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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태/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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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3. 법조인 경력4. 정치 활동
4.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후4.2.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 개요

정치인 김진태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

2. 일생

1964년 10월 13일 강원도 춘천시에서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한규 씨는 경상북도 성주군 출신의 군인이었으며[1] 어머니 윤종애 씨는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교사[2]로 재직했다.

집안이 원래 경상북도 성주군이고 8대조의 선영이 있다. 아버지 김한규는 6.25 전쟁에 참전하고 북파공작원으로 활동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도 참여해 화랑무공훈장 2개에 묘소도 국립대전현충원이다. 외할아버지는 1950년 6월 29일 북한군에게 죽었고, 외가 식구들은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했다. 어머니는 6.25 전쟁 발발 이전 춘천시 서면 금산초등학교에 첫 발령을 받은 이래 피난을 갔다가, 전후에 다시 춘천으로 돌아와 교편도 다시 잡으며 가족 뒷바라지를 했다. 김진태도 그때 태어났다. 모친은 그 후로도 1988년 2월 봉의초등학교 교감에 올라 명예퇴임까지 40여 년간 교편을 잡았다.

춘천교육대학교부설초등학교, 춘천 소양중학교를 거쳐 1983년 춘천 성수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 진학했다. 4학년 때인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1987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3. 법조인 경력

1989년 사법연수원제18기로 수료하였다.[3] 공부 하나만 현역 정치인 중 끝판왕이라 할 수 있다. 학과공부도 빡세다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4학년 재학중인 23세에 사시에 합격했다. 이 정도면 서울대 법대 출신들 중에서도 최상위권이다. 당장 기성 정치인 중에도 김진태보다 빨리, 즉 3학년에 붙은 사람은 거의 없다.[4] 1989년 5월 27일 공군 군법무관으로 임관하여 국군기무사령부에서 공안담당 법무관[5]로 복무했고, 1992년 2월 29일 대위로 전역했다.

1992년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 검사로 처음 임용되어 17년간 검사 생활을 했는데, 경력의 상당 부분을 공안검사로 보냈다. 1996년 서울지방검찰청 공안제1부 검사로 근무할 때 PC통신을 통해 김대중 총재를 비방한 사람을 구속기소시켰다. 2000년에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에 국외연수를 다녀왔다. 2002년에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부장검사로 근무했다. 2011년 11월 낸 책 ‘법대로 살까? 멋대로 살까?’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제1부 검사와 부부장검사로 근무했던 1996년과 2002년 두 차례 이명박 전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수사했다. 2003년 대선 당선자 신분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수사할 때는 기소를 주장하는 자신과 법 위반이 아니라는 부장검사가 서로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고 한다.

2006년 대검찰청 강력부 조직범죄과장 시절 바다이야기 사건을 수사했다. 채동욱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이 팀장을 맡고 김진태 조직범죄과장과 봉욱 첨단범죄과장이 팀원으로 포함되었다. 사실 이 사건 수사를 채동욱 수사기획관이 맡기 전에는 강력부가 이 사건을 맡았고 경대수 강력부장이 주축이 되어 이 사건을 수사했으나 검찰 윗선이 이 사건을 중수부로 넘긴 것.[6]

이후 2007년 서울중앙지방검찰청 부장검사가 되었는데 지검 내 부장 보직이 아닌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파견 근무를 갔다. 그는 이 인사에 대해 “허탈하고 분통이 터졌다”고 본인 책에서 회고했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에 대한 전원위원회 회의 때 “강기훈 씨가 유서를 대필한 것이 맞다”고 우기다가[7] 외부 위원들과 충돌하기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조봉암은 간첩이 맞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간첩죄로 사형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2011년 1월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김진태는 그 뒤로도 간첩이란 주장을 고수한 것이다. 그런데 2020년 조봉암이 김일성으로부터 대선 자금을 지원받았다는 구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되어서 다시 쟁점화되었다. 이 부분은 다시 후속 연구를 기다리는 중이다.

2008년 3월 20일부터 2009년 1월 29일까지 차장검사 1차보직인 제41대 춘천지방검찰청 원주지청장을 지낸 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발령나자 2009년에 검사직을 그만두고 원주시춘천시에 법률사무소를 열었다.[8]

4. 정치 활동

파일:김진태(정치인)3.jpg
▲ 초선의원 시절

2009년, 한나라당에 입당하여 2012년부터 정계에 입문했고, 제19~20대 총선에서 강원도 춘천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내리 당선했다. 2020년 5월까지 미래통합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지역구에서는 예산 확보 능력에 관해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1조 3,000억원 사업인 제2경춘국도를 예타 면제사업으로 확정받기도 했다.

본래 길게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 내지는 박근혜 정부 임기 후반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계파색이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던 정치인이었다. 지금이야 강성 친박 출신으로 유명하긴 한데, 정작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전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새누리당 계파 논쟁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던 인물도 아니었고, 친박 vs 비박 갈등의 정점에서 행동대장으로 선봉에 섰던 인물도 아니었다. 단지 공안검사 출신으로 반공, 반북 성향이 강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을 뿐. 이 때문에 원리적인 헌법주의자라는 평이 있다. 2013년 4월 처음으로 선 대정부 질문 자리에서 “본 의원은 지금 이 자리에도 대한민국의 적(敵)이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라는 도발적 발언으로 신고식을 했다. 민주통합당 의원들이 고함을 지르고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이제 종북세력과 결별하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세력은 스스로 이 땅을 떠나라”며 연설을 마쳤다. "김정은 심부름꾼이냐"…종북저격수 김진태 특히 2013~2014년 통합진보당 내란선동 사건통합진보당 해산과 관련하여 이석기를 비롯하여 통합진보당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저는 이석기 피의자를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으로 인정한 적이 없다. 대한민국의 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는 박근혜 비대위원장으로부터 공천을 받았다. 이때 박근혜는 선거운동 기간 춘천을 두 번 방문해 그를 지원 유세를 했다. 자신의 책에서 “몇만 명 관중 앞에서 내 이름을 또박또박 그것도 여러 번 불러줬다. 그래서 난 박근혜 대통령을 안 좋아할 수가 없다”고 썼다. 친박이라는 이미지가 탄핵 이후에 생긴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2013년 통합진보당 해산 당시 '종북 저격수' 이미지에서 연장된 것으로 보인다. 자신도 이를 의식하는듯 2014년 12월 출간한 에세이집 ‘진태의 난중일기’에서 “종북 저격수보다는 ‘보수의 아이콘’이라는 별명을 좋아한다. 나는 숨어서 쏘지 않고 드러내놓고 쏜다”고 적었다.
파일:김진태-2.jpg
▲ 2016년 모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로 윤상현, 서청원, 최경환, 민경욱, 조원진 의원 등과 함께 친박 정치인들 중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물로 꼽혔다. 그 전에도 이장우, 김태흠 등과 더불어 친박계 의원 가운데 하나로 꼽혔던 인물인데, 최순실 게이트를 기점으로 이 2명은 공기가 되고[9] 태극기 집회의 지지를 받는 김진태가 부상하게 되었다. 그나마 김진태는 박근혜를 옹호한 게 아니라 탄핵 자체의 법사위 절차와 증거능력에 대해서 비판 의견을 낸 것이 더 많은 유권자에게 신뢰를 준 것으로 보인다.#

2017년 3월 14일, 19대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강원도 출신 정치인으로 첫 대선출마이다. 이것의 시작으로 최문순도 이어서 대선에 도전하기도 하였다. 자유한국당 내 친박 단체의 지지와 후원에 힘입어 대선 후보 1차 컷오프에서 통과되었고, 2차 컷오프도 통과하였다. 2017년 3월 경선토론에서 강성친박답게 "배신자"라며 바른정당과 연합하는 것을 반대했다. # 하지만 결국은 20%에 못 미치는 득표율로 과반 득표한 홍준표에게 밀려 대선 후보로 선정되지는 못했다.[10]

이후 예상과 달리 자유한국당을 탈당하지 않고 새로 생긴 새누리당이나 대한애국당행을 거부함은 물론, 자유한국당의 일원으로 19대 대선 당시 강원도 선거대책위원장 직을 맡아 강원도 곳곳에서 홍준표의 유세를 도왔다. 하지만 선거결과는 신통치 않았는데 19대 대선 결과 지역구 춘천시에서 문재인 몰표가 나오고, 다른 강원도 지역 역시 스윙 보터 지역으로 바뀌는 등, 우파정당 우세 지역이었던 강원도문재인 약우세 지역이 되었다. 자유한국당 역시 쪼그라들어 자기 텃밭에 민심이 반대함을 확인한 김진태 자리를 내줄 여유를 갖기 힘든 만큼, 재기는 어렵게 되었다는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의 지지율 하락과 최문순 도지사의 친중 행보에 재평가되는 분위기도 고개를 든다. 일관성 있는 소신발언이 지지층을 만드는만큼 앞으로 시민들의 평가를 지켜볼 일이다.

2017년 5월 19일 선거법 위반 혐의로 열린 재판 1심에서 벌금 200만원형을 선고 받았지만, 같은 해 9월 항소심에서 파기되면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2018년 1월 25일 대법원 판결 결과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여기에 더해서 국가는 무죄를 선고받은 김진태에게 형사재판 비용 575만 원을 지급하라는 법원 판결이 내려지게 되었다. 무죄 받은 김진태, 국가로부터 보상금 575만 원 받는다.

제20대 국회에서 법학전문대학원 폐지 및 사법시험 존치를 주장하고 있는 국회의원이며, 정도로 따지자면 신림동을 끼고 있는 관악구를 지역구로 둔 김성식,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들[11]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사법시험 존치 법안을 육탄 방어하여 막으면서 본인을 '로스쿨의 어머니' 라고 자칭한 더불어민주당 박범계, 서영교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12]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주요 공약에 로스쿨 완전 폐지 및 사법고시 존치를 포함했다.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이국종 교수를 향한 인격테러라는 발언 논란에 대해 정의당을 향해 "선량한 소시민을 하루아침에 인격테러범으로 만드는 너희들이 바로 인격테러범이다."라고 강력 비판했다. 이때는 김종대와 정의당의 잘못이 빼박이기 때문에 김진태의 잘못이 아니다. 당시 하태경 바른정당 최고위원 뿐만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비판 발언이 나왔을 정도다.

2017년 10월, 자기한테 개 입마개를 전달했던 '둥글이8'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시민운동 활동가[13]를 5가지 혐의[14]로 고소했다. #

2018년 4월에는 이희호 여사의 경호 기간 논란을 두고,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로 보장되는 경호기간 15년이 만료되었으니 대통령경호처의 경호를 중단하고 경찰청으로 이관할 것을 요구했다. #.

2018년 7월에는 난민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난민심사를 엄격히 하고 각종 특혜를 폐지하는 난민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라는 등 난민법 개정안 발의를 검토했다.#. 평소에 김진태를 가루가 되도록 까기에 급급했던 대부분의 온라인 게시판에서도, 이번만큼은 김진태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했다.[15] 법치에 대하여 강한 신념이 있는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던 부분이었다.
2018년 11월,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형사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입장에 대해 "군대 갔다온 사람들은 다 비양심적이냐"고 비판했다.#

2019년 2월 자유한국당 당 대표 경선에 참여했다. 허나 얼마 후 이종명, 김순례 등과 함께 대표적인 5.18 민주화운동 폄훼 운동가인 지만원을 초청하여 5.18을 폄훼하는 공청회를, 그것도 국회에서 열어 여론의 엄청난 지탄을 받았다. 다만 국회 토론회는 소수 의견부터 잘못된 의견까지 모두 수렴하며, 토론회에서 토론자 의견이 의원실 의견을 대변하지 않는 않는 점이 대의민주주의임을 감안해야 한다. 해당 토론회에 본인부터 참석하지 않는 것이 그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파일:518북한군개입음모론_지만원_주최_김진태.jpg
▲ 지만원과 연계해 활동하는 당시 모습
이 일이 있은 직후 후보 연설을 위해 나머지 후보들과 광주를 찾았지만 광주 시민들과 5월 단체들의 거센 항의에 간담회는 취소되었다.
파일:김진태(정치인)2.jpg
▲ 2019년 전당대회 시절 모습
경선에서 연설하는 김진태 의원의 모습이다. 결국 이 공청회와 망언 사태의 후폭풍으로 인해 최종 결과는 3위로 마감하였다. 하지만 당내 강성보수층을 결집시켰다는 평가도 있다.


캡션

이후 청문회에서 항상 존재감을 드러낸다. 뱅골보수도 청문회에서 나온 별명이다. 2019년 검찰총장 청문회에서 뉴스타파단독보도[16]를 인용하여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의 거짓말을 폭로한다. (한국경제)윤석열 청문회 막판 '위증 논란'…"변호사 소개" 녹음파일 공개 김진태가 조사한 윤우진 세무서장의 거짓말 폭로로 여론은 급반전하였고 야당은 거세게 윤석열의 거짓말을 비판하며 청문회에서 위증한 검찰총장 후보는 자격이 없는 만큼 검찰총장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일보)野 "윤석열, 청문회서 거짓말로 국민 우롱...즉각 사퇴해야"


캡션

이 밖에도 청문회 내내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를 매섭게 공격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이 청문회 질의는 훗날 윤석열을 극도로 비토하는 진보층에 의해 재조명된다.
파일:김진태(정치인)4.jpg
▲ 2020년 의정보고회 활동 모습

2020년 3월 4일 본인의 사실상 지역구인 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 갑 선거구에 공천을 받았다. 공약으로는 제 2 혁신도시 유치, 춘천 시내버스의 원상 복구, GTX-B 춘천 연장 성사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선거 출구조사에서 패배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개표에서도 엎치락뒤치락 하다 결국 허영에게 패배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에도 강원은 원주시를 제외하고는 미래통합당이 다 가져갔는데, 결국 개인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춘천을 여당에 내주고 말았다.[17] 참고로 투표 개표 중 '김진태가 당선 유력'이라는 것이 뜨기도 했는데, 기사화가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의와 상관없는 설레발이 되고 말았다.

4.1.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이후

낙선 이후 김종인과는 신비한 인연이 이어진다. 김종인 비대위를 결사 반대하며 8.15 태극기집회에 참석하는 등 김종인이 당대표일 때 호흡을 맞추지 못할 것으로 평가되었다. 당시 민경욱, 김소연 등과 함께 당무감사에서 당협위원장 컷오프 1순위로 꼽혔지만 '당내 역할이 있다'며 컷오프 되지 않았다.

그 때부터는 사실상 김종인 비대위 하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전직 대통령 사과 발언에 강경하게 반응하지 않고 이낙연의 이명박근혜 사면 떡밥을 물지도 않고, 비판도 자제하는 등 태도가 확 바뀌었다. 유튜브나 SNS에서도 발언의 수위가 내려갔으며, 오히려 민주당 비판이나 지역구 문제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올리는 것으로 발언이 확장되었다. 덕분에 본인 수위가 내려간 만큼, 기사화 되는 빈도도 줄었지만 이 모습만 봐도 국민의힘 전체에 친박 색채가 빠졌다는 평가가 있었고, 재보궐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본인도 그 대가로 끝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했기에 최소한 당협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재기를 할 기회는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21대 총선 낙선 뒤 근황을 보이지 않다가 춘천과 홍천 지역의 차이나타운 건립 논란이 과열되자 최문순 강원도지사와 공개토론을 하자고 제안했다.#

페미니스트 교사 조직의 아동 세뇌 및 학대 음모론, 일명 '펨교조' 음모론이 제기된 후 발생하자 유튜버 성인권센터에게 법적 자문을 해주며 "아동복지법상 아동학대행위를 형사처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거는 그냥 넘어갈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라며 입장을 밝혔다. #

이후 2021년 5월 29일, 차이나타운 반대 시위를 하는 조원진 우리공화당 당대표의 연단 위로 올라가 가벼운 포옹을 나누는 등[18], 차이나타운 반대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다. #

며칠 뒤인 6월 5일에는 춘천에서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 나서고 있는 이준석을 수행하며 닭갈비를 먹고 지지자들과 셀카를 찍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그의 평소 강경 보수 행보와는 사뭇 달라 눈길을 끌었다. 중진 당협위원장과 젊은 당대표의 하모니로 젊은 층의 관심을 끌었다.

4.2.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선거 몇년 전부터 지역에서 차기 지선에서는 국민의힘 소속으로 강원지사에 출마할 것으로 전망되었다. 우선은 현역 최문순 지사가 3선 연임 제한으로 더 이상은 출마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또한 강원도 영동 지방과 최전방 특유의 보수세에 더해 본인이 춘천 출신이라 보수정당이 상대적으로 고전하는 영서지방의 표를 좀 더 가져올 수 있다는 점도 장점으로 속한다.[19] 보수 혁신을 위해 국민의힘 입장과 김진태 본인에게도 보수정당이 내리 4연패를 한 강원도지사를 다시 탈환한다는 명분도 충분하고, 또 정치인으로서 몸집을 키우기 위해서도 서로에게 윈윈인 선택으로 보인다. 2021년 5월 31일에 강원도민일보에서 시행된 여론조사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20] 권성동이 중앙 정치 활동으로 강원도지사 출마에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김진태가 강원도지사에 나갈 것으로 예상되나, 라이벌 이광재 전 지사가 지지율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여주면서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었고 본인의 막장 비호감 이미지가 발목을 잡고 있다.

이후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전후로는 이미지 개선을 목표로 잡았는지 이준석이 당대표가 되기 전 나오던 매일신문 프레스 18 유튜브에 나와 본인의 과거 발언에 대해 특히 청년층을 무시한듯한 뉘앙스로 보여지는 발언[21][22]에 대해 해명+반성과 사과를 하며 강원도에 대한 공약을 준비할 것을 약속했다. 본인 말로는 지만원과도 손절해버렸다고 한다.

2022년 1월 25일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이광재와 오차범위 내에서 접전을 벌이며 지지율 2위를 기록했다.#

2022년 3월 23일 오는 6월 1일 치러지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강원지사 출마를 선언했다. # 하지만 황상무가 공천되면서 컷오프되었다. 황상무보다 무게감과 인지도에서는 좋으나 강성 친박 이미지로 인해 춘천 지역을 제외하고는 중도층 표 결집 면과 여론조사 면에서 이광재에게 밀리는 경향도 있고, 당 차원에서 17석밖에 되지 않아 과거의 발언들이 선거국면에서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주목 받을 수 있는 광역단체장(강원도지사) 공천보다는 묻어갈 수 있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번 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본인은 재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특단의 조치를 언급하며 무소속 출마 가능성을 열어놨다.[23][24]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망언이 컷오프의 결정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국민의힘 지도부는 당장 지방선거 운동이 한창일 5월 18일과 그 즈음의 기간에 김 후보의 발언들이 환기되면서 전체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공천 결과에 불복하여 단식농성에 들어갔다.[25] 이 자리에서 김진태 전 의원은 "그게 문제라면 2020년 4·15 총선에선 어떻게 공천을 줬나? 이번 대선에선 이재명 비리 검증특위위원장으로 실컷 일 시키고 대선 이기니 토사구팽인가?"라고 주장하면서 "부당한 탄핵에 맞서 태극기 들고나간 게 죄인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문재인 정권을 막기 위해서 그랬던 거"라고 강조했다. 단식농성 현장에는 이준석 대표, 김웅 의원, 같이 컷오프된 박맹우 울산광역시장 예비후보 등이 다녀갔다.

4월 18일, 김진태 컷오프에 대한 여론도 그다지 좋지 않은데다[26] 물밑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오갔는지 공관위측에서 한발 물러나 황상무의 단수공천을 보류하고 김진태가 과거 발언에 대한 진솔한 사과를 한다면 경선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냈고, 김진태 역시 당일 오전 10시 30분에 깔끔하게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강원지사 경선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

결국 4월 23일, 김진태 본인이 58.29%를 득표해 정치 신인 가산점을 받은 황상무 후보(45.88%)를 누르고 강원도지사 국민의힘 후보로 최종 확정되었다.#

후보 확정 후 본선 상대가 된 더불어민주당 이광재 의원은 김진태 후보에게 축하를, 황상무 후보에게는 위로를 전하며 "강원도를 여야의 표밭이 아닌 통합과 희망의 일터로 만들자"라고 덕담을 건넸고, 김진태 전 의원은 "멋진 레이스 기대된다. 64년생 동갑인 우리 셋[27]이서 강원도를 위해 제대로 뛰어보자"라고 화답했다.

이후 경선 상대였던 황상무를 자신의 선대위원장으로 맞아들였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 유치를 핵심공약으로 밀고 있다.

선거기간 내내 민주당의 이광재 후보를 오차범위 밖에서 시종일관 앞섰으며 결국 54%의 득표율로 당선이 확정되었다.[28] 이로서 지난 총선 낙선 이후 2년만에 재기함은 물론, 광역단체장으로 한 단계 체급을 더 높이게 되었다.


[1] 육군장교로 6.25 전쟁에 참전했고, 2013년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2] 평소 저혈압을 앓고 있었는데, 2011년 12월 23일 새벽 목욕탕에 갔다가 심장부정맥으로 추정되는 불상의 원인으로 의식을 잃고 투병하다가 2012년 1월 4일 별세했다. #[3] 이재명과는 동기생이다. 검찰총장 출신의 띠동갑에 항렬까지 같은 동명이인은 14기다.[4] 보통 서울대 법대 출신을 사법시험 합격 학년으로 나눌 때에, 4학년에 합격한 사람이 최상위권이며, 3학년 합격자는 천재로 유명해진다. 소년등과의 상징인 우병우는 시골 출신이라 호적 등록이 늦었고 실제로는 1965년생([age(1965-01-01)]세)으로 생활하며 84학번 입학 후 87년 4학년 합격이기에 김진태와 동급이다. 3학년 합격자로는 안태근 전 검찰국장과 진경준 전 검사장이 있는데 둘 다 천재로 유명하다. 한편 늦깎이 합격 대기만성으로도 유명한 윤석열 대통령과 비교하면 윤석열은 김진태보다 4살 형이자 4학번 선배이지만 사법연수원 기수는 5기수나 아래이다.[5] 병과는 보안(8124)이었다.[6] 봉욱과 김진태는 강력부 부장검사였기 때문에 이 사건을 수사하게 된 것이었는데, 사건을 중수부로 넘기면서 이에 반발한 경대수 강력부장이 사표를 쓰고 나가게 된다.[7]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조작된 누명 사건이 맞고 김진태가 틀렸다.[8] 원주지청장을 지낸 경력 때문에 원주에 변호사 사무소를 연 것으로 추정된다. 춘천은 자신의 고향이니까 개업한 것으로 보인다.[9] 하지만 이 셋은 8회 지선에서 각각 대전시장, 충남지사, 강원지사에 당선되면서 재기에 성공한다.[10] 보수 성향 예비 후보들에 대한 평소 여론조사에 의하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9%, 홍준표 지사가 1%, 그 외 나머지 후보들은 1% 미만이었다. 그러나 황교안은 불출마를 선언했다.[11] 이 두 의원은 로스쿨-사시 병행을 주장한다. 그리고 김진태보다는 비교적 중도파다.[12] 참고로 서영교의 딸은 로스쿨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3] 본명은 박성수. 그전에도 박근혜를 비판하는 전단지를 제작하다 구속된 경력이 있었다.[14] 출판물에 의한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무고, 모욕, 정보 통신망 보호법 위반.[15] 실제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난민수용 반대에 서명을 한 사람들이 무려 70만명이 넘었고, 여론조사에서 2030대 젊은 연령층이 압도적으로 반대여론이 우세하다. 특히 20대 연령층에서 반대여론이 찬성여론보다 무려 3배나 높은 66.0%로 나오는 등, 난민수용 반대여론이 굉장히 압도적으로 높다. 정부와 집권여당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많아졌다. 그러니 평소에 김진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조차도 김진태의 난민법 개정안 발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남겼다.[16] 청문회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에 대한 기대치가 하늘을 찔렀던 진보층에서는 "어어디 감히 강직하고 정의로운 검사 윤석열에 총질이여? 너희도 결국 입진보였구나?"라고 성토하며 뉴스타파 구독취소 운동이 벌어지는 등 난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팟캐스트 진행자 이동형은 일찌기 윤석열이 양날의 검이라며 경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으나 묵살당했다. 청와대 내부 인사 중 조국, 최강욱 등도 윤석열 검찰총장 임명에 반대했으나 청와대 내 다수파에 의해 묵살당했다. 물론 조국 사태 터지고 윤석열 검찰총장이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한 이후부터는 자신들의 행동에 자괴감을 느끼고 이불킥하며 뉴스타파를 더욱 열성적으로 후원해줬다고는 얘기했다. #[17] 짙은 친박 성향과 잦은 막말도 있지만, 선거구가 분리된 것도 낙선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선거구 변경으로 보수 성향이 더 강한 춘천시의 북부 지역이 철원, 양구, 화천과 같은 선거구로 들어가버렸다. 다만, 춘천시·철원군·화천군·양구군 을 지역 중에서 춘천 지역은 민주당 후보가 근소하게 앞섰다. 춘천시/정치 참고.[18] 이게 하필 재보선 끝나고 김종인이 당을 나간 뒤에 보인 행동이라, "김종인 나가니까 원래대로 돌아오느냐"는 부정평이 심했다.[19] 거기에 검사 시절 춘천지검 원주지청장을 지낸 바 있고 원주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이력도 있어서 원주에도 어느정도 연고가 있는 사람이다. 즉 도내 양대도시에 모두 기반이 있다는 지사 후보로서 실로 엄청난 메리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20] 참고로 다른 유력 출마 후보는 강원도 최다선인 권성동인데 현재 국민의힘 의석수나 권성동이 지난 총선에서 지역구를 겨우 사수한 것을 감안하면 불출마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지만 권성동의 경우에는 보수 후보가 3명이나 출마했기에 겨우 당선된 것이기도 하다.[21] 대표적으로 군인 월급 인상에 대해 포퓰리즘이라고 까고 가세연에 나왔던 것. 촛불은 바람 불면 꺼진다 등을 말하였다.[22] 각종 욕설과 비아냥거리는 표현들도 많았는데 그걸 전부 복기했다고 한다. 예전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보였다.[23] 그러나 지난 태극기 부대 활동을 할 때도 조원진과 같이 신당을 만들고 활동하지 않고 당에서 자리를 지킨 만큼 탈당 후 무소속 출마 가능성은 떨어지는 편이다. 대신해서 최대한 자신의 억울함을 알려 지역 내에서 동정론을 얻고 결국에는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단수공천으로 확정된 황상무 후보를 도와주는 등 다음 정치적 활동을 위한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이 더 크다.[24] 오히려 무소속 출마시 황 후보와 같이 표가 분산되어 이광재만 좋은 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춘천 표가 찢겨서 황 후보 표가 김진태에게 분산되어 이광재에게 유리해질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또한 탈당 후 복당을 한다 한들 강성 친박을 쳐내려는 이준석과 권성동이 잠자코 복당을 해줄 것이라는 장담도 없다. 친박계인 이정현의 복당은 허가되지 않았냐고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이정현은 애초에 강경파까지도 아니고, 친박이라도 탄핵 정국에서 대표직을 사퇴하고 탈당, 문정부 5년 내내 집 밖에서 야인으로서 조용히 살아 현재는 친박의 색채가 거의 사라졌으며 무엇보다도 호남에 새누리당 깃발을 2번이나 꽂아 호남 지지율도 좋기 때문에 복당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장 극우친박 강용석의 복당을 불허한 게 현재의 국민의힘 지도부다.[25] 그 와중에도 히터는 자신이 아닌 보좌진을 향해서 틀어놓았다.[26] 김진태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차치하고 지지율 1위 후보를 경선조차 치르지 않고 무작정 잘라버리는 게 과연 공정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당원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었다. 그렇다고 김진태를 자르고 단수공천 하기로 한 황상무가 크게 경쟁력이 있는 후보인 것도 아니었기에 지선 패하려고 작정했냐는 비아냥은 덤. 울산광역시대전광역시 역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컷오프 때문에 말이 많이 나오고 있다.[27] 김진태, 이광재, 황상무. 그러나 셋의 실제 나이는 황상무 63년생, 김진태 64년생, 이광재 빠른 1965년생으로서 완전한 동갑내기는 아니다. 황상무가 김진태와 함께 서울대학교 83학번 동기라서 김진태가 동갑이라고 생각했거나, 또는 황상무가 호적상 64년생이고 실제로는 1963년생이라서 그럴 가능성도 있다. 어찌 됐건 셋은 같은 연령대이긴 하다.[28] 하지만 국민의힘의 압도적 우세 계층이었던 이대남에서도 이광재와의 양자대결 득표율이 겨우 51%(...)에 그쳤는데, 이는 김진태가 군인들 월급을 올려주지 마라는 망언을 하는 등 개인의 비호감이 워낙 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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