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라이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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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 |
15대 |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주장 | ||||
조지 하드윅 (1946~1948) | ▶ | 빌리 라이트 (1948~1959) | ▶ | 로니 클레이튼 (1959~1960) |
빌리 라이트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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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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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1957 Ballond'or | ||
수상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2위 빌리 라이트 | 3위 레몽 코파 던컨 에드워즈 |
빌리 라이트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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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前 축구인 | ||
이름 | 빌리 라이트 CBE Billy Wright CBE[1] | |
본명 | 윌리엄 앰브로즈 라이트 William Ambrose Wright | |
출생 | 1924년 2월 6일 | |
영국 잉글랜드 슈롭셔주 아이언브릿지 | ||
사망 | 1994년 9월 3일 (향년 70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73cm | 체중 73kg | |
직업 | 축구 선수(하프백,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1939~1959) |
감독 | 아스날 FC (1962~1966) | |
국가대표 | 105경기 3골 (잉글랜드 / 1946~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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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축구 감독. 세계 최초의 FIFA 센추리 클럽 가입자다.2. 생애
2.1. 어린 시절
라이트는 유년 시절 중앙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했다. 그는 축구를 시작할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고, 축구에 대한 관심을 울버햄튼 원더러스 FC에서 구단의 스태프로 일하며 키워갔다.결국 14살의 어린 나이에 라이트는 울버햄튼과 계약을 맺게 되었다. 라이트의 계약 당시 울버햄튼의 감독이었던 프랭크 버클리는 라이트가 너무 체격이 작고 그의 실력이 최고 수준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며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버클리는 이내 자신의 판단을 바꾸고 라이트를 8개월에 걸쳐 관찰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이 사진은 현재 울버햄튼 홈 구장에 동상으로 남아 있다.[2] |
라이트는 15살의 나이에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1군 데뷔전을 치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이가 어려 전선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발목 부상에서 회복하고 만 19세가 되던 1943년 이후로는 후방에서 체력 훈련 교관으로 복무했다.
1946년, 종전 후 첫 시즌이 시작되면서 라이트는 라이트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정식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고 이 시즌을 마치면서 전임 주장 스탄 쿨리스가 은퇴하자 라이트는 울버햄튼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1949년에 FA컵 결승에서 울버햄튼은 레스터 시티를 3-1로 꺾었고 이것이 라이트의 커리어에서 첫 우승 트로피였다. 1952년, 라이트는 기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오르기도 했다. 명실상부 잉글랜드 최고의 수비수이자 수비수를 넘어 최고급 선수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2년 후에는 클럽 역사상 최초로 잉글랜드 퍼스트 디비전 우승을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라이트는 이 시기 센터 하프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이 때부터 라이트의 은퇴 시점까지가 울버햄튼의 최고 전성기였다. 당시 울버햄튼은 라이트와 함께 통산 3회의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라이트의 은퇴 이후 아직 리그 우승을 못하고 있다.
우승 컵을 든 빌리 라이트[3] |
1959년, 35세의 나이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20년간의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4]
2.2.2. 국가대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다른 유럽팀들과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대표팀 역시 자연스러운 세대 교체가 이뤄졌는데 라이트도 그 새 얼굴들 중 하나였다. 1946년 A매치에 데뷔한 라이트는 1948년 잉글랜드 대표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에도 출전했다. 하지만 기세 좋게 브라질로 건너갔던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일격을 당하는 등 계속되는 굴욕 끝에 결국 예선에서 탈락했다.게다가 라이트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의 위상은 날로 떨어지기만 했는데, 헝가리에게 3-6으로 참패한 일명 세기의 경기 한 켠을 장식하기도 했고[5] 설욕을 위해 건너간 부다페스트에서는 아예 1-7로 박살나기도 했다.
잉글랜드는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떨어진 축구 종가의 자존심 회복을 목표로 내세우며 1954년 월드컵에 출전했고, 이번에는 예선 통과에는 성공했다. 하지만 8강 상대는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였고, 잉글랜드는 우루과이에게 2-4로 패하며 월드컵에서 또 다시 쓸쓸히 퇴장하고 만다.
1958년 월드컵에서는 뮌헨 비행기 참사로 인해 전력이 약화된 잉글랜드를 이끌고 스웨덴에 갔다. 브라질과 소련 등의 강호들과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소련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하고 이번에도 예선 탈락을 피하지 못했다.
국제 대회에서 잉글랜드 대표팀의 끝없는 추락과 다르게 한 줄기 빛이 된 소식이 있었다. 1959년 빌리 라이트는 기념비적인 업적을 세우게 되었는데,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로 100번째 A매치에 출장하게 된 것이다.
1959년 6월,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았다. 그리고 이 시기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대표 커리어도 끝났다.
2.3. 은퇴 후
아스날 감독 시절의 모습. |
라이트는 은퇴 후 아스날 FC에서 4년간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1965-66 시즌 14위로 시즌을 마쳤고, FA컵에서도 블랙번에 패한데다 승률까지 40%를 못 넘기자 결국 라이트는 경질당하면서 불명예스럽게 아스날을 떠났다.
축구 작가 브라이언 글랜빌(Brian Glanville)은 라이트의 아스날 감독 생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라이트는 일을 처리할 교활함과 권위를 갖지 못했고 비판에는 거의 유치하게 반응했다.
(He had neither the cunning nor the authority to get things done and reacted almost childishly to criticism.)
(He had neither the cunning nor the authority to get things done and reacted almost childishly to criticism.)
이후 라이트는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는데, 1970년 월드컵 때에는 ITV에서 휴 존스 캐스터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원래 결승전까지 중계할 예정이었지만, 잉글랜드가 8강에서 탈락하자 바비 무어가 라이트 대신 해설위원을 맡게 되었고 결승전까지 무어가 해설을 했다. 이후에도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89년에는 파산 위기에 직면한 친정팀 울버햄튼의 임원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1993년 푸슈카시 페렌츠와 함께한 노년의 라이트 |
그리고 1994년 9월 3일, 라이트는 위암으로 사망했다.#[6]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키는 173cm로 일반인 기준으로도 작았지만 강력한 태클과 승부욕으로 자신보다 큰 선수들을 제압했다.[7] 또한,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나서 상대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 강점을 보였다. 리더십도 뛰어나서 대표팀과 클럽에서 주장으로 활약했고, A매치 105경기 중 90경기를 주장으로 출전했는데 아직까지도 바비 무어와 더불어 잉글랜드에서 가장 많은 경기에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몸관리도 뛰어나서 경기에 빠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세계 최초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던 비결도 현역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대표팀의 모든 소집에서 3차례밖에 빠진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 걸맞게 라이트의 70회 연속 A매치 출전 기록은 당시 세계 기록이었지만 이 기록은 후에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86회로 경신했다. 또한 클럽에서도 14년간의 실질적인 커리어 기간 동안 31차례 정도밖에 빠지지 않았을 정도로 엄청난 철강왕급 내구성을 자랑했다.
4. 사생활
라이트는 1958년, 베벌리 시스터즈의 멤버 조이 베벌리와 결혼했다. 이는 현재의 WAGs의 훨씬 이전에 있었던 운동 선수와 연예인 커플 사례이다. 이들 부부는 라이트가 암으로 작고한 1994년까지 해로했다.5. 기록
5.1. 대회 기록
-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1939~1959)
- 풋볼 리그 퍼스트 디비전 우승: 1953-54, 1957-58, 1958-59
- FA컵 우승: 1949; 준우승: 1939
- 채리티 실드: 1949, 1954, 1959; 준우승: 1958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57
- FWA 올해의 선수: 1951-52
- 월드스포츠 1950년~1970년 세계 베스트 XI: 1970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2
-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명예의 전당: 2009
- 풋볼 리그 레전드 100인: 1998
- 국제 축구 명예의 전당: 1997
- IFFHS 올타임 잉글랜드 드림팀: 2021
5.3. 수훈
-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 수훈: 1959
[1] 1959년 수훈, 3등급 대영제국 훈장 Commander of Order of the British Empire[2] [3] 좌측의 트로피는 잉글랜드 1부 리그 트로피이고 우측은 FA 컵 트로피이다.[4] 물론, 전쟁 때문에 6년 동안 축구를 하지 못했기에 실제 커리어는 14~15년 정도였다.[5] 이 경기에서 푸슈카시 페렌츠가 축구 역사상 최초의 드래그 백을 사용해 라이트를 무너뜨리고 골을 넣었다.[6] 일부 기사에서는 췌장암이라고도 한다.[7] 특히 축구 선수, 그 중에서도 중앙 수비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