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5 06:48:44

험프리 보가트

험프리 보거트에서 넘어옴
험프리 보가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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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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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2위3위4위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7위8위9위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12위13위14위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22위23위24위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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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틀: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Academy Award for Best Ac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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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1929년)
제2회
(1930년)
제3회
(1931년)
제4회
(1932년)
제5회
(1933년)
에밀 야닝스
(최후의 명령)
(육체의 길)
워너 백스터
(추억의 아리조나)
조지 알리스
(디즈레일리)
라이오넬 배리모어
(자유의 혼)
프레드릭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월레스 비어리
(챔프)
제6회
(1934년)
제7회
(1935년)
제8회
(1936년)
제9회
(1937년)
제10회
(1938년)
찰스 로튼
(헨리 8세)
클라크 게이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빅터 맥라글렌
(밀고자)
폴 무니
(과학자의 길)
스펜서 트레이시
(굿바이 마이 라이프)
제11회
(1939년)
제12회
(1940년)
제13회
(1941년)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스펜서 트레이시
(소년의 거리)
로버트 도나트
(굿바이 미스터 칩스)
제임스 스튜어트
(필라델피아 스토리)
게리 쿠퍼
(요크 상사)
제임스 카그니
(성조기의 행진)
제16회
(1944년)
제17회
(1945년)
제18회
(1946년)
제19회
(1947년)
제20회
(1948년)
폴 루카스
(라인의 감시)
빙 크로스비
(나의 길을 가련다)
레이 밀랜드
(잃어버린 주말)
프레드릭 마치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로널드 콜먼
(이중 생활)
제21회
(1949년)
제22회
(1950년)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로런스 올리비에
(햄릿)
브로데릭 크로포드
(모두가 왕의 부하들)
호세 페레
(시라노)
험프리 보가트
(아프리카의 여왕)
게리 쿠퍼
(하이 눈)
제26회
(1954년)
제27회
(1955년)
제28회
(1956년)
제29회
(1957년)
제30회
(1958년)
윌리엄 홀든
(제17 포로수용소)
말론 브란도
(워터프론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마티)
율 브리너
(왕과 나)
알렉 기네스
(콰이 강의 다리)
제31회
(1959년)
제32회
(1960년)
제33회
(1961년)
제34회
(1962년)
제35회
(1963년)
데이비드 니븐
(애수의 여로)
찰턴 헤스턴
(벤허)
버트 랭카스터
(엘머 갠트리)
막시밀리안 셸
(뉘른베르크의 재판)
그레고리 펙
(앵무새 죽이기)
제36회
(1964년)
제37회
(1965년)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시드니 푸아티에
(들백합)
렉스 해리슨
(마이 페어 레이디)
리 마빈
(캣 벌루)
폴 스코필드
(사계절의 사나이)
로드 스타이거
(밤의 열기 속으로)
제41회
(1969년)
제42회
(1970년)
제43회
(1971년)
제44회
(1972년)
제45회
(1973년)
클리프 로버트슨
(찰리)
존 웨인
(트루 그릿)
조지 C. 스콧
(패튼 대전차군단)
진 해크먼
(프렌치 커넥션)
말론 브란도
(대부)
제46회
(1974년)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제50회
(1978년)
잭 레먼
(호랑이를 구하라)
아트 카니
(해리와 톤토)
잭 니콜슨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피터 핀치
(네트워크)
리처드 드레이퍼스
(굿바이 걸)
제51회
(1979년)
제52회
(1980년)
제53회
(1981년)
제54회
(1982년)
제55회
(1983년)
존 보이트
(귀향)
더스틴 호프먼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로버트 드 니로
(분노의 주먹)
헨리 폰다
(황금 연못)
벤 킹슬리
(간디)
제56회
(1984년)
제57회
(1985년)
제58회
(1986년)
제59회
(1987년)
제60회
(1988년)
로버트 듀발
(텐더 머시스)
F. 머레이 에이브러햄
(아마데우스)
윌리엄 허트
(거미여인의 키스)
폴 뉴먼
(컬러 오브 머니)
마이클 더글러스
(월 스트리트)
제61회
(1989년)
제62회
(1990년)
제63회
(1991년)
제64회
(1992년)
제65회
(1993년)
더스틴 호프먼
(레인 맨)
다니엘 데이루이스
(나의 왼발)
제러미 아이언스
(행운의 반전)
안소니 홉킨스
(양들의 침묵)
알 파치노
(여인의 향기)
제66회
(1994년)
제67회
(1995년)
제68회
(1996년)
제69회
(1997년)
제70회
(1998년)
톰 행크스
(필라델피아)
톰 행크스
(포레스트 검프)
니콜라스 케이지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제프리 러시
(샤인)
잭 니콜슨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제71회
(1999년)
제72회
(2000년)
제73회
(2001년)
제74회
(2002년)
제75회
(2003년)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다워)
케빈 스페이시
(아메리칸 뷰티)
러셀 크로우
(글래디에이터)
덴젤 워싱턴
(트레이닝 데이)
에이드리언 브로디
(피아니스트)
제76회
(2004년)
제77회
(2005년)
제78회
(2006년)
제79회
(2007년)
제80회
(2008년)
숀 펜
(미스틱 리버)
제이미 폭스
(레이)
필립 시모어 호프먼
(카포티)
포레스트 휘태커
(라스트 킹)
다니엘 데이루이스
(데어 윌 비 블러드)
제81회
(2009년)
제82회
(2010년)
제83회
(2011년)
제84회
(2012년)
제85회
(2013년)
숀 펜
(밀크)
제프 브리지스
(크레이지 하트)
콜린 퍼스
(킹스 스피치)
장 뒤자르댕
(아티스트)
다니엘 데이루이스
(링컨)
제86회
(2014년)
제87회
(2015년)
제88회
(2016년)
제89회
(2017년)
제90회
(2018년)
매튜 매커너히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에디 레드메인
(사랑에 대한 모든 것)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케이시 애플렉
(맨체스터 바이 더 씨)
게리 올드만
(다키스트 아워)
제91회
(2019년)
제92회
(2020년)
제93회
(2021년)
제94회
(2022년)
제95회
(2023년)
라미 말렉
(보헤미안 랩소디)
호아킨 피닉스
(조커)
안소니 홉킨스
(더 파더)
윌 스미스
(킹 리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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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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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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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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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험프리 보가트
Humphrey Bogart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322 Vine Street
}}}}}}}}}}}} ||

<colbgcolor=#092a33><colcolor=#fff> 험프리 보가트
Humphrey Bogart
파일:Humphrey Bogart.jpg
본명 험프리 드포레스트 보가트
Humphrey DeForest Bogart
별명 보기
Bogey
출생 1899년 12월 25일
미국 뉴욕 주 뉴욕 시
사망 1957년 1월 14일 (향년 57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학력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
신체 173cm
활동 1921년1956년
배우자 헬렌 멘켄 (1926년 ~ 1927년, 이혼)
메리 필립스 (1928년 ~ 1937년, 이혼)
매요 메토(Mayo Methot) (1938년 ~ 1945년, 이혼)
로렌 바콜 (1945년 결혼)
자녀 아들 스티븐 험프리 보가트 (1949년생)
딸 레슬리 험프리 보가트 (1952년생)
계급 미국 해군 상병
서명 파일:Humphrey_Bogart_signature.svg.pn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사생활4. 사망5. 출연작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ezgif-3-6727236666.gif
미국배우.

트렌치 코트와 중절모를 쓴 탐정 캐릭터로 널리 알려졌으며, 미국 탐정의 대명사 샘 스페이드와 필립 말로역을 모두 맡았던 하드보일드의 남자. 유명한 명대사는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남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1]가 있다.

필름 누아르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해당 장르를 개척한 배우로서 필름 누아르의 대표격으로 평가받는 배우이다. 미국에서는 Badass의 상징적 존재이자 사실상 영화 연기 내에서 쿨한 터프가이, 입체화 된 하드보일드 캐릭터를 처음 선보인 배우이다. 《카사블랑카》의 로맨틱한 터프가이나 《몰타의 매》의 하드보일드 이미지에서부터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에서 보여주는 탐욕으로 뒤틀려 망가져가는 추악한 모습이나 《케인호의 반란》의 퀴그 함장 같이 PTSD로 무너져내린 초라하고 옹졸한 인간까지 두루 연기하며 스타 이미지에 매몰되지 않는 생동감 있는 인물상들을 창조해냈다. 보가트 이전의 주연급 배우들이 주로 전형적인 착한 주인공이나 코미디 캐릭터들에 불과했다는것만 봐도 영화 연기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인물이다. 어찌 보면 존 가필드를 거쳐 말론 브란도 이후 물밀듯이 쏟아져 나온 다양한 개성의 성격파 배우들의 큰 틀을 프레드릭 마치와 함께 미리 잡아준 배우라고 볼 수 있다. 훗날 AFI(미국영화협회) 선정 가장 위대한 남배우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2. 생애 및 활동

무려 1899년생으로 동갑내기 제임스 캐그니와 함께 할리우드 남배우계의 맏형 라인이다. 참고로 이 둘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뉴욕 출신으로 원래는 배우를 꿈꾸던 사람이 아니었다. 유명한 뉴욕 토박이의 대명사로 가문을 흥하게 한 조상 대부터 뉴욕에 정착한 것이 아니라, 조상이 처음 정착한 곳이 나중에 발전해 뉴욕이 되었다. 집안이 매우 부유했다. 할머니는 상속녀였고, 아버지[2]는 잘 나가는 심장/폐 전문의였으며, 어머니[3]는 당시 가장 많은 돈을 받던 유명 삽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험프리 보가트 본인도 미국 최고 명문 보딩스쿨로 꼽히는 학교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를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모르핀에 중독돼 1934년 많은 빚을 남기며 사망했고, 여동생 하나는[4] 알코올 의존증으로 34살에 사망했고, 다른 여동생은[5] 평생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했는데 병원비를 보가트가 다 도맡았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이런저런 다양한 직업을 거친 뒤 1921년에 본격적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1920년대에는 브로드웨이에서만 일하면서 연기생활을 이어 나갔다. 29살이 되어서야 처음 영화에 등장했다. 1929년 월가 대폭락 사건으로 인해 연극 생활에 문제가 발생하자 할리우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1936년, 《화석의 숲》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쳐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후 《더럽혀진 얼굴의 천사》같은 갱스터 영화에 주로 출연하였다.

뉴욕 토박이인데, 그냥 토박이가 아니라 뿌리가 매우 깊다. 그의 7대조 할머니인 사라 라펠리에는 뉴욕주에서 태어난 최초의 백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뉴욕 자체가 그의 가문과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당시 뉴욕 지역의 식민지 개척사를 보면 보가트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냉정하고 날카로운 눈매와 턱선, 깡마른 체구등이 탐정 역할에 제격이었는지 그는 1941년부터 주연을 맡아, 《하이 시에라》, 《몰타의 매》같은 탐정 영화에서 뛰어난 연기를 펼쳤다. 다음해에는 본인의 최고 흥행작이자 명작으로 아직까지 회자되는 《카사블랑카》에 출연하여 주옥같은 연기로 인기를 얻게 된다.

네 번째 아내 로렌 바콜은 "귀족 출신"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일종의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그는 로렌 바콜과 함께 출연한 《소유와 무소유》, 《빅 슬립》, 《다크 패시지》, 《키 라르고》에 나왔다. 그는 《시에라 마드레의 황금》에서도 출연하였으며 1951년에는 《아프리카의 여왕》으로 마침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이후로도 《사브리나》, 《케인 호의 반란》에 출연하였으며 마지막으로 《하더 데이 폴》에 출연하였다.

3. 사생활

1937년 영화촬영장에서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였던 세 번째 아내 매요 메토를 만났다. 둘의 결혼생활은 부부싸움으로 아주 엉망이었다. 메토는 별명이 꽐라[6]일 정도로 유명한 알콜중독우울증 환자였다. 그럼에도 보가트는 쉽게 메토를 떠나지 못해서 <소유와 무소유>를 찍으면서 만난 로렌 바콜을 여러 번 내버려두고 메토에게 달려가 바콜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나 결국엔 이혼을 결심하고 1945년 5월 21일 바콜과 결혼했다. 결혼식은 보가트의 절친이었던 작가 루이스 브롬필드(Louis Bromfield)의 집인 오하이오주 루카스(Lucas)의 말러바 농장(Malabar Farm)에서 이뤄졌다. 이곳은 혁신적인 농사 기법을 도입했던 대농장으로,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농장"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했다. 바콜과 결혼한 뒤엔 바콜에게만 충실하게 지냈다.

4. 사망

1956년 과도한 흡연으로 인해 후두암이 발병하면서 수술을 받았지만 병이 깊어져갔다. 결국 1년도 못가 1957년 1월 14일, 만 57세로 세상을 떠난다. 사망 당시 몸무게가 40킬로그램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병색이 깊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캐서린 헵번스펜서 트레이시가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왔고 보가트도 이제 당장 죽을 몸임을 알아서인지 덤덤하게 이 둘을 맞이했다고 한다.

5. 출연작

6. 여담

  • 험프리 보가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바로 담배이다. 지금이야 담배에 대한 인식이 워낙 안 좋고 방송에서 흡연 장면을 모자이크 처리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7] 보가트는 당시 그가 출연하는 영화에서 멋드러지게 담배를 태우는 모습으로 흡연의 아이콘이었고 뭇 남성들의 로망이었다. 오죽하면 이지 라이더 삽입곡 중에서 Don’t Bogart That Joint, 즉 '보가트처럼 대마초 피우지 마' 라는 곡이 있는데, 여기서 보가트는 '독차지 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인다. 담배를 가장 멋지게 피우는 배우를 뽑으면 부동의 1위이기도 했다. 험프리 보가트의 사망 원인은 후두암이었는데, 이는 실제로도 엄청난 골초였던 그였기에 담배로 인한 후두암이 발생한 것이다.
  • 냉전 시대에 미국 영화계에 불어닥친 매카시즘 열풍에 적극적으로 반항하던 배우 중 하나였다.
  • 는 173cm. 당대 배우 치곤 그다지 별로 큰 편은 아니었기에 영화 촬영 때는 키높이 신발을 신었다는 일화와 카사블랑카 출연 당시 상대역 잉그리드 버그만이 175cm로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 기준으로도 여자로는 상당한 장신이라 사과 상자 위에 올라가 포옹씬을 찍었다는 일화가 있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난 바람둥이로 1000명 가량의 여성과 잠자리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여성편력은 오히려 그 자신이 게이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한다.
  •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ntessa)>(1954)에서의 보가트는 평론가들로부터 미스캐스팅으로 여겨지고 있다.
  • 리처드 버튼과 절친한 사이였다. 보가트가 사망하자 버튼 부부는 보가트의 8살 짜리 아들을 극장에 데리고 다니는 등 돌봐주었다.
  • 버튼과 바콜은 둘이 바람핀 것처럼 꾸며 보가트를 곯려주려한 적이 있다. 보가트가 일을 하러 집을 비운 사이 버튼은 안방에서 보가트의 잠옷을 입고 기다렸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보가트는 버튼을 본체 만체하고 바콜에게만 "나 왔어, 꼬맹아"라고 하고 옆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장난을 보기 좋게 실패 당한 버튼이 "보기, 내가 네 잠옷 입고 있는 거 안 보여?!"라고 소리 쳤는데, 보가트는 "어. 알아. 이제 벗어."라고 대꾸했다.


[1] Here's looking at you, kid.[2] Belmont DeForest Bogart.[3] Maud Humphrey.[4] Catherine.[5] Frances.[6] Sluggy.[7] 사실 대한민국을 제외하면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흡연 장면을 완전검열하는 국가는 아직도 그렇게 많지는 않다. 2010년대유럽, 일본 그리고 미국 드라마에서도 담배는 물론이고 전자담배대마초 흡연씬을 아무렇지 않게 내보일 정도이다. 게다가 영화에서는 누구나 다 알다시피 동서를 막론하고 지금도 거리낌없이 흡연장면이 나온다. 단,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에 의한 검열이 아니라 방송사들 자체 협약에 의해 검열된다. 흡연장면이 불법인 것은 아니나 방송사 자체적으로 금연 운동을 위해 검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