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13:26:53

기림 이사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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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15대 국왕
기림 이사금 | 基臨 尼師今
출생
(음력)
연대 미상
사로국 서라벌
사망
(음력)
310년 6월
사로국 서라벌
능묘 미상
재위기간
(음력)
신라 제15대 국왕
298년 12월 ~ 310년 6월 (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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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경주 석씨
기림(基臨) / 기립(基立)
부모 부친 석걸숙
왕호 기림 이사금(基臨 尼師今)
기립 이사금(基立 尼師今) }}}}}}}}}

1. 개요2. 업적
2.1. 재위기간 문제
3. 기타4. 《삼국사기》 기록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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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라의 제15대 군주. 칭호는 이사금.

제14대 유례 이사금부터 석씨 왕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제16대 흘해 이사금까지 세 명의 자세한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제13대 미추 이사금 이후에는 김씨가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후 석씨 왕실이 무너지며, 김씨가 왕실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석씨 왕실의 계보가 실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기림 이사금은 제11대 조분 이사금의 아들, 손자, 증손자라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나이 차이로 보아 아들일 가능성은 적고, 일반적으로 《삼국유사》가 석걸숙을 누락한 것으로 본다.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설을 따르면 아버지는 이찬걸숙인데 《삼국사기》에는 석걸숙이 조분 이사금의 손자라는 주장도 함께 싣고 있다.

2. 업적

기림 2년(300) 정월 와 화친하고, 비열홀에 순행해 노인과 빈민들을 위문하며 식량을 하사했다. 비열홀이 현재 비정되고 있는 함경남도 안변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고 있는데 경상도 지역도 제패하지 못한 3~4세기 신라의 상태에서 그 정도 북쪽까지 올라갈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근방인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냈고, 그 해 음력 3월 낙랑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고 한다. 다만 낙랑과 대방이 이 시기에 항복해왔다는 기록은 다소 믿기 어렵다. 신빙성을 찾아보겠다고 생각하고 봐도 낙랑과 대방의 항복 기사는 진짜 항복이 아니라 고구려에 대응하기 위한 수교 요청일 가능성이 높은데[1] 바로 직전에 고구려와 맞대고 있는 지역인 비열홀에 순행했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이때 신라가 비열홀까지 갔을 가능성도 드물어서 기사 자체에 의문이 들기도 한다.

흘해 9년(307), 탈해 이사금(제4대)이 '계림'으로 바꿨던 국호를 다시 '신라'로 되돌렸다. 신라로 확정한 것은 후대의 지증왕(제22대) 대의 일이다. 서라벌음차인 신라, 사로, 사라 등이 왔다갔다 하고 있었고 국호를 확정했다는 언급은 지증왕 대에 나온다.

2.1. 재위기간 문제

기림 이사금의 행적은 동시대의 다른 신라 왕들과 비교해봐도 기이하며, 위와 같이 시기적으로 모순된 기록이 자주 나타나는 것 때문에[2] 미추 이사금(제13대), 유례 이사금(제14대)과 더불어 후대의 기록이 앞당겨졌다는 설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기림 이사금이 충주 고구려비(480년 건립 추정)에 나오는 매금 (忌)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현대에 와서는 내물 이사금의 재위 중기 이전은 전부 인상했다는 것이 정설이다.[3]

최근 신라의 박석김 왕계가 사실 동시대에 존재한 군주들을 순서대로 재위한 것처럼 왜곡한 것이라는 견해가 떠오름에 따라 이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 경우, 앞에서 개연성을 지적받은 행보들의 상당수를 설명할 수 있다. 신라 왕위는 6세기 초까지 6부 간(干)의 수장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6세기 초 금석문에서 7명의 왕이 모여 국내 사건을 논의했다는 기록을 보아, 6부의 수장뿐만 아니라 일정 이상을 세력을 가진 유력자도 간이자 왕 대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림의 족보를 모계로 상고하면 혁거세-남해-아효부인-구추-벌휴-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걸숙-기림으로 혁거세의 9대손이며 걸숙의 누이 명원부인의 아들인 흘해 이사금이 고종사촌이다. 흘해 이사금은 일본서기 이주갑인상에 따르면 320년생인데 학계에서는 320년생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고종사촌인 흘해가 32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림의 실제 생년은 310~320년대일 가능성이 높다.[4] 따라서 기림 이사금의 주 활동 연대는 4세기 중반이라 추측할 수 있다. 380년 충주 고구려비에 나오는 매금 기가 기림 이사금 본인이 맞을 경우, 기림 이사금은 60~70대 이상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고고학계 연구에 따르면 파사-지마, 일성-아달라도 4세기 초반~중반에 활동했다는 것이 정설이고, 미추의 아버지 구도는 4세기 초반에 신라로 이주해 4세기 초중반에 신라에서 장군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고 있고, 미추는 4세기 중반에 주로 활동했으며, 내물은 4세기 후반에 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특이한 점은 미추는 누나 옥모부인의 친손녀인 광명부인과 혼인했는데, 광명부인의 장녀 보반부인이 380년대~393년에 세 아들을 낳았고, 광명부인의 차녀 아류부인의 딸 차로부인은 410년대에 보반부인의 장녀 눌지 마립간과 혼인하였다. 따라서 광명부인은 340년대생이고 미추가 딸뻘인 광명부인과 혼인했으며, 내물과 실성 또한 딸뻘인 보반부인, 차로부인과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골정과 혼인해 조분을, 조분의 딸이 미추의 처 광명부인이라 기록된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골정부터 흘해까지 4대(골정-골정의 딸-아이혜부인-명원부인-흘해)나 차이가 나서, 골정은 3세기 중후반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김씨 족단이 금릉동에서 사로국에 이주한 것은 4세기 초반이라 시대 차이가 수십 년은 난다. 구도의 딸 옥모부인과 골정의 부인 옥모부인은 동명이인일 가능성이 높다.

광명부인도 320년에 흘해를 낳은 명원부인과 실제 생년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실제로는 명원부인의 여동생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우로 전기에 따르면 우로가 왜에게 살해당하자 명원부인이 여동생의 남편의 도움을 받아 왜 사신을 죽였다고 하는데, 명원부인이 신라 왕의 도움을 받아 왜 사신을 죽인 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교차검증되지만 미추 이사금 본기에는 해당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명원부인의 자매 광명부인은 미추의 처 광명부인의 동명이인이고 명원부인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매부의 도움을 받아 왜 사신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다.

구도의 딸 옥모부인은 미추의 추정 생년을 고려하면 명원부인과 동세대로 보인다. 골정-조분-광명부인이라는 사서의 기록을 고려하며 구도의 딸 옥모부인이 실제로 4세기 초반에 혼인한 건 사서에서 부인의 이름이 없는 걸숙이고, 미추의 처 광명부인은 걸숙의 친손녀인 기림의 딸로 보인다. 이 경우 사서에서 기림 이사금의 어머니와 처자식의 기록이 없는 건 사서에서 신라 김씨 왕조의 기년을 인상하는 과정에서 세대도 인상하다 보니 자연히 없어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광명부인의 기림의 딸이 맞다면 신라 김씨 왕조는 기림의 후손이 된다.[5]

고고학적으로 기림과 동시대 활동한 왕들은 파사, 지마, 일성, 아달라, 유례, 흘해, 구도, 미추 등이며, 그 외에도 사서에 기록을 남기지 못한 신라 왕들이 여럿 있었다.[6] 이렇듯 4세기 신라에는 많은 왕들이 있었지만, 후대 내물 이전 신라 왕조의 기록을 작성할 때 선택된 16명의 왕 중 하나가 기림이었다는 건 4세기 중반에 존재하던 여러 신라왕'들' 중에서도 굉장히 높은 위상을 갖고 있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충주 고구려비의 매금 기가 기림이 맞다면 대고구려 외교에 대표로 나설 정도였다는 뜻이니 말할 것도 없다. 신라 초기 왕들의 기록을 보면 신라 초기의 기년을 인상하기 위해 후대 왕들의 행적 몇 개를 선대 왕들에게 대신 삽입한 정황이 있기 때문에, 기림 이사금이 한 게 없는 게 아니라 한 게 굉장히 많아서 신라 초기 16명의 왕의 일원으로 명단에 올렸지만 다른 왕들이나 인물들의 기록에 기림의 행적이 삽입되어 행적이 거의 안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3. 기타

북사》와 《수서》에 기록된 다소 뜬금없는 신라 건국 신화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조위의 장수 관구검과의 비류수 전투에서 패배한 동천왕을 따라 옥저로 이동한 고구려의 유민이 훗날 동천왕이 고구려로 돌아갈 때 돌아가지 않고 남아 세운 나라로, 백제 사람을 왕으로 세웠으며 한 / 예 / 옥저 / 불내에 걸쳐 있다가 바다를 건너와 신라를 건국했다고 전한다. 비류수 전투는 244년에 있었고 동천왕은 248년에 사망했는데, 김씨 족단의 전신인 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이 건국된 시기가 고고학적으로 3세기 중반으로 비정되기 때문에 실제로 시기가 겹친다.

충주 금릉동 마한 소국은 전형적인 마한 국가이며 마지막까지 친목지국 성향을 고수해서 4세기 초반 분노한 백제에게 목지국 본가와 함께 완전히 초토화되고 신라로 도망쳐 김씨 족단이 되는데, 고구려 일부 세력이 금릉동 마한 소국을 건국했을 당시 합류했을 개연성은 있다.[7] 다만 금릉동과 사로국 사이의 지리적 환경을 고려하면 강을 건넜다기보다는 육로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더 높기에, 바다를 건넜다는 건 오류일 가능성이 높다.

4.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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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31권까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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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열전(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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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림 이사금 본기>
一年冬十二月 기림 이사금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장흔을 이찬으로 삼다
二年春二月 시조묘에 제사지내다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다
三年春二月 비열홀에 순행하다
三年春三月 태백산에 망제를 지내고,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 오다
三年 봄과 여름에 가물다
七年秋八月 지진이 일어나 샘물이 솟아오르다
七年秋九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十年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하다
十三年夏五月 죄수들을 사면하다
十三年夏六月 왕이 죽다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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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昔] 경주 석씨 왕조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추존 국왕 및 왕족
[범례]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1] 비슷한 사례로 중국 측 사서에 몇 번이고, 현도군에 귀속을 청하는 고구려가 있다. 이것 또한 현대적인 관점의 항복이 아닌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정상적인 외교 강화를 맺은 것으로 본다.[2] 조분 이사금(제11대)의 아들인지, 손자인지, 증손자인지 기록마다 전부 다른 것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3] 내물 마립간의 재위기간이 45년 10개월로 흘해 이사금과 고의적으로 같게 조정되어 있고, 353년은 330~340년대생인 내물 마립간이 아주 젊었던 시절인 데다 370~3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황이 있다. 내물 마립간이 미추 이사금의 딸 보반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가진 기간이 380년대~393년임을 고려하면 보반부인은 내물의 딸뻘 정도 되는 나이이며 370~380년대 초에 내물과 혼인했을 가능성이 높다.[4] 미추 이사금의 친동생 말구의 아들 내물 마립간이 330~340년대생으로 추정되어 미추가 310~320년대생으로 추정됨을 고려하면 기림, 흘해, 미추는 모두 가까운 나이라 추측할 수 있다.[5] 미추의 처 광명부인이 명원부인의 여동생이라 적힌 걸 고려하면, 기림의 왕후가 명원부인의 자매의 딸이었거나 미추의 전처가 명원부인 자매의 딸이었던 걸로 보인다.[6] 갈문왕과 이벌찬, 간의 칭호를 가진 여러 인물들도 4세기에는 신라왕으로 불릴 만큼의 권위는 갖고 있었다.[7] 당시 충북 일대는 친목지국 성향의 마한 소국들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동시에 한사군, 동예, 옥저, 마한, 진한의 영향력이 모두 투사될 정도로 복잡한 환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