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6 12:07:36

유이(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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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C283F><colcolor=#fff> 하간왕(河間王)
劉易 | 유이
시호 없음
작위 하간왕(河間王)
(劉)
(易)
불명
생몰 ? ~ 316년 3월
출신 병주(幷州) 신흥군(新興郡)
부황 열종 소무황제(烈宗 昭武帝)
형제자매 20남 중 장남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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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조의 황족. 소무제 유총의 서장자. 가끔 "유역"으로 음차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이"가 옳은 발음이다.[1]

2. 생애

광흥 원년(310년) 7월, 초왕 유총이 황제로 즉위하자 자신의 아들들을 왕작에 봉했는데, 이때 서장자인 유이도 하간왕(河間王)에 책봉되었다.

가평 2년(312년) 6월, 소무제 유총이 유이를 거기대장군, 팽성왕 유익을 위장군으로 삼아, 함께 황궁의 금군을 통솔케 하고 궁중에서 숙영하도록 하였다. 또, 고평왕 유괴(劉悝)를 정남장군에 임명해 과거 도읍이었던 이석(離石)에 주둔시켰고, 제남왕 유기(劉驥)를 정서장군에 임명해 도읍 평양 근교에 서평성(西平城)을 축성케 하였으며, 위왕 유조(劉操)를 정동장군에 임명해 평양 북서쪽에 위치한 포자(蒲子)를 진수케 하였다. 이로써 유총은 황자들에게 각기 군권을 쥐어주어 권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가평 3년(313년) 3월, 정위 진원달이 소무제 유총에게 세 번째 황후인 유아(劉娥)를 위해 황의전(鷬儀殿)을 축조하는 것에 대해 간언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태재를 지내고 있던 유이는 대사도 임의(任顗), 광록대부 주기(朱紀), 태위 범륭 등과 더불어 소무제 유총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다행히 유아가 친필로 진원달을 용서해달라는 탄원서를 써줌으로써 소무제 유총이 진정하였고, 덕분에 진원달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가평 3년(313년) 7월, 서진의 병주(幷州)자사 유곤이 쳐들어와 남곡(藍谷)을 점령하고 감군 한거(韓據)에게 서평성(西平城) 공격을 명했으며, 대공 탁발의로도 탁발보근을 보내 북굴(北屈)에 주둔하여 유곤을 원조하였다. 이에 소무제 유총은 대장군 유찬을 파견해 남곡의 유곤을 치게 하고, 유이에게 표기대장군을 더해 여러 장수들과 함께 탁발보근을 막게 하였으며, 탕진장군 난양(蘭揚) 등은 서평성으로 보내 수비를 돕게 하였다. 유곤이 한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에 곧바로 군대를 거두어 철수하니, 소무제 유총은 여러 군대들에게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라는 명령을 하달하고 병주 공략의 계책을 생각해내게 하였다.

건원 2년(316년) 2월, 소무제 유총의 총애를 받는 환관 왕침(王沈)이 자신을 무시하는 조정의 대신들을 모함하였다. 유총이 왕침의 말만 믿고 그들을 모두 붙잡아 참수하자, 유이는 어사대부 진원달, 대장군·발해왕 유부, 금자광록대부 왕연과 대궐로 나와 표문을 올려 간하였다.
"신(臣)이 듣기로는, 선한 사람은 하늘과 땅의 규율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과거 문왕주나라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이고, 환제영제는 환관들의 말만 듣다가 한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자고로 명왕(明王)의 시대라 할지라도 환관이 정사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제, 순제, 안제의 고사만 보아도 족히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침 등은 상백(常伯)의 지위에 있으면서 대신들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어, 궁 밖으로 세를 떨쳐 사사로운 감정으로 정사에 임하고, 폐하께 빌붙어 아첨함으로써 조정과 임금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또, 형벌을 제멋대로 내리고 뇌물이 아니면 관리의 천거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라의 왕공(王公)들도 이들을 보면 깜짝 놀라며, 대신과 재상들은 마차에서 내려 예를 표합니다. 이는 폐하께 절개를 지키던 상서 왕염(王琰) 등의 충직한 신하들이 그 간사한 것들에 의해 극형에 처해져 죽은 것만 봐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서너 차례 더 살피지 않으시고 외람되게 그들을 주육하셨으니, 신들은 그 원한과 고통이 구천에 사무치고 천하가 비통해할까 두렵습니다. 왕침 등은 모두 칼과 톱을 휘두르는 배은망덕한 무리로, 그들을 향한 총애가 어찌 선비와 군자에게 베푸는 은혜보다 더 많은 보답이 나오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들을 가까이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귀중한 임무를 맡기십니까? 과거 제환공역아로 문란해졌고, 효회황제황호로 멸망하였는데, 이는 모두 먼 과거의 일만이 아닙니다. 지금 장안의 진(晉)은 아직 멸망하지 않았고, 파촉의 이웅성(成)을 세웠으며, 석륵과 조억(曹嶷)은 자립할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시국이 이와 같을진대, 왕침과 같은 자를 요직에 앉힌다면 그 누가 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부디 왕침 등을 면직시키고 그들을 정죄(定罪)토록 하소서."
유총은 유이의 상소문을 받아서 왕침 등에게 보이며 말했다.
"내 아들이 진원달에게 이끌려 결국 바보가 되었구려."
왕침 등은 유총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 흘리며 말했다.
"신을 비롯한 소인들은 무지몽매함에도 폐하께서 발탁해주신 덕에 궁각(宮閣)의 청소라도 할 수 있었으나, 왕공과 조정의 신하들이 저희를 원수 보듯이 미워하고 또, 폐하를 심히 원망하나이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대조(大造)의 은혜를 거두시고, 신들의 고깃덩어리를 가마솥에 넣어 황조(皇朝) 위아래의 화목함을 도모하소서."
그러자 유총은
"저들이 미친 소리를 계속 늘어놓을 뿐인데, 내 어찌 경들을 원망하겠나!"
라 탄식하였다. 그때 곁에 있던 차남 유찬이 왕침의 충정을 칭찬하니, 유총은 크게 흡족해하며 이를 이유로 왕침 등을 모두 열후(列侯)에 봉했다. 그 소식을 들은 유이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왕침을 열후에 봉한 것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문 쓰고 다시 대궐로 나와 유총에게 간곡히 간하였다. 그러나 유총은 몹시 분노하여 유이의 손에서 상소문을 낚아채 보란 듯이 손수 찢어 버렸다.

건원 2년(316년) 3월, 유이는 아버지의 행실에 분노와 원한이 사무친 나머지 분사하였다. 그동안 유이의 상소문을 도왔던 진원달은 그의 사망에 절망하여 더이상 직언할 생각을 포기하고 자택으로 돌아가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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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초에 "易"자가 이름으로 쓰일 때는 "바꿀 역"보다 경사스럽다는 뜻도 내포하는 "쉬울 이"의 의미로 훨씬 자주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