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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귀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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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귀태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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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2003 2004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12번
오윤(2000~2001) 강귀태(2002~2007) 구단 해체
우리 / 서울 /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12번
팀 창단 강귀태(2008~2009) 유한준(2010)
유한준(2010) 강귀태(2011~2012) 박헌도(2013)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24번
브룸바(2008~2009) 강귀태(2010) 박정준(2011~2012)
KIA 타이거즈 등번호 24번
전은석(2012) 강귀태(2013) 김다원(2014~2017.7)
}}} ||
파일:attachment/강귀태/ㅇㅇ.jpg
이름 강귀태(姜貴太 / Kang Gui-Tae )
생년월일 1979년 8월 12일 (만 [age(1979-08-12)]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인천서화초-동산중-동산고-동국대
포지션 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98년 고졸 우선지명 (현대)[1][2]
소속팀 현대 유니콘스(2002~2007)
넥센 히어로즈(2008~2012)
KIA 타이거즈(2013)
테마곡 복음성가 '예수님 찬양'[3]

1. 개요2. 선수 생활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2.2. 넥센 히어로즈 시절2.3. KIA 타이거즈 시절
3. 지도자 생활4. 플레이 스타일5. 기록종결자6. 연도별 성적7. 기타

1. 개요

넥센 히어로즈KIA 타이거즈의 포수.

2. 선수 생활

2.1. 현대 유니콘스 시절

파일:attachment/강귀태/Example.jpg
동산고동국대학교 시절 프로급의 장타력을 뽐내며 차세대 공격형 포수로 주목받았다. 이런 기대 속에 2억 1000만 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4] 현대 유니콘스에 입단한다. 입단 첫 해인 2002년에는 박경완의 백업 포수로 74경기에 출전, 타율 0.272의 준수한 타격감을 보이며 프로에 안착했다.

다음해인 2003년 박경완이 SK로 이적하자, 시범경기에 이어 개막전 주전포수로 출전하면서 확고한 주전으로 자리잡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개막 2경기만에 부상으로 낙마하였고 그 자리는 강귀태의 백업용으로 영입되었던 김동수가 차지한다. 그 후 김동수가 완전히 부활하면서, 부상이 완쾌된 후에도 김동수의 백업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실 더 많은 기회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한번 주전으로 낙점한 선수에게 무한애정을 보여주는 당시 김재박 현대 감독의 스타일 탓에 주전으로 자리잡지 못한 면이 있다. 또 중이염, 팔꿈치 인대 수술, 척추 질환 등으로 4급 판정을 3번 받아서 면제가 되었을 정도로 잦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실력이 정체되어 버렸다.

2.2. 넥센 히어로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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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현대가 히어로즈로 재창단되면서 40대에 접어든 김동수를 대신해서 자연스레 주전포수가 되었다.[5] 하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타격 수비 양면에서 이미 폼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여서 대단한 활약은 보이지 못하였고 오히려 잦은 실수와 미숙한 수비로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팀에 그나마 강귀태만큼의 경험을 가진 포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허준이나 유선정같은 다른 포수들도 고만고만한 수비에 1할대 타격으로 강귀태를 밀어내지 못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정말이지 답이 없는 상황. OTL

그러나 2011시즌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 신고선수로 입단한 허도환이 공수의 안정감을 선보이면서 주전포수로 자리잡았다. 거기에 시즌 종료 후 FA자격을 포기하고 나선 연봉협상 과정에서 프런트와 충돌하면서 불화설이 흘러나왔다. 강귀태는 FA 신청을 하지 않은 만큼 그간의 팀 공헌도(?)를 주장하면서 그에 걸맞는 대우를 해줄 것을 요구했고, 프런트는 부상과 실력정체를 이유로 오히려 삭감을 주장했다고 한다. 구단 입장에선 허도환이라는 대안이 생긴 상태라, 강귀태에 그다지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연봉은 전년과 동일하게 1억으로 동결되었다. 여기에 추가적으로 강귀태가 주전보장을 요구했지만, 구단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2012시즌에는 시즌 초반 몇 경기 나오다가 424 대첩에서 불성실한 플레이로 코칭스탭의 눈밖에 나면서 2군 붙박이가 되었다. 심지어 5월 들어 허도환이 대상포진으로 빠지게 되자 넥센은 2군 세이브왕 전유수를 내주면서까지 최경철을 데려왔고, 강귀태는 기용하지 않았다. 결국 시즌 종료 후 포수를 포기하고 지명타자 겸 백업 1루수로 전향하라는 신임 염경엽 감독의 제안을 거절하고 스스로 방출을 선택하였다.

2.3. KIA 타이거즈 시절

이후 KIA 2군이 마무리 훈련을 하던 경남 남해에서 목격되었다. 실제 KIA 타이거즈신고선수로 입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11월 17일 오키나와 1군 마무리 캠프에 합류하였다.

스프링캠프를 거치면서 연봉 7,000만원의 정규 선수로 등록하였고, 시범경기부터 투입되기 시작했다. 시범경기에서는 백업 포수와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이후 퓨처스리그에서 꾸준히 지명타자로 출전했다.

그러나 2013년 6월 이후 KIA 타이거즈 홈페이지 선수 명단에서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송산은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에이전트로 전업했으며, 강귀태는 스스로 팀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돌았다. 홍희정의 베이스볼 다이어리에 의하면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밝혀졌다.

3. 지도자 생활

은퇴 후 공주중학교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한 듯했으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쫓겨난 모양이다.[6]

박철순이나 김성한처럼 구타로 물의를 일으켰던 전직 야구선수들의 선례를 감안하면 다시 야구 지도자로 복귀하는건 어려워 보였지만, 현대 시절 사제 관계였던 금광옥 감독의 부름을 받고 2016년 모교인 동산고에 타격코치로 부임했다.[7] 금광옥 감독이 2017시즌 도중 퇴임하면서 물러났지만 2019년 역시 고교 선배이자 현대 시절 사제 관계인 이광근 감독이 동산고로 부임하면서 코치로 복귀했다.

4. 플레이 스타일

과거 동산고, 동국대 시절 무시무시한 장타력을 뽐내었던 과거 때문인지 매 타석마다 풀스윙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프로 통산 홈런은 30개가 전부. 하지만 장타력이나 치는 재능 자체는 있었기 때문에 현대 시절에는 대타로도 자주 나왔으며 타수가 적긴 하지만 나름 괜찮은 성적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본인은 스스로를 공격형 포수라고 생각한 듯. 히어로즈 시절, 기자와 인터뷰 하면서 "저는 공격형 포수입니다"라고 입을 털자 지나가던 김시진 감독이 "홈런 세 개짜리 공격형 포수도 있냐"고 디스.

포수로서의 모습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수준으로 투수 리드부터 송구, 블로킹, 수비력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함을 보였다. 특히 블로킹 능력은 프로 1군의 포수인지 의심을 하게 할 정도. 강귀태의 부족한 능력이 안 그래도 평균 연령이 낮고 경험이 미숙한 넥센 투수진의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이 많았다. 포수가 블로킹을 하지 못하면 투수는 브레이킹 볼(변화구) 구사에 부담을 느끼게 되어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8]

5. 기록종결자

파일:attachment/강귀태/ㄹㄹ.jpg

유난히 여러 기록을 막아낸 적이 많다. 이 정도 스탯으로 이렇게까지 많은 야구팬들에게 회자되는 이유

2007년 10월 3일 잠실에서 열렸던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인데, 이 경기에서 두산의 외국인 투수인 다니엘 리오스는 9회 1아웃까지 단 한 명의 주자도 출루시키지 않고 있었다. 남은 타자도 하위타선의 끝인 8번과 9번이었으며 이 두 타자만 더 잡아내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하는 상황.
모든 야구 팬들이 이 역사적인 대기록이 만들어지는 현장을 보기 위해 숨 죽이는 상황에서 8번 타자 강귀태가 타석에 들어섰다. 리오스의 공은 여전히 날카로웠고, 프로 데뷔 이래 최악의 시즌을 보내던 강귀태가 리오스의 공을 치리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강귀태는 리오스의 공을 잡아당겨 3유간을 뚫는그란도시즌 좌전 안타강커태슬램!를 만들어내며 리오스의 퍼펙트는 물론 노히트노런 마저 날려버렸다. 리오스는 이후 바로 강판되었고 덕아웃에서 그라운드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는 무례한 행동을 했지만 이에 대해서는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 그 대기록을 아깝게 날려버린 게 오죽 억울하고 분했으면... 이 날 강귀태는 자신의 이름이 주요 포털 사이트 검색순위 1위에 올랐다며 좋아했지만, 퍼펙트 게임의 현장을 목격하길 바랬던 많은 야구팬들은 강귀태를 원망하기도 했다. 실력도 없는게 매너까지 없다[9]부터 시작해서 엄청 까댔다. 사실 기습번트 안타를 만든것도 아니고 리오스에게 딱히 도발을 건 것도 아닌지라 까일 이유는 없었다.[10]

하지만, 그 다음 해 일본프로야구 구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한 리오스가 금지약물을 복용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나며, 당시 리오스의 퍼펙트 게임을 저지한 강귀태는 순식간에 약쟁이가 한국프로야구 최초의 대기록을 수립하는 것을 막아낸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며, 도마 강귀태 열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여러 모로 강귀태 입장에서 리오스는 좋은 인연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때 리오스에게 한 명언이 바로 'Welcome to the KBO'. 물론 믿으면 곤란하다.

2010년 8월 26일, 류현진의 30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행진을 마감시켰다. 역시 기록 브레이커 7회말, 이미 3자책점을 기록하고 있었던 류현진으로부터 솔로홈런으로 4점째를 얻어내면서, 대기록을 멈추게 했다. 류현진 본인은 대기록 지속에 대한 중압감을 떨쳐버려서 후련하다는 입장이었지만, 강귀태는 동산고 8년 후배의 대기록을 멈추게 해서 너무도 미안하다며, 대전 원정 때 류현진에게 고기를 살 것이라고 했다고. 파산 확정

이하는 강귀태가 기록을 저지(?)한 투수들의 목록.

위 5번의 기록 저지는 모두 서술된 투수로부터 직접 안타나 홈런을 뽑아내 저지한 것이지만 마지막은 심수창이 승리 투수 요건을 갖추고 내려간 상황에서 구원 투수로 올라온 임찬규에게 동점 홈런을 뽑아내 저지한 것이다.

그가 부상으로 못나오는 동안 그의 학교 후배인 한화 이글스이양기가 그를 대신하여 주키치의 퍼펙트 게임을 저지하기도 하였다.

6.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2 현대 74 .272 40 8 0 1 16 17 0 2 2 20 .290 .347 .636
2003 66 .256 30 6 0 3 12 19 1 10 1 16 .320 .385 .705
2004 84 .284 40 6 1 4 21 10 1 9 1 32 .323 .426 .748
2005 104 .264 70 12 0 8 38 30 2 26 4 38 .338 .400 .738
2006 73 .299 43 5 0 4 18 18 0 9 0 20 .338 .417 .754
2007 55 .231 25 8 0 0 6 5 0 5 0 13 .263 .306 .569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08 우리 104 .249 65 6 2 4 22 19 1 13 1 28 .282 .333 .616
2009 히어로즈 114 .249 70 12 0 3 37 28 3 28 3 49 .319 .324 .643
2010 넥센 97 .230 62 9 0 3 34 24 0 17 2 31 .278 .297 .576
2011 33 .235 19 4 1 1 10 4 1 5 0 11 .276 .346 .622
2012 12 .211 4 0 0 0 1 2 0 0 1 4 .250 .211 .461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사구 삼진 출루율 장타율 OPS
2013 KIA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11시즌)
816 .255 468 76 4 31 215 176 9 124 15 262 .304 .352 .656

7. 기타

  • 그의 기록 브레이킹을 보고 크보에서 세워준 척화비가 있다. 물론 이것도 믿으면 곤란하다
    파일:attachment/강귀태/Exag.jpg
  • 프로 시절에 상대적으로 드러난 적은 없어도 의외의 벤클 강자. 즉 한 주먹 하는 인물이다. 동국대 동기 서승화가 대학 시절 볼배합 문제로 강귀태와 크게 싸웠다가, 예사롭지 않은 기세를 본 뒤 그 후 대학 졸업 때까지 강귀태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어린이가 된 바 있다(...).


[1] 고졸 당시 지명하고 팀에서 지명권을 보유한 상태로 대학에 진학했다. 이 때문에 지명시기와 입단시기가 4년 차이가 난다.[2] 참고로 이 당시 같이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바로 입단한게 바로 1998시즌 신인왕 김수경이다.[3] 날려버려라~ 날려버려라~ 날려버려라~ 강귀태~ 안타! x4[4] 2000년 이후의 현대 구단은 모기업의 자금난으로 재정 상태가 악화되어 있었는데도 2억이 넘는 계약금을 안겨준 것을 보면, 나름 상당한 기대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그 다음해에 대졸 최대어로 불리며 입단한 이택근의 계약금이 2억 3천만 원이다.[5] 당시 돈이 없던 히어로즈 구단 프런트가 고액연봉자들을 강제로 은퇴 혹은 트레이드시키거나, 연봉을 대폭삭감하해서 팀운영비를 한푼이라도 줄이려고 했던 것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 특히 김동수를 비롯해서 이숭용, 송지만 등 은퇴가 몇년 안남은 노장 선수들이 주요대상이었다. 어차피 노쇠화 기미가 보이고 있던 김동수는 다음해인 2009년 플레잉 코치로 물러났고, 이숭용, 송지만은 트레이드에 실패해서 계속 히어로즈에서 뛰게 된다.[6] 위 기사에서는 35세 강모 코치라고 나오는데, 2014년 기준으로 강씨 성을 가진 35세 선수면 강귀태 확정.[7] 이 기사의 세번째 사진 참조.[8] 허도환이 2011시즌 하반기에 빠르게 1군에 자리잡을 수 있었던게, 바로 뛰어난 블로킹 능력 때문이다. 강귀태의 알까기를 몇년동안 보다가, 제구레기들의 온갖 괴랄한 공도 다 막아주는 허도환을 보니, 넥센팬들이 환호할 수밖에. 참고로 이 당시 허도환의 블로킹은 양상문 해설이 '리그 최고 수준'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9] 물론 후술하듯 쓰레기같은 소리이다.[10] 여기서 낮은 팬들의 수준을 알 수 있다. 타자가 투수의 공을,불문율과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정당하게 때렸는데 그걸 가지고 욕을 한다? 팬들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쓰레기들이며 야구를 볼 자격도 없는 그런 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