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3 20:40:23

메이레키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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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eireki_fire.jpg

메이레키 대화재를 묘사한 그림

1. 개요2. 사건 진행 상황3. 수습4. 피해5. 화재의 원인은 무엇인가?6. 전설7. 조선왕조실록의 기록8.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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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uby(明暦の大火, ruby=めいれきのたいか)] (명력의 대화[1])
[ruby(丁酉火事, ruby=ひのととりのかじ)] (정유화사[2])

에도 시대1657년 3월 2일[3]에서 3월 4일[4]까지 에도(지금의 도쿄)에서 일어난 대화재로, 후리소데 화재(振袖火事), 마루야마 화재(丸山火事)라고도 불린다.

일본에서는 로마 대화재, 런던 대화재와 함께 세계 3대 대화재라고 부르지만 객관적으로 기록된 이보다 훨씬 큰 화재들도 이전에도 이후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1633년 당시의 세계 초강대국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벌어진 1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1만 5천 채 이상 불이나 가게가 불에 탄 이스탄불 대화재[5] 같은 엄청난 화재는 역사상 세계 곳곳에서 오래전부터 있었다.

당시 고사이 덴노도 재앙이라고 해서 화재 이후 연호를 만지(万治)로 바꿀 정도였다고 한다.

2. 사건 진행 상황

1657년 3월 2일(음력 1월 18일) 오전 2시 혼묘지에서 처음 시작된 불이 유시마, 칸다, 니혼바시, 후카가와, 쓰쿠다지마까지 번지면서 에도 시가지가 초토화되었는데 이 불은 다음날 오전 2시에 1차적으로 진화되었다.

한편 이때 에도 내부의 아사쿠사몬이 폐쇄되어 여기에서 희생자가 많이 나왔다. 당시 감옥을 담당하는 벼슬아치가 아사쿠사몬 근처까지 번진 불을 보고 해당 지역 감옥의 죄수들을 일시적으로 풀어줬지만, 이 소식을 듣지 못한 관리들이 탈옥했다고 생각하고 해당 지역을 봉쇄하는 바람에 여기서만 전체 사망자의 20%인 2만 3천여 명이 나왔다.

하지만 이날 오전 10시 덴츠인에서 또 불이 나서 에도 성과 다이묘들의 거주지인 다이묘코지까지 불이 퍼졌다. 회반죽으로 나름 대비한 에도성조차도 계절풍을 타고 창문이 열리면서 불이 에도성 내부로 번졌고 화약고까지 터지면서 피해가 더 커졌다.

3. 수습

화재 당시 에도 막부의 오슈 아이즈 번 다이묘 호시나 마사유키[6]는 "갖추어 놓지 않고 처벌하는 것은 불가하다."라는 명언을 남기고 화재를 일으킨 혼묘지의 승려들을 처벌하지 않는 대신 피해자 구제/도시 재건/방화 대책에 힘쓰도록 했다.

일본은 지진이 잦기에 목조건물이 90% 이상이었거니와 에도에는 워낙 건물이 밀집되었던 만큼 한번 화재가 일어나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화재대비가 없어서 취약했기 때문에 불을 낸 혼묘지 사찰 측에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명판결이다. 즉, 사고를 일으킨 사찰뿐만 아니라 도시 계획을 잘못하여 방화소방 방재대책을 갖추는 데 실패한 막부와 정부 책임도 인정한 명언이다.

4. 피해

영주들이 살던 집과 불타버린 관공서를 합쳐서 약 930채, 민가는 4만 8천호, 사찰 350곳, 교량 60곳, 창고 9천 곳, 1만 석 이상 생산 가능한 농토도 500곳 이상 불탔다.

이 화재로 에도의 70%(2574헥타르)가 불탔고 사망자만 에도 인구의 14% 정도인 10만 7046명에 달했다. 유명한 에도 성천수각도 이 화재로 소실되었다.

5. 화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지간히 큰 화재였던지라 당시 에도에서는 막부에서 재정비를 한답시고 일부러 낸 화재라던가, 아니면 우연한 사고로 인한 화재라던가 하는 말이 많았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혼묘지 내 후리소데로 인한 화재라는 전설이다.

6. 전설

이 화재의 원인을 두고 상사병에 빠져 죽은 어느 소녀가 입었던 후리소데(振袖)[7]의 저주가 원인이라는 전설을 담은 여러 문서 기록이 있지만 이 전설은 대화재의 정치적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당시 아사쿠사 스와초에서 가면을 파는 부유한 상인의 외동딸 오키쿠는 17세 되는 해 에도에서 열린 마츠리(축제)에 놀러갔다. 당시 양갓집 규수들은 축제 같은 특별한 때 말고는 바깥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마츠리를 손꼽아 기다렸고 마츠리에서 남녀가 눈이 맞는 경우도 많았다.

17세 꽃다운 나이의 오키쿠도 화려한 보라색의 후리소데를 입고 마츠리 구경을 갔다가 먼발치에서 또래의 잘생긴 한 젊은이를 보고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오키쿠는 그 젊은이를 다시 보고 싶다고 부모에게 청하고 시집가고 싶다고 졸랐지만 부모들은 신분이 낮아 보인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하고 외출을 금지시켜버린다. 상심한 오키쿠는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다음 해 음력 1월 18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봄꽃놀이에서 본 젊은이에 반하고 다시 만나면 눈에 잘 띄도록 그 젊은이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후리소데를 만들어 입었지만 다시 만나서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설도 있고 딸이 상사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부모가 수소문 끝에 젊은이에 대해 알아냈으나 하필이면 그 젊은이가 결혼을 할 수 없는 와카슈도였던 탓에 맺어지지 못할 바엔 하다못해 그 젊은이가 입던 것과 비슷한 옷이라도 입혀 주고자 후리소데를 맞춰 주었고 이후 오키쿠가 병이 깊어져 죽고 말았다는 설도 있다.

부모는 딸을 잃고 크게 후회하며 슬퍼했고 에도의 큰 절인 혼묘지(本妙寺)에서 장례를 치러주었다. 일본 풍습에는 죽은 이가 아끼던 옷을 관에 덮어 주는데 어머니는 오키쿠가 마츠리 때 입고 간 그 후리소데를 덮어주었다.

그런데 절에서 일하는 일꾼들이 그 화려한 후리소데를 보고 탐을 내어 몰래 빼돌려 팔아 버렸다. 지금이나 그때나 화려한 후리소데는 엄청나게 비싼 고급 옷이다. 그런데 그 후리소데를 사서 입은 어느 집 딸이 다음해 같은 날 알 수 없는 원인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 소녀도 똑같이 혼모지에서 장례를 치렀고 그 후리소데는 다시 절의 일꾼들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그걸 입은 소녀도 그 다음 해 같은 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3년간 소녀 3명이 똑같은 1월 18일에 죽은 것이다.

역시 혼묘지에서 치러진 그 세 번째 소녀의 장례식에서 또다시 돌아온 그 후리소데를 알아본 절의 일꾼들은 죄책감과 불길함으로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다가 스님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는다. 스님은 부모에게 알리고 오키쿠의 한과 저주가 서린 그 후리소데를 공양하여 없애기로 하고 뜰에 불을 피우고 독경을 하며 후리소데를 불에 던져 버린다.

그런데 불타던 후리소데가 마침 불어온 돌풍에 날려가 혼묘지 본당 지붕에 날아앉아 불은 순식간에 번지고 본당과 혼묘지 사찰 전체를 태운다. 마침 에도는 11월부터 3달간 비가 내리지않아 매우 건조한 상태였고 강한 북풍 바람까지 불어 불은 삽시간에 에도 전체로 번졌다. 불은 사흘간이나 타올라 에도의 2/3을 태우고 사망자 11만 명을 냈기 때문에 그 화재 사건을 후리소데 대화재라고 부른다고 한다.

7. 조선왕조실록의 기록

조선왕조실록 효종 8년 8월 5일, 메이레키 대화재와 관련된 언급이 등장한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그를 보았습니다. 강호(江戶, 에도)에 불이 났는데 매우 참혹했다 하였습니다. 대개 저 나라의 관백(關白)이 연소하여 배우들의 연기 구경을 탐하기 때문에 재상의 무리가 상의하여 먼저 한 곳에 구덩이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화약을 장치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거짓으로 배우들의 연기를 구경한다고 말을 퍼뜨려 배우들을 모두 이곳으로 모이게 한 다음 그 속에 불을 놓았는데, 온 성안이 남김없이 모두 타버렸고 심지어는 불을 피하는 사람들이 성의 해자에 빠져 죽은 자가 모두 40여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저 나라 인물이 매우 번성하다고 하였는데 천도가 반드시 이렇게 할 것이다."
하였다.

8. 대중매체

Europa Universalis IV에도 등장한다. 에도 프로빈스를 보유한 국가에게 전용 이벤트가 발생하며 3개의 선택지가 주어지는데 1. 자금을 들여 소방대를 창설하고 대로를 놓는다. 2. 자금을 들여 빈민을 위한 주택가를 먼저 건설한다. 3. 화재와 소요는 에도의 꽃이다.(火事と喧嘩(ケンカ)は江戸の華)

일본 만화 닌자와 야쿠자에는 야쿠자의 시조라 불리던 반즈이인 쵸베에가 닌자 카사이 잔조에게 부하가 살해되자 복수를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나온다. 결국 불타는 에도에서 두 사람이 결투를 벌인 끝에 쵸베에가 패한다. 쵸베에는 친구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노 쥬로자에몬에게 복수를 부탁한 후 할복하고 이후 350년 넘게 닌자와 야쿠자가 전쟁을 벌인다.[8]

넷플릭스 오리지널 푸른 눈의 사무라이 시즌 1 마지막화에서 묘사되는데 여기선 서양인 엘라이자 파울러가 화승총으로 사병들을 무장시켜 에도를 전복하려고 하지만 사적인 복수에 눈이 먼 주인공의 습격에 무산되고 도망치는 와중에 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주인공이 불을 지른다. 그런데 에도 궁전 상층의 방 한 군데에 촛불로 지른 불인데 순식간에 도시 전체로 번져나가 버린다...


[1] 고사이 덴노 시절 연호로 그 시기에 벌어진 대형화재를 의미한다.[2] 정유년(1657년)에 일어난 대형화재라는 의미.[3] 메이레키 3년 음력 1월 18일[4] 음력 1월 20일[5] 바로 흡연가들을 3만 명이 넘게 죽였다는 술탄 무라트 4세 집권하에 벌어진 일이라 이 화재의 원인이 담뱃불이라는 근거로 흡연을 탄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서자, 3대 쇼군의 동생[7] 미혼 여성이 입는 소매 밑부분이 길게 늘어진 화려한 기모노. 기혼 여성토메소데를 입는데 소매 밑부분이 후리소데보다 짧다.[8] 사실 닌자가 워낙 초인적인 집단으로 나와 일방적으로 야쿠자가 학살당했다. 야쿠자들은 도쿄 대공습을 틈타 구호 활동을 벌이던 닌자들을 총으로 학살했으나 90년 이후 더욱 초인적으로 변한 닌자들에게 학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