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매체에서의 오오쿠에 대한 내용은 오오쿠/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大奥(おおおく)에도 막부(江戶幕府) 시대에 쇼군의 모친과 미성년 자녀, 정실(미다이도코로)과 측실, 시녀이자 쇼군의 잠자리 상대 후보인 여성들을 모아놓은 금남(禁男)의 공간. 지금은 황거로 이름이 바뀐 에도 성내에 있었다. 조선의 내명부나 오스만 제국의 하렘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으나 차이점도 있다.
2. 상세
이전 막부 시대에는 오오쿠와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 없었고, 에도 막부 초기에 오오쿠가 생기긴 했으나 딱히 금남의 공간까진 아니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여걸 카스가노츠보네[1]에 의해 그 뒤로 이어지는 오오쿠의 형태가 된다.카스가노츠보네가 오오쿠를 정비한 이유인즉,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여자 혐오증 때문에 여자는 멀리 하고 남자를 더 좋아하여 쇼군의 후계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어떻게든 후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라고.[2] 카스가노츠보네 시절에는 본인의 성격이 반영되어 검소하고 실용적인 무가 양식이 짙었으나, 카스가노츠보네 사후에 관리인 역할을 이어받은 여자가 교토 공가 귀족풍으로 바꿔버리면서 본격적으로 호화로워지게 되고 검소함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거주 인원은 최소 1,000명, 혹은 그 이상일 정도로 큰 규모였으며[3] 당연히 그만큼 유지비가 많이 들었는데, 오오쿠의 1년 예산이 은 80만 냥. 현재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면 160억 엔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국 돈으로 치면 무려 1,500~2,000억 원을 썼다는 이야기. 당장 쇼군의 정실인 미다이도코로만 해도 한 끼니에 10인분[4][5]을 차렸고 하루에 옷을 5벌이나 갈아입는 사치를 부렸다. 게다가 정실을 포함한 높은 신분의 여성들은 제례나 각종 잔치 같은 왕실 내부 일을 담당하느라 몸이 쉴틈이 없던 조선의 왕비,후궁들과 달리 거의 하는 일이 없다못해 심지어 문을 열고 닫는 것조차 시종들이 다해주었다. 이러다보니 한명 시중을 드는데 여러 인력이 필요하여 여성들을 뽑고 그러면서 유지비가 드는 악순환이 계속 될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에도 막부가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시기로 가면 막부의 재정을 압박하는 요인 중 하나이자 아예 돈 먹는 하마라는 비판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그나마 개혁에 성공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첩실들의 사치와 시녀들의 경쟁으로 오오쿠는 사치스러워졌다. 물론 이를 해소하기 위해 쇼군과 막신들이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오오쿠의 권력이 너무 강해 번번히 실패했다. 그렇다고 오오쿠가 본분인 쇼군의 후손을 이어가는 걸 잘했으면 또 모를까 자녀들은 요절하다 못해 아예 자손이 없는 경우도 허다했고 심지어 방계에서 대를 이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원칙상으로는 막부 직할의 무사 계급의 여자들만 오오쿠의 시녀가 될 수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평민 계층에서도 뇌물이나 연줄 등을 써서 들여보냈다. 꼭 권력을 노려서만은 아니고, 한동안 오오쿠에서 일하면서 상류층의 예의범절을 익혀 나오면 좋은 곳에 시집갈 수 있었기 때문. 일종의 신부수업이다. 그러나 원칙상으로는 높은 지위에 해당하는 시녀는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쇼군 일가를 섬겨야 했다.
딱 보기에는 '오오! 1,000명의 여자가 가득한 하렘!' 소리가 나오지만 실제 오스만 제국의 하렘과도 같이 겉보기만큼 남자의 로망을 해소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다고 한다. 오오쿠의 관리자격인 오토시요리(御年寄り)의 권한이 너무 강한 탓에 쇼군조차도 오오쿠에서는 편히 쉴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오토시요리는 그 대우가 10만석고의 다이묘의 대우에 준한다는 설이 나올 만큼 그 권위와 권력이 막강했다.
엄격한 계층사회로 미다이도코로(御台所)를 비롯해 오토시요리 같은 고위직인 오메미에이죠(御目見得以上)와 잡일을 하는 오메미에이게(御目見得以下)로 나뉘는데, 그 비율은 거의 1:9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오메미에(御目見得)란 한자를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눈에 보일 수 있다', 즉, 누군가의 앞에 나갈 수 있다(그럴 자격을 부여받았다)는 뜻으로, 이 누군가란 당연히 오오쿠의 주인인 쇼군을 의미한다.
조선 시대로 치면 중전이라 할 수 있는 미다이도코로(御台所)[6]는 오오쿠가 확립되기 전인 에도 막부 초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교토의 황족, 방계 황족, 또는 섭가 가문 출신의 매우 높은 신분의 여성들이 많았으며 막부 초기와 말기에는 다이묘 가문 출신의 미다이도코로도 있었다.
야사에는 막부에서 황족의 피가 섞인 후계자가 탄생하면 황실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미다이도코로의 식사에 피임약을 섞어 먹이는 등의 방법으로 될 수 있는 한 미다이도코로가 쇼군의 아이를 갖지 못 하도록 계책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등 각색물에서 자주 써먹는 야사지만 정설로 여길 만한 증거는 없는 모양. 실제로 에도 막부 15대 동안 미다이도코로의 아들로서 쇼군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미다이도코로인 오에요가 낳은 도쿠가와 이에미츠밖에 없는데, 이때는 아직 미다이도코로의 출신에 대한 관습이 세워지기 전이라 이 사람은 황족 출신이 아니었다. 황족 출신 미다이도코로가 아이를 낳는 일 자체는 적지 않았으나 이들은 한 명도 빠짐 없이 성인이 되지 못 하고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황족 출신 미다이도코로가 낳은 아이 중 가장 오래 산 아이가 향년 13세.(...) 10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와 이소노미야 토모코 사이의 딸 만쥬히메다.
그래서 명분상으로는 미다이도코로가 오오쿠에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다지만 실질적으로는 쇼군의 후계자를 낳은 측실의 권세가 더욱 막강했다. 다만 미다이도코로는 상술했다시피 신분이 매우 높았고 유교적 통치이념을 채용한 에도 막부의 영향도 있어서 정처인 미다이도코로와 어디까지나 곁다리인 측실은 확실한 격의 차가 존재했다. 또한 종종 차기 쇼군을 자신의 양자로 들이기도 했기에 미다이도코로에 따라서는 일본 정국에 상당히 개입한 사람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미다이도코로였던 고노에 히로코(덴에이인)가 있다.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등극을 돕고 그의 치세 동안 실권을 행사했다.
천황으로서도 일본의 실세인 막부와 연을 맺어 나쁠 것은 없었으므로 자신의 딸을 시집 보내려 시도하기도 있었다. 레이겐 천황이 그에 해당하는데, 자신의 딸 야소노미야를 차기 쇼군과 약혼시켰지만 상대가 일찍 죽는 바람에 실패했다.
황실과의 혼담이 성사된 것은 막부가 망해가던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의 혼인으로, 유일하게 천황의 친딸이 시집온 사례다. 이때는 여러 가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무합체의 한 방도로 이루어진 혼인이었기에 일본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정략결혼이라 할 수 있다.[7] 다행스럽게도 정략결혼이었지만 어린 부부는 역대 쇼군과 미다이도코로 중 가장 금슬이 좋았다고.[8] 하지만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20살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두 사람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짧게 끝나게 되었다. 가즈노미야 자카코 내친왕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세이칸인노미야'[9]라는 법명을 얻어 출가했고, 9년 후 이에모치의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오오쿠 최후의 미다이도코로라는 이름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다.
3. 대중매체
자세한 내용은 오오쿠/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혼노지의 변을 일으킨 아케치 미츠히데의 가신 집안 사람으로, 한 순간에 역적의 가문으로 전락했다가 이에미츠의 유모로 들어가 이에미츠를 쇼군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에미츠에게는 타다나가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말더듬 증세가 심하던 이에미츠 대신 차남을 쇼군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카스가노츠보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 앞에 나서 장유유서를 명분으로 읍소하여 이에미츠의 후계자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오쿠 내에서의 권력도 대단했다.[2] 이에미츠는 어렸을 적부터 입이 짧아 카스가노츠보네는 식사 때 밥만도 7가지씩이나 준비해 입에 맞는 걸 골라 먹도록 했는데, 그와 비슷하게 많은 여자를 모아두면 그 중 한 명쯤은 이에미츠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오오쿠를 세웠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실화로, 3의 만화에도 나온다.[3] 3,000명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시대에 왕이 거느린 궁녀가 보통 500~600명이었다.[4] 물론 10인분을 혼자 다 먹은 건 아니다. 그렇게 많이 차린 이유는 1) 몇 단계를 거치는 독 검사용, 그리고 그걸 통과한 나머지 상으로 식사를 하는데 2) 상류계층의 체면상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것은 품위 없는 일로 취급받아서 음식에 몇 번 젓가락질을 하면 상을 바꾸도록 하는 관습이 있어서 그랬다.[5] 실제로 드라마 오오쿠(2003)과 아츠히메에 나오는 묘사다. 공가나 다이묘 출신이 아닌, 당대에 시골 촌구석 취급받았던 사츠마 무가의 딸에서 쇼군의 정실이 된 주인공 아츠히메(텐쇼인)가 생선의 한 면을 먹고 뒤집자 수행하는 시녀들이 기겁을 하거나 한숨을 쉬는 장면이 나온다. 가장 높은 신분임에도 출신 때문에 오오쿠 사람들로부터 경원당하던 아츠히메는 오오쿠 개혁의 일환으로 근검절약 정책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식사도 1인분만 만들 것을 지시하는데, 사람들이 '이 답답한 오오쿠에서 좋은 음식 먹는 즐거움 하나가 사라졌다'고 투덜대는 것을 보면 남은 음식은 아랫사람들 차지였던 듯.[6] 부를 때는 미다이사마라고 부른다.[7] 일본 황실의 여인이 간토 지방의 신하에게 시집간 것 역시 처음이었다고 한다.[8] 공식적인 측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비공식적으론 이에모치도 몇 명의 여인을 거느렸을 것으로 추측은 되고 있다.[9] 미다이도코로들은 남편이 죽으면 불가에 귀의하여 법명을 받았다. 이에모치가 살아있을 때 짧은 인연을 예감이라도 했는지 자신을 미다이사마로 부르는 것을 거부하고 가즈노미야라는 원래의 호칭을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