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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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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집 기와집 너와집 귀틀집 샛집


파일:초가지붕 박.jpg
지붕 위에 을 기른 초가집의 모습을 구현한 구조물.

1. 개요2. 구조3. 특징4. 현대5. 해외에서6. 관련 문서

1. 개요

볏짚, 밀짚, 갈대 등으로 지붕을 엮어 만든 .

한자 표기가 '초가'()이므로 '초가집'은 잘못된 표현처럼 보일 수 있으나, '집'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의미상 중복되는 말을 더하여 사용한 것이다.

2. 구조

파일:chogajip.jpg

3. 특징

보통 방 2개에 부엌을 겸한 아궁이방이 하나 딸린 구조였고, 반대편에 난방용 아궁이가 하나 더 달린 경우도 있다. 방 크기는 3~4평으로 원룸과 비슷하다.[1] 초가삼간이라 하여 가난한 백성들은 주방1, 방1의 그 좁아터진 집에서 많은 가족들이 엉겨서 살아야 했다.[2]

대부분 단층으로, 그 이유는 한옥 문서에도 나오지만, 2층 가옥이 적었던 이유는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은 추운 겨울과 온돌바닥의 무거운 무게를 2층 이상에는 설치하기 힘들었던 것 때문이었다.[3] 재료가 재료인만큼 동아시아 3국의 집들 중 그나마 싼 편에 속한다.[4] 혹여나 ㄱ자로 단 한 칸이라도 붙는 순간, 그 집은 꽤 사는 집이라는 얘기이다. 다만 초가집을 짓는데도 규제는 있어서 조선시대에는 원칙대로라면 일반인들은 많아봐야 10칸이 한계였다. 물론 여유가 없는 집안이라면 알아서도 잘 지켜야 했지만, 잘 사는 집에서 이런 규제를 우회해서 눈에 확 띨 정도가 아니라면 무시하곤 해서 딱히 잘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단열이 잘 되어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지만, 특성상 지붕이 수시로 썩기 때문에 6개월에 한 번씩 갈아줘야 했다. 거기에다가 방역도 잘 되지 않던 시절에는 벌레 때문에 잠을 설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굼벵이류였다. 지붕 이은 지 조금만 오래되어도 천장에서 한 마리씩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이 벌레들은 짚을 먹고 자란 깨끗한 곤충으로, 약용이나 식용으로 좋아서 간식으로 꽤 먹었다고 하며, 가뭄이나 홍수로 작황이 안 좋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보릿고개가 찾아왔을 때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도 한다. 물론 저런 벌레들이야 위험할 것도 없고 먹을 수도 있었다지만, 문제는 지네 같은 독충들도 떨어진다는 것. 지네 자체가 상기한 대로 잡아먹을 곤충이 많고 따뜻한 썩은 지푸라기에 잘 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VJ특공대에서 관광지용 초가집 지붕을 보수하는 일꾼들이 오래된 초가 지붕에서 나오는 이런 벌레 및 애벌레들을 기름에 볶아서 좋아라 먹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그 중 나이가 많은 일꾼은 "어릴 적 초가집 살 때 지붕 고칠 때마다 이런 벌레 나오는 걸 볶아먹는 추억이 흔했는데, 이젠 이런 관광지용이나 와야지 먹을 수 있다"며 아쉬워했다.

김수로왕이 초가로 집을 지어서 살았다는 기록을 보면[5] 삼국시대 초기까지는 지배층들도 초가집을 지어서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와가 지배층들 사이에서 널리 보급되면서 초가집은 서민들의 주거지로 인식이 확 달라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화재에 취약하다는 인식도 강했기 때문에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 시대 때 아예 화재 위험을 이유로 도성의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교체하도록 장려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1426년 한양 대화재로 인해 1,780채나 되는 집이 불에 탔을 때 그 과반수가 초가집이었을 정도로 화재에 상당히 약한 게 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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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궁전

또한 기와가 발명되기 전에는 왕궁조차도 초가집 형태였다. 대표적인 예시가 상나라의 왕궁으로서, 중국에서 기와는 그 이후인 주나라 시기에 발명되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런 초가집은 아니고, 위 사진처럼 지푸라기를 검은색으로 칠해 기와집처럼 반듯하게 엮어서 덮어놓았다. 하지만 앞서 말했 듯이 건물의 내구도가 약해서 무너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아예 무너지지 않도록 사람의 목을 수십 개 씩이나 기둥 밑에 매장하는 경우가 있었다.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던 일부 지역에서는 볏짚보다 덜 썩는 갈대억새, 혹은 를 사용하기도 했다. 갈대집이든 억새집이든 초가와는 비교가 안 되게 오래 간다. 초가의 경우 최소한 1년에 한 번은 지붕을 교체해 줘야 하지만 억새나 갈대의 경우 잘 이으면 40~50년도 간다고 할 정도다. 다만 지붕을 얹을 만큼 대량으로 구하는 게 어려워 재료를 대량으로 구하기 가능한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이를 샛집이라고 하는데, 지리산 지역에서 주로 지어졌으며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회덕마을에 원형이 보존된 샛집이 남아 있다. 갈대는 주로 강가 지역에서 많이 보였다.

참고로 갈대억새는 고급 공예 원자재들인 만큼 값이 나갔고, 종친 등에게 나눠주던 이권이었다. 사실 위에 적힌 상나라 궁전도 실제로는 지푸라기가 아닌 띠풀을 이어 만들었다.

4. 현대

사실 국내외 가릴 것 없이 20세기 중반만 해도 초가집이 제법 남아 있었다. 이유는 당대에는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같은 걸 건축하기에 건축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6]

국내의 경우 일제강점기 때는 인구의 다수가 소작농이었고, 독립 이후로도 한국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현대식 가옥이나 기와집을 짓거나 혹은 지을 생각도 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초가집은 매우 구하기 쉽던 재료로 만들었던데다가 농촌 인구가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던 시절이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면 상부상조하는 게 보통이었기에 인건비도 별로 들지 않았고, 설사 도시에 살더라도 농촌 문화의 영향이 남아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축비가 적게 들었고 초가집은 그냥 판잣집을 짓는 것에 비해서 (여름에는 벌레가 생기고 겨울에는 화재가 날 위험도 있었지만) 단열도 잘 되었다.

그래서 서양의 문물이 대거 들어와서 서양식 건축이 대세를 이루게 될 때에도 돈이 없던 당시 서민층으로서는 초가집을 짓는 게 집을 마련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며[7], 1970년대 초엽까지는 농촌에 초가집이 즐비했다. 다만 지붕 갈기 귀찮은 점은 존재했기 때문에 1950년대~1960년대에는 페인트 비슷한 화공약품을 뿌리기도 했다. 이걸 뿌리면 1년은 더 버틸 수 있었다고.

그러다 농촌 지역에 새마을운동[8] 여파 등이 겹치면서 초가집을 대규모로 허물거나 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 지붕으로 갈아엎으면서 이후 초가집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상기한 대로의 초가집의 단점이 이 때 크게 부각되었었는데, 무엇보다도 매년 이엉을 갈아야 하는데다 시시때때로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굼벵이나 지네, 빈대 같은 벌레들은 실제 거주자라면 학을 떼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때 다 사라진 건 아니고 1980년대 초반에도 무려 강남구 대치동에 초가집이 존재했는데[9], 사실 이건 당시 서울 근처에 거의 유일한 농촌 지대로 남아있던 강남을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 인구가 폭증하자 1970년대 이후 개발한거니[10] 어찌보면 당연하다.

다만 20세기엔 행정력이 완전히 미쳤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1990년대까지도 일부 벽촌엔 초가집이 남아있었다. 그러다 21세기 들어 아예 현대식 농가주택으로 재건축되는 과정 등을 거쳐[11] 대부분 사라졌다. 그래서 현재는 하회마을, 양동마을, 낙안읍성 같은 일부 보존된 전통마을이나 민속촌 같은 데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12] 이런 곳들은 기관에서 지원금을 받거나 관광산업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는 거라고 한다.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백제문화공원에도 초가집이 있는데, 이 초가집은 백제 집자리를 재현한 전시관이다. 사족으로, 분당신도시중앙공원에도 초가집이 1채 보존되어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민속주점이나 주막 컨셉의 술집 등 요식업 업종에서 분위기를 위해 일부러 건물 일부를 초가집으로 재현해 놓는 경우가 있다. 또는 건강이 나빠져 신병 치료를 위해 지리산 등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초가집 오두막을 지어놓고 자연인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벽을 회벽이 아니라 전통 그대로의 황토벽으로 마감한다.

5. 해외에서

북한의 경우 남한보다 한발 앞서서 1960년대에 도시 지역에 아파트를, 농어촌 지역에는 문화주택이라는 현대식 가옥을 대대적으로 보급하면서 초가집이 사라졌다. 현대 북한에서 초가집처럼 보이는 가옥들은 대부분 겨울철 단열 목적으로 일반적인 문화주택의 지붕을 볏짚 등으로 덮은 것이며, 전통적인 초가집이 아니다. 그래도 황해도 지역에는 초가집이 아직 제법 남아있다고 한다.[13]

중국 지린성 연변에서는 조선족들이 이주한 이래로 초가집을 지어서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1970~80년대 이후로는 남한이나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기와집이나 벽돌 콘크리트 집으로 교체되었다.

일본도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1950년대까지는 초가집(갓쇼즈쿠리)이 꽤 흔하게 존재했지만, 1950~60년대에 출산율 저하와 이촌현상으로 농촌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일손이 모자라게 되고 삼나무 가격도 상승하는 바람에 현대식 주택으로 대부분 교체되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시라카와고 마을이 대표적인 일본의 초가지붕 마을.

일본의 전통 농가 초가집이 한국의 초가집과 다른 점은 벽 재료가 대부분 나무판자라서 보온성이 떨어지고 화재에 취약한 편이다. 지붕의 재료는 한국과 같은 짚을 엮은 것이지만 북부나 서부는 다설지가 많아서 지붕의 물매(경사)가 매우 가파른 편이다. 남부도 비가 많아 한국의 초가보다는 훨씬 물매가 높다. 창문은 벽의 판자 상부를 튀우고 창호지로 막아 채광을 하거나 또는 창문에 창살만 있고 따로 문풍지를 바르지 않고 대신 따로 판자 창문덮개가 있다. 보온보다 통풍을 우선시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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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네덜란드유럽에서도 생각보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이쪽은 팀버프레임이나 벽돌집에 갈대지붕을 올려놓은 형태가 많다. 이런거 보면 초가집도 어떻게 디자인해서 세우냐에 따라 오늘날 써도 제법 운치있게 만들 수 있긴 하다.

6. 관련 문서


[1] 전라남도, 경상남도 등 남부 해안지방은 기와집도 초가집처럼 방2, 주방1(혹은 2)의 규모인데, 규모를 늘이려면 비슷한 크기의 독채를 더 지었다. 롱하우스처럼 집 길이 자체가 늘어나는 중부식 기와집과 다른 특이한 부분.[2] 초가삼간은 현대에는 방2, 주방 1의 주택으로 오해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는 3칸이 아니라 3'간'(2간X1간)의 원룸이다. 문서 참조.[3] 한국사 속의 복층건물은 대부분 온돌이 활성화되기 이전 고대(신라~조선 초기)거나, 2층 이상엔 온돌이 없는 건물이다.[4] 중국벽돌, 일본은 나무, 한국은 나무+흙.[5] 실제로 가야 지역에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기와집 문화가 없었다. 가야 항목 참조.[6] 반대로 후술되어있듯 이후 국내외 가리지 않고 초가집이 대거 사라진거 보면, 인식 변화와 건축 기술 발달 등에 따른 시대상도 주요한 원인으로 보인다.[7] 물론 당대의 돈 있는 사람들은 기와집이나 서양식 주택을 짓고 살았다. 일본인들은 일본식 주택(적산가옥)에서 살았다. 게다가 초가집도 어떻게 디자인하냐에 따라서 겉모양이 많이 나뉜다.[8] 새마을노래 가사를 봐도 알겠지만 초가집을 없애자는 게 당시 정부의 정책이었다.[9] 사실 지금도 구룡마을이 비슷한 포지션이긴 하다.[10] 때문에 이 지역은 땅값이 폭등하면서 땅이 있던 졸부들이 속출했고, 반대로 땅이 없던 빈민들은 대거 쫓겨났다.[11] 대구광역시를 예로 들자면, 2000년대 이후 강창다사 등 대학가, 신도시 주변에 재개발 붐이 많이 일면서 이전 낡은 건물이나 논밭들이 헐리고 단독주택이나 아파트, 원룸촌이 대거 형성된다.[12] 사실 지금도 도시공터에 간혹 폐가 비슷하게 남아있는 경우는 있다.[13] 김일성이 일부러 황해도 지역을 남한과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개발을 잘 안해주었다. 개성시는 상징성이 있어서 개발을 해주기는 했지만. 사실 남한도 경기도 고양시, 파주시, 김포시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는 이었던 것처럼 전방 지역 개발은 꺼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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