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21:39:40

생 필리에르호 침몰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생 필리에르.jpg

1. 개요2. 사고 내용3. 사고 이후

1. 개요

Saint-Philibert

1931년 6월 14일 프랑스의 느와흐무티에(Noirmoutier)와 프레파유(Préfailles) 사이에서 일어난 여객선 침몰 사고.

2. 사고 내용

생 필리에르호는 1923년에 뒤비종(Dubigeon)조선소에서 만든 32m 길이, 폭 6.4m, 무게 189톤의 작은 증기유람선으로 낭트와 느와흐무티에 사이를 오고 갔다.

사고 당일에도 낭트에서 최소 500명의 승객들이 탑승했다. 성인 승객은 467명, 어린이 승객은 세지 않아 정확한 탑승자 수는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배는 최대 400명이 탑승 가능했으니 과적상태였다. 이에 비해 승무원 7명으로 굉장히 적었다. 선장은 경력 40년을 자랑하는 57세의 프란시스 올리브(Francis Ollive. 57세)였다.

배는 목적지엔 느와흐무티에의 Herbaudière에 무사히 도착했다. 하지만 그 날 오후 5시경, 바람이 거세지고 점차 바다 상황이 악화됐다. 승객 46명은 목적지에서 묵고 가거나, 다른 교통편을 이용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 다른 승객들은 탑승한 채, 배는 다시 나아갔다.

배가 바다를 항해하는데 파도가 점점 높아졌다. 배 안에 까지 들어오자 사람들은 바람을 피해 배 우현으로 몰렸다. 사람들의 무게로 배가 살짝 기울었다. 그런데 얼마 안가 생 길다스(Saint-Gildas)포인트를 지날 때 큰 파도가 치면서 배가 뒤집혔다. 사람들은 구명조끼를 메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다에 빠졌다.

사고 소식을 듣고 생 나자르(Saint-Nazaire) 포르닉(Pornic) 생 조지(Saint-Georges)등의 배가 찾아와 사람들을 구조하려 했으나 프랑스인 승객 7명, 오스트리아 승객 1명해서 총 8명만 구조하는데 성공했다. 선장을 포함한 최소 400명은 사망했다. 사고는 프랑스에서 비전시상황에 일어난 최악의 해양사고로 기록됐다.

3. 사고 이후

다음 날, 200구가 넘는 시신이 느와흐무티에 해안에 밀려왔다. 시신에서 물건 훔치거나, 신분증 훔쳐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나타나 경찰이 출동해 관리해야 했다.

낭트에선 희생자들을 기리는 장례식이 열렸다.당시 프랑스 총리였던 아리스티드 브리앙, 낭트 시장 오폴드 카세그랭(Léopold Cassegrain)도 참여, 총 6만명 참여했다.

느와흐무티에에선 10년에 한번 씩 희생자들 기리는 추모제가 Herbaudière의 공동묘지에서 열림

54명의 시신은 라 부테예리 묘지에 묻혔다가 이후 생자크 묘지로 이장됐다

사망자 수가 너무 많아 인근 어업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시신등으로 오염된게 아니냐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이러면서 한동안 어업에 지장 생겼고, 관광을 기피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생 필리에르호 자체는 멀쩡해 사고 이후 인양되고 화물선으로 개조되어 2달 후 다시 항해 당시 이름은 생 에플람(Saint Efflam), 코트데 아무르(Côte-d'Amour) 레 카스켓(Les Casquet)등의 이름으로 운영되다 1976년 운항을 끝냈고, 1979년에 스크랩 처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