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02:44:13

현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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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82 낙랑군3 현도군4
BC 75 남부도위 동부도위 (흥경 이현)
AD 30 폐지 (무순 이현)
AD 204 대방군
AD 314 (낙랑군 313년, 대방군 314년, 현도군 315년 요서 이현)
1 삼국유사에서는 평나군
2 현도군은 기원전 107년 설치되었음.
3 삼국유사에서는 평주도독부
4 삼국유사에서는 동부도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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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사군.jpg

1. 개요2. 소속 현3. 시기에 따른 이동
3.1. 제1차 현도군3.2. 제2차 현도군3.3. 제3차 현도군3.4. 제4차 현도군
4. 위치 논란5. 중국의 동북공정6. 기타7. 둘러보기

1. 개요

玄菟郡.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한 이후, 전한의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설치한 한사군 중의 하나이다. 예맥 계통 토착민 세력의 반발에 의해 점차 중국 본토 방면으로 이동하다가 고구려에 의해 완전히 소멸하였다.

'菟'자가 '토'로도 발음될 수 있기 때문에 일부 언론이나 서적에서는 현토군으로 쓰기도 한다. 실제로 《한서》의 기록을 참고하면 현도군의 '菟'자는 한나라 당시에 쓰이던 후기 상고한어 기준 '도(*dˤa)'보다 '토(*tʰˤas)'로 발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 물론 당시 발음을 현대 한국 한자음으로 변환하자면 그렇다는 것이고, 《자치통감》 주석에서 현도군의 '菟'를 "동(同)과 도(都)의 반절"이나 "도(塗)와 같은 음"으로 읽으라고 적기도 한 만큼 현도군이라는 독음도 그 나름대로의 역사성이 있으므로 이제 와서 구태여 정정할 필요는 없다.[1]

2. 소속 현

관할 지역으로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 부조현이 있었다. 상은태현을 제외한 세 곳은 각각 고구려, 개마국, 옥저 및 부여 한나라 사이의 조공무역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부여의 왕이 죽으면, 한나라는 죽은 부여 왕의 시신에 쓸 옥갑을 현도군으로 보내 부여의 사절단이 받아가게 했다. 고구려는 현도군으로 와서 한나라의 의복을 받아갔다.
  • 고구려현(高句麗縣):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본래 훗날 고구려가 건국될 압록강 유역에 위치했으나, 기원전 75년 토착민 세력의 공격 이후 서북쪽으로 이동하여 현도군의 새로운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사기》의 고구려현 습격 기사에 따르면 고구려 서쪽의 양맥이라는 집단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와 마주보고 있었다.
  • 상은태현(上殷台縣)
  • 서개마현(西蓋馬縣): 이수라는 강이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적혀있는데 개마고원 일대에서 이러한 지형을 가진 곳은 장진군(광복 당시 기준)밖에 없다. 개마고원 서쪽이라는 입지와도 상통한다.
  • 부조현(夫租縣): 현토군이 기원전 107년 처음 설치되었을때 치소가 있었지만, 기원전 75년 고구려계 세력의 공격을 받아 현도군의 치소가 고구려현으로 이동했고, 부조현은 낙랑군 동부도위 소속으로 변했다. 이후 이곳에서 옥저가 독립했는데, 부조(夫租)와 옥저(沃沮)의 자형이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 두 지명의 연속성을 확인할 수 있다.

3. 시기에 따른 이동

3.1. 제1차 현도군

고조선이 멸망하고 기원전 108년에는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이 설치되었으며, 이듬해인 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기원전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이 폐지되었을 때 임둔군 치하의 현들이 현도군으로 편입되었다.

3.2. 제2차 현도군

기원전 75년, 고구려가 건국되던 지역의 원 고구려 세력으로 구성된 이맥(夷貊)[2]의 공격으로 현도군의 치소가 혼하(渾河) 상류의 흥경(興京) 일대로 옮겨졌다. 당시 오환족을 상대하고 있었던 한나라로서는 압록강 중·상류의 지배를 강화할 수 없었고, 이때를 노려 한나라의 압박 지배가 완화되자 토착민들이 공격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기존 치소였던 옥저는 낙랑군 동부도위로 편입되었다.

지금의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으로 군치를 옮긴 현도군은 현도성을 수축하는 등 압록강 중·상류의 이맥 세력을 경계했다.

3.3. 제3차 현도군

서기 1세기 말, 후한은 갖가지 자연 재해와 특히 티베트계 민족의 공격을 받았다. 성장하고 있었던 고구려는 제2현도군과 요동군을 줄기차게 공격했다.

결국 현도군은 내지 쪽인 무순(撫順) 지방으로 옮겼고, 이때 원래 있던 고구려현, 상은태현, 서개마현에 더불어 본래 요동군의 현이던 고현(高顯)현·후성(侯城)현·요양(遼陽)현 3현이 더해져 6현이 되었다. 이 때 더해진 3개 현 중 요양현은 양맥과의 외교를 위해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 말에 동연의 지배를 받다가 조위, 서진을 거쳐 315년 2월에는 고구려 제15대 미천왕의 침공을 받았다.

3.4. 제4차 현도군

고구려 제18대 고국양왕에게 털린 이후 요서 대릉하로 다시 이치하여 명색만 군현인 채로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후연을 거치다가 404년 제19대 광개토대왕이 후연을 공략하던 즈음 그 교두보로써 편입된 듯 싶다. 멸망.

4. 위치 논란

  • 옥저(함경도)
    정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동옥저' 편에 있는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는 문장에 착안함.
  • 고구려(압록강 중상류)
    한서》 〈지리지〉와 《수경주》에 보이는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이 근거이다. 고구려는 지금의 졸본 - 집안 일대에, 개마국은 함경북도 개마 고원으로 비정되므로 그들의 원류인 고구려현과 서개마현은 압록강 중상류일 것이다.
  • 옥저+고구려
    청나라 말, 양수경의 《회명헌고(晦明軒稿)》 중에 수록한 《왕사탁한지석지박의(汪士鐸漢地釋地駁議)》에서 주장됨. 일본의 사학자 와다 키요시(和田淸) 또한 이 주장에 동의했다. 이병도는 기원전 128년에 설치되었던 창해군의 강역 또한 1차 현도군과 같았다고 주장했다. 창해군은 예군 남려의 귀부로 설치된 곳으로, 예군의 "예"를 옥저로 본 것이다.

어찌 되었든 통구평야(通溝平野) 일대의 한대 토성지(土城址)들을 현도군이나 속현의 치소로 추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현도군”과 “고구려”를 분리해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한나라의 “내속”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오는 경향이다. 물론 한나라에 현도군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고구려가 고구려현의 지배를 받은 것도 아니며, 고구려현의 정체는 현대식으로 볼 경우 주고구려 한나라 대사관 개념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후술하듯 이러한 점을 악용하여 동북공정으로 왜곡할 여지가 있다는 부분 역시 유의해야 한다.

5. 중국의 동북공정

최근 꾸준히 중국 측에서 고구려현도군에서 건국되고 확장되었기 때문에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를 볼 때 세월이 지나 나중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몰아내고 그 세력권을 전부 복속시킨다. 고구려가 건국되고 성장한 지역이 과거 현도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명백히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6. 기타

파일:goguryeo_seong.jpg
고구려 지도와 현도성의 위치
고구려는 제3차 현도군을 축출한 이후 오늘날의 푸순시 지역에 현도성(玄菟城)을 설치했다. 고구려-당 전쟁이 한창이던 645년 4월 1일에는 당군이 현도성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며, 665년에는 연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투쟁 당시 근거지로 삼기도 했다.
維咸享元年歲次庚午秋八月一日辛丑,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太祖中牟王, 積德北山, 立功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함형 원년 경오(670년)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太祖 中牟王)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를 덮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遠祖興武大王,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符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 ▨▨終平二敵, 永安兎郡之人, 克奉三朝, 遐撫辰韓之俗.
먼 조상인 흥무대왕(興武大王)은 오산(鼇山)의 정기를 받고 접수(鰈水)의 정기를 타고 났다. 문부(文符)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武略)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 ... 마침내 원수를 완전히 평정하여 토군(兎郡)의 사람들을 길이 편안하게 하였고, 세 임금[3]을 잘 받들어 진한(辰韓)의 풍속을 크게 위로하였다.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문〉
고구려 멸망 이후에는 '현도군' 또는 이를 축약한 '토군'이 삼국을 가리키는 관용어로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한사군 중 하나라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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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슷한 사례로는 고구려의 국명이 있다. '려(麗/驪)'자를 '리'라고 읽으라는 당대와 가까운 시기의 기록이 있긴 하지만, '고구려'라는 독음 역시 적어도 조선 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기에 '고구리'만을 올바른 표현이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2] 우리가 아는 추모의 고구려가 나타나기 이전 고구려계 맥족 집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학계에서는 이때쯤 고구려계 맥족이 '고구려'라는 정치체를 구성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3] 진덕여왕, 태종 무열왕, 문무왕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