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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by(北海道大学, ruby=ほっかいどうだいがく)] 홋카이도대학 Hokkaido University | |
건학이념 | 프론티어정신, 실학중시, 전인교육, 국제성 함양 |
분류 | 국립 |
창립 | 삿포로농학교 1876년 (메이지 9년) |
총장 | 호킨 키요히로 (寳金 清博) |
국가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소재 | 삿포로(札幌) 캠퍼스 홋카이도 삿포로시 키타구 키타8죠 니시5초메 하코다테(函館) 캠퍼스 홋카이도 하코다테시 미나토마치3초메 1-1 |
재학생 수 | 학부 11,561명 (2021년) 대학원 6,552명 (2021년) [1] |
교직원 수 | 3,893명 (2021년)[2] |
교색 | 녹색 |
웹 사이트 | 홋카이도대학 홈페이지 |
소개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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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시에 위치한 국립대학. 1869년부터 시작된 홋카이도 개척사에 있어서 절대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곳으로,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으로서 1876년에 설립된 삿포로농학교(札幌農学校)[4]를 전신으로 한다. 1918년에는 5번째 제국대학으로 승격되었다.201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스즈키 아키라 등의 3명의 노벨상 수상자[5]를 배출한 연구대학[6]으로서, 일본의 슈퍼글로벌대학 TOP형으로 지정되어 있다.[7] 종합 평가로는 2023년 THE 세계 대학 랭킹 일본판에서 6위, 2023년 QS 세계 대학 랭킹 일본 8위, 2022년 ARWU에서 일본 7~8위, 2022년 CWTS 레이던 랭킹 P기준에서 일본 6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학술 연구 성과 지표인 네이처 인덱스 교육기관 순위에서는 2022년 일본 5위를 기록했다.
대학의 약칭은 본래 제국대학 시절부터 불려온[8] 카이다이([ruby(海大, ruby=かいだい)])로 현재도 재학증명서 등 학교 발행 공식서류 우상단에 기재된 "海大第XX号"의 발행번호에 사용되고 있으나, 현대 일본에서 홋카이도대학의 약칭은 호쿠다이([ruby(北大, ruby=ほくだい)])로 통칭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9] 학교 휘장은 연령초(延齡草)[10]의 형상을 본떴다.
2. 역사
▲ 삿포로시 시계탑이 있던 당시 삿포로농학교 |
▲ 홋카이도제국대학 당시 공학부 건물[11] |
- 1872년: 개척사 가설학교(도쿄) 설치[12].
- 1875년: 개척사 가설학교 삿포로학교 발족.
- 1876년: 삿포로농학교 창립[13].
- 1898년~1903년: 캠퍼스를 현재 위치로 이전[14].
- 1907년: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으로 승격[15][16].
-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설립과 함께 삿포로농학교 예수과(豫修科)를 모체로 해, 학년 정원 100명의 대학예과[17][18] 설치[19].
- 1918년: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이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20][21].
-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설립과 함께 대학예과도 이관.[22][23]
- 1919년: 농과대학을 농학부로 개칭하고 의학부 설치[24].
- 1924년: 공학부 설치[25].
- 1930년: 이학부 설치[26].
- 1941년: 저온과학연구소 설치.
- 1943년: 촉매연구소[27], 초단파연구소[28] 설치.
- 1947년: 법문학부 설치(4월)[29], 홋카이도대학으로 개칭(10월).
- 1949년: 예과[30] 및 하코다테수산전문학교[31] 합병, 교육학부 설치, 신제 홋카이도대학 출범[32].
- 1950년: 법문학부를 문학부와 법경학부로 분리[33]. 또한 대학예과 폐지.
- 1952년: 농학부 수의학과가 수의학부로 독립[34].
- 1953년: 법경학부가 법학부와 경제학부로 분리[35].
- 1965년: 의학부 약학과를 약학부로 독립[36].
- 1966년: 의학부 치학과가 치학부로 독립,[37] 현재 12학부 체제 완성.
- 1995년: 교양부 폐지, 대학원 중점화 개시.
- 2003년: 의학부 부속병원과 치학부 부속병원을 홋카이도대학병원으로 통합.
- 2004년: 국립대학법인 홋카이도대학 출범.
- 2011년: 입시제도 개편, '종합입시' 제도 시작.
3. 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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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의 경우, 한국과 같이 전기모집과 후기모집(재모집)으로 나뉘고 입학은 10월 혹은 4월 입학 중에 고를 수 있다. 응시료는 2020학년도 입학생 모집 기준 3만엔. 다만 서류의 배송료, 입금 수수료 등은 별도로 든다. 입시 절차 및 입시 수험 과목은 연구과에 따라 전부 다르므로 해당 연구과 사이트에 접속하여 절차를 확인하는 것이 필수이다.
한편, 외국 대학 출신의 일본 대학원 진학자들은 입학 전에 먼저 연구생이라는 신분으로 반 년~1년 정도 연구실에 소속되어 공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대학원 입학 전에 연구실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연구를 위한 일본어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또한 대학원 입학을 위해서는 필기 시험을 쳐야 하기 때문에 그 시험의 족보(기출문제)를 받고 시험 공부를 하는 기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4. 조직
학부의 경우, 전기(前期)시험 합격자들의 일부는 2학년으로 진급하며 학과를 정하는 방식인 종합이과(약 1000명)와 종합문과(약 100명)로 각각 선발된다. 그에 반해, 후기(後期)시험 합격자들과 문과 학부, 의학부, 수의학부, 치학부, 수산학부는 일반적으로 학부 별로 모집한다. 한편, 홋카이도대학은 일본의 국립대학 중 가장 많은 학부를 가지고 있는 대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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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캠퍼스 및 시설
캠퍼스는 삿포로와 하코다테 두 곳에 있다. 오피스는 대한민국 서울[47], 일본 도쿄, 중국 베이징, 베트남 하노이, 미국 포틀랜드, 핀란드 헬싱키, 러시아 모스크바, 잠비아 루사카,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설치되어 있다.5.1. 삿포로 캠퍼스
삿포로 캠퍼스(札幌キャンパス) 전경.[48] |
일반적으로 홋카이도대학이라 하면 이곳을 가리킨다. 찾아가는 길은 JR 홋카이도 삿포로역 북쪽 출구에서 도보 7분(정문 방면), 혹은 삿포로 시영 지하철 난보쿠선 키타12죠역에서 대학병원 방면 도보 4분, 키타18죠역에서 체육관 방면 도보 10분.
대학 캠퍼스이자 삿포로 시내에 있는 유명한 관광지인데, 시내 중심인 삿포로역에서 가까워 입지가 상당히 좋고[49], 고풍스러운 건물과 웬만한 공원 뺨치는 아름다운 경관으로 특히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으며, 시민들도 피크닉이나 산책을 나오곤 한다. 특히 포플러 가로수길(ポプラ並木)과 은행나무 가로수길(イチョウ並木), 클라크 흉상 등이 유명하다. 학술적인 볼거리로는 부속 종합박물관과 식물원 등도 관광객이 많이 찾는 편이다. 실제로 삿포로캠퍼스는 트립어드바이저에서 발표한 일본의 가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무료 관광지 랭킹 2013에서 전국 6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캠퍼스 동쪽에는 대학병원이 있고, 북쪽엔 동물의료센터가 있어 시민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다. 키타18조에서 북쪽으로는 각종 연구시설이 몰려 있고,[50] 이쪽을 따로 키타(北) 캠퍼스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삿포로캠퍼스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걸어서 가면 30분은 족히 걸리며 면적상으로는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보다 좀 큰 수준이지만 교내 셔틀버스는 직원용으로만 운영하고 있으며, 학생과 관광객은 탈 수 없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재학생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편이다.
대학 캠퍼스지만 안에는 고급스러운 식당도 있다.
한편, 오도리역의 북쪽에는 삿포로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삿포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인 삿포로시 시계탑이 있는데, 사실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정식 명칭은 구 삿포로농학교 연무장(旧札幌農学校演武場)이다. 즉, 옛 학생들의 연무나 입학식, 졸업식 등 때 사용하던 중앙강당 역할의 건물이었다.
삿포로시 시계탑 | 삿포로시 컨트리 사인 |
추천하는 트레킹 코스는 아래 순서와 같다. 참고로 눈도 없고 풀도 없는 허허벌판이라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는 3, 4월 때의 방문은 비추. 이 기간에는 대학 캠퍼스 청소도 실시하는 데다가 식물원도 동기라서 온실 제외하고는 폐쇄 기간이다. 삿포로 캠퍼스의 상세 정보 및 사진은 밑의 캠퍼스 상세 소개 틀을 참조.
- 홋카이도대학 식물원[52] → 홋카이도대학 정문 → 교류플라자 '엘름의 숲' → 사쿠슈코토니가와 → 중앙녹지 → 후루카와 기념강당 → 클라크 동상 → 농학부 → 종합박물관 → 화목원 → 포플러 가로수 → 오픈이노베이션센터 '엔레이소' → 오노이케 → 은행나무 가로수 → 중앙로를 따라 북쪽으로 → 삿포로농학교 제2농장 → 수의학부의 가축 농장
캠퍼스 상세 소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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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대학 식물원 (北海道大学植物園) | |
1886년에 개관하였으며, 약 4000종의 식물이 심어져 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홋카이도 개척사의 박물관, 아이누족의 자료를 전시하는 '북방민족 자료실'도 있다. 상세한 내용은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식물원 및 박물관 항목 참조. |
중앙 녹지 (中央ローン) |
'사큐슈코토니가와'가 이어지는 개천이 흐르는 녹지이다. 겨울에는 꼬마들이 눈썰매를 타러 온다. 소설 빙점에서 주인공 요코가 자주 독서를 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
후루카와 강당 (古河講堂) |
후루카와 재벌의 기부금으로 1909년에 건축되었으며, 홋카이도 최초의 르네상스 양식의 건축물이다. 참고로 원래 이름은 '후루카와 강당(古河講堂)'이지만, 문화재로 등록할 때 '후루카와 기념강당(古河記念講堂)'으로 잘못 등록해서 현재는 이렇게 불리고 있다고...[53] |
클라크 상 (クラーク像) |
중앙 녹지의 북서쪽 모퉁이에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초대 교두(敎頭), 클라크 박사의 흉상이 있다. 참고로 홋카이도대학에서 발행하는 신용카드에는 다 이 동상이 그려져 있다(...). 상세 내용은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항목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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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삿포로농학교 건물 (旧札幌農学校) |
'엘름의 숲' 앞을 가로지르면 현재에도 쓰이는 농학부 건물 및 삿포로농학교 시절의 건물이 남아 있다. 첫 번째 사진은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건물, 두 번째 사진은 구 삿포로농학교 양잠학 교실, 세 번째 사진은 구 삿포로농학교 도서관 서고다. |
홋카이도대학 종합박물관 (北海道大学総合博物館) |
홋카이도대학 종합박물관은 1929년에 건립된 이학부의 본관 건물을 활용하였다. 개교한 이래 수집・보존・연구되어 온 300만 점 이상에 달하는 표본과 자료가 축적되어 있고, 본학 출신인 스즈키 아키라(2010년 노벨 화학상), 그리고 베냐민 리스트(2021년 노벨 화학상)가 받은 노벨상 메달들도 역시 전시되어 있다. 입장료는 무료이며, 월요일에는 휴관한다. 상설전시 외에 특별기획전시도 자주 열리기 때문에 알아보고 가는 편이 좋다. 참고로 박물관 1층에는 포라스라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있다. |
포플러 가로수 (ポプラ並木) |
2004년에 태풍으로 가로수가 많이 쓰러져서 현재 입구를 막아두었다.[54] 바로 옆에는 화목원(花木園)이 있고, 그 입구에는 니토베 이나조의 흉상이 있다. 2000년에는 헤이세이 포플러 가로수(平成ポプラ並木)라는 가로수길을 기존 위치의 북쪽에 새로 조성하였다. |
오노이케 (大野池) |
캠퍼스 거의 중앙에 위치하여 있는 연못에서 야생오리와 연꽃 등을 볼 수 있다. 그 옆에는 |
은행나무 가로수 (イチョウ並木) |
오노이케의 약 50 m 북쪽에 있으며, 길이가 약 380 m인 도로 양옆에 70그루의 은행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다. 11월에는 이곳에서 콘요우사이(金葉祭, 금엽제)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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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농학교 제2농장 (札幌農学校第2農場) |
1877년에 건축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농업 건축물이며 현재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상세한 내용은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제2농장 항목 참조. |
5.2. 하코다테 캠퍼스
하코다테 캠퍼스(函館キャンパス) 전경 |
JR 홋카이도 하코다테 본선 하코다테역에서 버스로 20분, 혹은 고료카쿠역에서 도보 40분이면 갈 수 있다. 내륙에 있는 삿포로 캠퍼스와 달리, 하코다테 캠퍼스는 바닷가 쪽에 있는 수산학부 전용 소규모 캠퍼스이다. 비록 캠퍼스 규모는 작지만 1958년에 개관한 박물관인 수산과학관(水産科学館)이 있고, 여러 선박들도 부속되어 있다.
하코다테 캠퍼스로 진학하는 수산학부 학생들은 삿포로 캠퍼스에서 종합교육을 이수하고, 3학년으로 진급할 때 하코다테 캠퍼스로 이전하여 전공을 수료한다. 대학원은 수산과학원・수산과학연구원이 설치되어 있다.
5.3. 그 외 시설
▲ 소라누마고야 |
- 산장
- 기숙사
- 케이테키료(恵迪寮)
학생들이 스스로 기숙사를 자치, 운영하는 방식인 자치료(自治寮)이다. 월세는 4,700엔밖에 안하지만 싼 만큼 시설이 상당히 노후화되어 있다. 현재 기숙사 건물은 1983년에 지어진 건물이고, 예전의 건물은 홋카이도 개척촌에 복원되어 있다. 케이테키료(恵迪寮)라는 이름은 1907년에 지어졌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년 기숙사 노래(寮歌)를 한 곡씩 작곡하고 있다. 그중, 1912년에 작곡된 미야코조야요이(都ぞ弥生)는 상당히 유명하여, 거의 대학 교가로 취급되고 있다.[57] 참고로 소설판 이웃집 토토로에서 아버지로 등장하는 쿠사카베 타츠오[58]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 걸로 홋카이도대학 출신이라는 설정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도 JR 타워 전망대에도 미야코조야요이의 2절의 가사[59]가 붙어 있다. - 소세이료(霜星寮)
여자 기숙사. 자치료(自治寮)이며, 월세는 4,700엔(6인실은 4,300엔). - 호쿠신료(北晨寮)
하코다테 캠퍼스에 위치해 있으며, 수산학부 학생 전용이다. 자치료(自治寮)이며, 월세는 7,000엔. - 호쿠다이 인터내셔널하우스 기타23조 2호동
- 호쿠다이 인터내셔널하우스 기타8조
호쿠다이 인터내셔널하우스 기타8조 히가시- 폐쇄- 호쿠다이 인터내셔널하우스 기타23조 1호동
- 호쿠다이 인터내셔널하우스 후시미
- 삿포로 유학생 교류센터
- 세미나 하우스
- 오타키 세미나 하우스(大滝セミナーハウス)
6. 국제 교류
2019년 기준, 62개 국가 및 지역과 489개의 교류협정을 맺고 있으며, 한국과는 32개 대학 및 연구기관과 협정을 맺고 있다.[60] 이 중 특히 서울대학교와는 1998년부터 학술 심포지엄을 매년 번갈아 개최하며 가장 활발히 학술 교류를 하고 있다.[61]7. 관련 인물
자세한 내용은 분류:홋카이도대학 출신 문서 참고하십시오.• 한국인
- 권영대 - 이학부 물리학과 : 물리학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 김동원 - 공학 박사 : 전북대학교 제18대 총장.
- 김삼순 - 이학부 식물학과 : 생물학자, 한국균학회 설립자.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등 역임.
- 박맹수 - 철학 박사 : 원광대학교 제13대 총장.
- 손응룡 - 농학부 농학과 : 독립운동가, 농학자. 고려대학교 교수 역임.
- 손치무 - 지질광물학과 : 지질학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이학부장 등 역임.
- 신현석 - 수산경영학 석사 : 제4대 한국수산자원공단 이사장.
- 안상한 - 수산학과 : 여수수산대학(현, 전남대학교) 총장,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부총장 역임.
- 윤여표 - 명예박사 : 제20대 충북대학교 총장, 제9대 식품의약품안전처장.
- 원병오 - 이학 박사 :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한국조수보호협회 회장, 국제환경과학연구소 이사장, IOC 이사 등 역임.
- 이기준 - 철학 명예박사 : 전 교육자, 관료. 제22대 서울대학교 총장.
- 이민재 - 이학부 식물학과 : 아주공과대학(현, 아주대학교) 제2대 총장, 강원대학교 초대 총장.
- 이영진 - 농학부 농학과 : 정치가, 대한민국 초대 충청남도지사.
- 이장무 - 공학 명예박사 : 전 교육자, 공학자. 제24대 서울대학교 총장.
- 이정환 - 농업경제학 석사 및 박사 :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제9대 원장.
- 이춘우 - 수산학 박사 : 제5대 한국수산자원공단 이사장, 부경대학교 교수.
- 임호식 - 농학부, 농학 박사 : 한국인 최초의 농학 박사 학위.
- 장종원 - 농학부 농학과 : 독립운동가.
- 정태경 - 공학 박사 : 정동성의 장남. 여주대학교 제7대 총장.[62]
- 전평수 - 이학부 물리학과 : 물리학자. 경성대학 조교수 역임 후 월북.
- 최용석 - 수산과학연구학 석사 : 제42대 국립수산과학원장
- 최일신 - 농학 석사・박사 : 한경대학교 제4대 총장.
- 하서현 - 농학 박사 : 강원대학교 제6대 총장.
• 일본인
- 니토베 이나조 - 삿포로농학교 : 사상가, 구 5000엔 지폐 인물.
- 마스타니 야스노리 - 공학부 정밀공학과 : 성우.
- 모리 마모루 - 이학부 화학과・이학 석사 : 우주비행사.
- 무라나카 리코 - 의학부 의학과 : WHO 소속 의료사회학자, 저널리스트.
- 미야모토 미츠루 - 공학부 합성화학과 : 성우, 배우.
- 미야자와 타이세이 - 법학부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소속의 투수. 홋카이도대학 출신 첫 프로선수.
- 미야베 킨고 - 삿포로농학교 : 식물학자. 초대 홋카이도대학 식물원장.
- 사카구치 요시사다 - 문학부 : 배우, 성우.
- 슈하마 료 - 법학부 : 정치인.
- 스즈키 아키라 - 이학부 화학과・이학 석사・이학 박사 : 2010년 노벨화학상 수상.
- 시바노 타카히로 - 문학부 : 일본의 성우.
- 아리시마 타케오 - 삿포로농학교 : 소설가.
- 야마모토 타다사부로 - 삿포로농학교 : 사업가.
- 오니시 코이치(大西巷一) - 문학부 : 일본의 작가. 소녀전쟁 집필.
- 오사카 세이지 - 약학부 : 정치인.
- 오츠 와타리 - 삿포로농학교 : 교육가. 홋카이가쿠엔대학 설립자.
- 요시카와 다카모리 - 공공정책대학원 : 정치인.
- 우치무라 칸조 - 삿포로농학교 : 사상가.
- 이치카와 고이치(市川厚一) - 농과대학 축산학과・수의학 박사 : '사실상' 1926년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63][64]
- 이후쿠베 아키라 - 농학부 산림과학과 : 고지라 시리즈의 작곡가.
- 츠치야 미노루 - 토목공학과 - 건축가. 북 방파제 돔 등이 대표작.
- 키하라 히토시 - 농학부 농학과 : 유전학자. 씨 없는 수박 개발자.
- 하치로 요시오 - 농학부 : 정치인.
- 혼다 히라나오 - 법학부 : 정치인.
- 히로이 이사미 - 삿포로농학교 : 토목공학자. 일본 항만공학의 아버지.
- 히토리 : 만화가.
- 타카이 다이 - 공학대학원 : FENNEL 소속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구리 료헤이 - 의학부 : 소설가.(후에 학력위조로 밝혀졌다.)
• 교직원
- 고바야시 요시쓰구 - 종합박물관 교수 : 저명한 공룡학자.
- 네기시 에이이치 - 촉매과학연구소 교수 : 네기시 커플링 개발. 2010년 노벨화학상 수상.
- 베냐민 리스트 - 화학반응창성연구거점 주임연구원 및 특임교수 : 2021년 노벨화학상 수상.
- 오사와 에이지 - 이학부 준교수 : 풀러렌 모델 예측. 1996년 노벨화학상을 불운하게 놓쳤다.[65]
-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 - 삿포로농학교 1대 교두 : 개척사에 의해 홋카이도에 초대되어 개척에 힘썼다. 홋카이도대학의 마스코트 격 인물이기도 하다.
- 윌리엄 휠러 - 삿포로농학교 2대 교두 : 개척사에 의해 초대되었다. 교두를 맡으며 삿포로시 시계탑을 설계.
- 이노우에 가쓰오 - 문학부 교수 : 동학농민운동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 이토 히로유키 - 공학부 직원 : 크립톤 퓨처 미디어 설립자, 현 대표. 보컬로이드의 하츠네 미쿠 등이 대표작.
8. 기타
홋카이도대학 신용카드 |
- 만화 동물의사 Dr.스쿠르에서 등장하는 대학이 바로 여기다.[66]
- 학부생의 약 70% 가까이가 홋카이도를 제외한 외부 지역에서 진학해 오며[67] 실제로 수험자 수 순위로도 일본 국립대학 중 TOP3에 매년 들곤 한다.[68] 게다가 2000년대 중후반 한국인 유학생이 모종의 대형사고를 친 이후부터 학부 유학생의 입시 난이도가 높아졌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다. 수험생 중 토플 점수를 못 받은 학생들이 "구제국대학인데도 토익을 보네~" 하면서 원서를 넣지만...[69]
- 현재와 같은 운동회 개최의 기원이 되는 학교이다. 1878년 5월 25일에 처음 리키게이카이(力藝會)라는 운동회가 열리며 학교연례행사로 정착되었고, 이것이 삿포로 → 홋카이도 → 일본 전국으로 점점 전파되었다. 1885년 초대 문부대신에 취임한 모리 아리노리(森 有礼)는 체육에 의한 집단훈련을 중시하며 운동회를 적극 장려하였고, 이후 대부분의 학교에서 운동회를 개최하게 되며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현재까지 남은 것이다.
- 캠퍼스 잔디밭에서 징기스칸[70] 파티, 일명 징파(ジンパ)를 전통적으로 하곤 했으나[71] 2013년부터 학교측에서 잔디보호를 이유로 금지하였다. 징기스칸을 금지시킨 이유는 학교의 잔디보호라는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관광객들이 마치 여행 코스처럼 이곳에서 징파를 하는 게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재학생들은 뒷정리를 어느 정도 함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관광객들은 당연히 안 하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금지시킬 수밖에 없다고.[72] 결국 2014년부터 정해진 구역에서 재학생 한정으로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으며, 학생 자치회에 가면 신청하여 시간과 구역을 허락받고 사용할 수 있다. 2018년 7월에는 세이코마트 홋카이도대학점이 개점하였는데, 이젠 그 곳 2층 테라스에서도 징파를 즐길 수 있다! 미리 사전 예약을 하면 징파를 위한 식재료와 도구를 준비해 주는 방식이라고 한다.
- 2020 도쿄 올림픽 마라톤 경기 코스의 일부로 이용되었다.[73] 시내를 전부 일주하는 코스로, 홋카이도대학의 중앙로,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삿포로시 시계탑, 마루야마 공원 등 삿포로시의 명소를 다 거쳤다.
- 삿포로 눈 축제에도 동아리, 학과 등 단위의 여러 소속으로 매년 설상을 출품하고 있다. 2023년 눈 축제에서는 저명한 공룡학자인 고바야시 요시쓰구 교수가 감수한 공룡 대설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홋카이도대학 홍보 부스도 설치되었다.
- 2024년에 첫 프로야구 선수를 배출하였다. 그 주인공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출신 미야자와 타이세이. 사실 홋카이도대학을 포함한 일본의 구제국대학 야구부들은 죄다 공부만 하던 범생이 출신이라서 야구 실력은 다 서울대학교 야구부 수준(...)이라, 구제국대학 출신 역대 프로선수들을 다 합산해도 10명도 채 안된다고 한다.
[1] 외국인 유학생 2,268명 (2021년)[2] 교원 1,946명[3]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에는 클라크 박사가 키타히로시마시의 시마마쓰(島松)에서 학생들과 송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는 유화가 전시되어 있다. 거기에 써 있는 전체 글귀는 다음과 같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이기심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추구하는 야망을.)[4] 삿포로농학교는 일본 최초의 근대적 대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러 학과가 있었고, 일례로 삿포로농학교 토목공학과는 무로란공업대학의 전신이 되었다.[5] 세계적으로 일반적으로 카운트하는 방법인 동문·연구원·교직원 수를 합산한 기준으로 교직원으로도 201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네기시 에이이치 교수, 202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베냐민 리스트 주임연구원 등이 재직했다. 리스트의 경우는 홋카이도대학 재직 중에 수상했다. #[6] 슈퍼글로벌대학의 지원이 끝난 이후, 문부과학성이 연구력 강화를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인 지역중핵 및 특색 있는 연구대학(J-PEAKS)에 채택되었다.[7] 때문에 학부/연구과를 졸업하면 일본 고도인재 외국인 대상 포인트 우대제도 신청 시 가산점 10점을 받을 수 있다.[8] 도쿄 토다이(東大; 동대), 교토 쿄다이 (京大; 경대), 도호쿠 호쿠다이 (北大; 북대), 규슈 큐다이 (九大; 구대), 홋카이도 카이다이 (海大; 해대), 게이조 조다이 (城大; 성대), 다이호쿠 다이다이 (臺大; 대대), 오사카 한다이 (阪大; 판대), 나고야 메이다이 (名大; 명대) 등[9] 북대(北大)는 과거 도호쿠제국대학의 약칭이었으나, 현재는 홋카이도대학을 지칭하는 데 통용되면서, 현재 도호쿠대학은 북대(北大) 대신 동북대(東北大) 또는 톤페이라고 불리고 있다.[10]
참고로 홋카이도대학 한국 동문회의 이름도 한국연령초회(韓国延齢草会)이다.[11] 우아한 흰색 건물로, 당시에는 백악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973년에 건물 해체.[12] 개척사 소속의 학교로,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었다.[13]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14] 1891년도 지도 참조. 현재의 삿포로시 시계탑이 위치한 곳이 원래 캠퍼스.[15] 도호쿠제국대학이 설립된 시기는 1907년이지만, 사실 이 당시에는 도호쿠의 센다이 시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고,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으로 승격함에 따라 제국대학이 된 삿포로농학교의 시설만이 홋카이도에 위치해 있었다. 삿포로농학교 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1911년에 본격적으로 센다이 시에 도호쿠제국대학의 캠퍼스를 조성하기 전까지는 삿포로농학교 교장이었던 사토 쇼스케가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 학장으로서 도호쿠제국대학 총장의 직무를 겸했다. 그 후 삿포로농학교가 다시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됨에 따라 사토 쇼스케는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초대 총장까지 역임하게 된다.[16]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農科大學官制), 관보 원문. 메이지 40년(1907년) 칙령 제237호, 1907년 6월 22일 공포.[17] 본래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졸업해야 하는 구제고등학교가 홋카이도에는 세워져 있지 않았고,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된 삿포로농학교에는 본과 진입 전 교육을 담당한 예수과(豫修科)가 있었으므로 이를 개편한 대학예과를 설치했다. 후에 홋카이도제국대학이 되는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은 예과 수료자를 최우선으로 입학시키고 결원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타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받았고,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예과도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가 되었다. 예과는 종전 후인 1947년 4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법문학부 설치의 모체가 되었으며 1950년 3월 폐지되었다. 학부 예비교육의 기능은 1949년 6월 설치된 교양학과(의학전문부 건물을 사용. 참조)/일반교양부(1951년 4월)를 거쳐 오늘날 종합교육부와 케이테키료(기숙사)로 계승되었다(참조). 이러한 제국대학예과 제도는 이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과 다이호쿠제국대학에도 도입되었다.[18] 1935년 이전 예과 건물은 목조였다고 한다. 아래 사진 및 링크 참조. [19] 1907년 6월 22일 공포된 메이지 40년(1907년) 칙령 제237호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農科大學官制, 관보 원문) 제9조 제1항(농과대학에 대학예과, 토목공학과, 임학과 및 수산학과를 부설하고, 조교전임 16명과 조교수전임 7명을 둔다.)에 의거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 설치.[20] 법제상 홋카이도제국대학을 창설하고,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을 홋카이도제국대학 소속으로 이관.[21] 홋카이도제국대학관제(北海道帝國大學官制), 관보 원문. 다이쇼 7년 칙령 제44호, 1918년 4월 1일 공포.[22] 다이쇼 7년(1918년) 칙령 제44호 홋카이도제국대학관제 제11조에 의거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로 개편.[23] 모집 정원의 경우, 1919년에는 의학부 설치에 따라 예과 모집정원 200명(農類(농학부 진학반) 120명, 醫類(의학부 진학반) 80명)으로 증원되었고, 1922년에는 공학부 설치에 따라 모집정원 320명(農類 영어반 80명, 農類 독일어반 40명, 醫類(독일어) 80명, 工類(영어) 120명)으로 증원, 1924년에는 당해 입학생부터 農類 전원을 영어반으로 편성하였다. 農類, 工類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이수하고 醫類는 독일어를 제1외국어로 한 셈.[24] 농학부, 의학부로 구성된 2학부 체제[25]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로 구성된 3학부 체제[26]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로 구성된 4학부 체제[27] 현, 홋카이도대학 촉매과학연구소[28] 현, 홋카이도대학 전자과학연구소[29]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법문학부로 구성된 5학부 체제[30]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는 삿포로농학교 예수과(預修科)가 모체로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를 거쳐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가 되었다. 문단 하단 참조.[31]
삿포로농학교 수산학과(1907년 2월)로 설립되고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수산학과(1907년 9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부속 수산전문부(1918년)를 거쳐 1935년에 하코다테고등수산학교로 분리독립하였다. 1944년에 하코다테수산전문학교로 개칭하였고 1949년에 다시 홋카이도대학에 합병되어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가 되었다. 링크 참조.[32]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법문학부, 교육학부의 7학부로 구성[33]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경학부, 교육학부 등 8학부 체제[34]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경학부, 교육학부 등 9학부 체제[35]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0학부 체제[36]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약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1학부 체제[37]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치학부, 약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2학부 체제[38] TOEIC, TOEFL 성적. 단, 공학부 환경사회공학과 사회기반학코스 한정.[39] 단, 의학부 의학과의 경우 TOEFL, TOEIC 제출 필수.[40] 이과의 경우에는 일본어, 기술, 물리・화학・생물(택 2), 수학(코스 2). 그리고 문과의 경우에는 일본어, 기술, 종합과목, 수학(코스 1).[41] 즉, 무슨 영어시험 성적을 제출하는지에 대한 제한은 자유로워서, PTE, G-TELP, TEPS 등 자신의 영어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다만 의학과는 TOEFL, TOEIC만 제출 가능.[42] 학부에 따라 실시하는 시험 항목이 다르니 자세한 내용은 모집 요강 참조. 한편 공학부 등의 입시 요강에는 면접에서 구두시험을 본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높은 확률로 구두시문을 실시한다.[43] 2012년부터 오비히로축산대학과 공동교육과정을 실시한다.[44] 2011년부터 학부 입학자는 전원 종합교육부에 소속되어 문과, 이과의 각 커리큘럼을 수료한 후, 2학년부터 각 학부로 진학한다.[45] 유학생만 입학 가능하며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다른 대학으로 치면 교양학과, 자유전공학과.[46] 유학생만 입학 가능하며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이학부(理學部)의 전공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학석사 통합과정이다.[47]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11, 703호(역삼동, 한덕빌딩)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서울오피스 홈페이지 참고.[48] 본관 캠퍼스 바로 위에 있는 곳은 삿포로 경마장이다.[49] 이 때문에, 홋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면 구제국대학 중 가장 신칸센 역에서 가까운 대학이 된다. 현재 가장 신칸센 역에서 가까운 구제국대학은 도호쿠대학.[50] 때문에 일부 이공계 학부생이나 연구생, 대학원생이 아닌 이상 갈 일이 없지만 여자 유학생들은 국제 기숙사가 이 근방에 있어서 지나갈 일이 많다.[51] 현재는 리노베이션 허브로 재개관[52]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아카렌가 청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 정문에 들어가기 전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53] 한편, 후루카와 강당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연구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이노우에 가쓰오 항목 참조.[54] 입구에는 쇠줄을 쳐놓았으나 들어갈 수는 있다. 그리고 길 중간에 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그 너머로 갈 수 없게 막아두었다.[55] 1936년에 나카야 우키치로 교수는 인공 눈을 개발하여 눈의 생성과정을 해명했다. 그 공적을 기념하는 기념비에는 '인공설 탄생의 땅(人工雪誕生の地)'이라고 쓰여져 있다.[56] 조치대학의 1호관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57] 물론 삿포로농학교의 교가는 1901년에 작곡된 토코시에노사치(永遠の幸, 영원의 행복). 아리시마 타케오가 작곡했다.[58] 작중에선 도쿄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라는 설정이다.[59] 2절의 가사에는 이시카리 평야에 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이시카리 평야를 바라보면서 가사를 볼 수 있는 셈.[60] 교류협정기관의 전체 리스트 링크(.pdf 파일)[61] 서울대학교는 홋카이도대학이 맨 처음 교류 협정을 맺은 한국의 대학이기도 하며, 홋카이도대학 공학부 건물 내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본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62] 재임기간은 2010.11.11 ~ 2015. 9.16.[63]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郎)와 이치카와 고이치은 1915년에 토끼 귀에 콜타르를 지속적으로 발라 인공적으로 암을 유발해내는 데에 성공하며 그 과정을 해명했다. 당시에 둘 다 노벨상 후보였으나, 1926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은 먼저 기생충이 암의 기원임을 주장한 요하네스 피비게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현재, "피비게르의 연구는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그래도 상을 한번 줬다가 다시 뺏을 수는 없기에...[64] 만약 이 둘이 1926년에 노벨상을 받았으면 이들은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며, 유카와 히데키보다 23년은 더 이른 최초의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였던 폴케 헨센(Folke Henschen)의 증언에 따르면, 노벨상 선고위원회에서 이 연구를 심사할 때 동양인에게 노벨상은 아직 너무 이르다라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65] 풀러렌의 존재를 최초로 이론적으로 예측하여 구성했지만 해당 논문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작성하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해, 1996년 풀러렌 개발 공적으로 스몰리와 크로토가 노벨상을 받을 때 수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토익 학원에서 광고 소재로 써도 좋을 듯하다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서는 네이처 저널 제384호에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66] 우리가 잘 아는 황우석도 서울대학교 임상수의학 박사과정을 마친 후 여기에서 2년간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냈다. 결말은 좋지 않았지만[67] 이 때문에 홋카이도 출신의 진학자가 상당히 줄어들어, '지역 공헌'의 면에서 보면 좋은 현상이 아니라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68] 종합입시 체제로 바뀌면서 확연히 인기가 높아졌으며, 일본의 국립대학 중에는 꽤나 도심에 위치하여 있는 편이고, 구제국대학의 네임벨류, 센터시험 점수보다 본고사 비중이 상당히 큰 점 등도 인기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69] 1차에서 수백 명이 넘는 외국인 수험생들이 몰리지만 결국 최종합격하는 일반 학부생은 매년 10명대. 사립대학들은 매년 수백 명의 학부생이 들어오는 걸 보면 상당히 문호가 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9년 기준 외국인 유학생 2,268명이고 그중 한국인은 167명. 참고로 학부 유학생의 인원은 대학원 유학생의 1/10 미만이다.[70] 불판에 숙주, 양파, 양배추, 당근, 호박, 피망 등의 채소와 양고기를 구워서 먹는 홋카이도 대표 음식. 양고기 특유의 냄새가 많이 난다.[71] 심지어 숯을 버리는 쓰레기통까지 있었다. 물론 다른 쓰레기들은 모두 가져가야 된다.[72] 비슷한 사례로, 성균관대학교 중국인 유학생들의 컴퓨터 QQ 테러가 있었고, 이화여자대학교에 관광 온 중국인들의 도서관 및 강의실 침입이 있다. 이와 같은 사례 때문인지는 몰라도, 2016년 시점에서 게이오기주쿠대학 미타 캠퍼스에서도 견학이 가능하냐고 물어보면 반드시 건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편이다.[73] 마라톤 종목은 도쿄의 무더위로 인해 상대적으로 시원한 홋카이도 삿포로시에서 치러졌다.
“Boys, be ambitious! Be ambitious not for money or for selfish aggrandizement, not for that evanescent thing which men call fame. Be ambitious for the attainment of all that a man ought to be.”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돈이나 이기심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명성이라 부르는 덧없는 것을 위해서도 말고. 단지 사람이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추구하는 야망을.)[4] 삿포로농학교는 일본 최초의 근대적 대학으로 여겨지고 있다. 여러 학과가 있었고, 일례로 삿포로농학교 토목공학과는 무로란공업대학의 전신이 되었다.[5] 세계적으로 일반적으로 카운트하는 방법인 동문·연구원·교직원 수를 합산한 기준으로 교직원으로도 201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네기시 에이이치 교수, 202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베냐민 리스트 주임연구원 등이 재직했다. 리스트의 경우는 홋카이도대학 재직 중에 수상했다. #[6] 슈퍼글로벌대학의 지원이 끝난 이후, 문부과학성이 연구력 강화를 위해 보조금을 지원하는 제도인 지역중핵 및 특색 있는 연구대학(J-PEAKS)에 채택되었다.[7] 때문에 학부/연구과를 졸업하면 일본 고도인재 외국인 대상 포인트 우대제도 신청 시 가산점 10점을 받을 수 있다.[8] 도쿄 토다이(東大; 동대), 교토 쿄다이 (京大; 경대), 도호쿠 호쿠다이 (北大; 북대), 규슈 큐다이 (九大; 구대), 홋카이도 카이다이 (海大; 해대), 게이조 조다이 (城大; 성대), 다이호쿠 다이다이 (臺大; 대대), 오사카 한다이 (阪大; 판대), 나고야 메이다이 (名大; 명대) 등[9] 북대(北大)는 과거 도호쿠제국대학의 약칭이었으나, 현재는 홋카이도대학을 지칭하는 데 통용되면서, 현재 도호쿠대학은 북대(北大) 대신 동북대(東北大) 또는 톤페이라고 불리고 있다.[10]
참고로 홋카이도대학 한국 동문회의 이름도 한국연령초회(韓国延齢草会)이다.[11] 우아한 흰색 건물로, 당시에는 백악관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1973년에 건물 해체.[12] 개척사 소속의 학교로,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었다.[13]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14] 1891년도 지도 참조. 현재의 삿포로시 시계탑이 위치한 곳이 원래 캠퍼스.[15] 도호쿠제국대학이 설립된 시기는 1907년이지만, 사실 이 당시에는 도호쿠의 센다이 시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고, 삿포로농학교가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으로 승격함에 따라 제국대학이 된 삿포로농학교의 시설만이 홋카이도에 위치해 있었다. 삿포로농학교 외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1911년에 본격적으로 센다이 시에 도호쿠제국대학의 캠퍼스를 조성하기 전까지는 삿포로농학교 교장이었던 사토 쇼스케가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 학장으로서 도호쿠제국대학 총장의 직무를 겸했다. 그 후 삿포로농학교가 다시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이관됨에 따라 사토 쇼스케는 홋카이도제국대학의 초대 총장까지 역임하게 된다.[16]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農科大學官制), 관보 원문. 메이지 40년(1907년) 칙령 제237호, 1907년 6월 22일 공포.[17] 본래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졸업해야 하는 구제고등학교가 홋카이도에는 세워져 있지 않았고,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승격된 삿포로농학교에는 본과 진입 전 교육을 담당한 예수과(豫修科)가 있었으므로 이를 개편한 대학예과를 설치했다. 후에 홋카이도제국대학이 되는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은 예과 수료자를 최우선으로 입학시키고 결원이 발생하는 경우에만 타 구제고등학교 졸업자를 받았고,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으로 분리되면서 예과도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가 되었다. 예과는 종전 후인 1947년 4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법문학부 설치의 모체가 되었으며 1950년 3월 폐지되었다. 학부 예비교육의 기능은 1949년 6월 설치된 교양학과(의학전문부 건물을 사용. 참조)/일반교양부(1951년 4월)를 거쳐 오늘날 종합교육부와 케이테키료(기숙사)로 계승되었다(참조). 이러한 제국대학예과 제도는 이후 설립된 경성제국대학과 다이호쿠제국대학에도 도입되었다.[18] 1935년 이전 예과 건물은 목조였다고 한다. 아래 사진 및 링크 참조. [19] 1907년 6월 22일 공포된 메이지 40년(1907년) 칙령 제237호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관제(東北帝國大學農科大學官制, 관보 원문) 제9조 제1항(농과대학에 대학예과, 토목공학과, 임학과 및 수산학과를 부설하고, 조교전임 16명과 조교수전임 7명을 둔다.)에 의거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 설치.[20] 법제상 홋카이도제국대학을 창설하고, 도호쿠제국대학 농과대학을 홋카이도제국대학 소속으로 이관.[21] 홋카이도제국대학관제(北海道帝國大學官制), 관보 원문. 다이쇼 7년 칙령 제44호, 1918년 4월 1일 공포.[22] 다이쇼 7년(1918년) 칙령 제44호 홋카이도제국대학관제 제11조에 의거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로 개편.[23] 모집 정원의 경우, 1919년에는 의학부 설치에 따라 예과 모집정원 200명(農類(농학부 진학반) 120명, 醫類(의학부 진학반) 80명)으로 증원되었고, 1922년에는 공학부 설치에 따라 모집정원 320명(農類 영어반 80명, 農類 독일어반 40명, 醫類(독일어) 80명, 工類(영어) 120명)으로 증원, 1924년에는 당해 입학생부터 農類 전원을 영어반으로 편성하였다. 農類, 工類는 영어를 제1외국어로 이수하고 醫類는 독일어를 제1외국어로 한 셈.[24] 농학부, 의학부로 구성된 2학부 체제[25]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로 구성된 3학부 체제[26]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로 구성된 4학부 체제[27] 현, 홋카이도대학 촉매과학연구소[28] 현, 홋카이도대학 전자과학연구소[29]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법문학부로 구성된 5학부 체제[30]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는 삿포로농학교 예수과(預修科)가 모체로 1907년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예과를 거쳐 1918년 홋카이도제국대학 예과가 되었다. 문단 하단 참조.[31]
삿포로농학교 수산학과(1907년 2월)로 설립되고 도호쿠제국대학농과대학 수산학과(1907년 9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부속 수산전문부(1918년)를 거쳐 1935년에 하코다테고등수산학교로 분리독립하였다. 1944년에 하코다테수산전문학교로 개칭하였고 1949년에 다시 홋카이도대학에 합병되어 홋카이도대학 수산학부가 되었다. 링크 참조.[32]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법문학부, 교육학부의 7학부로 구성[33]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경학부, 교육학부 등 8학부 체제[34]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경학부, 교육학부 등 9학부 체제[35]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0학부 체제[36]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약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1학부 체제[37] 농학부, 수의학부, 의학부, 치학부, 약학부, 공학부, 이학부, 수산학부, 문학부, 법학부, 경제학부, 교육학부 등 12학부 체제[38] TOEIC, TOEFL 성적. 단, 공학부 환경사회공학과 사회기반학코스 한정.[39] 단, 의학부 의학과의 경우 TOEFL, TOEIC 제출 필수.[40] 이과의 경우에는 일본어, 기술, 물리・화학・생물(택 2), 수학(코스 2). 그리고 문과의 경우에는 일본어, 기술, 종합과목, 수학(코스 1).[41] 즉, 무슨 영어시험 성적을 제출하는지에 대한 제한은 자유로워서, PTE, G-TELP, TEPS 등 자신의 영어 실력을 증명할 수 있는 시험이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다만 의학과는 TOEFL, TOEIC만 제출 가능.[42] 학부에 따라 실시하는 시험 항목이 다르니 자세한 내용은 모집 요강 참조. 한편 공학부 등의 입시 요강에는 면접에서 구두시험을 본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으나, 높은 확률로 구두시문을 실시한다.[43] 2012년부터 오비히로축산대학과 공동교육과정을 실시한다.[44] 2011년부터 학부 입학자는 전원 종합교육부에 소속되어 문과, 이과의 각 커리큘럼을 수료한 후, 2학년부터 각 학부로 진학한다.[45] 유학생만 입학 가능하며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다른 대학으로 치면 교양학과, 자유전공학과.[46] 유학생만 입학 가능하며 모든 수업은 영어로 이루어진다. 이학부(理學部)의 전공을 선택할 수 있으며, 학석사 통합과정이다.[47]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11, 703호(역삼동, 한덕빌딩)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서울오피스 홈페이지 참고.[48] 본관 캠퍼스 바로 위에 있는 곳은 삿포로 경마장이다.[49] 이 때문에, 홋카이도 신칸센이 개통되면 구제국대학 중 가장 신칸센 역에서 가까운 대학이 된다. 현재 가장 신칸센 역에서 가까운 구제국대학은 도호쿠대학.[50] 때문에 일부 이공계 학부생이나 연구생, 대학원생이 아닌 이상 갈 일이 없지만 여자 유학생들은 국제 기숙사가 이 근방에 있어서 지나갈 일이 많다.[51] 현재는 리노베이션 허브로 재개관[52]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아카렌가 청사) 옆에 위치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 정문에 들어가기 전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53] 한편, 후루카와 강당은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연구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이노우에 가쓰오 항목 참조.[54] 입구에는 쇠줄을 쳐놓았으나 들어갈 수는 있다. 그리고 길 중간에 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그 너머로 갈 수 없게 막아두었다.[55] 1936년에 나카야 우키치로 교수는 인공 눈을 개발하여 눈의 생성과정을 해명했다. 그 공적을 기념하는 기념비에는 '인공설 탄생의 땅(人工雪誕生の地)'이라고 쓰여져 있다.[56] 조치대학의 1호관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하다.[57] 물론 삿포로농학교의 교가는 1901년에 작곡된 토코시에노사치(永遠の幸, 영원의 행복). 아리시마 타케오가 작곡했다.[58] 작중에선 도쿄의 한 대학에서 강사로 활동 중이라는 설정이다.[59] 2절의 가사에는 이시카리 평야에 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에서 이시카리 평야를 바라보면서 가사를 볼 수 있는 셈.[60] 교류협정기관의 전체 리스트 링크(.pdf 파일)[61] 서울대학교는 홋카이도대학이 맨 처음 교류 협정을 맺은 한국의 대학이기도 하며, 홋카이도대학 공학부 건물 내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본 오피스가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62] 재임기간은 2010.11.11 ~ 2015. 9.16.[63]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郎)와 이치카와 고이치은 1915년에 토끼 귀에 콜타르를 지속적으로 발라 인공적으로 암을 유발해내는 데에 성공하며 그 과정을 해명했다. 당시에 둘 다 노벨상 후보였으나, 1926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은 먼저 기생충이 암의 기원임을 주장한 요하네스 피비게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현재, "피비게르의 연구는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그래도 상을 한번 줬다가 다시 뺏을 수는 없기에...[64] 만약 이 둘이 1926년에 노벨상을 받았으면 이들은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며, 유카와 히데키보다 23년은 더 이른 최초의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였던 폴케 헨센(Folke Henschen)의 증언에 따르면, 노벨상 선고위원회에서 이 연구를 심사할 때 동양인에게 노벨상은 아직 너무 이르다라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65] 풀러렌의 존재를 최초로 이론적으로 예측하여 구성했지만 해당 논문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만 작성하는 바람에 주목받지 못해, 1996년 풀러렌 개발 공적으로 스몰리와 크로토가 노벨상을 받을 때 수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