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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선지자 25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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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000><colcolor=#fff> 무함마드 محمد | |||
이슬람의 수니파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것을 금기시하기에 이슬람 서예를 이용해 무함마드를 나타낸다. | |||
이명 | 카심의 아버지(أبو القاسم)[1], 신의 사도(رسول الله)[2] | ||
본명 | 아불카심 무함마드 이븐 압둘라 이븐 압둘무탈립 이븐 하심(أَبُو ٱلْقَاسِم مُحَمَّد ٱبْن عَبْد ٱللَّٰه ٱبْن عَبْد ٱلْمُطَّلِب ٱبْن هَاشِم)[3][4] | ||
출생 | 570년[5] | ||
아라비아 히자즈 메카 (現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주 메카) | |||
사망 | 632년 6월 8일 (향년 62세) | ||
아라비아 히자즈 메디나 (現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주 메디나) | |||
국적 | 이슬람 제국 | ||
부모 | 아버지 압둘라 이븐 압드 알 무탈립, 어머니 아미나 빈트 와브 | ||
배우자 | 카디자 빈트 쿠와일리드, 아이샤 빈트 아비 바크르 외 11명 | ||
자녀 | 아들 카심, 압둘라, 이브라힘, 자이드 이븐 하리사[입양] 딸 자이납, 루카야, 움쿨숨, 파티마 | ||
종교 | 이슬람교 | ||
재임 기간 | 움마의 지도자 | ||
622년 ~ 632년 6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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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브라함, 모세, 예수 등을 통솔하는 무함마드 | 가브리엘을 영접하는 무함마드 |
수니파가 아닌 종파는 무함마드의 얼굴이 묘사된다. |
하나님이 보낸 자[7]
사람들이여! 하나님도 한 분이요, 우리의 선조도 한 분으로 우리 모두는 아담의 자손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훌륭한 인간은 정의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아랍인이 비아랍인에게 우월한 것 없이 모두가 평등합니다.
이슬람 제국의 무역가 출신 교주.[8]아라비아 반도의 제(諸) 부족을 이슬람의 기치 하에 통합함으로써 이슬람 정복의 초석을 둔 상징적 인물로, 이슬람에서 파생된 드루즈교, 알라위파, 시크교 등에서도 존경받는 예언자이다.
2. 명칭
2.1. 실명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무함마드'는 실제 사용한 이름이 아니라 자칭이며, 실제 이름은 쿠삼(قُثَم / Quṯam)이라는 설이 존재한다.관련 글. 당시 아랍 기독교계에서는 위 성경 구절의 '협조자(παράκλητος, 원문상에는 παράκλητον)'를 '무함마드'라 번역하고, '무함마드'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오리라 기대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0]
즉 스스로 '무함마드'라고 자칭함으로써 자신이 예수가 말한 그 협조자라고 할 의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극히 일부분으로써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여겨지는 성 쿠란을 연구해온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이름을 의심하지 않는다. 무함마드가 유아였을 때 한 유대인이 그(무함마드)의 신체에서 무엇인가를 목격하곤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임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슬림들은 성경 또한 하나님께서 내린 말씀을 기록한 성서라는 것을 믿지만, 자신들의 혈통에서 선지자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이 무함마드를 질투해 성경의 내용을 지우거나 변형하여 지금의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린 그대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2. 표기
영어식 표기로는 마호메트(Mahomet)가 관례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라틴어 표기인 마호메투스(Mahometus)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오늘날에는 아랍어 원어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무함마드(Muhammad)도 많이 쓰인다. 아랍 문자로는 محمد라고 쓰며 모음을 붙여 쓰면 مُحَمَّد(Muḥammad, [muˈħammad])로 표기된다.한국어권에서도 2000년대까지만 해도 영어식 표기를 차용하여 마호메트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 국립국어원에서는 마호메트와 무함마드 두 가지 표기를 다 인정하며, 점차 아랍어를 반영한 무함마드라는 표기가 정착되고 있는 편이다.
무슬림들은 '마호메트'라는 표현에는 그를 '악마'로 여기는 서구의 경멸적 시각이 담겨있다고 여긴다. 유럽에서 말하는 악마 바포메트가 무함마드의 이름이 약간 변형된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무슬림들의 이런 생각과 달리, 유럽에서 무함마드를 마호메트라고 표기하게 된 것은 무함마드의 오스만어 표기 '메흐메트(محمد / Mehmet)'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튀르키예는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유럽 대륙에 직접 발을 걸치고 있던 이슬람 국가였으며, 유럽에서는 주로 튀르키예를 통해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였다. 사실 십자군 전쟁을 제외하면 유럽이 이슬람 세력과 직접 접촉하게 된 것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침공한 이후였다. 또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는 15세기 이래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권 인물이었다. 사실 같은 이슬람권이라 해도 레반트 일대나 이란에서는 튀르키예인을 비롯한 튀르크인들을 무척이나 고깝게 보기 때문에 저런 주장이 나오는것도 마냥 이상한 일은 아니기는 하다.
《구당서》·《신당서》에서는 마하말(摩訶末), 《명사》에서는 모한맥덕(謨罕驀德)이라는 음차 표기로 소개되어 있다.
튀르크권에서는 동명이인이 워낙 많기 때문인지 사도 무함마드를 가리킬 때는 본명보다는 예언자라는 뜻의 "Peygamber(페이감베르)"를 더 자주 쓴다.
3. 위상
이슬람을 타 종교로 보는 비무슬림 입장에서야 쉽게 '이슬람의 창시자'라고 하지만 이슬람 기준으로는 무함마드가 종교를 '창시'한 것은 아니므로 무슬림들은 결코 저런 식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이슬람에서는 이슬람이 우주가 창조될 때부터 있었으나, 잘못된 방법으로 인류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려보내었으나 이후 다시 종교가 기존의 순수함을 상실하자 그를 바로잡기 위한 최후의 예언자로서 무함마드를 내려 보냈다고 가르친다.[11]이슬람 기준으로 알라의 25번째 예언자이자 14번째 사도이다. 쿠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으로 더이상 예언자나 사도가 없다고 선언하였다.[12]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가장 바른 인간의 표본이자 위대한 인도자 겸 스승으로써 극진히 존경하며, 하루 5번 매 기도 때마다 신에게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축복을 기원한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는 무슬림 사회 및 개개인 생활의 지침서이며, 하디스와 쿠란에서 드러난 그의 행동 및 습관은 '순나'라 하여 무슬림들이 일상 속에서 따르려 노력한다. 애초에 무슬림 다수를 구성하는 수니파란 말이 순나에서 유래한 것이다.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에서는 무함마드를 정의와 도덕 그 자체로 여기다가 이것이 과해져 간혹 신격화하기도 하며, 알라와 함께 매일 수백번씩 되새기는 디크르를 행하기도 한다. 수피와 시아파의 성인 숭배 사상의 영향으로 온건 수니파 등 이슬람권 전반부에는 미묘한 무함마드 숭배 기류가 있어 왔고, 특히 '민속 이슬람'이라 하여 율법을 잘 모르는 민중들이 기존의 다신교나 그리스도교 행사들과 엮어 무함마드의 탄생을 기리는 마울리드 등 무함마드 관련 행사들에 적극 참여했다.
모스크 내에도 아랍어 캘리그라피로 무함마드를 큰 원판에 써서 걸어두곤 하는데, 특히 아야 소피아처럼 튀르키예에서 그렇게 한다. 이슬람의 2번째 성지인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 역시 무함마드의 무덤을 중심으로 세워진 모스크이고, 개인 숭배를 엄격히 금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지만 1년 내내 많은 인파가 몰려 무덤에 경의를 표하고 그 앞에서 특별 기도 (라우다)를 드린다. 무슬림의 의무 중 하나인 메카 순례 역시 무함마드가 지정한 방식대로 행해지며, 메카 주변의 아라파트 (라흐마) 산이나 히라 동굴 및 아카바 모스크 등에도 순례객들이 몰려 최근 정비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이스탄불의 톱카프 궁전 등지에는 무함마드의 외투, 검, 인장, 깃발, 신발, 수염, 치아 등 개인적인 물품들이 성유물이 대대로 칼리파들이 애지중지하며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성유물들에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고, 칼리파들이 권위를 세우기 위해 취임식이나 라마단 혹은 전쟁 시에 착용하기도 할 정도였다.
비록 19-20세기 이슬람 원리주의의 발현과 함께 이러한 '무함마드 숭배' 행사들은 걸프 아랍 나라들을 중심으로 비판을 받아 왔고,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무려 메카에 있던 무함마드의 생가까지 파괴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무슬림 민중들은 여전히 무함마드에 대한 존경과 숭배 사이의 애매한 태도를 견지하는 편이다. 비슷하게 무함마드의 가족과 그 후손들에 대한 존경 역시 (물론 시아파에서 제일 크지만) 종파를 막론하고 이어져 샤리프나 사이드가 존경을 넘어 요르단과 모로코의 하심 왕가처럼 권좌에 올라 최강의 정통성을 자랑하는 배경이 되었다.
4. 생애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5. 후손
하심 가문 | 알라위 왕조 |
요르단 국왕 | 모로코 국왕 |
압둘라 2세 | 무함마드 6세 |
역사상 수많은 귀족 가문들과 이맘들이 무함마드의 후예로 알려져 있거나 스스로 주장해왔다.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다 요절하여 부계 자손들이 내려오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후손들은 다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사이에서 나왔다. 이 둘 사이에서는 장남인 하산 이븐 알리와 차남 후세인 이븐 알리가 있고, 역사 속에 큼직한 발자취를 남긴 후예들은 대부분 이 둘의 후손이다. 파티마를 통한 무함마드의 후손은 '샤리프(شريف, sharif)'라고 불리는데, 이 호칭은 하산의 후손들에게 자주 붙여진다. 후세인의 후손들은 주로 '사이이드(سيد, sayyid)'라고 불린다. 또 무함마드의 후예는 알리의 후손이기도 하므로, '알리 씨족(العلويين, al-ʿAlawiyyīn)'이라고도 한다.
대략적인 각 세력들의 계보 |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파티마) · (수니파의 제4대 칼리파) · (시아파의 초대 이맘) | |
하산 이븐 알리 · (수니파의 제5대 칼리파) · (시아파의 제2대 이맘) | 후세인 이븐 알리 · (시아파의 제3대 이맘) |
하심 가문의 계보 |
알라위 왕조의 계보 |
이드리시 왕조의 계보 |
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무함마드의 43대 후손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이 주장대로면 현 영국 국왕 찰스 3세는 무함마드의 44대손이 된다. 그러나 이 주장이 사실이려면 40대가 넘는 그 기나긴 족보에 단 한 건의 조작도 없고 단 한 명의 사생아도 없어야 하며, 사실이라 한들 무함마드의 유전자는 약 17조 분의 1로 희석되었으니 흥미롭긴 하나 유의미한 혈연관계는 아니다.
6. 편견 및 고정관념
실로 그대는 경고자일 뿐으로 인간을 감독하며 강요하는 자가 아니라.
쿠란 88장 21~22절
쿠란 88장 21~22절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의 선지자로 마리아에게 말씀이 있었으니 이는 주님의 영혼이었노라. 주님과 선지자들을 믿되 ‘3’을 말하지는 말라.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벽에 새겨진 쿠란 구절
이슬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슬람이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함마드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서 숭배의 대상이 아니다.[13] 무슬림들도 무함마드의 완전성을 믿지 않으며, 그도 인간이기에 몇개의 실수를 하였다고 인정한다.[14] 그리스도교에서 예수가 결점이 없는 신이자 사람이었던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따라서 둘을 비교하는 것은 양측 종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극단적인 와하비즘 무슬림들은 20세기 초 무함마드의 부모의 무덤, 심지어 무함마드의 무덤을 폭파하려 시도하기도 하였다.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벽에 새겨진 쿠란 구절
이슬람은 유일신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며 신은 하나로, 몇 개로 분할될 수 없고 침범할 수 없는 불변의 절대자로 여긴다. 따라서 이슬람의 입장에서 성부, 성령, 성자가 동일한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교리는 다신교로서 배척해야 하는 사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는 이슬람에는 성직자 계급이 없으며, 타 종교인에 대한 포교는 원칙적으로 권장하지 않는다.[15] 이슬람은 개인과 신간의 직선적인 연결을 주장한다.[16]
7. 평가
무함마드 전기 제2권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이 위대한 생애에 대해 더 이상 읽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슬펐다.
마하트마 간디
마하트마 간디
기독교에서는 거짓 선지자로 보며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나, 그래도 일신교를 전파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었다.
한편으로 나폴레옹도 무함마드를 존경했다. 물론 신앙적으로 존경한것은 아니고 행정가 및 군인의 관점에서 존경한것으로 사회개혁 및 군사적 확장을 이룩하여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후계자들이 대제국을 이루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한것이었다.
8. 비판 및 논란
자세한 내용은 무함마드/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9. 대중매체
이슬람 문화권에서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 즉, 이슬람이 국교가 아닌 국가에서는 얼굴 묘사를 해야 하니 무함마드가 직접 등장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몇몇 작품들의 이슬람교 관련 에피소드에서는 무함마드와 여러 칼리파 인물들의 얼굴이 직접적으로 나온 적 있다. 반면 이슬람이 국교인 문화권에서는 '알라 외에 사람을 우상을 하면 안된다.'라는 원칙때문에 신의 대리인이라 평가받는 무함마드라 해도 그 원칙에서 제외되지 않았다. 그래서 초상화나 그의 동상 같은 것은 잘 찾아볼 수 없는 편이며 무함마드가 등장하는 그림이더라도 성스러운 자라는 의미도 담아서 얼굴은 묘사되지 않는 편[18]이 많지만 시아파에서는 수니파보다 이런 부분에서 관대한 편이며, 이란에서는 무함마드를 묘사한 초상화나 우편이 팔릴 정도이다. 이슬람 쪽에서 무함마드 얼굴이 직접 나온 그림이 있으면 십중팔구 시아파에서 그린 그림이다. 중세 시아파 경우 얼굴에 흰천을 쒸운 모습으로 등장한다.이슬람에 대한 영화를 보아도 무함마드는 화면에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일대기 영화인 The Message[19]에서는 카메라 시점이 무함마드인 것 같은 연출을 사용하여 얼굴을 보이지 않고도 등장인물들과 대화하는 독특한 연출 방법을 사용한다. 화면에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말을 하는 식으로 연기한다. 무함마드에 우상숭배는 금기이지만,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는 마지막 선지자인만큼 절대적인 존재이다. 쿠란 안니사(여성) 장의 80절을 보면, "선지자(무함마드)에게 순종하는 자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라(من يطع الرسول فقد أطاع الله)"라고 한다.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 2와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어떤 직위건 히스토리를 볼 수 있는데, 수니파와 시아파의 칼리파 직위 계보를 보면 다른 칼리파들은 다 그냥 랜덤생성 얼굴이지만 무함마드만은 정말 종교적으로 적절하게 구현되어,[20] 패러독스 인터렉티브의 역덕 기질이 정말 잘 발휘되었다.
비잔티움의 첩자에서는 ‘성 무아메트’라는 이름으로 작중 시점에서 이미 고인인 과거의 인물로 언급되며, 이슬람교를 창시하지 않은 대신 사산 제국의 침략을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피난 갔다가 정교회로 개종, 그 뒤로 종교 시인이 되어 많은 찬송가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사후 시성되어 작중 동로마 제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성인이 되었다.
10. 여담
무슬림들의 기록에 따르면 언변이 뛰어나고 배가 나오지 않고 날씬했던 미남이었다고 한다. 평소에 약간의 대추야자와 낙타유, 채소 등으로 소식을 하고, 고기도 먹기는 했지만 많이 먹지 않았으며. 매달 일정기간씩 단식도 병행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신도들에게 식욕을 통제하라는 충고나 건강 유지를 위해 적게 먹으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뚱뚱한 게 미덕이던 중세 사회에서는 이례적인 사례였다. 재미있게도 무함마드가 평소에 먹었던 식단과 생활습관이 현대적인 의미의 웰빙에 부합되기 때문에, 비만으로 골머리를 앓는 많은 이슬람 국가에서 다이어트 캠페인을 할때마다 선지자의 식단과 생활습관을 따라해서 체중감량을 하고, 건강을 지켜야된다는식으로 홍보되며, 라마단 기간 중에도 과식을 피하고 절제있게 먹어야된다는 식으로 언급된다.저서로는 23년간 알라에게 받은 계시들을 기록한 책인 쿠란이 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쓴 건 아니고. 구전되거나 주변 서기들이 무함마들의 언행을 기록한 자료들을 나중에 모아서 책으로 낸 것이다.(논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예수가 신약성서를 기록하지 않은 것과 똑같은 이치. 하지만 쿠란의 시적 구조로 인해 그는 종종 시인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문학성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 동안 아랍인 시인들이 쿠란을 능가하는 명문을 만들수 없다면서 시짓기를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라, 상당기간 동안 자힐리야 시대에 지어진 시가 아랍 시의 모범으로 간주되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쿠란은 아랍이 낳은 최고의 문학 중 하나라고 평가된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분리/내분시켰다는 이유로 지옥에 있다. 알리도 와있는데, 아마도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리되게 한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주류 교파의 신자가 사이비 교파의 신자를 보는 느낌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단 지옥에 있는 게 아니라 사기 지옥에 있다는 것. 이런 서술로 볼 때 그 당시에도 이슬람을 그리스도교의 연장으로 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쿠란의 의하면 아내를 4명만을 두라고 했지만, 무함마드는 계시에 따라 13명을 두었다. 다만 동시에 4명을 넘는 경우는 없었다. 결혼이 아니라 약혼까지만 한 여자들은 더 많았다. 이렇게 많은 아내를 두는 통에 다른 사람도 아닌 애처 아이샤가 "무함마드는 기도와 향수, 여자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한다."라고 말했다는 하디스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아랍 무슬림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향수를 애용한다.[21]
- 첫 아내 하디자 빈트 쿠와일리드(خديجة بنت خويلد): 사이가 좋았던 걸로 유명하다. 무함마드는 하디자 생전엔 다른 아내를 두지 않았고 하디자 사이에서 자식 6명을 두었다.
- 사우다 빈트 자마(سودة بنت زمعة)
- 아이샤 빈트아비바크르(عائشة بنت أبي بكر) 무함마드의 뒤를 봐주던 아부 바크르의 딸이다.
- 하프사 빈트 우마르(حفصة بنت عمر)
- 자이나브 빈트 쿠자이마(حفصة بنت عمر)
- 움 살라마 힌드 빈트아비우마이야(أم سلمة هند بنت أبي أمية)
- 자이나브 빈트 자흐쉬(زينب بنت جحش): 자신의 양아들인 자이드 이븐하리사의 부인.[22] 즉 며느리이자 무함마드의 고종사촌이다.
- 주와이리야 빈트알하리스(جويرية بنت الحارث)
- 유대인 라이하나 빈트자이드(ريحانة بنت زيد)
- 유대인 사피야 빈트후야이(صفية بنت حيي): 그녀의 남편이었던 키나나 이븐알라비는 재산을 감춰 놓은 곳을 말하지 않아 무함마드는 키나나를 고문하라고 명령했고, 잔인하게 고문 당한 뒤 살해당했다.
- 움 하비바 라믈라 빈트아비수프얀(أم حبيبة رملة بنت أبي سفيان)
- 이집트 콥트 정교회 신자 마르야 빈트샤문(مارية بنت شمعون): 마리아 알키브티야(مارية القبطية, '콥트인 마리아')로도 불리며 무함마드의 막내 자식인 이브라힘을 낳았다고 한다.
- 마이무나 빈트알하리스(ميمونه بنت الحارث): 삼촌의 처제.
이중 일부는 정략적인 의미에서(사우다나 6살 난 아이샤), 일부는 과부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얻은 아내들도 있다.
그의 아내 사랑은 당시 아랍의 모범이었다고 한다. 철저히 평등의 이름 아래 매일 밤 여자 한 명씩과 잤다. 그러나 아내들을 공평하게 대우했다는 말도 사실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8번째 아내 마리아 빈트 샤문이 아들을 낳자, 너무 기쁜 나머지 마리아하고만 계속 어울려 다른 부인들의 질투에 큰 문제가 되었다는 언급이 있다. 아이샤가 질투하여 마리아가 이집트 출신 남자 노예와 바람을 피워 아들을 낳았다고 주장하자, 무함마드가 분노하여 마리아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알리가 손수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는데 그 노예가 거세되었음을 알게 되어 형이 취소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기존 아랍의 전통을 깨고 부인을 딱 4명까지만 가지라고 했다. 원래 이슬람은 일부일처제가 원칙인데, 아내들을 모두 평등하게 사랑할 수 있다면 4명까지는 가져도 좋다고 한 것이다.[23][24] 또한 여성의 유산상속권을 종교적 권위로 재확인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이슬람의 규칙으로 남아있다. 여자의 유산상속권은 무함마드의 첫 아내 카디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 무함마드가 규정하기 전에도 이미 보장되는 권리였는데, 무함마드는 이것을 재확인한 것이다.
또한 무함마드는 생전에 무에자(معزة)라고 이름 붙인 고양이를 대단히 아꼈다고 한다. 기도를 하던 도중 무에자가 와선 옷자락 위에서 잠이 들자 고양이를 깨우고 싶지 않다며 옷자락을 잘라내곤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였다고 한다. 무함마드의 영향 때문인지 현재까지도 무슬림들 중 상당수는 고양이를 애호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고양이가 마시던 물로 손을 씻기도 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슬람교의 율법에서는 예배를 진행할 때 동물을 데리고 들어오면 금기가 되어서 무효가 되고 처음부터 다시 진행을 해야 되니까 절대로 동물을 데리고 들어올 수 없지만, 예외로 고양이는 이슬람 예배를 할 때 데리고 들어와도 상관없다. 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가끔 예배를 진행하다가 고양이가 난입하는 에피소드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에 반해서 개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하게 생각해서 "개가 있는 집에는 천사도 들어오지 않는다" 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개를 실내에서 키우는 것을 더럽게 여기고, 개가 실내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일곱 번 닦아내야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만큼 깨끗해진다고 본다. 예배를 드리는데 개가 들어오면 무효가 된다고 할 정도이다. 2014년도에는 이란 보수파 의원 32명이, 애완견을 소유하거나 공공장소에서 개를 산책시킨 사람은 태형 74대를 맞고 벌금(한화로 약 35만~350만 원 상당)을 물어야 한다는 법을 만들어 표결을 추진하다는 영국 신문 가디언의 기사가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같은 경우 오래전, 미국 버스회사 그레이 하운드가 진출하자 회사 상표나 다름없는 개 그림을 지워야 영업을 인정하던 적도 있다. 그러나 모든 이슬람 나라가 그런 게 아니라 튀르키예나 아제르바이잔이나 유라시아, 동남아 이슬람 다수 나라들은 얼마든지 개를 키우고 개에 대하여 이런 이질감이 없다.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스탄불을 여행한 안데르센이나 마크 트웨인도 떠돌이 개랑 고양이가 많아서 신기했고 더더욱 신기한 건 이런 동물들을 맡아 관리하는 공무원도 있다는 점을 기록에 남겼다. 더불어, 무함마드는 목축견은 예외로 여겼기에, 유목민 무슬림이 목축견을 애완동물처럼 거리낌없이 키우는 경우도 많았다. 하긴 유목민들에겐 개는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돌보고 지키는 만큼 매우 유용했으며 이는 술과 같다.
무함마드는 와인과 곡주를 금기시했지만 대추야자로 만든 술은 즐겼기에 대추야자술은 술이 아닌 음료라고 받아들이던 무슬림도 있으며 물이 귀한 사막 유목민들에게는 가축 젖을 발효시킨 술이 물이나 다를 게 없었기에 이들에게도 술은 금지되지 않았다.
무함마드가 이슬람이 아닌 그리스도교쪽으로 가는 전개의 역사적 가정도 존재한다.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비잔티움의 첩자처럼 아랍 세력이 그리스도교 문화권에 편입되어 동로마 제국이 유럽과 중동을 제패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지만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의 의견은 그렇게 되면 아랍 그리스도교와 유럽 그리스도교가 서로를 이단이라며 다툼을 벌였을 것이고, 결국 역사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실제로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종파들간의 격한 분쟁을 자주 빚어왔다. 어느 유럽 대체역사소설에서도 이와 같은 주제를 다룬다. 과거로 간 크리스천 과학자가 무함마드를 만나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자신이 지브릴이라고 속이고 그가 그리스도교 교역자가 되게 만든다. 미래가 바뀌었으리라 기대하고 돌아와보니 십자군 전쟁은 그대로 벌어졌으며 이번에는 아랍 그리스도교와 유럽 그리스도교가 대립하고 있었다. 9.11 테러도 아랍 그리스도교 과격파인 탈레반이 일으켰고 미군이 아랍에 주둔하면서 아랍 그리스도인들과 갈등을 빚는다. 결국 무함마드를 개종시키더라도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고 과학자는 절망하며 끝난다.
무함마드의 행적은 순나(سنة, Sunnah)라고 부르며 무슬림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간주된다.[25] 굉장히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기록으로 남아 순나로 여겨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무함마드는 아침식사를 식초를 적신 빵을 먹고 대추야자로 만든 네비즈라는 술을 마셨다고 하는데, 이 대추야자 술은 현재도 할랄 마크를 붙인 채로 생산되고 있다.[26] 그리고 이 순나의 튀르키예어인 쉰네트(Sünnet)는 할례를 뜻하는 용어로 돌려 사용되고 있다.[27]할례 또한 무함마드가 행한 것이므로 모범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만 무함마드가 좋아하고 행했다는 것 때문에 구태여 이를 똑같이 하려 하는 바리사이파 같은 사례도 있다.
무함마드의 생일로 알려진 이슬람력 (히즈리력) 4월 12일은 마울리드라 하여 종파를 가리지 않고 세계 각지의 무슬림들은 축하 행사를 벌인다.
[1] Abū al-Qāsim.[2] Rasūl Allāh.[3] ''Abū al-Qāsim Muḥammad ibn ʿAbd Allāh ibn ʿAbd al-Muṭṭalib ibn Hāšim.[4] 뜻은 '하심의 아들인 압둘무탈립의 아들인 압둘라의 아들이자 카심의 아버지 무함마드'이다. 무함마드가 특이한건 아니고 아랍 인명 체계가 원래 이렇다.[5] 전투 코끼리를 앞세운 악숨 왕국의 침략을 몰아냈다 하여 코끼리의 해라 부른다. 자세한 것은 생애 문서 참조.[입양] [7] 아랍어로는 '라술룰라(رسول الله / Rasūlullāh)'인데, 무슬림의 다섯 가지 의무(이슬람의 다섯 기둥) 가운데 하나인 샤하다(신앙고백)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لا إله إلا الله محمد رسول الله)"라는 것은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간단하게 '사도'로 번역하기도 하고, 정수일의 저서에서는 성사(聖使)로 번역되기도 한다.[8] 세속적으로는 이슬람교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슬람교 그 자체에서는 단지 신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이슬람은 무함마드 이전인 초대부터 있었던 올바른 종교이고 따라서 즉 아담, 무사(모세), 이사(예수 그리스도), 마르얌(마리아) 모두 무슬림으로 본다. 그러나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신의 말씀을 왜곡하였기에 유대인은 노여움을 받은 자, 그리스도교는 방황하는 자 라고 부른다.(쿠란 최영길 교수 역본 1,7 각주 참조)[9] 흔히 개역성경의 표현인 '보혜사'로 잘 알려져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협조자(보혜사)를 성령으로 본다.[10] 실제 아랍어 성경에서는 "وَأَنَا أَطْلُبُ مِنَ الآبِ فَيُعْطِيكُمْ مُعَزِّيًا آخَرَ لِيَمْكُثَ مَعَكُمْ إِلَى الأَبَدِ،ـ"로 번역하며, '위로자'를 위미하는 'المُعزّي'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관련 링크 1, 관련 링크 2.[11] 이슬람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무슬림은 아담(آدم)과 하와(حواء)이다. 낙원에서 추방된 이후로 아담과 하와는 아라비아에 정착했으며, 그 뒤로 주요 예언자들이 메카를 다녀갔다고 여긴다. 가령 메카 카바 신전 바로 옆에 있는 '잠잠'이란 우물은 모세가 지팡이로 땅을 내리쳤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이 있으며 카바 사원의 벽 모서리에 박힌 검은 돌은 아담과 함께 내려온 운석이라고 전한다.[12] 예언자(나비)와 사도(라술)는 혼용되어서 쓰이지만 엄밀하게는 두 단어는 의미가 다르다. 사도가 예언자보다 더 좁은 개념이며, 일반적으로 예언자보다는 사도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예언자는 이전에 전해진 알라의 말을 확증하는 역할을 한다면 사도는 예언자의 역할과 동시에 알라의 말을 전하는 임무를 맡는다고 한다. 무함마드는 무사(موسى, 모세)의 구약, 다우드(داود, 다윗)의 시편, 이사(عيسى, 예수)의 신약이 전해졌다는 사실을 인정하여 예언자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쿠란을 계시받아 전달하여 사도의 역할을 다했다.[13] 이와 관련된 논쟁은 무함마드 사후에 벌어지기도 했는데 무함마드가 죽자 몇몇 이들은 이슬람교는 이제 끝이라고 여기거나 자기가 무함마드의 뒤를 잇겠다며 반기를 드는 일이 일어났다. 하지만 아부 바크르가 "너희 중 누구라도 무함마드를 믿었느냐? 보라, 그는 죽었도다. 그러나 너희가 알라를 믿었느냐? 그는 존재하시고 영원 불멸하시다."라는 말로 이슬람교는 끝이라고 말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즉 이슬람교는 애초부터 무함마드를 숭배하는 종교가 아니었다.[14] 유대교에서 말하는 선지자들의 실책에 대해서도 '과장되었다.', '없는걸 지어냈다.' 식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없는건 아니었다고 인정한다.[15] 선교보다는 초대, dawah라는 개념이다. 그래서 중동에서 이슬람이 다수가 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뒤의 일로, 아바스 왕조 초기까지 이슬람 제국내에서 무슬림이 차지하는 비율은 10% 이하에 불과하였고, 제국내에서도 기독교, 유대교, 마니고, 조르아스터교, 브라만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해있었으며, 이집트는 12세기가 되어서야 이슬람교도의 비율이 기독교인을 추월하였다.[16] 즉, 알라와 신자 개인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샤하다 하나만으로도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맘도 단순한 예배 대표자일 뿐이다. 이건 퀘이커나 개신교, 특히 회중교회나 침례회와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17] 불과 2년 만에 사망했다는 점을 빼고 보면 그가 주창한 이슬람교가 뻗어나갈 토대를 당대에 마련했기 때문에 가능한 평가다. 다른 종교들이 창시 후 뻗어나가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굉장히 성공한 셈이었다. 비교해 보자면 공자도 관료로 어느 정도 자리에까지 올라왔지만, 현실의 한계에 부딪혀 당대에는 가르침이 실현되지 않았으며, 예수도 가르침이 인정받지 못하고 처형당하는 운명을 맞이했으며, 석가모니는 왕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속세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와 비교해 보자면 무함마드는 그의 가르침을 당대에 실현하려 했으니 엄청나게 성공을 거둔 셈이다. 다만 반대로 그럴 만한 힘이 있었고 그랬기에 아래에 나오는 논란도 생겼다. 사실 무함마드가 악평을 받는 부분도 헤지라 이후로 세속적인 정치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그 부산물로 남은것이다.[18] 보통은 얼굴 대신 불의 형상이나, 빛에 감싼 형태로 그려놓는다. #[19] 한국판 제목은 '예언자 마호메트'. DVD에선 메세지란 원제로 나왔다. 1976년작으로 사막의 라이온 감독이자 할로윈 시리즈 제작자인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했다.[20] 포트레잇이 없고 그자리에 "محمد 무함마드" 라 쓰여있는 심볼이 박혀있다.[21] 아랍 무슬림들과 하루 어울리고 나면 옷에 향수 냄새가 배어 있다. 사실 아랍식 인사만 해도 서로 포옹하여 냄새가 밴다.[22] 자이드의 결혼 순서상으로 5번째.[23]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은 모두를 평등하게 사랑하기는 어렵기에 이슬람 법학자들은 웬만하면 그냥 하지 말라고 한다. 쿠란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구절에서도 바로 뒷부분에 너희는 그 많은 아내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사실상 하지 말라는 소리. 그래서 실제로 부인을 2명 이상 둔 사람은 약 2%도 되지 않는다. 사실 지참금 문화 때문에 돈을 못 내서 결혼을 못하는 남성들이 이슬람 세계엔 수두룩하다.[24] 현대에 들어와선 일부다처제에 대한 여성들 본인의 반발도 거세다. 튀르키예의 경우 약 98%의 혼인적령기 여성들이 일부다처제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답했고, 이슬람 근본주의로 유명한 사우디조차도 이 응답률은 80%대이다. 또한 일부다처를 하려면 무조건 기존의 아내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데, 이 또한 문제. 어찌어찌 새 아내를 맞는 데 동의한다 치더라도, 이슬람법상 여러명의 아내를 한 집에 함께 거주하는 것 또한 불법이다. 결국 새 아내를 위한 집과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하고, 기존의 아내들에게 자동차가 있었다면 똑같은 자동차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안 그랬다간 아내들이 "남편이 우릴 불공평하게 대한다"라고 법정에 소송을 걸고, 막대한 위자료를 뜯어낼 수 있기 때문. 여기까지만 봐도 웬만큼 돈이 있어선 일부다처를 꿈꾸기도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다.[25] 이 순나를 따르는 자에서 따온 이슬람의 다수파가 바로 수니파이다.[26] 그리고 이 내용을 들어 근대 이전까지 무슬림들은 와인은 술로 여겨 금지했지만, 대추야자술이나 무함마드 시절엔 없던 위스키, 맥주, 코냑 같은 술도 잘만 마셨다. 보수반동주의의 대표주자인 오스만 제국의 압뒬하미트 2세도 위스키와 샴페인을 즐기던 칼리파였다.[27] 아랍어로는 키탄 (ختان)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