 이미 붕괴됐다. 무능한 정부는 제국 내 각 민족들의 이해조율에 실패했으며 전시행정과 보급체계는 무너져내렸다. 그 결과 전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는 완전히 사라졌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외부보다도 이미 내부에서 빠르게 붕괴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좌파 세력들은 노조와 힘을 합쳐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등지에서 대규모 파업을 주도했다. 패전이 눈앞에 다가오자 병사들도 제 목숨을 버리기 싫어해 탈영과 봉기, 항복이 급증했다. 무려 11개의 민족[24]으로 구성된 제국은 전쟁이 길어지고 형편이 어려워지자 속절없이 공통 정체성이 붕괴했다. 특히 체코 민족의 독립을 주장한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의 영향을 받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며 분리독립 움직임을 자극했고, 동맹국의 패전이 확실해지자 각지의 민족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독립을 선언하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이탈리아 전선의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대패하자 각 민족들은 전장을 내팽겨쳤다. 체코, 슬로바키아 병사들은 귀국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을 조직했고 남슬라브 병사들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연합으로 떨어져나갔으며 폴란드, 루마니아 병사들도 귀국해서 자국의 독립운동에 합류했다.
황제 카를 1세는 필사적으로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제국 내 소수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은 더이상 막기 어려웠다. 1918년 가을에는 이미 제국 곳곳에 임시정부들이 들어서며 황제의 통치권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지경이 되었다. 1918년 10월 이슈트반 부리안 외무장관은 미국에게 14개 조항을 기초로 공식적인 휴전 요청을 했고, 카를 1세는 10월 16일 제국개혁선언을 발표해 제국을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민족별 자치국가들로 구성된 연방으로 바꾸겠다는 최후의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틀 뒤 미국은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휴전 제안을 거부했다. 11월 3일 빌라주스티 휴전이 체결되며 군사적 활동은 모두 끝장났고, 11월 12일에는 카를 1세가 퇴위를 선언했다.
| | |
| 프라하에서 체코의 독립을 선포하는 체코인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분할 |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루마니아 왕국, 이탈리아 왕국, 새로 독립한 폴란드에 영토를 할양하고 소국으로 전락했다. 합스부르크 가문도 1918년 11월 12일에 오스트리아의 제위에서, 11월 16일에 헝가리의 왕위에서 밀려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휘청거리자 1918년 10월 28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되었으며 비슷한 이유들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바나트, 서우크라이나, 크라쿠프[26] 등이 독립하면서 제국은 뿔뿔히 조각났다.
체코슬로바키아, 슬라브계, 폴란드, 헝가리가 모조리 독립을 선언했고 제국의 통제 아래 남은 것은 주로 독일계가 거주하는 다뉴브와 알프스 지역 뿐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마저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황제의 권위를 부정하고 공화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최후의 제국 총리였던 하인리히 라마슈는 제국의 붕괴가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 황제에게 '통치권 행사를 중지'하라고 권유했다. 말이 중지지 사실상 퇴위였다. 결국 1918년 11월 11일 카를 1세는 통치 권한을 포기한다는 조서를 발표, 그 다음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된다. 불과 4일 뒤에는 미하이 카로이의 주도 하에 헝가리 제1공화국이 수립된다.
처음 협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해체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1917년까지만 해도 전황이 별로 좋지 않았던 데다가 지금은 같은 편으로 싸우고 있지만 언제 다시 적대관계로 돌변할지 모르는 러시아 제국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를 견제할 나라로 남겨둬야 했기 때문이었다.[27] 하지만 러시아 제국이 러시아 혁명으로 무너지고 그 후에 들어선 소비에트 러시아는 러시아 내전 등으로 제정 시절보다 위축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살려둬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28] 이후 해체된 제국 내의 독일어권 지역에서는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수립,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제국 내 모든 독일어권 지역들을 영토로 선포했으나 이미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나라들과 협상국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현재의 오스트리아의 영토만 보유하게 되었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해체된 제국의 후계국들을 나누는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 못했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역시 다민족 국가였고, 제국 시절보다 더한 민족갈등[29]과 종교 갈등[30]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나마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는 양차대전 이후로 여러 요인으로 강제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갈등이 어느 정도 봉합되었지만, 유고슬라비아 지역은 냉전 종결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이라는 대참사를 겪고서야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1] 페르디난트 1세는 러요시 2세의 누나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와 결혼했고, 러요시 2세는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와 결혼했다.[2] 퇴쾨이 임레는 라코치 페렌츠 2세의 어머니인 크로아티아인 귀족 옐레나 즈린스카(Jelena Zrinska 1643~1703)와 결혼했다.[3] 전통적으로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은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치러졌으나 모하치 전투 패전 이후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왕국의 1/3을 점유하면서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지 않고 빈과 가까웠던 포조니의 성 마르틴 성당에서 대관식이 열렸다.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헝가리 대부분이 수복된 이후에도 프란츠 요제프 1세 전까지는 포조니에서 헝가리 국왕 대관식이 열렸으며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카를 1세는 부더페슈트에서 대관식을 치렀다.[4] 같은 구성원인 보헤미아 왕국도 이와 유사했다. 다만 보헤미아 왕국은 오래 전 보헤미아 공국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었던데다가 동방식민운동의 영향으로 독일화된 보헤미아인 귀족들이 많았으며, 30년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독립 운동이 실패한 후 오스트로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자치를 얻자는 방식으로 선회하여 헝가리만큼 반항적이지는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경우 1526년부터 친 합스부르크 성향이 강해 헝가리와는 반대로 대 오스만 전쟁의 선봉을 자처하는 한편, 헝가리의 독립 시도 탄압에 제국 내 어느 민족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서 동군연합임에도 오히려 사이가 매우 좋지 못했다.[5] 자그레브의 중심지 옐라치치 광장의 모델이 된 요시프 옐라치치, 슬로바키아어의 아버지 류도비트 슈투르, 에르데이 태생의 법률가 아브람 이안쿠 등은 합스부르크 왕가 편으로 참전하여 헝가리 혁명 진압에 앞장섰다.[6] 이것도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상실이 큰 것에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카밀로 카보우르 몰래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빌라프랑카디베로나(Villafranca di Verona)에서 강화를 맺어 베네토는 겨우 지켜낸 것이었다.[7]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모두 있어야 진정한 독일 국가를 이룬다"고 말했을 정도로 웬만해서는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을 원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등 독일 연방 바깥의 국가들을 포기할 의사가 없었고, 결국 독일 연방에서 쫓겨났다.[8] 게다가 자신들을 패배시킨 그 사르데냐-피에몬테와 프로이센이 마침내 자신들의 영향권이었던 이탈리아와 독일을 통일하고 신흥 세력으로 등장하자 더욱 속이 쓰렸다.[9] (Friedrich Ferdinand Graf von Beust, 1809 ~ 1886)[10]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치세 후반기에 헝가리 의회가 군대 내의 독일어 사용에 대해 불만을 품고 헝가리어를 동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자, 황제는 헝가리 국민의 투표권을 개정해 빈민과 농민이 대거 참정권을 가지도록 해서 언어 운동을 주도한 헝가리 귀족들을 제압하려고 했다. 그러자 언어 운동 지지자들은 재빨리 황제에게 지지를 보내며 꼬리를 내렸다. 내가 잘나지는 것보단 나보다 못난 게 나만큼 잘나지는 걸 막으려는 모양새였다.[11] 합스부르크 제국 본토 자체가 면적에 비해 바다와 접한 해안선이 너무 짧았고 그나마도 유일하게 접한 바다인 아드리아해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앞마당이었다. 그래서 멸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해군 인프라를 흡수하기 전까진 합스부르크 제국에 해군이란게 아예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내해인 아드리아해를 나오면 또 내해인 지중해라 다른 국가들에 비해 해외 진출에 크게 불리했다.[12] 특히 산 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형성될 불가리아 공국은 오스만 제국의 발칸반도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데다가 지중해까지도 접해있는, 옛 불가리아 제2제국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거대했다. 지중해의 항구를 가진 불가리아를 통해 러시아가 지중해를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영국은 필사적으로 이를 막으려 들었다.[13] 베를린 회의는 러시아의 팽창을 제어하고 발칸 지역의 세력 균형을 회복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히려 발칸 민족주의와 범슬라브주의를 더욱 자극하여 장기적으로는 유럽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키기만 했다.[14]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8년부터 1909년까지 라슈카와 노비파자르를 점령했다. 1909년 다시 오스만 제국에 반환되었지만 제1차 발칸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갈라먹는다.[15] 이 곳은 6년 뒤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총으로 쏴 살해한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1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러시아와 영토에 대한 영향권을 합의했으나, 러시아가 이러한 조약 변경을 다른 주요 국가들에게 알리고 인정받기 전에 1908년 오스만 제국이 '통일 진보 위원회(청년 튀르크당)'가 일으킨 혁명으로 혼란에 빠지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합병해 버림으로써 세르비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의 분노를 사게 된다.[17] 이때 세르비아는 군대를 동원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원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18] 대타협 이전이긴 하나[19] 이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못지않은 잔인한 보복전을 벌였다.[20] 보슈냐크인들은 이슬람, 크로아티아인들은 가톨릭을 믿었고 종교적으로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인들과 달랐기에 동질성이 낮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해주는 합스부르크에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사라예보 사건이 기존에 존재하던 민족 갈등에다가 불을 붙였던 것이다.[21] 특히 사라예보 사건이 터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에서 이런 분위기가 강했다.[22] 한편 이탈리아 왕국은 본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동맹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선제침략에 반대하며 초창기에 중립을 지켰다가 이후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트렌티노, 남티롤, 이스트리아 등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부를 떼주겠다는 약속(런던 조약)을 받고선 1915년 5월 협상국에 붙어 배신해버린다.[23] 러시아 역시 썩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브루실로프 공세는 단기적으로는 승리였지만,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손실로 러시아 경제가 붕괴하고 결과적으로 러시아 혁명의 촉매제가 되었다.[24] 독일인, 헝가리인,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폴란드인, 루마니아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우크라이나인, 이탈리아인.[25] 이들은 이미 1917년 코르푸 선언으로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와 남슬라브 통일국가를 수립하겠다는 목표를 천명한 바 있었고 1918년 10월에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26] 폴란드에 흡수됨[27] 한편 러시아도 군주국이었기에 합스부르크 가문을 쫓아낼 생각이 없었다.[28] 물론 만약 러시아 제국이 안 무너졌거나 나중에 무너졌다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더 존속할 수 있었다.[29] 폴란드 제2공화국은 폴란드인, 독일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이 섞여 있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폴란드인이 섞여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말할 것도 없다.[30]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독일계, 헝가리인,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등 가톨릭을 믿는 민족들이 다수였지만 폴란드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정교회를 믿는 벨라루스인과 우크라이나인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심지어 가톨릭-정교회-이슬람이 대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