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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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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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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tv03.search.naver.net/201402031114318631.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아명 정경업(鄭經業)
자 / 호 경시(京施) / 위당(爲堂)
본관 동래 정씨[1]
출생 1893년 5월 6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계 종현동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
사망 1950년 11월 말 (향년 57세)
북한
묘소 재북인사릉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213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
2.1. 해방 이전2.2. 해방 이후
3. 기타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의 한학자, 역사학자, 교육자.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해방 이전

헌종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이며, 1893년 5월 6일 한성부 남부 명례방 종현계 종현동(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2가)에서 정3품 이조참의를 지낸 아버지 정은조(鄭誾朝)와 어머니 달성 서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나, 후손이 없던 큰아버지 정묵조(鄭默朝)에 입양되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 수창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수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도 일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때 정인보의 스승이 된 사람이 이건방인데, 그의 집안은 양명학을 대대로 연구한 가문이었다. 그로부터 정인보는 한학뿐 아니라 양명학적 사상까지 함께 받아들인다.[2] 1910년 한일합방독립운동을 하러 중국 상하이한반도를 오가다가 상하이에서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김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여 교포에 대한 계몽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부인이 산후병으로 사망하자 귀국하여 국내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경성부 연희전문학교 등에서 한학, 역사학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 안재홍[3] 등과 '조선학운동'을 전개하는데 식민사학에 맞서 조선 내에도 근대적인 흐름이 있었음을 증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민족사학운동 중에 일본광개토대왕릉비 왜곡에 대해 반박을 하기도 했다. 그는 실학사상에서 근대적인 사고를 발견하려 했는데, 1935년 정약용 사후 100주년을 맞아 펴낸 <여유당전서>는 그 성과였다. 1935~1936년 동안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오천년간 조선의 얼"을 연재했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 국사학, 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쳐 강의를 하였으며, 이때 발음의 유사성을 들어 숙신이 고조선의 일부라는 학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 국학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족들과 전라북도 익산군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2.2. 해방 이후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국학 공부를 계속하였으며, 1946년 국학대학이 설립되자 학장에 취임한다.[4]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감찰위원장(오늘날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으나, 초대 상공부장관인 임영신이 선거 중 저지른 비리를 적발해 파면을 요구하였다가 도리어 경질되었다. 1950년 6.25 전쟁서울에 고립되었다. 당시엔 등창으로 투병중이었는데 인민군 3명이 자택으로 찾아와 현재의 롯데백화점 본점 주차장 부지인 국립중앙도서관 지하실로 연행했다고 한다. 연행 직후인 그 해 7월 경 납북되었다.[5]

납북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한동안 밝혀지지 않다가, 1991년 10월 1일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6]의 구술기록이 공개되었는데 이때 밝혀진 바에 의하면, 1950년 8월 중순 서울을 출발한 그는 당초 평양에 수용되었다가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 직전 적유령산맥을 넘다 대열에서 낙오되었고, 아사 직전에 가까스로 구출되었다. 그 뒤 뒤늦게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그 해 11월 말 경에 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북한 내에 조성된 재북인사릉의 묘비에는 그가 1950년 9월 7일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폭사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이는 납북자들의 죽음을 미국 탓으로 돌리려 북한 측에서 조작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므로 앞선 기록이 좀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그리고 1991년 11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3. 기타

  • 저서로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으며 주로 조선의 얼을 강조했다.
  • 슬하에 4남 4녀를 두었는데 장남 정연모(鄭淵謨), 차남 정상모(鄭尙謨), 3남 정흥모(鄭興謨), 4남 정양모(鄭良謨)[7], 장녀 정정완(鄭貞婉)[8], 차녀 정경완(鄭庚婉)[9], 3녀 정양완(鄭良婉)[10], 4녀 정평완(鄭平婉) 등이다.
  • 1966년 영화 《남북천리》에서 배우 최삼이 연기했다.


[1] 문익공파 29세 인(寅) 항렬.[2] 이는 1933년 <양명학연론>이라는 저서를 저술하는 것으로 이어졌다.[3] 6.25 전쟁 중 정인보와 함께 납북된다.[4] 국학대학은 1966년 우석대학교와 합병되며, 우석대학교는 1971년 고려대학교에 인수된다.[5] 그의 납북에 연희전문학교 시절 친구였던 사학자 백남운이 관계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정인보는 순종이 죽자 그의 묘지문을 쓸 정도로 알아주는 한학자였던 덕분에 백남운이 고서를 읽고 해석하는데, 정인보의 덕을 많이 보았다. 전쟁이 터지자 친구의 신변 보호 겸 번역 노예로 쓰기 위해 납북에 관여했다는 얘기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저 당시 지식인 계층들은 한문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본적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고서를 읽고 해독하는 것은 별개였고(현대 학생들이 정철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성산별곡을 따로 주석과 사전을 동원해 해석해야하듯이) 그 시대에 통용되는 표현과 시대배경, 문법 순서 등을 두루 꿰차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환단고기나 화랑세기, 격암유록 등 위서들 역시 한자로 써있지만 근대에 쓰던 표현이 있고 우리 말을 한자로 옮긴 수준 밖에 안되었기에 금세 위서임을 알 수 있었다.[6] 필명 신경완(申敬完).[7] 정양모는 국립경주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냈다. 호는 소불. 유홍준 교수의 스승이기도 했다.[8] 정정완은 침선장(전통 바느질 기법) 무형문화재였으며, 1986년 2월 6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에서 자세한 생애를 확인할 수 있다.#[9] 정경완은 홍명희의 아들인 홍기무와 결혼했으며 남북협상 때 시아버지인 홍명희와 함께 평양으로 갔다가 북한에 정착했다.[10] 정양완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문학 교수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문집을 한글로 번역했다. 정양완의 남편은 국어학자인 강신항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성추행으로 문제를 일으킨 강석진서울대학교 교수가 큰아들이다.[11] 한편 국경일은 아니지만 국조일인 현충일을 기리는 현충일 노래조지훈 시인이 지었다.[12] 최현배도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사를 하다가 연세대학교로 승격된 후 교수, 문과대학장을 거쳐 부총장까지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