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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우치무라 간조 [ruby(内村, ruby=うちむら)] [ruby(鑑三, ruby=かんぞう)] |
출생 | 1861년 3월 26일 |
에도 코이시가와 (現 도쿄도 분쿄구 코이시가와) | |
사망 | 1930년 3월 28일 (향년 69세) |
직업 | 학자, 사상가 |
국적 | [[일본 제국| ]][[틀:국기| ]][[틀:국기| ]] |
종교 | 개신교 (감리회/무교회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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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개신교 사상가. 서구적인 기독교가 아닌, 무교회주의를 제창했다.2. 생애
도쿄영어학교[1]를 졸업 후, 삿포로농학교(현, 홋카이도대학) 2기[2]로 입학. 학생 시절의 신앙 생활로 기독교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학교에서는 수산학을 전공하였고[3], 농학사 학위를 받고 수석 졸업하였다.그 후, 대학교를 졸업한 1882년 우치무라와 친구들은 삿포로 기독교회라는 서구의 교회가 아닌 일본적 교회를 설립하고자 했다.[4] 또한 1881년에 설립한 삿포로 YMCA의 부회장 역을 맡았다.
1884년 미국에서의 사회운동과 애머스트 칼리지 유학으로 신앙의 실천의 중요성과 신앙에 대한 생각을 굳혔고, 하드포드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신학 교육에 실망하고 자퇴하였다.
1888년 일본에 돌아왔고, 1889년 부터는 세계 최초의 수산교육기관인 수산전습소(水産伝習所)(현, 도쿄해양대학)에서 수산동물학을 가르쳤다.
1890년 도쿄에 있는 제일고등중학교[5]의 촉탁 교원이 됐고 이 곳에서 이듬해에 유명한 "불경사건"이 일어난다. 천황의 《교육칙어(敎育勅語)》봉독식에서 우치무라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천황의 친필 서명에 경배하는 것을 거부했는데[6], 이것이 천황에 대한 불경으로 비난 받아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우치무라는 학교에서 해임됐고 설상가상으로, 사회적인 비난으로 스트레스를 받은 아내가 와병 중에 사망하는 일까지 생긴다.
1897년 이후로는 '만조보'의 기자와 월간지 '성서지' 연구의 간행인으로도 일했다. 1921년에는 도쿄의 한복판에서 일요일마다 로마서를 강의하여 수많은 청중들이 크게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3. 이념
그의 신학은 기존교회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존중한 복음주의이다. 교회가 아닌 성서가 기독교 신앙의 원천이라는 오직성서(Sola Scriptura)이다. 그는 성서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고 고백하였으며,"나의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에 대한 감사일 뿐이다. 그러니 나의 신앙은 낡았고 구식이다"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강조하였다.그가 무교회주의를 주장한 이유도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가시적인 교회, 즉 예배당이 아닌 성서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기독교 신앙의 유일한 근거는 성서뿐, 교회와 그 관습은 기독교를 담아내는 껍데기라고 하였다. 구안록에서는 죄인인 사람은 스스로 평안을 구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에 평안을 얻는다고 했다. 출처
하지만 그의 이러한 신학은 개신교계 주류에게 크게 비판받았다. 물질적인 장소로써의 교회, 신학, 전통, 관습을 무조건 버리는 형태의 교회는 역설적으로 성경에 대한 자의적, 이단적 해석을 용인하게 되고, 교회 자체가 자멸할 수 있는 치명적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우치무라 간조의 신학은 퀘이커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의 친구인 니토베 이나조는 확실하게 퀘이커이다.
오늘날 일본의 개신교가 힘을 쓰지 못하는 여러 원인 중 하나로 우치무라의 실책이 지목된다. 그의 사상과 서구식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함께 받은 일본 개신교계가 결국 신사 참배 등 비기독교, 반기독교적인 행위를 용인하고 타협하는 쪽을 나갔기 때문이다.
4. 기타
- 유틀란트 반도는 한국의 중년층 이상 세대들에게 엔리코 달가스의 황무지 개간 일화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정작 덴마크 내에서는 그룬트비만 유명하고, 달가스는 아예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7] 오히려 한국과 일본에서 더 유명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이 컸다. 우치무라는 1911년 '덴마크 이야기'(デンマルク国の話)란 강연에서 처음으로 위 일화를 언급했으며 이것이 글로 펴내졌는데, 이후 잊혀졌다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 재발견되어, 일본도 이런 식으로 재건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이용되었다.
- 우치무라 유시는 우치무라 간조의 아들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야구기구 제 3대 커미셔너를 지내기도 했으며 많은 야구서적을 번역했다.
[1] 니토베 이나조와 동기. 참고로 도쿄영어학교는 도쿄대학 예비문으로, 졸업하면 자동적으로 도쿄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당시 삿포로농학교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학사호를 받을 수 있는 근대적인 대학에다가 돈도 적게 들었으므로 이 길을 선택하게 된다.[2] 니토베 이나조와 미야베 킨고의 동기.[3] 일본 최초의 수산학도로 알려져 있다.참고 문헌[4] 교회는 5명의 위원들에 의해 공동으로 운영되었는데, 일상적인 교회의 일은 그들이 함께 처리했고 그 외의 것은 언제나 투표로 처리했다. 또 교회의 회원은 의무적으로 교회를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5] 현, 도쿄대학 교양학부, 치바대학 의학부[6] 절을 하기는 했는데, 원래 천황에게 하게끔 규정된 「최경례(最敬礼, 45도로 몸을 숙인다)」가 아닌 그냥 「경례(30도)」를 한 것이 문제가 됐다.[7] 정확히 말하면 달가스 본인보다는, 그가 황무지 개간을 위해 설립한 히스 협회(hedeselskabet)가 더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