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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발레세 케이블카 추락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1976년의 사고3. 1998년의 사고4. 개요
4.1. 사고 과정4.2. 사고 여파4.3. 사고 조사 과정4.4. 군법 회의, 그리고 결과

1. 개요

이탈리아 카발레세에서 일어난 케이블카 추락사고에 대한 문서로 1976년, 1998년에 각각 일어난 두 사고를 다룬다.

2. 1976년의 사고

파일:카발레세 케이블카 1.jpg

Il disastro della funivia di Cavalese (1976) o Disastro del Cermis

1976년 5월 2일 이탈리아 트렌토에서 북동쪽으로 4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스키 리조트의 케이블카가 출발했다. 해당 케이블카는 Flack-Acciaierie e Ferriere Lobmarde라는 회사에서 만든 케이블카로 와이어 2대가 위아래로 평행한 상태에서 위는 케이블카 고정용, 아래는 직접 움직이며 케이블카를 움직이는 구조였다. 때문에 두 와이어가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해야 했는데 두 와이어가 겹칠 경우 아래 와이어가 계속 움직이면서 위의 와이어를 줄톱으로 뭔가 잘라내는 것마냥 잘라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했다. 하지만 긴급 정지를 하거나 과적이 있을 때 마다 종종 와이어가 겹치는 일이 있었다.

휴가철이라 사람이 많이 대기 중이었고 케이블카 오퍼레이터 카를로 슈바이처(Carlo Schweizer)는 대기 중이던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케이블카에 최대한 사람을 태웠다. 마침 애들도 많고 해서 무게 제한에 덜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지, 최대 인원이 성인 40명인 케이블카에 44명이 탑승하게 됐다. 카를로는 정식 직원이 아니고 계절 근로자라 케이블카 운영 구조를 잘 몰랐고 아예 면허도 없었다.

사람이 가득 찬 케이블카는 초속 10m의 속도로 빠르게 올라갔다. 정상적인 속도가 아니었다. 때문에 가다 멈추는 일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아래 와이어와 위의 와이어가 겹쳤다. 옆의 내려가던 케이블카 쪽 오퍼레이터 기오르기오 디마티오(Giorgio Demattio)는 와이어가 겹치면서 불똥이 튀는 걸 보고 놀라 카를로에게 연락을 취하려 했으나 연락이 되질 않았다. 결국 와이어가 끊어졌고 케이블카는 69미터 아래 산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케이블이 끊어진 거지 케이블카 자체는 끊어진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었고 케이블이 계속 움직이면서 약 200m를 질질 끌고 갔다. 많은 사람들은 추락 당시 사망했고 간신히 살았으나 시체들에 깔려 질식사한 사람도 있었다.

실종자 1명(이후 사체를 찾아 사망 처리)을 포함해 4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역대 케이블카 사고 중 가장 많은 사망자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카프룬 터널 화재도 엄밀히 볼 경우 꼭대기에서 케이블로 끌어올리는 케이블카의 일종이라서 이쪽이 더 많다. 생존자는 알레산드라 피오베사나(Alessamdra Piovesana)라는 14세의 소녀뿐이었는데 이 소녀는 케이블카가 기운 곳의 반대쪽 끝에 서 있어서 가장 마지막으로 추락했고 먼저 깔린 사람들 위로 추락하면서 충격 방지가 되었다고 한다. 증언에 따르면 추락 직후에는 몇몇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고.

원인은 과적이었다. 케이블카는 성인 40명(약 3,200kg)만을 태울 수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이 탑승자 중 어린이들이 많아서 탑승제한이 무시됐으며 해당 케이블카는 와이어 두 가닥이 위 아래로 평행하는 구조였는데 위는 고정용이고 아래 케이블만 움직이면서 케이블카를 움직이는 구조였다. 때문에 두 가닥이 겹치면 아래 케이블이 계속 움직이면서 사실상 줄톱이 되어 위의 선을 자를 수 있어서 조심했어야 했는데 케이블이 겹치면서 윗쪽 케이블을 잘라내 추락했다.

이후 관련자 중 4명이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다. 이 중 카를로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9개월만에 풀려났다.

3. 1998년의 사고

4. 개요

사고 사진 1 (열람시 피해자의 혈흔이 그대로 보이니 주의) [ 펼치기 • 접기 ]
파일:카발레세 케이블카 2.jpg

L'incidente della funivia del Cermis, strage del Cermis (이탈리아어)
Cavalese cable car disaster (영어)

4.1. 사고 과정



1998년 2월 3일 미 해병대의 애쉬비 대위는 조종사 진급 뒤 마지막 임무인 전파방해 장비 작동시 저공비행으로 피하는 연습을 치르기 위해 오후 1시에 항법사 조셉 슈와이처, 레이너 대위, 시그레이브스 대위와 함께 EA-6B 프라울러에 탑승했다. 항법사 조셉이 길을 정한 뒤 조종사인 애쉬비 대위에게 길을 알렸고 오후 2시 35분, 콜사인 Easy01 프라울러가 이륙했다.

2시 52분, Easy01 프라울러 기는 고도 350미터 이하 비행금지 명령을 받았지만 하강 중 레이더 고도계에 이상이 생겨 최저고도 이하로 내려가면 울려야 할 경고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문제는 노후 기체였던 만큼 자주 있었던 문제였고 고도계를 재부팅시키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3시 13분, 항법사가 위치(대략 46.283733°N 11.467237°E)를 확인하던 중 눈 앞에 나타난 6센티미터 굵기의 와이어를 발견했다. 와이어를 피하려 애썼지만 이미 늦었고, 결국 오른쪽 날개가 와이어와 시속 800킬로미터를 넘는 속도로 부딪치며 4분의 1 가량이 찢어지고[1] 와이어가 끊어졌다. 와이어가 끊어지는 소리는 계곡에 크게 울렸고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해서 밖에 나왔다가 지나치게 낮게 나는 비행기에 연기가 나는 것을 목격하고 소방서에 신고했다. 비행기는 비상탈출하기 위해 다시 상승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소방관들은 비행기 추락에 대비해 불을 끌 준비를 한 상태였으나 더 끔찍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비행기가 자른 와이어는 케이블카의 와이어였고 와이어가 잘리면서 케이블카가 80m 아래의 계곡으로 추락해 내부에 있었던 탑승객 20명이 전원 사망했다.[2] 추락의 충격으로 인해 케이블카는 납작해졌고 눈밭에는 케이블카의 잔해와 시신 조각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소방관들은 케이블카 속에서 그나마 형체가 남아 있는 시체를 꺼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유압조절장치가 고장난 상태에서 관제탑과 교신에 성공해 연료가 새는 상황에서 기지의 5번 활주로에 비상착륙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앞에 앉았던 애쉬비 대위와 조셉 항법사는 바로 내리지 않는 어딘가 의심될 만한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비상 착륙시에는 언제 화재가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내리도록 교육받는다. 이후 지휘관은 이 4명에게 비행기가 케이블카 와이어를 끊는 바람에 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말한다. 이후 시체가 수습되면서 사망자는 더 늘어나 독일인 8명, 벨기에인 5명, 이탈리아인 3명, 폴란드인 2명, 오스트리아인 1명, 네덜란드인 1명, 총 20명의 사망자의 시체가 수습됐다. 19명은 관광객이었고 1명은 케이블카 운전기사였다.

4.2. 사고 여파

6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미군의 실수로 사망한 가운데 사건에 전세계적으로 관심이 쏠렸다. 이후 군 당국이 손상된 항공기부터 먼저 조사하려다가 분노한 지역사회에서 반미 시위가 벌어져 길거리에 주차되어 있었던 차까지 불타는 등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언론에서는 미국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거나 미국이 자료를 조작해 보고하려 한다는 설까지 나오는 등 적대적인 기사를 내보내면서 사태가 심각해졌다.

4.3. 사고 조사 과정


이후 유럽 주재 미 최고 사령관이 조사권을 NCIS(해군 범죄 수사대, Naval Crime Investigation Service)가 아닌 해병대의 마이크 더롱 장군에게 넘기면서 의혹은 더 커졌다. 결국 해병대 지시하에 NCIS가 조사하고 해병대가 보고서를 작성하는 식으로 결정됐다. 당시에는 증거를 수집하는 전문 조사관이 없어 해병대의 지시 하에 조사를 했다.

맨 먼저 레이더 고도계에 이상이 있어서 사고가 발생한 것인지 조사했으나 레이더 고도계는 문제가 없었다. 이후 항공기 내부에서 카메라 촬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비행한 곳이 워낙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장소여서 가지고 탑승했지만 4명은 촬영을 부인했다. 항공기 내에서 비디오 테이프 비닐이 발견된 후에도 부인은 계속됐다. 이후 조사결과 비행기는 최저고도와 최고속도를 어긴 것으로 드러났다. 사건 당시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비행기가 지나치게 낮게 날았다고 증언했다. 해병대가 조사 보고서를 작성하면 형사고발이 이뤄질 상황이었다.

토머스 대령은 내부조사에 착수해 해병대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지만 사건은 이미 국제 외교 문제로 악화됐고 백악관에서는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탈리아 총리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이탈리아 총리가 미군이 이탈리아 내에 있는 모든 병력을 철수시키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영원히 주둔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등 사태가 심각해져 미국의 유럽에서 군사적 지위가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지휘관은 조사 중지 명령을 내렸고 수집한 정보를 언론과 정부에 공개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벗으려고 애썼다. 보고서엔 NCIS와 해병대의 정보만 적혔고 토머스 대령은 NCIS의 증거를 확인한 뒤 군의 조사 관행에 따라 추가적으로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승무원들의 비행 기록을 조사했는데 애쉬비 대위는 당시 F-18 프로그램에 선발될 정도로 평판이 좋았으나 예산 축소로 인해 승무원들의 비행 시간이 줄어들어 6개월간 계곡 비행을 못 한 상태였다. 대령은 단순한 실수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비행계획, 특히 지도에 주목했는데 그 지도에는 케이블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같은 축척의 이탈리아 지도에는 표시되어 었었는데 국가영상지도국은 케이블에 대한 정보가 우연히 삭제됐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승무원들은 얼마 전 변경된 최저고도 규정에 대해 몰랐고 4명 중 이를 알고 있었던 건 단 1명 뿐이었다.

NCIS의 근무태만, 해병대의 훈련 부족, 지도 오류, 정보 전달 문제에 대한 지적이 모두 보고서에 올라갔다. 이후 비난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보고서 내용을 완화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내려오자 사고로부터 한 달 뒤 더롱 소장은 사고 원인이 계산착오가 아니란 결론이 나왔다고 발표한다.

지휘부에서는 승무원 4명을 희생시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한 미군의 이탈리아 주둔기지를 살리려고 시도했고 승무원들은 본국에 송환된 뒤 군법회의에 회부되기로 결정됐다. 기소담당자는 전 해병대 조종사인 카우치 중령이었고 혐의는 과실치사로 유죄 확정 시 징역 20년을 선고받을 상황이었다.

감찰관은 조종사와 항법사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하고 다른 2명의 승무원에게 기소를 취하하는 거래를 제안하자 조종사와 항법사가 비상착륙 후 바로 내리지 않은 것이 증언됐다. 항법사 조셉은 심문 뒤 이를 인정했고 테이프를 카메라에서 빼고 공테이프로 갈아끼우느라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풍경을 보며 실컷 웃는 게 테이프에 찍혔을텐데 사람이 죽은 상황에서 웃는 자기 모습이 퍼지면 안 좋은 모습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테이프를 갈아끼운 뒤 애쉬비 대위와 같이 테이프를 태웠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승무원들이 규정을 준수했다면 테이프를 안 태웠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 새 정보를 추가 증거로 제시했다.

4.4. 군법 회의, 그리고 결과


사고 1년 후 군법회의가 시작되었다.

검찰측은 피고 측이 최저고도를 어긴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고 변호인 측은 낮은 고도에서는 수평선이 아닌 계곡의 끝을 기준점으로 삼는데 이 기준점에 접근하면 수평선이 내려간 것처럼 보여 하강하다가 와이어를 본 순간 자신들이 위에 있다고 착각해 하강하면서 벌어진 사고라고 주장했다. 검찰 측에선 이에 대해 책임회피라며 비난했고 피고 측은 해병대의 훈련부족, 정보전달 미비에 책임이 있다 주장했다.

이후 절반이 비행기 조종사인 배심원이 7시간에 걸쳐 논의한 끝에 과실치사 혐의는 무죄를, 테이프를 태운 행위에 대해서는 공무집행방해죄를 적용하여 애쉬비 대위에게 6개월 형을 선고했고 항법사와 함께 불명예 전역 처리되었다. 사실상 케이블카 추락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않은 셈이다. 제 식구 감싸기 이에 대해 한 배심원은 해병으로서 수치심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사고 이후 아비아노에는 여전히 기지가 존재하지만 해병대는 모두 추방당해 주둔하지 않는다.

피해자 보상은 1999년 2월까지 이탈리아 정부에서 피해자 1명당 6만 5천 달러를 일단 배상해 줬지만 1999년 5월 미국 의회는 피해자를 위한 4천만 달러 보상 기금을 조성 법안을 거부했기 때문에 솜방망이 처벌에 이어 피해자에게 제대로 된 보상을 취하지 않으려는 미국의 행위에 대해 논란이 되었다. 그래도 1999년 12월 이탈리아 의회에서 추가로 최종 보상 계획을 승인해 1인당 190만 달러를 더 지급했으며 NATO 조약은 미국 정부가 이 보상금 중 75% 이상을 내게 하도록 의무화했고 이에 대해 미국 의회도 결국은 받아들였다. 나머지 25%는 이탈리아 정부 및 케이블카 보험업체에서 내 줬다. 더불어 각 사망자 개인 보험은 별도로 알아서 지급하게 되었다.


[1] 사고 이후 촬영된 날개 상태[2] 그것도 온몸이 뭉개졌으며 일부는 떨어질 때의 충격과 찌그러진 케이블카에 의한 압력으로 압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