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14:36:45

그레타 가르보

그레타 가르보(배우)에서 넘어옴
그레타 가르보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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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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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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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가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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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2위13위14위15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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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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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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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7021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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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68692><colcolor=#fff>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본명 그레타 로비사 구스타프손
Greta Lovisa Gustafsson
출생 1905년 9월 18일
스웨덴 스톡홀름
사망 1990년 4월 15일 (향년 84세)
미국 뉴욕주
국적
[[스웨덴|]][[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활동 1920년1941년
별명 은막의 여왕
스웨덴의 스핑크스
The Face[1]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arbo_signature.jp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 팬페이지 'Garbo Forever'

1. 개요2. 생애 및 활동3. 주요 출연 작품4. 은퇴 후5. 사생활6.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DK1V.gif

할리우드와 스웨덴에서 활동한 스웨덴 출신의 배우.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과도기를 이끈 배우로 양쪽 분야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5위에 선정되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네 번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엔 실패했다.

북유럽 출신답게 170cm의 큰 키, 그리고 본인의 얼음같은 매혹적인 미모로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배우 루이즈 브룩스[2]는 가르보가 "완벽한 골격, 부드러운 피부, 투명한 눈동자"를 가졌다고 평하기도 했다.

신비한 이미지로 유명하나 이는 소속사였던 MGM이 정성을 들여 조성한 인위적 산물이다. MGM은 알쏭달쏭 수수께끼 같은 매력이 있는 배우라는 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스웨덴의 스핑크스(Swedish Sphinx)"란 별명을 만들어 널리 퍼트리기까지 했다.

2. 생애 및 활동

파일:kagalb.jpg
부모님 결혼 사진, 1897년
극빈 가정에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난 가르보는 어린 시절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환경 탓인지 어려서부터 물질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무런 기술을 갖추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로 주로 재래식 화장실의 오물을 퍼내곤 했는데, 가르보는 이런 아버지를 부끄러워했지만 지나친 노동의 여파로 앓기 시작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13살 때 학교를 그만뒀다. 결국 14세에 아버지를 잃고 가계를 부양하기 위해 스톡홀름의 이발관에서 면도사 일을 시작했다. 직장은 다시 백화점으로 바뀌었다. 외모가 눈에 띄어 카탈로그 모델 일을 시작했고 1921년 해당 백화점에서 후원하는 단편 광고 영화에도 나왔는데, 이는 더 많은 단편 홍보 영상 일거리로 이어졌고, 코미디 감독인 에릭 페츨러의 단편 영화 <Luffar-Petter(부랑자 피터)>(1922)에도 출연하게 됐다. 어려서부터 영화관에 매료돼있던 가르보는 스톡홀름의 왕립 연극 학교에서 2년 동안 본격적으로 연기 공부를 했다.

가르보는 감독 모리츠 스틸러[3]의 눈에 들어 그가 연출한 로맨스 영화 <괴스타 베르링스 사가(Gösta Berlings Saga)>(1924)에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스틸러가 매니저를 자처한 덕에 경력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예명을 가르보로 바꿔준 것도 이 감독이었다.
파일:20230105_183546.jpg
모리츠 스틸러

사실 가르보는 자국에선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두 번째 주연작 <기쁨없는 골목길(Die freudlose Gasse)>(1925)은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해 여름 스틸러와 가르보는 MGM과 계약을 맺고 할리우드로 진출한다. MGM은 가르보의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해 머리와 눈썹을 정성껏 다듬었다. 치아 교정을 시키고 15kg을 빼라고 강요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MGM은 가르보와 스틸러 두 사람 모두에 대해 그닥 확신을 갖지 못했고, 남미 통속 소설[4]을 원작으로 하는 <Torrent>(1926)에 가르보를 요부로 캐스팅하면서 스틸러 대신 다른 감독을 꽂았다. 가르보는 대본의 내용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미국 데뷔작을 스틸러가 연출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매우 실망했다. 이 작품이 흥행하고 나서야 MGM은 또 한 번 남미+가르보 히트 공식을 써먹기 위해 소위 남미 연인[5]의 대명사였던 안토니오 모레노[6]를 상대역으로 꽂으면서 가르보의 이름을 포스터 최상단에 배치시키고 스틸러를 감독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스틸러는 스튜디오와 의견 대립을 하면서 <The Temptress>(1926)에서 쫓겨났고 촬영 도중 언니가 스웨덴에서 사망해 가르보에겐 개인적으로 또 한 번 매우 불행한 작품이 되었다. 심지어 MGM은 스웨덴에서 열린 언니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 막아버렸다.

그러나 미국에서 찍게 된 세 번째 작품 <Flesh and the Devil>(1927)은 사적으로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가르보는 당대 가장 인기 있던 무성영화 남자배우인 상대역 존 길버트[7]와 첫눈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고, 영화는 크게 흥행했다.
파일:20221201_1111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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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esh and the Devil>(1927) <Love>(1927)

내리 세 편이 성공하자 가르보는 MGM과 협상에 들어갔다. 스웨덴으로 돌아가겠다고 협박하며 파업한 끝에 가르보는 당대 최고 계약 액수를 갱신했다. 이게 당대에 어찌나 유명해졌던지 1934년 뮤지컬 "Anything Goes(뭐든 좋아)"의 "You're the Top(넌 최고야)" 가사에 "넌 최고야, 마치 가르보의 출연료처럼[8]"이란 구절이 나왔다. 또한 감독들[9]을 비롯해 제작인력들을 원하는대로 고를 수 있게 됐으며[10], 하루에 정해진 시간 이외의 촬영을 거부했고, 촬영장은 비공개여야만 하고 근접촬영 때는 카메라와 자신이 암막에 둘러싸여야만 한다고 못박았다. 그 외에도 현장에서 자잘하게 요구하는 게 많아 까다로운 성격으로 유명해졌다.
파일:Photographer-Unknown-22Nils-Asther-and-Greta-Garbo22-192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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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ingle Standard>(1929)

주로 혼외 관계를 하는 여성이나 숙명적 사랑을 하는 연인 역을 도맡으며 무성영화의 여신으로 군림하던 가르보가 출연한 최초의 유성영화는 <안나 크리스티>였다. 이 영화 광고할 때 내건 표어는 "Garbo Talks!(가르보가 말한다!)."[11] 20년대 무성영화가 토키로 넘어갈 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배우들 중 한 명이다. 기존 이미지와는 잘 맞지 않는 목소리나 부정확한 영어 발음으로 많은 인기 배우들이 결국 한계에 부딪혀 반강제로 은퇴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가르보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는 가르보가 무성영화로 쌓아올렸던 인상과 잘 어울렸다. <안나 크리스티>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되었고, <마타 하리>, <그랜드 호텔>, <안나 카레니나>, <춘희>, <니노치카> 등에 출연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했다.

한편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는 유성영화로의 변환기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MGM 윗사람들과의 불화마저 심각해져 스튜디오를 떠난 뒤 경력이 심각하게 망가지고 있었는데, 가르보가 자신이 주연인 <크리스티나 여왕>에 길버트를 쓰고 싶다고 강력히 요청해 MGM으로 다시 데려와 재계약을 맺게 했다. 그러나 해당 영화가 작품성으로나 흥행으로나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길버트의 심신은 계속 망가졌고, 1936년 길버트가 심장마비로 요절하면서 둘의 공동 작업은 완전히 끝이 났다.

마리 퀴리를 맡아 정극 연기에 도전하려고 했지만 MGM이 제작을 미루고[12] <두 얼굴의 연인>(1941)을 억지로 맡겨 크게 실망했다. 이 영화를 끝으로 가르보는 다시는 영화를 찍지 않았다. 36세 때였다. 가르보는 할리우드와 연기생활 모두에 질려있었고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대중의 관심과 명성도 싫고 무서웠다. 그나마 이게 30대 초반에 이미 그만 두고 싶었던 것을 억지로 참고 참다 터트린 거였다. 그렇게 가르보는 최정상에서 군림하던 30대에 은퇴를 선언하고 대중 앞에서 사라졌다.

3. 주요 출연 작품

  • Flesh and the Devil, 1926
  • The Torrent, 1926
  • Love, 1927
  • The Divine Woman, 1928
  • A Woman of Affairs, 1928
  • The Single Standard, 1929
  • Inspiration, 1931
  • 안나 크리스티(Anna Christie), 1931
  • Susan Lenox(Her Fall and Rise), 1931
  • 그랜드 호텔(Grand Hotel), 1932
  • 마타 하리(Mata Hari), 1932
  • 크리스티나 여왕(Queen Christina), 1933
  • The Painted Veil, 1934
  •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 1935
  • 춘희(Camille), 1936
  • 정복자(Conquest), 1937
  • 니노치카(Ninotchka), 1939
  • 두 얼굴의 연인(Two Faced Woman), 1941

4. 은퇴 후

가르보는 출연료를 영리하게 투자를 한 것이 대박이 터져서 은퇴 후 평생을 윤택하고 편안하게 살았다. '로데오 드라이브'가 번화가가 되기 전에 부동산을 사뒀고 주식에도 소질이 있었다. 사망 전까지도 부동산과 주식을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이스트 강이 내다보이는 맨해튼 건물의 5층을 통째로 차지하고 방 7개짜리 집에서 혼자 지냈다. 수위들이 사생활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늘 호위해주었다. 같은 건물의 이웃들은 암묵적 규칙에 따라 가르보랑 얼굴이 마주치면 못 본 척을 해야했다. 그래서 이웃들 사이에서 호칭이 '그 얼굴(The Face)'이었다. 별칭이 원래 의도한 의미와 다른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래도 살던 건물의 직원들이 전부 파업했을 땐 이웃들을 위해 직접 승강기를 운행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에는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과 18세기 프랑스 고가구들이 잔뜩 있었다. 매일 실컷 늦잠을 자고 집안일은 전혀 손대지 않았고 요리도 한 번 하는 법 없이 고급 북유럽 요리 전문점 뉘보르 넬슨[13]에서 배달만 시켜먹었다. 커피 내리는 것조차 번거로워했다. 인생을 귀차니즘으로 살았던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어하고 통화하는 것도 성가셔서 몇 주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는데 그러다가도 얼마 없는 친구들을 만나 밥이 먹고 싶을 때면 특정 장소에 쪽지를 두곤 했다. 밴 존슨의 경우엔 공원의 나무였다.

사람들이 못 알아보도록 페도라 모자를 쓰고 스카프선글라스를 상시 착용하긴 했어도[14] 매일 외출했다. 혼자 돌아다니는 게 불안할 땐 친구나 연인을 경호원처럼 대동하고 다녔다고 한다. 상가에서 물건을 둘러보고 가명으로 화랑에 전시 구경을 다니고 해외를 수시로 왔다갔다 했다. 휴가용 저택이 있던 스위스 클로스터스(Klosters)에 갈 땐 가장 좋아하는 감독 클래런스 브라운의 성을 딴 해리엇 브라운(Harriet Brown)이란 가명을 썼다. 그럼에도 알아채는 사람들이 당연히 나타나곤 했는데 그때마다 시치미를 뚝 뗐다. 사람을 안 좋아하고 은둔을 추구했지만, 그런 것 치곤 상당히 활달한 삶을 살았고 덕분에 이렇게 은퇴 이후의 개인적 삶에 대한 주변인들의 증언이 풍성하게 남았다.

한국에선 가르보가 꽃을 키운 것을 두고 소박한 소일거리였겠거니 오해하고 있지만 가르보는 아예 캘리포니아에 큰 장미 정원을 두고 있었고 겨울만 그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다. 즉 "야채와 꽃을 키웠다" 는 언급은 본인이 직접 텃밭 같은 걸 가꿨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냥 일꾼들을 사서 정원 손질을 시킨 것이다. 애초에 뭘 하는 게 너무 싫고 귀찮아서 은퇴한 사람이다.

제2차 세계 대전스톡홀름에서 영국군이 고위급 나치 동조자들을 색출하는 데 협조했다는 군 관계자들의 주장이 있다. 영국 첩보원들을 서로 연계해주고 쪽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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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에 찍은 증명사진. 다음해 하퍼스 바자에 실렸다.

1950년경 리처드 버튼은 20명 정도가 모인 작은 할리우드 모임에서 가르보를 만나 대화까지 나눴는데 가르보라는 걸 못 알아차린 적이 있다. 마흔 정도라 짐작되는[15] 품격이 있어 보이는 여성이 농담으로 꽤 야한 얘기들을 꺼내서 놀랐다고 한다. 다른 동료 배우들도 "가르보가 저속한 얘기를 잘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1954년에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연기"를 펼쳤다는 찬사와 함께 아카데미 특별공로상을 수상했다. 1955년부터는 사인하는 것도 그만 두고, 초연 행사에도 안 가고, 백악관 초대도 거부했다. 그러나 동시에 친구에게 "사람들이 내가 여기서 지내는 걸 알게 하는 게 싫기" 때문에 고집하고 있는 삶의 방식 때문에 "죄수"가 된 것 같다고 편지하기도 했다. 서신들을 보면 본인도 이렇게 죽을 때까지 아무 것도 안 하고 살아도 되나 고민은 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언제나 결론은 "귀찮다"로 끝났다.

유일하게 열심히 한 건 운동이었다. 집에서 요가를 열정적으로 했고 50대에도 옆으로 재주를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참 운전을 해야 갈 수 있는 친구 집에서 테니스 시합을 하기도 했다.

60대엔 우울증을 앓아서 이웃의 소음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단조로운 삶을 지겨워하면서도 사회 불안장애와 군중에 대한 공포가 심해져 사람을 더 기피하게 됐던 모양이다. 1980년대에 가르보와 두 번 인터뷰 했던 에드워드 로지[16]에 의하면 흡연과 단음식(초콜렛칩 쿠키)과 꽤 심한 음주(스톨리치나야 보드카[17]와 커티 사크 스카치[18])를 상당히 즐겼다고 한다. 말년엔 지팡이에 의지해야했고, 심장콩팥 문제로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받았다.

1990년에 84세로 맨해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고 유골은 스웨덴에 있다. 조카가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정 받았는데 그 조카도 2017년 사망했다.

5. 사생활

동성애자였다는 의심이 꾸준히 있어왔다. 실제로 보면 여성이라기보단 중성, 이를 넘어 남성에 가까운 느낌까지도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친구인 작가 고어 비달은 "여자들은 가르보를 좋아했지만, 남자들은 가르보를 다 싫어했다"고 답했다.[19] 다른 사람들의 말까지 종합해보면 남자들에게 인기가 없었다는 건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 사실로 보이며 이런 점이 동성애자 의혹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남성 연인들이 존재했던 게 분명하기 때문에 여성 연인들의 존재 여부가 확실해진다면[20] 양성애자로 분류하는 게 합당하다.

명성에 비해 연애적으로 흥미를 보이는 남성들이 적었기 때문인지 마음에 드는 남성들에겐 먼저 적극적으로 접근해 직설로 구애하는 편이었다. 활동 당시엔 이게 거꾸로 유혹에 능한 악녀 이미지가 되어, 세간에선 연인이었던 존 길버트가 가르보의 농간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이 진실로 여겨졌다.[21] 감독 모리츠 스틸러도 길버트와 마찬가지로 MGM의 희생양이었지만 "희대의 악녀" 가르보 때문에 자살했다는 악성 소문이 수십 년 동안 기정사실화 됐었다.

가장 유명한 연인인 존 길버트와는 이들 콤비의 첫 영화 촬영 때인 1926년부터 그 다음 해까지 교제했다. 길버트는 여러 번 청혼했으며, 감독 킹 비더가 엘러노어 보드먼[22]과 결혼할 때 합동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의 아내가 되는 걸 끔찍하게 여긴[23] 가르보가 결국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서신 등을 보면 가르보는 이즈음 이미 평생 독신으로 살 생각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 길버트는 아이너 클레어[24], 버지니어 브루스[25]와 결혼생활을 했다. 길버트가 이 와중에도 다시 가르보와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헤어진 후에도 혹은 헤어진 때로 추정되는 시기에도 가르보는 길버트에게 강한 애착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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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애자인 영국인 사진작가/디자이너 세설 비튼[26]과의 파란만장한 연애도 유명하다. 비튼은 고전 할리우드 시대를 수놓은 스타들의 외모를 전부 신랄하게 비하했는데, 유일하게 찬양한 사람이 가르보였다. 비튼은 1930년대부터 가르보를 좋아했지만, 1946년이 되어서야 사귈 수 있었다. 그러나 비튼과의 연애 역시 비튼이 아니라 가르보가 대놓고 잠자리로 이끌면서 관계가 시작됐다고 한다. 비튼도 가르보에게 청혼했었다.

가르보는 비튼과 사귀던 중에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멀리하며 정신고문 했는데, 막상 비튼이 남편과 사별한 한 영국 여성과 만나기 시작하자 "그 여자의 목을 잘라버리겠다"고 말했다. 비튼은 가르보에게 차이고 영국으로 건너갔는데, 그 뒤로도 오랫동안 가르보를 홀로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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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비튼이 찍은 가르보의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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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비튼은 할리우드에서 각광 받아 여타 전설적인 고전 스타들의 사진도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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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선수 맥스 베어[27]도 가르보가 먼저 흥미를 표시한 남성 중 하나다. 1933년 6월 독일인 막스 슈멜링[28]을 유대인 맥스 베어가 녹아웃으로 꺾자 가르보는 이를 나치에 대한 "작은 승리"라 칭하며 MGM 수장 루이 B. 메이어조차 방문이 금지돼있던 촬영장으로 초대를 해 사귀게 되었다. 그러나 베어가 1934년 6월에 있던 프리모 카르네라[29]과의 경기 준비를 위해 뉴욕으로 가면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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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관계한 남성들로는 배우 닐스 아스테르[30], 찰스 K. 펠드먼[31], 조지 브렌트[32], 만화가 찰스 아담스, 미용사 시드니 길러라프[33] 등이 거론된다. 1955년 즈음에 아리스토틀 오나시스와 관계했다는 말도 있다.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마를레네 디트리히와 관계가 있던 남자들이며, 제작자 릴런드 헤이워드는 캐서린 헵번의 첫 불륜 상대다.

지휘자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와 1937년에 공개적으로 함께 다녀 연인 사이로 알려져 있으나 친구에 불과했다는 주장도 많다. 한때 사업가 조지 슬리[34]가 사는 건물로 거주지를 옮겨 불륜 관계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슬리의 아내인 최초의 스타 패션 디자이너 밸린티나[35]와의 깊은 친분 때문에 이사한 걸로 보기도 한다.

친구 사이로 알려져있는 밴 존슨과도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다. 앤디 워홀 등 팝아티스트들을 세간에 알렸으며 세설 비튼과 친분이 있던 새뮤얼 애덤즈 그린[36]은 가르보의 절친이었는데, 그가 녹음했던 통화 내용엔 실제로 가르보가 존슨을 남자친구로 칭하는 구간이 있다.

관계한 상대로 지목되는 여성들은 클로뎃 콜베어, 빌리 홀리데이, 재닛 게이너, 조저핀 헛친슨[37], 루이즈 브룩스[38], 리비 홀먼[39], 캐서린 코넬[40], 오너 먼슨[41] 등이 있다. 털룰러 뱅크헤드[42]마를레네 디트리히와도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6. 여담

  • 노화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은퇴했다는 얘기는 낭설이다. 가르보는 외모에 관심이 없었고 신경 쓰는 걸 귀찮아했다. 산발을 하고 화장이 다 번지든 말든 대충 다녔다. 데이트에조차 이렇게 나타나 세설 비튼이 일기에서 한탄했다. 빈틈 없어 보이는 이미지는 소속사 MGM의 공로이며 눈썹 등 각종 스타일링 역시 MGM의 것이지 가르보가 창안한 게 아니다.
  • 미용산업의 변천사를 다룬 책 "아름다움의 발명"에 가르보의 이야기도 나온다. 당시 눈썹을 가늘게 그리고 속눈썹을 강조한 가르보의 메이크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 명언으로 "할리우드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면 좋을 텐데"가 있다.
  • MTV에서 나오는 뮤직비디오와 시시껄렁한 케이블 예능을 보는 걸 좋아했다.
  • 많은 동료 배우들의 증언에 의하면 알몸으로 멱을 감는 걸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 뭘 고를 땐 그냥 검정색으로 정했다. 다른 색깔로 고민하는 게 성가시다는 이유였다.
  • 동료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대화 방식이 지목되곤 한다. 잉그리드 버그먼은 가르보랑 대화할 기회가 한 번 있었는데 "바베이도스 섬에선 사람들이 옷을 훔쳐가니 조심하라"는 뜬금없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 대화가 뚝 끊겼다고 한다. 보통 캐서린 헵번을 괴짜라고들 하지만, 가르보는 그보다 더한 괴짜였다.
  • 같은 괴짜류에 똑같이 운동을 좋아하는 캐서린 헵번과 1936년 처음 만나 사망한 해인 1990년까지 교류했다. 서로를 집에 초대하고 함께 테니스를 치고 수영을 하는 사이였다. 헵번은 가르보가 여배우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으며, 상냥하고 다정하며 유머감각이 있다고 말했다. 양성애자 의혹이 있는 헵번과도 관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 배우로서 엄청나게 존경 받았다. 그레고리 펙이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이기도 했다.
  • 가르보의 조기 은퇴와 영원한 은둔은 영미권에 큰 인상을 남겨 사회적으로 알려진 사람이 갑자기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자취를 감추는 걸 뜻하는 "do a Garbo(가르보하다)"라는 관용어구가 생겼다. 토머스 핀천처럼 대중의 시선을 피하는 인물들은 흔히 가르보에 비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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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바빌론>(2022)에서 브래드 피트의 배역은 노골적으로 존 길버트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올리비아 와일드가 연기한 아내 역은 가르보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위 가르보 모자를 쓰고 나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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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년작 영화 <그랜드 호텔>에서 가르보의 유명한 대사가 '혼자 있고 싶어요'라고 알려져 가르보의 은둔 이미지를 강화시켰는데, 1955년 가르보는 라이프지와의 인터뷰에서 "'혼자 있고 싶어요(I want to be alone)'가 아니라 '날 좀 내버려둬(I want to be let alone)'라는 대사고 둘 사이엔 큰 차이가 있다"고 정정했다. 물론 사람들은 제대로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혼자 있겠다고 해놓고' 인터뷰도 계속 하고 사인지도 만들고 길거리에서 자주 포착되다보니 조롱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더들리 무어와 함께 활동했던 유명 코미디언 피터 쿡[43]은 가르보 분장을 하고 오픈카를 타고 런던 시내를 달리며 확성기에 대고 "혼자 있고 싶어요!"라고 외치는 코미디 스케치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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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전설적인 뮤지션 마츠토야 유미가 팬이었는지, 타 가수에게 곡을 제공할 때 그레타 가르보를 음차한 '쿠레타 카루호(呉田 軽穂)'라는 가명을 작곡가명으로 사용한 적이 있다.
  • 가르보를 소재로 한 <가르보 토크(Garbo Talks)>(1984)라는 영화도 있다. 가르보의 열렬한 팬인 어머니가 시한부 선고를 받자, '가르보를 한 번만이라도 직접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 가르보를 찾으러 가는 중년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명감독 시드니 루멧이 연출했고, 어머니 역은 앤 밴크로프트가 연기했다. 가르보 역의 배우는 뮤지컬 계에서 유명했던 베티 캄든. 배틀스타 갤럭티카 신 시리즈에서 로러 라슬린 역을 맡았던 메리 먹다널의 영화 데뷔작이다. 다만 루멧의 기량이 오락가락하던 1980년대 영화라 평은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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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즈니도널드 덕 단편 만화영화 <The Autograph Hound>(1939)에서 과장되게 묘사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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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제일 오른쪽 위가 가르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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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클라크 게이블이다. 둘은 앙숙이라 서로 상대에 대한 혐오를 세간에 공개적으로 표출하던 시절인데도 정반대인 것처럼 묘사됐다.
  • 함께 왕립 연극 학교를 다녔으며 평생 교류한 스웨덴 배우 미미 폴락[45]에게 일방향의 연애 감정을 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결혼을 한 폴락이 남편의 아이를 출산을 했을 때 가르보가 "아버지가 된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표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 동성애 성향의 근거로 제시되는 편지 구절들은 표현이 상당히 모호하나 두 사람의 서신이 전부 공개된 상황이 아니라 가르보가 폴락을 짝사랑 했다는 이론이 여전히 지지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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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배우 릴리언 타쉬먼이 동성 애인 중 하나로 지목되고 있다. 타쉬먼은 배우 에드먼드 로우(Edmund Lowe)와 베벌리 힐스에 "Lilowe(릴로우)"란 이름의 저택을 갖고 있던 잉꼬부부로 유명했는데 로우의 사후 그가 게이였고 타쉬먼은 레즈비언이었으며 둘은 위장부부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타쉬먼을 늘 집요하게 쫓아다니던 당대 기자들은 타쉬먼에게서 그런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 그 외에 신빙성 있는 증인은 없음에도 가르보의 상대였다고 이름이 꾸준히 거론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피피 도르세이[46], 마저리 케인[47], 디타 파를로[48], 콘스턴스 콜리어[49], 가르보와 사교적인 교류가 있었으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성적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돌로레스 델 리오 등이 있다.
  •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동성애 관계가 있지 않았겠냐는 얘기가 있지만 낭설에 불과하다. 디트리히와 가르보가 관계했다는 말이 도는 남녀들이 겹치고, 일방적으로 대항 의식을 지녔던 디트리히가 인터뷰에서 가르보를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한 번 한 적이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은 할리우드 내 공동의 모임에서 때로 서로 얼굴을 마주쳤지만 개인적 교류는 없던 사이다.
  •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50]는 가르보와 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현재는 짝사랑에서 비롯된 허풍이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가르보에게 차이고 홧김에 디트리히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가르보와 오래 친구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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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의 일기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
  • TBC에서 이선영이 전담 성우였다. <니노치카>, <안나 카레니나>, <크리스티나 여왕>, <춘희>, <그랜드 호텔>에서 모두 맡았다. <춘희>의 경우 성우들의 배역 경쟁이 치열해 송도순, 장유진과 함께 경합했다고 한다.

[1] 신이 빚어낸 궁극의 얼굴이란 뜻이다.[2] Louise Brooks. 1906 - 1985. 플래퍼의 아이콘으로 한때 큰 인기를 누렸다.[3] Mauritz Stiller. 1883 - 1928.[4]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모은 대중작가 빈센트 블라스코 이바네스(Vicente Blasco-Ibanez).[5] Latin lover. 이국적인 외모에 여성을 잘 유혹하는 미남 역의 전형.[6] Antonio Moreno. 1887 - 1967.[7] John Gilbert. 1897 - 1936.[8] Garbo's salary.[9] 주로 클래런스 브라운. 총 7편을 함께 했다.[10] 일례로 촬영감독 윌리엄 대니얼스(William Daniels)가 있다.[11] 이 유명한 표어는 밑에서도 얘기하지만 앤 밴크로프트가 출연한 동일한 이름의 영화도 만들어졌다.[12] 5년 뒤 그리어 가슨 주연으로 개봉한 <퀴리 부인>은 흥행과 비평 면에서 모두 성공했고 작품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등 7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다.[13] Nyborg Nelson. 한때 뉴욕의 명물이었다.[14] 특유의 귀찮아하는 성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이 원칙은 차차 폐기되었다.[15] 실제론 40대 중반이었다.[16] Edward Lozzi. 언론인. 홍보 회사도 운영하는데 로지를 고용했던 고객 중엔 존 보이트, 자자 가보 등이 있다. 조지 리브스의 사망과 관련한 증언도 유명하다.[17] Stolichnaya. 호밀을 재료로 하며, 소련에서 생산되던 브랜드. 소련 붕괴 후 룩셈부르크의 주류회사 SPI Group에서 Stoli라는 이름으로 판매 중이다.[18] Cutty Sark scotch. 글렌로씨스. 이름의 커티 사크는 현재 유일하게 전해져와 박물관에 전시 중인 쾌속 범선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스웨덴 화가 칼 조지 오고스트 발린(Carl Georg August Wallin)이 그렸던 이 배의 그림이 라벨에 나와있다. 현재 프랑스 주류회사 라 마르티니케즈(La Martiniquaise)에서 생산 중이다.[19] 여성팬층이 두터워서 그 당시 MGM은 그것을 알아차리고 가르보를 퀴어 영화에 출연하게 한 적이 있다.가르보와 다른 여배우와 키스씬이 나온다.[20] 아직까지는 제대로 된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21] 전술했듯이 길버트는 유성영화 전환기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와중에 MGM까지 작정하고 괴롭혀 자기파괴적 말로를 보냈으며, 가르보는 이런 길버트를 구하려고 노력했다.[22] Eleanor Boardman. 1898 - 1991.[23] "Wife" is such an uggly word.[24] Ina Claire. 1929 - 1931[25] Virginia Bruce. 1932 - 1934.[26] Cecil Beaton. 1904 - 1980.[27] Max Baer. 1909 - 1959. 진 할로우와 불륜한 적도 있다.[28] Max Schmeling. 1905 - 2005. 1930년 미국인 잭 샤키(Jack Sharkey)가 실격패 당하면서 유럽인 최초 헤비웨이트 세계 챔피언이 되었으나 1932년 재대결에선 샤키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빼앗겼다. 이후 벌어진 미국 흑인 선수 조 루이스(Joe Louis, 1914 - 1981)와의 대결은 세계정치판 및 인종 대결의 상징적 대리전이 되었다. 1936년 슈멜링이 루이스를 녹아웃으로 이기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은 그를 아리아인의 전형으로 선전했다. 1938년 6월 22일 재대결 전에 아돌프 히틀러는 슈멜링을, 프랭클린 로저벨트는 루이스를 만나고 돌아갔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7만 명이 운집한 이 재대결에선 루이스가 슈멜링을 경기 시작 2분만에 녹아웃 시켰다. 슈멜링 본인은 나치와 거리를 뒀으며 유대인 훈련사를 고용했고 수정의 밤 때 자택에 유대인 소년 둘을 몰래 숨겨주기까지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선 독일 낙하산 부대병이었으며 크레타 섬 전투에서 부상 당했다. 1950년대에 루이스와 재회한 뒤 좋은 친구로 지냈다.[29] Primo Carnera. 1906 - 1967.[30] Nils Anton Alfhild Asther. 1897 - 1981. 같은 스웨덴 출신으로 '남자 가르보'라 불렸다. 가르보와 <The Single Standard>(1929), <Wild Orchids>(1929)를 함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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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Charles K. Feldman. 1951 - 55년 사이에 마릴린 먼로의 에이전트였으며 <7년만의 외출>(1955)의 제작자다.[32] George Brent. 베티 데이비스의 상대역을 했던 작품들이 유명하다.[33] 케리 그랜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슈퍼스타들만 전담하던 전설적인 미용사. 양성애자였다.[34] George Schlee. 1901 - 1964.[35] Valentina. 1899 - 1989.[36] Samuel Adams Green. 1940 - 2011.[37] Josephine Hutchinson. 1903 - 1998. 1927년 여배우 이버 러 갤리언(Eva Le Gallienne)과 불륜을 저질렀다가 발각돼 아웃팅 당했으나 경력을 그대로 이어나갔다. 이버 러 갤리언과 함께 극찬을 받은 연극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만든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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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본인의 주장이다. 가르보를 두고 매우 '남성적'이라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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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Libby Holman. 1904 - 1971. 배우. 양성애자다. 털룰러 뱅크헤드와도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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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Katharine Cornell. 1893 - 1974. 게이인 남편과 위장결혼을 했으나 당대에도 암암리에 업계에선 모두 레즈비언임을 알고 있었다. 털룰러 뱅크헤드,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 등과도 관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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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Ona Munson. 1903 - 1955. 양성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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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Tallulah Bankhead. 1903 - 1968. 1932년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남성들과의 성관계에 대한 욕망을 발언해 헤이즈 위원회의 출연 금지 목록(Doom book)에 오르며 고초를 겪었을 정도로 남성을 좋아하는 성적 지향성 역시 가졌던 양성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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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Peter Cook. 1937 - 1995.[44] 다만 가르보는 뼈대가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45] Mimi Pollak. 1903 - 1999.[46] Fifi D'Orsay. 1904 - 1983. 배우. '프랑스 여자'로 소비됐으나 실은 캐나다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래서 '프랑스를 한 번도 못 본 프랑스 여자'라고 불린다.[47] Marjorie Kane. 1909 - 1992.[48] Dita Parlo. 1908 - 1971. 독일 배우.[49] Constance Collier. 1878 - 1955. 영국 출신의 배우. 유럽에서 최초로 인슐린을 투약 받았던 사람이다.[50] Mercedes de Acosta. 1892 -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