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15 04:59:00

안드로니코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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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포로스 왕조 니키포로스 1세 | 스타브라키오스 | 미하일 1세 랑가베스 · 테오필락토스 · 스타브라키오스
- 레온 5세 · 콘스탄티노스
아모리아 왕조 미하일 2세 | 테오필로스 · 콘스탄티노스 | 미하일 3세 · 테클라
마케도니아 왕조 바실리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 레온 6세 | 알렉산드로스 2세 | 콘스탄티노스 7세 | 로마노스 1세 · 흐리스토포로스 레카피노스 · 스테파노스 레카피노스 · 콘스탄티노스 레카피노스 | 로마노스 2세 | 니키포로스 2세 | 요안니스 1세 | 바실리오스 2세 | 콘스탄티노스 8세 | 로마노스 3세 | 미하일 4세 | 미하일 5세 | 공동 즉위 조이 · 테오도라 | 콘스탄티노스 9세 | 2차 재위 테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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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카스 왕조 콘스탄티노스 10세 | 에브도키아 · 미하일 7세 · 콘스탄티오스 두카스 ·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로마노스 4세 · 레온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디오예니스 | 니키포로스 3세
콤니노스 왕조 알렉시오스 1세 · 콘스탄티노스 두카스 | 요안니스 2세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 마누일 1세 | 알렉시오스 2세 | 안드로니코스 1세 · 요안니스 콤니노스
앙겔로스 왕조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3세 | 2차 재위 이사키오스 2세 | 알렉시오스 4세 | 알렉시오스 5세
니케아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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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통 콘스탄티노스 라스카리스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미하일 8세 | 안드로니코스 2세 · 이리니 | 미하일 9세 | 안드로니코스 3세 | 요안니스 5세 | 공동 즉위 요안니스 6세 · 마테오스 | 2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안나 | 안드로니코스 4세 · 요안니스 7세 | 3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2차 재위 요안니스 7세 | 4차 재위 요안니스 5세 | 마누일 2세 · 요안니스 7세 · 안드로니코스 5세 | 요안니스 8세 | 콘스탄티노스 11세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FCE774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37px; padding: 0 6px"
}}}}}}}}}}}}
로마 제국 제113대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
Ανδρόνικος Α΄
<nopad> 파일:143_-_Andronikos_I_Komnenos_(Mutinensis_-_color).png
<colbgcolor=#702963><colcolor=#FCE774,#FCE774> 이름 안드로니코스 콤니노스
Ἀνδρόνικος Κομνηνός
출생 1118년
동로마 제국
사망 1185년 9월 12일 (향년 66~67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183년 9월 ~ 1185년 9월 12일 (2년)
전임자 알렉시오스 2세
후임자 이사키오스 2세
부모 아버지: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어머니: 조지아의 카타
배우자 이름 불명의 첫번째 부인
프랑스의 아녜스
자녀 마누일 콤니노스
요안니스 콤니노스
종교 정교회
1. 개요2. 생애와 치세
2.1. 방랑으로 점철된 삶2.2. 황제 등극2.3. 공동 황제 시해 및 공포정치2.4. 최후
3. 평가
3.1. 긍정적인 평가3.2. 부정적인 평가
4. 가족 관계

1. 개요

로마 제국 제113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콤니노스 왕조 제6대 황제.

2. 생애와 치세

2.1. 방랑으로 점철된 삶

안드로니코스 1세는 조부인 알렉시오스 1세의 삼남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의 아들로, 마누일 1세와 사촌지간이었다. 사촌이자 동갑내기였던 안드로니코스와 마누일은 자주 어울렸던 것으로 보이며, 1146년 마누일이 제위에 오른 직후의 원정에 참가하는 등 젊은 시절에는 황족으로서 주로 에 종사했다. 이 때 수뇌부끼리 "전 황제인 요안니스 2세와 현 황제인 마누일을 비교하면 누가 더 무예가 나은 것 같은가" 논쟁이 붙었는데,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일이 더 낫다"고 강하게 주장했고 논쟁이 격화되면서 마누일의 형인 이사키오스의 칼을 맞을 뻔한 해프닝이 있었다. 후일 마누일과의 악연을 생각하면 이 시점에서는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일의 지지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1152년에는 킬리키아에 부임하여 아르메니아 공국을 공격하였으나 도로스 2세에게 참패했다. 1153년에는 니소스 - 브라니세바(Braniseba)[1]등의 제국 서북방으로 발령받는다. 여기에서 안드로니코스는 야심을 드러내는 데, 바로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업고 마누일 황제 암살을 두차례나 기도한 것(1154년). 그러나 마누일의 측근들에 의해 이는 실패하였고 안드로니코스는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감옥에서 9년여간을 지내게 된다.

1164년, 기어이 탈옥에 성공한 안드로니코스는 제국의 북쪽 국경다뉴브 강을 넘어 몰다비아 지방을 거쳐 갈리치아 공국에 의탁한다. 갈리치아와 불편한 관계이던 제국은 對 헝가리 왕국 전쟁의 사전 준비를 위해 갈리치아에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있던 안드로니코스를 일종의 외교 사절로 이용하였고, 공적을 인정하여 안드로니코스를 다시 받아들인다(1165년).

1166년, 안드로니코스는 다시금 킬리키아로 발령받는다. 그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인 막장 행보를 시작한다. 당시 안티오히아를 수복한 상태이던 마누일은 전 황후가 죽어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새로 황후로 들인 상태였는데, 안드로니코스가 황후의 자매이던 필리파와 내연 관계를 가진 것이다.[2] 결국 황제의 추궁을 받게 된 안드로니코스는 키프로스 - 킬리키아 일대에서 횡령한 세금과 함께 예루살렘 왕국으로 도망친다.

다시금 국외에 의탁하게 되었으나 여기서도 호의를 이끌어 낸 안드로니코스는 이번엔 보두앵 3세미망인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증손녀인 친척 테오도라 왕비[3]와 추문을 뿌리게 된다. 당시 제국의 영토는 안디오히아에 이르고 있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제국에 의존하고 있었으니 사실상 주변의 기독교권은 전부 그의 적이 된 셈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로마 제국에는 거세안구 적출이라는 형벌이 있음을(...). 결국 안드로니코스는 테오도라와 함께 이슬람권으로 도피한다.

다마스쿠스를 시작으로 시리아에서 이라크, 이란, 조지아 지역을 아우르는 도피는 제국의 적국인 룸 술탄국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서 안드로니코스는 튀르크인 군사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 제국령을 침범하고 약탈하였는데, 이러한 막장 행각은 제국의 인내심을 폭발시켰고 교회가 파문을 내리게 만든다.

명실공히 제국의 공적이 되어버린 안드로니코스의 행각은 아내와 자식들이 제국 측에 잡히면서 끝난다. 온갖 일탈 행위를 저지르고 다닌 그였지만 결국 한명의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것.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여 마누일 앞에 무릎 꿇은 안드로니코스는 황실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사실상의 항복 선언을 하게되고, 마누일은 그를 용서하여 흑해해안지대에 요양지를 마련해준다.[4]

그렇게 탕아의 행보는 멈추는 듯 했다.

2.2. 황제 등극

그러나 최대의 라이벌이자 장애물인 마누일이 사라지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사촌에 의해 가려졌지만, 그는 분명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배우처럼 연기와 언변에 능숙했으며, 여러 여성을 유혹할 만큼 매력적이었고, 군대를 비롯한 여러 공직을 지낸 경력과 오랜 기간 쌓은 명성 또한 있었다. 1180년 마누일 사후 제국은 어린 알렉시오스 2세를 내세운 황태후 안티오키아의 마리아를 필두로 한 섭정단(알렉시오스 대군주(1135?~1182)[5])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와중에 일어난 혼란은 늙은 야심가에게 기회를 주게 된다.
그의 몸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위엄 있는 모습에 기골이 장대했고 얼굴은 청년 같았다. 그는 방탕하지도, 식탐을 부리지도 않았고 주정뱅이도 아니었으며 호메로스의 영웅들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기에 눈에 띄게 건강했다.
니키타스 호니아티스

당시 제국에는 마누일의 친서방 정책으로 인해 많은 서방인들이 존재했다. 상인은 물론이요 관료 집단에도 침투해 있어서 마찬가지로 서방인인 황후와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섭정단에도 포함되어 있었다. 종교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여러모로 이질감을 느꼈던 제국민들은 자신들이 '야만인'으로 보던 서방인에 대해 반감을 느끼고 있었으며, 상당히 만연해있던 부정부패는 이를 부채질하여 아직 젊은 미망인인 황태후가 불륜을 저지른다는 소문 따위를 낳고 있었다.

그 와중에 마누일의 장녀인 마리아 콤니니가 섭정단이 동생 알렉시오스 2세의 제위를 찬탈할 것으로 의심[6]하여 남편 몬페라토의 레니에르와 함께 수도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쿠데타는 '여론을 등에 업었으나 정당성과 실력이 부족한' 황녀파의 숨통을 '정당성과 실력은 갖췄으나 여론의 지지가 부족한' 섭정단이 끊지 못하면서 어중간하게 멈춘 상황이었다. 황녀파는 황족의 명사(?)인 안드로니코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는 '황가에 충성한다'라는 맹세를 한 안드로니코스가 이를 지킬 뿐이라는 명분을 준 셈이 되었다. 요양지를 출발한 안드로니코스는 수도로 향하면서 앞을 막는 사람들과 진압군까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며 수도에 입성하였고 이에 맞춰 일어난 폭동은 성내에 거주 중이던 몇 만명 규모의 서방인 대학살로 이어진다. 이러한 살육을 방관한 - 혹은 부추겨놓고 모른 체 한 - 안드로니코스는 황녀파를 손쉽게 제압하였다. 이와 함께 그의 또 다른 당질인 알렉시오스 대군주를 실명시킨 뒤 숙청하고, 그토록 염원했던 것을 차지한 실권자가 된다(1182년).

2.3. 공동 황제 시해 및 공포정치

마누일 사후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헝가리 왕 벨러 3세는 봉신 노릇을 집어치우고 일전의 시르미움 전투에서 동로마에게 상실한 달마티아와 시르미움을 침공했다. 안드로니코스는 황태후가 벨러 3세와 인척관계라는 것을 구실로 이미 여론의 지지를 잃은 황태후마저 살해해 버리면서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되었다. 결국 알렉시오스 2세를 지키기 위함이라며 공동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얼마 안가 어린 황제를 살해하고 마르마라 해에 시신을 던져버렸다. 평생 꿈꾸던 황제의 자리는 그만의 것이었다(1183년).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유럽 지역은 물론 마누일의 가계(家系)[7]에 충성하던 아나톨리아 지역에서도 정통한 황제를 죽이고 자리에 오른 찬탈자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안드로니코스는 아직 충성하던 군대를 소집하여 진압에 나선다. 로파디온 - 니케아 - 프루사 등 비티니아 지역에 대한 진압은 잔혹한 대학살로 본보기를 보이며 끝을 맺었고 드러난 반대파는 소멸해버렸다.[8] 찬탈자라지만 명색이 황제라는 자가, 끌어안아야할 자신의 신민을 향해 칼을 휘두른 정신나간 사건이었다.

진압을 마친 안드로니코스는 이번엔 수도로 돌아와 피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아직 남아있던 반대파를 갈아버리던 피바람은 곧 명사(名士)들에게도 들이닥쳤고 황족들도 덮쳤으며[9] 과거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까지 예외는 아니었다. 긍정적이게도(?) 마누일 말기의 부정부패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조금의 혐의나 고발이 있으면 죄다 죽여서 부패의 주역이던 서방인, 황족, 관료들이 소멸해 버렸으니까.

2.4. 최후

찬탈과 폭정으로 안밖을 가리지않고 적을 만들어낸 제국이 외침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이미 헝가리의 침공이 있었으며 혼란을 틈타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10]와 킬리키아의 아르메니아계 세력이 떨어져나갔고 룸 술탄국의 압박 또한 이어졌다. 숙청을 피해 달아난 황족들이 주변 국가로 망명하면서 서방인 학살에 대한 보복과 함께 좋은 명분을 제공해 주었으며 이는 곧 시칠리아 왕국의 침공으로 현실화 되었다.(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 시칠리아군은 상륙 즉시 디라히온을 함락시키고 수비군과 요격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동진하였고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까지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군대와 시민들은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안드로니코스의 실책으로 요격군이 족족 격파당하자 테살로니키가 위치한 마케도니아 지방에서부터 수도에 이르는 트라키아 지방까지의 방위 체계는 모조리 붕괴되었다. 그럼에도 안드로니코스는 신나는(...) 학살을 수도에서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안드로니코스의 총신이자 간신이었던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11]의 악의에 의해 살생부에 오른 이사키오스 앙겔로스가 자신을 잡으러온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우발적으로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겁에 질린 이사키오스는 성당으로 도주하였고 이를 알게 된 수도 시민들은 그동안 쌓인 불만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폭동을 일으키게 된다.

당황한 안드로니코스는 폭동을 진압하고 이사키오스를 잡아들이려 했으나 이미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하기아 소피아에 도망가있던 용감한(?) 이사키오스는 즉흥적으로 황제로 추대되어 이사키오스 2세가 되었고 대세를 읽은 군과 근위대는 안드로니코스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결국 시내로 끌려나간 폭군은 오른손이 잘리고 머리카락과 이와 오른쪽 눈이 뽑히게 되었으며 얼굴에 끓는 물이 부어지는 등 온갖 고문과 모욕을 당하다 죽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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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그야말로 동로마의 왕망에 가까운 인물. 힘없는 소년 군주를 내몰고 찬탈했으나, 안 하느니만 못한 폭력적인 개혁 조치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외교 파탄 끝에 내부의 변란으로 인해 피살되었다. 마누일 1세 치하의 누적된 모순을 해결해줄 강력한 인물로서 나름 환영받으며 집권했으나, 대규모의 숙청 작업으로 유능한 귀족과 관료층을 전멸시켜, 제국을 지탱하던 시스템, 탁시스(Taxis, ταξίς)[13]을 붕괴시켰고 이것이 무능한 앙겔로스 왕조의 집권으로 이어져[14] 제국 멸망의 단초가 되었다. 고작 2년만에 제국을 내전 상태로 이끌고 해체의 수순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으로 평가된다.

개인으로만 보면 대단한 인물이다. 분명 능력있었고 매력적인 남자였음에 분명하며, 외국을 떠도는 고달픈 도피 행각에도 불구하고 건강을 유지하고 야심을 키워나가는 근성도 있었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 이후에는 마누일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도 보였으며 수도로 향할 때에는 사람들을 설득하고 끌어들이는 카리스마까지 보여준다. 마누일 1세가 없었다면, 권력욕에 사로잡혀 수습할 수도 있었던 폭동을 방치하여 두고두고 제국의 후환을 만들지 않았다면, 개혁을 극단적으로 진행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행하면서 귀족 세력과 타협했다면 좀 더 나은 평을 남겼을지도 모르는 인물이다. 그러나 황제라는 목표, 그리고 개혁이라는 이상 자체에 지나치게 매몰되었던 것인지 황제가 된 이후의 행동은 전대 황제들과 너무나 비교되는 폭군이요, 암군의 모습이었다.

사실상 동로마 후기 몰락의 원인의 상당수가 이 사람과 이 사람 덕(?)에 탄생한 앙겔로스 왕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안드로니코스는 마누일 1세가 힘들여 구축한 외교 관계를 박살내서 주변국으로부터 고립을 가속화 시키고 도움이 될 만한 국가를 이탈시켜 국제적 위상 추락을 야기했다. 선대의 황제들이 구축한 체제를 통해 멈춰놓은 탁시스(Taxis) 체제의 붕괴는 그의 선동 정치와 파플라고니아 출신들의 득세로 확정되었다. 그가 섣부르게 정치에 손을 대면서 중앙 - 지방간의 상호 의존 관계가 끊어지자 결속력을 잃은 국가는 와해되기 시작했으며, 이를 수습해야 할 이사키오스 2세는 실정를 거듭한 끝에 형해만 남은 나라를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찬탈당했다.

선대 콤니노스 황제들이 100여년간 애써 중흥시킨 제국은 당시 유럽 최강국 중 하나였으며, 가장 유서 깊고 가장 부유한 선진국이었다. 물론 테마 제도가 사실상 해체된 뒤 제국의 군사력은 양적인 축소를 겪었고, 마누일 1세의 말기에는 군비의 비중도 높아지면서 체제는 불안함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 콤니노스 100여년을 지내면서 황제 개인에게 제국이 많이 의존하게 되었지만, 국내외의 연결고리가 많은 알렉시오스 2세가 무사히 장성할 때까지는 버틸만한 기본은 있는 나라였다. 그러한 제국의 미래를 개인의 욕심으로 크게 전환시키고 결과적으로 망쳐버렸다는 점에서 안드로니코스는 충분히 포카스와 함께 동로마 제국 최악의 폭군 중 하나라고 할 만하다.

3.1. 긍정적인 평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시대 자체는 분명 개혁이 필요한 시기는 맞긴 했다. 콤니노스 왕조의 통치가 오래되면서 제국은 번영했지만 한편으론, 특유의 족벌주의가 시민과 지방을 중앙정치에서 배재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로마 천하관과 정체성에 대한 회의감이 퍼진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됐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만지케르트 전투와 1차 십자군 이후로 시민들도 서방세게의 역량이 크게 상승하고 제국의 위신이 줄어든게 체감됐는데 족벌주의에 근간한 친서방 수도 몰빵 중앙 독주가 가속화하면서 중앙정치에서 배재당한 꼴이 된 시민과 지방의 불만이 크게 누적되었고, 이는 제국의 결속력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때문에 이 문제를 의식한 안드로니코스 1세는 외정에 주로 관심을 둔 선제 마누일 1세와 달리 귀족의 권력을 제한하고 부패를 막아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권을 황제의 손에 되돌리기로 결심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잔혹하게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앙 귀족을 탄압 하여 이런 불균형을 해소하려고 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는 귀족들에게는 잔혹했지만, 일반 백성, 특히 지방의 농민들에게는 호의적인 개혁가로 평가된다. 그는 선대 황제, 특히 마누일 1세 통치 하에서 악화된 중앙 권력과 지방 사이의 격차를 해소하고 부패를 척결하는 데 집중했다. 안드로니코스 통치 이전에는 지방 행정관이나 세금 징수 청부업자들이 합법적인 세금 외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농민들에게 추가적인 부과금을 징수하는 부패가 만연했는데 새 황제는 이 부패한 세금 징수 관행을 근절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목표는 농민들이 오직 정규 세금만을 납부하도록 보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는 수입 징수와 관련된 공직을 최고 입찰자에게 매관매직 하는 관행을 금지했다. 대신, 이러한 직책들은 능력에 따라 수여되도록 법제화했다. 이 조치는 관리들이 투자금 회수를 위해 백성을 착취하는 동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또한 일반 시민, 백성들의 고발 수용 및 정의 실현에도 힘을 기울였다. 안드로니코스는 중앙 권력에 대항하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반 백성, 즉 농민과 시민들의 목소리에 적극적으로 귀 기울였다. 불평등 및 부패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일반 백성이 귀족들의 부패 행위나 불법 행위에 대해 고발하는 것을 수용하고 장려했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지방 인구의 착취가 줄어들고 복지가 개선되면서, 그의 통치 하에서 지방의 번영했고 인구가 증가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마누일 1세가 수도의 귀족들을 지나치게 우대함으로써 발생했던 지방과의 경제적, 정치적 불균형 문제를 인식하고 지방과 수도 간 격차 해소 노력하고 해결하고자 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는 지방 행정의 통제권을 황제의 손에 집중시키고, 중앙의 개입을 통해 지방의 약자들을 보호하려고 시도했다. 즉 지방과 수도 간 격차 해소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안드로니코스의 정책은 귀족들의 사적 이익을 희생시켜 국가 재정과 일반 백성의 복지를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으며, 이로 인해 일반 민중 사이에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개혁은 너무나 급진적이며 파괴적으로 제국의 중앙정부와 행정력을 파괴했고 제국 전역을 반신불수 상태로 만들어 결국 콤니노스 왕조 전체의 몰락을 가져왔다.

3.2. 부정적인 평가

급진적인 개혁과 포퓰리스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너무 극단적으로 개혁을 진행한 것이 그와 콤니노스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급진 개혁 정책과 비록 짧았으나 지나친 공안 정국 양상을 조장하고 공포정치를 단행한 것으로 보면 로베스피에르의 선배격이 아닌가 싶을 정도.

안드로니코스 1세의 통치는 극단적인 이중성을 띠었다. 내부적으로는 부패 척결이라는 명분 아래 급진 개혁 정책을 펼쳐 분명 신민들의 호응을 이끌기도 했으나 이 과정에서 극단적으로 잔혹한 공포 정치를 펼쳤고, 대외적으로는 이러한 내부 혼란으로 인해 제국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영토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안드로니코스는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부패한 귀족 계층의 힘을 뿌리 뽑기 위해 가족과 반대파를 가리지 않고 숙청했다. 이 시기는 제국 역사상 가장 어두운 공포 정치 시기 중 하나였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만 아니라 안드로니코스의 즉위에 반대했던 아나톨리아의 도시 니케아프루사 역시 공격했고 잔인하고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단순히 불충을 의심받는 것만으로도 개인과 일족의 파멸로 이어지는것은 예사였다. 황제의 감시자들이 제국 전역에서 신민들을 감시했고, 야간 체포와 가짜 재판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귀족 계층 전체에 극심한 불안감을 조성했다.

결국 지나친 학살과 숙청에 신물이 나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군대와 시민들은 각지의 반란과 외침에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안드로니코스가 그렇게 몰락하면서 불과 5년전만 해도 강대한 국력을 자랑하던 마누일 1세의 제국은 안드로니코스 1세의 집권 몇년만에 소프트웨어, 하드웨어가 모두 박살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래서는 결국 아무리 의도가 좋았더라도 개혁의 긍정적인 면모가 상쇄될 수 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의 잔혹한 통치는 제국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파괴하며 귀족들을 제국 밖으로 도망치게 만들었고, 이들은 외국의 군주들에게 도움을 호소하며 제국을 상대로 한 침략과 반란을 부추겼다. 이로 인해 마누일 1세가 그렇게 애지중지 가꾸었던 발칸반도의 동맹 체제가 무너지고 제국은 각지의 중요한 영토를 상실했다. 헝가리의 벨러 3세는 1183년, 처형된 마리아 황태후의 복수자를 자처하며 제국을 침공했고 비록 1184년에 격퇴되었지만, 이 침략은 제국의 북부 국경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또한 다음해 시칠리아 왕국굴리에모 2세침공하여 제2의 도시 테살로니키를 함락하고 학살을 자행했다. 이는 안드로니코스 몰락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내부적으론 불가리아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반란을 일으킨 키프로스 역시 정세가 이 시기에 불안정해졌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이들은 앙겔로스 왕조 시절 제국에서 각각 불가리아 제2제국[15]키프로스 왕국으로 이탈하게 되었다.

또한 라틴인 학살을 방조하거나 선동했다는 측면에서는 공포정치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고, 증오를 부추겨 동로마를 후퇴시킨 황제의 진면모를 초장부터 보였다고 할 것이다. 서유럽의 힘이 나날히 제국 이상으로 상승하는 와중에 폭도들을 상대로 충분히 소요사건 정도 진정시키거나, 본인의 군대로 폭동을 진압하고 주동자들을 처벌하면서 서방에 외교적인 면을 세울수도 있었던 사한을 크게 터뜨려 두고두고 증오의 연쇄를 만들었다는 측면에선 만번 까여야 마당하다. 이 대학살은 서방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동로마 제국의 이미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비록 얼마 후 무역협정이 다시 체결되었지만 근본적인 적대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 사건이 22년 후 4차 십자군이 탈선한 명분 중 하나가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제위 계승 전쟁 중 일이 꼬여서 대금을 못 받았다고 해도, 채권이나 저당을 잡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아예 때려부숴서 강제로 상환받자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는 쉽지 않다.

4. 가족 관계


[1] 현재 세르비아 동부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불가리아 지방에 접하고 북으로는 다뉴브에 닿는 지역.[2] 사실 처음도 아니었다. 과거 킬리키아에 있을 때부터 사촌인 마누일의 누이 에브도키아와 근친상간 관계였던 것. 다만 마누일 역시 당시에 조카와의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다(...). 하하 개판이네.[3] 13세에 시집왔으나 결혼 당시 28세 였던 보두앵 3세는 후사조차 없이 테오도라가 17세일 때 죽었다. 48세인 안드로니코스를 만났을 때는 한창인 21세 였다. 사실 이러한 나이차 많은 관계나 어린 미망인은 중세에 흔한 편이었다. 다만 안드로니코스가 많이 막장일 뿐.[4] 말년의 마누일은 악화 된 건강 때문에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 2세를 위한 안전 장치를 마련하느라 결혼 동맹을 맺고 무리한 군사 행동을 나서는 등 분주했다. 위험한 친족을 국내에서 통제하에 두는 것 또한 이러한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밖으로 다니게 내버려두면?... 그 결과는...[5] 요안니스 2세의 차남인 안드로니코스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또 다른 당질[6]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알렉시오스 2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즉위하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2세 못지 않게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 정통성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누일 1세가 요안니스 2세의 4남이고, 이 알렉시오스 대군주의 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는 요안니스 2세의 차남으로서 요안니스 2세 계열의 집안에서는 오히려 선제 마누일보다 형으로서 큰집이기 때문이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요안니스 2세의 자손도 아닌 그 형제의 집안이라서 방계 황족이다. 즉 알렉시오스 2세에게는 할아버지 요안니스 2세의 후손도 아닌 안드로니코스 1세보다도, 같은 할아버지 요안니스 2세를 둔 사촌형 알렉시오스 대군주가 더욱 가깝다. 그만큼 더 위협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7] 당연히 정통성은 알렉시오스 2세의 가계가 안드로니코스 1세에 비하면 넘사벽이다. 알렉시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1세, 요안니스 2세, 마누일 1세의 적손인 반면 안드로니코스 1세는 알렉시오스 1세의 직계이지만 요안니스 2세의 조카이므로 방계에 불과하다. 고로 적통 황손과 방계황족(조선시대에 비유하면 왕세자 > 군)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8] 반란군 중 한 명이었던 귀족 이사키오스 앙겔로스에 대한 공격 중, 안드로니코스는 수비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이사키오스의 어머니 에우프로시네를 공성퇴 위에 올려놓는 비인간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프루사가 함락된 후, 도시의 수비대원들은 성벽 밖에서 꼬챙이에 꿰여 공개적으로 처형 되었다.[9] 키프로스를 점령하고 독립을 선포한 사촌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안드로니코스는 콘스탄티노노에 남아 있던 이사아키오스의 친척 두 명을 돌로 치고 꼬챙이에 꿰어 처형했다.[10] 요안니스 2세 황제의 아들의 딸의 아들. 즉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는 6촌 조카손자(재종손) 되겠다.[11] Στέφανος ἁγιοχριστοφορίτης, 안드로니코스 1세 시기의 공문서국 국장(Logothetes tou dromou)이자 알렉시오스 2세를 죽인 실행범으로,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시민들로부터 증오를 받았다.[12] 동로마의 역사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플 히포드롬의 두 기둥에 발로 매달린 안드로니코스 1세를 누가 더 깊이 찌를 것인지를 놓고 제국의 라틴인 병사 두 명이 겨루기까지 했다고 한다. 3년 전의 대학살에 대한 서방인의 증오가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일화.[13] 탁시스는 그리스어로 기본적으로 '질서', '정돈', '배열'을 의미한다. 이는 창조주이자 신이 우주에 부여한 보편적 조화를 모방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황제의 가장 근본적인 의무는 신민들 사이에서 이 질서와 번영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탁시스는 황궁 내의 의례(Court Rituals)와 행정 시스템에 가장 먼저 적용되었다. 궁정 의례와 행정 관료 및 교회 관료의 정확한 서열과 역할을 규정한 특별 지침서들을 '타크티카(Taktika)'라고 불렀는데, 이는 탁시스의 구현체였다. 이는 사회적 위계질서와 황제와의 친밀도에 따라 개인의 위치가 정해지는 방식을 보여 주었다. 요약하자면, 동로마의 탁시스는 제국의 질서, 위계, 행정, 그리고 군사 대형을 모두 포괄하는 동로마 행정 체계 그 자체를 상징한다.[14] 물론 앙겔로스 왕조 일족 자체가 범군 내지는 암군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이때 말아먹은 제국 행정의 기초 부실로 인한 잘못 역시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15] 1185년 시칠리아 왕국의 발칸 침공은 불가리아 독립을 촉진한 아센과 페터르의 난의 원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