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 막부 정이대장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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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제5대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츠나요시 徳川綱吉 | |
출생 | 1646년 2월 23일 |
사망 | 1709년 2월 19일 (향년 62세) |
신장 | 130cm 이하 추정[1] |
원호 | 죠켄인(常憲院) |
재임기간 | 1680년 ~ 170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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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성(民)은 나라의 근본이다.
쇼군 취임식에서 한 연설에서
쇼군 취임식에서 한 연설에서
에도 시대 제5대 쇼군.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측실의 아들로 넷째 아들에 해당했고, 제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에겐 배다른 동생이었다. 형의 양자가 되는 형식을 거쳐 쇼군이 되었다. 일본 대중에겐 개 쇼군이라는 중의적인 의미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메이지 시대에는 후술된 정책들 덕분에 암군이란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동물 우대 정책과 재정 낭비 등 논쟁거리도 있지만, 현대에는 동물 보호, 인명 중시 사상을 주입하고자 노력했던 현군(賢君)이라는 식의 재평가 움직임도 있다. 실제로 그가 통치하던 시기는 겐로쿠 호황, 텐나의 치세(天和の治)[2]라고 불리는 일본 전근대사 최대의 경제 호황기였다.
2. 생애
2.1. 유년기와 쇼군 집권기 초기
어릴 때부터 총명해서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학문에 힘쓸 것을 권해서 유학(유교)과 불교에 심취하였다. 학문 외에도 노, 서화 등 예술에도 조예가 깊어, 그가 직접 그린 서화가 남아 있다. 여러 영지를 거쳐 1661년, 고즈케국(上野国) 오라군(邑楽郡) 다테바야시 번(館林藩) 25만석의 영주가 되었다.측실 소생의 4남이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쇼군의 후계자 계승과는 연이 멀었지만, 배다른 형이 후사가 없자, 35세의 나이에 뜻하지도 않게 쇼군이 되었다. 아버지 이에미츠 시기에는 도쿠가와 에도 막부에 대해 아직도 반감이 남아있는 다이묘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가이에키(改易, 개역)와 참근교대 제도를 도입하는 등 반발하는 세력을 거세하고 견제하는 철권통치로 쇼군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으나, 츠나요시가 다스리는 시기는 도쿠가와 쇼군 정권이 자리를 잡고 안정되었던 시기라 이전의 공포정치를 풀어주고 문치주의로 전환하려고 시도했다. 권력의 중앙집권화과 재정문제, 기강 확립에 주력하고 이를 위해 유학을 융성하게 하여 덕치에 의한 정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다. 유학을 널리 퍼트려서 명분을 무사의 윤리 의식(일본식 무사도)으로 심어주려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스스로도 유학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나서서 《주역》을 강의했을 정도였다. 이때 조선의 문관으로 정유재란때 포로로 잡혀 온 강항으로부터 주자학(성리학)을 배운 하야시 가문을 중용했다. 유학적 이데올로기의 확립을 위해서 주자학을 전문으로 강의하는 학교인 유시마성당[湯島聖堂]을 세워 고위 관료들의 자제가 다닐 수 있도록 했다.
전국에 조사관을 파견해서 부정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평판이 나쁜 다이묘와 대관(代官: 하급 하타모토)을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로 교체했다. 대관의 교체율은 80%. 가이에키(개역 : 영지를 뺏기는 것) 처분을 당한 다이묘가 40명이나 되었다. 인재 선별에는 능력주의 정책으로, 도자마 다이묘도 대우했으며, 막부의 관리로 등용되는 도자마 다이묘가 나온 것도 이 시점부터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따르던 가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澤吉保, 1658 ~ 1714)를 소바요닌(側用人, 측용인)에 임명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때가 1685년이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1687년 쯤부터 그의 행보에 논쟁이 시작된다.[4]
2.2. 동물 애호가 쇼군
1685년, 제5대 쇼군 츠나요시는 '쇼군이 지나가도 개와 고양이가 다녀도 괜찮다. 앞으로는 묶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1687년에는 본격적으로 동물의 살생을 금지하는[5] <생류연민령>(生類憐憫令, 生類憐みの令)이라는 법령을 반포했다.이런 법령들이 반포된 이유는 쇼군의 어머니 케이쇼인[6]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쇼군에게 적자(嫡子)인 후계자 아들이 생기지 않자, 적자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생을 금하고(不殺)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積善) 승려 류코우(隆光)의 말을 믿고 이런 정책을 실행하도록 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아직 류코우가 에도에 있지 않은 때였던 탓에 현재 이 설은 사실이 아니라는 설이 있지만, 그 전부터 류코우가 에도 성에 출입한 기록이 남아 있다.[7]
특히 츠나요시는 개에게 지나칠 만큼 관대했다. 그가 개띠라는 사실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개를 때리거나 죽이는 건 당연히 금지되었고, 여기에 수명을 다한 개는 주인이 직접 좋은 장지를 골라 묻어주도록 법제화했는데, 심지어 개가 병사(病死) 등으로 자연사해도 견주를 처벌(...)했다고 한다. 1695년(화폐개혁을 한 해)에는 호적대장을 만들어 개를 관리했고(개는 물론 고양이, 소, 말까지), 에도성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곳(현재의 나카노지역)에 약 100만 평(여의도 넓이의 1.14배) 넓이로 유기견 보호시설을 만들었다. 떠돌이 개 약 10만 마리를 치료하고 먹여주며[8] 재워주는 관청도 설치했다. 개를 먹이는 데 연간 금 98,000냥[9]이 들었다. 또한 애완견들이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밤에도 산책을 시켜주는 직속 관리를 따로 두었으며, 야행시에는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참고로 고래기름으로 등불을 밝힐 수 있으려면 적어도 어용상인급의 재력이 있어야 했던 시절임을 감안할 때 한마디로 개팔자가 상팔자인 시기였다. 다만 이런 정책을 시행한 것이 당시 사람들이 기르기를 포기하고 버려진 개들이 들개 무리가 되어 에도를 돌아다니면 아이들과 사람들을 해치다보니 이에 대한 대책의 일환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개에 관해서는 1685년 개와 고양이를 묶어두지 못하게 하는 법령 외에도, 7년 후인 1692년 '강아지는 말이나 사람에게 밟히지 않도록 개집에 넣어둘 것', 1694년에는 '개를 버리지 말 것, 버려진 개는 주운 사람이 기를 것.' 같은 법령도 반포했다.[10] 그러나 지켜지지 않다보니 처벌 조항을 추가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애완견이나 군마, 가축까지 상처 입히면 처벌 받도록 법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후 닭, 조개, 새우 요리를 금하더니 60회의 포고령이 더해지면서 조개, 장어 등의 채취, 판매까지 금지되었다. 급기야 어떤 생물이든 학대하면 처벌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닭을 키우는 것은 괜찮지만 달걀을 먹는 것은 금지되었고[11], 동물들에게 짐을 싣는 행위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개나 고양이 등을 죽였다가 도망가거나 죽은 사람이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자식의 병에 특효약이라는 민간요법에 따라 제비를 잡아 먹인 아비가 처형되었고 그 자식도 추방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후대 역사가들이 법의 부정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풀려서 기술했다는 설도 있다. 지금보다는 중앙 통제력이 약했던 시대이니만큼 <생류연령>이 민간에서도 엄격하게 집행되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이 법령은 135차례나 발표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24년간 실제 처벌된 건수는 72건으로 1년에 3건 꼴이었다.
그리고 이런 동물 보호 정책이 극단적인 면이 있어도 쇼군 한 사람의 취향만을 위해 만든 비현실적이고 엽기적인 법안만은 아니라는 평가도 있다. 츠나요시가 집권하던 시기는 전국시대는 끝난지 오래되지 않은 시기였다. 끝없는 전란으로 인해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당연시되었고, 무사들의 이러한 생명 경시 사상이 팽배했다. 이런 법안에는 이와 같은 잔혹한 풍조를 해소하려던 의도가 깔려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츠나요시의 정책 중에는 동물보호 외에도, 당시 문제가 되고 있었던 생활고로 어린이와 병자(病者)를 버리는 풍습으로 발생한 문제를 나라에서 보호하고 기르라는 법령도 있었다. 이 법이 현재에 와서 츠나요시가 재조명받는 한 요인이기도 한데, 교고쿠 나츠히코의 《우부메의 여름》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등장하면서, 에도 시대에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죽은 아이는 장례 공양도 해 주지 않았고[12] 현대에는 당연한 상식이자 윤리가 된 아동 인권에 대한 의식이 거의 전무했던, 나라에서 '아이를 버리지 말라'고 명하는 법령이 ‘악법’으로 혹평받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 시대였다고 주장했다.[13][14][15]
그 외 위생 상태가 형편없어 병들어 죽는 경우가 많았던 감옥 생활을 하는 죄인들에게도 한 달에 5번은 목욕을 시키라고 명령하는 등, 츠나요시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생명 경시 풍조가 팽배했던 에도 막부 초기의 사회 분위기를 유교와 불교 사상에 입각한 생명 존중, 인권 의식 함양 사회로 바꾸고자 했다는 평가도 있다.[16] 물론 현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인간에게 불편 혹은 해가 될지도 모르는 현실적 필요 이상의 동물 보호를 공권력이 강요한다는 것은 분명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동물 보호라는 가치는 숭고하나 접근법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반발을 살 수 있다는 것.
1682년 츠나요시는 '충효에 힘써, 부부, 형제, 친척이 사이좋게 지내고, 하인들도 소중히 여겨라.' 같은 내용의 령도 내렸는데, 이는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그의 바람을 담은 것이었다. 당시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에미츠는 생명을 중시한 선진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츠나요시를 마냥 폄하하는 것은 본질을 놓칠 수 있다.
사실 츠나요시의 엽기적인 행각으로 알려진 것 중에는 후대인 메이지 시대에 조작된 정보도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개가 병사(病死) 등으로 우연히 자연사해도 견주를 처벌했다고 알려진 것도 사실 타인의 개를 훔쳐서 그 개를 죽인 악질적인 경우에 사형 판결{사죄(死罪)}을 내린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정보들이 현대 역사 연구가들에 의해 거짓일 확률이 높다고 부정되고 있다. 츠나요시가 암군으로 본격적으로 평가절하된 시기는 메이지 시대로 당시 일본 정부는 전 정권인 에도 막부를 깎아내리고 천황을 추켜 세우고자 했다. 그래서 에도 막부의 쇼군 중에서 제일 트집잡기 쉬운 인물인 츠나요시에 대해 왜곡했고, 특히 츠나요시를 동물을 비정상적으로 사랑한 정신병 환자(Zoophilomanie)로 진단하기도 했다.
2.3. 재정 부담과 상인 대두
츠나요시는 씀씀이가 커서 재정을 과하게 지출했다. 여러 사찰의 수리를 명했고, 황실을 우대하는 차원에서 역대 천황릉 중 66곳을 재건하는 사업도 벌였다. 문제는 상인들에게 손을 벌리는 크기가 커져 막부의 경제적인 부담이 가속화되었다는 것이다.결국 사업을 너무 많이 벌여서 1695년 <화폐주조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 율령에 의해서 1706년, 1710년에 걸쳐 두 번 '겐로쿠 금•은'(元綠 金•銀)이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당초 막부의 경제가 어려운 상태여서 금과 은의 순도가 낮아져 악화가 주조되었고, 일시적으로나마 재정이 회복되는 듯이 보였지만 물가의 상승만 일어났다. 덕택에 실물 경제를 쥐고 있었던 금•은좌(金•銀坐)[17]와 나카마(仲間, 막부시대 상인동맹조합)들만 큰 이익을 보게 되어 막부의 경제는 사실상 상인들이 지배하게 되었다. 오죽하면 봉행(奉行, 막번의 무사들이 다이묘나 쇼군으로부터 받는 급료)도 상인들이 주게 되었다. 현대 사회에 대입해서 본다면, 공무원들의 급여가 민간 기업을 통해 지급되는 격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상인들이 득세한 덕에 이후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은 무사 계급에서 상인 계급으로 전환되었다.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즐기던 노(能)와 농민들이 즐기던 덴가쿠(田樂, 전악)가 당시 일본의 문화를 대표하다가 상인의 이야기를 주된 스토리 라인으로 잡는 가부키가 등장하게 된 것도 츠나요시때부터였다. 막부 재정을 낭비한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쵸닌(町人) 문화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2.4. 사망
천연두에 걸려 1709년 향년 63세로 사망했다.[18] 그리고 츠나요시는 100년 뒤에도 이 법이 존속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음에도, <생류연령>은 그의 사후 10일 만에 사실상 폐지되었다.[19][20]아들은 측실 오덴노카타(お伝の方)로부터 낳은 도쿠마츠(徳松)[21]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츠나요시가 쇼군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도쿠마츠 외에는 직계 자손이 없다보니 후계자로 츠나요시의 이복형제 아들이었던 조카 츠나토요(이에노부)가 지명되었다. 하지만 뒤이어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노부와 이에노부의 아들인 도쿠가와 이에쓰구도 얼마 못가 죽으면서 제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겼다. 이후에는 방계인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제8대 쇼군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3. 조선과의 관계
그의 치세는 조선의 숙종(1674~1720) 재위기와 일치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원강길'(源綱吉: 미나모토노 츠나요시)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숙종실록》에서 그가 쇼군직을 승계받은 이듬해(1681년 - 숙종 8년) 조선에 통신사를 다시 요청하는 기록이 나온다.[22] 재미있는 점은 츠나요시가 개 덕후였던 것처럼 숙종 또한 상당한 고양이 덕후였다는 것.[23]또한 독도 문제로 안용복이 일본에 가서 일본인들의 불법 조업에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 돌아온 것도 바로 츠나요시가 쇼군으로 있을 때였다. 일부 기록에는 이때 안용복이 일본의 관백(칸파쿠)을 만나고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에도까지 가서 쇼군인 츠나요시를 직접 만나고 돌아온 셈'인데[24] 정황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이 만났던 인물은 백기주(伯耆州; 호키 국 - 돗토리 현)의 영주였고,[25] 안용복은 일본어가 원어민 수준이 아니었던 데다가[26] 일본을 잘 몰라서 백기주를 에도로 착각하고 있었다. 다만 안용복의 담판 이후 쓰시마 측에서 '앞으로 찝적대지 않겠습니다.'라는 문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유학에 대한 관심이 깊었던 만큼, 조선 통신사를 접대하는데 가장 많은 돈을 쓴 쇼군이기도 하다. "조선통신사가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라는 요지의 글이 있다면 그건 주로 츠나요시 때의 이야기. 그러나 이 조선통신사를 접대하는데 드는 돈은 오롯이 다이묘들의 몫이라서 쓰시마 번부터 에도에 이르는 길의 서일본 방면 다이묘들이 많이 고통스러워하기도 했다. 허나 츠나요시 사후에는 상기했듯 <검약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카스테라[27] 같은 비싼 음식이나 접대가 사라져서 뿔난 통신사마저 생겼을 정도였다.[28]
4. 평가
일단은 재위 기간 동안 화폐 개혁에 실패했고, 추신구라(忠臣藏, 충신장) 사건이나 호에이 대지진, 후지산 분화, 대화재 같은 재해 사고도 이 시기에 있었던지라, 상기한 <동물 살생금지령>까지 겹쳐져 안티들이 많아서인지 암군 혹은 괴짜 쇼군이란 평이 오랜 기간 그를 따라다녔다.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츠나요시의 집권기는 겐로쿠 시대, 즉 일본 전근대사 최대의 호황기였다. 현대 들어 츠나요시 재평가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다.[29] 또 상기했듯 <동물 살생금지령> 역시 단순한 괴짜 정책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동물 보호, 인명 중시 사상을 주입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동물 살생금지령>이 어느 정도 적용되기 시작하자 츠나요시는 그동안 횡행하던 아동, 노인, 병자를 버리는 풍습도 금지하고, 이를 막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들을 내세웠다. 애시당초 츠나요시가 어렸을 때부터 유학과 불교에 심취한 사람인 데 이러한 학문들은 기본적으로 생명 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츠나요시는 배운대로 실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외 상인조합인 나카마들의 힘이 쎄져 무사에게 봉행(급료)까지 주게 된 이후부턴 사무라이가 예전보다 많이 얕잡아 보이게 되었으며, 무사가 투잡 뛰는 일도 발생하기 시작하는 등 사농공상[30] 신분제 붕괴의 전조가 이 시대에 나타난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근대적 의미로는 현대 사회의 밑거름이 형성되었던 시기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쇼군의 지시들이 사회 불안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
5. 여담
전해지는 일화들을 보면 츠나요시는 두려움이 많은 성격이었던 듯 하다. 한 번은 천장에서 물체가 떨어진 사건을 들은 츠나요시가 자신의 머리 위에도 뭔가가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31] 에도성 기둥이란 기둥을 줄로 동여매는 일을 시켰는데 이 줄의 두께가 약 30cm였다고.32세가 되어서도 천둥을 무서워하여 천둥을 멈추게 하는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츠나요시의 총애를 받아 이례적인 출세를 한 야나기사와 요시야스는 천둥이 칠 때면 심야던 이른 아침이던 츠나요시의 침소로 달려가 그를 달래주었다고 전해진다. 집으로 돌아가서 쉴 때도 천둥이 치면 잽싸게 성으로 다시 출근을 했다고. 흡사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방법이라 놀라운데, 가신인 야나기사와가 12세 연하라는 점은 더더욱 놀랍다.
벌레도 무서워해서, 벌레가 나타나자 가신들에게 얼른 잡으라고 했는데 처리를 못하고 쩔쩔매자 기분이 상해서 신경질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나름 뜻을 담아 선포한 <살생금지령> 때문에 오히려 동물 학대가 심해지는 일이 일어나자, 츠나요시는 몹시 힘들어 했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동물 학대를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솔개나 까마귀 같은 해조를 수백 마리 잡아다가 방생하는 뻘짓을 하기도 했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와 다른 측실을 끌어들여 난교를 했다는 이야기도 나름 유명하다. 그런데 플레이를 할 때는 야나기사와만이 안는 역을 했다고 전해진다. 즉 쇼군인 츠나요시가 수였다.[32]
쇼군이 되기 이전부터 자신을 섬겼던 충신 마키노 나리사다의 부인인 아구리와 딸인 야스코를 NTR했다는 설도 있다. 일종의 야사이지만 사극 오오쿠와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판 《오오쿠》에서도 이 설을 채택하고 있다. 드라마판 오오쿠에서는 어렸을 때 자신을 다정하게 잘 돌봐줬던 시녀 출신인 아구리를 어렸을 적부터 좋아해서 연회 핑계를 대고 그녀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강간을 해놓고선 이미 시집가서 남편이 있었던 그녀의 딸마저 자신의 첩으로 데리고 오는 막장 행보를 보여준다. 덕분에 아구리는 자살하는데 저래놓고서는 딸인 야스코에게 내가 니네 엄마 아빠한테 돈도 주고 비단도 주고 영토도 주고 정말 잘 해줬는데 왜 죽어버렸냐며 징징거린다.
위패가 매우 작은데, 쇼군의 위패가 키에 비례한다는 관례에 따르면 그의 키는 124cm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일본인 평균인 155cm로는 31cm가 차이가 나며 그것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그가 왜소증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33] 다른 쇼군들의 위패 크기와 유골로 추정한 실제 키의 차이가 대략 5cm 전후로 차이나곤 하니 실제로 이만큼 작지는 않더라도 평균 키에는 한참 못미쳤을 것이다.
한국사에도 츠나요시와 비슷한 행적을 보인 왕이 있었는데 바로 백제의 제29대 왕인 법왕이다. 법왕은 불교를 매우 숭상했지만 그 정도가 너무 지나쳤는지 자신이 즉위하자마자 백성들에게 그물과 사냥도구들을 태워버리게 하고, 기르는 매와 사냥한 매를 전부 풀어주게 했으며, 적군이 쳐들어와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6. 도쿠가와 츠나요시가 등장한 작품
6.1. 드라마
1995년 NHK 대하드라마 《8대 쇼군 요시무네》배우: 츠가와 마사히코2005년 후지TV 드라마 《오오쿠~화의 란~》배우: 타니하라 쇼스케
6.2. 영화
2012년 영화 《오오쿠~영원~[에몬노스케·츠나요시 편]》 배우: 칸노 미호6.3. 만화
가정교사 히트맨 리본의 주인공 사와다 츠나요시의 이름을 이 인물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바우와우에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꿈에서 등장한다.
파워퍼프걸Z에서도 등장하는데 35화의 B파트[34]에서 그의 검은 가루로 영혼 상태로 부활해서 메이어 시장님에게 빙의해서 몬스터 보호명령(モンスター 憐れみの令)[35]을 내려서 도쿄 시티를 무법천지로 만들었다.[36] 몬스터를 저지하다가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하고 연구소마져 공격 당할 위기에 쳐하지만 기지를 발휘해 핫도그를 먹여 시장님의 몸에서 분리한다. 물리적 공격이 안 통했지만[37] 고토쿠지 미야코의 버블 캐쳐에 붙잡히고 마츠바라 카오루의 스윙 소닉에 날아가서 자신의 무덤으로 다시 들어간다. 한국판에선 도그마 개오르개라는 심히 기괴한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오오쿠도 등장. 이쪽 세계관상 여자로 등장했다. 여자로써의 본명은 실제 츠나요시의 아명인 “토쿠마츠“ 에서 따 온 토쿠코. 도쿠가와 이에츠나라는 예명으로 살아온 4대 쇼군이었던 큰이복언니 치요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외조부의 사생딸인 자신의 어머니 치에가 낳은 아이들[38] 중 유일하게 남은 자신이 5대 쇼군이 된다. 하나 뿐인 자식 마츠가 죽고 카스가노츠보네의 개삽질을 그대로 행하는 친부 케이쇼인 [39] 때문에 개법도 만드는 등 어떻게든 아기를 가질려고 수난을 겪다가 오오쿠에 있던 시종 중 가족이 개에 물렸는데도 개를 처리하지 못해 죽은 원한으로 습격까지 당한다. 케이쇼인과 에몬노스케가 죽고 어떻게 잘 정리하다 했더니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에게 암살당한다.[40]
6.4. 게임
게임 오보로 무라마사의 배경이 이 쇼군 때다. 당연히 최종보스로 등장하며 한번 털리면 이누가미로 변한다.추신구라 사건이 소재인 에로게 ChuSingura 46+1에서는 로리로 TS되어 등장한다.
[1] 위패가 쇼군의 키에 비례하는데 위패가 124cm로 당시 일본인의 평균키인 155cm보다 31cm가 차이나며 역대 쇼군 중에서도 키가 가장 작다고 추정된다. 물론 다른 쇼군들의 위패 크기와 유골로 추정한 실제 키의 차이가 대략 5cm 전후로 차이난다고 하니, 이것보단 더 컸을 가능성도 있지만 평균 키에는 한참 못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2] 현대 일본어로 '천화'(天和)는 '텐와'(てんわ)라고 읽어야 하지만, 이 경우는 '텐나'(てんな)라고 읽는다. 츠나요시 집권 초기의 연호가 '텐나'(天和)였기 때문이다.[湯島聖堂] 탕도성당. 도쿄대학의 원류가 된다.[4] 1680년 ~ 1686년 6년간은 정상적으로 집권했었으나 그 이후 문제가 생긴것이다.[5] 사실 일본은 이미 675년부터 천여년간 육식금지령이 이어져오던 상태였다. (계란이나 생선류는 섭취.) 따라서 육식을 잘 하지 않는 분위기는 이미 사회에 있었는데(전반적으론 육식 금지란 분위기가 지켜졌으나, 현실 여건상 고래고기 섭취 등 이런저런 꼼수, 뒷구멍을 만들어 놓았다는 말도 있다), 더해 살생까지 금한 것으로 보인다.[6] 이름은 '오타마'(お玉). 정확하지는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1627년생이었다. 교토의 가난한 서민 출신으로 어릴 적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길바닥에서 야채 행상을 하던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절세 미녀여서 13세 때 오오쿠에서 스카웃하여, 오만노카타(お万の方)의 측근 시녀로 일했다. 이윽고 3대 쇼군 이에미츠의 측실이 되었고, 20세 때 츠나요시를 낳았다. 25세때 이에미츠 사후, 관습에 따라 에도 성을 나와 비구니로 출가했고, 54세 때 쇼군의 어머니가 되어 79세에 영면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신데렐라 스토리라고 하면 타마노코시(玉の輿, 오타마가 탄 가마)라고 말한다. 젊었을 적 오만노카타의 측근 시녀였던 것을 바탕으로 창작물에서는 케이쇼인 역시 오만의 신변 시중을 들기 위해 같이 오오쿠로 따라 들어온 비구니라는 설정이 붙기도 한다.[7] 《密教大辞典》(法蔵館)・《真言宗年表》(国書刊行会)によると貞享3年(1686年)10月3日に江戸城黒書院で安鎮法を修しており、生類憐れみの令以前より江戸城に出入りしていたため誤りである。[8] 1마리 당 하루 세 끼 쌀밥과 말린 정어리, 된장국 제공.[9] 당시 막부 수입 80만 냥의 11%. 그 대부분은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이 부담했다. 개천국.[10] 사실 개가 버려진 이유에는 전반적인 농업 생산력이 좋지 않았던 시대적 상황도 있다. 사람을 부양하기도 빠듯하다 못해 먹을 입을 줄인다는 명목하에 마비키까지 일본 평민들 사이에서 벌어질 정도로 안좋은 식량 사정에서 일반 서민들은 개에게 먹이를 주면서 기를 여유가 없었다. 호황기 아니었나 법령에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11] 이전까진 육식금지령 시대에도 계란은 허용되었다. 사실 계란 항목에도 있지만 무정란은 병아리가 태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섭취해도 동물 윤리적으로 어느정도 허용이 되는 부분이 있다.[12] 이는 전근대의 높은 영유아 및 아동사망률로 인한 부분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일곱살이 되어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기 전까지는 아이를 자식 취급하지 않는 케이스도 있었던 것 같은데, 간토와 도호쿠 지역의 빈농들에 의해 행해진 영유아 살해 마비키 풍습이 이런 비극적인 사회상을 보여준다.[13] 물론 조금 과장된 부분이 있다.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이더라도 어린 새끼에 대한 연민은 인간의 본성적인 측면도 있기 때문. 결국 현실적인 문제가 빈농들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일본의 세율은 지주인 영주에 대한 토지 임대료를 포함해 토지 산출의 60% 내외였다. 따라서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아이 넷 이상을 부양하기 힘든 상황이었고, 이에 따라 피임 개념도 희박하던 일부 빈농들은 어쩔 수 없이 낳는 셋째 혹은 넷째부터는 낙태 혹은 살해하거나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력이 필요했던 도시 상공업자들이나 지역 영주에게 떠넘기는 현상이 특히 도호쿠와 간토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또한 세금과 지대 부담으로 시달리던 농민들의 반란도 18세기 후반부터 크게 늘어났다. 이런 일본 사회의 혼란은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인 행정 시스템과 지대 및 세제 제도가 도입되고 근대적인 농업 기술이 일본에 도입되어 농민들의 실질 소득이 개선된 이후 사라졌다.[14] 중국도 명조에는 지대와 지세 그리고 인두세를 모두 합해 일반적으로 토지 산출의 50~60% 내외를 지불해야 해 결론적으로 일본의 농민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세금을 부담해야 했고, 이는 명조 내내 이어진 농민 반란과 여아 유기/낙태/살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청조에 접어들며 강희제와 옹정제의 세제 개혁 이후 농민들의 공식적인 세부담이 크게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농민들과 도시 서민층의 세금 부담이 커 여아에 대한 낙태 및 살해가 이뤄지곤 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서양 세력으로의 국부 유출이 심각해지며 세금을 낼 수 없게 된 농민들과 도시 서민층에 의한 아동 낙태/살해 및 반란이 빈번해졌다.[15] 조선의 경우 17세기까지 소작농의 비중이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매우 낮았고 조세율도 10% 내외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 상당히 낮았기 때문에 농민들의 부담이 상당히 덜하였다. 그러나 17~18세기를 거치며 소작농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병작반수가 보편화되며 많은 수의 농민들이 산출의 50%를 부담하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자영농의 비중이 제법 높았고 임대인이 아닌 지주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법적 장치가 잘 작동하여 동아시아에서는 괜찮은 사정을 보였다. 그러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정조가 죽고 세도정치가 시작되며 중앙의 통제가 사실상 사라지자 소작농이 농촌 사회의 절대다수를 점할 정도로 크게 늘고 조세 부담을 농민들이 지기 시작하자 절대다수 농민들의 지대+지세 부담이 산출의 60% 내외까지 크게 늘어났고, 여기에 더해 중앙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된 지방관들과 아전들의 횡포로 비조세 부담이 크게 늘어나자 조선에서도 아동 유기/낙태/살해와 농민반란이 급증하였다.[16] 여담으로 이 정도까진 아니지만, 현대에도 서남아시아에 위치한 불교 강세 국가 부탄이 이와 비슷한 경향의 정책을 펼친다. 그 덕분에 소나 개 같은 동물들이 도로를 맘껏 누비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육식도 이웃나라 인도 등에서 수입한 음식만 허가한다.[17] 막부의 명령 아래 화폐 주조에 관한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있었던 상인들의 통칭. 금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금좌, 은화를 주조하는 상인이 은좌였다. 서양의 역사에 빗대어보면 Goldsmith, Silversmith에 해당하는 금은공예상공회와 비교, 가능하다.[18] 다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정실(미다이도코로)인 노부코가 츠나요시를 어떤 방으로 오게 한 뒤에 무리심중, 즉 강제 동반자살의 형태로 죽었다는 의혹도 있다. 실제로 노부코는 츠나요시가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는데 사망 기간이 밀접한지라 이런 의혹이 제기된 걸로 보인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정실인 노부코와 사이가 안좋았던 것이 이런 소문을 불러왔을 가능성이 있다.[19] 사문화되었다고 한다. 바로 문서상으로 지워버리면 막부의 권위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런 조치의 경위도 츠나요시의 뒤를 이은 이에노부가 "돌아가신 분의 유지는 받드는 것이 원칙이나, <생류연령> 때문에 졸지에 죄인이 돼버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천하만민을 위해서 <생류연령>을 폐지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동물 보호 정신은 유지하라고 당부한다. 여하튼 <생류연령> 폐지 덕분에 서민들의 지지가 높아졌다고 한다.[20] 사실 도쿠가와 이에노부는 츠나요시와 성향이 상당히 비슷한 면도 있었으나, 정작 두 사람은 생전 사이가 그리 좋진 않았다고 한다. 츠나요시가 아들이 일찍 사망해 후계자로 찍긴 했지만, 재위 시절 가진 식사 자리에서 삼촌 츠나요시와 조카 이에노부는 서로 껄끄러워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도 뒤를 이은 이에노부는 <생류연령>과 능묘 재건사업 외의 정책은 그대로 이어받았다. 집권 3년만에 사망하긴 한다만.[21] 참고로 도쿠마츠의 탄생 축하 행사가 11월 15일에 이루어지면서 시치고산의 유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22] 《실록》에 의하면 일본에서 1666년(현종 7년)부터 이 때까지 조선에 통신사를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조선 대기근이라고 할수 있는 경신대기근 여파도 있었고 헨드릭 하멜 사건도 원인으로 추측된다.[23] 고양이 한 마리를 금손이라고 이름짓고 직접 먹이를 주며 키웠다. 심지어 금손의 어미 고양이 장례식까지 치러줬을 정도.[24] 참고로 당시 조선에서는 관백과 쇼군직을 같은 직위로 취급하였다.[25] 당시 돗토리 번을 다스리던 이케다 가문의 고쿠다카는 32만석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니 꽤 큰 가문.[26] 어려서부터 왜관에서 자라서 일본말을 잘하긴 했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던 모양. 일상 회화는 큰 문제가 없던 것 같지만, 본래 주류 지식인 계층이 아니었기에 지금으로 치면 기초 학력도 이수하지 못한 셈이고, 당연히 전문적이고 복잡한 정치, 외교, 법률상의 고급 어휘나 전문 용어 등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안용복도 이런 걸 알았는지 2차로 일본에 갔을 때는 당시로는 전문 지식인 계층인 승려들의 도움을 얻었다.[27] 일본인들이 기록한 조선인들이 좋아하던 음식 목록에 당당히 들어가있다.[28] 1717년 조선통신사였던 신유한은 그의 저서 《해유록》에서 병농공상의 야만족 집단이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이전의 통신사들이 츠나요시의 숭유정책에 감탄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29] 물론 반대로 호황기였기 때문에 쇼군의 저 뻘짓정책들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지금 와선 모든게 추론의 영역.[30] 일본은 '사'에 선비 대신 무사(사무라이)가 들어가 '병농공상'이라고 불리기도 한다.[31] 다만 수도직하지진 같은게 한번 닥치면 머리 위에 뭔가가 떨어지는걸 걱정하는건 현실이 된다. 설령 수도직하지진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에도에 큰 여파를 끼치는 지진 하나 닥쳐도 저게 가능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일본은 지진이 잦다. 그렇기에 좀 지나치게 유난을 떨었다고 볼 수는 있지만 기우 수준으로 없는 가능성도 아니다.[32] 이는 이례적인 일로 보통은 이런 관계에서 높으신 분이 공을 맡는다.[33] 아이러니하게도 2대 뒤의 도쿠가와 이에츠구는 6세에 사망했을 때 키가 135cm였던 거인증 환자였다. 2022년 기준 일본의 6세 남아, 여아 평균 신장이 115cm이다.#[34] 한국판에선 처음엔 방영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방영했다.[35] 위에서 언급한 '생류연민령의 몬스터 Ver이다.[36] 이 에피소드의 모티브는 도쿠가와 츠나요시 + 프린세스가 시장이 된 에피소드로 보인다.[37] 연구소에서 영혼 분리 장치를 이용해 분리하려고 했지만 분리하지 못했다.[38] 사실 친모인 치에가 다른 남자들과 여러번 밤을 보내고 아이를 낳았으나 유산됐거나 오래 못 살았고, 살아남은 건 아버지가 다른 세 자매인 치에와 스테조(오라쿠)사이에서 태어난 장녀 치요(이에츠나), 치에와 오나츠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 츠나시게, 치에와 교쿠에이(오타마)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토쿠코(츠나요시) 본인뿐이었다.[39] 본명은 교쿠에이이며 친모가 붙여준 예명은 오타마.[40] 요시야스가 원한을 가져서 그런건 아니다. 츠나요시가 누구한테 죽는 꼴을 볼 봐에 자기한테 죽는게 낫다며 질식사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