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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정규군 게릴라를 뜻하는 단어.2. 어원
빨과 산이 들어가며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조선인민유격대가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관계로 '산(山)에서 싸우는 빨갱이' 같은 뜻을 가진 합성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그러나 실제로는 러시아어 '파르티잔(партиза́н)'에서 유래한 외래어로 한국어에서 빨치산으로 발음이 변형된 것이다. 즉, 빨치산 자체에는 이념이나 지역에 대한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반공주의 성향의 빨치산이나 산이 아닌 곳에서 활동했던 빨치산들도 많다.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적어도 12세기 경부터 partisan이라는 단어가 프랑스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17세기경에는 지역 군벌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중 스페인 전역에서 게릴라에게 호되게 당한 프랑스군은 이들을 군벌이라고 호칭하게 되었고 그것을 옆에서 잘 지켜보던 영국군은 게릴라 = 파르티잔이라고 생각하게 됨에 따라 스페인어에서 유래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게 정착되었지만 이때까지는 순수한 유격대원의 의미와 더불어서 정예 혹은 특수부대의 의미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19세기 이전 미국에서는 파르티잔의 의미가 약간 뒤틀렸는데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와 남북 전쟁 당시의 남군[1]의 영향으로 인해 19세기까지 파르티잔의 의미는 레인저나 코만도와 같은 특수부대와 비슷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던 와중 20세기에 접어들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반프랑코 게릴라들의 활약과 국제여단 덕에 파르티잔과 게릴라에 대한 개념과 인식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가고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의미도 거의 현재와 비슷하게 고정되었다.
3. 현재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2]을 가리키며 그에 따라 앞서 말한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제네바 조약[3]에서는 몇몇 상황에서 무기를 공공연하게(=숨기지 않고) 갖고 있으면 전투원으로 취급되며 잡혔을 때 전쟁포로로서 존중됨을 규정하고 있다. 몇몇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가. 각 교전기간중 및
나. 공격 개시전의 작전 전개에 가담하는 동안 적에게 노출되는 기간 중. 본 항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는 제37조1항에서 의미하는 "배신적 행위"로 간주되지 아니한다.
나. 공격 개시전의 작전 전개에 가담하는 동안 적에게 노출되는 기간 중. 본 항의 요구에 부합하는 행위는 제37조1항에서 의미하는 "배신적 행위"로 간주되지 아니한다.
현실적으로 잘 지켜질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은 이 조항을 유보하고 제네바 협약에 가입했기 때문에 적용 자체가 안된다.
제네바 조약이 없던 시절인 나폴레옹 전쟁 중의 스페인 전역 때도 프랑스군은 게릴라들은 불문곡직하고 쏴 죽였으며 동조자들도 종종 처형하곤 했다.[4]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일반 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6.25 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해서는 빨치산 대신 공비(共匪, 공산당 도적)라는 호칭도 많이 사용한다.
4. 예시
빨치산의 역사는 게릴라전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라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반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의 민병대, 러시아 내전에서 대다수의 적군과 백군에 가담한 민중봉기 세력들 등을 빨치산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전간기에 있었던 리프 전쟁 당시 반군 지도자 아브드 엘 크림의 게릴라 전술은 스페인 내전의 게릴라 전술에도 영향을 주었다. 20세기 이후 굵직한 빨치산을 몇몇 다루자면 다음과 같다.
4.1. 스페인 내전과 그 이후의 게릴라
게릴라/파르티잔의 확산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세력으로, 스페인 내전 당시와 이후 반 프랑코 세력을 총칭한다.이 시기에는 국제적으로 상당수의 의용병들이 들어와서 국제여단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공화파 의용군은 대부분 제대로 된 군복과 명령체계가 없었다. 그 외에도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망명했던 스페인인 일부가 귀국하여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이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막상 '게릴라'란 단어 자체가 태어난 곳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스페인 내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공화파 진영 전체로 보면 CNT나 UGT 등 공화국 정부와는 사실상 따로 노는 전투 노조들이 프랑코군에게 포위된 막말로 가망 없는 조직원들에게 최후 항전의 의미로 내린 단발성 지령을 빼고는 조직적인 게릴라전을 펼친 적이 없다는 점이다. 당시는 게릴라전에 대한 심도 깊은 군사학적, 전술적 연구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여전히 1차대전식 '정정당당한' 마인드가 군사적 인프라로는 영 후진국인 공화파, 파시스트 진영 양쪽에 팽배했기 때문에 공화파는 충분히 장기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그 이득을 못 봤으며 후대 살아남은 공화파 인사들은 아나키스트 CNT나 공산당 지도 아래 공화국 정부 인사나 군사 내적인 측면에서는 이 점을 최대의 실책으로 평가했다. 빨치산의 근간이 되는 발렌시아에 위치한 공화국 정부의 지휘를 받는 정규군인 공화국인민군(Ejército popular de la República) 소속이 아닌 좌익 의용군, 민병대들은 전쟁 발발 이전 노동자로서 먹고 살며 지리와 구조에 익숙했던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같은 곳의 시가전에서는 정규군 못지 않은[5] 효율과 전투력을 발휘했던 반면 어리석게도 공화파 지도부나 자체적인 노조 의용대 지휘관들이나 오히려 1차대전의 참호전과 근본적으로 변한게 없는 야전에서의 고지 점령전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CNT의 연맹 민병대(milicia confederal) 같은 무장 노조 민병대들도 나름 사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정규군의 절반 이상이 넘어갔으며 당시 스페인에서 유일하게 실전에서 단련된 정예 병력인 북아프리카 식민지 부대(regulares)만으로도 모자라 그나마 외부 지원 세력인 소련은 오히려 공산당이 점차 장악해 가는 공화국 정부만 독점 지원하며 자신들을 때려 잡으려는 와중에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적극적인 군사 지원을 받는 파시스트 쿠데타 세력을 상대로 기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격차는 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그나마 상술 된 상황에서의 선전으로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스페인 북동부 산악 지대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무장 노조들은 당장 해방구 내에서 벌어지는 정치, 사회적 혁명의 물결을 주도하는 걸로 대중적인 지지와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적 사회 혁명을 지속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구체적인 마을과 도시를 중심으로 고정적인 해방구를 성립해 사수하고 확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장기적으로는 저런 근본적인 군사적 인프라의 차이로[6] 더 불리할 수 밖에 없으니 CNT나POUM 혹은 바스크 자치정부 산하 구다리(Euzko Gudarostea) 같은 독립 세력들은 오늘은 우에스카, 내일은 사라고사라는 식으로 정치적인 가치가 큰 지방 도시들을 목표로 삼아 제대로 된 기갑, 항공 지원 따위는 생각지도 못하는 상황에 1주일 전에는 민간인이었던 알보병들로 도시 점령 전격전 공세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단순히 군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화파와 스페인 좌파 전반의 정치적, 구조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공화파는 반자이 돌격스러운 무분별한 공세를 남발하다가 느리지만 착실한 프랑코군의 반격으로 하나 하나 통제 지역을 상실하다가 1939년 패망했다. 오히려 전쟁이 말기에 들어가고 공화국의 패망이 시간 문제라는 게 기정사실화되면서 프랑코가 점령한지 얼 마 안된 지역이었던 아스투리아스-레온의 북부 산맥, 카스티야 라만차의 중부 고원, 안달루시아 대농장과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2차대전이 터지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와 발을 함깨 한 유격전이 성행했다. 이 시기에 들어서는 오히려 아예 조직 자체가 붕괴되어 버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파시스트들에게 항복하자니 에라이 될대로 되라는 마인드라 저런 정치적인 문제에 전혀 속박당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펼치다 보니 의외로 효율이 좋아 공화국이 정식으로 패망하고도 10년 넘게까지 빨치산 조직들은 프랑코 정권의 속을 썩였다.
이들은 프랑코 정권이 열렬한 양다리 외교로 연합국에 의해 그 생존을 허락받자 결국 하나 둘씩 고립되어 잡혀 죽던가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로 망명하는 식으로 말라 죽었으나 이들의 경험에 기반한 군사 활동/정치 활동 양면의 유격전 군사적 교훈은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 전반으로 국제여단과 망명객들을 통해 퍼졌다. 2차대전이 끝나면서 연합군이 프랑코 정권을 응징하지 않고 협상으로 그 존속을 허락해 버리자 피레네 산맥, 칸타브리아, 아라곤 등지에서 버티고 있던 빨치산들 중 많은 수가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 프랑스를 통해 망명했다. 이 와중에 적지 않은 수가 프랑스, 중남미 등 망명간 나라의 좌파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투쟁 방식과 게릴라전 경험도 전파했다. 스페인 내전 자체에서 빨치산 전술은 잘해봐야 가능성을 보여준 정도에 끝났지만 여기서 실전 경험을 한 이탈리아 의용병 출신 가리발디 여단이나 프랑스계 파리 코뮌 전투단 같은 국제여단의 의용병들은 스페인에서 배운 선동술, 전술 등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자국 내 반파시스트 빨치산 투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1943년 여름 무솔리니 정권이 한번 몰락하고 살로 공화국이란 나치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부활해 이탈리아 전선이 내전의 구도로 변화할 때까지 핵심적인 조직적 기반과 교관 역할을 할 수 있는 숙련된 투사들은 비공산권 사회주의 혁명 조직이었던 정의와 자유(Giustizia e Liberta)나 이탈리아 공산당 내 국제여단 출신원들 같은 스페인 내전 경험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수이자 30년대 후반에서 2차대전을 통틀어 소련 외 국제 공산주의 네트워크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 중 하나였던 팔미로 톨리아티만 하더라도 국제 여단 의용병 모집을 책임지면서 국제적 경력과 인망을 쌓았다.
4.2. 소련의 파르티잔
소련은 그 태동부터 파르티잔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는데 러시아 내전 때부터 파르티잔은 시베리아, 극동,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지역민들에 기반하여 백군과 각종 반소세력들을 사보타주하고 괴롭혀왔으며 이런 파르티잔 활동은 소련 건국의 민중 혁명적 성향으로 선전되었기 때문이다.러시아 내전당시엔 괴뢰국이였던 극동 공화국의 영토서 활동하던 현지 파르티잔과 적군 일부를 규합하여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으로 창설시켰다.
독소전쟁 초기에 소련 영토 깊숙히 진군한 독일군에 의해 점령지의 소련 정규군 전선과 행정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나치 점령지에서 자생된 파르티잔의 역할은 다시 중요해졌다. 나치의 주도로 점령지에서 학정을 벌이는 경우가 늘자 파르티잔 조직들은 나치에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의 지지를 받아 세를 불려 분대나 소대급에서 연대나 여단급 조직까지 확대할 수 있었다. 소련군도 이렇게 거대화된 빨치산 조직들을 지원하기 위해 무기와 탄약, 훈련과 보급 요원들을 공수해 지원했고 나치가 소련 밖으로 후퇴할 시기엔 아예 군복과 계급을 주고 정규군에 편입해 '파르티잔 사단'으로 개편했다.[7] 이 시기에 활동한 유명한 빨치산 지휘관으로 우크라이나 출신인 시디르 코브파크가 있다.
역설적으로 파르티잔이 과격해진 원인은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점령지의 약탈이었다. 친지를 적군에게 잃고 농지와 작물을 속절없이 빼앗겨 잃을 것도 없어지자 복수심에 불탄 많은 이들이 파르티잔에 들어가 점령군과 싸웠다. 가뜩이나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군으로서는 파르티잔이 철도를 파괴하고 후방 부대를 급습해 지휘관이나 병사들을 암살하거나 무기와 탄약 등을 탈취해 가는 것에 치를 떨었고 파르티잔이 잡히면 고문을 가하고 모욕적인 문구를 써넣은 플래카드를 들게 해 조리돌림한 뒤 공개처형하는 식으로 보복했다. 심지어 파르티잔이 아닌 일반인도 그들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사소한 지원을 했을 경우 같이 처벌했다.
이런 강경한 탄압은 오히려 파르티잔의 저항을 더 격렬하게 만드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전쟁이 소련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면서 소련군에 해방된 지역 출신의 파르티잔들이 정규군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베를린 전투에서 제국의사당 옥상에 소련 국기를 꽂은 밀리톤 칸타리야와 미하일 예고로프도 파르티잔 출신 병사들이었다.
4.3.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자세한 내용은 레지스탕스 문서 참고하십시오.4.4. 이탈리아의 파르티자노
자세한 내용은 레시스텐자 문서 참고하십시오.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과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 뒤 이탈리아를 점령했던 독일 국방군과 나치에 의해 옹립된 무솔리니 괴뢰정권에 대항해 싸웠던 이탈리아의 무장 저항집단인 레시스텐자[8]도 큰 활약을 보였다.
이탈리아가 추축국이었고 독가스를 통한 학살과 인권유린 등의 전쟁범죄를 다수 자행한 이력이 있었음에도 같은 추축국인 일본이나 독일과 다르게 그다지 심각하게 전범 국가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는 항복 후에 연합국으로 돌아서 특수지위국으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의 침략 전쟁에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찬성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연합군과 함께 연합하여 싸워 무솔리니를 직접 처단한 파르티자노들의 활약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파르티자노에 가담한 이들이 적지 않았으며 기독교계에서도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 기독교계 레시스텐자 대원들이 전후 이탈리아의 여당 자리를 장기간에 걸쳐 차지했었던 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의 핵심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이탈리아 헌병군은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 지절에는 독재정권의 수족으로서 기능했지만 무솔리니가 실각한 후에는 그를 체포하고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해방을 위해 나치 독일과 싸웠는데 이로 인해 나치에 단단히 찍혀 1943년 10월 7일에 해체당하고 장병들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 뒤에도 많은 장병들이 파르티자노에 가담하여 계속 나치에 저항하였다고 한다. 전후 추산으로는 나치와의 전쟁으로 최소 2,700명이 전사하고 6,5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유고슬라비아 등 이탈리아 국외에서도 나치에 맞서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때문에 전후 이탈리아 정부는 이들에게 훈장을 추서하여 공을 치하했다.
소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시리즈의 주인공 돈 카밀로 신부와 페포네 읍장은 파르티자노에서 함께 싸운 전우였다. ABE전집의 '초록 불꽃 소년단'도 소년 파르티자노들의 활약을 다룬 청소년 소설이며 관련 민중가요로 벨라 챠오가 있다.
4.5.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자세한 내용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문서 참고하십시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역시 빨치산으로 유명하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대표적인 저항조직은 체트니크의 세르비아계와 티토의 공산주의 파르티잔 두 가지가 있었다. 티토는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연합국에게 대독전선에서 파르티잔의 활약상을 효과적으로 선전한 반면 체트니크는 전쟁 중후반부터 추축국 부역 혐의가 생기고 빨치산 토벌을 하기도 하여 민심이 기우는 바람에 전후 민중과 승전국의 암묵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티토가 이끄는 파르티잔의 활동은 유고에서 독일을 몰아내고 2차 대전의 승전국이 되는 데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9] 이같은 파르티잔 전쟁 수행의 성공적인 경험은 냉전 시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국가방위 계획 수립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방위 계획은 기본적으로 침공군을 지연시키며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 설계되었던 유고의 준군사조직인 영토방위군은 향후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각국의 군대로 변모하였다. 외적을 상대로 계획했던 비정규전이 유고 구성국간의 비정규전이 되어 서로간에 총부리를 돌렸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파르티잔은 군사정책뿐만 아니라 유고와 그 후신 국가의 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어 하나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대표적인 예시로 세르비아의 축구팀 이름에는 파르티잔까지 붙는다(파르티잔 베오그라드).
4.6. 대한민국에서의 빨치산
어원은 빨간색이나 빨갱이와는 전혀 무관하지만 한국에서는 공산당의 상징 색상인 빨간색이 쉽게 연상되어 공산 게릴라를 쉽게 떠올리게 하다 보니 특히 공산 게릴라 한정으로 이 단어가 쓰였으며 우연히 글자까지 딱딱 맞아 떨어져 빨갱이 치[10]들이 산에서 활동해서 빨치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실제로 남한 최후의[11] 공산 빨치산들이 지리산[12] 자락에서[13] 빨치산 유격전을 벌이다가 소탕당한 것이 잘 알려진 것도 한 몫 했다. 애초에 비하적인 명칭이었다면 북한에서 빨치산 영웅[14] 운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렇다보 니 '파르티잔'보다는 '빨치산'이 워낙 잘 알려져서 한국어의 외래어 단어 중 껌, 빵 등과 함께 된소리 발음/표기가 허용되는 몇 안 되는 단어 중 하나다.
빨치산이라는 단어가 공산 게릴라를 뜻하는 용법으로 자주 사용되다 보니 정부기관마저 뜻을 혼동하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당시 국방부는 홍범도의 공산주의 활동 증거라면서 "홍범도가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고 발표했는데 한 기자가 국방부 대변인에게 "독립운동 당시 국가가 없었기에 비정규군일 수밖에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은 다 빨치산인 건데, 그걸 '빨치산(공산 게릴라)'이라고 하면 얼마나 부끄럽고 천박하냐"며 원어와 공산 게릴라의 의미를 모두 지적하기도 했다. 후술하겠지만 공산 게릴라 한정이 아니라 유엔군 산하 유격부대와 국군 산하의 게릴라 부대들도 빨치산/파르티잔으로 지칭했다.
4.6.1. 일제강점기의 무장투쟁단체
이 외에도 일본이 총동원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여 산으로 숨어들어가서 빨치산 투쟁을 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후 조선인민유격대에서 활동하게 되는 남도부가 이때부터 빨치산 생활을 시작했다.
4.6.2. 6.25 전쟁 당시 빨치산
4.6.2.1. 친대한민국 빨치산
"유격전과 비슷한 용어로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 흔히 사용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군과 싸우면서 등장한 빨치산이라는 용어는 싸우는 사람 혹은 그 단체를 뜻하고, 스페인 산간지역에서 프랑스군과 투쟁하면서 사용된 게릴라전은 소규모 전투행위를 의미한다. 이처럼 각 국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빨치산전 혹은 게릴라전이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6.25 전쟁 당시 국군과 미군은 게릴라전, 혹은 빨치산전을 혼용하였다. 1952년 11월 유격대 간부들의 훈장을 상신할 때 게릴라대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백령도 레오파드기지사령부에서 발행한 동키 제13부대의 대원 신분증에는 ‘애국 빨치산부대의 일원’이라고 했다.1952년 11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한국인 유격부대를 주한 유엔군 유격부대(UNPFK)에서 보듯이 파르티잔(partisan)이라고 했다. "
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4~5쪽
친대한민국 빨치산들도 한국에선 빨치산으로 불렀다. 이후 빨치산 토벌대장이 되는 차일혁도 원래 북한군 남하 당시 게릴라 활동을 하던 사람이다. 차일혁은 특히 중국공산당[15]과 함께 항일 빨치산 투쟁을 한 적이 있는 사람이였기 때문에 큰 성과를 거두고 이후 빨치산 토벌 작전도 성공적으로 진행할 수 있었다.조성훈, 한국전쟁의 유격전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4~5쪽
-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 1950년 6월 2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불암산에서 창단하여 9월 21일까지 북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부대.
- 호림부대 - 1949년 2월에 창설된 부대로 빨치산 보다는 육본 정보국 산하의 특수부대. 강원도 양양, 인제에서 주로 활동했으며 1949년 7월 고성군에 침투하였다가 부대원 대부분이 사살-생포당하는 궤멸적 피해를 입었다. 간신히 귀환한 극소수의 대원들은 호국군, 대한민국 국군에 편입됐고 이후 지리산, 팔공산, 보현산, 한라산 등지에서 빨치산 토벌 임무를 맡았다.
- 미 제8240유격부대 - 한국에서는 통칭 켈로부대로 유명하다. 북한 도서 지역과 경기도, 강원도 같은 전선 인근에서 활동하였다.
- 영도유격대 - CIA가 비밀공작활동을 위해 창설한 부대로 함경도, 강원도 출신 피난민들로 구성되어 북한 전역에 투입되었다.
- 백골병단 -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채명신 장군이 지휘했다. 1951년 1월부터 3월까지 강원도에서 극히 짧은 기간 활동하였으나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 제1사단 제5816유격부대 - 연백 개풍 옹진 지역에서 활동했던 유격부대이다
- 제2사단 독수리유격대 - 포천군 신읍에서 60명 규모로 창설된 자경단으로 이후 국군에 흡수됐다.
- 제 8사단 유격대
- 동키부대, 백호부대 - 1.4 후퇴 당시 서해 5도로 피난온 황해도민들로 구성된 부대. 규모는 약 5,000~8,000명이었다. 백령도를 비롯한 서해 5도를 중심으로 황해도 지역에 투입되었으며 종전까지 적군 4,000명을 사살하였다.
- 민간 자생 빨치산: 주로 개전 초 북한군 점령지역의 민간인들과 낙오한 국군 장병들이 결성한 레지스탕스 성향의 부대들. 전라북도 보라매구국대 →진안결사대, 전라남도 완도 청산향토방위결사대, 강원도 화무결사대, 강원도 춘성군 남면 반공투쟁 공작 산악대, 강원도 진동리 한청결사대, 경기도 북면 ‘임산 의혈대’, 초옥동 결사대 가평읍 반공 산악공작대, 태극단, 조양단, 해동의사단 등 굉장히 많다.
4.6.2.2. 반대한민국 빨치산
자세한 내용은 조선인민유격대 문서 참고하십시오.엄밀하게는 조선인민유격대 이외에도 미군정 시절 항미 빨치산 투쟁을 한 단체는 여러 곳이 있으나 기록이 부족하다.
4.7. 북한에서의 빨치산
4.7.1. 동북항일연군
빨치산은 북한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일단 주석인 김일성부터가 동북항일연군을 통한 게릴라전으로 경력을 쌓았고 당시의 김일성 부대 인물들이 북한을 구성하는 초기 멤버들이 된다. 동북항일연군 이후 김일성이 조직한 조선인민혁명군을 비롯한 다양한 부대들은 조선인민군으로 전통이 내려왔다고 보며 북한이 국가 정통성을 항일 빨치산에서 찾는 근원이 된다.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과거 6.25 전쟁 때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16] 인민군 부대와 지역민들이 '제 2 전선'을 조직해서 북한 중, 남부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벌였다고 하며 그렇게 북한의 지역을 해방하고 미군과 국군의 보급선에 큰 타격을 줘서 북한의 인민군 부대가 남하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서울까지 해방했다고 한다.
실제로 김일성이 빨치산 투쟁을 하였고 김일성 이외에도 항일 빨치산 출신들이 북한 정권을 잡은 것은 사실이지만[17] 북한의 주장이 상당히 과장되었으며 실제로 한국이 독립하게 된 것은 소련과 미국의 도움과 다른 독립운동 단체의 투쟁도 큰데 이를 무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4.7.2. 치안대
치안대라고 하면 북진 당시 북한 지역의 치안 유지를 위해 조직되었다. 중공군 개입 이후 게릴라가 된 진짜 '치안대' 도 포함되지만 북한 내부 게릴라 단체가 한두개는 아니었기 때문에 치안대 뿐만 아니라 무궁화 무장청년단[18], 조선인민유격대 등의 단체도 있었고 기독교인들이나 아나키스트들도 독자적인 무장 단체를 조직하여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9]4.7.2.1. 우익
북한에도 소수이기는 하지만 반공 빨치산이 존재했다. 북한의 반공 빨치산들은 이북에서 치안대라고 불리며 '치안대 출신'이란 단어는 북한에선 적대계급잔여분자라는 뜻이라 심한 욕설이자 낙인이다.[20]치안대는 한국군이 북진 당시 북한 지역에 반공 인사들을 중심으로 결성했는데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대다수는 공산군의 보복 때문에 국군과 유엔군의 따라서 1.4 후퇴 당시 같이 내려갔다. 전선은 남쪽으로 내려가긴 했지만 공산군에 열악한 해상장악력으로 인해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 도서 지역은 대다수 국군과 유엔군이 장악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연출됐고 이로 인해 황해도 평안도 해안지역 에서 활동하던 치안대, 반공 주민 일부가 도서지역으로 자력으로 탈출하였다. 중공군의 하계 동계 공세가 실패로 끝나고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까지 북진하자 일부 치안대원들이 수복지구에서 경찰 국군의 보조 대원 역할을 하다가 흡수되었다.
4.7.2.2. 좌익
사실 북한의 반정부 빨치산들 중 상당수가 좌익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숙청을 피해 입산하게 된 것일 수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하다. 다만 일부 기록으로 보아 그런 경우가 실존하긴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21]4.8. 베트남 전쟁에서의 빨치산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은 계속된 정부의 부정부패로 인해 많은 국민들의 마음이 돌아선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북베트남의 호찌민은 이미 공산주의로 북베트남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북베트남에서 큰 인기는 물론 남베트남 국민들에게도 인기가 높은 상황이였다.그래서 남베트남의 국민들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일명 베트콩을 결성하여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공산화시키겠다는 무장투쟁이 이어졌고 이에 북베트남이 베트콩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이 패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남베트남, 미국과 동맹국은 베트콩을 토벌하려 했지만 정글에서 숨어다니면서 공격하는 베트콩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베트콩들이 몇몇 남부 지역을 점령한 지도
4.9.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의 파르티잔
멜리토폴, 헤르손 등과 같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기에 빠르게 점령된 지역에서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 활동[22]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 러시아군이나 러시아에 부역하는 우크라이나인을 노린다고 한다. 부역자의 차량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심지어 대낮에 무장한 파르티잔들이 순찰중인 러시아군 보병 분대나 검문소에 총격을 가하는 등의 사례까지 보고되고 있다.9월 초순에 시작된 우크라이나군의 쾌진격엔 그동안 암약해 왔던 파르티잔들의 대대적인 봉기도 한 축을 담당했다고 한다. 매 전선마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군과 파르티잔 사이에 양면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반전/친우크라이나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에 위치한 군 징집 센터와 선전물에 화염병을 던져 전소시키거나 군용 화물열차 운행을 방해하는 식으로 활동한다.
벨라루스인들도 벨라루스에서 러시아로 가는 군용 화물열차 운행을 방해하는 식으로 활동한다.
4.9.1. 목록
4.9.1.1. 우크라이나
- 베르댠스크 파르티잔군
- 노란리본
4.9.1.2. 러시아
- 무정부 공산주의자 연맹
- 아테쉬
- 러시아 국민공화군
4.9.1.3. 벨라루스
5. 가공의 빨치산 단체 혹은 인물
- 조선인민유격대를 주제로 한 소설의 대다수의 인물
- 파르티잔 1941 - 주인공, 동료들
- 메이플스토리 - 레지스탕스(메이플스토리)
- 스타워즈 - 저항군(스타워즈)
- 반란 주식회사 - 반군
-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 - 통일동방연맹
[1] 특히 이들은 Partisan Rangers라고 자칭하고 파르티잔 전술을 총정리하기까지 했다. 다만 최초의 문서화는 프로이센 왕국군의 한 공병 대위가 7년 전쟁 중에 했다.[2] '편의'란 사복, 즉 민간인 복장을 가리키는 구식 표현이다.[3] 정확히는 제1 의정서[4] 사실 대부분의 빨치산들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며 싸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5] 물론 당시 스페인 정규군도 쿠데타군이던 공화파에 남은 편이던 유럽 주요 열강에 비하면 장비나 훈련의 질이 모로코 식민지 외인부대 빼고는 한두단계 아래이기도 했다.[6]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아무리 유럽 기준에서는 2류라고 해도 일단 정규군과 말 그대로 내전 발발 하루 전에는 빨래방 이모, 정육점 아저씨로 일하다 총 잡은 민간인들의 대결이다.[7] 맥심 기관총 같은 중화기는 물론, T-34 같은 전차도 한두대 굴리는 파르티잔 부대도 있었다. 영화 컴 앤 씨에도 자세히 묘사된다.[8] 파르티자노(partigiano)라고도 불린다.[9] 2차 대전 이후 소련군의 점령하에 놓인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괴뢰 정권이 아니라 엄연히 자력으로 나치 독일을 몰아냈기 때문에(독소전 내내 나치는 1개 집단군을 유고슬로비아에 박아둬야 했으며 전쟁 말기에는 패배해 쫓겨났다.)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여기에 서방세계가 소련의 영향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티토의 독자노선을 지지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종속국 처지가 아닌 제3세계의 주요 국가로써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10] 사람을 낮잡아 이를 때 쓰는 말이다.[11] 물론 엄밀하게 보면 이후 운동권에서도 도시 유격전을 시도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하지는 못했다.[12] 엄밀하게는 최후의 조선인민유격대 부대였던 남도부 부대는 지리산이 아닌 신불산과 팔공산 일대에서 결사 항전했다.[13] 물론 실제로는 행동대와 조선인민유격대 서울시당과 같은 도시유격대도 빨치산으로 지칭한다.[14] 물론 북한에서 말하는 빨치산 영웅은 조선인민유격대가 아니라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만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외의 항일, 항미 빨치산에 대해서는 중립적 내지는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는 김일성 이외의 빨치산 세력이 김일성 세력의 독재를 방해한다고 판단해서다. 실제로 조선인민유격대가 버려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15] 중국공산당 계열 유격대에서 활동하다가 해방 이후 한국으로 온 사람은 꽤 있었다고 한다.[16] 이때 들이대는 자료가 로동신문의 전신인 조선인민군 일보에 "조국의 촌토를 피로써 사수하자."고 나온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17] 다만 친일 계열 인사도 일부 있었다. 물론 8월 종파사건 당시 대부분 숙청되었다.[18] 당시에나 지금에나 상세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지금까지도 존재는 하는(다만 이름만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반정부 게릴라 단체로 추정된다.[19] 다만 북한의 특성상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 존재했거나 존재한다는 것 자체는 사실에 가깝지만 실체는 알기 어렵다.[20] 출처: 탈북자 동지회[21] 6.25 전쟁 당시 징계를 피하기 위해 입산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22] 아무래도 과거 공산권이었던 지역이었다 보니 대외적으로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는 레지스탕스나 게릴라라는 단어보다 파르티잔이나 빨치산이라는 단어로 저항군을 표현하는 매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