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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와라 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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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shiwara_circa_1872.jpg

요시와라 유곽의 전경 (1872년에 찍힌 사진)

1. 개요2. 역사3. 구조4. 용어
4.1. 문서가 있는 용어4.2. 문서가 없는 용어
5. 실상6. 미디어 매체
6.1. 만화, 애니메이션6.2. 게임6.3. 영화6.4. 소설6.5. 기타
7. 여담8. 관련 문서9. 외부 링크 및 참조

1. 개요

[ruby(吉原遊廓, ruby=よしわらゆうかく)]

통칭 요시와라일본에서 에도 시대에 생겨난 거대한 유곽촌(집창촌)을 일컫는 말이다. 교토의 시마바라 유곽(島原遊郭), 오사카의 신마치 유곽(新町遊郭)과 함께 3대 유곽으로 꼽혔으며 그 중에서 제일 유명한 유곽촌이었다. 요시와라는 18세기에 약 1,750명의 여성이 살았던 곳으로 일본 전역에서 한 번에 약 3,000명의 여성이 살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였다. # 심지어 1893년에는 요시와라에 무려 9,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다.[1]

원래는 니혼바시[2] 근처였으나 에도 말기에는 니혼츠미[3]으로 옮겼으며 지금도 근처에는 고급 사창가가 존재한다. 가까운 전철역은 이리야역이다.

이 때문에 현 다이토구 센조쿠3초메(와 4초메 일부분)는 지명에는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지만 아직도 그냥 '요시와라'라고 하면 여기를 가리키는 말로 통한다. 별로 이미지가 좋은 지명이 아니었으므로 공식 지명에서는 없애버렸는데 사람들의 인식이 남아 관습적으로 계속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한국에도 부산완월동이 비슷한 케이스로 사창가 이미지가 너무 뿌리박혀서 지금은 충무동의 일부로 합쳐버렸으며, 서울 미아리의 경우도 동네를 가리킬 때에는 '리'자를 빼고 '미아동', '미아사거리역' 등으로 부른다. '미사리'나 '청량리'가 그대로 관습적으로 불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요시와라는 '갈대밭'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실제 요시와라 유곽 터가 설립된 장소가 갈대 천지였기에 붙여진 것이다. 요시와라를 다룬 작품에서 나이가 많거나 성병에 걸려 요시와라에서 쫓겨난 유녀들은 갈대밭이 우거진 강가의 나룻배에서 살며 몸을 판다는 묘사가 많이 나온다.

요시와라는 뒷골목에 위치한 음습한 이미지를 가진 일반적인 집창촌과 달리, 거대한 번화가로서 유곽 외에도 각종 찻집과 음식점(고급 소바초밥 가게 등)부터 우키요에 가게, 기모노 가게, 가부키 극장 등이 즐비했다. 전성기 때는 요시와라에서 만들어진 헤어스타일과 패션이 일반 아녀자들에게도 전해져 유행을 타거나 정계, 재계 등 상류층의 사교 장소로, 요시와라에 놀러가는 것이 일종의 흥이었고 그런 문화를 즐기는 것이 당시 상류층의 멋이요 기본 소양이었다.

이 때문에 오이란뿐만 아니라 일반 유녀들도 최소한의 교양은 배울 필요가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단돈에 팔리는 싸구려 창부는 키리미세라(切見世)는 하급 가게에 소속된 유녀(가시죠로)였고, 최하층은 요타카(夜鷹)라 불리는 가게 및 요시와라 거리에서조차 장사를 못하던 신조조차 못될 나이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 등으로 유곽에서 쫓겨난 길거리 창부였다.

2. 역사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90년 8월 30일 에도로 입경하고 1603년에 정이대장군으로 임명되면서 에도 막부를 창설, 당시 촌구석에 불과했던 에도를 재건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목 공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때문에 공사를 하러 온 남성 인부를 상대로 한 윤락업소가 에도 근처에 설립되고 그 수가 증가하게 되었는데, 허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업소들이 늘어났다. 막부에서는 이미지 관리 차원 하에 유곽 이전을 종용하기도 했으나,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막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때 교토에서 유곽을 운영하던 쇼지 진에몬이 유곽 경영인의 대표로 나서서 "유곽을 한 곳에 모아 운영해달라"는 청원을 냈고, 막부도 이를 받아들여(1617년) 니혼바시 근처에 터를 세우게 되었다.

이렇게 요시와라 유곽이 1618년 11월에 설립되었다. 갈수록 규모가 커졌기에 막부는 "요시와라를 에도 외곽으로 옮기라"고 명령했고, 1657년 3월 2일 메이레키 대화재가 일어나면서 구 요시와라는 전소, 결국 니혼츠제(현재의 니혼츠미)로 장소를 이전하게 되었는데 이곳이 신 요시와라였다.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요시와라는 신 요시와라로, 에도 시대 말기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에는 오이란의 인기가 시들고, 당시에 유녀와 오이란의 뒤에서 연주만 했던 게이샤가 인기를 끌면서, 정계와 재계의 중심지도 요시와라 유곽이 아닌 게이샤의 마을인 하나마치(꽃마을)로 옮겨갔다. 요시와라 유곽은 침체기를 맞이해 한물 간 것으로 취급되었고, 1872년에 마리아 루스 호 사건의 영향으로 유녀 해방령이 내려지면서[4] 요시와라는 일반적인 사창가로 전락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 중에는 도쿄 대공습에 휘말렸는데, 도쿄 대공습 당시 요시와라에는 매춘부들이 도망가는 걸 막고 외부에 화재가 발생해도 막을 수 있도록 방화벽 역할을 겸한 큰 철문들이 달려있었지만 도쿄 대공습의 경우 일반적인 화재가 아니라 200대 이상의 폭격기에서 쏟아부은 네이팜탄이 초속 28m에 달하는 화염선풍을 일으키는 도시 단위의 재난에 가까웠기에 철문 따위로는 막을 수도 없었고 되려 탈출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한 탓에 결국 손님들과 접대부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안에서 전부 타죽은 일도 있었다.

이렇게 요시와라는 근근히 존재를 유지하다 1956년 5월 31일 성매매 방지법이 통과되어 1957년 4월 1일에 법이 시행되며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요시와라의 터는 소프랜드 같은 변종 성매매 업소들이 즐비한 현대적인 사창가가 되었다.

3. 구조

파일:1846_Yoshiwara_map.jpg

요시와라 유곽 내부 지도 (1846년 기록)

지도에 나온 것처럼 북쪽 정문(그림에서는 오른쪽에 위치)을 중심으로 구획이 십(十)자로 나뉜 계획도시였다. 대문과 이어지는 중앙의 거리가 나카노쵸라 불린 번화가로 오이란을 소개해주는 찻집인 하카테차야와 오이란을 불러 연회를 열 수 있는 토로, 오이란이 있는 고급 가게(오오미세)는 나카노쵸에 몰려있었고 오이란도츄(오이란 행렬)도 나카노쵸에서 했었다.

한편 골목길에는 하리미세가 있었는데, 흔히 유곽 매체에서 묘사하듯이 격자창을 달고 그 안에 코우시급의 상급 내지 중하급 유녀들이 앉아서 손님을 끌어모았다. 오이란을 살 수 없는 중하급 손님들은 이런 하리미세로 갔으며, 키리미세 같은 싸구려 가게는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4. 용어

4.1. 문서가 있는 용어

  • 오이란(花魁)
    최상급·고급 유녀를 부르는 별칭. 모든 유녀들을 총괄하는 위치이자 교토의 유곽에서는 타유(太夫)가 대응되었다. 오이란을 포함한 유녀들의 세부 계급과 생활상 같은 자세한 내용은 오이란 문서를 참고.
  • 쿠루와코토바(廓詞, 廓言葉)
    유녀들이 주로 썼던 특이한 어휘, 오이란코토바, 아린스코토바, 사토코토바로 불렸다.

4.2. 문서가 없는 용어

  • 나지미(馴染み)
    오이란의 단골 손님. 다른 말로는 남편을 뜻하는 단나(旦那). 그러나 나지미와 단나의 사용례는 기록마다 다른데, '단나'만 오이란의 단골을 뜻하는 말이었고 '나지미'는 모든 유녀의 단골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이란의 나지미가 되면 부부의 연을 맺은 것으로 간주되어, 다른 유곽의 오이란과 유녀를 살 수 없었다.
  • 미아가리(身上がり, 身揚がり)
    유녀가 자의로 일을 쉬는 것. 그러나 이에 따른 손해 비용은 유녀의 사비에서 지출되었다. 주로 연인을 둔 유녀들이 많이 한 행위.
  • 미우케(身請け)
    돈이 많은 손님이 유녀가 진 빚을 대신 갚아주되 , 혹은 정실 아내로 삼아 유곽에서 빼내는 행위. 다른 말로는 낙적이라 했다. 미우케 비용은 일반 화대 비용보다 배로 비쌌고, 특히 오이란은 화대 비용이 그만큼 비싸 미우케 비용도 엄청 높았기에, 미우케가 되어 낙적된 유녀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었다.

    어두운 면의 문단에서 후술하듯, 유녀들이 안전하게 유곽을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 요타카(夜鷹)
    거리에서 매춘하는 노숙 창부의 은어. 중세 일본 성매매계에서 가장 아래에 있던 존재로, '츠지기미(辻君)'라고도 불렸다. 쏙독새의 일본어에서 따왔으며, 토메소데 신조조차 못될 늦은 나이에 매춘에 뛰어들거나, 성병이나 손님이 줄어들어 유곽에서 장사할 수 없게 되어 쫓겨난 전직 유녀들이 대부분이였다.

    주로 멍석(돗자리)를 들고 길거리 아무데나 누워서 손님을 받았으며 마을에서도 쫓겨난다면 강가나 숲속에서 뗏목이나 오두막 하나 짓고 매춘을 했었다. 우키요에에서 멍석을 든 여인이 그려진 그림들은 전부 요타카를 묘사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40대 중년은 물론이고 70대 노년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요타카는 노숙자 신세라 야쿠자에게 의탁하는 경우도 많아서, 그나마 유곽이라는 거처라도 있던 일반 유녀보다 더 위험했다.
  • 요시와라의 계율 (요시와라노 오키테, 吉原の掟)
    이름 그대로 요시와라에서 어기면 안 되는 규정이자, 어길 시에는 처형을 당했다. 보통 남성은 즉시 사형이었고, 여성(유녀)는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을 정도의 매질만 했지만 죄가 심각하다 싶으면 처형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 마쿠라아라시(枕荒らし)
      직역하면 "베개분란"인데, 유녀가 손님이 잠든 틈을 타 지갑에 손을 대는 도둑질에 대한 은어이다.
    • 신쥬(心中)
      연인 간의 동반자살. 주로 유녀가 연인이나 나지미와 같이 자살하는 행위를 말한다. 실제로 에도 막부에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가부키극인 소네자키 신주가 대박나면서 이를 따라하는 연인들이 늘어나자, 신주를 시도하는 이들에게 엄히 다스렸다. 유곽이 아니더라도 신주를 하다가 한쪽만 살아남았을 경우, 살아남은 이에게 엄격한 처벌을 내렸다.자살하면 죽여버리겠어!
    • 아시누케(足抜け)
      야반도주. 즉 빚을 다 갚지 않고 유곽에서 탈출하는 행위이다. 어두운 면의 문단에 후술하듯 일반적으로 빚을 갚아서 나간다는 건 불가능했고, 미우케도 극소수만이 가능했기에 야반도주를 시도하는 움직임은 많았다.
    • 아헨키츠비키(阿片喫引)
      말그대로 아편(마약)을 사용하는 것.
    • 카쿠나이노밋츠(廓内の密通)
      유녀가 손님이 아닌 유곽의 종업원과 밀회를 가지거나 사랑에 빠지는 것.
    • 키쇼우분란파츠(起請文乱発)
      번역하면 "기청문 남발"로 연애편지를 남발해 노골적인 호객 행위를 하는 것이다.

5. 실상

파일:요시와라유곽.jpg
태어나서는 고계(고통스러운 세계), 죽어서는 조칸지
生まれては苦界、死しては浄閑寺[5]
조칸지의 공식 소개문
예기나 창기는 인간이지만 일신(一身)의 자유를 상실한 이들로, 소나 말 등의 가축과 같다. 소나 말에게 자신의 몸값을 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무상으로 해방한다.
산조 사네토미 태정대신[6]이 직접 발표한 정식 포고문 일어 위키피디아, 일본 백과사전 : 창기 해방령 문서

당대에는 인권 개념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요시와라 유곽은 에도 시대를 상징하는 문화이기도 했으나 집창촌이라는 특성상 성매매의 부정적인 면모를 대표로 한 어두운 면도 매우 많았다. 하단에 서술된 요시와라 유곽을 다룬 대중매체에서도 어두운 면은 빠지지 않고 다룬다.

일본동아시아 3국 중 성적으로 좀 더 개방적이었고 에도 막부에 와서야 유교를 도입했다보니 중국, 조선보다 유교의 영향력이 낮았다. 그러나 풍기문란 수준으로 개방적이진 않았고 당대 동서양 사회상이 그러했듯 여성의 정조관념에 대해서는 남성과 다른 엄격한 이중잣대가 존재했다.

또한 당대의 피임 기술과 성병 치료 의술은 존재하지 않았거나 없는 것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때문에 사회적 매장을 각오하고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하겠다는 여성은 없었으며, 유녀들의 사회적 인식은 좋지 못한 것을 넘어서서 인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비단 성엄숙주의를 내세운 기독교·유교 문화권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매춘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전 세계적으로 좋지 못했다. 종교 영향력이 낮아 성적으로 개방적인 곳도 보수적인 곳보다 그나마 나았다는 거지, 인간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했다.[7]

그래서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 공급은 전부 인신매매로 이루어졌다. 아동인권 개념도 없었던 시대인 만큼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었기에, 가난해서 집안의 입을 줄여야 한다거나 빚이 많다는 이유로 10살도 안 되거나 성인식도 안 치른 어린 딸을 업자에게 팔아넘기고,[8] 업자는 각 유곽에 파는 식으로 유녀들을 외부에서 충당했다. 심지어 부모가 계약을 맺었다면 더 많은 선지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출처]

또한 임신한 유녀가 아이를 출산할 시에는 그 아이들도 유곽의 소유물이 되었기에, 남자아이면 유곽 종업원(기둥서방)으로, 여자아이는 유녀로 키우는 식으로 인력을 충당했다.

이렇게 유녀들은 전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유녀가 되었고, 일정한 고용기간 내에 가족의 빚을 갚는다는 목적으로 일을 했다. 빚을 갚으면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유녀로 장사를 시작한 뒤의 비용은 유곽에서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식비부터 해서 치장비용, 방세, 일을 쉴 시 발생하는 손해 비용 전부 유녀 자신의 수입과 사비에서 지출해야 했다. 유곽 주인에게 뜯기는 마진세도 매우 많았다.

그리고 중급 이상은 휘하 후배 유녀(카무로, 신조)를 필수적으로 둬야 했는데, 카무로와 신조의 의식주나 교육비용도 유녀의 수입으로 해결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유녀들은 개인 재산 축적은커녕 스스로 빚을 갚아 나간 경우조차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이란들은 다를까 싶지만 버는 돈이 많은 만큼 지출 비용 대부분 소속된 유곽 전체에서 빠져나갔기에, 오이란도 제발로 나가기는 불가능했다. 또한 유녀들은 야반도주를 막기 위해 유곽 주인의 허가가 없으면 요시와라 밖을 나갈 수도 없었고, 유녀가 바깥 사람인 척 위장해서 요시와라를 나가는 것도 막기 위해 일반 아녀자들도 요시와라 내부에 들어갈 수 없었다.[10]

특히 매춘 문제의 0순위라 볼 수 있는 성병 감염은 취약한 것을 넘어서서 창궐했는데, 만일 유녀가 성병에 걸린게 발각되면 유곽에서 쫓겨났는데, 오갈 곳이 없으니 돗자리를 들고 거리에서 매춘하거나 거리에서조차 매춘을 못하면 아예 도시 밖으로 나가 뗏목 같은 것을 띄우고 강가에서 매춘을 하는 요타카(夜鷹)로 전락해,[11] 죽는 게 나은 최악의 삶을 살았다. 일반 유녀만이 아닌 코우시같은 상급이나 오이란일지라도 얼마든지 요타카로 추락할 수 있었다.

병이나 사고로 돌연사해 죽은 유녀나 요타카도 있었으나, 요시와라의 계명을 어겨 처형당하거나 처벌목적으로 구타당하다 죽기도 했다. 죽은 유녀는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売女」[12]라고 적은 뒤 대충 멍석에 말아 강가나 근처에 버리거나 매장하는 식으로 방치했다. 참고로 장례를 치르지 않고 길가나 절 앞에 버리는 것은 '인간으로 취급하면 뒤탈이 나기 때문에 축생도에 버린다'는 의미인데, 유녀들을 인간이 아닌 축생 취급을 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죽어 버려지는 것은 일반 유녀만 아니라 중상급 유녀와 오이란도 해당되었다. 아무리 인권개념이 희박한 시대였다지만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유녀들은 유곽 측에서도 중요한 상품이었기에, 요시와라 계율을 심각하게 어긴 것이 아니라면 어지간하면 죽이지는 않았고 구타만 한 뒤 유곽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얼굴이나 몸에 흉터가 생기면 계급이 떨어지거나 일하는 데에 지장이 생겼고, 최악에는 요시와라에서 쫓겨나 요타카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즉 죽어도 죽지 못해도 노예 신세였던 것이다.

신 요시와라 근처에 세워진 조칸지(浄閑寺)라는 절은 '유녀들의 나게코미데라(投げ込み寺, 投込寺)'[13]라는 별명이 붙여진 만큼, 보통 요시와라에서 유녀들이 죽으면 조칸지 앞에다가 내다 버렸다. 조칸지의 승려들은 유녀들의 시신을 화장해주고 명복을 빌어주었다.

조칸지는 지금도 있으며 공식 사이트도 운영한다. 절에 들어가보면 유녀들의 유골함을 볼 수 있는데 무려 2,000개가 넘는다. 조칸지만 아니라 유곽 근처의 절들은 전부 유녀 전용 나게코미데라를 겸했는데, 또 다른 유녀의 나게코미데라인 사이호지(西方寺)는 유명한 오이란이자 세습명으로 유지한 2대째 다카오 다유의 유골함이 모셔져 있다.

아무튼 상기 서술된 사정으로 인해 유녀들의 평균 수명은 약 23세. 보통 15살부터 정식 유녀가 되었는데, 아무리 평균수명이 짧은 시절이었다 쳐도 심각한 수준이며, 성병 감염으로 인한 병사나 규율을 어겨 처형된 것만 아니라 당시 화장품의 주 재료였던 수은 중독, 좁은 가게 내의 비위생적인 집단생활로 인한 면역 저하와 스트레스는 물론 낙태를 하겠다고 시술을 받다가 사망한 경우도 많았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1893년 요시와라에는 무려 9,000명이 넘는 여성들이 있었는데, 그중 많은 유녀들이 매독으로 고통받았다.[출처2][출처3]

정말 운좋게 20대 후반까지 살아남으면 빚을 다 갚았다는 이유로 낙적될 수는 있었다. 실상은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내쫓는 것에 가까웠지만. 그런데 어릴 때부터 매춘과 가무만 배웠으니 달리 할 일이 없고, 유녀 시절부터 각종 이유로 돈을 유곽에게 뜯겼으니 개인 재산도 없는 수준이고 제대로 된 결혼도 할 수 없으니 결국 반토신조가 되어 후배 유녀들을 양성하거나 오이란의 시중담당, 호객꾼, 뚜쟁이, 게이샤로 전직해 유곽에 계속 남는것을 택했다.

즉 한번 유곽에 팔려오거나 태어났다면 나이가 들거나 죽을 때까지 유곽에 묶여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착취당하고, 죽으면 멍석에 말려 나게코미데라 앞이나 길가에 버려져 이름없는 시체로 잊혀지는 것이다.

결국 유녀들의 유일한 구원이자 안전하게 유곽에서 나가는 방법은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는데 27세가 되기 전에 단골손님이 빚을 갚아주는 대신 첩이나 아내가 되어 유녀에서 낙적되는 것. 전문 용어로 미우케(身請け)가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미우케 비용은 화대비용보다 비쌌고 오이란은 배로 더 비쌌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자도 미우케를 하는 건 매우 힘들었다는 것.
"일본 정부는 인신매매와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 루스 호가 쿨리들과 맺은 계약을 인정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창녀의 인신매매는 무엇입니까? 그녀들은 어릴 때 돈으로 팔려서 가혹한 조건 아래 홍등가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일본인 창녀의 매매가 합법이라면, 페루인 선장의 행위도 합법적인 것이 되지 않습니까."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영국인 변호사 디킨스의 변론
설사 창녀 매매에 의해 예증될 만한 노예제가 일본에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노예를 국외에 내보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따라서 청나라인 노동자를 요코하마에서 국외로 이송하려 한 페루인 선장의 행위는 위법이다.
마리아 루스 호 사건 당시 특명재판장 오오에 타쿠(大江卓)의 판결

이 때문에 현대 자료에서는 요시와라 유곽은 최소한 싫으면 그만둘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보증되어 있고 개인 자산 축적도 가능한 인권이 보장된 현대적인 공창 제도가 아니라, 막부가 합법적으로 운영하고 문제점들을 묵인한 인신매매·짐승과 동급인 성노예 소굴이라고 보고 있으며 이는 메이지 시대일본 법원 또한 인정한 사실이었다.

참고- 요시와라에 대한 글.[16]

6. 미디어 매체

오이란과 함께 에도 시대와 에도 시대 말기, 메이지 시대 초기를 기점으로 중근세의 에도(현 도쿄)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에는 요시와라 유곽 그 자체나 요시와라 유곽에서 모티브를 따온 가공의 유곽은 반드시 등장한다고 보면 된다. 특히 유녀(오이란)이 중심이 되는 창작물에서는 주요무대.

요시와라 유곽의 비참한 실상이 널리 알려진 만큼 긍정적으로 묘사한 작품은 단 하나도 없으며 심의 및 연령 문제로 노골적인 어두운 면을 묘사하지 않은 작품들도 어느정도 지키는 선 한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6.1. 만화, 애니메이션

  • 귀멸의 칼날 - 도깨비가 사는 유곽(유곽 잠입)편의 주요 무대로 등장했다. (애니메이션은 2021년 12월 5일부터 방영.) 유곽 잠입편의 주요 적인 다키는 오이란과 유곽 문화의 어두운 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다만 유곽 문화의 고증은 잘되었지만 시대 고증은 잘못됐는데, 요시와라는 1870년대부터 하락세였고 다이쇼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름만 알고 아무도 안 가는 성매매 업소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요시와라라는 이름이 유곽의 대명사급이다 보니 굳이 다른 지명을 사용하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고증을 틀린 것으로 보인다.
  •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 - 시시오 마코토의 측근 코마가타 유미가 요시와라의 오이란이었다는 설정. 마리아 루스 호 사건에 분노해 메이지 정부를 부정했다. 프리퀄 외전인 이막편에서는 요시와라에 있던 시절의 이야기가 다루어진다.
  • 사쿠란 - 요시와라에 팔려온 소녀 키요하가 오이란이 되기까지의 내용을 다뤘다. 실사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원피스 - 와노쿠니편 한정. 요시와라 유곽 그 자체는 등장하지 않으나 코무라사키가 와노쿠니의 유일한 오이란에 쿄시로가 운영하는 유곽에 소속되어있다는 설정이 있으며 유곽의 존재가 종종 언급된다. 유곽의 어두운 면을 최대한 순화했다.
  • 염한 - 에도, 메이지, 다이쇼, 쇼와 시대의 특징들을 섞어 창작된 가공의 나라가 모티브라 요시와라 유곽 자체는 등장하지 않지만 유곽과 유녀, 오이란이 심심하면 나온다.
  • 은혼 - 요시와라 도원향으로 각색. 정확히는 천인과의 전쟁으로 지상의 요시와라는 전소되었지만 높으신 분들의 전용 사창가라는 특성에 주목한 각 지배층이 지하 방공호에 다시 만들었다는 식으로 각색되었다. 요시와라 도원향이 주요 무대가 되는 에피소드는 요시와라 염상편, 붉은거미편 (지라이아편, 츠쿠요편) 애염향편.
  • 오오쿠 - 남자들이 병으로 단명하는 바람에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 역할과 지위가 반전된 성반전 대체역사물로 이곳의 요시와라 유곽은 남성 창기들이 가는 곳으로 바뀌었다. 단 쾌락 목적보다는 남성 귀족을 얻지 못한 지위낮은 여성들이 씨를 얻기 위한 목적이 1순위.
  • 오이란 걸 - 순정만화. 화재로 부모를 잃어 요시와라에 팔려간 여주인공이 오이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만화이다. 총 5권 완결.
  • 요시와라 플라토닉 - 신의 물방울의 그림작가 오키모토 슈가 연재하는 만화로 미식이 취미인 무라사키 타유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요리물이다.
  • 타임슬립 닥터 JIN - 주요인물 중 하나인 노카제(나카타니 미키)가 요시와라의 오이란.
  • 청루 오페라 - 무가에서 자란 여식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과정에서 목숨만 건지고,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신분을 숨기고 유녀가 된다. 본격적인 유녀가 되기 전 견습과정에서 고리대금업자 댁의 아웃사이더 문제아 도련님과 알게 되고 죽은 아버지가 누명을 쓴 정황도 알게 되는데... 미성년자 대상(!) 순정만화이기 때문에 유곽의 어두운 면은 최대한 순화한 편이지만 마냥 가벼운 분위기는 아닌 작품.
  • MAO - 91~92화에 소개되며 지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내용을 읽어보면 이곳임을 알 수 있다. 렌지가 이곳 출신.

6.2. 게임

  • 남유곽 - 오토메 게임으로 오오쿠처럼 남녀역할이 반전된 게임이다. 그러나 요시와라 피안화와 달리 17세 이용가 게임이다.
  • 오이란루쥬 - 유곽 경영 시뮬레이션 에로게.
  • 요시와라 피안화 - 성인향 오토메 게임으로 여주인공이 오이란
  • 용과 같이 켄잔! & 용과 같이 유신! - 용과 같이 시리즈의 외전. 두 작품 다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기에 시리즈에 줄기차게 나오던 캬바쿠라와 캬바죠가 유곽과 유녀로 대체, 일단 매춘을 안한 캬바쿠라와 달리 유곽은 매춘이였기에 유녀와 동침하는 부분은 간접적인 연출로 대체했다.
  • 제5인격 - 추적자 중 한 명인 붉은 나비(미치코)는 요시와라의 게이샤였다. 때문에 오이란 내지는 매춘을 한 것으로 오해받는데 배경 추리를 보면 알다시피 왜곡된 게이샤가 아닌 오이란을 띄워주기 위해 뒤에서 공연하던 게이샤로 고증을 맞췄음을 알 수 있다.
  • Fate/Samurai Remnant - 본작의 성배전쟁인 영월 의식에 참여한 마스터 중 하나가 당대 요시와라에서 이름 높던 다유인 타카오 다유이다. 스토리 상으로는 화려한 겉면과 비참한 뒷면 모두를 조명하고 있으며, 타카오 다유가 영월 의식에 빌려 하는 소원은 요시와라 유녀들의 해방이다.

6.3. 영화

  • 적선지대 -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 수치의 거리라고도 불린다. 1956년 성매매 금지법 제정 당시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들을 다루고 있다. 에도시대나 메이지 초기가 아닌 비교적 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현 시점에서는 말기 요시와라 유곽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있는 편이다.
  • 요시와라 불타오르다 -1987년에 개봉한 영화로 원제는 요시와라염상(吉原炎上). 1908년 메이지 말기를 배경으로 했다.
  • 사쿠란 - 안노 모요코 원작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삼은 영화로 유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화소도중 - 해당 작품도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로, 국내에는 <벚꽃 물든 게이샤> 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 메트로폴리스(영화) - 작중 언급된다.
  • 요시와라의 요녀 이야기 - 1960년에 개봉된 영화. 얼굴에 심각한 반점이 나 결혼은커녕 여성들에게 기피받던 상인이 요시와라 유곽의 유녀에게 넘어가 파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6.4. 소설

  • 키 재보기 - 1895년 발표된 일본의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의 대표작. 당시 요시와라 유곽촌에 살던 청소년의 삶을 그렸다.
  • 에도시대 유곽의 누주로 환생했기 때문에, 유녀와 요시와라의 미래를 바꿀까 생각 - 소설가가 되자에서 연재된 소설로 라이트 노벨로 출간되었다.
  • 비타 섹슈얼리스 - 일본의 소설가 모리 오가이가 1906년 발표한 소설. 요시와라 유곽은 이 작품의 중요한 무대가 된다.

6.5. 기타

  • 요시와라 라멘토 - 요시와라 유곽에 팔려간 유녀의 비애를 주제로 삼은 노래.
  • 화강루 시리즈 - 보이즈 러브 드라마 CD 시리즈로 주인수(主人受) 캐릭터들은 화강루라는 유곽에 소속된 남창들이다.

7. 여담

  • 오사카의 토비타신치는 옛날 일본식 유곽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 오늘날 일본 최대의 유곽이라고 한다. 일본의 유곽 단속은 한국만큼 철저하지 않고 지역별로도 차이가 큰지 도쿄에선 거의 다 없어지고 소프랜드 같은 현대적 변종만 남았지만 오사카에선 법의 빈틈과 일본 지역경찰 매수를 통해 옛 모습을 비교적 더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일본에 남아있는 것 중 그나마 가장 크다는 것이지 토비타신치도 에도시대 전성기 요시와라에 비하면 훨씬 작다. 이 문서 위에 있는 지도와 토비타신치 문서의 지도를 비교해 봐도 그렇다.
  • 요시와라역은 동명의 철도명으로, 요시와라 유곽과 관계없는 곳이다. 이 요시와라역은 시즈오카현 후지시에 위치해있으며 요시와라 유곽에 해당되는 지역은 타이토 구 일부이다.
  • 우구이스다니역 문서는 과거 요시와라 유곽터가 있던 곳이라고 대한민국 인터넷 상에서 잘못 소개된 적이 있었다. 이는 우구이스다니역이 사창가가 즐비한 거리라는 오보가 퍼져서인데 우구이스다니역의 위치는 도쿄도 타이토구 네기시 1초메 4-1로 요시와라 유곽이 있었던 타이토구 센조구 3초메와 4초메 지역과 관련이 없다. 오히려 요시와라 유곽이 있던 자리는 우구이스다니역에서 1.8km 떨어진 미노와역과 가깝다. 이런 오해가 퍼진 것은 우구이스다니역 부근에 러브호텔이나 출장 마사지같은 변종 업소가 있기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제로 사창가가 있던 것도 맞다. 다만 그 기록이 6~70년대 문헌들이라 한국에서 시간개념을 생각하지 않고 현재도 있겠거니 하고 잘못 받아들인 것.
  • 다만 실제 물리적 위치와는 별개로 요시와라의 정신적인 후계지가 우구이스다니인 것은 맞다. 마리아 루스 호 사건 이후 요시와라가 없어진 후 일본의 근대화로 인해 우에노역이 도쿄의 관문 역할을 하며 지금의 신주쿠처럼 번성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도쿄로 일하러 건너오는 노동자들은 우에노 근처인 우구이스다니에서 많이 살았고 요시와라가 없어진 후 갈 곳 없고 배운 것이라고는 몸을 파는 것 뿐인 창녀들 또한 우구이스다니에 정착하며 우에노~우구이스다니 에리어에서 계속 몸을 팔았기 때문이다. 우구이스다니역이 아닌 미노와역 근처에 있다지만 우구이스다니에서 미노와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라 물리적 거리도 결국 거기서 거기다. 결국 우구이스다니가 요시와라의 계보를 잇는 것은 틀린 말까지는 아니다.
    또한 2010년대 초중반 엔화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을 때 대한민국 국적의 여성들의 주된 근거지 또한 우구이스다니역이었다. 이 시기에 원정 성매매가 어찌나 심했던지 일본 출입국 관리청은 한국 국적 여성들에게만 비자 심사를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기도 하였다.
    우에노~우구이스다니 상권을 그나마 유지시켜주던 한국인 원정 성매매 여성들조차 엔화가 떡락하며 사라지자 상권은 가부키쵸를 위시한 서도쿄 에리어로 유흥의 중심이 옮겨지며 2020년대 현재의 우네노 상권은 명맥을 유지하는 정도로 쇠퇴하였다.
  • 화재로 장소를 이전했다는 서술을 보면 알다시피 에도 시대때는 화재가 잦았는데 요시와라도 화재때문에 길거리마다 물통을 배치했다. 특히 도쿄 대공습 당시에는 특유의 폐쇄적인 구조로 인해 불타오르는 요시와라에서 탈출 못 해 죽은 사람이 많았었는데 이때도 조칸지는 매춘부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 당시 일본은 남색을 일종의 풍류로 인정했던 것만큼 요시와라에서도 남창 전문 가게가 있었는데, 카게마챠야(陰間茶屋)라는 이름으로 찻집 형태로 운영했다.[17] 그러나 남색 향유층들도 진짜 동성애자는 아니었기에 이러한 남창 전문 찻집은 극소수였고 고급 남창같은 개념은 없었다.
  • 요시와라 유곽 터에 존재했던 에도 시대 때의 건물들은 전부 사라졌지만 교토에 있는 영화 세트 촬영장인 토에이 우즈마사 영화마을(東映太秦映画村)에서는 이 요시와라 유곽을 재현한 세트장을 볼 수 있다.일부 사진 보러가기
  • 미야모토 무사시는 생전에 결혼을 한적은 없었으나, 이 유곽에 단골 유녀가 있었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9. 외부 링크 및 참조



[1] De Becker, J. E. The Nightless City, or The History of the Yoshiwara Yūkaku (Charles E. Tuttle, Tokyo, 1971), p. 360.[2] 현재의 일본 도쿄도 니혼바시닌교초[3] 현 니혼츠미1초메와 2초메로 센소지(아사쿠사)의 북쪽에 위치.[4] 그러나 막부 측은 유녀들에게 배상금을 물어주기 싫어서, 인간으로서 해방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 짐승 취급을 해 해방령을 내렸다.[5] 고계는 불교 용어로, "괴로운 인간세계"를 말한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강제로 매춘하게 된 "괴로운 유녀의 처지"를 뜻하는 은어도 담고 있다.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조칸지는 유녀들의 나게코미데라로 유명했고, 해당 문구도 유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사적인 신 요시와라 총령탑을 세우면서 읆은 시이다. 즉 요시와라 유녀들을 위한 시.[6] 태정대신은 내각총리대신 제도가 도입되기 전, 정부의 명목상 2인자 역할을 했던 직책이다. 그래서 연혁상으로는 태정대신 직책이 폐지된 직후 바로 총리대신으로 연결되어 직접적인 전신이다.[7] 매춘부는 결혼 상대로서도 낙제점에, 기껏해야 정부나 첩이 되었지 정실부인은 테오도라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이상 되지 못했다. 실제 성적으로 지나치게 개방적이여서 퇴폐적이었던 고대 그리스에서도 유명한 헤타이라인 프리네는 '신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는데, 그 이유가 어떤 화가가 아프로디테 여신을 그리기 위해 프리네에게 모델을 부탁해서였다. 헤타이라도 결국 고급 매춘부였기에, 매춘부가 여신의 모델이 된다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8] 단 이 인신매매도 부모가 합의하에 판 것만 인정되었지 아이의 부모를 속이고 요시와라에 몰래 팔거나 납치해서 파는 건 불법이었기에, 불법으로 팔려온 여자아이는 부모의 품으로 돌아갔다. 때문에 여자아이나 아녀자가 실종되면 1순위로 수색하는 곳이 요시와라였다. 실제로도 어떤 부모는 딸을 아는 지인에게 양녀로 보냈는데 그 지인이 양녀로 온 아이를 요시와라에 팔아버리는 바람에, 부모의 신고로 아이는 부모에게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었다.[출처] Embree, John F. Suye Mura: a Japanese Village, Ann Arbor: Center for Japanese Studies University of Michigan, 1995.[10] 그래서 시대극의 성격을 띠는 의학만화 타임슬립 닥터 JIN에서 남성인 주인공 미나가타 진과 달리 히로인 타치바나 사키는 여자라 문전박대를 당하다가 '의사 조수'라는 신분으로 겨우 들어오고, 반대로 진이 외부에서 신변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오이란이었던 노카제는 요시와라에서 나갈 수 없었던 몸이라서 진을 구해달라며 서신을 띄워 사키에게 부탁했다.[11] 참고로 만화 닥터 JIN을 다시 인용하자면 여기서는 강가에서 매춘을 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후술할 '비인간적인 장례'와 합쳐서 성병에 걸린 유녀를 뗏목이나 배에 태워 강이나 바다로 보내서 빠져 죽게 만드는 걸로 묘사했다.[12] 부정한 여자를 뜻하는 말로, 보통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매춘부들을 칭하는 비속어이다.[13] 번역하면 "던져 버리는 절"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연고가 없거나 인수인이 없는 자가 죽으면 장례를 치러주지 않고 아무 절에나 내다 버렸기에 붙여진 별명. 유녀는 인수인이 없었고 연고가 없는 자들은 말그대로 객사한 행려인들이라, 현존하는 나게코미데라에 가보면 이렇게 이름없이 죽은 자들의 유골함이나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사당을 볼 수 있다.[출처2] De Becker, J. E. The Nightless City, or The History of the Yoshiwara Yūkaku (Charles E. Tuttle, Tokyo, 1971), p. 360.[출처3] Sone Hiromi. “Prostitution and Public Authority in Early Modern Japan,” in Women and Class in Japanese History, edited by Hitomi Tonomura, Anne Walthall, and Haruko Wakita. 169-85. Ann Arbor: Center for Japanese Studies the University of Michigan, 1999.[16] 해당 글은 자료 조사가 잘 되어 있으나 약간 오보가 있는데, 요시와라역은 여담 문단에 서술된 것처럼 요시와라 유곽과 연관이 없는 동명의 철도고, 귀멸의 칼날의 악역인 다키(규타로, 우메)의 모친은 키리미세의 싸구려 유녀였을지언정 요타카는 아니었다. 요타카라면 유곽에 있지도 못하고 쫓겨나서 거리나 야생 오지에서 매춘을 해야 한다.[17] 참고 자료 : 요시와라에도 남창이 있었다? 카게마챠야에 대해. 해당 글에 나온 것처럼 주요 손님은 남성이었지만 소수의 여성 손님도 있었는데, 오오쿠에서 일하던 시녀들이었지 유녀들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