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1:09:39

바비 무어

보비 무어에서 넘어옴
바비 무어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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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지미 암필드
(1962~1964)
바비 무어
(1964~1973)
마틴 피터스
(1973~1974)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역대 주장
공석
(1960~1962)
바비 무어
(1962~1974)
빌리 본즈
(197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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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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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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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 1969 · 1971 · 1972 ·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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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Ballond'or
수상
게르트 뮐러
2위
바비 무어
3위
루이지 리바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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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2003년 수상 당시 국명[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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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의 기타 정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영구결번
No.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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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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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31e31>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피터 쉴튼 125회 1970.11.25 1990.7.7
2 웨인 루니 120회 2003.2.12 2018.11.15
3 데이비드 베컴 115회 1996.9.1 2009.9.14
4 스티븐 제라드 114회 2000.5.31 2014.6.24
5 바비 무어 108회 1962.5.20 1973.11.14
6 애슐리 콜 107회 2001.3.28 2014.3.5
7 바비 찰튼 106회 1958.4.19 1970.6.14
프랭크 램파드 1999.10.10 2014.6.24
9 빌리 라이트 105회 1946.9.28 1959.5.28
10 해리 케인 103회 2015.3.28 2024.11.18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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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파일:bobbi-mur.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바비 무어
Bobby Moore
본명 로버트 프레더릭 첼시 무어[1]
Robert Frederick Chelsea Moore
출생 1941년 4월 12일
영국 잉글랜드 에식스주 바킹[2]
사망 1993년 2월 24일 (향년 51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원즈워스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장 183cm[3]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4]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주발 오른발[5]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958~1974)
풀럼 FC (1974~1977)
→ 샌 안토니오 선더 (1976 / 임대)
시애틀 사운더스 FC (1978)
헤르닝 프레마드 (1978)
캐롤라이나 라이트닝 (1983)
감독 옥스퍼드 시티 FC (1980)
이스턴 AA (1981~1982)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 (1984~1986)
국가대표 108경기 2골 (잉글랜드 / 1962~1973)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선수 경력2.3. 은퇴 후
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3. 수훈
6. 무어에 대한 말, 말, 말7. 어록8. 여담

[clearfix]

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인.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이다.[6]

현역 시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에서 주장을 맡아 제프 허스트, 마틴 피터스 등과 함께 FA컵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을 이끌었고, 잉글랜드 대표팀에서도 주장으로 활약하며 1966 월드컵 우승[7]을 주도했다. 현재 그의 등번호 6번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잉글랜드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앞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1993년에 그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그의 유산을 기반으로 하여 설립된 '바비 무어 기금'이 영국대장암 환자들을 돕는 데에 쓰이고 있다.

2. 생애

2.1. 유년기

2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던 1941년 4월 12일, 에식스 주 바킹의 어프니 병원에서 로버트 프레데릭 무어가 태어났다. 당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었고, 무어의 부모는 공습을 피하기 위해 폭격 대상인 공업 지역에 위치한 집에서 벗어나 강 위의 발전소 근처로 대피해야 했다. 아이 두 명을 데리고 다니느라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맞았지만 다행히 가족이 모두 생존했다.

무어 가족은 바킹에 있는 웨이벌리 가든 43번지에 살았고 바비는 웨스트버리 초등학교에 다녔다. 무어의 부모님은 바킹을 응원했는데, 가족 전부가 바킹의 홈경기와 원정 경기를 챙겨 보러 다닐 정도로 열성팬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무어는 자연스럽게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무어는 길거리에서 틈 날 때마다 축구를 하던, 당시의 여느 동년배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소년이었다.
파일:1952BobbyCrispshield.jpg
1952년, 바킹 팀과 함께 크리스프 실드[8] 우승을 차지한 무어

위 사진에서 방패 모양 트로피를 들고 있는 선수가 11세 시절의 무어이다. 이때도 주장이었다고 하니, 유소년 시기부터 특출난 리더십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무어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레이튼에 있는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무어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첫 두 달은 적응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나는 우리 지역에서 온 유일한 소년이었다. 아침 7시, 집에서 바킹 역으로 가는 버스를 혼자 탔고, 완스테드로 가는 기차에 탄 뒤, 레이튼으로 가는 트롤리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학교까지 오랫동안 걸어서 가야 했다. 나는 날마다 아팠다. 나는 멀미를 이유로 바킹에 있는 의사에게 가서 편입학 자격증을 따로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어는 학교를 계속 다니기로 결정했다.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서 무어를 가르쳤던 교사 중 한 사람인 조안 라이트는 나중에 무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학교에서 반장을 맡았다... 매우 인기가 많은 소년이었다. 그곳은 기술과 상업을 주로 가르치는 학교였고, 바비는 거의 6개의 'O' 레벨을 한 번에 통과했다. 뛰어난 학생이었다. 나는 '학업에 종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축구선수 지망생'을 만날 때마다 바비 무어를 예로 들며 두 가지 모두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무어는 톰 후드 기술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레이튼 구 13세 이하 팀에서 뛰었다. 무어는 평범한 선수였다. 무어의 동년배 중에서도 에식스의 15세 이상 청소년 팀에 들어간 선수들이 있었다. 무어는 그들을 우러러보며 자신의 실력이 하루 빨리 늘기를 바랄 뿐이었다. 무어는 나중에 에식스 15세 이상 청소년 팀에 선발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에식스 팀이 무어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임시 센터 포워드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무어는 이른바 '땜빵'용 선수 취급을 받았다. 선수들 대부분은 무어를 애송이 취급했고, 무어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무어에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열망을 심어주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최고의 자질은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이었다.#
15세가 되던 1956년, 무어는 어느 날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웨스트햄 1군 팀 감독인 테드 펜튼으로부터 젊은 선수들을 지도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주장이자 '빅 맬'이라는 별명을 가진 유명 선수 말콤 앨리슨이 선수들의 플레이를 면밀히 관찰하기 위해 와 있었다.
펜튼 감독은 남학생들을 데리고 야간 훈련을 진행할 때마다 나에게 3파운드를 추가로 주곤 했다. 그래서 자주 학생들과 함께 훈련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내가 프로 선수가 될 만한 재능 있는 선수를 찾는 데에 약간의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생들과 함께한 2주 간의 훈련 기간이 끝나고, 테드 펜튼 감독이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먼저 펜튼 감독은 잉글랜드 스쿨보이스와의 경기에서 혼자 9골을 집어넣은 조지 펜이라는 공격수를 영입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하지만 나는 조지 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는 마치 축구에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에게서 헌신적인 면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나는 바비 무어가 엄청난 대선수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경청할 줄 아는 선수였다. 당신도 만약 그때의 바비를 봤다면, 그가 완벽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말콤 앨리슨
테드 펜튼 감독은 말콤 앨리슨의 의견을 받아들였고, 평범한 축구 꿈나무 중 한 명이었던 무어를 팀에 입단시켰다. 그 무렵, 무어는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런던 스쿨보이즈 소속으로 글래스고 청소년 팀과 경기를 진행했다. 이 경기를 보러 온 유명 축구인이 있었는데, 다름아닌 풀럼의 감독 론 그린우드였다. 그린우드 역시 무어의 플레이를 보고 말콤 앨리슨과 같은 생각을 했다. 론 그린우드는 무어가 1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남들에게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린우드는 1955-56 시즌을 마지막으로 풀럼 감독직을 접고 1957년에 잉글랜드 유소년 국가대표팀 사령탑에 앉게 되었는데, 곧장 무어를 유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해 주장으로 삼았다. 둘의 관계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무어는 1956년 8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의 아마추어 계약을 맺었다. 무어는 학교 과정을 끝마치고 나서야 웨스트햄과 정식 계약을 맺었다. 날짜는 1957년 7월 19일이었다. 무어는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 본격적으로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기 시작했다. 무어는 자신을 웨스트햄에서 뛸 수 있게 해 준 은인인 말콤 앨리슨을 경기장 안팎에서 졸졸 따라다녔다.
버스에 타기만 하면 그는 나에게 끊임없이 다양한 종류의 질문을 퍼부었다. 언젠가는 바비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앨리슨 씨,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가요?" 나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다. "공을 잡기 전에, 공을 잡은 후 어떤 일을 할지 미리 생각해 두는 게 가장 중요해.
말콤 앨리슨
무어는 앨리슨과 아주 가깝게 지냈다. 앨리슨도 무어를 매우 아꼈다. 연습 경기가 끝나면, 둘은 종종 단둘이 카페에 가서 소금통과 후추통을 선수 삼고 식탁을 전술 판 삼아서 축구 전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또한, 말콤 앨리슨은 발이 느린 무어에게 '가능하면 깊은 위치에서 뛰어라'라는 조언도 해 주었다.
파일:reservemoore.jpg
2군 팀 소속의 무어

웨스트햄의 유소년팀에서, 몇몇 팀 동료들은 그가 빠른 센터 포워드나 공중에서 강한 선수들과 대면했을 때 굉장히 조바심을 냈다. 그들은 피지컬적으로 훌륭하지 않은 무어가 그 위치에서 고립되는 것을 걱정했다. 무어는 스피드가 느렸고 공중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일리 미러에서 무어의 경력을 취재한 켄 존스는 "바비는 헤딩하는 것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다. 깔끔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무어는 지저분한 플레이에 관심이 없었다. 그 대신, 무어는 누구보다도 뛰어난 훈련 태도와 성실함, 그리고 공간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프 허스트는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 웨스트햄에서 훈련을 시작했을 때 바킹의 금발 청년과 함께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복근 강화를 위한 운동을 할 때, 우리는 등을 대고 바닥에 누워 다리를 공중에 들어올려 그대로 있는 훈련을 주로 했다. 직접 해 보면 이 훈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이 운동을 하는 50여 명의 선수들 중 마지막으로 다리를 내리는 선수는 바비 무어였다. 언제나.
우리는 연습 경기를 자주 했는데, 어느 날 그(말콤 앨리슨)가 우리에게 일단 멈추라고 말한 뒤, "눈을 감아라"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선수들에게 선수 개개인이 현재 그라운드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 말해보라고 했다. 무어는 이 특별 게임에서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어는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레프트윙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고, 라이트백이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았고, 센터 하프가 그로부터 두 야드 뒤에 있다는 것도 인지하고 있었다. 조 블록스가 자신의 10야드 앞선 위치에 있는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제프 허스트
유소년 시절의 무어는 여러 포지션을 옮겨 다녔다. 그린우드는 잉글랜드 유소년 팀 코치로 일할 적에, 무어를 전통적인 센터 하프로 보았다. 잉글랜드에서 하프백이란 파괴자를 의미했다. 축구 저널리스트 '존 모이니한'이 쓴 '축구 신드롬'이라는 책에 '그 포지션의 유일한 임무는 '사기꾼을 감시하는 카지노 매니저처럼 센터 포워드를 추적하는 것'이라고 써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프백은 창조적인 능력이 필요하지 않은, 경기장에서 가장 덜 까다로운 포지션으로 인식되었다. 지능적인 선수도 몇몇 있었지만, 대부분 키 크고 투박한 선수들의 포지션이었다. 세련된 스타일을 가진 무어는 하프백 포지션에서 아주 특이한 유형의 선수로 인식되었다.

무어 스스로가 웨스트햄 유소년 팀에서의 기억 중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경기는 1957년에 있었던 첼시 유소년 팀과의 경기이다. 무어는 뛰어난 드리블러인 배리 브리지스를 성실하게 따라다니며 마킹했다. 경기는 0-0 스코어로 종료되었다. 무어는 이 경기에서 자신이 굉장히 잘 했다고 생각했고, 경기 종료 후 말콤 앨리슨이 자신을 칭찬해 줄 것으로 예상했다. 무어는 이 날만큼 수비를 잘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말콤 앨리슨은 굉장히 화가 난 상태로 라커룸에 들어와 무어에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경기한다면, 다시는 너와 대화하지 않을 거야. 넌 오늘 그저 브리지스를 따라 경기장을 돌아다녔을 뿐이라고! 넌 우리 골키퍼가 공을 잡았을 때는 근처로 다가가서 공을 받으며 그를 편하게 만들어주는 플레이를 했어. 그렇지? 우리 레프트백이 공을 잡으면 네가 뒤쪽으로 빠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레프트백이 다시 너에게 패스를 해 줄 수 있었고, 너는 중앙 공격수에게 공을 띄워 보낼 수 있었어. 그렇지? 난 너에게서 그런 플레이를 보고 싶어.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집까지 바래다 주지 않을 거야.
말콤 앨리슨
앨리슨의 분노는 무어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어는 그 후로 다시는 맹목적인 대인 마킹을 하지 않았다. 무어는 앨리슨이 말한, 그리고 자신이 곧잘 했던 플레이를 자신의 스타일로 고정하기로 결심했다. 골키퍼로부터 공을 받고, 레프트백에게 패스를 받아 중앙 공격수에게 길게 패스하는 플레이가 그것이었다. 이런 플레이는 무어만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무어는 축구선수 생활을 끝마칠 때까지 이 스타일을 고수했다.

1957년 9월 16일, 말콤 앨리슨은 셰필드와의 경기 후 어떤 병에 걸렸다. 무어 역시 앨리슨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무어는 경기장 스태프 임무를 수행했고, 당일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무어는 업튼 파크 스탠드에 혼자 서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말콤 앨리슨을 보았지만 다가가 말을 걸지 못했다. 말콤 앨리슨은 무어와 단짝 친구처럼 함께하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으나, 무어는 그때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나를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 주었지만, 나는 그에게 다가가 "왜 그래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라고 물어볼 만큼 내가 그를 잘 알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말콤 앨리슨이 걸린 병은 결핵이었다. 앨리슨은 당장 수술을 받았지만, 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폐를 절제하는 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팀의 정신적 지주였던 말콤 앨리슨이 더 이상 웨스트햄을 위해 뛸 수 없게 된 것은 웨스트햄 선수들을 자극했다. 웨스트햄 선수들은 절망에 빠진 채 방출 통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불쌍한 빅 맬을 위해 남은 시즌 동안 더 열심히 뛰었다. 결국 웨스트햄은 1957-58 시즌 잉글랜드 2부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1부 리그 진출의 꿈을 이뤄냈다.

무어는 다음 시즌인 1958-59 시즌, 1군 팀에 콜업된다. 무어는 앨리슨의 등번호였던 6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선택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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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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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은퇴 후

1978년에 무어가 자신의 프로 생활을 정리한 후, 왓포드 구단주 엘튼 존이 무어에게 접근했다. 엘튼 존은 무어를 왓포드 감독 자리에 앉힐 생각이었다. 무어는 엘튼 존의 제안을 듣고 굉장히 들떴다.
그것은 축구계와 음악계를 대표하는 두 아이콘의 만남이었고, 바비는 매우 열광했다. 그는 이것이 아주 멋진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휴가를 왔는데, 그는 매우 들떠 있었다. 이미 왓포드 감독직에 부임하기 위한 대화를 거의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티나 무어(무어의 첫 번째 아내)
그러나 무어 가족이 휴가를 떠난 사이 왓포드 이사회는 다른 계약을 진행하고 있었다. 엘튼 존은 자신보다는 이사회의 결정을 존중하려고 했는데, 이사회가 선택한 왓포드의 차기 감독 후보는 무어 말고도 여러 명이 있었다. 이사회는 무어보다는 그레이엄 테일러가 왓포드 감독 자리에 더 적절하다고 보았다. 엘튼 존도 이 결정을 따랐다.
는 이사들에게 선택권을 주었고,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왓포드의 감독 자리에 더 적합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자, 제발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자랑하려는 게 아니에요. 나는 그들이 나를 선택했다는 소식을 듣기만 했어요. 왓포드의 제안을 수락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바비 무어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는 사실은 정말 몰랐어요.
그레이엄 테일러
휴가지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무어는 아침에 식료품점에 갔다가 한 종이를 보고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집으로 달려가서 아내 티나에게 전해 주었다. 티나 역시 그 종이를 보자마자 얼어 버렸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파일:WatfordTaylor.jpg
왓포드가 연봉 2만 5천 파운드의 조건으로 테일러와 계약함
내 생각에는 그것이 바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인생은 그 일 이후로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다른 축구 관련 일 제안이 들어오는 것이 단순히 시간 문제라고만 여겼다. 그러나 이후 바비에게 아무도 축구 관련 직업을 권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제안이 들어오긴 했는데, 옥스퍼드 시티의 형편없는 제안이었다. 사실 그것은 좋은 제안이었지만, 동시에 매우 암울한 시기의 시작이기도 했다.
티나 무어
옥스퍼드 시티에서 감독을 맡았으나, 전혀 유명하지 않은 팀이었다. 심지어 아마추어 팀이었다. 당연히 무어는 옥스퍼드 시티 FC의 선수 중 한 명도 알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무어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다. 해리 레드냅이 무어를 돕고자 했으나 레드냅 역시도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다. 무어는 이후 자신이 일자리를 원한다고 여기저기에 알리고 다녔으나, 어디에서도 무어를 고용하지 않았다. 돈 레비 감독이 물러난 이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원한다고 FA에 알리기도 했지만, FA 측에서는 무어에게 답장조차 해 주지 않았다. FA는 론 그린우드를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에 앉혔다. 이 기간 동안 무어는 축구계에서 완전히 무시당하는 찬밥 신세였다. 무어는 잘못한 것이 없었으며, 잉글랜드가 무어를 외면한 것 역시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이에 대한 추측성 의견은 존재한다. 제프 허스트, 해리 레드냅, 제프 파월 등 무어와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은, 이 시기에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무어를 외면한 이유 중 하나가 1970년 월드컵 직전에 있었던 '보고타 팔찌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무어는 단지 누명을 뒤집어썼을 뿐이지만, 축구와는 전혀 관련 없는 인물인 해럴드 윌슨이 사건 해결을 위해 개입했을 정도로 국제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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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운영하는 유소년 축구팀을 취재하러 온 기자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하는 무어

1980년에는 '바비 무어 축구 교실'이라는 이름의 유소년 축구팀을 운영했다. 이 축구 교실은 2년간 운영되었다.

돈이 필요했던 무어는 정말 다방면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그 결과 영화에도 출연하게 되었는데, 1981년에는 펠레, 카지미에슈 데이나 등의 유명 선수들과 함께 '승리의 탈출'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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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을 찍기 위해 세트장에 서 있는 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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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탈출'에 함께 출연한 배우 마이클 케인과 함께
나와 바비 무어는 지금 축구를 하지 않는 스타들과 함께 일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연기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우리는 그들에게 축구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펠레
잉글랜드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무어는 해외 일자리도 찾아보았다. 그 결과 1981-82 시즌에 홍콩에 있는 이스턴 AA의 감독으로 잠시 부임할 수 있었는데, 앨런 볼, 그레이엄 패든 등의 잉글랜드 스타플레이어들을 홍콩으로 불러오기도 했다. 1983-84 시즌에는 잉글랜드 3부 리그의 팀인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의 코치로 부임했다.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는 강등권에 머물러 있던 클럽이었고, 감독을 자주 바꾸었다. 무어 역시 얼마 안 가서 감독직을 받았다. 생애 처음으로 수행해 보는 프로 구단 감독직이었다. 하지만 무어 역시 사우스엔드의 강등을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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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내 티나, 딸 로버타, 아들 딘과 함께

무어는 이후에도 여러 방송과 영화 등에 출연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수입을 벌어들였지만 심각한 재정적 문제에 시달렸고, 그것은 더욱 심해져서 자신의 집을 팔아야 하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무어는 자신이 직접 산 집에 대해 큰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집만큼은 팔고 싶지 않아 했다.
내 생각에, 바비는 나와 아이들을 그런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그런 수준으로 몰락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의 불면증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고, 그는 과하게 자책했다. 그는 자신이 가족들을 실망시켰다고 느꼈고,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우울증이 온 것 같았다.
티나 무어
무어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 시기에 무어는 굉장히 힘들어했고, 아내와의 사이도 점점 멀어졌다. 결국 1984년에 별거를 시작했다.
나는 그때 바비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져서... 내 생각엔... 음, 모든 제안이 거절당한 후 그는 매우 큰 절망감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가 우리의 결혼 생활에서 벗어난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하려 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봐, 나 문제가 좀 있어"라고 말했다. 그가 매우 죄책감을 느꼈다는 것을 안다. 나는 그가 그것(별거)을 가볍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는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와서 나를 보았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했다. 내가 상처받고 망연자실했던 만큼 그 역시도 같은 절망에 빠졌고, 그렇게 점잖고 좋았던 사람은 나를 떠나갔다.
티나 무어#
별거 후에도 죄책감에 시달렸던 무어는 그 후로도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보았으며,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1986년에는 정식으로 티나와의 관계를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 후,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의 감독직을 내려놓았을 때 즈음 스테파니라는 새 연인을 만나게 된다. 스테파니는 축구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었고, 무어의 신사적인 면에 빠져 연애를 시작했다. 무어는 자신의 후임 감독인 데이비드 웹이 사우스엔드 유나이티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재단에 가입했고,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재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무어는 1990년에 타블로이드 신문사인 선데이 스포츠에 입사하여 칼럼을 기고하며 활동했다. 같은 시기에 축구 분석가 겸 해설가로 런던 라디오 방송국 캐피털 골드에도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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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너선 피어스 등 캐피털 골드의 해설위원들과 함께
내가 처음으로 바비 무어를 만난 것은 내가 캐피털 골드에서 일할 때였다. 우리는 함께 해설을 진행할 이름값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고, 나는 단기간 안에 그런 사람을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바비가 사무실에 걸어 들어왔다. 그는 깔끔하고 멋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나를 JP라고 불렀다. 그건 현실이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콤비로 활동했다. 1966년 월드컵에서 우승한 절대적인 영웅 바비 무어, 내게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평범한 남자이기도 했다.
조너선 피어스[9]
이때 새내기 캐스터였던 조너선 피어스(위 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를 만났고, 둘은 얼마 후 이탈리아에서 있을 월드컵에서 해설을 맡을 콤비 해설진으로 선정되었다. 그 후로도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너선 피어스와 콤비를 이루어 캐피털 골드에서 라디오 중계를 하였다. 해리 레드냅은 자신이 웨스트햄에서 일할 때 무어는 라디오 방송을 중계하는 것이 전부였다면서,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무어를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조너선 피어스에 의하면, 자신과 함께 해설하러 다니던 시기의 무어는 그 명성에 비해 좋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긍정적이고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파일:BobbyMooreRadio.jpg
해설 중인 무어

1991년 4월 22일, 무어는 갑자기 복부에 통증을 호소하며 '비상 위 수술'을 받았다. 자세한 검진 결과, 이 통증은 대장암 때문이었다. 의사의 말에 따르면 이미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과 마찬가지였지만, 무어는 의연했다. 연인 스테파니는 무어가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곁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가까운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오직 둘만 알고 있기로 했다.
스테파니 무어
같은 해 12월, 무어는 스테파니와 결혼식을 올렸다. 무어는 시한부였지만 의사에게 살 날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남았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무어는 남은 세월 동안 스테파니와 함께 자신이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기로 했다.
파일:여행을다니는무어.jpg
곳곳을 여행하며 사진을 남긴 무어

당연하지만, 무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1993년 들어서는 걷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몸이 완전히 쇠약해졌을 때, 무어는 자신에게 잘 대해 주었던 제프 허스트, 해리 레드냅, 조너선 피어스 등에게 연락을 하고 특별한 말 없이 작별인사를 전했다. 출근길 기차에서 전 부인 티나를 만나기도 했다.
출근 시간에 기차를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옆자리에 앉고 "아주머니."하고 말을 건넸다. 나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고, 조금 지나서야 그가 바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는 너무 달라 보였다. 내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모습의 바비가 아니었다. 그는 건강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다음 역에 도착했을 때 그는 기차에서 내리려고 일어섰다. 그러다가 문이 닫히려고 할 때 다시 기차에 올라탔다. 그는 내 옆에 다시 앉았고,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목이 메어 걸어나갔다. 그 후,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다.
티나 무어
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어는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1993년 2월 14일에는 무어가 대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이 가디언지의 '디 옵저버'라는 코너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그제서야 잉글랜드 축구계는 무어를 다시 찾았다. 잉글랜드의 월드컵 우승을 이끈 영웅이 시한부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훌륭한 기삿감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암에 걸린 사실을 숨긴 덕에 언론의 주목을 받지 않고 조용히 일을 이어 갈 수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무어가 편안하게 지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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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웸블리

무어는 2월 17일,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산마리노 축구 국가대표팀과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의 경기를 중계했다. 이것이 무어의 마지막 웸블리 방문이었다. 무어는 원래 업튼 파크도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무어의 딸 로버타를 비롯한 많은 주변 사람들이 무어의 일정 강행을 만류했다. 대장암 말기의 무어가 업튼 파크에 방문할 경우 전설의 소식을 원하는 기자들로부터 카메라와 마이크 세례를 받을 것이고, 그것은 무어가 원했던 '평온한 작별'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스테파니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바비는 웨스트햄에 갈 예정이었다. 스테파니는 미디어에서 그를 집중 조명할 것이기 때문에 바비가 그곳에 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했다. 거기에는 분명 카메라가 잔뜩 있을 것이었다. 스테파니는 바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나에게 그대로 좀 전해달라고 연락한 것이었다. 나는 바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비, 난 다음에 당신이 웨스트햄에 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곳은 아주 끔찍할 거예요. 카메라가 가득일 거예요." 나는 바비가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답이 없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다. "카메라가 잔뜩 있을 것이고, 그건 아마 최선의 선택이 아닐 거예요, 밥." 바비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피어-소... 난 항상 자네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자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아. 월요일에 말하자." 이것은 내가 바비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조너선 피어스
그렇지만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던 무어는 결국 가족들과 주변인들의 만류를 받아들였고, 남은 기간 동안 퍼트니에 있는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로 했다.

2월 24일, 무어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가족들은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지금 당장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 스테파니, 그리고 아버지가 위독해서 집에 와 있었던 아들 딘은 이를 거절했다. 바비가 그동안 '집'이라는 공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어는 마지막 순간까지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리고 스테파니, 로버타, 딘이 지켜보는 가운데 침대 위에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1세였다. 캡틴 바비 무어는 잉글랜드의 영광스러운 1966년을 빛낸 선수단&코치진 중 가장 먼저 세상을 떠났다.

다음주, 웨스트햄은 무어를 기리기 위해 경기 직전에 추모식을 거행했다. 울버햄튼과의 대결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양 팀 선수들과 관중석에 있던 양 팀 팬 모두가 경기 시작 직전 무어를 위해 묵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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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경기에 참석한 웨스트햄 시절 동료들.[10]

경기장 밖에 무어의 유니폼이 걸렸고, 수많은 웨스트햄 팬들이 그의 곁에 머플러를 걸어 두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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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의 추모 광경

경기장 밖에서도 추모식이 열렸는데, 다름아닌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열렸다. 바비 무어는 바베이도스 출신의 크리켓 선수인 프랭크 워렐 경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추모식을 가진 스포츠인으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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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무어 기금

아내 스테파니는 이후 영국 암 연구회와 함께 바비 무어의 이름을 딴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 대장암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동시에 대중의 인식을 높이고자 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설립된 1993년부터 바비 무어가 남긴 유산을 토대로 암 환자들을 돕기 시작했으며, 2013년부터 Make Bobby Proud라고 불리는 켐페인을 진행 중이다. 현재는 바비 무어의 딸 로버타 무어가 이 재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일반적으로 해당 포지션에서 역대 최고가 되려면, 보편적으로 요구되는 능력만 최고 수준으로 갖추어서는 안된다. 최고 레벨에 오른 선수들은 다들 저마다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다. 무어 역시 굉장한 '별종'이었다. 한국에서는 대부분의 매체에서 '스토퍼'형 수비수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본인이 스스로를 스위퍼라고 소개했을 정도로 '스토퍼'라는 단어와 거리가 먼 선수였으며, 기본적으로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 자체가 스토퍼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는 선수였다.

일단 무어가 프로 무대에서 본격적으로 뛰기 시작한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무어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무어가 데뷔한 때는 다름아닌 1958년이다. 브라질 국가대표팀은 벨러 구트만 감독의 4-2-4 포메이션에서 착안하여 1958년 월드컵에서 자신들의 팀에 4백을 사용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하였고, 이 전술로 3백을 사용하던 다른 팀들을 상대로 대부분 승리를 거두며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4백이 축구계의 주류 수비 전술로 자리 잡기 시작했는데, 무어는 바로 이 시기에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포지션이 명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선수였던 무어는 피지컬적인 부분에서 다른 선수들에 비해 돋보이지 않는 선수였다. 그래서 중앙 수비수의 역할을 하는 '센터 하프'를 한 명만 두는 기존의 3백 전술에 사용하기에는 어려운 카드였다. 피지컬이 좋지 않은 이상 상대 중앙 공격수를 효율적으로 봉쇄하기 어려우니까. 무어의 지능적인 수비 능력을 활용하지 못해 아쉬워하던 웨스트햄 감독 론 그린우드는 1961-62 시즌 도중 해결책을 떠올려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4백 전술이었다. 론 그린우드는 주로 레프트 하프로 출전하던 무어에게 좀 더 깊은 위치에서 플레이하라고 지시했고, 무어는 마당쇠 스타일의 센터 하프인 켄 브라운 옆에서 경기하게 되었다. 레프트 하프인 무어를 처진 위치의 센터 하프와 가까운 위치에서 뛰게 하는 전술을 통해, 웨스트햄은 사실상의 포 백 전술을 완성했다. 그린우드의 판단은 적중했다. 피지컬이 훌륭한 브라운과 기술이 훌륭한 무어의 조합이 훌륭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어는 그 무렵에 발탁된 국가대표팀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기용되었다. 파트너 센터백이 궂은 일을 하면 무어는 옆에서 전방을 향해 양질의 패스를 제공하거나 거침없이 오버래핑하곤 했다. 이것은 기존의 센터 하프가 하던 일과는 달랐다. 무어는 영락없는 스위퍼였다. 특히 납작한 포백 라인에 최적화된 스위퍼였다.

그래서 무어는 기본적으로 필드의 최후방에 위치했고, 언제나 발군의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가장 뛰어났던 것은 상대의 패스를 미리 읽고 차단하는 인터셉트 능력이다. 론 그린우드가 무어의 포지션을 바꿔가며 어떻게든 살리고자 했던 재능이 바로 이것이며, 펠레, 조지 베스트, 조크 스타인 등 축구계의 거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는 무어의 최고 장점 또한 이것이다. 포백 수비 라인을 유지하다가도 총알같이 튀어나와서 상대의 패스를 차단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충격과 공포가 따로 없다. 머리, 가슴, 양 발을 전부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아주 지능적으로 수비를 했고, 이 뛰어난 두뇌 덕분에 무어는 발이 느린 선수였음에도 수비에 큰 곤란을 겪지 않았다. 무어 본인도 인터뷰에서 "속도란 A에서 B로 이동하게 하는 육체적인 것인데 이에 있어서 나는 빠르지 않다. 그러나 상대방보다 A에서 B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나? 생각의 속도 역시 다리를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만큼 필수적이다. 나는 상황을 빨리 분석하여 다른 이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닫기 전에 예상하고 먼저 반응하여 느린 속도를 보완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매우 신중하게 수비하는 스타일이었으며, 이에 걸맞게 태클 또한 아주 깔끔하고 정확해서 파울이 정말 드물었다. 무어는 1970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옐로카드와 레드카드가 도입된 이후 A매치 28경기에 출전했는데, 레드 카드는커녕 옐로 카드조차 한 장도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런 점이 증명된다. 타이밍을 보고 기다리다가 공만 톡 쳐서 빼내는 스타일이었으며, 발이 빠른 공격수와의 무리한 경합은 다른 선수에게 맡겼다. 본인 역시 '느린 속도'라는 단점을 잘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적극적인 마킹보다는 순간적인 재치와 판단을 이용해 수비하는 방향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무어는 이런 스타일의 수비만으로도 대부분의 공격수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런 수비 능력이 종합적으로 가장 돋보인 경기가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이다. 조별리그 브라질전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고의 공격진인 '4 '을 혼자 틀어막다시피 하여 단 한 번 빼고 모두 수비에 성공했다. 해당 경기 후반전에 사이드라인을 따라 빠르게 드리블하던 자이르지뉴를 상대로 보여준 대인 마킹, 그리고 이어진 깔끔한 슬라이딩 태클은 월드컵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수비 장면으로 남아 있다. 비록 0-1로 패하긴 했지만, 당시 브라질이 월드컵 모든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제외한 팀 모두 3골 이상 득점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수비수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약점도 있었다. 선수생활 초기에는 공중볼에 어느 정도 약점을 노출했다. 그러나 1962년에 국가대표팀에 발탁된 후로는 공중볼 경합 능력도 엄청나게 성장하여 상대팀 선수 중 누구도 무어를 상대로 공중볼을 쉽게 따낼 수 없었다. 위 영상의 13분 51초부터 시작되는 '헤더 클리어링' 부분을 보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패스에도 능했다. 패스 횟수, 정확도 모두 괴물같은 수준이었다. 짧은 패스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라인을 올리는 것보다는 긴 패스로 한 번에 찬스를 만드는 것을 선호했다. 무어의 중장거리 패스는 클럽에서도 국가대표팀에서도 최고의 공격 옵션 중 하나였으며, 대표적으로 1964년 FA컵 결승전에서는 단순히 빌드업 잘하는 센터백을 넘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같은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웨스트햄에서는 원거리 프리킥과 일부 근거리 프리킥을 본인이 전담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66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간접 프리킥을 통해 제프 허스트에게 환상적인 패스를 연결, 어시스트를 기록한 바 있다. 게다가 양발 사용 빈도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양발잡이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양발로 세트 피스를 처리하며 아웃프런트 킥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했을 정도이다. 특히 세트 피스 상황에서 이 양발 사용 능력이 빛났다. 무어는 다른 행동을 하는 척 하다가 갑자기 왼발로 위협적인 크로스를 제공하여 상대팀 수비진의 간담을 서늘케 하곤 했다. 또한 양발을 제약 없이 사용하여 부드럽게 탈압박을 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으며 동시대의 센터백 중 발기술이 매우 뛰어난 축에 속하는 선수였다. 함께 뛴 골키퍼들이 무어를 상당히 신뢰했기에 백패스를 받은 후에는 언제나 무어에게 굴려 주었다.

그는 영역의 한계를 깨부수는 수비수였다. 센터백이라는 제한된 영역의 포지션을 극한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았으며 그러한 플레이를 하는것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스위퍼의 롤을 늘리는데 베켄바워와 더불어 가장 많은 기여를 한 선수로 기억될 것이다. 무어 이전에도 스위퍼라는 포지션은 존재했었으나 무어는 그전의 스위퍼들이 하지 않은 독창적인 플레이를 시도하였다. 베켄바워 이전부터 그는 스위퍼 포지션에서 상대의 허를 찌르는 치명적인 로빙패스를 뿌린 다던지 오버래핑을 한다던지 더 자유롭고 도전적인 플레이를 시도했으며 그의 플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전술들은 다양한 팀에서 활용되었다. 그의 플레이를 모토로 하여 공격적인 전개를 하는 센터백들이 여럿 나오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예시로 시레아나 바레시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어는 잉글랜드 스위퍼의 시작점을 알린 선수였으며 당대 최고의 수비수였다.[11] 이처럼 무어는 스위퍼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는데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플레이를 하였음에도 펠레, 크루이프, 게르트 뮐러, 에우제비우 등 당대 최고의 공격수들을 완벽히 봉쇄할 만큼 강력한 수비력까지도 갖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수비수였던 것.

2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미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주장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과 리더십을 갖춘 선수였다. 웨스트햄에는 무어보다 경기 경험이 많고 나이 역시 훨씬 많은 선수들이 수두룩했고, 국가대표팀도 마찬가지였다. 당장 바비 찰튼만 해도 무어보다 대표팀에 먼저 데뷔했으며 나이도 무어보다 3살 많다. 그럼에도 무어가 주장이 된 것은 정말 어린 나이부터 특출난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도 잉글랜드 내에서는 주장의 상징이나 다름없으며, 웸블리 스타디움 앞에 적힌 문구가 이를 증명한다. 참고로 무어는 1963년, 그러니까 만 22세 때 국가대표팀 주장직을 처음으로 수행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잉글랜드 축구 성인 국가대표팀의 최연소 주장 출전 기록으로 남아 있다.

4. 평가

영국 축구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자,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단연코 잉글랜드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기도 하다. 무어와 견줄 만한 잉글랜드의 위대한 수비수는 빌리 라이트 정도가 있는데, 라이트의 경우 무어에 비하면 월드컵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무어는 영연방 역대 최고의 선수를 거론할 때도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스탠리 매튜스, 고든 뱅크스, 존 찰스와 함께 늘 거론된다. 사실상 프란츠 베켄바워, 파올로 말디니를 제외하면 그보다 확실히 나은 평가를 받는 수비수는 없다. 남미에서는 엘리아스 피게로아다니엘 파사레야 정도만이 무어와 비견될 수 있고, 21세기로 넘어가면 세르히오 라모스 정도가 여기에 언급될 수 있다.

여러 매체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고, 이는 대표적으로 발롱도르 득표 결과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발롱도르 순위 10위 안에 통산 네 차례나 이름을 올렸고 유효표를 받은 횟수만 무려 일곱 차례다. 1970년에는 1위 게르트 뮐러와 단 7점 차이로 발롱도르 2위에 올랐다. 프랑코 바레시가 1989년 마르코 반 바스텐에 이은 2위를 기록했을 때도 1위와 이렇게 적은 차이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수비수 중 무어만큼 많은 발롱도르 유효표를 받은 선수는 베켄바워[12], 바레시[13], 말디니[14], 파케티[15]뿐이다.

무엇보다 펠레, 프란츠 베켄바워,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 고든 뱅크스, 알프 램지, 알렉스 퍼거슨 등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축구계의 전설들이 입을 모아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는 칭찬을 하는 선수이기도 하다.

은퇴 후에도 대단한 평가를 받는다. FIFAIFFHS가 20세기 말에 선정한 20세기 베스트 XI의 멤버였고, 바레시나 시레아 같은 선수를 제치고 선정된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IFFHS의 '20세기 세계 최고의 선수' 투표에서 24위를 차지했고, '20세기 최고의 유럽 선수' 부문에서는 17위를 차지했다. 잉글랜드 국적의 선수 중에서는 7위의 찰튼, 8위의 매튜스에 이어 3위였고, 영연방을 통틀어서는 11위에 오른 북아일랜드의 조지 베스트까지 포함하므로 4위였다. 은퇴한 지 4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2013년에 영국의 월드 사커가 진행한 역대 베스트 XI 투표에서 센터백 포지션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고, 결과적으로 23표를 득표하여 22표를 얻은 바레시를 1표 차로 제치고 센터백 자리에 베켄바워와 함께 선정되었다. 2020년에 프랑스 풋볼에서 진행한 발롱도르 드림팀 투표에서는 센터백 부문에서 178표를 획득해 베켄바워, 바레시, 라모스, 칸나바로에 이어 5위에 올랐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70
  • 발롱도르 드림팀 후보: 2020 (CB 5위)
  • FIFA 월드컵 최우수 선수[16]: 1966
  • FIFA 월드컵 올타임 XI: 199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68
  • FWA 올해의 선수: 1963-64
  •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올해의 선수: 1961, 1963, 1968, 1970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8, 1969, 1971, 1972, 1973
  • 월드 사커 올타임 XI: 2013
  • FUWO 올해의 유럽팀: 1965, 1966, 1967, 1969, 1970, 1972
  • Sport Ideal 유럽 XI: 1971, 1972
  • 20세기 월드팀: 1998
  • 20세기 유럽팀: 1998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UEFA 주빌리 어워드[17]: 2003
  • PFA 세기의 선수 (1907~2007)
  • PFA 세기의 팀 (1907~2007)
  • FIFA 공로훈장: 1996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1966
  • BBC 위대한 영국인 100인: 2002
  • IFFHS 올타임 월드 드림팀[18]: 2021
  • IFFHS 올타임 유럽 드림팀[19]: 2021
  • IFFHS 올타임 잉글랜드 드림팀: 2021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3. 수훈

6. 무어에 대한 말, 말, 말

바비 무어 1941~1993 무결점 축구 선수, 최고의 수비수, 잊혀지지 않을 1966년의 영웅, 월드컵을 들어 본 첫 영국인, 동런던의 아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역사상 최고의 전설, 영국의 국보, 웸블리의 주인, 축구의 통달자, 상상 이상의 주장, 역대 최고의 신사.
웸블리 스타디움에 새겨진 글귀
그는 마치 왕처럼 수비했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게. 내가 경기를 할 때, 대부분의 수비수를 눈짓만으로 제압할 수 있었어. 나는 한 쪽을 보고 다른 쪽을 보며 수비수들을 속이곤 했어. 상대 수비수들은 그들이 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나를 걷어찼지. 아니면, 나의 날렵한 움직임 때문에 혼란에 빠져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반칙을 가했어. 나는 눈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였지만 공을 건드리지 않았지. 이게 내 비법이야. 이건 언제나 통했지. 그러나, 바비에게는 이게 절대 통하지 않았어. 바비는 나를 수비할 때 오로지 공만 보았고, 내 속임 동작을 모조리 무시했지. 그리고 바비가 그의 균형을 찾고 준비를 끝냈을 때면, 언제나 강력하면서도 공정한 태클로 공을 빼앗았지. 그는 신사였고 믿을 수 없는 수준의 축구 선수였어.[20]
그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수 중 한 명이다. 매우 영리하게 플레이를 하며, 또한 용감한 플레이를 펼친다. 그와 대결했을 때는 마치 고도의 체스 경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떤 수비수를 상대하는 게 가장 힘들었냐고 하면, 우선 바비 무어와 베켄바워가 떠오른다. 그 두 선수의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 베켄바워의 플레이는 게임을 설계하기 위한 것이지만 바비 무어의 플레이는 상대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바비 무어가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펠레#
나의 주장, 나의 리더, 나의 오른팔. 그는 우리 팀의 기운이자 우리 팀의 심장이었다. 내 인생을 걸어도 괜찮을, 멋지고 계산적인 축구 선수이다. 그는 내가 일해 본 사람들 중에서도 완벽한 프로였다. 그가 없었다면 잉글랜드는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단순한 팀 주장이 아니다. 그는 모두의 주장이다.
Q:(1974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바비 무어가 벤치에 앉고 나서 건넨 말)이제는 대표팀에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거죠?
A:당연히 아니야. 난 내년 월드컵에서도 주장으로 뛰어줄 자네가 필요해.
알프 램지
바비는 나의 축구 영웅이다. 나는 그를 존경하며 자랐다. 그와 경기한 적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이다.#
그는 정말로 신사적인 사람이자 나의 진정한 친구이다.
펠레가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것처럼, 나에게 있어서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는 바비 무어이다.#
프란츠 베켄바워
나한테 바비 무어에 대해서 얘기하라고 하면 며칠 동안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나는 금세 할 말이 없어질 것이다.
론 그린우드
함께 플레이한 모든 선수 중에서 가장 좋은 동료였습니다. 1966년을 함께했던 동료들은 모두 알 테지요. 무어가 잘 해내면 우리 역시 언제든지 잘 해냈고, 무어가 낙담했을 땐 모두가 근심에 빠졌습니다. 무어는 언제나 모범적이었으며 매우 영향력 있는 선수였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상상 이상의 주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의 포지션에서 틀림없는 최고였으며, 그 포지션에서 뛰었던 모든 세대의 선수들 중 가장 위대한 반열에 올랐다. 나는 그가 어느 위치가 위험한지 파악하고 위험의 싹을 잘라내는 플레이에 타고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선수들은 무어가 빠르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경기를 읽을 줄 알았고, 엄청난 통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을 빠르게 장악했으며, 상황 판단이 엄청나게 빨랐다. 그는 경기 중 어디에 누가 있고 누가 없는지를 아는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경기를 읽는 사람이었다.[21]
바비 찰튼
난 울었습니다. 나와 함께한 위대한 선수 두 명이 떠났을 때... 바비 무어와 빌리 브렘너가 그 두 명이죠... ...(침묵)... 그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잭 찰튼
함께 뛰어봤던 선수 중 최고의 주장이다. 그는 자신만의 경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위치에 없는 상태에서도 다른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는 플레이를 했다.
바비는 남들이 모두 긴장해 있을 때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아주 멋진 선수였다. 경기의 흐름을 굉장히 잘 읽었고, 그래서 상대의 찬스를 떡잎부터 싹둑 잘라 버리곤 했다. 마치 상대의 생각을 읽어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는 공을 잘 지켜냈고, 어떤 상황에서 패스를 해야 하는지, 혹은 크로스를 해야 하는지, 혹은 뛰어가는 선수를 위해 공을 보내주어야 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고함을 지르는 유형의 주장이 아니었다. 그는 하프타임에 중점을 두었는데, 등을 쓰다듬어 주거나 손을 잡아 주는 등의 행동을 하면서 젊은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리고 필드에서 누군가가 실수를 했거나 뭔가를 잘 했다면, 그는 그 선수에게 다가가 그 행동에 대한 칭찬 혹은 지적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주먹질이나 강압적인 통제를 하는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그는 주장 일을 효율적으로 했으며, 그것은 내가 원하는 그대로였다.[22]
고든 뱅크스
Q: 위대한 바비 무어를 상대로 알까기[23] 를 성공시킨 것에 대해 사람들이 수십년 뒤에도 이야기하는 건 어떤 기분인가?
A: 그는 위대한 선수이며,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선수였고, 1966년의 챔피언이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대인 수비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공격수에게 잠깐의 시간도, 공간도 내주지 않았다....(후략)
토스탕#
바비? 내가 웨스트햄을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날이 떠오른다(웃음). 음, 바비는 다이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고, 항상 완벽한 타이밍에 플레이했다. 그는 절대로 발 빠른 선수가 아니었지만, 경기를 읽는 능력이 아주 특별했다.#
위대한 선수이자 위대한 지도자였고, 내가 본 수비수 중 최고였다. 헤더나 태클을 자주 하는 선수는 아니었지만, 1970년에 그가 자이르지뉴를 상대로 보여준 태클은 아마도 역대 최고의 태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나를 막으려고 섣불리 달려들거나 슬라이딩하는 선수들을 쉽게 느꼈는데, 바비는 결코 그러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그를 제치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조지 베스트
그를 제어하기 위한 법률이 필요하다. 그는 모든 선수들보다 20분 앞서서 경기의 모든 것을 읽어낸다.
조크 스타인
무어는 내가 지금껏 본 수비수 중 최고였다.
알렉스 퍼거슨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고 고함치는 주장이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는 누군가에게 한 쪽 눈썹을 들어올려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의 플레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
훌륭한 선수 중에도 큰 경기마다 얼어붙는 선수들이 많다. 무어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 큰 경기일수록 그의 플레이는 더 좋아졌다.
젊은 선수들은 그를 존경하며, 그가 자신들에게 영감을 주는 선수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보다 나은 롤 모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영웅이 누구냐고 물어왔고, 심지어 지금도 종종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여전히 바비 무어라고 대답한다.
제프 허스트
선수, 그리고 남자로서 나는 그를 사랑했다.
마틴 피터스
그날은 정말 환상적인 날이었다. 나는 항상 내가 그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충분히 만끽할 수 없었던 것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바비는 적령기였고, 그는 (월드컵을)들어올렸다. 그러나 그 날 나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 준 것은, 그가 경기 전에도, 경기 중에도, 경기 후에도 보여준 놀라운 수준의 침착함이었다.[24]
앨런 볼
위대한 주장이자 월드클래스 플레이어. 더 나아가, 그는 모든 선수들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노비 스타일스
그는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플레이하기 위해 태어났다. 그렇지 않은가?
노먼 헌터
그는 월드클래스였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6년 팀을 살펴보면, 뱅크스, 찰튼, 무어, 피터스 등 모두 세계적인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 레이 윌슨 또한 세계적인 선수였다. 바비는 그중에서도 바비 찰튼, 고든 뱅크스와 같은 수준의 선수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선수 생활 내내 자신의 포지션에서 최고였다. 이는 자명하다.[25]
앨런 멀레리
기사 작위를 받은 다른 축구선수들을 존경하며 그들에게 행운이 있길 바라지만, 축구 선수들 중에서 바비보다 우선적으로 기사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는 기사 작위를 받았어야 했다. 확실히.[26]
누군가가 바비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여지껏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생각에, 그와 개인적으로 만나 본 사람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누구라도 그를 싫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어느 밤에 열렸던 슈루즈버리와의 친선 경기에서 센터 포워드로 출전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 기억 상으로 그는 두 골 혹은 세 골을 득점했다. 아마 그 밤에 해트트릭을 기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어디에서든 플레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유형의 축구 선수였다.
해리 레드냅
무어는 위대한 홍보대사이다. 축구 선수로서도 그렇고, '삶'에서도 그렇다.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
바비 무어는 그 상황(1966년 월드컵 8강 아르헨티나전, 상대팀 주장 라틴의 갑작스런 퇴장)에서 누구보다도 잘 대처했다. 나는 그것이 주장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27]
그는 로버스의 로이(만화)였다. 또한 댄 데어(만화)였다. 나는 그가 그 시대에 주장이란 무엇인지, 리더란 무엇인지를 재정의했다고 생각한다.[28]
레이 데이비스
바비 무어는 펠레, 마라도나, 조지 베스트, 요한 크루이프가 있는 최고의 신전에 포함될 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선수들은 스포츠를 넘어서는 무언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29]
러셀 브랜드
바비는 다른 누구보다도 인식 능력이 뛰어났다.
켄 브라운#
바비와 나의 관계 하면 기억나는 사건이 하나 있다. 이탈리아 월드컵 4강 독일전 직후, 바비와 나는 기쁨에 찬 독일 팬들을 헤치고 토리노 광장에 다다랐다. 우리 앞에 펼쳐진 장면은 마치 단테의 지옥에서 나온 장면 같았다. 훌리건들이 서로를 으깨가며 싸우고 있었다. 좋지 않은 날이었다. 우리는 멀리 보이는 호텔에 가기 위해 광장을 지날 참이었다. 나는 바비에게 말했다. "근처 술집으로 들어가요, 바비. 난 못 해요. 저기로는 절대 못 지나간다고요." 그랬더니 바비가 이렇게 대답했다. "오, 아니야, 피어-소(피어스의 별명).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바비는 걷기 시작했다. 돈키호테처럼... 난 산초 판사처럼 바비의 뒤에 숨어서 따라 갈 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바비가 광장에 도달하자마자 정열적으로 싸우던 사람들이 싸움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바비 무어야. 맞죠, 무로?(Moore의 애칭)", "맞습니다.", "이번 경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래요, 아주 나쁜 페널티였죠", "오, 충격적인 페널티였다고요.", "바비 무어? 바비 무어가 왔어?", "바비 무어다...!", "바비 무어가 왔다!" 그들은 쾅, 쾅, 쾅! 큰 소리와 함께 바로 싸움을 재개했다. 우리는 유유히 그들 사이를 가로질러 갔다. 그들은 마치 홍해처럼 갈라졌고, 아무도 바비와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도. 놀라웠다. 그는 신성한 존재 같았다.[30]
단순한 축구선수가 아니었다. '66'이라는 숫자도 그를 완전히 대변해 줄 수 없다. 그는 위대한 정신력, 용감함, 품위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남긴 것은 계속해서 기억될 것이다.
축구공을 차는 일곱 살 짜리 소년이 그의 국가대표팀을 이끌기 원한다면, 누구도 그의 열정을 꺾을 수 없을 것이다. 바비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철했다. 축구에 대한 그의 지식은 나를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조너선 피어스
그는 완벽했다. 바비는 후방에서 경기하는 법을 아는 선수였다. 누군가는 바비가 훌륭한 태클러가 아니며 공중전에 약하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그는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뛰어난 게임 리딩 능력 덕분에).
존 모트슨
그는 여지껏 필드에 발을 들여놓았던 수비수 중 가장 위대하다.
노먼 길러
어느 날 보우(Bow) 성당에 가고 있었는데, 어떤 차가 내 옆에 섰다. 그 안에 있던 사람은 바비였다. 그는 나에게 물어보았다. "어디 가?" 나는 대답했다. "보우 성당에 가는 중입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나도 그 길로 가는데, 나는 역으로 가는 중이야. 이리 타! 거기까지 태워 줄게." 그는 나를 보우 성당에서 내려주었고, 나는 내가 바비 무어의 차에서 내리는 그 순간을, 나를 아는 누군가가 봐 주기를 바랐다.[31]
토니 카
가끔은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또 그와 함께하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질 때가 있다. 우리는 약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그에게 내 옆자리에 앉아 달라고 말했고, 그는 내 옆에 앉아 주었다. 우리는 돌아오는 내내 수다를 떨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은 참 좋은 시간이었다. 나는 그를 실제로 만난 몇 안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다.[32]
내가 어린 시절에 응원했던 팀은 웨스트햄이었다. 나는 17세 때 뉴캐슬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웨스트햄이 좋아서 웨스트햄에 입단하려 했던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웨스트햄을 좋아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고, 바비 경[33]없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쓰이는 이름에 Sir, 즉 '경'이 붙지 않지만, 영국 내에서는 무어를 부를 때 이름 앞에 존경, 감사의 뜻을 담아 의도적으로 Sir을 붙이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개스코인 역시 무어를 개인적으로 깊게 존경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역시 그중 하나였다.
폴 개스코인
내가 이 클럽에 입단했을 때, 나는 그가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장면들은 그의 태클 실력 말고도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는 공 앞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팀에 걸맞은 리더이며, 아주 훌륭한 선수였다.
안젤로 오그본나
그 경기(1970년 월드컵 브라질전)는 바비 무어 스스로도 자신이 치른 경기 중 최고로 꼽았을 것 같다. 그는 역대 최고의 센터 포워드를 상대로 최고의 플레이를 펼쳤다. 이것이 바비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준다.
제임스 콜린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아버지와 업튼 파크 밖에 꽃을 내려놓으러 갔던 것이 기억난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의 주장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는 다른 사람은 아마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확실히, 내 선수 경력 중에는 그럴 일이 없다.
마크 노블
눈에 띄는 수비수는 당신이 경기의 하이라이트만을 볼 때조차 당신을 그에게 다가간 펠레[34]처럼 행동하게끔 만들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는 아닐지라도, 그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 넷(오그본나, 하트, 노블, 콜린스)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존경을 받는다.
조 하트#
만약 내가 그처럼 고환암에 걸렸다면, 그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정신력과 신체적인 힘이 없었을 것 같다. 그런데 바비 무어는 고환암을 진단받은 지 18개월만에 월드컵을 들어올렸으며, 그 후 그의 커리어를 더 발전시켰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성과다.
존 하트슨
그는 경기장 안팎에서 왕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바비는 우리 집 안을 돌아다니곤 했다. 내가 충분히 많은 나이를 먹었을 때, 그러니까 그가 월드컵을 들어올린 잉글랜드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 나이가 되었을 때, 그가 나와 함께 정원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았던 적이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들떴던 경험이 있다.
나는 바비의 전설을 듣고 자란 세대이다. 사실, 우리 아버지는 젊을 때부터 바비와 한 방을 쓰던 사이였다. 내가 어렸을 때, 내가 잘못 행동할 때마다 아버지는 바비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그가 그의 방을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했는지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는 완전한 신사였다. 일요일 아침에 훈련하고 추가 훈련까지 하는 그의 이야기, 레스토랑 같은 축구장 밖 공간에서도 사람들을 상대하는 그의 이야기는 그가 당시 엄청난 스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나는 그의 이야기들을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의 기준으로 삼았다. 내가 나이가 들었을 때, 아버지께서 "네가 너의 선수 경력동안 바비의 요소들을 어떻게 짊어지고 왔는지 볼 수 있구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엄청난 일이었다. 당신이 올바른 가치관을 고수하길 바란다면, 바비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다.#
프랭크 램파드
이 나라의 기준에서 (월드컵 무관)50년은 너무 긴 것 같다. 우리는 그것을 바꾸고 싶다. 우리는 우리만의 역사를 만들어내서, 지금 사람들이 바비 무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리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를 바란다. 1966년의 전설은 모든 세대들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고, 존경할 만한 것이다.
웨인 루니

7. 어록

"적어도 그것은 승리였고, 우리는 이겼다."[35]
"만약 당신이 골을 내주지 않는다면, 지는 경기보다 이기는 경기가 많아질 것이다."#
"사람과 공간, 둘 다 막을 수는 없다."
"내가 막 계단 꼭대기로 다가가 모퉁이를 돌아 왔을 때, 내가 처음으로 본 것은 빛나는 흰 장갑을 낀 여왕이었다. 우리가 아주 습한 경기장에서 경기했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나는 더러운 진흙을 잔뜩 묻힌 손이 생각나서 도저히 그녀와 이렇게 악수를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급하게 떠올린 것은 '악수를 하기 직전에 식탁보 벨벳에라도 손을 닦아내자'라는 생각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 같은 짓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그 예쁜 장갑을 더럽힐 수 없었다."[36]
"이 경기를 즐겼니?"
"아니, 나는 그러지 못했어"
"친구, 우리 나이는 (FA)컵 결승전에서 뛸 나이가 아냐. 그러니까 이런 경기는 즐겨야 한다고."
(2부 리그 팀 풀럼을 이끌고 간신히 진출한 FA컵 결승전에서 패한 이후 풀이 죽은 동료 앨런 멀레리에게 해 준 말)

8. 여담

진행자: 당신의 신체적 특징 때문에 어떤 별명이 생겼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시나요?
바비 무어: 여기서 말해도 될까요?
진행자: 네.
바비 무어: 오, 감히 말해도 되나요?(Oh, Dare I?)
진행자: 하하하, 네.
바비 무어: 느림보요.(Tubby.)
진행자: 느림보요?
바비 무어: 느려터진 뚱보요.(Tubby and Fatso.)
진행자: 느려터진 뚱보였군요.(Tubby and Fatso, yes.)
(객석 웃음)
출처
바킹에 살던 어린 시절, 무어의 별명은 Tubby 그리고 Fatso, 즉 '느림보', '뚱보'였다. 위 사진의 검은 동그라미 속에 있는 통통한 소년이 무어이다. 어렸을 때에는 키에 비해서 상당히 비대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지만, 나이가 들며 살이 엄청나게 빠져서 아주 깔끔한 외모의 미남이 되었다.

무어가 본격적으로 1군 팀에 데뷔하기 전 가장 존경했던 선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던컨 에드워즈이다. 던컨 에드워즈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 3위에 올랐을 정도로 이름을 날렸던 잉글랜드 최고의 기대주였다. 웨스트햄 팀 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믿고 따랐던 선수는 말콤 앨리슨이었다. 이 선수의 포지션도 던컨 에드워즈와 마찬가지로 레프트 하프였다. 그래서 무어는 에드워즈, 앨리슨의 등번호였던 6번을 달고 뛰고 싶어했다. 1957년에 말콤 앨리슨이 결핵으로 인해 커리어를 중단하게 되면서, 무어는 1958-59시즌 1군에 데뷔하자마자 6번을 자신의 등번호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어는 존경하던 던컨 에드워즈와 같은 등번호를 달고 함께 경기하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에드워즈는 무어가 1군에 데뷔하기 8개월 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37]
파일:BobbyMooreWithTheEquals.jpg
1969년 런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브릿팝 그룹인 디 이퀄스와 만나서 그들의 히트곡인 Viva Bobby Joe를 Viva Bobby Moore로 개사하여 부르는 신선한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이 녹음본은 유실되었다. 대신, 록 그룹 더 비지니스가 2006년에 Viva Bobby Moore를 다시 녹음하여 대중에 공개했다.
파일:BobbyMooreSavePenalty.gif
부상당한 골키퍼 대신 골대에 섰다가 페널티 킥을 막아낸 특이한 경력이 있다.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바비 무어/클럽 경력참고.
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1.jpg
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2.jpg파일:BobbyMooreandFranzBeckenbauerFamily.jpg
메이저 국가대항전에서 매 번 만났고, 만날 때마다 명경기를 연출해냈던 서독의 프란츠 베켄바워와는 사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서독 국가대표팀이 유로 1972 플레이오프를 위해 잉글랜드에 방문해 있었을 때, 베켄바워의 가족이 무어의 집에 놀러 오기도 했다. 둘은 체스 게임을 하고 사진을 찍는 등 우정을 나누었다. 위 사진들은 전설적인 사진작가 테리 오닐이 그때 직접 무어의 집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들이다. 베켄바워는 저 때 무어와 함께한 체스 게임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미소를 띄워 보이며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켄바워는 바비 찰튼과도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여러 모로 과 관련이 많은 인물이다. 1964년 말, 20대 초반의 나이에 고환암 진단을 받았으나 5년에 걸친 꾸준한 노력 끝에 결국 완치에 성공한 인간승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당시 언론에 대놓고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무어와 가까운 지인들은 모두 그가 고환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국내에는 대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 고환암을 앓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본인의 의도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후 부인인 스테파니 무어가 바비의 유산으로 영국 암연구회와 협력하여 바비 무어 기금을 설립했다. 현재 이 기금은 꽤 많은 수의 암 환자들을 돕고 있다.

발렌타인 데이와도 관련이 깊다. 1973년 2월 14일 자신의 100번째 A매치를 진행했고, 1993년 2월 14일에는 대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대중에 공개했다. 물론 후자의 경우 본인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동료 제프 허스트 등의 말에 따르면, 타인에게는 매우 관대하나 본인에게 상당히 엄격한 완벽주의자였다. 티나와 이혼했을 때도 이 성격이 큰 영향을 미쳤고, 평생 지낼 것 같았던 웨스트햄에서 떠난 것도 이런 이유가 컸다. 본인이 부상으로 빠져 있을 때 팀의 성적이 더 좋아지자, 그냥 바로 풀럼으로 떠나버렸다. 국가대표팀에서도 충분히 더 뛸 수 있었지만 32세에 은퇴했는데, 이 역시 1974년 월드컵 유럽 예선 폴란드전에서의 실수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실수의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다면 바비 무어/국가대표 경력 참고 바람.
"그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는 라인에 맞춰서 모든 옷을 정리해 놓았고, 그의 시계는 안방 진열장에 완벽히 정렬되어 있었으며 모든 것이 표준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그는 가장 환상적인 룸메이트인데, 그와 함께라면 어느 물건도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중략) 그는 티끌 하나 없이 깔끔했다."
지미 그리브스
함께 월드컵 우승을 경험했던 지미 그리브스는 무어를 위와 같이 서술했다. 생활 습관 자체가 상당히 깔끔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재미없는 성격은 아니었고, 유머러스한 장난도 칠 줄 알았다.
"그가 경기 전 잉글랜드 선수들을 FA 관계자들에게 한 명 한 명 소개할 때, 엉뚱한 이름으로 소개할 때가 많았다. "여기는 레이 윌슨, 여기는 조지 코헨..." 그리고 내 차례가 왔을 때, 그는 뜬금없이 나를 '로저'라고 소개했다. 내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자, 그는 나에게 윙크 사인을 보내고 "여기는 로저 헌트입니다"라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쳤다. 그런데 그들은 그게 거짓말인지 몰랐다. 그들은 FA의 고위 관리들이었고 선수들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어쨌든, 무로(별명)는 낯빛을 전혀 바꾸지 않은 채로 그런 장난을 치곤 했다. 바비는 내가 아는 어떤 선수보다도 나를 더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그는 악당이었다."
지미 그리브스
파일:Bobby'sfamily.jpg
위 사진은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로버타와 아들 딘을 담은 사진이다. 상당히 가정적인 성향이 강했다. 티나는 바비가 결혼생활에 충실했던 덕에 결혼생활 내내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바비가 바람을 피운다는 말과 비슷한 말조차도 들어본 적이 없으며, 자신 대신에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은 상상도 못 해봤다고 한다. 결국 여러 가지 문제가 겹쳐 1986년에 이혼하긴 했지만, 외도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선수생활 내내 사생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1970년 월드컵 직전, 바비 찰튼과 함께 보고타 호텔 근처의 귀금속 상점에서 금팔찌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한 적도 있으나, 이 역시도 둘 다 완벽하게 무죄인 것으로 밝혀졌다.

생전에 마가렛 대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함께 있는 사진#
파일:afterretirementbobbyinhispubnamedthethreehorseshoes.jpg
런던에서 유명한 애주가였다. 알코올에 중독된 적은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술을 마셨다고 한다. 특유의 분위기를 상당히 좋아해서, 한창 축구 선수로 뛰던 시절에도 아내 티나와 함께 웨스트햄 홈구장 업튼 파크 근처에 주점을 차려 운영하기도 했다. 위 사진은 은퇴 후에 운영한 'The Three Horse Shoes'라는 주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밤을 아주 좋아했다. 뛰기 위해 마시고 마시기 위해 뛰었다.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훈련할 때에는 악바리였다. 때때로 그는 토요일 밤을 샌 후 일요일 아침에 저녁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나곤 했다. 그는 일요일에 트랙수트, 빈 다이너, 검은색 가방을 착용하고 운동장 12바퀴 정도를 돌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훈련하며 땀을 뺐다. 누군가가 그에게 열한 시 정도가 되었다고 말해 주면, 그는 경기장 밖으로 나가서 옷을 단정히 입고, 펍에 갔다."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해리 레드냅&제프 허스트&롭 젠킨스, Bobby 다큐멘터리에서
1970년까지는 술이 문제가 된 적이 없었지만, 1970-71 시즌에 대형 사고를 친 적이 있다. 당시 웨스트햄은 1월 첫째 주의 FA컵 경기를 앞두고 있었는데, 무어는 경기 전날 그라운드에 서리가 생겨 FA컵 경기가 연기된 것으로 알고 팀 동료 지미 그리브스, 클라이드 베스트, 브라이언 디어와 함께 술을 무리하게 마셨다. 그러나 경기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무어는 최악의 활약을 보여주며 리그 최하위 블랙풀을 상대로 패하여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은퇴할 때까지 무리하게 술을 마셔 사고를 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이런 습관이 무어의 대장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생전에 옷을 깔끔하게 잘 입는 것으로 유명했다. 소위 말하는 '조각 미남'은 아니었지만, 좋은 스타일링으로 준수한 외모를 잘 살렸다. 이런 점에 국가대표팀의 주장인 점까지 보너스 요인으로 작용하여, 월드컵 우승 직후 영국에서 손꼽히는 대스타가 되었다. 축구선수 중에서는 그야말로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무어의 이런 범국민적인 인기는 조지 베스트가 이어받게 된다.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기간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짧고 그마저도 TV가 아닌 라디오 해설위원으로만 활동했지만, 조너선 피어스, 존 모트슨 등 그와 함께했던 사람들은 바비가 그 짧은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미담을 만들어냈는지 증언하고 있다.
"바비는 내가 만류해도 직접 운전하기를 고집했다. 스테파니가 말해 주었는데, 바비가 운전을 고집하는 것은 그가 경기장에서 내가 대부분의 일을 한다고 생각하므로 오고 가는 동안은 자신이 모든 일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바비는 거친 운전을 즐겼다. 사람들은 경적을 울리고 창문을 쿵쾅거리다가도 운전자가 바비인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태도가 싹 변했다. "바비 무어?", "바비 무어다!", "바비 무어가 방금 우리 차를 추월했어!" 모두가 바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교통체증이 조금 풀리면, 그들은 다시 옆으로 와서 창문을 열고 바비에게 사인을 요청했다.[38]
조너선 피어스
"또 하나의 놀라운 일화는 UEFA 유로 1992때 있었다. 줄리안 워터스라는 청년 기자가 나와 함께 월드컵을 취재하러 왔는데, 그는 토너먼트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고 싶어했다. 잉글랜드는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고, 캐피털 라디오 측에서는 예산이 없어서 우리 팀이 모두 돌아와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줄리안은 슬퍼했다. 그때, 바비 무어가 나를 한쪽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이야기했다. "줄리안의 임금과 남은 대회 기간 동안 머물 경비를 내가 마련할게. 단, 줄리안이 이 사실을 모르는 한." 바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친절했다....(중략)... 그는 왕자와 거지를 똑같이 대하는 훌륭한 신사였다."
조너선 피어스
"내가 바비 무어를 실제로 처음 만난 것은 내가 BBC 프로그램 스포츠나이트의 첫 주에 해설 일을 하던 때였고,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추운 밤 중 하나인 아이레솜 파크에서 열린 미들즈브러와 풀럼 사이의 앵글로-스코티쉬 컵 결승전이었다! 나는 경기가 끝난 후 벌벌 떨며 바깥을 배회하고 있었는데, 풀럼 탈의실 문이 열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바비 무어였다. 그는 '추워 보인다. 안으로 들어와!'라며 나를 불렀다. 그것은 아주 친절한 남자의 아주 멋진 행동이었다. 그는 그가 하는 모든 일에서 너무나 겸손한 태도를 보여주었고, 나는 그에게 보살핌을 받았던 그 저녁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중략)... EFL 트로피[39] 대회가 열렸을 때도 나는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바비는 그때에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째, 바비는 한 무더기의 유니폼을 직접 들고 와서 마치 그가 키트 관리인인 것처럼 모든 선수들에게 유니폼을 직접 나누어 주었다. 그것은 그가 가진 겸손함의 또 다른 예였다....(중략)... 바비 무어와 그의 부인 스테파니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당신과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스테파니가 바비의 유산으로 설립한 '바비 무어 기금' 덕분에 대장암에 걸렸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존 모트슨

1978년에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가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최연소 월드컵 우승팀 캡틴이었다. 우승 당시 나이는 25세 109일.
파일:BobbyMooreWithGranddaughter.jpg
1991년 4월, 바비 무어의 아들 딘 무어가 '포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바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손녀를 얻으며 할아버지가 되었다. 바비 무어는 51세까지 살았고, 바비의 아들 딘 무어는 2011년 43세의 나이에 별다른 이유 없이 세상을 떠났다. 부자가 모두 단명했다. 딘의 어머니이면서 첫 번째 아내인 티나 무어, 그리고 딸 로버타 무어는 현재 살아있다.
파일:BobbyMooreStatue.jpg
1923년부터 80년간 존속된 올드 웸블리 스타디움을 2003년에 철거하고 다시 지을 때, 잉글랜드 축구의 아이콘인 바비 무어의 동상을 구장 입구에 세우기로 했다. 또한 동상이 서게 될 구장 입구 이름도 'Bobby Moore Entrance'로 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상은 2007년 구장 재건축 완료와 함께 세상에 공개되었다. 웸블리 구장 안에는 '바비 무어 룸'이라는 이름의 레스토랑도 있다.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무어를 굉장히 기념비적인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Moorewithhurst.jpg
웨스트햄의 전 홈구장인 업튼 파크 근처에도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은 웸블리의 동상과는 다르게 1966년 월드컵 우승 당시 찍힌 사진을 토대로 만든 동상이다.
파일:number6retirefromwestham.jpg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에서 6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하기 전, 마지막으로 6번을 달았던 선수는 매튜 업슨이다. 위 사진 왼쪽에 있는 인물은 무어의 두 번째 아내인 스테파니 무어이다.

역대 올타임 베스트 일레븐을 꼽을 때 대개 센터백에 프란츠 베켄바워는 고정이고, 프랑코 바레시, 엘리아스 피게로아, 다니엘 파사레야, 가에타노 시레아 그리고 바비 무어가 파트너로 경쟁하게 되는데, 그중에서도 무어와 바레시가 서로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선수이다. 보통 클럽 활약과 국가대표팀 활약 중 어느 쪽을 중요하게 보느냐에 따라 갈리는데, 클럽 활약을 중시하는 경우 바레시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고 국가대표팀 활약을 중시하는 경우 무어의 손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공신력 있는 매거진의 올타임 베스트 XI 선정 사례로는 2013년 영국 월드 사커의 올타임 베스트 XI 투표를 들 수 있는데, 무어는 센터백 포지션에서 23표를 받아서 22표를 받은 바레시를 딱 1표 차로 제치고 베켄바워의 파트너로 선정되었다. 이때 베켄바워는 무려 68표를 받았다.

FC 온라인에서는 평가가 박하다. FC 온라인에서의 명성은 고작 유명 선수. 레전더리, 월드클래스, 탑클래스까지 유명 선수보다 나은 클래스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명 선수' 명성이 부여되었다. 평가도 평가이고, 무엇보다 게임 내에서의 성능 자체가 별로 좋지 않다. 이는 피지컬 면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바레시나 베켄바워도 마찬가지. 이들의 천재적인 라인 컨트롤이나 경기 템포 조절 등은 게임에서는 구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바레시, 베켄바워 같은 경우에는 스피드 면에서는 좋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으나 무어의 경우에는 아예 당대에도 발이 느린 것으로 유명했던지라[40] 스탯이 더 심각한 수준이다. 실제의 바비 무어는 신기에 가까운 예측능력으로 이를 커버했는데, 이를 게임에서 구현할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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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수비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60년대 수비수들 중 2위에 이름을 올렸다.

[1] /ˈrɒbət ˈfrɛdərɪk ˈtʃɛlsɪ mʊə/[2] 현재는 런던 바킹대거넘의 서쪽 지역, 뉴엄의 동쪽 지역으로 구성되어있다.[3] 178cm라는 말도 있다. 실제로 피파같은 축구 게임에서는 178cm로 나온다.[4] 많이들 스토퍼형 수비수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리베로에 가까운 플레이 스타일을 보였다.[5] 양발잡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왼발을 이용한 빌드업에도 능했다.[6] 선수 시절 초기에는 주 포지션인 레프트 하프를 비롯해 여러 포지션을 겸했다. 한국에는 스토퍼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사실 스위퍼였다. 무어 본인이 자신을 스위퍼라고 소개한 바 있으며, 론 그린우드가 무어의 역할을 기존의 레프트 하프 위치에서 좀 더 처진 위치로 바꾼 것 역시 무어가 전통적인 '센터 하프'의 투박한 이미지와는 많이 다른 유형의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나 유럽 쪽에서 만든 자료 중 무어가 스토퍼로 분류되어 있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 # # # # # ## # # #[7] 이 우승이 현재까지 잉글랜드의 유일한 월드컵 우승이자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이다.[8] 크리스프 실드에 대해 궁금하다면 이 링크를 참고하세요.[9]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BBC의 캐스터로 선정되었고, 카잔의 기적을 생중계하기도 했다.[10] 왼쪽부터 제프 허스트,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 론 그린우드, 마틴 피터스, 해리 레드냅, 빌리 본즈[11] 무어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를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베켄바워는 1970년 월드컵까지 중앙 미드필더로 뛰었다.[12] 12차례 유효표를 받았다[13] 무어와 바레시는 발롱도르 득표 양상이 정말 비슷하다. 무어와 바레시 둘 다 7차례의 유효표를 받았고, 포디움에 한 번씩 들었으며, 포디움에 든 해를 포함하여 10위 이내에 4번 이름을 올렸다.[14] 11차례 유효표를 받았다.[15] 8차례 유효표를 받았다.[16] 잉글랜드 자체 선정. #[17] UEFA 소속 모든 국가들을 대상으로 근 50년간의 선수 중 최고의 선수를 선정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무어가 선정되었다.[18] B팀[19] B팀[20] 2006년 5월 27일 '데일리 메일'의 리 클레이튼과 인터뷰, "Welcome into Pelé's World"[21] In his position, he was arguably the best in the world at the time and one of the greatest players in that position of all time. I had this awareness, ummm... he have this knack of knowing where danger was, and nipping it in the bud. And a lot of players have criticized even by saying that you know well, 'Bobby Moore doesn't had the ball very much, is not very fast'. But he's other attributes compensated for that no small measure. He read the game, he had great control he did. he got control of the ball very very quickly. Assess the situation very quickly. And Also had this quality of knowing where people aren't as will you as we say in the game. He had good read out. 무어의 사후 방송된 1993년의 다큐멘터리에서[22] Bobby was a very very cool sort of player that could relax at a time when others were a little bit tense. And could read the game so well that he would nip it in the bud. It was as though he could read the opponents mind. The guard with a ball. And he just know exactly where he was gonna put the pass out of the cross for the head or the throw ball for the player running onto it. He wasn't a captain a shouting around. I mean he'd bring a point to half time and also lift the lads before they went out, you know, give him an a pat on the back and a shake of the hand and that sort of thing... And out on the field, if you made a mistake or if you did something well, it would make sure that he'd come over and pointed out to you whatever it was. But he wasn't a fist racer or force temper at all. He just went around doing the job efficiently, which is exactly what I wanted. 무어의 사후 방송된 1993년의 다큐멘터리에서[23] 사실 이 질문은 잘못되었다. 1970년 월드컵 조별리그 잉글랜드 vs 브라질 경기에서 나온 상황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 유튜브에 남아있는 1970 월드컵 고화질 다큐멘터리를 재생 속도 0.25배로 해 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알까기가 아니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24] It was just a fantastic day. and I've always said out it's just pity I was too young at the time really for it all just to sink in. But with Bobby, he was right age, he was carrying... But what struck about that particular day was how calm he was before the game, during the game, and after it.[25] I mean, he was world-class. there's no doubt about that. If you look at the 1966 squad, with Banks, Charlton, Moore, and Hurst, Peters, whatever, they're all world-class players. Ray Wilson was a world-class player. Bob was world-class player with the Bobby Charlton and the Banks as well. He was undoubtedly, he was the best defender in that position throughout his football career. No doubt. 무어의 사후 방송된 1993년 다큐멘터리에서.[26] No disrespect to other footballers who got knighthoods, and good luck to them, no one deserved a knighthood more than Bobby did amongst the footballers. He should have had a knighthoon, for sure.[27] 파일:Honeycam 2020-05-21 15-18-42.gif
무어는 심판에게 경기를 빨리 재개해 달라고 말하다가 아르헨티나의 수비수 로베르토 페레이로에게 난데없이 뺨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주심은 로베르토 페레이로에게 그 어떤 제제도 가하지 않았다.
[28] He was Roy of the Rovers. he was Dan Dare. I think he personified what a captain in those days should be, a leader. 다큐멘터리 Bobby에서[29] Bobby Moore is one of the figures that will be in the final pantheon of Pele, Maradona, George Best, Johan Cruijff. Bobby Moore. Like, these players that are above. It's because you've connected to something in people that goes beyond sport.[30] And I think that was one of the defining moments of my relationship with him. So we plodded away through these jubilant German supporters and we get to this square in Turin and it's like something from Dante's inferno, you know, there's all these hooligans piling into one another and smashing each other up. It was a bad day. We go to get across the square because we can see our hotel in the distance, and I said to Bob, "Let's find a bar, I'm not doung it, I'm not going to go across there" and he went, "Oh, no, Pearce, we'll be all right. So Bobby starts walking, Don Quixote, across this square and I'm his Sancho Panza, I'm hid behind him. But I didn't need to because as soon as Bobby hit the square, all these people punching one another, bang, bang, bang... "Oh, that's Bobby Moore. All right, Mooro?" "All right, son?" "What did you think of the game?" "Yeah, bad penalty wasn't it?" "Oh, it was a shocking penalty. It's Bobby Moore? It's Bobby Moore!... Bang, Bang, Bang, carried on the fight. So we were walking across, it was the parting of the Red Sea - Bobby and me and these hooligans having a go at each other, no-one touched us, no-one touched us. It was brilliant. Like being in the presence of a divine being. 다큐멘터리 Bobby에서[31] I was walking out of the ground one day, car pulled up alongside me and it was Bobby and he said, "Where are you going?" I said, "I'm going to Bow." He said, "I'm going that way, going to the station - jump in I'll give you a lift." He dropped me off at Bow Church and I was just hoping there'd be someone walking along the road that knew me that would see me getting out of Bobby Moore's car![32] Who do you turn to? You know, because some days you want the experience what it would be like winning the World Cup and obviously with him doing it... We had a little chat for a while. I got him to sit next to us on the plane and that. We chatted all the way back. That time that I were with him was really nice, you know. So I was one of the fortunate ones that actually got to meet the guy.[33] 개스코인은 실제로 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Sir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바비 무어에게는 기사 작위가 주어진 적이[34] 파일:1970PeleMoore.jpg
이 장면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35] At least it was victory and at least we won. 제프 허스트의 결승골에 대한 서독 선수들의 불만에 대해 경기 직후 했다고 알려진 말. 실제로, 해당 경기에서 불이익을 먼저 본 쪽은 잉글랜드였다. 베버의 동점골 상황에서 슈넬링어가 팔로 공을 건드려 핸드볼 상황이 발생했으나 파울이 선언되지 않았다.[36] When I just approached the top of the stairs and come around the corner for the first time I could visualize was the Queen, in shining white gloves. you know we've been playing on the very very wet pitch. And all I could think of it dirty wet muddy hands, I can't possibly shake hands with her like this. And the first thing I could think of was to clean my hand in which I did on top of her lovely laid out velvet just prior to meeting her. you know, I suppose it might have been a silly thing to do, you know, to many many people, but it was just an immediate reaction was that my goodness play those lovely white gloves I can't dirty them. 나중에 한 기자가 무어에게 1966년 월드컵 우승 당시 한 특정 행동에 대해 물어보자 한 답변.[37] 출처[38] Bobby would insist on driving. Stephanie told me it's because Bobby thought that I did all the work at the ground and therefore he would do all the work in getting there and getting back. Bob would cut off everyone. And did the people banging their horns and thumping their windows and then they'd see it was Bobby and go, you know, "Bobby Moore? Bobby Moore!!", "Bobby Moore has just cut us up." Everyone waving for Bobby, then stop at a traffic jam a bit further up the car that he'd just cut up would want his autograph. 2016년의 BBC 특별 다큐멘터리 Bobby에서.[39] EFL 컵이 1부 리그와 2부 리그 팀들 간에 진행되는 대회라면, EFL 트로피는 3부 리그와 4부 리그 팀들 간에 진행되는 대회이다[40] 다만 아무래도 너무 느리면 곤란하기 때문인지 중앙 수비수 중에는 평범한 정도의 수치인 60대 중반 정도의 속도를 매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