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8:29:20

배헌(후조)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1권 「전조록일(前趙錄一)」 2권 「전조록이(前趙錄二)」 3권 「전조록삼(前趙錄三)」 4권 「전조록사(前趙錄四)」
유연 · 유화 유총 유총 유총 · 유찬
<rowcolor=#fff> 5권 「전조록오(前趙錄五)」 6권 「전조록육(前趙錄六)」 7권 「전조록칠(前趙錄七)」 8권 「전조록팔(前趙錄八)」
유요 유요 유요 유선 · 유성 · 유익 · 유윤
<rowcolor=#fff> 9권 「전조록구(前趙錄九)」 10권 「전조록십(前趙錄十)」 11권 「후조록일(後趙錄一)」 12권 「후조록이(後趙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석륵 석륵
<rowcolor=#fff> 13권 「후조록삼(後趙錄三)」 14권 「후조록사(後趙錄四)」 15권 「후조록오(後趙錄五)」 16권 「후조록육(後趙錄六)」
석륵 석홍 석호 석호
<rowcolor=#fff> 17권 「후조록칠(後趙錄七)」 18권 「후조록팔(後趙錄八)」 19권 「후조록구(後趙錄九)」 20권 「후조록십(後趙錄十)」
석호 석세 · 석준 · 석감(鑒) 석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21권 「후조록십일(後趙錄十一)」 22권 「후조록십이(後趙錄十二)」 23권 「전연록일(前燕錄一)」 24권 「전연록이(前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외 모용황
<rowcolor=#fff> 25권 「전연록삼(前燕錄三)」 26권 「전연록사(前燕錄四)」 27권 「전연록오(前燕錄五)」 28권 「전연록육(前燕錄六)」
모용황 모용준 모용준 모용위
<rowcolor=#fff> 29권 -2l 「전연록칠(前燕錄七)」 30권 「전연록팔(前燕錄八)」 31권 「전연록구(前燕錄九)」 32권 「전연록십(前燕錄十)」
모용위 토욕혼· 모용한· 모용인· 모용각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33권 「전진록일(前秦錄一)」 34권 「전진록이(前秦錄二)」 35권 「전진록삼(前秦錄三)」 36권 「전진록사(前秦錄四)」
부홍 부건 부생 부견
<rowcolor=#fff> 37권 「전진록오(前秦錄五)」 38권 「전진록육(前秦錄六)」 39권 「전진록칠(前秦錄七)」 40권 「전진록팔(前秦錄八)」
부견 부견 부비 부등
<rowcolor=#fff> 41권 「전진록구(前秦錄九)」 42권 「전진록십(前秦錄十)」 43권 「후연록일(後燕錄一)」 44권 「후연록이(後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수 모용수
<rowcolor=#fff> 45권 「후연록삼(後燕錄三)」 46권 「후연록사(後燕錄四)」 47권 「후연록오(後燕錄五)」 48권 「후연록육(後燕錄六)」
모용수 모용보 모용성 모용희
<rowcolor=#fff> 49권 「후연록칠(後燕錄七)」 50권 「후연록팔(後燕錄八)」 51권 「후연록구(後燕錄九)」 52권 「후연록십(後燕錄十)」
모용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53권 「후진록일(後秦錄一)」 54권 「후진록이(後秦錄二)」 55권 「후진록삼(後秦錄三)」 56권 「후진록사(後秦錄四)」
요익중 요양 요장 요흥
<rowcolor=#fff> 57권 「후진록오(後秦錄五)」 58권 「후진록육(後秦錄六)」 59권 「후진록칠(後秦錄七)」 60권 「후진록팔(後秦錄八)」
요흥 요흥 요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61권 「후진록구(後秦錄九)」 62권 「후진록십(後秦錄十)」 63권 「남연록일(南燕錄一)」 64권 「남연록이(南燕錄二)」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모용덕 모용초
<rowcolor=#fff> 65권 「남연록삼(南燕錄三)」 66권 「하록일(夏錄一)」 67권 「하록이(夏錄二)」 68권 「하록삼(夏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혁련발발 혁련창 혁련정
<rowcolor=#fff> 69권 「하록사(夏錄四)」 70권 「전량록일(前涼錄一)」 71권 「전량록이(前涼錄二)」 72권 「전량록삼(前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궤 장실 장준
<rowcolor=#fff> 73권 「전량록사(前涼錄四)」 74권 「전량록오(前涼錄五)」 75권 「전량록육(前涼錄六)」 76권 「촉록일(蜀錄一)」
장중화 · 장령요 · 장조 장현정 · 장천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특
<rowcolor=#fff> 77권 「촉록이(蜀錄二)」 78권 「촉록삼(蜀錄三)」 79권 「촉록사(蜀錄四)」 80권 「촉록오(蜀錄五)」
이류 · 이웅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1권 「후량록일(後涼錄一)」 82권 「후량록이(後涼錄二)」 83권 「후량록삼(後涼錄三)」 84권 「후량록사(後涼錄四)」
여광 여소 · 여찬 여륭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85권 「서진록일(西秦錄一)」 86권 「서진록이(西秦錄二)」 87권 「서진록삼(西秦錄三)」 88권 「남량록일(南涼錄一)」
걸복국인 · 걸복건귀 걸복치반 · 걸복모말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rowcolor=#fff> 89권 「남량록이(南涼錄二)」 90권 「남량록삼(南涼錄三)」 91권 「서량록일(西涼錄一)」 92권 「서량록이(西涼錄二)」
독발녹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이고 이흠
<rowcolor=#fff> 93권 「서량록삼(西涼錄三)」 94권 「북량록일(北涼錄一)」 95권 「북량록이(北涼錄二)」 96권 「북량록삼(北涼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저거몽손 저거무건 {{{#!folding [ 펼치기 · 접기 ]
<rowcolor=#fff> 97권 「북량록사(北涼錄四)」 98권 「북연록일(北燕錄一)」 99권 「북연록이(北燕錄二)」 100권 「북연록삼(北燕錄三)」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풍발 풍홍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1. 개요

裴憲
생몰연도 불명

서진후조의 인물. 자는 경사(景思). 사주(司州) 하동군(河東郡) 문희현(聞喜縣) 출신. 배해의 아들.

2. 생애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무언가를 가르치면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깨달았고, 호걸을 흉내내며 협객 노릇을 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약관의 나이에 이르렀을 때는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남들의 주장을 들을 줄 알게 되었고, 엄중히 유학 공부와 수양에 매진하여 전국을 유람하던 다른 명문가 자제들과는 달리 수년간 고향에 머물렀다. 배헌의 명성은 널리 퍼져 진군(陳郡)의 사곤, 영천(穎川)의 유개(庾凱) 등 당대 명사들은 그와 교류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후 배헌은 서진 조정에 임관하여 동궁(東宮)의 시강(侍講)에 임명되었고, 황문이부랑, 시중을 역임하였다가 동해왕 사마월에 의해 예주(豫州)자사, 북중랑장, 가절로 옮겨졌다.

영가 2년(308년) 9월, 한(漢)의 유연이 진동대장군 왕미와 보한장군 석륵을 보내 업(鄴)을 침공하자, 업을 지키던 서진의 정북장군 화욱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동해왕 사마월은 한나라 군대가 황하 이남으로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헌에게 명을 내려 백마(白馬)에서 왕미의 군대를 막게 하고, 거기장군 왕감(王堪)을 동연(東燕)에 주둔시켜 석륵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영가 3년(309년) 11월, 동해왕 사마월의 명령에 따라 거기장군 왕감과 합류하여 여양(黎陽)에 한나라의 평동대장군 석륵이 남겨둔 군대를 쳤다. 당시 신도(信都)에서 서진의 기주(冀州)자사 왕빈(王斌)을 격파한 석륵이 그 소식을 듣고 다시 여양으로 돌아오니, 서진의 위군(魏郡)태수 유구(劉矩)는 위군을 들어 석륵에게 투항하였다. 이로써 석륵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배헌은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토벌을 중지한 뒤 회남(淮南)으로 물러났고, 왕감도 퇴각하여 창원(倉垣)을 진수하였다.

영가 5년(311년) 6월, 건강(建康)에서 할거하는 낭야왕 사마예가 백관을 설치하고 사실상 서진 세력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낭야왕 사마예는 건강을 중심으로 강남의 호족과 지방관들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배헌과 강주(江州)자사 화일만은 서진 조정의 명을 우선시하여 낭야왕 사마예의 세력에 저항하였다. 이에 낭야왕 사마예는 양주(揚州)자사 왕돈, 역양(歴陽)내사 감탁, 양열장군 주방 등을 보내 화일을 패사시키고 강주를 장악해버렸다. 화일보다 세력이 약했던 배헌은 두려운 나머지 북쪽으로 도망쳐 유주(幽州)자사 왕준에게 의탁하였다.

영가 5년(311년) 7월, 왕준이 사마씨 황족을 데려와 황태자로 옹립하고, 승제하여 부하들에게 관직을 분배하면서 배헌을 상서로 삼았다.

건흥 2년(314년) 2월, 석륵이 왕준을 죽이고 붙잡은 왕준 휘하의 정예병 10,000명을 전부 몰살시키자, 조숭(棗嵩) 등 왕준의 부하들이 각자 살기 위해 저마다 석륵의 군문으로 나아가 앞다투어 사죄를 하고 뇌물을 바쳤다. 이때 상서 배헌과 종사중랑 순작(荀綽)만이 집에 머물며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니, 본래 그들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석륵은 배헌과 순작을 소환해 물었다.
"왕준은 학포하여 유주의 사람이나 귀신이나 그를 똑같이 미워하였다. 이에 나는 천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고 주살함으로써 이곳의 백성을 구원하였으니, 모두가 즐거워 경하하고 길 가는 곳마다 내게 감사를 표하였다. 한데, 그대들은 왕준과 악(惡)을 함께 행하여 오만한 위세를 떨치고 진실된 신뢰를 스스로 두절시켰다. 그대들은 방풍지륙(防風之戮)을 하여 장차 누구에게 귀순하려 하는가?"
그러자 배헌은 안색이 변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며 답하였다.
"신들의 집안은 대대로 진나라의 영광과 은혜 덕에 융성히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왕준은 흉폭하고 거칠었으나 진나라의 번(藩)이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비록 이번의 성화(聖化)는 기뻐할 일임이 틀림없지만 의(義)는 성(誠)보다 우선시 해야하는 법입니다. 과거 무왕주왕을 토벌한 후 상용(商容)이 사는 마을 어귀에서 그를 칭송하였는데, 상용이 주왕 배반하고 토벌에 가담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명공께서 덕과 의가 아닌 위엄과 형벌로 다스리려 한다 해도 신하로서 방풍지륙을 행하는 것 역시 도리라 할 수 있습니다. 청컨대 죽음으로 그 책임을 지겠습니다."
말을 마친 배헌은 석륵에게 배례도 하지 않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석륵은 매우 기뻐하며 즉시 배헌과 순작을 빈객의 예로써 대우하고, 뇌물로 목숨을 구걸하던 주석(朱碩), 조숭 등을 붙잡아 전부 참수하였다.

석륵이 왕준의 측근들의 가산을 모두 몰수해보니 각자 수만 금을 헤아렸으나, 배헌과 순작의 집안에서 나온 재산은 책 100여 권과 소금과 쌀 10여 곡이 전부였다. 이를 전해들은 석륵은 장사 장빈에게
"그들의 명성은 거짓이 아니었구나. 나는 유주를 얻은 것보다 그 두 사람을 얻은 것이 더 기쁘도다."
라 말하였다. 이후 배헌을 종사중랑, 순작을 참군으로 삼고 각기 옷과 마차를 하사하였다.

광초 원년(318년) 12월, 근준의 반란이 진압된 후, 석륵의 명령에 따라 석회(石會)와 함께 반란군에 의해 파괴된 영광릉(永光陵)과 선광릉(宣光陵)을 수리하였다.

광초 2년(319년) 2월, 석륵이 조왕(趙王)을 자칭하자 배헌은 경학좨주(經學祭酒)에 임명되었고, 장락(長樂)태수, 낭중령을 역임하였다.

건평 원년(330년) 2월, 석륵이 대조천왕(大趙天王)을 자칭하고 배헌을 상서로 삼았다. 이후 석륵이 황제를 칭했을 때는 왕파(王波)와 더불어 조정의 의례를 세우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였다. 또, 《동정의(東耕儀)》를 편찬하여 농법을 정리하니, 명제 석륵은 기뻐하며 배헌을 태중대부로 임명해 신임하였고, 오래지 않아 사도로 승진시켰다.

건평 4년(333년) 7월, 명제 석륵이 붕어하고 권력을 잡은 승상 석호는 명제 석륵이 아끼던 대신들을 대부분 숙청했지만 배헌은 오히려 예우가 더해졌다.

건무 3년(337년) 10월, 배헌의 두 아들 배읍(裴挹), 배곡(裴瑴)은 둘 다 나란히 문재(文才)로 이름을 날렸는데, 배곡은 조정에 임관하여 태자중서자, 산기상시를 지내면서 호걸이나 협객들과 어울리며 술 마시고 인물에 대해 평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러한 배곡의 취미로 인해 하간(河間) 지역 출신의 학어(郝魚)라는 자와 갈등하게 되었고, 결국 학어는 배곡의 말을 훔쳐 단부로 달아나다가 도중에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석호는 단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기에, 학어는 심문 과정에서 자신은 배곡의 명령에 따라 단부에 토벌 정보를 유출하려 했다 자백하면서 배곡을 모함하였다. 이때 운이 없게도 단부의 수령인 단요(段遼)가 먼저 후조를 공격해오니, 석호는 학어의 자백을 그대로 믿고 배읍과 배곡을 붙잡아 모두 주살하였다. 그들의 아버지인 배헌 역시 연좌되어 면직당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직되어 우광록대부, 사도, 태부를 역임하고 안정군공(安定郡公)에 봉해졌다.

배헌은 여러 현직을 역임하면서도 공을 세우는 일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항상 조정의 회의에 참석해도 가장 말이 적었고, 그저 세상사에 무심한 듯한 태도로 관직에 임하였다. 그러나 워낙 덕성으로 명성이 높아 배헌은 죽을 때까지 존중과 예우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아들들이 모두 주살당해, 사후 같은 집안 사람인 배치(裴峙)의 아들 배우(裴邁)가 그의 후사를 이었다.

3. 둘러보기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유화 · 유선, 유총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석홍 · 장빈, 석계룡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배억 · 고첨, 모용황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왕타, 부견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