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8:26:48

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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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솜 전투
Battle of the Somme
La bataille de la Somme
Die Schlacht an der Somme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의 대규모 전투
파일:Cheshire_Regiment_trench_Somme_1916.jpg
날짜
1916년 7월 1일 ~ 11월 18일
장소
프랑스 솜강 일대
협상국 동맹국
교전국
[[영국|]][[틀:국기|]][[틀:국기|]]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틀:국기|]][[틀:국기|
속령
프랑스
]]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틀:깃발|
기 명칭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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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헤이그|
더글러스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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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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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프리츠 폰 벨로우
전력
병력 7월 1일
영국 육군: 약 260,000명
프랑스 육군: 약 220,000명

11월 1일
영국 육군: 약 1,020,000명
프랑스 육군: 약 960,000명
7월 1일
독일 제국 육군: 약 201,000명

11월 1일
독일 제국 육군: 약 1,000,000명
피해
사상자 영국 육군: 약 419,000명
프랑스 육군: 약 204,000명
독일 제국 육군: 약 434,000 ~ 530,000명
결과
어떠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투
영향
- 연합군의 공세 실패.
독일 제국베르됭 공세 중지.
1. 개요2. 서론3. 전투 이전4. 전투 경과5. 결과6. 기타
6.1. 유명 참전자들
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 중 1916년 7월 1일부터 동년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솜강 유역에서 벌인 영국군의 대공세. 1916년, 서부전선에서 펼쳐진 대규모 전투 중 하나로 철조망기관총 앞에서 10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제1차 세계 대전 중 최대최악의 살육이 벌어진 전투이다.

1918년 아라스 전투(2차 솜 전투)와 비교하기 위해서 제1차 솜 전투라고도 부른다.

2. 서론

솜 전투의 전개
An das deutsche Volk! Seit der Reichsgründung ist es durch 43 Jahre Mein und Meiner Vorfahren heißes Bemühen gewesen, der Welt den Frieden zu erhalten und im Frieden unsere kraftvolle Entwicklung zu fördern...

독일 국민들에게 고한다! 제국의 형성 이후 43년 동안 나와 나의 조상들은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의 평화롭고 강력한 발전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왔다...
1914년 8월 6일 빌헬름 2세의 연설 중.

솜 전투는 1915년 말,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독일의 전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계획한 합동 공세 작전에서 시작되었다. 협상국은 본래 이 작전을 통해 독일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었으나, 이보다 먼저 독일 제국군이 베르됭 전투를 일으키는 변수가 일어나게 된다.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군의 공세에 프랑스군의 전황이 극도로 급박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합동 공세 작전은 베르됭의 프랑스군이 받는 압박을 줄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8월 1일이었던 원래 작전 개시일에서 한달이나 앞당긴 7월 1일에 개시되었다. 그리고 작전 개시 당일 영국군에서만 5만 8천 명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6] 대략 3개 보병사단하루만에 증발해버린 것이다.

이러한 대참사의 원인은 공세 직전까지 독일군 진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했던 것에 있었다. 작전 개시 5일 전인 6월 26일부터 계속된 영국군의 대규모 포격[7]은 발사된 많은 포탄들이 물렁해진 땅 속으로 박혀들어가 불발하기 일쑤였고 이렇게 제대로 피해를 주지 못한 적 진지로 수많은 보병들을 천천히 전진시키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었다.

독일군의 철조망과 기관총 세례 앞에 영국군 장병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세는 11월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독일군의 포지어 장군을 사로잡는 등 여러 눈여겨볼 성과도 있었으나 결국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후반기에는 최초의 전차까지 투입되어 독일군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 나름의 활약도 했지만 이 초기 전차들은 많은 결함과 고장으로 그다지 신뢰받지는 못하였다. 솜 전투는 이후 11월 18일 폭설로 인해 중단되었다.

최종적으로 협상군은 이 치열한 전투 끝에 겨우 6마일(9.66km) 정도 전진했는데 이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 육군 42만 명, 프랑스 육군 20만 명이었으며, 독일군의 인명 손실은 43만 명~53만 명 가량이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이 전투가 협상국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점하게 해준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그 대가는 처참했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영국 미디어들은 매년 7월 1일이 되면 희생자들을 기리는 추모 기사를 내보낸다.

3. 전투 이전

1915년 말, 협상국 측은 러시아 제국 육군의 피해가 컸던 동부전선에서는 수세로 전환하고, 서부전선에서는 영국-프랑스 2국이 프랑스군 원수인 조제프 조프르가 제안한 대규모 공세를 시도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 작전은 독일로부터 영토를 탈환한다는 것보다는 독일군의 병력을 소모하게 해서 독일군 전체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 제국군베르됭 전투를 일으키면서 큰 변화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베르됭 전투로 인해 공세의 주력을 담당할 것으로 여겨졌던 프랑스군이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반면 영국은 병력 증강을 위한 대규모 모병 활동의 결과로 비로소 프랑스 육군에 필적하는 규모의 육군 병력을 갖추게 되면서 솜 전투는 제1차 세계 대전 사상 최초로 영국군이 주도하는 공세가 되었다. 실제로 이 전선에서 프랑스 육군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는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한다.

또한 최초 계획이었던 8월 1일에서 7월 1일로 공세 일자가 앞당겨졌는데, 이는 베르됭 전투의 전황이 급박하게 전개되면서 프랑스 측이 공세시기를 앞당기기를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쪽에 브루실로프 공세를 요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어떻게 해서든 베르됭에 가해지는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고자 하였다.

초기 전투 목표는 베르됭 전투의 독일군과 비슷한 것이었다. 즉 독일군의 예비병력을 최대한 고갈시켜 버리겠다는 것. 그러나 독일군의 주력이 베르됭으로 향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공격의 주도권을 쥔 영국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 장군은 '이참에 여길 뚫어서 독일군 서부전선을 확 붕괴시켜 버리자'는 야심찬 목표를 품게 되었다.

4. 전투 경과

파일:솜전투.png
솜 전투 전개도. 7월~11월

헤이그는 세르에서 몽토방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한 후 포지에르와 긴치를 연결하는 선까지 달려나갈 계획을 세웠다.

포지에르~긴치 라인을 점령하면 후속 돌파는 매우 용이할 것으로 본 헤이그는 영국 제4군을 최선봉에 세우며 돌파력을 강화시켰고 좌우에서 제3군과 프랑스 제6군이 조공을 담당했다

영국 육군이 6월 24일부터 8일간 준비포격을 가하면서 피의 향연이 시작되었고 영국군은 7월 1일 오전 7시 30분부터 돌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독일 육군의 종심방어망은 소나기처럼 뿌려댄 포격에도 대부분 남아있었고 포병이 다 때려부쉈으니 총 들고 유유히 걸어가 깃발만 꽂으면 될 것으로[8] 전달받았던 영국군의 보병들은 개전 첫날부터 대량학살을 당한다. 애초에 방어선의 대부분이 건재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 게다가 폭약 지뢰까지 심어놓아 영국의 피해는 급증했고 돌격속도는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나마 숙련된 정예병들로 구성된 부대들은 초반에 기관총 공격을 받고 사상자가 나자 바로 상황파악을 하고 신속하게 은엄폐 및 분산 기동에 들어가 피해를 최소화했으나, 대부분의 영국군은 기초훈련만 받고 투입된 징병자원 혹은 민간인 지원병들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대처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전멸 당했고, 곰쿠르와 프리쿠르 등 진지를 최종 점령한 곳도 당장 방어전이 가능한 멀쩡한 병력은 총원의 몇분의 1도 안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단 하루만에 5만 8천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그중 2만 명은 전사자 혹은 실종자였다. 심한 곳에서는 기관총반 1~2분대에게 대대급 병력이 쓸려버린 곳도 있었다고 한다.

공격준비 포격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 까닭으로는 여러 요인이 제기되었다.
  • 영국 육군 포탄의 품질이 불량하여 불발탄이 많이 나왔다.
  • 방어진지 파괴에 효과적인 중포의 수가 현저히 적었다.
  • 솜 지방의 무른 토질 때문에 포탄이 제대로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에서는 경작지 개간 중에 불발탄이 심심찮게 나온다고 한다.
  • 독일 육군의 참호의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서 모두 제압할 수 없었다.[9]
  • 독일군이 포격 시 기관총을 해체시켜 안전한 곳으로 신속하게 옮기는 훈련을 통해 대비하였다.
  • 무작정 많은 수의 야포를 동원하다 보니 심각한 사거리 격차가 발생하였다. 프랑스 육군의 포는 목표거리를 달성했지만, 영국 육군이 끌고 온 소구경 야포의 포격은 목표점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 영국 육군이 쓴 포탄의 대부분은 구조물을 효과적으로 부술 수 있는 고폭탄(High Explosive-HE)이 아니라, 참호나 철조망 등의 시설물의 파괴를 기대할 수 없는 인마살상용 유산탄(shrapnel)[10]이었다.

보통이면 이렇게 피해가 크면 공세를 중지해야 정상이지만, 헤이그는 독일군 또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거라는 오판을 하고 말았고 그에 따라 공세는 멈추지 않고 5개월 동안 계속되었다.[11] 독일 또한 초전의 대선전에 힘입어 항전의 의지를 내세웠고 방어와 동시에 때때로 반격을 통해 뺏긴 지역을 수복하기도 했다. 이렇게 피의 복수가 반복되는 와중에 영국군은 기어코 7월에 콩탈메종 등 독일 제2방어선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쌍방의 희생이 증가하는 가운데 7월 중순 독일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솜의 전황이 더 중요하다 판단하여 베르됭의 공세를 중지시키고 제1군을 새로 창설해 솜으로 보냈다.

인간 도살장은 8월 중순이 되어도 문을 닫지 않았는데 이는 사령부의 미친 짓과 오판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닥공만 외치던 총사령관 헤이그는 물론이거니와 주공을 담당한 롤린슨 4군 사령관은 거점 확보만 눈이 팔린 채 무식하게 무인지대를 뚫고 가라는 지시를 반복했다. 게다가 일선 지휘관 또한 돌파구 형성이 아닌 진지 점령만 하다보니 피를 안 흘릴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결과 독일의 방어선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에도 영국의 피해는 늘어만 갔다. 하지만 최상부 참모진의 변화는 없었다. 영국은 더 강한 돌파를 주문했고 독일 또한 루프레히트 집단군을 새로 창설하면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런 와중에 8월 말 독일에서 팔켄하인이 경질되고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에 오르면서 변화가 생기게 된다. 동, 서부 무관하게 전황이 불리해지면서 힌덴부르크는 공세를 전면중단시키고 수세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명령했다. 이를 통해 최전방의 병력배치는 대폭 줄이고 대신 기동방어를 채택해 대규모의 예비대를 종심에 배치하고 유사시 대처하도록 전략을 전면수정했다.

이러한 독일군의 변화를 영국측에서는 독일군이 붕괴한다는 조짐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본토로부터의 강한 압력을 받던 헤이그는 결정타를 가할 때라고 판단을 내리고 영국 제4군, 프랑스 제10군 및 영국 후방군을 동원해 9월 15일 공세를 감행한다. 독일 제3방어선인 모르발에서 구드쿠르 일대를 점령하려는 것이 공세의 목표였다. 이때 최초의 전차Mark I이 등장했다. 전차를 내세운 영국군은 플레르와 쿠르슬레트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독일의 예비대가 동원되자 돌파는 중단되었고 다시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전차 또한 운용을 뒷받침할 기술과 작전술이 미성숙했기 때문에 전투에선 쓸 만해도 전술적이나 전략적인 돌파를 성공시키진 못했다. 또, 내구성이 최악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대다수가 고장나 퍼지고 말았다.

헤이그는 첫날의 성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재차 공세를 명령했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7일 공세의 핵심 목표였던 티에프발을 점령하는데 이른다. 하지만 티에프발은 이미 독일에게 그다지 중요한 지역이 아닌 상황이었다. 10월 1일까지 대부분의 독일 제3방어선을 점령한 영국군은 10월13일 티에프발 일대의 레지나 라인을 공격했다. 이후 11월 르 사르의 요새와 보몽아멜의 보루를 점령하면서 솜 전투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5. 결과

"전쟁을 시작할 때 있었던 정예 병력들의 다수는 베르됭에서 쓰러졌고, 살아남은 나머지는 전부 솜에서 쓰러졌다."
-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1916년 7월 1일에 시작된 이 공세는 사실 1917년까지 지속되었다. 참호전의 특성상 정확한 종전일은 없으나 보통 11월 18일로 잡는 이유는 이날 첫 눈이 내려서 전투가 일시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이 그친 후에 전투가 다시 재개되었다. 영국 측에서 11월 18일을 종전일로 잡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하여 연합국이 뭔가 이루어 낸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솜 전투의 목표는 바폼(Bapaume)의 점령이었고, 11월 18일까지 연합국은 목표에 절반도 다다르지 못했다. 연합국에 비해 부족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던 독일은 숫적 열세의 상황속에서 적의 목표를 저지하기 위해 전략적 지연 후퇴를 하였다. 11월 18일 일시적으로 전투가 중단된 후 다시 재개되었지만 이후 연합국은 이듬해까지 단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솜 전투는 바폼이라는 전략적 요충지를 획득한다는 연합국의 목표가 실패한 전투였고, 독일은 바폼을 지키는 데 성공한 전투였다. 하지만 연합국 쪽은 이러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독일의 점령지를 약 10km 차지했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6마일(9.66km) 앞으로 전진했는데 이때 발생한 인명 손실은 영국 육군(영연방군 포함) 42만 명, 프랑스 육군 20만 명. 이를 막기 위해 싸웠던 독일 육군의 인명 손실은 43만~53만 명가량이었다. 독일군의 피해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 정확한 기록은 1940년대에 불타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이에른 왕세자나 전간기 독일군 측 연구를 통해 추산을 할 뿐이다. 양측 피해를 합치면 1km당 대략 10만, 전체 약 12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공격으로 얻은 땅이 전사자 매장하기도 부족하다라는 참호전의 평가가 실감이 나는 수치다. 덕분에 1차 대전의 지옥 같은 참호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투가 되었다.

다만 이 전투는 장기적으로 연합군에게 이득을 준 전투가 됐다. 솜에서의 공격 자체는 실패했지만 그 목적은 솜에서의 공격만이 아니라 독일의 병력을 솜에 집중하게 해 다른 곳(베르됭 등)의 압력을 줄인다는 것에도 있었다. 그리고 엄청난 피해에도 불구하고 이것만큼은 결국 성공하여 서부전선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영국은 솜 전투를 기점으로 실수를 분석하며 참호전 공격 능력을 꾸준히 상승시켰다. 비록 피로 얻은 경험이었지만 그 경험을 꾸준히 발전시켜나가 전쟁 말기에 연합군의 주축이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독일은 이 전투에서 입은 병력 손실을 메꾸지 못했다. 그렇잖아도 베르됭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해 큰 병력 손실을 입은 상황에서 솜 전투까지 더해지면서 확연히 약화되기 시작한 것.

물론 6마일의 땅을 얻으려고 지불한 대가는 결코 가벼운 게 아니었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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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일명 Going over the top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진이다. 기관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무인지대(No Man's Land)로 돌진을 시작하려는 영국 육군을 찍은 사진으로 솜 전투와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일 것이다.[12]
  • 당시 영국 육군은 Pals(팔스, 지역연대)라고 해서 한 부대에 같은 지역/구역의 사람들을 몰아서 배치하는 방식을 사용했다.[13] 예를 들면 맨체스터 출신들만 '맨체스터 팔스'로 명명한 연대로 묶는 식이다. 이는 과거 영국 육군의 경우, 지역 영주들이 자기 영지에서 직접 징병 혹은 모병해 연대를 꾸리고, 국왕이 소집령을 내릴 때마다 이들을 이끌고 참전했던 전통의 영향과 서로들 잘 아는 사이니까 전투력을 늘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및 징병 행정의 편의성 확보 차원 등에서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솜 전투에서 최악의 결과를 내 버렸다. 한 지역의 젊은 남자들이 한꺼번에 몰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런 '팔스'에 소속되어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어떤 젊은이는 전쟁이 끝나고 동네에 돌아와 보니 자기 또래의 남자가 모두 죽어 자신만 남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전장에서 처절하게 할 짓 못할 짓 다 해가며 어째어째 살아남아 고향으로 귀환했더니 어린시절부터 수백 명씩 알고 지내던 동네 친구들, 형, 동생, 심한 경우 삼촌, 아저씨들까지 전부 죽거나 상이군인이 되었고, 사지 멀쩡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지인 전우들이 수 백 단위로 계속 죽어나가는 걸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어떻게든 살아서 가족에게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정신줄을 붙들어멘 끝에 겨우 생환했더니, 주변 사람들은 자식이나 형제, 남편 잃은 분노에 생존자들을 겁쟁이라서 살아남았다고 매도했다.[14] 이쯤되면 멀쩡히 살아 견뎌낸 사람이 비정상인 지경이었다. 영연방 캐나다군 소속의 뉴펀들랜드 연대는 공격 개시 20분 만에 총원 780명 중 712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영국 정부는 뒤늦게 이 편제의 문제를 파악하고, 이후에는 가능하면 한 부대에 다른 지역 사람들이 고루 배치되도록 육군의 방침을 바꾸었다. 동네 주민들이 생환자들을 겁쟁이라 매도하는 분위기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민간인도 폭격 등으로 전쟁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면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 문제점은 영국 육군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독일 육군[15]과 유럽의 군제를 그대로 베낀 일본 육군[16]도 이랬다. 그나마 전국에서 몰려든 수병들을 각 부대마다 분산시킨 해군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17]
  • 작전 첫 날, 영국군 제18사단 55여단 소속인 이스트서리 연대 8(복무)대대[18]축구공 두 개를 차면서 진격했다. 이는 영국군 작전 계획과 장병들의 안일함을 얘기하기 위해 언급되는 일화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B중대장 윌프레드 네빌(Wilfred Nevill) 대위가 돌격하는 병사들의 공포감을 덜어주기 위해 낸 아이디어였다. 병사들에게 익숙한 축구와 함께라면 돌격의 공포를 조금이나마 덜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 네빌 대위는 작전 첫 날 전사했으나 이스트서리 연대는 첫날에 성공적인 결과를 내면서 네빌 대위의 아이디어가 옳았음을 보여주었다.
  • 당시 솜 전투를 비롯한 1차 대전 참호전의 참상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종류가 전해지는데, 그중에는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오지의 원주민과 선교사의 다음과 같은 얘기도 있다.
    원주민: "그렇게 많이 죽습니까?"

    선교사: "그렇습니다."

    원주민: "그러면 백인도 죽인 적의 시신을 먹나요?"

    선교사: (질겁을 하며) "아닙니다."

    원주민: "백인들은 참 이상하군요. 먹지도 않는다면서 사람을 왜 그렇게 많이 죽입니까?"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TV 드라마인 인디아나 존스에서도 나왔는데, 바로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나와 통역하던 에피소드였다. 거기에선 좀 다르게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부족끼리 전쟁을 치르며 여자와 아이들, 항복한 적을 죽이지 않는 법칙이 있고, 전쟁이 끝나면 서로가 죽은 사람에 대해 가축과 생필품으로 보상해야 하는 법칙이 있다고 말한다. 이들은 한번 전투에서 죽는 사람이 10명이 최대치인데, 바로 슈바이처가 이들과 이야기하다가 백인들이 전투를 벌이면 얼마나 죽냐? 하기에 가장 많이 죽는다고 답해야 했다. 한 번 전투에서 10만 명, 수십만 명이 죽는다는 말을 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들 부족민들은 그 말에 놀라면서 "10명씩이나 죽는다고요!? 백인들이 부자인가 봐요. 그만큼 배상해야잖아요?" 라고 말하는데 젊은 인디아나 존스에게 밤중에 이야기를 하던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저들은 10명은커녕 10만 명, 그러니까 당신 마을 수백여 개 사람들이 다 죽은 만큼 죽는다고 말해 줘도 도저히 안 믿을 겁니다. 어떻게 말해줘야 할까요? 저들은 "말도 안 돼! 그건 무슨 신이 벌을 내려 다 죽였다는 소리도 아니고? 사람이 그렇게 다 죽인다고?"라고 여길겁니다." 라는 말을 하는데 존스도 공감한다. 일명 '문명인'이 오히려 '미개인'보다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19] 덤으로 이들이 궁금해하던 "백인은 죽은 이들이나 유족들에게 보상은 합니까?"라는 말도 하는데 슈바이처도 존스도 사실, 그런 거 없다라는 말도 저들이 이해할까? 되레 이런 야만인들! 유족들은 어쩌라고? 되레 미개인이라고 우리 백인이 욕먹어도 반론 못 하겠다고 한다.
  • 이처럼 처참했던 1차 대전 뒤 예술가지식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충격은 우연이 아니었다. 1차 대전 뒤에 나타난 다다이즘 미술 사조와 허무주의적인 문학은, 전쟁을 거쳐 드러난 물질문명의 추악한 모습(기관총, 독가스)을 반영했다고 보면 충분하다.
  • 영국 육군에서 전투의 준비 및 초반을 기록영화로 촬영했고, 이것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도 했다. 홍보영상이라 당연히 전쟁의 참상이 아닌 깔끔하고 해맑게 웃는 육군 장병들만 나오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얼마 후 전쟁터에서 죽거나 불구가 되었으니 안타까울 따름.#
  • 2014년 8월 14일 영국 BBC3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기념 다큐드라마 <아워 월드 워>(Our World War), 2화로 솜 전투를 그린 "Pals"를 방영했다(상술했던 팔스와 관련한 드라마이다).#
  • 워낙 미쳐 돌아간 전투다 보니 영연방군에서 탈영했다가 잡힌 병사들도 많았고, 약식재판으로도 사형까지 가능한 당시의 군법 제도에 의거하여 상당수가 충성심도 필요하지만 전장에서 도망갈 수 없어야 병사들이 싸운다는 이유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대표적인 인물이 <아워 월드 워>에 등장한 맨체스터 팔스 소속 윌리엄 헌트 이병이며, 그를 포함해 전쟁 중에 사형당한 영연방군은 306명에 달했다. 다만 약식사형이 당연시되던 독일군, 프랑스군, 러시아군과 달리 영국군은 탈영병에 대해 약식재판으로 사형집행을 한 게 불법이었는지에 대해 유족들이 전후 소송을 걸었고, 결국 2006년 영국 정부는 이들에 대한 사형판결이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집행됐다고 규정하고 사과했다.

6.1. 유명 참전자들

  • 반지의 제왕》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도 영국군 장교로 이곳에 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새옹지마로, 이후 참호열(Trench Fever)에 걸려서 후방으로 후송되었다. 하지만 후송 직후 톨킨의 동창이자 친구들, 대대원들 그리고 자신의 부대를 지휘한 임시 부대장까지 전사했고, 이 때문에 한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20] 이 때의 경험으로 반지의 제왕 소설 내 지역인 죽음늪이 만들어졌다.
  • 아돌프 히틀러가 참여한 전투였다. 당시 직책은 전령으로, 전투 중 파편에 맞아 베를린 부근의 베일리츠 요양소로 후송되었다.
  • 안네 프랑크의 부친인 오토 프랑크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
  • 영국의 유명한 작곡가 레이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는 42세의 상당한 나이였음에도 전쟁 발발 후 영국군 의무대에 자원하여 솜 전투에 참전했고 전쟁 중에 기관총 소음에 너무 노출된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게 되었다. 그의 동료 작곡가 조지 버터워스도 같이 참전하였다가 전사했다.
  • 최초의 스위퍼 키퍼로 알려진 리 리치몬드 루스는 은퇴후 영국군에 입대해서 갈리폴리 전투등 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하지만 솜 전투때 전사했다.
  • 후일 영국 수상을 지내는 해럴드 맥밀런도 척탄근위대 장교로 참전했다가 2번째 부상을 입었다. 참고로 첫번째 부상은 1915년 루 전투에서였다.
  • 영국의 시인 시그프리드 사순도 왕립 웨일즈 퓨질리어 1대대 장교로 참전했다.
  • 아서 코난 도일의 큰아들 아서 앨런 킹슬리 도일도 이때 참전했다 부상을 입고 폐렴으로 목숨을 잃었다. 코난 도일이 말년에 심령술에 빠진 것은 이 영향이라는 설도 있다.
  • 최후의 솜전투 베테랑으로 알려진 인물은 알버트 마셜(Albert Marshall, 1897-2005)인데, 나이가 되지 않았음에도 억지로 참전했으나 전쟁에서 입은 쇼크 때문에 80세가 되기 이전까진 전쟁 경험에 대해서 함구하다가 1990년대 이후에야 각종 행사에 참석했다. 2005년 5월 16일에 10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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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헨리 롤린슨 (Lord Henry Rawlinson)은 영국 육군 대장이자 영국 남작으로, 영국 원정군 제4군 사령관으로서 솜 전투아미앵 전투, 힌덴부르크 선 돌파와 같은 굴직한 전투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시아에서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영국령 인도군을 지휘하기도 하였다.[2] 휴버트 고프 (Sir Hubert Gough)은 영국 육군 대장이자 영국 원정군 제5군 사령관으로, 솜 전투를 비롯한 파스샹달 전투루덴도르프 공세에도 참전하였다.[3] 마리 에밀 파욜(Marie Émile Fayolle)은 프랑스 육군 원수이자 협상국 작전 사령부였던 최고전쟁위원회(Supreme War Council)의 회원이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군 제1, 4, 6프랑스 예비집단군를 지휘하였었다.[4] 프랑스 육군 소장[5] 비텔스바흐 가문 당주로 반나치 성향 때문에 1939년이탈리아로 망명했다. 헝가리에 있던 가족1944년에 나치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연합군의 진군 이후 풀려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은 자코바이트 기준에서 보면 영국의 국왕이 될 수 있다. 윌리엄 1세후손이고, 찰스 1세의 딸인 헨리에타의 후손이기 때문. 정작 본인은 전후 독일에 군주제가 복구되면 독일의 군주가 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1955년에 사망했다.[6] 참고로 1차 인도차이나 전쟁부터 베트남전 종전까지 장장 20년간(1955~1975년) 확인된 미군 전사자 수가 약 5만 8천이다.[7] 영국군에서 무려 1,500문의 대포가 동원되었다.[8] 격렬한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무거운 건설자재들을 나르던 공병부대들도 진격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복구는커녕 건설자재들과 함께 떼죽음 당했다. 이는 모두 그 형편없는 수준의 포격으로도 독일군이 전멸했을 거라 판단한 무능한 지도부의 오판으로 인한 것이었다.[9] 참호 깊이가 그렇게 깊다면 방어사격은 어떻게 할까도 싶은데, 일반적인 참호는 사격 시 발을 디뎌 서기 위한 발판이 있었기 때문에 참호 깊이가 수미터에 달해도 사격엔 전혀 지장이 없었다.[10] 적은 폭약과 대량의 파편을 탑재한 포탄. 개활지의 보병을 공격할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참호나 시설물에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11] 다만 작전 방식은 좀 바꿔서 피해를 줄이긴 했다.[12]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13] 이렇게 병력을 출신 지역별로 편제하는 것은 당시 세계 각국에서 많았다. 다만 프랑스 같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오래 유지한 국가는 병력을 적당히 섞어도 별 문제가 없었지만 영국의 경우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등 4개국이 지역색도 다르고, 서로 전쟁을 하며 지역감정도 많아서 지역별 편제가 부득이했던 건데...[14] 이들이 이런 이유는 가족을 잃은 분노도 있지만, 영국 본토가 주전장이 아니었던 탓에 전쟁의 끔찍함에 대한 체감이 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매도는 2차 대전 당시 영국 본토가 독일의 폭격에 노출되어 민간인들이 전쟁의 참상을 실감하게 되고 나서야 사그라들기 시작한다.[15]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도 나왔듯이 신병들을 같은 지역끼리 묶어서 전선으로 보냈다.[16] 근위사단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단의 병력들은 각 사단의 사령부가 위치한 지역에서 징집한 신병으로 충원했다. 예를 들면 2사단은 사단 본부가 센다이에 위치했었고 징병도 도호쿠 지방의 장병들로 충원했다. 뉴기니에서 전멸한 20사단의 경우 조선의 경성 주둔 사단으로 사단의 10%가 조선인 병사들이었다.[17] 반면 미국은 선전용으로 가족을 배 하나에 몰아서 배치했다가 설리번 5형제의 일을 겪고, 제2차 세계 대전을 마지막으로 폐기했다.[18] (복무)는 이 대대가 개전 이후 허버트 키치너가 대규모로 모집한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라는 뜻이다.[19] 다만 이 부분을 더 진지하게 고찰해보면 "선량한 미개인"의 오류에 빠진 이야기이다. 원시부족을 연구한 결과로는 인구 숫자가 적어서 그렇지 인구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현대인보다 더 잔인한 전쟁을 한다고... 현대인과 원시부족은 "다른 방식의 전쟁"을 할 뿐이다. 위에서 전사자수가 10명인 예시에서, 부족 전체 인구가 1,000명이라면 한 번의 전투에서 1%의 사망자를 낸 것이다(!). 1차 대전에서 극심한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가 인구 3,960만 명에 사망자 136만 명으로 4년간 3.4%가 사망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20] 톨킨은 입대하기 전 4명으로 이루어진 독서 클럽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소속된 친구들이 모두 전사하고 자기만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