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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블랑 터널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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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cendie du tunnel du Mont-Blanc[프랑스어]
L'incendio del Traforo del Monte Bianco[이탈리아어]
Mont Blanc Tunnel fire
파일:attachment/몽블랑 터널 화재/fire.jpg
파일:mont-blanc-safety.jpg
발생일 1999년 3월 24일
사고일로부터 [dday(1999-03-24)]일
발생 국가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발생 위치 알프스 산맥 몽블랑 산 인근 몽블랑 터널
유형 차량 화재터널 화재
원인 트럭 공기흡입구로 들어간 담배꽁초의 불씨 확산
인명피해 사망 39명[3]
부상 중상 14명, 경상 추산 불가[4]
재산 피해 트럭 7대, 승용차 40대 이상 전소, 소방차 3대 손상
터널 복구 및 재개장 비용 약 4억 1천만 달러

1. 개요2. 상세
2.1. 몽블랑 터널
3. 사건 전개
3.1. 3번이나 무시된 경고3.2. 연쇄작용과 혼란의 가중3.3. 손해만 늘어난 구조 작전3.4. 53시간이 만들어낸 비극
4. 대중매체에서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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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9년 3월 24일, 프랑스이탈리아의 국경 부근에 위치한 몽블랑 산을 관통하는 몽블랑 지하 터널에서 발생한 터널 화재 사고. 충분히 경미한 사건 정도로만 남을 수 있었던 트럭의 화재가 통제소와 운전기사의 안전불감증과 부실대응, 부실한 안전시설과 구조대의 진입 불가 등 치명적인 요소들이 맞물려 사상 최악의 터널 화재 사고 사례들 중 하나로 남게되었다. 현재까지도 유럽의 소방관들이나 구조대원들의 안전교육에서 터널 화재의 위험성을 알려주는 대표적 사례로 짚고 넘어간다고 전해진다.

2. 상세

2.1. 몽블랑 터널

파일:external/www.lovecourmayeur.com/mont-blanc-tunnel-map.jpg
Le tunnel du Mont-Blanc
Il traforo del Monte Bianco
Mont Blanc Tunnel

파일:tunne_du_montblanc.jpg

프랑스샤모니이탈리아의 코우르마이에르를 잇는 길이 11.6km의 터널로, 프랑스 출신의 G.드레피네가 1870년 제안한 뒤,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공사가 늦어져 1958년이 되어서야 착공되었다.
파일:mont-blanc-const.jpg
몽블랑 터널의 공사 현장
파일:cdg-srgMontblanc2.jpg
개통 당일 리본커팅식을 진행하는 사라가트 대통령(가장 왼쪽)과 드골 대통령(왼쪽에서 두번째)
양쪽에서 파내기 시작해 1962년 드디어 서로 뚫은 터널이 만나는 데 성공했고, 계속해서 공사를 이어나가 1965년 7월 19일 개통되었다. 개통식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샤를 드골이탈리아 대통령이었던 주세페 사라가트도 방문했으며, 두 대통령이 동승한 의전차량은 몽블랑 터널을 통과한 첫 자동차가 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연결하며 터널 덕에 이동 거리가 200km 정도 단축되어 유럽의 새 동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알프스 계곡과 오스타 계곡을 직접 연결하며, 샤모니몽블랑에서 북으로 제네바를 거쳐 리옹에서 프랑스 각지로 통하는 길과 쿠르마이외에서 남으로 토리노, 밀라노, 로마로 통하는 길이 1년 내내 연결되어 정치적, 경제적인 영향이 굉장히 큰 터널이다.

이 터널은 이러한 유명세와 중요도만큼 안전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해서 18개의 화재 대피소와 총 77개의 비상 전화가 일정 간격마다 존재했고, 이탈리아 쪽에는 의용소방대가, 프랑스 쪽에는 터널 화재 전문교육을 받은 전담 터널소방대가 존재해 약 34년 동안이나 깨지지 않던 무사고 기록을 자랑했었는데...[5]

3. 사건 전개

사상 최악의 참사의 재현영상[6]

3.1. 3번이나 무시된 경고

1999년 3월 24일 오전 10시 46분, 벨기에 출신의 트럭 운전기사 길버트 디그레이브(Gilbert Degrave)가 운전하는 볼보 FH12 트랙터트레일러마가린 9톤과 밀가루 포대 12톤을 싣고 밀라노의 과자 공장으로 향하기 위해 터널로 진입했다. 터널 안에서 길버트 앞의 운전자가 담배를 다 피고 꽁초를 창밖으로 던졌는데, 꽁초가 하필 바람을 타고 길버트가 운전하는 트럭의 공기흡입구에 들어갔다.[7] 공기 흡입구 내에서 산소 공급을 받으면서 불씨가 재발화한 담배꽁초는 이내 하얀색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고, 연기가 심해지자 반대쪽 차선에서 달리던 운전자들이 경적과 비상등으로 경고했지만, 길버트는 자신의 차량에서 나오는 연기가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다고 판단해 마주오는 차량들의 경고를 무시한 채 운전을 계속했다.[8]

10시 50분, 연무가 점차 퍼져나가 가시거리 감지 센서 9개의 가시거리 수치가 30% 이상 하락하자 제어 컴퓨터가 이탈리아와 프랑스 두 곳의 관제소에 경고를 보냈지만, 이탈리아 쪽 관제소는 과거에 잘못된 경고를 자주 받아서 경고를 무시하도록 설정을 바꿔둔 상태였고,[9] 프랑스 측에서는 CCTV를 확인했으나 딱히 연기가 심각해 보이는 수준은 아니었기에 늘 그렇듯 발생한 시스템 오류라 생각하고 사고 발생의 가능성을 인지는 했으나, 별다른 대응을 하지는 않았다.

52분, 길버트는 연기가 더 심해지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이 심각해졌음을 깨닫고, 비상등을 점멸한 채 프랑스 쪽 터널 입구로부터 6km 가량 떨어진 지점에 트럭을 멈춰세웠다. 그런데 몽블랑 터널은 갓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아치형 왕복 2차선 구조였기에 길버트가 차를 세우자 프랑스 쪽 입구로부터 뒤따라 들어오던 10대의 승용차와 18대의 트럭들이 그대로 정체된다. 트럭에서 내린 길버트는 소화기를 꺼내 진화를 시도했으나 불이 이미 너무 커진 뒤라 실패했고, 불이 붙은 연료가 바닥으로 흘러내려 타이어와 연료통까지 옮겨 붙으면서 결국 트럭이 폭발했다. 길버트는 폭발에 놀라 진화를 포기하고 이탈리아 쪽 입구로 도주했다.

3.2. 연쇄작용과 혼란의 가중

54분, 트럭의 화재를 목격한 운전자들 중 한 명이 22번 대피소에 설치된 비상전화로 관제소에 전화를 걸어 터널 내부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문제는 불이 너무 강해 양쪽 통제소에서 정확히 어디서 불이 난 건지 CCTV로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하필 냉장 트레일러의 보냉재(폴리우레탄)가 연기를 심하게 내며 타는 재질이기도 했고, 그 안에 실려있던 마가린과 밀가루는 딱 기름과 장작 조합[10]이었기 때문에 연기를 엄청나게 뿜어대며 CCTV 카메라를 전부 가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처음 불이 났던 길버트의 트럭 뒤에 세워진 트럭들에는 스티로폼 포장지를 비롯해 불이 잘 붙고 유독성 가스를 잘 뿜는 물건들이 잔뜩 실려 있어 연기가 더더욱 심해졌다.

불이 더 커지면서 연기가 터널 내부를 꽉 채우기 시작했고[11], 차량들은 터널을 최대한 빠르게 대피하고자 사투를 벌였다. 이탈리아 쪽 차량들은 빠르게 트럭을 지나쳤고, 정체된 프랑스 쪽 차량들은 후진이나 유턴을 통해 대피하기 시작했다. 2차선에서 방향을 돌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트럭들은 그대로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터널을 꽉 채운 연기 때문에 가시거리는 매우 짧아진 상태였고, 이미 정체된 차들로 꽉 막혀버린 뒷쪽 역시 상황이 영 좋지 않았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재가 터널 내 산소를 모두 연소시켜버리면서 차량들의 시동을 꺼뜨려버렸다. 그렇게 유턴을 시도하려다 멈춘 차들과 버려진 트럭들은 이내 도로를 완전히 봉쇄시켜버렸다.# 사실상 불난 터널에 바리케이드를 쌓아버린 격.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결국 차량을 버리고 피난소로 대피하거나 창문과 통풍구를 모두 닫은 채 구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총체적 난국이 펼쳐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양쪽 입구의 톨게이트들은 즉시 차단되었고, 이탈리아 관제소에서 대피 차량들의 엔진이 산소부족으로 정지되는 걸 막고자 외부공기 공급 시스템을 가동했으나 밀폐된 공간에 산소를 불어넣는 꼴이 되면서 불길만 더 키우는 역효과를 낳았다.

3.3. 손해만 늘어난 구조 작전

10시 57분경, 프랑스 샤모니 소방대에서 두 대의 소방차가 첫 대응에 나섰다. 이들은 소방차를 몰고 화재 현장으로부터 2km 떨어진 지점까지 가는 데는 성공했으나 너무 짙은 연기와 길을 막은 자동차들 때문에 진입에 어려움을 겪어 일단 후퇴하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까지 오니 엔진이 산소부족으로 죽어버려서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 결국 소방대는 화재 현장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근처 기계실로 대피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기계실에서 약 5시간을 갇혀있다가 이후 극적으로 구출된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소방대가 작전에 나섰다. 이탈리아 쪽은 연기가 별로 안 퍼져서[12] 화재 지점 10m까지 접근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이들 역시 산소 부족과 유독성 연기 흡입으로 인해 소방차가 고장나버렸고, 현장에서는 차량들의 타이어연쇄폭발하기 시작하면서 소방대는 다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후퇴하면서 이탈리아 쪽 생존자들을 구조했는데, 그 중에는 사고의 발단이 된 트럭의 운전기사 길버트 디그레이브도 있었다.

11시 11분경, 이탈리아 소방대장 디오니지 글레리(Dionigi Glarey)와 그의 동료 5명으로 구성된 구조대가 투입됐다. 그러나 짙고 두꺼운 연기에 시야 확보를 실패한 그들은 일단 24번 피난소로 대피했으나, 이탈리아 소방 본부에서 먼저 나섰던 선봉대 대원들이 실종된 것 같다는 내용을 전달했고, 이들을 수색해달라는 요청에 구조대는 피난소를 다시 나와 길을 잃지 않도록 벽을 짚어가며 소방대원의 수색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다음 피난소에 도달하도록 수색 작업은 허탕이었고, 상황이 악화되어 다시 24번 대피소로 복귀했을 때에는 이미 피난소는 한계에 다다라 산소 공급 장치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을 구출하고자 투입된 구조대였던 그들은 한순간에 구조 대상이 되어버렸고, 소방 본부는 터널의 지하에 건설되어 있는 환풍 통로를 통해 그들을 포함한 모든 소방대원들을 철수시켜야만 했다.

한편 이탈리아 관할구역의 경비원 피에루치오 티나치는 자신의 BMW K75 오토바이를 타고 산소 호흡기와 산소캔을 멘 채 터널 내를 5번 왕복하면서 10명을 구조한 뒤 사망했다고 알려졌었으나... 사실은 피에루치오 티나치에 관한 영웅담이 실린 지역뉴스를 최초로 프랑스 외부 미디어로 인용한 기자 Mark Gardiner의 인용기사가 다시 확대 재생산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영웅을 만들어낸 오보였음이 밝혀졌다.

실제로 화재 당시 피에루치오가 구조한 인명은 단 1명으로, 화재현장 인근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던 프랑스 트럭기사 Maurice Lebras를 터널 내 20번 방화구로 이끌고 들어가 함께 몸을 숨긴 뒤 이를 인터폰을 통해 관제센터에 보고하였으나, 무려 50시간 이상 지속되었던 엄청난 화염 앞에 고작 4시간을 버티도록 설계된 방화구에 있던 이들을 구조할 수 없었다.[13] 결론적으로 그가 Maurice Lebras를 구조한 것은 맞고 이는 또한 영웅적인 행동이나, 이러한 노력이 어쩌다보니 지역 신문과 화재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영웅 만들기에 급급했던 관할 경찰에 의해 10명 이상 구조했다고 과장되었던 것이었다.

구조 작업이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앞으로 터널 내부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소방대 측 피해만 점점 커지자, 프랑스와 이탈리아 소방대는 터널 바깥쪽 생존자들의 구출과 불씨의 확산을 방지할 뿐 화재 발생지 주변에는 얼씬도 채 하지 못했다. 결국 화재는 자연소화 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으며, 불씨가 완전히 진압되기까지 무려 53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처참했던 내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3.4. 53시간이 만들어낸 비극

불은 상술했듯 무려 53 시간이나 타올랐고, 화재 발생지(길버트의 트럭) 주변의 온도는 최대 섭씨 1,000도(화씨 1,832도)에 달했다. 화력이 너무 강해서 콘크리트가 녹아 터널 내의 암반이 드러날 정도였고, 트럭과 승용차들의 알루미늄 차체 골격은 열변형에 의해 심하게 뒤틀렸으며, 트레일러들의 뼈대는 완전히 녹아내려 그 형태를 제대로 알아보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14] 터널 내 공기 여과 장치의 부실, 통제소 측의 판단 오류로 인한 화재 연소의 심화, 연소한 물건들의 유독성, 그리고 산소 부족으로 인한 소방차들의 엔진 정지와 짙은 연기로 인한 구조 작전 실패 등이 사고의 피해를 키웠다.

사망자는 무려 39명이나 발생했는데, 그 중 30명은 자신의 차량 안에서 애타게 구조를 기다렸던 사람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도 8명이 차량 밖 터널 도로 위에서 질식사 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들의 시신은 모두 이미 53시간 동안의 화염 속에서 유골이 되었거나[15], 더욱 심하게 훼손되어 뼛가루 상태까지 일부 진행된 채 발견된 사람들도 있었다.[16] 하필 화재 현장에는 가연성 소재와 독성 물질, 발암 물질 등이 많이 있어 유독 가스를 만들어낸 것도 인명피해를 극대화시켰다. 불이 진압된 이후 이들을 수색하던 소방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이들을 구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으로 많은 소방관들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피난소로 대피한 사람들 역시 피해를 입었는데, 피난소가 오랜 시간을 버티도록 설계되지 않은데 비해 불이 너무 오랜 시간동안 타올랐고, 산소 공급 장치로 유독 가스가 유입되는 바람에 피난소로 대피했던 사람들 또한 상당수 화상, 뇌손상, 호흡기관 손상 등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원래 터널 피난소는 최대 2시간 가량의 열기와 연기를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무려 53시간 동안이나 지속된 불 속에서는 그저 인간 오븐일 뿐이었다.

화재 진압에 투입되었던 15명의 소방관들은 전원 구출되었으나, 모두 호흡기관에 심한 손상을 입은 상태였고, 한 명이 끝내 병원에서 투병 중 사망했다.

비극의 원인이 된 트럭의 운전자였던 길버트 데그라브는 4개월 면허정지 처분을 받았고, [17] 그가 몰았던 볼보 FH 트럭 또한 안전에 대한 이미지가 급격히 추락하면서 볼보 회사 측에서 고소까지 당할 뻔 했으나, 이후 트럭의 설계가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음이 밝혀지면서 겨우 브랜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샤모니시 시장 미겔 샤를레데는 직무정지 6개월에 벌금 1만 5천 유로 처분을 받았고, 프랑스 쪽 관리공단 사장 레이 차튼은 2년형을 받고 역시 벌금 1만 5천 유로를 내야 했으며, 터널 안전 담당자 제랄드 론 클리는 6개월간 수감되고 2년 직무정지 처분을 받아야 했다.

이 사고 이후 몽블랑 터널은 3년간 폐쇄되었다가, 2002년 5월 9일, 약 4억 1천만 달러 가량의 수리비와 복구 비용을 들여 다시 개통했다. 사고 이후 터널을 지나가는 모든 트럭은 적외선 온도 감지 시스템을 지나야 하고, 엔진 과열 같은 화재의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경보를 울리고 터널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절차가 변경되었고, 혼선을 빚었던 관제소는 양쪽 국가에 하나씩 두지 않고 중앙 한 곳으로 통일해 공동운영을 하도록 변경되었다. 터널 내부에는 100m 간격으로 비상전화 추가 설치, CCTV를 120여대로 증설, 비상 대피소 총 37곳에는 화상통화장비를 설치하고 방화복과 마스크를 구비했으며, 36대의 환기팬이 설치되어 연기를 쉽게 뺄 수 있도록 했고, 대피소 지하에 환풍구에는 피난계단을 설치해 화재가 발생하면 공기 공급을 중단하고 구조용 통로로 사용하도록 바꾸는 등 안전 측면에서 거의 모든 것을 갈아엎었다.

한편 소방차의 진입에 큰 문제를 겪었던 소방대는 이 사고를 계기로 터널의 화재 사고만을 전담하는 터널소방대의 기지를 터널 내부에 배치했다. 또한 소방대의 구조차량으로 Janus 4000이라는 특수 차량[18]을 적극 도입, 그리고 터널의 밑에 물탱크와 수송관을 길게 설치해서 소방대가 언제나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도록 했다.

이 사고로 인해 한 때 LPG 자동차의 통행이 금지된 적도 있었다. 최근에는 차량 앞에 LPG 차량임을 표시하고 사전 신고하는 조건 하에서 허가하도록 지침이 변경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 오스트리아 카프룬 터널 화재 - 몽블랑 터널 사고와 함께 사상 최악의 터널 화재 사고의 대표적 사례. 다만 사망자 수는 이쪽이 더 많았다.
  • 런던 킹스 크로스 역 화재사건 - 담뱃불을 붙였던 성냥이 나무로 제작된 에스컬레이터에 옮겨붙어 대형화재로 이어진 사고. 화재의 원인이 담뱃불과 관련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 고타드 터널 화재 - 몽블랑 터널 화재 2년 뒤 일어난 비슷한 참사.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3] 민간인 38명, 소방관 1명[4] 집계된 중상 14명은 모두 구조작전에 투입되었던 소방관들로, 심각한 호흡기관 손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5] 다만 터널의 운영 담당업체에 따르면 이 사고 이전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은 존재해왔는데, 터널의 첫 운행 시작부터 약 34년간 총 16번의 트럭 화재가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번 모두 운전자가 조기진압을 할 수 있었기에 사고로는 이어지지 않았고, 덕분에 인명피해 역시 없어 사고 기록이 남지 않으면서 무사고라는 기록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6] 다만 위 영상의 썸네일은 몽블랑 터널 화재가 아닌 고타드 터널 화재의 사진이다.[7] 믿기 어렵겠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위기탈출 넘버원에서 트럭(훨씬 작은 봉고트럭으로 실험하긴 했다.)앞에서 담배꽁초를 계속해서 버리는 실험을 했는데 트럭 창문이 열려있다면 바람을 타고 창문 안으로 들어오거나 짐칸에 떨어지는게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8]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는 사이드 미러를 통해 하얀색 연기가 나오는 것을 봤지만 많은 양은 아니라서 정상적으로 주행했다고 밝혔다.[9] 오작동이 잦다고 센서를 꺼버리거나 무시하는 것은 현장에서 가장 흔하게 행해지는 잘못이다. 심지어 휴전선 인근 부대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나 산짐승에 움직임 감지 센서가 수시로 동작하자 민감도를 크게 낮추거나 아예 소리를 꺼버리는 경우가 존재한다.[10] 마가린은 애초에 주성분이 식물성 기름이고, 밀가루분진폭발을 일으키는 대표적 물질들 중 하나이다.[11] 53분부터 57분 사이 연기는 이미 프랑스 방향으로 반 km나 퍼진 상태였다.[12] 당시 기후의 영향도 있었고, 이탈리아 쪽에서 불어넣은 외부 공기 때문에 연무가 주로 프랑스 방향으로 퍼져나갔다.[13] 당시 소방대는 생존자 구출은 커녕 자신들의 소방대원들마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들을 우선적으로 구출하는데 급급했다.[14] 알루미늄 금속의 융점(녹는점)은 약 660.3도 정도이고, 콘크리트는 혼합 성분에 따라 약 305~770도 이상이다.[15] 인간의 유해에서 유골을 제외한 모든 신체 부위가 녹는 데에는 약 900~1000도 가량의 온도가 필요하다. 화장을 할 때 사용하는 화장장 또한 약 900~1000도 씨의 온도를 사용한다.[16] 다만 한 명은 구조 작전에 투입된 소방관으로, 그는 터널에서 구조됐으나 이후 병원에서 투병 중 사망하였다.[17] 불씨를 제공한 길버트 앞의 흡연자 또한 신원을 알아냈다면 책임을 물었을텐데 찾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에는 담배 꽁초가 화재의 원인이었는지에 대한 증거가 미약했다. 물론 길버트 또한 첫 연기를 목격했을 때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시한 안일함으로 인해 사고가 커졌으므로 그에게도 죄가 없지는 않다.[18] 터널 같은 곳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차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빼기 쉽도록, 엔진과 운전석이 앞뒤 양쪽으로 달린 전후동력형 구조를 갖춘 것이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