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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우주력 800년, 신제국력 2년 4월 29일 ~ 5월 17일 | ||
장소 | ||
엘 파실 독립정부령 이제르론 회랑 | ||
교전 당사자 | 은하제국 로엔그람 왕조 | 엘 파실 독립정부 |
지휘관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볼프강 미터마이어 오스카 폰 로이엔탈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나이트하르트 뮐러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 알렉산더 바르트하우저 폴커 악셀 폰 부로 칼 에두아르트 바이어라인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 롤프 오토 브라우히치 칼 로베르트 슈타인메츠† | 양 웬리 에드윈 피셔† 더스티 아텐보로 빌리바르트 요아힘 폰 메르카츠 마리노 |
병력 | 은하제국군 슈바르츠 란첸라이터 함정 1만 5900척, 장병 190만 8000명 파렌하이트 함대 함정 1만 5200척, 장병 185만 7600명 라인하르트 함대 함정 13만 210척, 장병 1422만 5500명 바렌 함대 함정 1만 5200척, 장병 불명 메크링거 함대 함정 1만 5900척, 장병 불명 총병력 함정 19만 2410척, 장병 1791만 1100명 이상 | 엘 파실 혁명군 함정 2만 8840척, 장병 254만 7400명 |
피해 규모 | 슈바르츠 란첸라이터 함정 6220척 격침, 장병 69만 5700명 전사[1] 파렌하이트 함대 함정 8490척 격침, 장병 109만 5400명 전사[2] 라인하르트 함대 함정 2만 4400척 격침, 장병 200만 명 전사[3] 총 손실 함정 3만 9110척 격침, 장병 379만 1100명 전사 | 함정 약 1만 8천 척 손실(추정)[4] 장병 약 160만 명 이상 전사 (추정)[5] |
결과 | ||
엘 파실 독립정부와 은하제국의 휴전 및 회담 성립 |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의 에피소드 | ||||
페잔 폭탄테러사건 | → | 회랑 전투 | → | 양 웬리 암살사건 |
1. 개요
상승(常勝)과 불패(不敗)의 대결
[ruby(常勝, ruby=じょうしょう)]と[ruby(不敗, ruby=ふはい)]の[ruby(衝突, ruby=しょうと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71
[ruby(常勝, ruby=じょうしょう)]と[ruby(不敗, ruby=ふはい)]の[ruby(衝突, ruby=しょうと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71
- 등장 작품
- 시기 : 우주력 800년, 신제국력 2년 4월 29일 ~ 5월 17일
은하영웅전설의 전투. 우주력 800년, 신 제국력 2년에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 지휘하는 은하제국군과 양 웬리가 지휘하는 엘 파실 혁명군이 이제르론 회랑에서 격돌한 전투이다.
2. 배경
양 웬리 원수 모살미수사건 이후 은하제국 황제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은 자유행성동맹 정부가 제국 고등판무관 헬무트 렌넨캄프 상급대장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여 무고한 양 웬리 퇴역원수를 체포하고, 양 웬리 일당에 조안 레벨로 의장이 납치되자 태세를 전환하여 렌넨캄프 판무관을 팔아넘겼다는 것을 명분으로 바라트 화약 파기와 재원정을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 통칭 '대친정'이 시작되었다.이미 제국령 침공작전 부터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까지 무수한 전쟁을 겪어 막대한 전력을 손실한 동맹은 더 이상 제국을 막을 힘이 없었다. 자유행성동맹 최후의 우주함대 사령장관 알렉산드르 뷰코크 원수가 현역에 복귀하여 남은 함정을 끌어모아 마르 아데타 성역에서 결전에 나섰지만, 제국에 패배하고 뷰코크 원수도 전사했다. 승기를 잡은 제국군은 곧장 하이네센을 점령하고 겨울장미원의 칙령을 발표하여 동맹을 형식적, 실질적으로 완전히 멸망시켰다.
그러나 동맹이 멸망하기 직전에 엘 파실 자치정부가 독립을 선언했고, 반강제로 하이네센을 탈출한 양 웬리 함대가 신생 엘 파실 독립정부에 합류했다. 그리고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 벌어지던 시기 양 제독은 소규모 타격대를 파견하고 이전에 숨겨둔 함정까지 활용하여 코르넬리우스 루츠 상급대장이 지키고 있던 이제르론 요새를 매우 손쉽게 함락했다. 제10차 이제르론 공방전으로부터 1달 뒤 동맹이 멸망하고, 이제 인류의 생활권 전체를 지배하게 된 카이저 라인하르트의 전제정치에 대항할 유일한 세력은 이제르론 요새를 장악한 양 웬리와 엘 파실 독립정부밖에 남지 않았다.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오래 전부터 버밀리온에서 수치를 안겨준 양 웬리와 다시 한 번 겨루어보고 싶어했기 때문에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양 웬리는 제국의 패권을 인정하되 그 안에서 엘 파실 성계의 내정자치권을 얻어 민주주의의 불씨를 보존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전투를 바라는 카이저 라인하르트와 한 번 싸워야 할 필요성을 직감했다. 그렇게 하여 이제르론 회랑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전 은하계의 통일과 이에 따른 항구적 평화의 구현, 그리고 민주공화주의의 수호와 보존. 어느 쪽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대의를 지니고 인류 역사를 통틀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뛰어난 재능들이 모여 가장 격렬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 것이다.
두 사람이 싸워야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가치관이 단 한가지 점에서 일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 공정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은 집중해야 하는가, 분산해야 하는가. 이 유일한 불일치 때문에 당시 인류사회 최대 군사적 재능이 충돌하고 수백만 장병이 이제르론 회랑 안팎에 피의 궤적을 그렸던 것이다.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을까?
- J.J. 피사드르 『The Heroic History』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72[6]
- J.J. 피사드르 『The Heroic History』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72[6]
3. 전투 준비
3.1. 은하제국
우주력 800년, 신제국력 2년 2월 21일, 라인하르트는 임시 총본영으로 쓰는 호텔에서 은하제국군 최고 간부들에게 정식으로 이제르론 요새를 재탈환하겠다고 선언했다.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와 우주함대 사령장관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가 라인하르트의 건강을 염려하여 친정 대신 자신들에게 요새 공략 임무를 맡겨달라고 간청했지만 라인하르트는 양 웬리와 결판을 내고 싶으며, 양도 그것을 바랄 거라고 기각했다.하지만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 백작영애까지 나서 페잔으로 귀환하기를 청하고 로이엔탈 원수 탄핵사건까지 일어나면서 원정은 일시 중단되었다. 원정이 중단된 사이 후방총사령관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상급대장이 라인하르트의 명을 받아 이제르론 회랑 제국령 출구 방면에 포진하여 양 웬리를 견제했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원정 계획은 3월 19일 라인하르트가 로이엔탈을 신설된 노이에란트 총독에 임명하는 자리에서 원정 재추진 의사를 밝히면서 재개되었다. 라인하르트는 양 웬리 일당을 방치했다가는 그들의 전력이 증강될 뿐만 아니라 라인하르트가 양을 두려워하여 공격하지 않았다고 선전할거라면서 양 웬리를 굴복시키기 전에는 오딘은 물론 페잔으로도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제르론 요새 사령관을 맡다 양 웬리에게 쫓겨난 코르넬리우스 루츠 상급대장을 페잔 경비사령관에 임명하고 제국 본토에 남아 있는 아우구스트 자무엘 바렌 상급대장을 전선으로 불렀다.
우주력 800년 4월, 제국군은 본격적으로 이제르론 공략 준비에 착수했다. 구 동맹령, 현 노이에란트 방면에서는 슈바르츠 란첸라이터 사령관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과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 상급대장이 선봉으로 이제르론 회랑 입구로 진격했으며 제국령 방면에서는 에르네스트 메크링거 상급대장이 회랑으로 진격했다. 카이저 라인하르트 역시 4월 2일 전함 브륀힐트를 타고 하이네센을 떠났다. 볼프강 미터마이어 원수, 나이트하르트 뮐러 상급대장,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 상급대장이 라인하르트와 함께했으며, 중간에 칼 로베르트 슈타인메츠 상급대장이 라인하르트 본대에 합류했다. 라인하르트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하이네센의 경비는 알프레트 그릴파르처 대장이 맡았다.
이렇게 모인 제국군은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을 능가하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선봉대만 해도 함정 3만 척에 장병 300만 명 이상으로 혁명군을 상회했으며 제국 본토에서 오던 메크링거 함대도 1만 6천 척에 가까운 병력을 가지고 있어 혁명군으로서는 무시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여기에 카이저 라인하르트의 본대까지 합친 제국군 총병력은 함정 약 19만 척으로, 혁명군의 10배에 달하는 전력차를 보여 말 그대로 '공룡과 개미의 싸움'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국 본토에는 변경과 요지를 경비하는 병력만 해도 10만 척에 달했으며 제국수도 오딘을 지키는 울리히 케슬러 상급대장의 함대와 페잔을 경비하는 코르넬리우스 루츠 상급대장의 함대까지 남아 있었다.
한번 전쟁이 결정되자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를 제외한 제국군 전원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힐다는 싸우지 않고 양 웬리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몇 차례 주장했고 그의 아버지 프란츠 폰 마린도르프 백작도 양 웬리 하나를 토벌하기 위해 제국 전군을 이끌고 진두에 서는 것은 "쥐를 잡기 위해 대포를 쏘는 것"과 같다며, 회랑 양측에 병력을 배치하여 오랫동안 고립시킨다면 틀림없이 항복할 터이니 제도로 귀환해 달라고 의견을 냈지만 라인하르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양 웬리만 쓰러뜨리면 전쟁이 끝난다는 생각은 제국 수뇌부에 만연했고, 그에 따라 양 웬리를 회담장으로 끌어내 모살한다든가[7], 양의 부하들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여 부하들이 양을 배반하도록 한다든가, 양이 부하들을 팔아 혼자 살아남으려 한다고 이간질하는 방법 등 수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8] 그러나 압도적인 전력 우위와 정정당당한 함대결전을 선호하는 라인하르트 이하 제국 수뇌부의 특성 때문에 이러한 아이디어는 모두 실행되지 않았다. 후세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라인하르트의 천재성으로도 '적국 깊숙이 침입하는 단기결전, 그리고 완전한 승리'라는 유혹에는 벗어날 수 없었다"고 논평했다.
3.2. 엘 파실 독립정부
마르 아데타에서 자유행성동맹군 최후의 우주함대가 소멸되던 시점부터 엘 파실 독립정부는 다가올 제국의 침공에 맞설 준비에 착수하였다. 행성 경비대 수준에 불과했던 엘 파실군은 동맹의 전쟁영웅 양 웬리 퇴역원수와 참모진들이 합류하여 사령부로써의 모습을 갖췄고, 자유행성동맹이 멸망한 뒤에는 구 동맹군의 잔존 세력이 양 웬리를 찾아 엘 파실로 흘러들어온 덕분에[9][10] 엘 파실 혁명군은 제국군이 이제르론 회랑 코앞까지 진격한 4월 20일이 되자 함정 28,840척, 장병 254만 7400명의 강대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다.문제는 보유한 함정의 30% 가량은 전투 중 손상 등의 이유로 즉각적인 수리가 필요하거나 건조된 지 너무 오래되거나 전쟁 말기 너무 급하게 생산되어 대대적인 정비가 필요한 상태라는 것. 더구나 휘하 장병의 20% 정도가 말기에 징집된 신병들이라 전장에 나가기 앞서 훈련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다양한 출신의 크고 작은 함대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터라 지휘 체계를 처음부터 다시 구축할 필요까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엄청난 노력과 시간과 자원을 필요로 했고, 관련 업무를 총괄할 혁명군 후방근무부장 겸 이제르론 요새 사무감 알렉스 카젤느 중장은 한동안 과중한 업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혁명군 조직을 정비하는 동안, 혁명군 사령관 양 웬리는 당면한 전술전략 목표를 구상하고 있었다. 멸망한 국가의 후신치고는 3만 척에 달하는 거대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정규 함대만 10만 이상에 달하는 제국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것은 제 아무리 불패의 마술사라도 해도 현실성이 없는 망상에 불과한 일이었다.[11] 양 웬리는 고심 끝에 은하제국의 패권을 인정하되, 과거 제국의 일부였으나 폭넓은 자치권을 인정받은 페잔 자치령처럼 구 동맹령의 성계 일부를 반환받아 민주공화제를 유지하는 제국 산하의 자치국가를 설립한다는 것을 목표로 전략적 계획을 세우게 된다.
우주력 800년, 황제 라인하르트가 직접 지휘하는 원정함대는 엘 파실을 향해 출격하였다. 엘 파실 독립정부는 엘 파실 성계를 포기하고 혁명군 사령부와 함께 이제르론 요새로 이동, 황제 라인하르트는 비텐펠트 함대와 파렌하이트 함대를 선발대로 보내 회랑 입구를 장악하도록 하였다.
4. 도발
4.1. 바람은 회랑으로
4월 20일, 황제 라인하르트의 지시대로 은하제국군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 상급대장과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 상급대장의 함대가 이제르론 회랑의 동맹측 출입구에 위치한 다곤 성역까지 진군했다. 이들의 임무는 황제가 이끄는 본대가 도달할 때까지 회랑 입구를 장악하고 있는 것. 그러나 강한 호전성으로 유명하고, 양 웬리에 대한 치욕의 패배를 씻기 위한 복수를 갈망하던 비텐펠트 상급대장이 전투욕을 감추지 못하고 드러내면서 사태의 단초를 만들어지게 된다.슈바르츠 란첸라이터가 진군을 멈춘 4월 20일, 향후 방침을 결정하기 위한 주요 지휘관 회의가 함상에서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양 웬리에게 달콤한 조건을 내밀어 평화 협상을 제시하여 양 웬리 일당을 협상장으로 끌어내 모두 체포하자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이는 정면에서 당당하게 회전을 벌여 승리를 쟁취하고 싶던 비텐펠트가, 불명예스러운 방법으로 거둔 더러운 승리를 카이저께서 퍽이나 인정해주시겠다며 고함을 질러 묵살되었다. 회의는 계속되었지만 어차피 비텐펠트에게 재량권이 있는 게 아니라서 라인하르트가 올 때까지 성질을 억누르고 최전선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결국 비텐펠트는 파렌하이트와 정기통신에서 '최전선의 무료함'을 호소하게 된다.
이전부터 선발대의 무료함을 호소할 생각이었는데, 폐하께서 도착하실 때까지 할 일이 없다보니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녀석들이 생기게 된다. 무언가 할 일이 없는 것인가.
은하영웅전설 OVA 77화
은하영웅전설 OVA 77화
물론 그 '쓸데없는' 생각의 우두머리는 비텐펠트 상급대장 본인이었다. 비텐펠트는 대놓고 적군이 먼저 공격해온다면 카이저를 기다릴 필요없이 전투를 벌일 수 있다는 발언을 늘어놓았고, 파렌하이트도 회랑 바깥에서 후속 부대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리는 상황을 그리 반기지는 않았다. 허나 휘하 장수인 자신들이 전투 의욕 하나를 제어하지 못해서 카이저가 수립한 전략을 헝클어트리는 어리석인 짓을 자제할 '상식'이 있었다.
문제는 비텐펠트. 성향이 과격하다고 해도 공명심에 눈이 멀었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양 웬리에게 몇 번이고 굴욕을 당한 과거로 인해 이대로 두었다간 카이저의 지시를 어길 '적절한' 명분을 물색할 위험이 있었다. 고심 끝에 자신에게 비텐펠트를 제어할 책임이 있다는 점을 되새긴 파렌하이트는 '상대가 받아들일 리 없지만' 적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살피고, 카이저가 이끄는 본대의 도착까지 시간을 벌어둔다는 의미에서 양 웬리에게 항복을 권고해보라고 제안했다.
본인이 꺼낸 제안이지만, 파렌하이트는 처음부터 비텐펠트가 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벌이기 전에 잠시나마 시간을 벌면 좋다는 생각이었고, 비텐펠트가 이걸 거절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면 된다며 큰 의미를 두고 꺼낸 말이 아니었다. 비텐펠트가 생각해보겠다며 돌아서자 파렌하이트는 흡족해하며 다곤 성역 회전의 전훈을 되살려 다수의 정찰부대를 파견, 인근 지역의 지리적 정보를 수집하는데 전념하였다.
그런데 비텐펠트는 평소 성격에서는 절대 벌이지 않을 일을, 갑작스럽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부하를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항복권고문'을 작성하여 대뜸 이제르론에 발송해버렸다.
파렌하이트는 예상을 초월한 비텐펠트의 돌발 행동을 보고받고 잠시 당황했지만,[12] 어차피 양 웬리가 이제 와서 항복할 위인도 아니고 비텐펠트의 행동이 카이저의 명령을 심각하게 위반한 행위도 아니었기에 별다른 말 없이 상황을 묵인해주었다. 다만 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보이는 행동은, 후일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4.2. 비텐펠트의 항복권유
『과거에는 자유행성동맹 최고 지장이었으며 이제는 공화주의자 잔당의 유일한 장수가 된 양 웬리에게 제국군이 통고한다. 평화와 통일에 대한 귀관의 저항은 도덕적으로 무익할 뿐만 아니라 전술적으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며, 전략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현명한 귀관이라면 이를 분명 이해하고 있으리라, 본관은 진심으로 충고한다. 귀관이 목숨과 소소한 명예를 지키고 싶다면 반기,反旗,를 내리고 카이저의 자비를 청하라. 본관은 기꺼이 그 중재를 수행할 것이다. 이성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이만 통신을 마친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36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36
은하제국군 비텐펠트 상급대장의 명의로 발송된 항복 권고문은 더스티 아텐보로를 통해 양 웬리에게 보고되었다. 이제르론 입장에서는 카이저 본인이 직접 보낸 것도 아니고, 제국군 3대 장관과 같은 최고위직이 제국을 대표해서 보낸 것도 아닌 일개 장수에 불과한 비텐펠트가 개인적으로 보낸 문서일 뿐. 엘 파실 혁명군의 수뇌부는 이를 무가치한 종이조각 정도로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양 웬리 본인으로써는 비텐펠트가 카이저 라인하르트의 지시를 받고 보낸 문서인지, 그 내용은 진심인지 아니면 단순히 형식을 차린 것인지, 제국군의 의도는 양동작전인지 아니면 내분인지를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동안, 가치가 없다고 해도 예의를 차리는 측면에서 답장 정도는 보내야하는게 아니냐는 의견이 제시되었고 더스티 아텐보로 장군이 적극적으로 본인이 답장을 작성하겠다고 자원하였다.
문제는 아텐보로 장군이 이 귀찮은 역할을 자원한 것은, '권한도 없는 주제에 주제넘게 건방진 문구를 담은' 문서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사관생도 시절부터 정평이 나있던 독설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비텐펠트가 보낸 만큼, 그보다 더 많은 보답을 해주겠다며 전문을 써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첫 번째 답신안은 너무 천박해서 반려, 내용을 수정한 두 번째 답신안은 너무 과격해서 반려되고 만다. 아텐보로는 다시 수정을 거듭하여 나온 세 번째 답신안을 온건하고 고상한 내용으로 작성했다며 수뇌부 회의에 제출하였다.
『매년 거듭되는 실패에도 그때마다 계급이 오른 기적의 인간 비텐펠트 제독에게. 귀관의 단점은 용기와 사려의 불균형에 있다. 그 점을 시정하고 싶다면 아군을 공격하라. 귀관은 실패를 교훈 삼아 성장할 마지막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57[13]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57[13]
비텐펠트의 항복권유문은 분명 문제가 있는 내용이긴 했다. 그리고 양 웬리를 위시한 이제르론 수뇌부는 이런 모욕을 당하고 그냥 넘어가지도 않고, 무례한 상대방에게 더 큰 무례함을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보기에도 이 답신안은 그저 극도로 모욕적이고 상스러운 욕설을 간략한 정중함으로 포장한 모습일 뿐. 양 웬리는 이 내용을 보고받고 이게 고상하고 온건한 것이냐고 되물었고, 발터 폰 쇤코프는 품성이라는 것을 귀관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고 한 소리 거들었다. 아텐보로는 자신의 작품을 비텐펠트를 도발하여 전투에 끌어들이기 위한 비책이라며 변호했지만,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대놓고 도발하는 내용에 걸려들리가 있겠냐는 현실적인 반박에 부딪히고 만다. 그런데 관록있고 중후하며 만인에게 온화한 것으로 유명한 메르카츠 제독이 돌연 아텐보로 중장의 주장을 거들고 나섰다.
"만약, 비텐펠트, 파렌하이트 두 함대만이라도 각개격파할 수 있다면 다소나마 전력 격차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해볼 가치는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중략)
"그 통신문을 보냄과 동시에 아군이 전진한다면, 설마 이를 회피해 후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둘째 치고, 공격에 대해서는 응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우선 그들을 치고, 그리한 다음 카이저 라인하르트 본대와 대치한다면 긍지 높은 카이저에게 심리상 선제공격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60
(중략)
"그 통신문을 보냄과 동시에 아군이 전진한다면, 설마 이를 회피해 후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격은 둘째 치고, 공격에 대해서는 응전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우선 그들을 치고, 그리한 다음 카이저 라인하르트 본대와 대치한다면 긍지 높은 카이저에게 심리상 선제공격을 가할 수도 있습니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60
메르카츠의 정돈된 의견에 아텐보로가 찬성을 표했지만, 무라이는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에게 미끼를 뿌렸다가는 뿌린 팔까지 뜯어먹힐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양 웬리는 제국군을 격파할 책략을 완성하여, 메르카츠 제독의 이름을 빌린 작전을 입안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의 원흉, 비텐펠트는 살짝 도발적인 어조로 작성하긴 했으나 그래도 자기 나름의 성의를 담아 전달한 제안을 전달했었다. 그런데 무인으로써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가 없는 모욕적인 답변으로 돌아오자 극도로 분개하여 문서를 구겨 탁자에 내리쳐버렸다.[14]
5. 회랑의 전초전
5.1. 메크링거 함대 격퇴
비텐펠트와 아텐보로의 눈부신 협동으로 인해 갑자기 촉발된 전투였기에, 명장 양 웬리로써도 작전을 구상하고 성공시킬 준비를 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직 제국군 본대가 도착하지 않았지만 일단 전투가 개시되면 정면에서는 격노한 비텐펠트와 파렌하이트 함대 3만 척, 후방에서는 메크링거 함대 1만 5900척이 몰려들어 양 웬리 함대를 앞 뒤에서 포위할 터. 2배가 넘는 적군을 상대로 포위당하게 되면 제아무리 양 웬리라도 해도 승산을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양 웬리는 우선 숫적으로 소수인 메크링거 함대를 처리할 계략을 발동시켰다.현재 이제르론의 양 입구를 장악하고 있는 제국군은 황제가 도달하기 전까지는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을 것이고, 이제르론 요새를 아군이 장악한 탓에 두 입구의 제국군들을 직접 교신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양 웬리는 이런 제국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우선 비텐펠트, 파렌하이트 방면을 비워두고 2만 척 이상의 함대를 일거에 메크링거쪽으로 출격시켰다.
당시 제국군의 약점에는 상술한 것 이외에도 이제르론으로 유입된 동맹군의 잔당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존재했다. 마르 아데타에서 주력 함대가 괴멸되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지역 성계에 남은 함선이나 자유행성동맹에서 생산 가능한 함선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는데다 양 웬리의 보안태세가 철저하여 이제르론에 집결한 병력의 대략적인 수치조차 몰랐다. 무엇보다 양 웬리가 모든 함대 전력을 제국령 방향으로 집중한다는 말도 안되는 술수를 썼으리라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중한 성격의 메크링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메크링거 상급대장은 자신의 눈 앞에 2만 척이 넘어가는 동맹 함대가 출현하자, 이 방향으로 이 정도의 전력을 동원할 수 있다면 양 웬리가 보유한 함대는 못해도 5만 척이 넘어가는 것이 틀림없다고 착각하고 모든 함대를 급히 철수시키게 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시 전장 상황 탓이었다. 은하제국의 주력함대 대부분은 황제 라인하르트의 지휘 아래 동맹령 쪽에 있고 제국 령의 정규 함대는 오직 방어를 위해 주둔 중인 메크링거 함대 뿐이었다.
메크링거 제독은 자신 앞에 불패의 마술사가 서 있다는 사실에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양 웬리를 상대로 정면 대결을, 그것도 숫적으로 불리한 전투를 벌일 생각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자신이 패배했을 경우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너무나 위험했다. 광활한 제국령 전역이 양 웬리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된다. 숫적으로 불리한 자기 함대의 전력을 어떻게든 보충해야 했는데, 그 시점에 제국령에 존재하는 함대는 지역 방위용의 2선급 함대 뿐. 이래서는 양 웬리를 이길 방법이 없었고, 애초에 그 2선급 함대를 모을 여유조차 주어질 리가 없다.
더구나 만약 자신이 살아서 퇴각하지도 못한다면, 제국 수도 오딘이 그대로 적의 공격에 무력해진다. 립슈타트 전역 이후 문벌대귀족들을 전원 숙청하고 재개편 중인 제국의 중심지가 함락된다면[15] 그 피해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 게다가 안네로제 폰 그뤼네발트가 아직 오딘 근교에서 칩거중인데 만약 그뤼네발트 백작부인의 신변에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과거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반신 키르히아이스가 사망한 직후 거의 폐인이 되어 휘하 함대 전체가 마비되었던 적도 있었다. 이걸 겨우 제정신으로 되돌려놓은 것이 누이 안네로제이다. 그런데 이런 누이가 어떻게 된다면 라인하르트가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물론 양 웬리가 동맹령쪽 입구에서 20만에 달하는 제국함대를 두고 메크링거를 돌파하여 오딘을 직격하는 일은 가능성이 매우 낮은 일이었다.[16] 메크링거의 추측대로 양 웬리에게 5만척 이상의 충분한 병력이 있다고 가정해도, 제국령 쪽에 수 만의 함대를 할당해버리면 가뜩이나 부족한 이제르론 방위가 어려워지고 만약에 오딘을 함락해도 이제르론을 잃으면 사방에서 몰려드는 제국군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진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메크링거는 자신과 장병의 목숨, 제국의 운명을 걸고 도박수에 판돈을 걸어 볼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기적적으로 양 웬리를 이기는 확률과 모든 것을 잃을 확률, 그리고 일단 퇴각해서 상황을 관망했을 때 전력을 보존할 확률 등을 앞에 둔 메크링거의 선택은 당연히 퇴각이었다.
비텐펠트는 훗날 메크링거가 후퇴하지 않고 이틀이라도 양 함대를 잡아두었으면 자기 함대가 반대편에서 들이닥쳐 양 웬리를 잡아죽였을 것이라고 격노했다. 비텐펠트 판단대로 양쪽에서 협공했다면 제아무리 양 웬리라도 돌파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그럼 최소한 파렌하이트가 전사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메크링거의 판단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았다.[17] 황제는 물론 미터마이어를 포함한 다른 제독들은 이 일을 전혀 비난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이 부분은 메크링거 함대가 본토를 방어하고 나머지 함대가 모두 출동하여 동맹령을 공략한 상황에서 동맹령의 함대를 본국으로 되돌릴 시간이 없었던 전략적 상황을 고려해볼 때 비판받을 문제도 아니다. 다만 애당초 동맹령을 제압하러 출병했을 때 제국령에 일부 함대라도 남겨놓았으면 문제도 없었다. 애초에 제국군 장성들 숫자를 생각해보면 하나쯤 더 남겨놔도 문제가 없었다. 제1차 라그나뢰크 작전 시기의 동맹이라면 모를까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 시기의 동맹은 거진 다 망했기에 함대 5개분 정도만 달고가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변수로 양 웬리가 있지만 압도적인 전력차이가 있으니 2,8840척이 모이거나 아니면 동맹군 우주함대 사령부에 합류하기 전까진 양 웬리가 별 의미는 없었다.
하지만 제2차 라그나뢰크 작전이 실행되었을 때 양 웬리는 잠항하고 있었고, 제국령은 이제르론 요새에 있는 루츠와 제국령에 주둔하고 있던 메크링거가 지키고 있었다. 그로부터 1달 뒤에 양 웬리가 엘 파실 독립정부에 합류하지만, 그가 가진 병력은 제국군 루츠 함대의 10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극히 적었다. 제아무리 라인하르트라도 양 웬리가 그렇게 적은 병력으로 제국군을 쫓아내고 요새를 탈취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동맹을 멸망시키고 난 뒤 남은 제국군 함대를 제국령으로 보내 메크링거를 돕는다는 방법도 있었으므로 라인하르트의 책임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양 웬리의 세밀한 심리전과 제국군의 약점이 원인이 되어 상황은 양 웬리의 생각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5.2. 비텐펠트, 파렌하이트 함대 격파
양 웬리의 활약으로 메크링거 함대는 회랑 밖으로 철수하여 방어태세에 들어갔다. 교신의 어려움으로 이 사실을 모르는 비텐펠트와 파렌하이트 함대는 이제르론 요새 정면을 향해 진입하였고 양 웬리는 함대를 돌려 이에 맞서 싸울 준비에 들어갔다.4월 27일, 아텐보로가 집필한 답변을 받아들고 비텐펠트의 격노했던 당시에, 답신안과 함께 비밀통신문이 하나 함대에 수신되었다. 보낸 이는 메르카츠 제독으로 은하제국으로의 귀순을 청하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있었다. 허나 메르카츠의 고결한 품성을 알고 있는 파렌하이트는 물론이고 비텐펠트조차[18] 메르카츠의 귀순을 진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텐펠트는 메르카츠의 진의는 자신을 희생하여 혁명군의 승리를 얻는 책략, 다시 말해 사간(死間)이라고 추측했다. 파렌하이트는 비텐펠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았지만[19] 함대 전체에 2급 임전태세를 발령했다. 얼마 뒤 재차 통신이 왔고 비텐펠트는 파렌하이트의 동의를 받아 메르카츠 제독의 귀순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을 담은 답신을 보냈다.
비텐펠트의 예상대로 더스티 아텐보로 중장이 이끄는 혁명군 함대는 4월 29일 제국군 함대에 조심스럽게 접근했으나 미리 감지한 제국군에게 선제 공격을 얻어맞고 도주했다. 이에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혁명군 함대를 맹추격했으나 아텐보로는 양 함대의 주특기인 도망치는 연기를 완벽히 구사하여 아슬아슬하게 제국군 함포 사정거리를 벗어난 상황을 유지한 채로 제국군을 회랑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한때 반전공격을 가하는 혁명군 함대에 공세를 가해 반포위하려 했으나 아텐보로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놓칠 수 밖에 없었다.
4월 29일 10시 45분, 양 웬리 원수가 있는 혁명군 본대는 제국군의 급속 접근 보고를 받고 제1급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이어서 11시 30분, 제국군을 유인해온 아텐보로 제독의 선발대가 혁명군 본대 좌익에 합류했다. 얼마 뒤 제국군 함대가 접근하자, 양군은 함포 사정거리에 돌입하는 대로 발포 명령을 내렸다.
전투 배치는 오목진형을 짠 혁명군 함대에 맞서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와 파렌하이트 함대가 방추진형을 짜고 돌진하는 형상이 되었다. 파렌하이트는 슈바르츠 란첸라이터가 회랑에 돌입하자 카이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에게 전투 개시를 보고하고 더 나아가 비텐펠트를 돕기 위해 공세에 가담했다. 그러나 이는 좁은 회랑 안에 제국군이 밀집하는 결과를 낳아 밀집한 제국군 함정이 서로 걸림돌이 되어 혁명군에게 유효하게 반격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에서 가장 신중하다는 평가를 받는 부참모장 오이겐 소장이 카이저의 진노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희생을 각오하고 후퇴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 의견을 들은 비텐펠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이대로 후퇴한다면 혁명군의 반포위 추격을 허용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전 함대에 중앙돌파를 위한 돌격 명령을 내렸다.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혁명군에 3연속 일제사격을 퍼붓고 돌격했다. 그러나 혁명군은 그대로 맞서지 않고 중앙부가 후퇴하면서 양익을 전진시켜 제국군을 종심진에 가두고 십자포화를 퍼부어 돌격을 저지했다.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어떻게든 양 함대에 접근해서 근접전을 벌인다면 전황을 혼전으로 바꾸고 더 나아가 강대한 파괴력으로 양 함대를 패퇴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여 끊임없이 진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돌진했다. 이때 아텐보로가 마이크를 잡고 제국군을 도발했다.
"작년 버밀리온 성역 회전을 떠올려 봐라. 네놈들 제국군은 참패 대패 완패한 끝에 우주 먼지가 될 예정이었지. 그걸 불쌍히 여겨 살려줬더니 은혜도 잊고 또 쳐들어와? 네놈들의 카이저는 얼굴만 예쁘장한 개망나니구나."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82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82
은하제국군의 제독으로써, 황제의 충실한 신하를 자처하는 비텐펠트에게 모욕도 이런 치욕스러운 모욕이 없었다. 더욱 격노한 비텐펠트는 아군 함대는 3만 척이고 적 함대는 2만 척이니 1척이 1척을 잡고 죽어도 우리가 1만 척이 남아 승리할 것이 아니냐는 맹렬한 패기를 부리며 돌격을 명령하였다.[20] 그러나 에드윈 피셔 중장의 노련한 함대 운용에 제국군의 10여 차례의 파상공세는 모조리 분쇄당했고 교환비는 1대 1은 커녕 1대 2, 1대 3으로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참모장 그레브너 대장과 부참모장 오이겐 소장의 의견을 받아들인 비텐펠트의 명령에 의해 일시적으로 후퇴했다.
비텐펠트가 최전선에서 물러나자 이를 대신해 공세에 나선 것은 아달베르트 폰 파렌하이트 상급대장의 함대였다. 파렌하이트는 돌격을 명령했으며 제국군 함대는 아텐보로가 지휘하는 혁명군 함대 좌익에 화력을 집중하여 함대를 분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는 패착이 되었다. 함대를 분단한 것처럼 보였던 파렌하이트 함대는 좌우에서 날아드는 혁명군 함대의 포화에 끼여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때 재편성을 마친 슈바르츠 란체라이터가 돌진하여 양 함대의 일부를 쫓아냈으며, 고전하던 파렌하이트 함대와 합류했다.
하지만 이것이 양 웬리가 짠 함정이었다. 합류한 두 함대는 혁명군 함대와 이제르론 회랑의 위험공역에 갇혀 무자비한 포화에 노출되었다.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의 합류로부터 시작된 제국군의 우세는 불과 30분만에 무너졌으며 파렌하이트 함대는 메르카츠 제독이 지휘하는 혁명군 우익함대와 위험공역 사이에 포위당했다.[21]
위기에 빠진 파렌하이트는 혁명군의 포화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함대를 재편하고 화력을 집중해 포위망을 뚫고 도주를 시도한다. 비슷한 시각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도 혁명군 일부를 무너뜨린 뒤 회랑 출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이 또한 양 웬리의 함정으로, 혁명군은 포위를 풀면서 도주하는 두 함대에 종심진을 펼쳐 막대한 포화를 퍼부었다. 제국군은 혁명군의 공세에 함대 곳곳이 분단당하면서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4월 30일 23시 15분, 최후까지 전장에 남으며 함대의 퇴각을 엄호하던 파렌하이트 함대 기함 아스그림이 혁명군의 포화에 노출되었다. 혁명군의 포격이 집중되자 기함 아스그림은 함체가 광선에 꿰뚫려 전투불능에 빠졌고, 파렌하이트 상급대장을 비롯한 다수의 승무원이 부상 및 전사했다. 죽어가던 파렌하이트는 자신의 당번병이었던 유년학교 생도에게 탈출을 명령하고 전사했으며, 기함 아스그림도 주인을 따라가 23시 25분 폭발했다.
5월 2일, 제국군 잔존병력은 카이저 라인하르트가 지휘하는 제국군 본대와 합류했다.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함정 1만 5900척과 장병 190만 8천 명 중 6220척과 69만 5700명을 잃었고, 파렌하이트 함대는 파렌하이트 제독과 함정 1만 5200척과 장병 185만 7600명 중 8490척과 109만 5400명을 잃었다.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비텐펠트 상급대장은 무릎을 꿇고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다며 책임을 자인하였으나 파렌하이트가 전사한 마당에 장군 하나를 또 잃을 수는 없고 장병들의 사기 문제도 염려한 라인하르트는 '비텐펠트만의 방법으로 이 실수를 만회'하라며 처벌하지 않았으며, 죽은 파렌하이트 상급대장을 원수로 추서했다. 비텐펠트의 '슈바르츠 란첸레이터'나 파렌하이트 함대 모두 약 절반 가량을 잃었기 때문에 라인하르트는 우선 사령관을 잃은 파렌하이트 함대를 비텐펠트 휘하로 돌려 1개 함대로 재편성하며 양 웬리와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대승을 거둔 혁명군은 쌓인 장병들의 피로도를 풀기 위해 탱크 베드를 모조리 동원하고 있었으며, 아텐보로의 지휘 아래 회랑 입구에 연쇄식 폭발 기뢰 500만 개를 살포했다. 또 이때 비록 적으로 만났지만 옛 전우였던 파렌하이트를 잃은 메르카츠 제독이 5월 1일 개최된 작전회의에 불참하고 상복을 입었는데, 무라이의 비판적인 시선을 사기는 했으나 별다른 문제 없이 넘어갔다.
이 서전은, 양 웬리 함대의 전술적인 강점이 여지없이 드러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전술을 기획한 양 웬리, 유격전으로 적을 회랑으로 끌어들인 더스티 아텐보로, 그리고 그 와중에 함대 운용을 통해 진형이 깨지더라도 그것을 도리어 기회로 만든 에드윈 피셔의 괴물같은 함대운용능력이 극대화된 전투라 말할 수 있다.
6. 회랑의 전투
6.1. 회랑 진입
비록 전초전에서 참패하고 파렌하이트와 100만 명이 넘는 장병을 잃었지만 제국군의 물량은 여전히 혁명군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제르론과 하이네센 중간에 포진하고 있는 바렌 제독의 함대 1만 5200척을 제외해도 무려 함정 14만 6600척, 장병 1620만 명이 이제르론 회랑 출구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이는 2만 척에 불과한 혁명군 함대의 7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 뿐만 아니라 병사들로부터 숭배받는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여전히 건재하였기에 초전의 패배에도 병사들의 사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높은 사기와 많은 숫자만 믿고 비좁은 회랑에 병력을 투입했다가는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제국군의 쌍벽은 몇 차례나 작전을 협의해야 했다.양 웬리는 전초전에서 승리한 뒤에 회랑 입구에 500만 개에 달하는 기뢰를 매설하여 제국군의 접근을 차단하였다. 그 목적은 아군 병사들이 전투에서 쌓인 피로를 푸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지만[22] 은하제국군은 양 웬리의 의도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지향성 제플 입자로 기뢰밭을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는 기껏 통로를 뚫어 침입해봤자 양 함대의 강력한 집중포화에 걸려 섬멸당한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승부를 보기 위해서는 회랑 내부에서 침입해야 하는 상황, 로이엔탈은 한나절만에 기뢰밭을 돌파할 작전을 입안했고 라인하르트는 이를 승인했다.
5월 3일 6시 30분을 기하여 은하제국군은 회랑 진입을 시도하였다. 선봉은 롤프 오토 브라우히치 대장이 맡았고,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 상급대장이 2진, 나이트하르트 뮐러 상급대장이 후위를 맡았다. 한나절 동안 회랑의 기뢰밭을 제거하고 침입을 시도한 브라우히치 함대는 같은 날 21시부터 양 함대와 교전하기 시작했다. 눈앞에는 적의 포화가, 뒤에는 기뢰밭이 있어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였지만, 브라우히치는 이를 대비하여 라인하르트로부터 작전을 전수받았다. 그것은 휘하 함대 6,400척을 100척 단위 소함대로 쪼개어 적의 화력 집중을 회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대의 기동이 어려운 환경과 적의 포화 때문에 제국군은 상당한 피해를 입어 궁지에 몰렸다.
5월 4일 2시 20분을 기해 제국군은 작전 2단계에 돌입했다. 지항성 제플 입자가 회랑의 기뢰를 폭파시켜 다섯 개의 통로를 개척하였다. 고속순항함이 신속하게 기뢰밭을 돌파했고, 혁명군은 이를 저지하려고 했지만 다섯 곳을 모두 제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제국군 주력은 혁명군이 고속순항함대와 교전하는 사이 브라우히치가 개척한 통로를 통해 회랑 내부로 침입했고, 2시간 동안 교전한 끝에 회랑 내부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6.2. 격렬한 전투의 서막
5월 4일 12시 정각, 전함 브륀힐트가 이제르론 회랑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엘 파실 혁명군은 일제히 포격을 날렸다. 좁은 회랑은 머지않아 두 함대가 뿜어내는 막대한 에너지의 탁류를 일으켜, 두 함대의 함렬을 흐트러뜨리게 했다. 여기에 광선이 직진하지 못해 명중률이 떨어져 전황은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졌다.먼저 혼란을 회복한 것은 회랑 내의 전투에 익숙한 양 함대였다. 양 함대는 볼프강 미터마이어가 정통적인 진형을 간신히 재편했을 때 육박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퍼부었다. 미터마이어는 좌익을 후퇴시켜 적 전위를 끌어들이고 동시에 중견과 우익부대를 반시계방향으로 회전시켜 혁명군 좌측면을 치려고 했다. 그러나 통신체계가 완전히 기능하지 못했고, 대병력이 자유로이 활동할 공간도 부족했다. 제국군 함렬이 일시적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놓치지 않고 양 함대는 일제포격을 퍼부었다.
미터마이어는 이를 보고 세밀한 작전 지휘를 위해 5월 4일 20시 15분경 자신의 기함 '베어볼프'에 탑승하여 최전선에서 작전 지휘에 나섰다. 황제 다음으로 병사들의 지지를 받는 미터마이어 원수의 등장으로 제국군 장병들의 사기가 고양되었고, 칼 에두아르트 바이어라인 대장이 지휘하는 함정 6,000척이 선봉에 나서 혁명군을 공격하게 되었다. 미터마이어는 바이어라인 함대에게 일익을 형성하게 하여 경우에 따라 혁명군을 반포위하려 하였다. 이를 막은 것은 더스티 아텐보로 중장이 지휘하는 함대였다. 아텐보로가 지휘하는 병력은 바이어라인의 80% 수준에 불과했으므로, 그는 정면대결을 피하고 양 본대와 자신의 함대 사이로 바이어라인을 끌어들여 협공하고자 했다. 교전 5분 후 아텐보로가 후퇴하자 바이어라인은 이것이 함정임을 알았으나 전황에 변화를 주기 위해 더더욱 빠른 속도로 미사일과 광선을 난사하며 전진했다. 그러나 양 웬리는 미터마이어 함대를 포격으로 견제하면서 10시 방향으로 전위부대를 고속이동시켜, 바이어라인 함대를 반포위했다. 뒤늦게 알아차린 바이어라인은 재빠르게 후퇴하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한편 미터마이어는 전황을 소모전으로 끌고가고자 했다. 그리고 그 때가 올 때까지 제국군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동력 중심 함대와 화력 중심 함대를 각각 1,000척 씩 편성하여 무너져가는 전선을 보강하고, 수송선과 병원선을 최대한 동원해 유기적인 병참에도 신경을 썼다. 그 덕에 제국군은 양 함대 상대로 열세를 보였으나 질서가 무너지지는 않았다.
5월 6일, 양 웬리는 메르카츠 제독의 의견을 수용하여 제국군의 좌측 함대에 공격을 가해, 제국군 중앙 함대가 지원을 오게끔 유인하고 그 틈을 타 라인하르트의 본진을 공격한다는 작전을 세운다. 제국군이 유인책에 걸려든 사이 양 웬리 함대의 마리노 준장의 타격대가 라인하르트를 향한 공격을 개시했으나 이를 간파한 칼 로베르트 슈타인메츠 상급대장은 함렬을 늘려 마리노 분함대 왼쪽에서 포격을 퍼부었고, 마리노 분함대는 버티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양 본대가 전진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밀집대형을 갖춘 양 함대는 정밀한 포화로 슈타인메츠 함대의 무수한 함정을 격침시켰고 메르카츠가 공세에 가담하여 교대로 슈타인메츠 함대를 두들기자 슈타인메츠 함대는 순식간에 해체당했다. 슈타인메츠 함대 기함 폰켈도 5월 6일 11시 50분 레일 캐논 포탄에 두들겨 맞아 격침당했으며, 슈타인메츠 상급대장을 비롯한 슈타인메츠 함대 사령부가 거의 전멸했다.[23] 파렌하이트에 뒤이은 로엔그람 왕조의 두번째 상급대장 전사자가 발생한 것이다.
슈타인메츠의 사망은 제국군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슈타인메츠는 제국군 참모총감직을 맡고있던 터라 제국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라인하르트는 우선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를 중장 대우의 참모총감으로 임명하여[24] 빈틈을 메꾸고 혼잡해진 제국함대를 수습하였다.
제국군이 혼란에 빠지자 양 웬리는 최고의 지장(智將)이라는 별명에 맞지 않을 정도로, 가히 맹장(猛將)과도 같은 모습으로 라인하르트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국군은 과밀하게 밀집되어 방어선을 펼치기도 힘들고 슈타인메츠 함대가 사령관을 잃고 무력화되는 등 큰 위기에 봉착했으나[25] 알렉산더 바르트하우저가 지휘하는 함정 2,400척이 양 함대 우측면에 포화를 퍼부어 브륀힐트가 후퇴할 시간을 벌었다. 라인하르트는 후퇴를 마뜩찮아 했으나 적 주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는 로이엔탈의 설득에 설득되어 기함을 후퇴시켰다. 그러나 제국군 각 부대의 연동 속도가 로이엔탈의 뜻대로 되지 않아, 브륀힐트가 후퇴한 공역은 순식간에 양 함대가 차지하게 되었다. 양 함대는 천저 방면으로 돌진하여 제국군의 방어선을 뚫고, 아래쪽에서 라인하르트 본대를 향해 막대한 광선과 미사일을 퍼부었다. 그러나 라인하르트는 공세 도중 양 함대가 공황에 빠지지 않고 함렬을 유지한 지점을 찾아, 그곳을 향해 화력을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덕분에 제국군은 양 함대의 공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26]
쌍방이 어느정도 손실을 내고 장병들의 피로가 상당하게 쌓이자 라인하르트는 제국군을 교두보 방향으로 일시적으로 후퇴시켰고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던 양 웬리도 이제르론 요새로 철수하여 재정비에 들어갔다. 양 웬리는 전초전부터 승리를 거듭하며 제국군의 피해를 상당히 누적시키긴 했으나 제국군의 힘은 여전히 강력하였고 라인하르트가 후퇴한 틈을 타 장병들의 피로를 약간이나마 해소하고 함대의 소모된 물자를 재보급하고 함대를 출격시켰다.
마찬가지의 라인하르트 또한 함대를 내보냈고 5월 7일 23시 정각, 양 웬리가 거센 전면전을 걸었고 '철벽' 나이트하르트 뮐러의 함대가 방어에 나섰다.[27] 날을 넘긴 5월 8일 들어서도 전투의 열기는 가라앉지않고 더욱 격렬해져만 갔으며 전장의 상황은 누구도 예측 할 수 없는 미궁속으로 빠져들었다.
"전후, 좌우, 상하 어느 방향을 보아도 아군 함정들로 가득하다. 그런데도 아군이 열세라니, 이게 어떻게 된 노릇인가."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131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131
압도적인 숫자, 압도적인 훈련도, 제국군의 폴카 악셀 폰 부로 대장은 양 웬리를 상대로 불리함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군의 모습에 한탄을 내뱉었고 급기야 미터마이어 원수가 탑승한 베어볼프가 공격에 휘말려 함선 오른편이 끔찍하다 싶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미터마이어 원수가 전사했다는 충격적인 보고가 올라오며 제국군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다
6.3. 전투의 절정
5월 4일부터 시작된 제국군의 대공세는 5일 동안 계속되었지만 혁명군은 무너지지 않았다. 은하제국은 상대보다 10배는 많은 함대와 상대보다 더 많이 훈련된 병사를 가지고도 압도적인 승리는 커녕 혁명군의 공세를 허용해 수 많은 함대와 수많은 장병, 상급대장급 제독 한 명을 잃었다.[28]5월 9일,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어전회의에서 슈타인메츠 제독을 1계급 특진시켜 원수에 추서하고, 그의 후임으로 황제 수석비서관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 백작영애가 중장 대우 총본영 참모총감에 임명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동안 전투에서 수세를 취한 것이 잘못이었다며 실책을 인정하고, 정면에서 힘으로 적의 저항을 격파하여 재기하지 못하도록 해아 한다고 역설했다.
5월 11일 6시 45분, 제국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전과 달리 제국군은 함대를 돌진시켜 집중포화를 퍼붓고, 끊임없이 함대를 교체시켜 양 함대가 말라죽을 때까지 공세를 퍼붓는 단순하지만 무서운 물량전에 돌입했다. 제국군의 새로운 전법을 맞닥뜨린 혁명군 내부에서는 메르카츠와 아텐보로가 요새까지 후퇴하여 토르 하머로 파상공세에 대응하자고 제안했지만, 제국군은 끝임없이 양 함대에 달라붙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가장 먼저 돌입한 함대는 나이트하르트 뮐러 함대였다. 양 웬리는 뮐러의 공세에 맞서 뚫린 함렬을 메우고 사령부 휘하 기동병력으로 반포위당한 아군을 구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뮐러 함대는 30시간동안 교전했지만 양 함대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뮐러 자신도 지쳤기 때문에 후퇴했다. 그러나 뮐러 함대는 적 코앞에서 후퇴하다가 양 함대의 포화에 피해를 입었다.
뮐러 함대가 물러나고 뒤이어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 함대가 돌입했다. 양 함대에 필적하는 전력을 가진 아이제나흐 함대는 선두부대가 맹렬한 응사로 양 함대를 후퇴시킨 사이 전진한 종대가 양 함대에 측면공세를 퍼부어 양 본대와 아텐보로 분함대를 분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분단에 성공한 아이제나흐 함대는 며칠 전 파렌하이트 제독이 당한 것처럼 양 함대와 아텐보로 함대 사이에 끼여 두들겨맞았다. 특히 마리노 준장이 아이제나흐 함대 좌측면에 맹공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아이제나흐는 기함 비다르 주변이 불바다가 되고 호위함들이 터져나가는 순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마리노의 맹공을 버티면서 간헐적인 포격을 가해 적을 견제하면서 위험공역을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피해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간부들이 후퇴를 건의하자 아이제나흐는 속으로 뭐라 말하면서도 후퇴했다. 이때 아이제나흐는 일부러 후퇴 도중 허점을 노출했으나, 양은 다음 파상공세가 오는 것을 대비해서 물자를 보급하고 병력을 보충하며 부상자를 후송해야 했기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이때 보급담당 알렉스 카젤느 중장은 양에게 이제 한계라고 경고했다.
아이제나흐가 물러난 뒤 칼 에두아르트 바이어라인 함대와 폴커 악셀 폰 부로 함대가 공세에 나섰으나 양 함대에 격퇴당했고, 양은 한발 더 나아가 공세를 펼쳐 제국군을 밀어내려 했다. 이 때문에 4차 공세에 나섰던 구 파렌하이트-슈바르츠 란첸라이터 연합함대는 기선을 제압당하여 일시적인 혼란에 빠졌다.
5월 14일 4시 40분, 기함 쾨니히스티거와 함께 최정예 병력이 양 함대 중추를 향해 돌진하며 4차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국군의 돌진에 양은 좌익부대의 돌진을 멈추고 공세에 맞서기 위해 전선을 축소했다. 비텐펠트는 이전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직접 전열에 가담하여 맹렬하게 돌진했다. 양은 포화를 퍼부어 돌진을 저지한 뒤 교묘히 진형을 바꾸어 비텐펠트의 공세를 왼쪽으로 흘려 메르카츠에게 측면을 치도록 했다.그러나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는 혁명군보다 더 강했고 협공당한 게 오히려 지휘통일을 강화해 준 꼴이 되었다.
전투에 돌입한 두 함대의 전투는 무시무시했다. 막대한 포화가 서로를 향해 날아가고 수많은 군함들이 폭발했다. 양은 물자를 대량으로 소모하여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의 돌진을 막아내고, 구 파렌하이트 함대에 측면공격을 가해 적 지휘체계를 압박했다. 슈바르츠 란첸라이터도 공세종말점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세를 유지하기 어려워져 5월 15일 19시 20분 퇴각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함대운용을 담당하던 에드윈 피셔 중장이 전사했다. 비텐펠트는 양을 쓰러뜨리지 못했다며 이를 갈았지만, 그는 자신도 모른 채 양 함대에 치명상을 입힌 것이다. 이때 제국군이 추가 공세에 나섰다면 양 함대는 이제르론 요새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6.4. 사투의 끝
5월 16일, 카이저 라인하르트를 괴롭히던 열병이 재발했다. 황제가 몸져눕자 통수본부총장 오스카 폰 로이엔탈 원수는 미터마이어, 힐데가르트와 협의하여 전군을 잠시 이제르론 회랑 밖으로 물렸으며 황제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극비에 부쳐 총본영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5월 17일, 제국군은 이제르론 회랑을 빠져나갔다. 우주를 통일했던 제국군은 은하계 변경에 틀어박힌 혁명군을 상대로 함정 24,400척, 장병 200만 명의 손실을 봤다. 양은 제국군이 철수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혁명군도 지친 데다가 로이엔탈과 미터마이어가 추격할 틈을 보여주지 않았으며, 뮐러가 반격태세를 갖춘 채로 전군의 후미를 지키고 있었기에 추격하지 않았다. 특히 에드윈 피셔 중장을 잃은 것은 뼈아픈 타격이었다. 그동안 불패의 전설을 써내려간 양 함대 사령부 참모 중 첫 번째 전사자가 나온 것도 남은 이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지만, 그의 놀라운 함대운용 능력이 사라진 이상 앞으로 승리하기는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텐보로는 라오에게 "살아 있는 항로도가 죽은 항로도가 되었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8배가 넘는 압도적인 숫자 우세임에도 제국군은 이기지 못했다. 혁명군에게 손실을 크게 줬다고 해도 양 웬리와 이제르론은 건재했기에 누가 봐도 제국군이 패배하여 물러난 셈이었다.
"우리는 우주를 정복할 수 있으나 한 개인을 정복할 수는 없단 말인가!"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139
우주함대 사령장관 미터마이어의 절규 같은 한탄이 압도적인 전력 차임에도 이기지 못한 제국군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나카 요시키, 은하영웅전설 8권 <난리편>, 김완, 이타카(2011), p.139
7. 제국군의 회담 제의
5월 18일, 병환에 시달리던 황제는 양 함대에게 정전과 회담을 제안했다. 힐다는 그동안 간부들의 제의를 무시하며 무력으로 양을 무릎꿇리려 했던 황제가 이제와서 정전과 회담을 청한 것에 의문을 품었으나, 카이저 라인하르트는 꿈속에서 지크프리트 키르히아이스가 나타나 양 웬리와 다투지 말라고 했다고 대답했다. 힐다는 카이저의 꿈 속에 나타난 키르히아이스가 여러가지 감정과 이성이 뒤섞여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으나,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라인하르트는 휘하 장수들에게 양 웬리와 협상을 공표하면서 그것이 꼭 타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며, 재결전에 대비할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 말을 들은 프리츠 요제프 비텐펠트는 협상은 어차피 결렬될 거라고 공언하고 다녔으며 사령관을 잃은 슈타인메츠 함대와 파렌하이트 함대에서도 복수심에 격발할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자 미터마이어가 나서 두 함대를 재편하고, 폭발하려는 슈타인메츠와 파렌하이트의 부하들을 눈빛 한 번으로 제압했다. 한 지휘관은 물량전에서 성공하기 직전에 군을 물린 카이저 라인하르트를 보고 "카이저는 전투가 아니라 유혈을 즐기는 것인가"라고 푸념했는데 미터마이어는 황제의 권위와 지휘관의 안위 모두 지키기 위해[29] 그 자리에서 지휘관을 따귀를 때려 바닥에 쓰러뜨려서 사태를 수습했다.
같은 날 양 웬리는 이제르론 요새로 귀환하는 기함 율리시스에서 제국군의 제의를 수신했다. 그러나 2주 넘게 이어진 전투에서 제대로 잠도 못 잔 양 함대 장병들은 피로를 호소했기 때문에 답신은 미뤄질 수 밖에 없었다.
사령관인 양 웬리는 "뇌세포가 우유죽이 돼서, 지금은 생각이고 뭐고 할 상황이 아니야. 아무튼 잠깐 자고 오겠어."라고 하소연하며 침대로 직행했고 아텐보로는 "깨우는 놈은 반혁명 죄로 총살!"이라며 마찬가지로 침대로 직행했다. OVA에서는 얼굴을 찌푸리며 버럭 소리를 질러 곁에 있던 참모들이 깜짝 놀라기도. 포플랭은 "침대가 필요해. 여자가 없어도 되니까."라는 말을 하며 자신 인생의 반을 부정하며 잠들었다. 근엄한 메르카츠 제독마저도 "무한한 미래보다 하룻밤 수면이 간절한 심경이로군." 이라며 최소한의 지시만 내린 뒤 개인실로 들어가 잠들었다. 슈나이더는 메르카츠가 개인실로 들어가는 걸 다 본 다음에 나오면서 "지금 적군에게 공격당하면 어쩌려고 이런담. 하지만 뭐, 자는 거나 죽는 거나 비슷하니까..."라고 중얼거리며 개인실로 가다가 승강기에서 쓰려져 잠들었다. 프레데리카 그린힐, 율리안 민츠, 카테로제 폰 크로이처와 참모들도 마찬가지로 잠에 들었고 복도며 곳곳에 잠에 지친 혁명군 장병들이나 간부들은 그냥 쓰러져 잠들어버렸다. 함대 전투와 상관이 없어 요새에서 대기하던 카젤느와 쇤코프는 이 참상을 어떻게 치우느냐를 생각해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 잠자는 왕자님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키스해 줄 공주님 100만 명은 필요하겠다는 농담과 함께.
그렇게 푹 잔 양 함대는 이번에 걸신들린 듯 요새 내 모든 식당에 모여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장교고 사병이고 관계 없이 죄다 난민 꼴을 하고 식당에 몰렸지만, 오로지 올리비에 포플랭만은 일어난 뒤에 샤워를 정성스럽게 하고 한껏 몸단장을 한 뒤에 식당에 나타났다. 하지만 너무 늦게 나온 탓에 식당이 아니라 복도에서 화이트 스튜를 먹어야 했다. 이걸 본 혁명군 고위간부들은 웃음을 참지못했다.
이때 제국군이 공격했다면 이제르론은 난공불락이 아니라 초전박살이 났을 것이나, 제국군도 2주동안 잠도 안자고 싸워야했으니 똑같이 피로에 찌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제국군들도 전투가 끝나 물러나자마자 곳곳에 드러누워 잠들어버렸으며 특히 제국군의 후방을 맡아 항상 임전태세를 유지해야 했던 나이트하르트 뮐러는 아군이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잠도 안 자고 쉬지도 않았다가 안전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워 뻗어 잠의 여신을 만나러 갔다. 굳이 피로 때문이 아니더라도 라인하르트가 먼저 회담을 제안했을뿐더러 황제 자신도 앓아누웠기에 더 이상의 전투는 무리였다. 그리고 이 전투가 양 웬리가 지휘하는 인생 마지막 전투였다.
5월 20일 13시 40분 양 웬리는 제국군의 제의에 대해 토의하기 위해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그러나 카이저를 회담 테이블로 끌어낸다는 게 혁명군의 전략이었으므로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양 웬리는 회견 제의를 수락했으며, 5월 25일 롬스키 주석과 함께 몇몇 수행원을 대동하고 레다 II호에 탑승하여 회견장으로 향했다.
이렇게 사투가 끝나고 평화와 공존의 희망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을 때, 지구교도들이 일을 저지르고 만다.
8. 평가
수적으로 압도적이었던 측이 무장(武裝)의 질적으로도 우세하고 지휘관들이 유능하기까지 하였음에도 수적으로 열세인 측이 승리한 극히 희소한 회전이였다.[30][31] 전술적인 것과 전략적인 것 등, 자세히 나누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8.1. 전술
총 전력 약 20만 척 대 약 2만 8천 척의 엄청난 전투, 소모전을 강요해오는 제국군에 맞서 [32] 두 명의 상급 대장을 전사시키고 제국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양 웬리의 전술적인 면모는 역시나 빛났다. 제국군의 경우도 외부 조건인 황제의 와병만 아니었다면 희생이 엄청나게 크긴 했지만 원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제국군은 무기의 질과 병력의 수와 훈련도 및 사기, 지휘관들의 능력 모두 엘 파실 혁명군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어 객관적으로는 못 이기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환경이 좋지 못했다. 좁은 이제르론 회랑에는 아무리 함대 규모가 크다 한들 투입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어 압도적인 전력을 제대로 무기로 삼기 어렵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전력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함대 전력을 회랑에 밀어 넣었으나 오히려 이는 유기적인 작전 운용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었고, 양 웬리보다 지략면에서 뒤질 것이 없는 황제 포함 최고 지휘부 세 명이 검토하여 짠 훌륭한 작전안은 제대로 끝까지 전달되지 못하여 생각대로 함대 병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최고 지휘관이 현장에 없을 때의 문제점이 심각하여 미터마이어가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를 하게 되었다.
또한 제국 본토에 넉넉한 병력이 있었다면 양 웬리 함대를 회랑 양측에서 공격하여 더욱 쉽게 이길 수도 있었겠으나 이는 실현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오히려 제국 본토의 전력은 회랑 전투에 짐만 되었지 도움은 주지 못하였다. 전체 전력면에서 양 웬리 함대에 비해 불리하고 병력 차이 극복을 위해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중앙군 예비대가 없던 제국 본토측의 메크링거 함대는 양동 작전인 양 위장하고 주 전력 대부분을 동원한 양 웬리 세력의 움직임에 전체 전력을 과대 평가하고 소극적인 방어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제국 본토에 주력 함대는 자신뿐인 상황에서 양 웬리 함대가 닥치고 오딘을 향해 제국령 러시를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이상 소극적으로 방어에 치중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이는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면서 함대 배치를 노이에란트 방면에 몰빵한 라인하르트의 실책이며 메크링거의 잘못은 아니나, 이는 결과적으로 제국군이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을 힘들게 끌고나갈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물론 제국군은 이러한 악조건들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공수 양면에서 양 웬리를 몇 번이고 당황하게 만들었으며, 비록 절대적인 피해는 더 크게 입었으나 양 웬리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다는 전술적인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제국군 내부에서 전투를 종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인하르트의 와병)가 없었다면 제국군이 후반부에 사용한 단순하지만 확실한 소모전을 양 웬리 함대에 끝까지 강요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로 양 웬리 함대 측은 이제르론 회랑이라는 지형적 특성 빨을 그야말로 제대로 받은 전투이기도 하다. 이제르론 회랑이 좁아 20만 척의 제국군이 한꺼번에 물량 러시를 할 수 없었기에 제국군이 한 번에 투입할 수 있는 함선 숫자도 양 웬리 함대가 제법 겨룰만한 규모였다. 이것과 병력 비가 비슷한 시바 성역 회전에서는 이제르론 공화국 함대의 1/3이 날아갔음을 감안해보면 양 웬리 함대는 분명 지형 빨을 받은 게 맞다. 제국군이 끌고온 병력은 양 웬리 함대에 비해 압도적이니 비텐펠트 식의 논리로 한 척이 한 척을 잡고 죽는 소모전을 강요하면 약 2만 8천척 전부가 사라져도 무려 17만 2천척이 남을 정도였다. 문제는 이제르론 회랑의 특성상 후자는 아예 불가능 전자는 한 척이 한 척을 잡긴커녕 몇 척이 한 척에게 두들겨 맞던 상황 여기에 정면에서 만나는 병력 비는 비슷해진다. 여기에 회랑 전투에서 자주 발생한 제국군 내부의 지휘 문제도 겹쳐 이러한 요소를 따지면 제국군 입장에서는 커다란 핸디캡을 달고 싸운 셈이었다. 어쨌거나 양 웬리 함대는 제국군의 일급 지휘관 두 명을 우주에 장사지내고 입은 피해에 비해 훨씬 많은 제국군 함선을 가라앉히는 성과를 거두며 전술적으로는 판정승을 거두었다.
병력은 압도적으로 많으나 지형적 특징 때문에 결국 승자는 외려 병력이 적던 쪽에 돌아간 전투는 현실에서는 명량 해전이 있다. 여기서는 회랑의 전투 따위는 씹어먹을 정도로 불리했는데 먼저 병력비만 해도 1:11~26[33]로 회랑의 전투 따위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넘사벽급에 회랑의 전투의 양 웬리 함대는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이라는 사기에 있어 좋지 않을 일을 보고받긴 했지만 제10차 이제르론 공방전이라는 땜빵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수군은 다 와해된 후 이순신이 오자 어찌어찌 규합한 아스타테 성역 회전에서 패전한 4,6함대를 규합해 절름발이 함대라고 불렸던 초창기 양 웬리 함대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34] 그나마 두 전투 모두 공통적으로 지닌 강점이라면 불패의 명장이 지휘관이며 평소 사기와 군율이 높다는 거뿐 그 외에는 거의 [35] 절대 열세, 하지만 이 상황에서 이순신은 울돌목이라는 폭이 좁고 물살이 센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 결과 100척도 넘는다는 일본군 함선들은 그 100척이 다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고 반대로 조선 수군은 13척만으로도 일본군이 아군을 포위하지 못하게 그리고 통과도 못하게 했고 그리고 결국 조선 수군이 이겼다. 이 점을 회랑의 전투에도 적용시켜 보면 회랑의 전투 역시 마찬가지로 이제르론 회랑의 폭이 좁아서 양 웬리는 2만 8840척의 함대만으로도 이제르론 회랑에 제국군이 통과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고 또 제국군은 그 압도적인 숫자로도 양 웬리 함대를 포위하는 게 불가능했다. 여기에 제국군이 명량해전과는 달리 비장의 카드로 내세울 수 있을 메크링거는 연락도 되지 않고 [36] 애당초 양 웬리 함대의 규모를 오인하여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명량해전의 일본군과는 달리 써먹을 수 있는 양면 전선의 카드마저 써먹을 수 없었던 것
그러나 제국군은 명량 당시의 판옥선에 비해 스펙이 압도적으로 밀렸던 일본전선과는 달리 양 함대의 것들과 훨씬 나은 설비와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개개별 장군진들도 단독 실력은 양보다 모자랄지 몰라도 양을 제외한 양 함대의 나머지 간부들 보다는 충분히 유능한 이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제아무리 양 웬리라도 이러한 절대적인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전세를 뒤집을 순 없었으며 종국에는 피셔 중장이 비텐펠트에게 전사하고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리게 되었다. 명량에선 심지어 전투 초기엔 대장선 1척만으로도 무쌍을 찍을 정도로 절대적인 교환비를 낼 수 있었지만 회랑 전투에선 제국군이 지형에서 불리할 뿐 어쨌든 접촉면에선 전력교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조금씩이라도 갉아먹혀 간다면 결국 패배할 것은 양 쪽이었다. 게다가 지형적으로 포위를 못한다는 건 제국군에선 상대적으로 노는 병력이 생긴다는 것이고, 이는 역으로 보면 이런 병력들은 후방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전방이 어느정도 소모되면 교대해서 계속 공세를 펼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반면 양 함대는 워낙 병력이 쪼들려서 좁은 지형이라도 커버하기 위해선 전함대가 계속 풀타임으로 버텨야 한다. 물론 제국군도 피곤했지만 양함대에선 싸움이 멈추자 고위간부들조차 숙소에조차 못 들어가고 중간에 길바닥에 쓰러져 잠드는 일이 속출했는데 그럼 휘하의 병사들의 피로도는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 과거 필승의 전략이 뭐냐고 묻는 트류니히트에게 맥여줄 겸 양이 ‘최소 6배의 병력을 갖추고 보급과 정비를 철저히 할 것’ 이라고 정론으로 대답했는데, 제국군은 그런 면에서 철저한 우위를 점하고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도 승리를 목전에 둘 수 있었다.
8.2. 전략
우선 제국군 입장에서는 인적 자원의 손실이 뼈아팠다. 아무리 인재가 넘쳐나는 신은하제국이라고 해도 전사한 두 상급대장들은 군사적인 역할 말고도 정무적인 역할도 수행하거나 기대할 수 있는 인물이었기에 아까운 손실이었다. 참모총감 직위를 맡고 있던 슈타인메츠 상급대장의 전사가 타격이 크지만 적극성과 신중함을 모두 갖고 있는 파렌하이트 제독의 전사도 제국군에 아픈 상처로 남았다. 덤으로 반토막이 난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와 파렌하이트 함대를 합병하면서 함대 내부의 케미스트리가 엉망이 되어 오베르슈타인이 어그로를 끌기 이전까지는 그 후유증이 남았다.대부분의 전력을 구 동맹령에 배치하고 제국령에는 추가 전력을 동원하지 않은 전략 구성은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이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구 자유행성동맹령의 민심을 더 확고히 제압하고 반체제 세력들을 제압하며 더는 구 동맹군의 패잔병들이 이제르론 요새에 들어가기 전에 양 웬리 함대를 파괴해 국가를 안정시켜야 하기 때문에 요새 탈환 목적의 전투를 결심한 것 까지는 좋은데 동맹 쪽 입구에는 약 15만에 달하는 함대가 투입된데 반해 제국 쪽 입구에는 기존에 배치된 메크링거의 약 1만 5천 척만 이 투입되었다. 15만 함선을 한쪽에 밀어 넣을 게 아니라 못해도 2만에서 3만 척을 덜어내서 메크링거 쪽으로 보내든가 그 제국 본토의 병력들 가운데 2만에서 3만 척을 동원했어야 했다. 늘어난 병력 바겐자일 대장이나 기타 출세에 목마른 능력있는 장군진들이 제국에 넘쳐났으니 얼마든지 충당이 가능하다.[37] 그 결과 양 웬리의 전력 블러핑에 놀란 메크링거가 수세적으로 행동할 수 밖에 없었고 요새 탈환 또는 양 웬리 함대 세력 일소라는 최종 목적 달성까지는 실패했다.
양 웬리 측의 경우에는 '왜 싸워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고민 없이 전투에 뛰어 들었다. 함대를 투입한 것은 제국군이며 이제르론 세력은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지만 일단 이제르론 회랑 내의 지연전을 얼마나 오랫동안 수행할지, 작전의 목적이 황제를 직접 노리는 것인지 따끔한 맛을 보여줘서 협상인지 불분명했다. 전자가 목적이면 전멸을 무릅쓰고라도 병력을 집중해서 한 번에 치명타를 먹여야 그나마 죽일 확률이 높아지며,[38] 후자의 경우라면 미리 협상의 준비를 진행함과 동시에 상대방에게도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야 하는데 현실은 황제와 선봉장에 대한 도발뿐이었다. 제국군이 양 웬리 함대의 협상 의지를 전혀 모르는 이상 목표는 양 웬리 함대 격멸 및 이제르론 요새의 점령에서 달라질 일은 없었고 이렇게 전략적인 목표 없이 단순 방어에 급급하다보니 후반부에는 뻔히 적이 물량전으로 전환할 것임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황제를 격멸하지도, 치명타를 입혀 협상 테이블에 앉히지도 못했으며, 치명타를 입혔다 한들 상대방에게 협상의 의지가 있는지도 불분명했다. 이럴 거면 보급 문제를 해결한다는 전제하에 차라리 메크링거 함대를 격멸하고 제도 오딘으로 레이드를 뛰는 것이 나을 지경. 물론 이 경우에도 제국령에서 약탈 말고는 보급을 하는 것이 어려울 뿐더러 행군 거리도 너무 먼 데다 메크링거가 직접 상대를 하지 않고 시간을 끌다 제국령에 여러 소부대로 흩어진 경비함대 10만 척 이상을 재조직해서 맞받아쳐버리면 도저히 답이 없어진다. 제국령 지리도 모르는 양 함대는 오딘 근처에도 가기도 전에 망해버릴 가능성도 높다. 외려 페잔 레이드가 더 낫다. [39]
더군다나 황제를 전장에서 전사시키는 버밀리온 성역 회전 2라운드는 사실 아예 선택옵션조차 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일단 양 웬리가 크게 불리한 군세를 대등(1:1)하게 만들도록 최대한 게릴라전을 하여 제국군을 분산시킨 뒤 홀로 남은 라인하르트와 서로 누가 먼저 죽나 하고 치킨 레이스를 벌인 버밀리온 성역 회전의 전례에서는 그 때 정말로 현 황제를 기함이 격침되기 직전까지 몰았던 바 있다. 하지만 회랑 전투는 당시 동맹령 침공처럼 목적지(침공지)가 분산된 것도 아니며 수도 방위 병력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과 간부진이 전선에 집결해 있었고, 전력비는 비텐펠트의 말을 빌려 최소한 10:1은 되었다. 버밀리온 성역 회전처럼 보급물자가 마르든지 양 웬리를 먼저 치든지 양자택일의 상태로 몰리지 않았기 때문에 라인하르트가 굳이 나설 이유가 없었으며 그렇다 한들 주위인들도 바짓 가랑이를 붙들고 말릴 것이었다. 실제로도 움직이지 않았다. 제국군은 두 명의 상급대장을 잃고 전체 병력 손실도 꽤 컸으며 전방에서 지휘를 하던 미터마이어조차 기함이 피탄되어 한 때 전사설까지 돌았지만 브륀힐트 주변은 조용했다.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살려 최대한의 방어전을 펼쳐도 국지적인 승리만 얻을 수 있는 양 함대 입장에서 그 이점을 버리고 10배 대군의 품으로 공세를 펼치는 건 그대로 자살행위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고 제국군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줘서 협상을 유도하는 것 역시 무리였다. 파렌하이트와 슈타인메츠가 전사하고 슈바르츠 란첸라이터가 반파되는 엄청난 타격을 입어 라인하르트는 격노하고 이를 애석해하긴 했지만 정복의지를 꺾지 않았으며 실제로 전력적인 우세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전술적으로 양 웬리 함대가 더 이상 잘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정도의 최대의 성과를 끌어냈음에도 황제는 철군이나 협상을 생각치 않았다. 전력의 격차는 인력적인 측면에서 봐도 심각한데, 제국 측은 두 명의 최고위 제독을 잃었음에도 그를 대신해서 나설 지휘관들이 얼마든지 있었던 반면 양 함대 측에선 함대 운용의 권위자인 피셔 한 명이 전사하고 제국군이 단순 무식한 소모전을 강요하자 더 이상 제국군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전투 행위를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양 입장에선 전력 차가 너무 나서 전략적인 선택지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기적적인 승리를 거둬서 교환비로 이득을 엄청 봐도 불리한 국면은 그대로이고, 이번엔 안전하게 후방에서 지휘하는 황제를 죽여 일발역전을 노릴 수도 없었다. 오딘에 역공을 가는 작전안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결국 양 함대는 처음부터 패배가 결정된 싸움을 시작한 셈이었다. 최대한 남은 병력으로 버티면서 상황이 바뀌길 바라볼 뿐이었으며, 실제 황제의 와병으로 철군이 이뤄지고 심경 변화로 협상에 나서자고 하면서 겨우 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살기를 바랐으면 처음부터 비텐펠트의 항복 권고를 받아들였거나 아니면 피셔의 전사 후 재공세가 시작되었다면 이제르론에 들어가 잠깐 더 버티다가 항복의사를 밝히거나 뿐이었을 것이다. 양 웬리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인재욕이 큰 황제라면 휘하 장성들도 어떻게든 살려주고 등용하고자 했을 것이다.
8.3. 이전 전투들과의 비교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당 전투는 라인하르트와 양, 두 주인공의 마지막 결전이라서 그런지 이전에 두 인물이 붙었던 전투에서의 요소가 존재한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이는 두 주인공이 겪은 상황의 반대이기도 하다.8.3.1. 소모전: 아스타테 회전
아스타테 회전 당시 양은 라인하르트의 원정군을 서로가 서로의 꼬리를 무는 소모전을 걸어 완승을 저지해냈다. 그런데, 이 회랑의 결전에서는 라인하르트가 전투 후반에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앞세운 소모전을 가하여 양 함대에 타격을 입혀 승리를 목전에 둔다. 물론 두 소모전에는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다.8.3.2.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한 전투 중지: 버밀리온 성역 회전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는 양이 끝내 라인하르트를 죽음의 코앞까지 밀어넣어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나 힐데가르트 폰 마린도르프의 조언에 따른 미터마이어, 로이엔탈군의 하이네센 포위와 이로 인한 욥 트뤼니히트의 항복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사실상 제국의 판정승을 허용하고 만다. 마찬가지로 라인하르트 역시 이 회랑 결전에서 상술한 물량전으로 승리를 목전에 두었으나, 본인의 와병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결국 양 웬리를 꺾는 데에는 결과적으로 실패한다.8.4. 결론
결론적으로, 양측 모두 결전이라는 말이 어울리도록 화려한 전투를 벌렸고, 결과적으로 결국 양측이 서로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다만 그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1] 회랑의 전초전 기준.[2] 회랑의 전초전 기준.[3] 전초전 이후 재편성된 슈바르츠 란첸라이터의 손실을 포함한 수치.[4] 모인 병력은 28840척이었지만 시바성계의 마지막 전투에서 동원한 함정은 총 9800척 정도 였다. 전투 초기엔 30%는 정비가 필요해 직접 동원 가능한 것은 2만 척이었으나 분명히 전투 중에 손상 함정의 후방이송과 보충병력을 전선에 배치하였다는 언급이 있었으므로 이들 역시 결국에는 전투에 나섰음을 알 수 있다. 만약 나서지 않았다면 시바성계 전투당시 무인함정으로 동원되었을 것이다.[5] 정확한 숫자는 알기 어렵다. 시바 성계 전투당시 이제르론 요새에서 출격한 병력은 567,200명이었고 엘 파실 독립정부가 붕괴할 때 100만 명 가량이 이제르론 요새를 이탈했고 남은 사람은 94만 명이었으며 성비는 대략 2:1이었고 67만명에 달하는 남성의 절대 다수는 군무종사자였다. 이를 토대로 계산한 수치.[6] 은하영웅전설이 후대 역사가들의 시각으로 쓰여진 전기(傳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대목이다.[7] 작중에서 비슷한 생각이 나온 적 있는데 오베르슈타인의 풀베기에서 비텐펠트는 오베르슈타인이 노리는 것은 감금된 인사들을 미끼로 이제르론 놈들을 꾀어 하이네센에 오면 이들을 잡아다 모살하는 것이라고 추측한 바 있다. 비록 라그풀 교도소 폭동사건으로 인해 이제르론측 인사들이 하이네센에 오는 일은 없었지만 이 말을 들은 뮐러는 오베르슈타인은 그러고도 남을거라 생각했다.[8] 정작 이 방법들은 상당수 안 먹힐 방법인데 먼저 양 웬리 함대의 수뇌부는 대부분 동맹군 시절에 여러 이유로 상부의 눈에 들지 않아 능력에 비해 출세가 늦다가 양을 만나면서 덩달아 덕본 케이스라 무려 버밀리온 성역 회전 직후에 아얘 동맹정부 따위는 쌩까버리고 양에게 충성선언을 할 정도였다. 즉 수뇌부는 뭔짓을 해도 안 먹힌다. 특히나 로젠리터라면 더더욱. 오히려 엘 파실 정부인사들이 더 잘 먹히는데 이들은 롬스키에게 양을 팔아 엘 파실의 자치권을 얻자고 주장한 바 있고 양 웬리 암살사건이 터지자 잽싸게 엘 파실 독립정부를 해산시켰다. 다만 은하제국은 엘 파실 독립정부보다는 양 웬리 함대가 실체가 있다고 보고 있기에 독립정부측 인사를 회유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9] 패전에서 살아남은 정규함대의 잔존 병력, 지역 성계의 경비함대, 군 조병창에서 갓 생산된 신조함, 민간 의용군 등. 자유행성동맹에 남아있는 모든 전투함들은 양 웬리를 찾아 엘 파실 성계로 속속 합류하였다.[10] 이외에도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 직전, 자유행성동맹군 우주함대 총참모장 춘우 지엔 대장이 동맹 정규함대에서 함선 5,560척 및 함선 운용에 필요한 인원들을 선별하여 엘 파실로 합류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11] 심지어 엘 파실 독립정부 각료층에서는 차라리 양 웬리를 제국에 넘기고 엘 파실의 자치권을 인정받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독립정부 주석 프란체스크 롬스키가 이는 민주공화 정신을 부정하는 비열한 행위이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조안 레벨로의 시신을 황제에게 바쳤다가 그 자리에서 처형당한 록웰의 선례를 들어 각료들을 꾸짖어 실제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12] 상부의 지시를 구한 것도 아니고, 하다 못해 바로 옆에 있는 파렌하이트에게 논의 한 번 하지 않고 혼자 멋대로 결정해버린 것 모두 문제이다.[13] 원작에선 이 뒤에 『유일 이외의 장수, 더스티 아텐보로.』라는 발신인을 알리는 메시지가 존재한다. 일본에서 원작소설을 준거해서 만들어진 OVA는 물론 서울문화사 판에서도 재현돼 있었다.[14] 도발적인 말투가 원금에 풍부한 이자까지 더해져서 돌아왔으니,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다. 애초에 비텐펠트가 동맹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이나 군부 실세들과 충돌하며 독설가 클럽이 되어버린(...) 양 웬리 함대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 문제.[15] 약 1년 전, 황제 라인하르트의 특명으로 제국 수도는 페잔으로 천도했으나 수백 년간 수도로써의 역할을 다해온 오딘의 기능이 단기간에 페잔으로 이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16] 페잔 상인 보리스 코네프를 통해 제국쪽 성도를 입수한다고 해도 막대한 작전을 벌이기에는 지리적 정보가 너무 적다.[17] 메크링거가 그 당시 전투를 벌였다면 파렌하이트가 살아남을 수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메크링거 본인이 죽어버릴 수도 있게 되어 버린다.[18] 파렌하이트는 메르카츠가 배신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냐며 어이없어 했고, 비텐펠트는 자기가 그따위 것 정도를 모르겠냐고 되받아치며 메르카츠가 뭘 꾸미고 있을지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19] 그런 비정한 방법을 양 웬리가 승인하겠냐는 의구심이었지만, 비텐펠트는 양 웬리가 그럴 인물은 아니지만 메르카츠 본인이 희생을 자처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생각했다.[20] OVA에서는 이 말을 들은 주변인물들이 경악한다.[21] 이때 파렌하이트가 메르카츠 제독이 참전했음을 알아보는 묘사가 나온다.[22] 단시간 내에 병사들의 피로를 회복하기 위해 탱크 베드를 총동원하고 있었고 흥분과 긴장, 불안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탱크 베드에 들어가는 사태가 속출했다.[23] 마르크그라프 소장을 제외하면 전원 전사했다.[24] 마린도르프는 본인이 지휘 경험이 없어 참모총감직을 맡을 수는 없다고 이의를 제기했으나 마린도르프는 앞서 버밀리온 성역 회전에서 뛰어난 군사적 판단으로 라인하르트와 제국을 구해냈던 공적을 세우기도 했고 어차피 주된 지시는 라인하르트 본인과 군 원수들이 수행하고 마린도르프는 세밀한 사항에 대해 보조역할만 수행하면 되는데다 마린도르프의 성격상 황제의 권위를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할 사람도 아니었기에 황제의 명령은 문제없이 받아들여졌다. 대충 바지부장을 앉혔다고 보면 된다[25] 여기에 제국군 함대의 움직임이 수뇌부의 예상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양 웬리가 파고들 자리가 발생한 탓이기도 했다.[26] 이때 라인하르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자기 작전이 먹혀들자 버밀리온에서 패배한 거 때문에 속앓이 하다가 양 웬리를 격파하기 직전까지 간 모습으로 비칠 정도로 좋아한다(그만큼 버밀리온에서 왕창 깨진 것이기도 하다).[27] 이때 양 웬리는 뮐러에 대해서 라인하르트는 그를 부하로 가진 것만으로도 후세에 이름이 남을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게 뮐러의 공식 평가가 되었다(...) 뮐러의 평가는 '제국군의 철벽'과 함께 '그 양 웬리가 '양장'이라고 평가한' 이기 때문.[28] 당시 은하제국군은 숙적 자유행성동맹군을 완전히 멸망시켜 사기는 충만해있고 전쟁 기간 큰 피해도 없어 오랜기간 실전으로 강인하게 단련된 수 많은 장병과 모자란 곳 없는 유능한 지휘관들이 가득한 강군이었다. 골덴바움 왕조 시절부터 내려온 막강한 함대는 그 거대한 규모를 유지하고 더 확장한 반면 수 차례 패전을 거듭하다 조국이 멸망하고 남은 잔당들이 모인 엘 파실 혁명군은 사기와 능력은 그렇다고 쳐도 낡고 파손된 보잘것 없는 함대는 숫자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당연히 엘 파실 혁명군이 손가락도 쓰지 못하고 괴멸되어도 당연하다고 할 일이었는데 이들은 되려 예상을 뒤엎고 은하제국군을 상대로 모랄빵을 시전하고 있었다(...) 공룡을 패대기치는 개미의 위엄[29] 발언을 그대로 놔두면 황제의 권위가 손상되고, 해당 장교는 불경죄로 처벌받을 수 있었다. 미터마이어는 결코 부하를 엄하게 다루는 장교가 아니지만 그 상황에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30] 양 웬리 함대의 회랑의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이기는 하였지만 요새를 사용한 공성전은 아니었다.[31] 물론, 양 웬리 측도 상술했듯, 패배 직전까지 몰린 만큼, 완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32] 제국군은 엘 파실 혁명군에 비해서 소모전으로 인한 피해를 감수할 수 있었다. 비텐펠트의 어법을 빌려서 서술하자면 제국군은 20만 척이고 엘 파실 혁명군은 2만 8천 척이니까 1척이 1척을 잡고 죽어도 17만 척이상이 남는다.[33] 일본군 함선 숫자에 대해선 논란이 있지만 최소 133척 최대 333척 정도로 보고 있다.[34] 오죽하면 조정에선 바보같이 수군 폐지를 이순신에게 얘기했을 정도[35] 이순신은 그나마 함선과 화력이 우세했고 일본군의 호승심이 일본군의 약점이 된 장점이 있었다.[36] 수천 광년의 거리상 통신을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 가능하다고 치면 양 웬리가 방해전파를 내보냈을 것이다. 그렇다고 직접 함선을 보내서 소식을 주고받자니 페잔 회랑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것에만 며칠이 걸리는 일인 만큼 이걸로 소식을 주고받는다고 가정하면 메크링거가 어떻게든 진격 명령을 받아 진격했을 때는 일은 이미 다 끝나 있었을 것이다.[37] 당시 제국 측 출구를 지키던 건 메크링거 하나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좀 무리인 게 제국군 함대 상당수가 동맹령 정복에 나섰으니 동맹 측 출구에 있던 병력이 제국 측 출구에 있는 병력보다 더 많아도 이상할 건 없지만 메크링거의 병력 숫자는 그야말로 1개 함대 수준이다. 마르 아데타 성역 회전의 동맹의 병력보다도 훨씬 더 적다. 아무리 동맹도 제압해 제국에 맞설 강대한 세력 없다 하나 제국령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제국 측 출구에 고작 1개 함대만 그것도 멸망 직전의 동맹군보다 더 적은 숫자를 배치한 것은 안일한 태도다. 여기에 메크링거에게 병력이 좀 더 있었다면 회랑의 전투의 승자는 제국이 될 수도 있었다. 메크링거가 2만 척의 함대에 줄행랑을 친 건 양 웬리 함대의 총병력이 5만은 될 거라고 짐작한 것이 이유인데 제국에서 3만쯤 덜어주면 메크링거는 무려 4만 5천 척을 이끌게 된다. 이 정도면 양 웬리가 이런 전술로 나온다고 해도(사정을 알면 할 리도 없지만) 교전을 해도 될 수준이며 특히나 구태여 공격적으로 나올 거 없이 수비적으로만 나와도 양 웬리 함대를 제국 측 출구에 묶어둘 수 있다. 양 웬리가 제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양면전선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중한 성격의 메크링거라지만 양면 전선은 당하는 쪽이 불리한 만큼 아무리 공세로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아예 발을 빼버리는 일까지는 안 했을 것이다. 회랑의 사이가 넓기에 양면 전선이 형성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일단 형성되면 당하는 쪽이 손해다.[38] 버밀리온 회전 때에도 이때의 목적은 황제의 전사였기에 오로지 브륀힐트로의 포격을 염두에 두었다. 후에 나오지만 시바 성역 회전에서는 황제 어환이라는 사실을 도청한 율리안 함대가 브륀힐트 공격에 올인하여 작전을 시행한 결과 압도적인 교환비 손실을 감수하고 이를 성공시켰다.[39] 만일 양 웬리 함대가 이제르론 회랑, 페잔 회랑 두 개를 모두 탈취하고 지킬 수 있는 조건이 된다면 페잔 레이드도 나쁜 생각이 아니다. 이 경우 은하 제국은 구 동맹령과 본토로 나뉘는 곤란한 상황에 이르기 때문 만일 양 웬리가 마르 아데타에서 소모된 2만~2만2천척의 동맹군 최후의 잔여함대까지 이 당시에 지휘할 수 있었다면 이제르론 회랑과 페잔 회랑을 모두 장악하고 라인하르트를 협박한다는 선택지를 골랐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역시 어렵긴 매한가지 두 지역 거리가 바로 옆동네 따위가 아니기에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으며 병력이 심하게 분산된다. 더하여 양 웬리 함대에 양 웬리만 한 지략가가 또 있다면 모를까 양 웬리 함대에는 그 정도 되는 인물은 양 웬리 하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함대 지휘를 맡아본 이조차 양 웬리 하나뿐이었으니... 더하여 페잔 회랑은 외려 이제르론 회랑보다 더 지키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페잔 회랑에 있는 페잔은 이제르론만 한 요새도 아닐뿐더러 소수의 점령군이 다수의 주민들을 챙겨야 하는 건 하이네센을 장악했던 구국군사회의의 상황과 똑같기 때문 여기에 페잔 사람들이 양 웬리를 반길지도 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