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17 18:02:43

손응룡

파일:손응룡.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우전(雨田)
출생 1920년 5월 5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천리 317번지
(현 함경북도 어랑군 수남리)
사망 2018년 8월 28일 (향년 98세)
경기도 남양주시
직업 교수
학력 용정 광명중학교[1] (졸업)
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 (농정경제학과 / 졸업)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농학 / 학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6묘역-20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 내용
3.1. 상세
4. 상훈5. 저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고려대학교 명예교수(생명과학대학 생명공학부).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20년 5월 5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용천리 317번지(현 어랑군 수남리)에서 태어났다. 그 뒤 형의 직장을 따라 가족이 중화민국 지린성 연길현 육도구 용정촌(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으로 이주하면서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용정 광명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일본으로의 유학을 결정했고, 1939년 3월, 신경특별시봉천시를 거쳐 다롄에서 요코하마행 여객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일본 9대 농업학교 중에 하나인 우쓰노미야고등농림학교(宇都宮高等農林学校)[2]농정경제학과에 입학해 학교를 다녔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고등농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1942년 3월, 우츠노미야고등농림학교 졸업성적 상위 10%만 입학할 수 있었던 홋카이도제국대학(현, 홋카이도대학) 농학부 농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당시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홋카이도제국대학 조선인 학생 비밀결사 북우회(北友會)를 결성하고 있었고, 손응룡 선생은 입학과 동시에 그 곳에 가입했다. 북우회에 가입한 선생은 당시 교포들과 그 자녀들에게 민족 단결과 학도병제도 반대,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비롯해 조국독립의 필요성과 방법 등을 가르치고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3]되어 삿포로 토요히라 육군 헌병유치장을 거쳐 홋카이도형무소 지소에 이감된다. 북우회 활동과 관련해 조직 활동을 하게 된 계기, 회합장소, 시간, 대화내용 등을 약 6개월 간 취조받고, 1944년 5월 12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의 금고형을 선고받게 된다. 당시 '북우회' 사건으로 선생과 함께 구속됐던 유학생들 중 북우회 회장 김현구 4년, 이배함·엄상국 2년 6개월, 장종원·임종묵 2년 등 각각 금고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된다. 나에보(苗穂)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해방 후, 1945년 10월 7일 형집행정지[4]로 풀려나게 된다.

그 후 대학에 복학하여 1946년 2월 홋카이도제국대학 농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46년 농림부, 1949년 대구농과대학 교수를 거쳐, 1954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교수로 부임했다.

1956년 9월 미국 미시시피주립대학교 농과대학 유학

1960년 2월 미국 미시시피주립대학교 농학박사 학위 취득

1960년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교수 복직

1967년 8월 8일 재단법인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이사선임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작물학회 부회장,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제11대 한국작물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5년, 한국연초학회 회장직을 맡았다.

199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18년 8월 28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8세.

3. 독립운동 내용

1942. 3월 북해도(北海道) 제국대학(帝國大學) 재학중(在學中) 비밀 결사(秘密結社) 북우회(北友會)를 조직(組織)하고 한국유학생(韓國留學生)을 규합(糾合)하여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을 위해 학생(學生), 일반 교포(一般僑胞) 및 징용자(徵用者)의 민족의식 고취(民族意識鼓吹)와 독립사상(獨立事想)을 앙양(昻揚)하기 위하여 계속(繼續)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2년형(年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3.1. 상세

  • 첫째, 일본의 국력이 전쟁으로 피폐해졌을 때 우리가 일제히 봉기하기 위하여 우선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각자가 학생징용자·일본교포·징용위안부들에게 민족의식의 앙양 및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 둘째, 중국인 유학생들과의 친교를 돈독히 하면서 일본의 패전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한국독립지도체제와 후원방법을 협의하였다.
  • 셋째, 이배함·이종묵과 함께 교포가정을 방문하여 그 자녀들에게 한글과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 넷째, 독일(獨逸)국민에게 고함, 한국 농업지대(韓國農業地帶)·삼민주의(三民主義)등의 도서를 탐독하고 평가하면서 독립방법을 연구하였다.
  • 다섯째, 탄광이나 징용에 끌려간 노무자 및 각 도시에 산재해 있는 유흥업소의 부녀자를 계몽하는 방법을 협의하는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여 나갔다.

4. 상훈

녹색혁명훈장을 비롯해 국민훈장 동백장, 건국훈장 애족장 등을 수여받았다.

5. 저서

  • 雨田漫錄(우전만록) 後悔(후회)없이 살아온 길 : 손응룡박사 자전에세이
  • (공예작물학)工藝作物學
  • 생장조절제를 이용한 연초제조법 건조법 및 품질개선에 관한 연구
  • (식물생리학)植物生理學
  • 함께 걷는 길
  • 농.생물통계학(農.生物統計學)

[1] 1946년 9월 16일, 은진중학교(恩眞中學), 동흥중학교(東興中學), 대성중학교(大成中學), 광명여자중학(光明女子中學), 명신여자중학교(明新女子中學)이 용정중학교(龍井中學)로 통합되었다.[2]우쓰노미야대학 농학부의 전신.[3] 나중에 알고보니 북우회를 밀고한 사람이 '다가야마'라는 조선인 헌병보라서, '조선인이 조선인을 고발한 사건인데 우리가 어떻게 관대하게 처벌할 수 있겠느냐'라는 담당 검사의 말을 들었다는 증언이 있다.[4] 연합군사령부정치범 석방 결정이 늦어지면서 형집행정지도 늦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