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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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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oulmetro2_icon.svg 서울 지하철 2호선
을지로순환선(본선) 시청 ~ 시청
(48.8km, 81.06%)
성수지선 성수 ~ 신설동
(5.4km, 8.97%)
신정지선 신도림 ~ 까치산
(6.0km, 9.97%)
역 목록 | 역사 | 사건 사고

1. 개요2. 노선 구상3. 공사와 개통4. 당산철교 재시공

1. 개요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역사(歷史)에 대한 문서이다.

2. 노선 구상



양택식 서울시장이 1970년 서울 지하철 노선을 구상할 당시에 계획됐던 2호선은 현재의 2호선과는 을지로를 지난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현재와는 완전히 달랐다. 당시 2호선은 김포국제공항-목동-여의도-충정로-을지로-왕십리-강남으로 이어지는 노선이었으며, 김포공항-충정로 구간은 현재의 5호선, 충정로-왕십리 구간은 2호선, 왕십리-강남 구간은 분당선과 유사한 선형이었다. 당시 5호선까지 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몇 차례 계획 수정으로 서초역에서 P턴을 해서 강북 한 바퀴를 돌고 오는 4호선을 제외한 나머지 2, 3, 5호선은 그 후 현재의 다른 노선들로 계승됐다. 2호선은 상술했듯 지금의 5호선+2호선+분당선이 됐고, 3호선은 현재 3호선과 4호선의 강북 구간을 합친 U자 모형이었고, 5호선은 지금의 2호선+5호선+8호선을 섞은 모양이 됐다. 그러나 양 시장은 육영수 피살 사건에 대해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후임으로 들어온 구자춘 시장은 서울이 사대문안, 영등포, 강남 3개의 도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3핵도시론을 주창했다. 그는 서울의 도시 기능이 사대문안에 집중되어 있어 강남 등으로 그 기능을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모든 노선이 사대문안을 중심으로 하여 설계된 양택식 시장의 지하철 계획은 문제가 많았다. 그리하여 구자춘 시장은 1975년에 전임 양택식 시장의 2~5호선 계획을 전부 엎어버리고, 대신 도심인 사대문안과 부도심인 영등포 및 강남의 3자 간 원활한 연계를 위해 2호선을 세 지역을 연결하는 순환선으로 바꾸었다. 이 때 구자춘 시장이 지도 위에 선을 그으면서 노선의 초안을 계획했는데 많은 수정 없이 거의 그대로 노선이 지어졌다는 일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다. 사실 이는 구 시장이 포병장교 출신이라 가능했던 것으로, 장교의 핵심 자질 중 하나가 지형숙지 및 파악(독도법)이기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이다.
2월 초순의 어느날, 오전 11시 경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도시계획국장, 도시계획과장, 지하철건설본부장 등이 시장실로 호출됐다.
(중략)
구 시장은 미리 준비해 둔 서울시 지도를 펴놓고 그들이 서서 보는 앞에서 지하철 2호선의 선을 그었다. 검은색 연필이었다. 종전에 정해져 있던 제2호선은 왕십리 ~ ~ 마포 ~ 여의도 ~ 영등포였다. 그런데 구 시장은 마포, 여의도를 피해 신촌 ~제2한강교(양화대교) ~ 당산으로 이었고, 그것을 더 연장해 구로공업단지 ~ 봉천동 ~ 관악구청앞 ~ 사당동 ~ 서초 ~ 강남 ~ 삼성동 ~ 잠실 ~ 성수 ~ 뚝섬을 거쳐 왕십리로 이었다. 구도심(을지로) ~ 영등포 ~ 영동을 잇는 3핵의 연결이었다. 마포 ~ 여의도를 피한 것은 그의 전임 김현옥, 양택식 시장이 만든 것이었기에 구 시장은 여의도에의 새로운 투자는 피하는 눈치였다.
(중략)
포병장교 출신답게 구 시장의 지도 파악력은 정확했다. "구로공단 앞은 통과해야 되겠지" "서울대 앞도 지나야 되겠지" 질문인지 독백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누구 하나 발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마 그렇게 선을 긋는 데 걸린 시간은 20분도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정목 -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3권 발췌
파일:건설부고시 제203호.jpg
1975년 12월, 건설부고시 제203호로 고시된 노선안

2호선은 구자춘 시장의 노선안에서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변경은 있었다.
  • 영등포역을 통과하여 1호선과 환승하려 했으나 당시 기술력으로 이미 운영되고 있던 대형 철도역의 운영을 방해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터널을 뚫기 어려워 대신 신도림동 일대에서 1호선과 교차하도록 했고 신도림역이 세워졌다.
  • 왕십리역 인근에서 왕십리로를 따라 한양대역으로 가려던 노선이 경원선 왕십리역 아래를 통과하도록 변경됐다. 이 때 왕십리역 동쪽 주택가 한가운데를 지나게 되어 주민들이 강력히 반발했으나, 서울시는 지상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하는 공법인 파이넥스 초발파공법을 적용하기로 하고 수정안대로 건설했다.
  • 구의역에서 잠실나루역까지의 구간도 본래 자양사거리에서 잠실나루역 방면으로 일직선 형태였던 것을 막 매립이 끝난 구의동 매립지를 경유하도록 수정되었고, 구의역의 위치가 재조정되었으며 구의동 매립지에 강변역이 추가되었다.
  • 낙성대역에서 신대방역까지의 구간도 본래 봉천로를 고가로 경유하고자 했으나 인근 주택가에 미치는 소음을 고려해 남부순환로를 지하로 경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 본래 계획에서는 일본 자문단의 권고에 따라 공사비 최소화를 위해 고가 구간이 더 많았는데, 그 중 일부 구간이 지하로 변경됐다. 신도림역 ~ 당산역 구간, 낙성대역 ~ 신대방역 구간, 잠실나루역 ~ 삼성역 구간이 이에 해당한다.
  • 군자차량기지 인입선은 본래 왕십리역에 연결하려고 했으나 난공사가 우려된다는 일본 자문단의 권고에 따라 성수역으로 변경했다.
  • 경찰청앞 교차로(서소문고가차도 인근)에 역을 건설하려던 것을 충정로 인근과 덕수궁 남쪽에 2개 건설하는 것으로 수정했고, 각각 충정로역시청역이 되었다.[1]
  • 삼성역강남역 사이에는 본래 1개 역만 둘 예정이었으나 2개로 늘었고, 각각 선릉역역삼역이 되었다.
  • 교대역방배역 사이에는 본래 역 계획이 없었으나 서초역이 추가되었다.
  • 당초 승강장을 8량 1편성을 수용할 수 있는 170m 길이로 건설하고자 했으나, 서울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고려해 공사 도중에 10량 1편성을 수용할 수 있는 210m로 수정했다.

일반적으로 도시에 지하철을 만들 때에는 우선 도심과 외곽 지역을 잇는 방사형 노선들을 만들고, 도심이 과밀화되어 방사형 노선들의 도심 교통량이 포화상태에 이를 때 이를 분산하고 도심 주변의 부도심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순환선이 지어진다. 구자춘 시장의 2호선은 이러한 법칙을 정면으로 위배한 노선으로, 구 시장이 그림을 그릴 때 참모들이 이 사항을 포함한 내용으로 태클을 걸고 싶었으나 구 시장의 성격상 그러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 대신 순환선이 보조해줘야 할 방사형 간선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지하철 3호선서울 지하철 4호선 계획이 빠르게 진행됐다. 그렇게 기존 철도 노선들을 활용한 1호선과 거대 순환선인 2호선, 서울을 X자로 통과하는 3,4호선까지 1기 지하철 계획이 완성됐다.

3. 공사와 개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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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2호선 강북구간 기공식서울 지하철 2호선 개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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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션
1980년 10월 31일 지하철 2호선에 시승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과 영부인 이순자
1984년 5월 25일 대한뉴스 제1490호 - 지하철 2호선 완전 개통}}}


이 거대한 순환선은 1978년 3월 9일에 착공에 들어갔다. 을지로를 지나가 공사가 어려웠던 성수~시청 구간을 제외한 나머지 구간은 1978년에 착공했고, 성수~시청은 1980년대 착공했다. 대부분의 지하 구간은 1호선처럼 개착식 흙막이 공법으로 건설됐으나, 왕십리역 ~ 한양대역 구간, 선릉역 ~ 역삼역 구간, 서초역 ~ 낙성대역 구간(역 인근 제외), 이대역 ~ 충정로역 구간에서는 산악터널(ASSM) 공법을 사용했다.

이미 완공된 구간이 있었고(성수지선 참고) 대부분이 지상 고가였던 신설동~종합운동장의 공사가 가장 빨리 진척되어 1980년에 개통했고[2], 1982년에 2단계 구간인 종합운동장역 ~ 교대역 구간이 개통되었다.[3] 3단계 구간인 성수역 ~ 을지로입구역 구간은 1983년 6월에 개통 예정이었지만, 1983년 9월에 완공되어 개통이 3개월 미뤄졌다. 2호선의 3단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신설동역 ~ 성수역 구간은 성수지선으로 분리되었다.[4] 나머지 구간(4단계)인 교대역 ~ 을지로입구역 구간은 1983년 12월에 개통될 예정이었으나, 공사 지연 등으로 인해 서울대입구역까지 우선 개통되었다.[5] 4단계의 일부 구간이 개통된 이후 5개월 만인 1984년 5월 22일에 잔여 구간인 서울대입구역 ~ 을지로입구역 구간이 개통하며 순환 운행이 개시됐다.[6]

초기에는 4량으로 운행했으나 역세권 발달로 혼잡도가 상승하자 6량으로 증결됐다. 이 때 성수지선의 차량은 증결이 되지 않고 각 역의 승강장도 4량 길이라서 지금도 4량 1편성으로 운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에는 기존 군자차량사업소의 시설용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면서 새로운 차량기지를 지어야 했다. 때마침 2기 지하철 계획이 수립됐고, 원래는 5호선김포공항역~까치산역~신도림역을 운행할 예정이었지만 최종 계획에서 까치산~신도림 구간이 제외되고 5호선이 까치산에서 방향을 틀어 여의도로 가는 것으로 수정됐다. 대신 까치산~신도림 구간은 2호선의 지선으로 건설하고 노선 근처에 신정차량사업소를 건설해 차량기지 인입선을 겸하게 했다. 이렇게 탄생한 지선이 현재의 신정지선이다. 신정지선은 2기 지하철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기에 개착식 공법을 사용했던 본선과 달리 NATM 공법을 사용해 건설됐다. 한편 본선은 계속되는 수요 및 혼잡도 증가로 1993년 6량에서 10량으로 증결됐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6량 1편성 차량을 신정지선으로 차출해 가면서 신정지선은 현재까지도 6량 1편성으로 운행 중이다.

시설과 운영에서는 1호선 건설과 운영의 경험을 살려 새로운 시도들이 이뤄졌다. 우선 직원용 화장실을 1982년에 이용객에게 개방했던 1호선과 달리 2호선은 모든 역에 공중화장실을 갖추었고, 역 냉방 설비도 도입했다. 심도가 깊은 역삼역, 사당역, 이대역, 시청역, 충정로역, 문래역에는 개통 당시부터 일부 계단에 에스컬레이터를 설치했다. 아울러 1호선 운영 당시 통일된 규격과 시안 없이 설치된 표지판과 시설들이 보기 좋지 않다는 반성에 따라 디자인 및 서체 전문가에 의뢰해 픽토그램을 추가한 각종 안내판 디자인과 지하철 표지판에 사용할 서체, 역번호, 노선 고유 색상, 시설 디자인 규격을 만들어 2호선에 최초로 적용했다. 역번호를 제외한 모든 사항들은 역삼역교대역에 최초로 적용되고, 역번호는 제정이 늦어 을지로입구역~뚝섬역 구간에 최초로 적용됐다. 뒤이어 이는 서울 내 모든 지하철에 적용됐다. 차량에서도 1호선 저항제어 방식 전동차의 비효율성과 열 배출 문제를 반성해 초퍼제어 방식의 전동차를 도입하는 등의 혁신이 있었다.

4. 당산철교 재시공

당산철교는 개통한지 몇 년 안된 1990년대 초반부터 기관사들로부터 안전성에 대한 의구심이 제기됐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인한 전국 모든 교량의 재점검 결과 당산철교의 부실 시공이 드러났다. 부실공사와 잘못 적용된 공법으로 인해 이미 트러스와 기둥에 많은 균열이 발생한 상태였고, 결국 1994년 11월부터 모든 열차가 당산철교를 지날때 30km/h로 서행하기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행 중 볼트와 너트가 지속적으로 빠지면서 엄청난 진동과 소리가 발생했다고 한다. 결국 보수공사로 충분하다는 의견과 아예 철거하고 재시공해야 하는다는 의견이 대립하던 상황에서 여론이 후자로 쏠리기 됐고, 당산철교 구간을 대체할 수 있는 서울 지하철 5호선 도심구간 완전개통이 1996년 12월 30일로 잡히면서 1996년 12월 31일 막차 통과를 마지막으로 철교를 전면 폐쇄하고[7] 1997년 1월 1일부터 철거가 시작됐다. 아니나다를까 이 당산철교는 철거 중이던 1997년 5월 22일 스스로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나마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재시공 당시 순환선이 일시적으로 끊기면서 2호선은 "당산행"(기존 내선순환), "합정행", "홍대입구행"(기존 외선순환)으로 운행을 했다. 당산행은 당산역 바로 남쪽에 X자 시저스 크로싱을 설치해 회차하는 방식으로 운영됐고, 홍대입구행은 홍대입구역에 Y자형 회차선이 따로 있어 이를 이용했다. 합정역은 당산역처럼 X자 크로싱을 설치하기도 곤란한 상황이었고, 홍대입구역처럼 회차선을 설치하자니 역 뒤가 바로 언덕이라 열차를 멈춰두기가 불가능해 1월 1일 폐쇄됐다가 결국 단방향 선로 전환기를 설치하여 2월 15일에 재개통했다. 이 때 대부분의 외선순환 열차가 홍대입구행으로 운행하면서 합정행의 배차간격은 15분에 육박했는데, 양방향으로 X자 회차가 가능한 당산역과는 달리 단방향으로만 회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구간은 4호선 당고개역이나 상계역처럼 2대의 전동차를 멈춰두고 유치하게끔 설계한 게 아니라 단순히 통과하는 것만을 전제하고 건설한 구조물로써 당산철교 진입을 위해 급경사가 이어져 있어서 오랫동안 열차를 멈춰둘 수 없었고 단방향으로 1대만 회차할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합정역에서 회차할 때에는 회차선에 열차를 세워 두고 승무원 앞뒤 교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열차가 회차선에 들어오면 곧바로 선로 전환기를 바꾼 뒤에 퇴행으로 합정역 구내로 돌아와서 승무원 교대를 했다.

파일:20170812_124412.jpg

폐쇄된 당산철교를 대신해 당산역과 합정역, 홍대입구역 사이를 잇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셔틀버스 이용객을 위해 개찰구를 열어놓았으므로 이용객은 승차권(당시는 마그네틱)을 꺼낼 필요 없이 그냥 나가서 셔틀버스에 도달했으며, 지하철 승차권을 셔틀버스 기사에게 보여주면 탑승할 수 있었다. 열차가 영등포구청역(내선)/충정로역(외선)에 도착하기 전에 이들 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충정로역/영등포구청역에서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라는 안내방송도 나왔다. 새 당산철교는 1999년 11월 22일 재개통했으며, 헤비 리프팅 공법으로 튼튼하게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방음 장치를 강화해 소음 공해를 최소화하고 내진 설계까지 적용 완료해 1등급 교량으로 인증을 받았다.


[1] 언론 자료들을 보면 계획 수정 이전에 1호선과의 환승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서울) 앞에 세워지는 '시청앞역'(현재 을지로입구역에 해당)이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2] 「대한뉴스 제 1306호-건설의 소식」, KTV, 1980-11-05[3] 「대한뉴스 제 1417호-지하철 2호선 2차 개통」, KTV, 1982-12-30[4] 「대한뉴스 제 1455호-서울지하철 2호선」, KTV, 1983-09-24[5] 「地下鐵Ⅱ 教大앞~서울大入口구간 개통 서울大~乙支路입구 49분 걸려 새벽 5시~밤11시51분까지 운행」, 동아일보, 1983-12-17[6] 「대한뉴스 제 1490호-지하철 2호선 완전 개통」, KTV, 1984-05-25[7] 「당산철교 폐쇄...31일밤 마지막 열차 통과」, 연합뉴스, 199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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