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2:21:49

홍무제/평가


{{{#!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0000><tablebgcolor=#000000> 파일:1280px-A_Seated_Portrait_of_Ming_Emperor_Taizu.jpg홍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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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생애 <colbgcolor=#fff,#1f2023>생애
평가 평가
전투 파양호 대전
연호 홍무
능묘 명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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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성장 배경과 능력3. 군사
3.1. 군사 제도 수립
4. 내정
4.1. 환관 중용
5. 숙청
5.1. 숙청의 이유5.2. 과장된 악명
6. 후계자 문제
6.1. 번왕 책봉
6.1.1. 과장된 번왕 문제

1. 개요

"짐이 생각하기에 역대 현군 중에서 홍무제만한 인물이 없다. 왜냐하면 여러 군주들의 덕정이 각기 장점이 있지만, 완벽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반면 홍무제가 정한 조리와 장정은 매우 세밀하고 완벽하게 계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짐은 역대 군주들이 홍무제만큼 미치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朕以為歷代賢君、莫如洪武。何也數君德政、有善者。有未盡善者。至洪武所定條例章程、規畫周詳。朕所以謂歷代之君、不及洪武也。
청나라 제3대 세조 순치제, 《청실록》순치 10년 정월 29일 기사(大清世祖章皇帝實錄·卷之七十一·順治十年正月二十九日)
우리 태조 고황제는 진정 천만고에 한 번 나올 황제다.
我太祖高皇帝,盖千萬古之一帝也。
이탁오,《속장서》(續藏書)
악명 높은 숙청을 저질렀지만, 홍무제중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세운 위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난세의 강력한 군벌이자 효웅이었으며, 치세에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온갖 제도를 정비한 명군이었다. 미천한 신분에서 일어나 9주 천하를 거머쥐고 능히 다스린 그의 일생은 신화와도 같았다.

홍무제의 신화적인 행적은 후대의 왕조였던 청나라에서도 흠모와 모범의 대상으로 제시되었고, 성조 강희제 같은 명군도 홍무제의 위업을 인정했다. 극빈층 출신에 사회적으로 경멸당하는 탁발승이었음에도[1] 부족했던 소양을 노력으로 극복하고, 천하쟁패의 승자이자 황제로 우뚝 선 입지전적인 모습은 역사라는 백지 위에 쓰인 인간승리의 서사라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성장 배경과 능력

파일:external/jiuyingzhi.com/suotouwugui-3.jpg
치륭당송(治隆唐宋), 성조 강희제의 어필, 난징 효릉
(명나라의 치적이 당나라와 송나라보다 더 융성했다.)
홍무제는 어렸을 적에 고생한 영향으로 탐관오리부정부패를 끔찍이도 싫어했다. 그래서 각 성마다 비석을 세워 일정량 이상의 세금을 걷지 못하게 하고, 관료들의 기강을 철저하게 단속했다. 그리고 오랜 전란으로 황폐화된 국가를 재건하고 개간을 장려해 농업 생산력을 끌어올렸으며, 이갑제를 실시해 사회 질서를 세우고, 농촌 공동체를 회복시켰다.

훗날 청나라강희제강남을 순행하면서 홍무제가 안장된 효릉에 참배한 후, 홍무제를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치세가 중국 역사에서 번영의 상징으로 꼽히는 당나라송나라 시절보다 융성했다는 의미의
치륭당송
(治隆唐宋)
이라는 네 글자를 친필로 써 비석을 세웠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홍무제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황제였다. 서민 신분의 사람이 통일 왕조의 황제가 된 것은 전한고조 유방에 이어서 두 번째였으며, 한고조보다 훨씬 더 여건이 나쁜 극빈층 농민으로 시작해 천하의 대권을 잡았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된 이들 중에서 주중팔보다 시작 여건이 좋지 않은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2]

진시황제는 조부 진소양왕에게서 물려받은 기반이 있었고, 한고조는 홍무제와 같은 평민이었으나 사수정의 정장 벼슬도 할 정도로 형편에 여유가 있었으며, 한삼걸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을 잘 기용해 천하를 통일했다. 그러나 홍무제는 아무런 기반 없이 밑바닥에서 시작하여 군사와 내정 양면을 주도했다.

명의 3대 개국공신 서달, 유기, 이선장이 유명하지만 이들은 한삼걸에 버금가는 위상은 누리지 못했다. 이는 이들 3대 개국공신의 공적이 적다기 보다는 왕조의 개창 과정에서 그만큼 홍무제의 비중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홍무제는 여러 군웅들과 패권을 다툴 때부터 모든 정책은 자신이 큰 그림을 그리고 막료들이 세부 계획을 수립하는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내정을 총괄했던 이선장이 올린 헌책을 기각하고, 자신의 구상을 밀어붙여 일을 성공시킨 일도 여러 번 있었으며, 여러 장군들의 뜻을 물리치고 진우량을 격파한 일도 있었다.

심지어 기반 세력도 수백 명의 병사들을 장인 곽자흥에게 넘기고 25명의 최측근만 대동한채 의병을 모아 새로 다진 것이었다. 25명으로 시작한 병력이 3,000 ~ 4,000명으로 늘어나고, 목대형을 굴복시킨 덕분에 20,000명까지 불어난 군대에 군율을 세우고, 정규군으로 재조직한 것을 보면 홍무제의 능력이 거병 초기부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홍무제는 당대의 군벌치고는 배신을 거의 당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수십 명의 양자를 들여서 지휘관과 감군으로 운용하고, 장수들의 일가 친척들을 응천부에 살게 해 인질로 잡았으며, 장수들은 철저히 자기가 짠 작계대로 움직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의심이 생기면, 곧바로 인질들을 참살하는데다가 주변에 감시인들이 많고 통제가 강하니 지휘관들이 배신할 마음을 갖기가 어려웠다. [3]

낮은 출신의 성분과 황제로서의 치적 덕분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성군이라는 평가를 받은 반면, 개국공신들에 대한 숙청과 강한 통제 및 형벌 때문에 신하들에게는 폭군처럼 무서운 존재였다. 개국공신이며 원로대신인 유기이선장 등도 비참한 말로를 겪었으며 남옥과 호유용을 위시한 다수의 회서계 공신들과 숙장들이 황제권 강화를 이유로 숙청당했다.

또한 엄청난 일 중독자로 유명했다. 홍무제는 세력을 구축해 오국공에 오른 뒤에는 여러 지휘관들에게 병력을 주어 원정군을 운용했는데, 서류 하나 하나까지 다 살펴가며 보급과 작계를 총괄했다. 1380년, 홍무제는 좌승상 호유용을 숙청하고 승상직을 폐지해 6부를 황제의 직속 기관으로 삼고 황제권을 강화했다. 이후, 붕어할 때까지 18년 동안 엄청난 양의 업무를 소화하는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업무량을 한 번 계산해 본 적이 있는데 8일 동안 문서 3,391건을 처리했다고 한다. 대략 하루에 처리한 것이 400건이 넘는 것이다. 자신의 의견을 건의하고 문제의 해결책에 대해 청원하는 부분은 500여 글자 밖에 안되는데 비해 황제를 찬양하는 구절만 10,000 글자가 넘어간 상소문을 읽다가 격노한 일화도 있다. 안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상소문을 읽던 신하가 황제 찬양문을 6,000자까지 읽자, 격노하여 상소문을 올린 관료를 조정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폭행했다. 그래도 상소문의 제안 만큼은 훌륭했기 때문에 홍무제는 상소문의 진언을 가납했다.

다만 신하들의 사소한 잘못에도 노발대발하면서 두들겨 팬다거나, 다른 왕조나 황제들의 치세에는 거의 시행되지 않은 체벌인 정장(廷杖)을 유독 홍무제의 치세에만 가했다는 설을 신뢰하는 것은 유보할 필요가 있다. 공식적인 기록에는 정장을 가했다는 기록이 매우 적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홍무제가 구축한 황제 독재 체제는 황제에게 과중한 업무 부담이 발생하기 때문에 황제의 업무를 보조해 줄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홍무제는 호유용 숙청 이후에 사보관 제도를 시행해 업무 보조 인력을 확보하고, 이후 전각 대학사를 설치했다. 홍무제의 뒤를 이은 영락제는 전각 대학사를 내각으로 개편하고, 학사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어 황제의 업무 부담을 분산시켰다.

홍무제의 황제 독재 체제는 원나라를 반면교사한 것이었다. 원세조 이후에 즉위한 원나라의 황제들은 암살이나 급사하는 일이 잦았고, 무능하거나 태만한 황제들이 많았다. 또한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파벌 다툼으로 인해 대도와 상도 사이에 대전(양도전쟁)이 터지는 등 내전도 여러 차례 발생했었다.

이에 대해 학습한 홍무제는 황제가 전면적으로 국정을 장악하는 체제를 꿈꾸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을 쥐어 언제든 권신이 될 수 있는 공신과 숙장들을 숙청하고, 그 빈 자리를 환관과 과거제를 통과한 행정 관료들로 채웠으며, 황태자 주표를 잘 교육해 그가 부황을 보조하도록 했다. 홍무제에게 있어서 송나라보다 더욱 강력한 황제 독재 체제는 시대적인 요구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홍무제의 황제 독재 체제는 다양한 면에서 비판받는다. 황제권의 강화는 측근 세력인 환관과 외척의 발호를 불러 왔고,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전제로 흘러갈 소지가 다분했다. 또한 '군신공치'를 중시하는 신사 출신 관료 계층과 황제 친위 세력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명청교체기에 명나라가 청나라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동림당으로 대표되는 사대부 세력과 환관으로 대표되는 엄당 세력 사이의 격렬한 갈등이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후대 황제들의 부족한 자질과 황제에게 몰리는 과중한 업무량은 명나라를 비판할 때마다 항상 지적되는 요소이다. 당장 홍무제 시기에는 고위직을 독점한 공신들을 제거하고 황제가 정력적으로 국정에 임하니 큰 문제가 없었지만, 후대에 측근과 환관들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업무를 등한시한 여러 황제들이 나타나면서 문제가 심화되었다.

어쨌거나 홍무제가 만든 황제권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명청시대 황제들에게 일종의 모범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 21세기가 된 오늘날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한자문화권의 황제들이나 군주들의 모습은 사실상 주원장이 만들어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이 때문에 명대 이전의 황제와 군주들을 묘사한 사극을 보다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모습에 혼란을 겪는 이들도 적지 않다.

3. 군사

예로부터 군사적 능력에 있어서 이세민을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 다음은 주원장이다.
自古能军无出李世民之右者,其次则朱元璋耳。
마오쩌둥
태조는 동남에서 일어나 서북을 점령했으니 고금에 드문 일이다. 그의 병법을 살펴보면, 실로 손자와 오자에서 나왔으며, 허점을 공략하여 적을 무찌르니, 가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천하를 얻고자 하는 뜻만 있고 전략이 없다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태조는 선후의 완급과 분합의 이치를 잘 알아, 처음에는 전장에서 기회를 결정하고, 이어서 조정에서 승리를 쟁취하니, 대략 한고조와 같고, 정밀함은 광무제에 비할 만하다.

太祖起自东南,奄有西北,为古今异数。尝考其用兵之法,实一出于孙吴,攻瑕捣虚,是以所向无敌。夫有取天下之志,而无取天下之略,自开辟以来,未见有成功者也。太祖明于先后缓急之宜,分合向背之理,始则决机于两陈,继直制胜于庙廊,大略同于汉高,精密媲于光武
고조우[4]
팽대와 조균용의 세력 등이 날뛰었지만 곽자흥은 약하니, 주원장은 곽자흥과 함께 거사를 이루기 어렵겠다고 판단, 병사를 다른 장수들에게 맡기고 서달, 탕화, 비취 등[5]과 함께 남쪽으로 원정을 갔다.

여패채의 항복한 병사 3,000여 명을 수습해서 동쪽으로 갔고, 밤 중에 황간산의 원나라 장수 장지원을 기습하여 군졸 20,000여 명을 거두어 들였다. 도중에 이선장을 만나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고는 크게 기뻐했고, 같이 저주를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원나라 군대 100,000명이 화주를 공격하자 3개월을 걸쳐 수비했으나 식량이 거의 떨어졌다. 독견첩목아, 추밀부사 반주마, 민병원수 진야선은 나누어 신당, 고망, 계룡산에 주둔하여 보급을 끊었다. 태조는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격파했고, 원나라 병사들은 패배하여 달아났다.

時彭、趙所部暴橫,子興弱,太祖度無足與共事,乃以兵屬他將,獨與徐達、湯和、費聚等南略定遠。計降驢牌寨民兵三千,與俱東。夜襲元將張知院於橫澗山,收其卒二萬。道遇定遠人李善長,與語,大悅,遂與俱攻滁州,下之. 元兵十萬攻和,拒守三月,食且盡,而太子禿堅、樞密副使絆住馬、民兵元帥陳野先分屯新塘、高望、雞籠山以絕餉道。太祖率眾破之,元兵皆走渡江
《명사》, <태조본기>(明史, 本紀第一 太祖一)
윤월 병진일에 진우량이 태평을 함락시키고, 수비 장수 주문손과 원판 화운, 왕정, 지부 허원이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량은 그의 주군 서수휘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국호를 '한'이라 했다. 그는 장강과 호광 지역을 점령하고, 장사성에게 함께 응천을 공격하자고 제안해 응천이 큰 충격을 받았다. 장수들이 먼저 태평을 회복하여 그를 묶어두자는 의견을 냈으나, 주원장은 반대했다.

태조는 진우량의 수군이 자신들의 10배에 이르러 갑작스러운 회복이 어렵다고 보았다. 어떤 이가 직접 나가 싸우자고 제안했지만, 태조는 적이 일부 병력으로 자신들을 얽매고 주력군이 금릉으로 향하면 자신들의 보병과 기병이 100리를 달려 전투를 치르게 되므로, 이는 병법에 어긋난다며 거절했다.

태조는 호대해에게 신주를 공격해 후방을 흔들고, 강무재에게 편지를 보내 진우량을 속여 동쪽으로 오도록 했다. 진우량이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자, 장우춘은 석회산에, 서달은 남문 밖에, 양경은 대승항에, 장덕승 등은 용강관에 배치되었다. 태조는 노룡산에서 군을 지휘했다.

을축일에 진우량이 용만에 도착하자, 태조는 곧 비가 올 것을 예측하고 식사를 마친 후 비를 타고 공격하자고 명했다. 곧 큰 비가 내리자 병사들이 격렬히 싸웠고, 비가 그친 후 수•륙 양면에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진우량은 별도의 배를 타고 도망쳤다.

태조는 태평을 회복하고 안경을 함락시켰다. 호대해도 신주를 점령했다. 처음에 태조가 강무재를 통해 진우량을 속이려 했을 때, 이선장이 의심했으나 태조는 두 적이 합쳐지면 자신들이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되므로 빨리 오게 해서 먼저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결국 장사성의 병력은 출병하지 않았다.

閏月丙辰,友諒陷太平,守將硃文遜,院判花雲、王鼎,知府許瑗死之。未幾,友諒弒其主徐壽輝,自稱皇帝,國號漢,盡有江西、湖廣地,約士誠合攻應天,應天大震。諸將議先復太平以牽之,太祖曰:「不可。彼居上游,舟師十倍於我,猝難復也。」或請自將迎擊,太祖曰:「不可。彼以偏師綴我,而全軍趨金陵,順流半日可達,吾步騎急難引還,百里趨戰,兵法所忌,非策也。」乃馳諭胡大海搗信州牽其後,而令康茂才以書紿友諒,令速來。友諒果引兵東。於是常遇春伏石灰山,徐達陣南門外,楊璟屯大勝港,張德勝等以舟師出龍江關,太祖親督軍盧龍山。乙丑,友諒至龍灣,眾欲戰,太祖曰:「天且雨,趣食,乘雨擊之。」須臾,果大雨,士卒競奮,雨止合戰,水陸夾擊,大破之,友諒乘別舸走。遂復太平,下安慶,而大海亦克信州。初,太祖令茂才紿友諒,李善長以為疑。太祖曰:「二寇合,吾首尾受敵,惟速其來而先破之,則士誠膽落矣。」已而士誠兵竟不出。丁卯,置儒學提舉司,以宋濂為提舉,遣子標受經學。六月,耿再成敗石抹宜孫於慶元,宜孫戰死,遣使祭之。秋九月,徐壽輝舊將歐普祥以袁州降。冬十二月,復遣夏煜以書諭國珍。
《명사》, <태조본기>(明史, 本紀第一 太祖一)

홍무제한고제, 광무제와 더불어 물려받은 기반 없이 거병하여 자기 힘만으로 천하통일의 과업을 완수한 몇 안 되는 통일 군주 중 한 명이다. 시황제는 강대한 진나라의 국력을 바탕으로 천하통일에 나섰으며, 무제 사마염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로부터 유산을 물려받았다. 수문제는 12대장군 출신의 세력가로서 북주의 황권을 찬탈해 중국을 통일했으며, 당태종은 부황의 거병에 참여해 군웅들과 패권을 다투었다.

과거에는 당태종이 거병과 통일전쟁을 주도한 것처럼 인식되었지만, 현재는 《대당창업기거주》를 통해 당고조가 거병을 주도한 사실이 드러났다. 송태조송태종은 군권을 장악하고 파벌을 구축한 뒤, 황제가 급사한 상황을 노려 진교역의 병변을 일으켜 선양을 받았다. 이후, 송태조후주의 세종 시영이 만들어둔 기반 위에서 통일을 이룩했지만, 그조차도 연운 16주는 수복하지 못했다.

한때 홍무제의 위업은 곽자흥의 기반을 물려받은 덕분이라는 설이 퍼졌지만, 《명사》와 《명실록》의 기록을 통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다. 오히려 곽자흥과 의견차가 벌어지고 의심을 받자, 자기가 이끌던 병력을 모두 곽자흥에게 넘겨주고 새로 거병했다. 이후 곽자흥이 패망하여 홍무제에게 찾아오자 기꺼이 영토와 병력을 나눠주었으며, 곽자흥의 사후에 잔존 세력을 받아들였다.

앞서 열거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통일전쟁을 수행하던 홍무제는 친정을 꺼리지 않는 강력한 군사지도자였으며, 여러 차례의 승전으로 자신의 기반과 실적을 쌓아나갔다. 크고 작은 전투에서 몸소 지휘를 맡아 대부분 승리를 거둔 홍무제의 전술적인 능력은 대단히 뛰어났지만, 그보다 더 뛰어난 자질은 대국을 볼 줄 아는 시야와 형세 판단, 체계적인 군수 관리와 대민정책이었다.

홍무제는 군을 쪼개어 유기적인 기동을 발휘하는 것이 전술적인 장기였는데, 이는 엄청난 리스크가 동반된 행동이었다. 적이 예상 밖의 움직임을 취하면 도리어 각개격파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홍무제의 판단은 번번이 들어맞았다. 훗날 전선에서 물러나 행정을 돌볼 때도 북벌의 대전략은 홍무제가 직접 수립했으며, 코케테무르북원 조정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서달을 움직여 그들의 주력군을 포위 섬멸하는데 성공했다. 괜히 한고조의 기풍을 가졌으면서 광무제가 보인다는 극찬을 들은 게 아닌 것이다.

전술 · 전략적 능력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평가할 수 있는 군수 체계와 주민 정책, 군기 확립은 홍무제의 군대가 도적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고, 대규모 작전을 체계적으로 장기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했으며, 현지 주민들의 적대를 회피하게 해주었다. 홍무제는 물자 확보를 위해 주민의 재산을 징발하는 채량(寨糧)을 폐지하고, 둔전을 조성해 안정적으로 물자와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민심을 살 수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홍무제의 오군(吳軍)이 다른 군벌들의 군대와는 차별화되는 강점이었다.

3.1. 군사 제도 수립

홍무제의 진정한 군사적 업적은 새로운 군사 제도의 시행일 것이다. 거병한 이후, 세력을 구축한 뒤부터 홍무제는 원나라의 군사 제도를 개편하여 군 지휘 체계를 조직하고, 대도독부를 설치했다. 통일을 한 뒤에는 유기의 건의에 따라 친군지휘사사를 설치하고, 군의 편제를 개편했다. 최소 부대 단위는 백호소였으며, 부대 지휘관은 소기(10명) - 총기(50명) - 백호(100명) - 천호(1,000명) - 지휘(5,000명 지휘)의 순서로 이뤄졌다. 즉, 백호소에는 100명의 병사와 소기 10명, 총기 2명, 백호 1명이 주둔해 있었으며, 지휘는 병사 5,000명과 약 600명 이상의 간부를 거느렸다.

호유용의 옥 이후, 홍무제는 중서성을 폐지하고, 그 통제를 받던 병부를 자신의 직속 기관으로 삼았으며 병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대도독부를 5군 도독부로 개편하고 각 군 도독부(전 · 후 · 좌 · 우 · 중군 도독부)들이 황제의 통제를 받으면서 상호 견제하게 하여 황권에 도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병력을 동원할 때는 반드시 황제의 재가를 받도록 했으며, 이때도 군 부대가 보관하던 부패와 사자가 가지고 온 부패가 결합하는지를 확인했다. 만약 사자가 갖고 온 금자패나 부패의 생김새와 글자가 부대에서 보관하던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즉시 사자를 붙잡았다. 또한, 감군을 설치해 각 군 지휘관의 동향과 군의 현황을 살폈으며, 이와는 별도로 금의위가 무관들을 감시하고, 의심할만한 정보가 들어오면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홍무제는 도독부 내부에도 좌 · 우도독을 두어 양자가 군권을 나눠 갖게 해 서로 견제하게 했으며, 동지 · 첨사 등으로 도독을 보좌하게 했다. 이로써 명나라의 군사권은 병부가 군정권을, 5군 도독부가 군령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5군 도독부 산하에는 13개의 도지휘사사와 3개의 행도지휘사사를 설치했으며, 1393년부터 1개의 지휘사를 추가해 총 17개로 증설했다. 이 17개의 도지휘사는 총 329개의 위소를 관할했으며, 위소는 변방을 수비하는 외위와 내지와 수도의 방위를 담당하는 내위로 나뉘었다. 도지휘사는 단독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2명의 지휘동지, 4명의 지휘첨사가 지휘사를 보좌했다. 또한, 요충지와 험지에도 위를 설치하고 이를 담당하는 진수장교들을 파견했으며 수도의 방위를 맡는 유수사 1개, 수어천호소(守禦千戶所) 65개소도 설치했다. 황궁에는 별도로 금의친군도지휘사사를 설치해 시위와 숙위를 맡겼다.

홍무제는 통일 대업을 함께 한 공신과 숙장들을 숙청하긴 했지만, 무관들을 우대하여 봉록을 후하게 주고, 훈작을 내렸으며 군인 유가족에게도 복지를 제공했다. 일종의 채찍과 당근을 병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5군 도독부가 6부보다 격이 더 높았기에 무관들이 문관들에게 꿇릴 이유가 없었다.

병사들은 병역을 세습하는 군호들로 구성했으며, 민호와 군호가 분리되어 있었기에 안정적으로 병력 자원을 수급하고 군사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대규모 인력을 변경 지역으로 사민해 군호로 삼았기에 사민 과정에서 진통이 상당했으며, 죄인들을 군호로 만들어 종사하게 하는 충군 제도는 민심을 불편하게 했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대대손손 변방을 방비하는 군호로 전락하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군호들은 거주 이전의 자유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잃고, 군인으로만 복무해야 해서 불만이 상당했다.

명나라군의 편제상 병력은 총 120만 명으로 그 숫자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각 위소의 군호들은 둔전을 경작해 자급자족을 꾀했다. 그렇지만, 명말 청초의 사상가였던 황종희가 지적했듯이 둔전을 운영해도, 거대한 병력이 자급자족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많은 수의 인력이 군호로 빠지다보니 화북의 농촌 인구가 상대적으로 부족해져서 이전의 송나라처럼 막대한 양의 군량과 물자를 위소들로 운송해야 했다. 이 '운송의 역'은 명나라 시대의 인민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명대 중기가 되면, 군호 제도는 붕괴하고, 모병제인 소모제로 전환하게 된다.

4. 내정

홍무제는 통일 이후에도 정력적으로 각종 국가 사업을 추진했으며, 이는 사회 · 경제의 재건에 방점을 두고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원나라 말기가 되면, 화북 지역은 북송 시기와 비교해 인구가 1/4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쇠퇴했다. 이는 원대 중기부터 빈발하기 시작한 황하의 범람과 태풍 · 역병 · 지진 · 황충 같은 자연 재해, 사회적 혼란 때문이었으며, 원 조정은 이에 잘 대응하지 못했다. 《원사》(元史)에 따르면, 조정이 치수에 힘쓰지 않아 황하가 자주 범람했으며, 황하 인근은 늪지대가 되고, 범람한 강물이 마을을 휩쓸어버리는 사태가 수십 차례 발생할 정도였다. 《원사》 <왕흥지>에는 황하의 범람으로 인해 조주(曹州), 변량(結梁) 등에서 45만 가구가 이주해야 했다고 적혀 있다.

《명사》<태조본기>에 따르면, 홍무 13년(1381년)에 전국 총인구는 5,987만 3,305명이었고, 그중 산서성의 인구가 410만 3,450명이었다. 여러 산맥으로 둘러쌓인 산서의 인구가 국가 전체 인구의 8%나 되었던 것은 유력 군벌이었던 코케테무르의 근거지라 그나마 안전한 곳이었고, 중원과 하북의 다른 지역은 사회적 혼란과 지진, 역병 등으로 인해 인구가 급감했기 때문이었다. 즉, 원말 명초는 군벌들이 세력을 다투는 격동기를 넘어서서, 온갖 자연재해와 역병까지 일어나던 아수라장이었던 것이다.[6]

북원만리장성 이북으로 몰아내는 북벌을 완수한 직후, 홍무제는 화북의 여러 지역들을 재건하기 위해 강력한 사민정책을 시행했다. 그래서 송나라와 여러 정복왕조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거대한 인구가 화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인구 이동은 심각한 민심 이반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에 홍무제는 이주민들을 위해 다양한 혜택을 제공했다.

여기에는 휴경지 개간시의 세금 면제, 정착 비용 제공, 소와 농기구, 곡식 종자의 무상 제공, 대규모 공공사업 시행 등의 세부적인 정책이 포함되어 있었다.[7] 그 결과, 홍무 25년(1393년)에는 경작지가 8,804,623묘였으며, 홍무 27년(1395년)까지 전국에 총 40,987개의 연못과 보를 건설하고 약 4,162개의 하천를 준설했다. 이 수치는 명나라를 통틀어 최고점으로, 홍무 치세 이래로 다시는 달성된 바가 없다.[8]

일례로 산동성 금향현에는 1,247개의 마을이 있는데, 원나라 이전에는 69개 마을에 불과했으나, 명나라 때 830개 마을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였으며, 청나라 때 323개 마을, 민국 이후에 8개 마을이 형성되었다. 홍무제의 사민 정책과 사후 대책이 잘 이뤄졌다는 방증이다. [9]

군사제도인 위소제 또한 사민정책과 연관되어 있었다. 《캠브리지 중국경제사》에서도 분량을 할애해 짚고 넘어가는 부분인데, 병사들에게 땅을 주고 현지에 정착하는 위소제를 활용해 화북 지역에 인구를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1391년까지 군호와 민호의 호적에 기록된 이주민의 수는 1,100만 명에 이르렀으며, 이는 당시 명나라 전체 인구의 약 15%에 해당했다. 이 1,100만 명의 이주민 중 군호는 400만 명으로 전체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이들은 요동 · 하북 · 섬서 · 감숙 · 운남 · 귀주 등의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지금도 저 지역에는 명나라 군인들의 후손이 살아가고 있다.[10]

《하버드 중국사》에서는 홍무제가 제위에 오른 뒤부터 재해가 급감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분명 운도 따라주었겠지만 단순히 자연의 변화무쌍함 덕분이라기보다 홍무제가 시행한 인프라 재건의 효과를 톡톡히 봤을 것이다. 각지의 하천과 보, 그리고 댐을 준설하거나 보수한다는 건 치수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앞서 열거한 홍무제의 내정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각 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원말의 파국으로 무너진 중화의 기반을 부활시키기 위해서는 사민정책이 필요했다. 특히 북원이라는 외적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화북의 인구가 회복되지 않으면 만리장성 일대를 유지하는 것부터가 힘에 부칠 수밖에 없으므로. 이러한 사민정책을 펼침에 있어, 백성들을 움직일 요인으로서 각종 인센티브 및 인프라 재건 사업과 위소제가 필요했다. 그 위소제를 시행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지방 행정력을 살리기 위한 이갑제가 필요하고, 그 이갑제와 위소제를 전국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행정의 주체로서 조정 뿐만 아니라 각지의 번국들이 필요하며, 각지의 번국들이 북원에 맞서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인구와 국력을 갖춰야 하니 다시 사민정책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중국 왕조가 굳건한 반석 위에 섰다면 이러한 정책들은 번잡하기만 할 뿐 효용성이 뒤떨어진다. 사실상 봉건제로의 회귀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대 중기부터 이어진 자연재해로 화북의 인구가 감소하고, 원말의 혼란으로 인해 각지의 행정력이 완전히 붕괴한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지극히 적었다. 전한이 최종적으로는 군현제를 목표로 했지만 군국제라는 임시방편을 마련하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즉, 홍무제의 정책은 원말 명초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 전체를 재건해 왕조의 근간을 마려한 것이었다. 홍무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1393년,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이란 이름으로 전국적인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시행해 더욱 박차를 가했다. 다른 왕조들은 2대, 3대에 걸쳐 해냈던 일을 홍무제는 혼자서 다 끝마쳤던 것이다. 건국 초의 명나라라고 하면 '철혈 군주와 강성한 대제국'이란 막연한 이미지만을 연상하기 쉽지만 사실 홍무제의 명나라는 몽골이 남기고 간 잿더미에서 가까스로 부활한 중화 문명이었던 셈이다.

이에 훗날 청나라 최고의 명군이었던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홍무제의 업적을 칭송했다.
"명태조는 하늘의 지혜와 용기를 받아 일어나서 천성의 베옷을 입고, 무예와 문학을 가르치며, 천하를 통일했다. 그의 제도는 현재를 살피며 과거를 모범 삼아 더욱 철저하게 짜여졌으며, 후대들은 그의 행보를 따라갈 수 없었다. 한나라나 당나라, 그리고 송나라조차 그에 미치지 못했다." 明太祖授天智勇,崛起布衣,纬武经文,统一方夏,凡其制度,准今酌古,咸极周详,非独后代莫能越其范围,即汉唐宋诸君诚有所未及也。
《皇朝文献通考》

4.1. 환관 중용

태조 홍무제가 원나라 시대 환관들의 전횡을 반면교사해 환관들을 통제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홍무제는 환관들의 권한과 숫자를 대폭 축소하고 품계도 낮추었으며, 가혹한 규율을 적용했다. 또한 교육 수준까지 제한해 환관이 글자를 알지 못하도록 했다. 홍무제의 환관 통제는 정말 강력하여 《명태조보훈》에는 정사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천자를 오래 모신 환관이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으며, 글을 아는 환관들을 내치거나 죽였다는 출처 불명의 일화까지 있을 정도다.

그러나, 홍무제의 환관 통제는 치세의 전기에 해당하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홍무제 본인이 자신의 조치를 뒤엎고, 환관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환관들에 대한 통제를 대폭 강화한 전기에도 환관들을 외교관에 임명해 해외 각국에 파견한 일이 자주 있었다. 애초에 의심이 많아 심복들조차 믿지 못해 금의위 같은 첩보기관까지 운영한 홍무제에게 있어, 황제의 충복이 자연스럽게 될 수 밖에 없는 환관은 좋은 수족이었고, 이렇게나 좋은 수족을 쓰지 않는 것은 낭비였다.

홍무제가 환관들을 다시 중용하는 시기는 그가 정력적으로 대숙청을 벌이던 시기였다. 즉, 홍무제의 환관 기용은 무수히 많은 관료와 군지휘관들을 숙청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만한 가장 적절한 세력이 환관이었다는 이유로 이뤄진 일이었다. 홍무 연간의 후기가 되면, 외교 뿐만 아니라 감찰, 감군, 교역, 징세, 정보 수집 등 다양한 업무에 환관들이 종사하기 시작하며, 환관의 숫자와 조직의 규모도 대폭 확장된다. 정사에 대해 발언했다는 이유로 충직한 환관을 내쳤던 홍무제가 후기에 와서는 환관의 숫자를 줄일 것을 진언한 관료에게 화를 내며 처벌하고 있었다.

《명사》의 편찬자들은 명나라에서 환관이 처음 기용된 것도, 전횡을 일으킨 것도 영락제가 시작이었다고 서술했지만, 홍무제의 실록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음이 드러난다. 명대 환관의 발호는 홍무제가 원인을 제공했지만, 청나라는 모종의 이유로 영락제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 것이었다.

5. 숙청

홍무제 주원장의 행적하면 숙청을 단연 빼놓을 수 없다. 홍무제의 숙청은 그 규모와 잔혹성에 있어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는데 그나마 홍무제의 숙청에 그나마 비견될 수 있는 사례로는 10족을 멸한 것으로 유명한 자신의 아들 영락제대숙청이었다.(임오순난) 홍무제는 자신을 도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개국공신들과 그 일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숙청의 대상이 된 사람들과 학연 등 인맥이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기 때문에 홍무제의 숙청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90,000명 또는 100,000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숙청이 비록 구세력을 구축하며 들어선 신생 국가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변론하는 이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홍무제의 숙청은 필요 이상으로 대규모였던 데다가 너무나 잔혹했다. 참고로 송나라의 경우만 봐도 비교적 온건한 숙청이 이루어졌다.[11]

홍무제의 숙청은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지만 그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다. 홍무제는 어지러워진 치안과 사법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굉장히 잔인한 고대의 형벌로 범죄를 다스렸다. 특히 반역죄로 처형했을 때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 사람의 살을 포 뜨듯 떠내서 죽이는 능지형은 물론이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관리에게는 특별히 박피형을 내렸다.

여기서 박피형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가죽을 벗기는 형벌이었다.[12] 홍무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벗긴 가죽을 허수아비 위에 둘러씌워 관청 문 앞에 세워놓게 했다.[13] 심지어 그는 직접 형벌을 고안해내기도 했는데, 돼지 털을 벗기는 것에서 착안하여 소세()[14]라는 형벌을 만들었다, 빗으로 씻긴다는 뜻인데, 그 방법이 소름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벌거벗은 죄수의 몸에 펄펄 끓는 물을 여러 번 뿌린 뒤, 철로 만든 빗으로 쓸어서 피부를 벗겨내는 형벌이었다. 이는 피부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뼈가 드러날 때까지 했다고 한다.

이 밖에도 무릎 연골을 빼내는 알슬개(揠膝蓋), 내장을 꺼내서 죽이는 추장(抽腸)을 비롯하여, 전갈을 풀어서 물려 죽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바로 장형(杖刑)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그러나 홍무제는 이러한 끔찍한 형벌들을 즐겼는지, 아니면 죄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이러한 형벌들을 집행할때 직접 나와서 자신이 이러한 형벌들을 주도했다.

특히 형벌을 가할 때도 천천히 매우 고통스럽게 죽이도록 했다. 능지처참을 할 때도 칼로 살살 피부를 그어가다가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최대한의 고통을 느끼고 죽게 했으며, 박피형을 행할 때도 살을 천천히 벗겨서 죽기 직전까지만 살을 벗긴 다음에 잔혹하게 죽였다. 그리고 만약 중간에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형을 집행했던 망나니가 박피로 처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망나니 또한 죽지 않기 위해서 더욱 더 고통스럽게 죽였다고 한다. 문제는 범죄를 다스리기 위한 엄벌주의와 별개로 순수하게 정치적인 숙청에까지 이런 혹형들을 폭넓게 활용해서 셀 수 없이 많은 공신들과 신하들이 끔찍한 고통 속에 죽어가게끔 했다는 것이다.

인자한 마황후가 살아있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이성적인 브레이크를 걸어가면서 숙청을 진행했던 거 같지만, 마황후가 세상을 뜨자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공신들을 무자비하게 공포와 폭압,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이러한 온갖 잔혹한 형벌들은 조정을 공포 분위기에 휩싸이도록 했고 신하들은 모두 홍무제를 무서워했다. 아침에 신하들이 등청하여 홍무제을 배알할 때, 만약 옥대(玉帶)가 배꼽 위에 있으면 오늘은 사람을 죽이지 않거나 적게 죽이겠다는 뜻이어서 신하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만약 그가 옥대를 배꼽 아래로 누르고 있으면 그날은 사람을 대량으로 참혹하게 죽이겠다는 신호였으므로, 문무백관들이 모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공포에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현대인들의 생각으로는 그렇게 두려우면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樂鄕)하거나 은거(隱居)하면 되지 않나 하겠지만, 홍무제는 그것조차도 용납하지 않았다. 홍무제가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들 중
"모든 백성들과 신하들은 오직 황제를 위하여 행동하여야 한다."
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이 명령을 어긴 신하, 한마디로 일을 고의로 대충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관리가 나오게 되면, 그 사람뿐 아니라 그 집안까지도 말 그대로 쑥대밭을 만들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관직을 함부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특히, 호유용 옥사의 잔재를 핑계삼아 일어난 남옥의 옥사 때 남옥을 포함한 호서파가 15,000명이 넘게 죽어나가서, 황태손 주윤문(후대의 건문제)이 제발 사람 좀 죽이지 말아달라고 직접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홍무제는
"황위는 가시나무 몽둥이 같은 것이니, 자기 생전에 가시들을 다 제거해주려고 이런 짓을 한다."
라고 말했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버전으로 황태손에게 가시 막대기를 들어보라고 했는데 들지 못하자,
"내가 그 가시들을 전부 없애줄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도 한다.[15][16] 또 《명산장》이라는 사료에서는 장남 주표가 이에 대하여
"위에 요순같은 임금이 있으면, 아래에 요순의 백성이 있는 법입니다."
라고 반박하자 홍무제는 화가 나서 주표에게 의자를 던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아 주표를 쫓아가며 때리려고 할 때, 마침 주표가 그림 한 장을 떨구었는데 그 그림의 내용이 옛날에 마황후가 전장에서 홍무제를 업고 도망치는 장면이라 마황후 생각이 나서 멈췄다고 한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 좌승상 호유용을 비롯한 권신과 그 일가족 30,000여 명이 처형당한 사건인데, 이를 계기로 승상직을 폐지하고, 중서성을 황제의 직속으로 두는 황제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홍무제는 관료들을 황제의 통치를 위한 것, 철저히 황권에 필요한 소모품 정도로 봤다. 말 안 듣는 물건은 부셔버리고 새 거 사서 쓰면 되니, 아끼고 소중히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대부나 권신들이 크게 반발했지만, 반발했던 권신들은 죄다 찍어 눌렀고,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는 권신들도 죄다 죽어나갔기 때문에, 나머지는 그냥 황제의 지시대로 열심히 일을 했다.

이와 같은 홍무제의 과격한 숙청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 동안 명나라는 끊임없이 성장했다. 1393년 남옥의 옥으로 공신들을 숙청하는 와중에도 홍무제는 인구조사와 토지조사를 기어이 끝마쳤으며, 대규모의 사민정책을 시행하여 화북과 중원 지방을 부흥해내는데 성공했다. 실제로 홍무 연간 명나라의 경작지는 8,804,623면에 달하는데, 이후 정난의 변이 터지면서 다시는 저 수치를 회복하지 못한다.

또한 홍무제는 원말에 잦았던 재해의 극복을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했다. 그의 명령으로 총 40,987개의 연못과 보가 건설되고, 약 4,162개의 하천이 준설되었는데, 덕분에 홍무제의 치세 동안 원말과 같은 황하장강의 범람 및 극심한 가뭄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대규모 숙청을 하면서도 전혀 행정의 공백이 생기지 않은 것이다.

이렇듯 홍무제는 어떤 통일 군주보다 적극적인 내정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를 위해 중요 관료가 아닌 실무자는 가급적 건드리지 않았다. 숙청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황권의 확보였기에, 황권을 침범할 가능성이 없거나 그럴 야망이나 능력 자체가 없는 자들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아 최소한의 신뢰성은 확보할 수 있었다.[17]

그의 숙청으로 수많은 개국공신들이 죽었는데, 숙청 이전에 전사하거나 병사한 사람들을 제외하면 탕화[18], 목영, 경병문, 곽영, 장룡, 고성만이 숙청을 피했다.[19]

이들 중에 경병문, 곽영, 고성은 정난의 변에도 관련된 인물[20]들이었다. 또한 신하 숙청 뿐만 아니라 맹자의 학설을 비판하며 일부 경전을 탄압한 점은 비판의 대상이다.

지나친 숙청으로 명대부터 강대한 황제의 권한을 견제할 수 있는 신권(臣權)의 위력이 송대에 비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이는 암군과 환관들의 발호 등을 불러왔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환관이 날뛰는 것은 아들 영락제의 중용 때문이었고, 홍무제는 환관들을 확실히 찍어누르며 관직 임용에 제한을 가했다.[21] 또한 후대에는 자신과 같은 가혹한 형벌을 관리들에게 가하지 않게끔 조치하기도 했다. 명나라 초기의 고문과 형벌은 전대의 왕조들보다 잔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홍무제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왕조 초기에는 법이 엄해야 한다는 원칙과 더불어 기존 공신 집단 숙청 등에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그럴 필요성이 없어졌기에 국가 반역자나 연쇄 살인범과 같은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혹형을 집행하지 않았으며, 초기를 제외하면 명대의 형벌이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근거는 없다.

명나라에서 공식적으로 규정된 형벌태장도유사의 5형이었지만, 홍무제는 자주 임의적인 형벌을 가하곤 했는데 대표적으로 능지처사(陵遲處死)가 있었다. 이러한 정식 형벌(5형)과 임의 처벌(능지처사)이 공존하는 형태는 명대의 특징적인 모습으로, 한•당•송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5형과 요•금•원으로 이어지는 이민족 왕조의 유산이 결합된 결과였다.

5.1. 숙청의 이유

위의 내용만 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인 미치광이 살인마로 보이나, 당시 시대적인 상황상 숙청은 다음의 이유로 인해 필요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 명나라는 흑사병과 자연재해, 조정의 잘못된 통치가 겹쳐 일어난 원 · 명 교체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밑바닥까지 떨어진 황실과 조정의 권위를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군벌로 시작해 지방 세력의 협조를 어느 정도 구하며 중국을 통일한 홍무제는 조정의 권위를 세우고 강력한 황권과 중앙집권제를 세우기 위한 방안으로 숙청을 선택했다. 그는 호 · 람의 옥과 같은 숙청을 통해 공신, 숙장들의 전횡과 신권(臣權)의 지나친 강화를 막았으며 부정부패 근절도 근절하려 했다.(ex. 부마 구양륜 사사 등)
  • 홍무제의 출신 배경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그는 기아에 시달리던 최하층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원나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적떼에 가담하여 출세한 사람이었다. 이런 한미한 출신 배경으로 인해 설사 그가 탁월한 능력으로 난세를 평정하고, 통일 왕조를 개창하여 강력한 정치 권력을 틀어쥐었다 하더라도 기존의 지배계층이 진정으로 새 황실를 존중하며, 충성한다고 보기 어려울 수 있다. 따라서 홍무제는 이들을 숙청하여 견제하고, 취약할 수 있는 신생 왕조의 권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5.2. 과장된 악명

분명 홍무제의 숙청은 잔인하고, 가혹했으나, 과장된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가령 홍무제는 과거 불우했던 시절에 대한 개인적인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이것이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는 설이 있다. 탁발승 시절과 도적 시절은 홍무제의 대표적인 역린이어서, 홍무제는 그 시절을 수치로 여겨 그 앞에서 일체 옛날 일을 꺼내지 못하게 했고, 승려 생활 때 머리를 깎은 것 때문에 '빛날 광(光)'[22], '대머리 독(禿)' 자를 쓰거나 '승려 승(僧)' 자와 그것과 발음이 같은 '생(生)' 자를 쓰는 행위, 도적이란 의미의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칙(則)' 자를 쓰는 행위를 무조건 처벌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반박된 사례이다. 홍무제의 공신에 대한 대규모 숙청은 분명 존재했고, 그가 신하들에게 잔혹하기는 했지만, 문자의 옥을 저질렀다는 것은 후대에 창작된 설화라는 것이다.

예컨대 명말 청초에 저술된 《한중고금록》(閒中今古錄)에 따르면, 장청고(蒋清高)는 홍무 17년 황제의 심기를 거슬러(즉, 문자의 옥에 연루되어) 죽었다고 적혀 있는데, 정작 장씨네 족보인《蒋氏谱》에서는 장청고가 홍무 9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초기의 고승이었던 내복(来复)은 홍무제에게 시를 바쳤다가, 문자의 옥에 연루되어 글자로 트집을 잡혀서 죽고, 시는 불태워졌다고 하는데 정작 그 시는 궁정에서 사용된 시문과 음악을 모은 《황명아송》(皇明雅颂)에 고스란히 실려 전해지고 있고, 명대 고승들의 생애와 계보를 작성한 《보속고승전》(补续高僧传)과 《계등록》(继灯录)에서는 내복이 호유용 사건에 연루되어서 죽었다고 교차검증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말 홍무제가 시행한 문자의 옥이란 것이 실존했다면, 내복의 시는 황실 문집에 실릴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설도 있다. 항주의 유생 서일기(徐一夔)가 올린 하표에
'광천지하(天之下), 천성인(天聖人) 위세작(爲世作)'
이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홍무제는 승려 시절을 수치스러워해 빛날 광, 대머리 독, 승려 승, 승려 승과 발음이 비슷한 생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이 때문에 서일기를 참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후대에 창작된 악명에 불과하다. 일단 저 일화의 출처부터가 불분명하거나 당대를 기록한 제1차 사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학자 진학림(陈学霖)의 연구에 따르면 서일기(徐一夔)는 홍무제 생전에 죽기는커녕 오히려 천수를 누리다가 건문제 시기인 1400년에 항주에서 죽었기 때문이다. 정말 서일기가 홍무 연간에 죽었다면 《명실록》이나 《명사》에 적혀 있어야 하는데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서일기가 직접 쓴 <故文林郎湖广房县知县齐公墓志铭>라는 비문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저 비문은 1399년에 작성된 것인데, 홍무제는 1398년에 이미 붕어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홍무제는 자신의 승려 시절을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이는 홍무제가 직접 쓴 자신의 아버지 주세진의 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명 황릉의 비문 효자 황제 원장이 삼가 기술하다.

홍무 11년 여름 4월, 강음후 우량에게 명하여 황당을 건축하게 했다.

내가 그때 거울을 들여다보며 형체를 살폈지만, 회색 머리와 백발만 보일 뿐, 문득 옛날의 고난이 생각났다. 더욱이 황릉 비문은 모두 유신들이 아름답게 꾸민 글이라, 후세 자손에게 경계가 되지 못할까 두려워 특별히 고난과 창성한 운명을 기술하여, 세대가 그것을 보게 했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옛날 내 부왕께서 이곳에 거주하셨는데, 농사는 고되고, 아침저녁으로 방황하셨다. 이윽고 천재지변이 유행하여 가족이 피해를 입었고, 황고는 64세에, 황비는 59세에 돌아가셨다. 맏형은 먼저 죽고, 온 집안이 애도를 지켰다. 토지주는 나를 돌보지 않고, 큰소리로 나를 꾸짖었으며, 땅도 주지 않아 이웃들은 서운해했다. 갑자기 형의 관대함으로 이 황토를 얻게 되었다. 장례에는 관도 없고, 몸에 걸친 옷도 형편없었다. 흙을 덮어 세 발만큼 높이 쌓고, 어떤 음식이나 술을 올릴 수 있었겠는가. 매장한 후, 집안은 불안정했다. 둘째 형은 어리고 약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고, 맏형수는 어린 아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늘은 비가 오지 않고, 메뚜기가 날아다녔다. 마을 사람들은 먹을 것이 부족해 풀과 나무를 먹었다. 나에게 무엇이 있으랴, 마음은 미치도록 놀랐다. 그래서 형과 상의하여, 어떻게 상황을 유지할까.

형은 이곳을 떠나 각자 기근을 견뎌내자고 했다. 형은 나를 위해 울고, 나는 형을 위해 슬퍼했다. 황천의 백일하에, 눈물이 심장을 끊었다. 형제가 함께 길을 가며, 슬픔이 먼 하늘에 닿았다. 왕씨 노모는 나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아들을 보내 향기로운 술을 준비하게 했다. 승려의 문을 드나들며 불법을 행했다.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절주가 곡식을 봉인했다. 모두가 각자 계획을 세우고, 구름과 바람에 흩어졌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아무 재주도 없었다. 친척에 의존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하늘만 바라보며 막막했다. 의지할 곳이 없으니, 동무의 그림자를 따라, 새벽엔 연기를 향해 급히 나아가고, 저녁에는 옛 절에 다가가 비틀거렸다. 하늘의 절벽을 바라보며 푸른색에 기대고, 원숭이 울음소리와 달빛에 슬퍼했다. 혼자서 부모님을 찾아 헤매며, 의지가 사라지고 의협을 베풀었다. 서풍에 학이 울고, 이내 추위가 내리며 날아갔다. 몸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멈추지 않고, 마음은 끓는 국물처럼 요동쳤다.
大明皇陵之碑孝子皇帝元璋谨述

洪武十一年夏四月,命江阴侯吴良督工兴建皇堂.

予时秉鉴窥形,但见苍颜皓首,忽思往日之艰辛.况皇陵碑记,皆儒臣粉饬之文,恐不足为后世子孙戒. 特述艰难,明昌运,俾世代见之,

其辞曰:

昔我父皇,寓居是方,农业艰辛,朝夕傍徨.俄而天灾流行,眷属罹殃,皇考终于六十有四,皇妣五十有九而亡,孟兄先死,合家守丧.田主德不我顾,呼叱昂昂, 既不与地,邻里惆怅.忽伊兄之慷慨,惠此黄壤.殡无棺廓,被体恶裳.浮掩三尺,奠何肴浆.既葬之后,家道惶惶.仲兄少弱,生计不张.孟嫂携幼,东归故乡. 值天无雨,遗蝗腾翔.里人缺食,草木为粮.予亦何有,心惊若狂.乃与兄计,如何是常.

兄云去此,各度凶荒.兄为我哭,我为兄伤.皇天白日,泣断心肠.兄弟并路,哀动遥苍.汪氏老母,为我筹量,遣子相送,备醴馨香.空门礼佛,出入僧房.居未两月,寺主封仓,众各为计,云水飘飚,我何作为,百无所长,依亲自辱,仰天茫茫,既非可依,侣影相将,突朝烟而急进,暮投古寺而趋跄.仰穹崖崔嵬而倚碧,听猿啼夜月而凄凉.魂悠悠而觅父母无有,志落魄而侠佯.西风鹤唳,俄淅沥以飞霜,身如蓬逐风而不止,心滚滚乎沸汤,<

위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홍무제는 자신의 승려 생활을 수치스러워하긴커녕 직접 비문에 새겨 똑똑히 명시하고 있다. 정말 승려 생활을 수치스러워했다면 비문, 그것도 아버지의 묘비에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저 비문을 남긴 이유는 홍무제가 일부러 후손들에게 태조의 고난을 잊지 말고 삼가 행동하라는 의미였다. 정말 홍무제가 문자의 옥을 일으켰다면 어떤 형식으로든 《명실록》에 흔적이 남아 있어야 한다. 청나라의 사례처럼. 하지만 《명실록》과 《명사》 어디에도 홍무제가 특정 글자를 쓰지 말라고 칙령을 내린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공신에 대한 대규모 기획 숙청은 했을지언정, 글자로 꼬투리를 잡으며 무차별 폭격은 가하지 않은 셈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초기의 숙청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숙청은 잦아지고, 그 정도 역시 가혹해져 갔으며, 무고한 사람들까지 숙청을 당했다. 이는 분명한 비판점이다. 공신에 대한 가혹한 처벌이 훗날 과장된 악명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렇게 신하를 잔혹하게 다루는 풍조는 제3대 성조 영락제도 마찬가지, 아니 더 심했다. 그나마 이후에는 정치적 필요성이 있다고 쳐도 연좌는 자제하고, 적당한 범위 내에서 숙청을 하는 식으로 좀 완화되긴 했으나 그래도 제16대 의종 숭정제가 명장 원숭환의 무고 건을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채 능지처사하는 등 다른 건 몰라도 정치적 숙청과 관련해서는 대종 경태제나 광종 태창제처럼 뭔가를 할 시간이 전혀 없었거나, 희종 천계제처럼 정말 어딘가 심각하게 부족해서 황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사람이 아니면 명나라 역대 황제들이 명군과 암군, 성군과 폭군할 것 없이 자유로운 사람들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6. 후계자 문제

홍무제는 장남인 주표황태자로 책봉해 후계자로 공인했으나, 4남인 연왕 주체에 대한 호감을 은근히 비추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홍무제는 공신들을 탐탁찮게 본 반면, 그에 대한 반발 심리였는지 태자 주표는 공신들을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상당히 유약한 성격이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그래도 후계자를 갈아버리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태자가 일찍 사망한 뒤에도 연왕 주체가 아닌 적장손인 주윤문을 황태손으로 봉해 계승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명나라를 건국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에서 황실의 정통성 문제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적장자 계승 원칙을 지키려 한 홍무제의 의도 자체는 옳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의문태자 주표는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는데, 아버지의 막나가는 숙청으로 인해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이에 따라 4남 주체가 태자로 책봉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장자 계승 원칙을 지켜 적장손인 주윤문황태손으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연왕으로 책봉되어 베이징에 머무르고 있었던 주체가 상당히 격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3]

이러한 모습은 홍무제가 시골 출신이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같은 공동체 안에서는 훈훈한 인정미가 넘치는, 이른바 시골 인심을 보여주지만 외부인들에 대하여는 어떠한 짓을 해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시골 사회의 특성이 황족 우대/공신 박대라는 홍무제의 모습에 상당히 맞물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두 홍무제에 대한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았던 시기에 야사와 상상력, 3차에 걸쳐 정치적인 이유로 개수한 《홍무실록》을 토대로 만들어 낸 소설들이다. 홍무제는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에 오른 그 해에 주표를 황태자로 봉하고, 중서령에 임명해 권력을 나눠주며, 황태자를 육성하려 시도하다가 유기와 측근들의 반대로 실패했었다.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세조 쿠빌라이 칸의 황태자 육성책과 황권 강화를 포기하지 못한 홍무제는 점차적으로 황태자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태자를 보좌하는 동궁의 관료 조직도 개편했으며, 신료들이 황태자 앞에서 신(臣)을 칭하는 것도 허락하여 황태자의 권위를 대폭 상승시켰다. 이것이 별 게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황태자를 황제에 준하는 존재로 격상시킨 조치로서 다른 왕조였다면 신하가 황태자 앞에서 신(臣)을 칭했을 때, 두 군주를 섬겼다는 죄로 능지처사당했을 것이다.

또한 호유용의 옥이 있기 이전부터 황태자 주표에게 주요 공문서의 검토와 결재를 맡기고, 중서성과 주요 부서에도 황태자의 재가를 마친 것만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약 15년 동안 황태자 주표는 국가의 대•소사를 관장했으며, 이 시기의 명 조정은 황제와 황태자가 일종의 이중 권력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즉, 홍무제가 장자 계승의 원칙을 유지하고 공신들을 숙청한 것은 소규모 농촌 공동체의 닫힌 사회에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라 쿠빌라이 칸의 황태자 육성책을 계승하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야사에서 유약하다고 알려진 황태자 주표는 10년 이상 국정을 수행하여 경험이 풍부하고 권력이 막강한 실권자였으며, 그 권위는 황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대로 마음 고생을 심하게 해서가 아니라 과로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정도이다. 또한, 《홍무실록》에 홍무제가 연왕 주체를 황태자로 삼을 생각이 있었다고 기록된 것도 여러 차례 개수한 정황 때문에 신뢰하기가 힘들다.

6.1. 번왕 책봉

다만 홍무제는 장자 계승을 확립하려는 것 치고는 실책으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했다. 바로 황자들을 번왕으로 책봉하여 각 지역에 보낸 것이다. 번왕들은 백성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진 않고 국경 수비만 맡았지만, 그래도 소규모나마 군사력은 보유하고 있었다. 장수들을 보내면 자기들끼리 군사를 키워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여 장수들 대신 아들들에게 맡긴 것인데, 국경 수비 지휘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정도로 인망이 있고 유능한 황실 적자가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무슨 짓을 할까?

역사적으로 번왕 제도는 사후에 제위 계승권을 놓고 다툼이 벌어지게 했다면서 일부 신하들이 이를 거두어주도록 요청했지만, 홍무제는 주청한 신하들을 족치고 그대로 강행했다. 결국 4남인 연왕 주체에 의해 이 문제가 현실화되면서,(정난의 변) 나중에는 가까운 황족들에게는 봉토를 적게 주거나, 아예 주지 않는 친왕 제도로 바뀐다.

물론 홍무제는 아들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을 임명하는 것은 그만큼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하들의 이야기 역시 사실이니까, 마음 깊이 잘 새겨두고 나중에 형의 핏줄이 계승한 중앙 정부와 협력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라."
라면서 은근한 협박 기술을 시전했다. 그리고 딴에 대비를 안 한 건 아니라서 나이도 많고 비교적 황위에 가장 가까운 차남 진왕(秦王) 주상, 3남 진왕(晉王) 주강, 4남 연왕(燕王) 주체까지의 봉지는 시안 - 타이위안 - 베이징 순으로 붙어 있게 하여 한쪽이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다른 둘이 견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의도와는 다르게 주상과 주강이 먼저 죽어버렸다.

이러니 당장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는 군사력을 가진 숙부들에게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중 건문제의 숙부 가운데 가장 항렬도 높고 실력도 있는 연왕 주체는 가장 큰 경계의 대상이었다. 결국 번왕 숙청 프로젝트(삭번정책)가 가동되자, 연왕 주체에게는 가만히 있다가 죽기 vs 어차피 죽을 거 반란 한번 일으켜보기 외의 선택지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락제의 입장에서 무고한 조카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말이 억울했을 것이다.[24][25]

또한 황자들(즉 차기 황제나 차차기 황제의 형제, 숙부나 백부들)에게 어느 정도의 세력을 허용해야 하는지는 원래 답이 없는 문제다. 제위 계승의 안정성과 정통성을 생각하면 황자들에게 세력(특히 군사력)을 가질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 좋지만 대신 이 경우 황족의 세력이 미약해져서 그만큼 황실이 취약해지는 것이다. 세력을 가진 황족들은 황실 내부적으로는 황제에 대한 위협이 되지만, 반대로 황실 외부에 대해서는 황제의 권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기 황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황자들이 세력을 가지는 것은 곧 자신의 황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의 요소가 되지만 왕조 전체, 또는 왕조 창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의외로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 황족들끼리 권력분쟁을 벌여 황제가 갈린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새 황제 역시 황족, 즉 왕조 창시자의 후손이기는 마찬가지니까.

물론 홍무제의 입장에서도 자기 자식이나 후손들이 서로 싸우고 죽여대는 것이 달가운 일일 리는 없고,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국력의 약화나 정통성의 실추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도 발생하겠지만, 어쨌건 왕조 자체의 존속이 목적이라면 황자들이 세력을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얻는 효과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정난의 변 이후 등극한 영락제 역시 홍무제의 아들이므로 왕조 자체는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아직 왕조의 권위가 불안정한 개국 직후, 게다가 빈민 출신으로 가문의 세력과 명망 역시 변변찮은 상황이었던 홍무제의 입장에서는 일단 자식들에게 군권을 맡김으로써, 주씨 왕조의 기반 자체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고 판단했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물론 여러 문제로 인하여 홍무제의 최초 복안이었던 장자상속 전통의 확립이 실패한 것은 분명 사실이지만 '왕조 자체의 유지'는 '장자 상속 전통의 확립'보다 더 상위의 목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홍무제가 장자 상속 전통의 확립을 위해 정말 황자들을 숙청하거나 정치적으로 무력화했다면 정작 건문제가 즉위한 이후, 숙부가 아닌 다른 권신들에 의해 황위를 위협받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왕조 창시자의 입장(즉, 자기 왕조가 혈통적인 정통성이 아니라 힘과 실력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자기 스스로 잘 알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홍무제의 입장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6.1.1. 과장된 번왕 문제

위 문단은 명나라의 군사 제도에 대한 이해없이 예전부터 전해지는 야사와 정난의 변의 전개를 보고 평가한 인상 비평에 가깝다. 원래 번왕들은 중앙을 대리하여 책임지는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관리할 권한을 받았다. 여전히 북쪽에는 북원의 잔당들이 남아 있고, 국토의 재건이 시급한 상황이었기에 머나먼 남경에서 행정과 군사 업무를 처리하기 보다는 여러 곳에 번왕들을 보내 신속하게 행정과 군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허나, 독립적인 권한과 영지를 지닌 번왕들은 황제가 기거하는 남경의 조정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전한 초기의 오초7국의 난, 서진 말기의 팔왕의 난 등 번왕들이 일으킨 내전들, 그리고 여러 왕조들의 황자들이 벌인 황위 쟁탈전은 홍무제를 근심케하는 역사의 교훈들이었다. 남경에서 만리장성까지 가히 1,000리가 훌쩍 넘는 물리적 거리는 누구라도 불안할 수밖에 없는 요인이었다. 결국 누군가에게 통치권을 주어야 한다면, 공신이나 숙장들이 아니라 혈족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섣부르게 실권을 줬다간 과거 왕조들의 오류를 재탕할 뿐이었다.

그래서 홍무제는 번왕들의 봉지를 잘게 쪼개고, 번왕들이 단독으로 운용할 수 있는 병권은 대폭 약화시켰다. 대제국의 번왕이며 황손임에도 직접 운용하는 병력은 고작 몇 천명의 호위사 뿐이었으며 이는 5,000명을 지휘하는 도지휘사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호위사 내부에도 황제의 직신들이 파견되어 있어 번왕들은 호위사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고, 왕부 안에는 감군이 군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으며, 그 존재조차 인식하기 어려운 금의위까지 포진해 있었다. 만약, 번왕이 비밀리에 군을 움직이다가 발각당하면, 즉시 감군에게 제압당할 수 있었고, 그 전에 금의위에게 움직임이 포착당해 남경의 조정에서 이미 진압군을 보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번왕들이 가진 군권은 황제의 명이 내려질 때만 국경 지역의 총사령관이 되어 군을 동원해 각 군의 지휘관들을 이끌고 원정이나 방위의 업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지, 당나라 시대의 절도사와 남송 초기의 원수들처럼 지역의 행정권 · 군사권 · 사법권 일체를 틀어쥔채, 마음대로 군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주왕과 초왕을 비롯해 국경이 아닌 '내지'에 파견된 번왕들은 아예 군권 자체가 없었다.

또한 홍무제는 과격한 숙청 속에서도 믿을 수 있는 장수들을 건문제에게 남겨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사가 바로 경병문과 곽영이다. 이들은 모두 개국공신들로 천하통일의 과정에서 공을 세우고 서달 · 남옥 등과 함께 북벌에 나선 잔뼈 굵은 장수들이었다. 경병문은 진왕좌상도독첨사 장흥후(長興候)로서 장사성 토벌에 참여했고, 북벌에 종군해 개봉부, 산서성, 운남성 공략을 성공시켰으며 북원을 침공해 몽골의 벨 호수까지 진군한 공신이자, 명장이었다. 곽영은 홍무제의 후비였던 영빈 곽씨의 오빠로, 홍무제와 탕화의 부장으로 종군해 공을 세웠다. 영빈 곽씨는 마황후 사후에 후궁을 관할했으며 5살 된 건문제의 할머니 노릇을 했다. 즉, 그 오라비인 곽영은 외척이자 군부의 중핵이었다.

게다가 화북에는 서달의 아들인 서휘조를 배치하여 '외지'의 번왕들을 견제했다. 서휘조는 아버지에게서 병법을 배워 북원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중군도독으로서 산서 · 하남 · 북평 · 산동의 병마를 조련했다. 서휘조는 2대에 걸쳐 황실과 연을 맺은 외척으로 가장 믿을 수 있는 군부 인사였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정난의 변 초기의 영락제는 북방의 병마를 모두 거머쥔 적도 없었고, 다른 번왕들도 대군을 틀어쥔 군벌들이 아니었다. 화북의 지방군은 내부적으로 여러 지방군 사령관들과 번왕들 간의 상호 견제가 이뤄지는 상황이었고, 감군과 금의위들이 철통같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군을 동원할 수 있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남경의 옥좌에 앉은 황제 뿐이었다.

번왕에게 실권을 주어 국토 재건과 국경 안정에 힘쓰되, 조정의 막강한 힘으로 번왕을 통제한다는 홍무제의 설계는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잘 작동한 것이다. 만약 정난의 변이 수도나 궁전에서 일어난 쿠데타였다면, 홍무제의 설계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이 되지만, 정난의 변은 북변의 일개 번왕이 남경의 조정에 대항하여 일어난 내전의 양상을 띠었으며, 그 내전의 무게추는 시작부터 완전히 조정에 쏠려 있었다.

정난의 변이 일어날 당시, 화북의 명나라군은 연왕의 급습으로 큰 혼란을 겪었음에도 대다수가 건문제와 남경 조정에 충성했고, 이들은 모두 북벌을 성공시킨 역전의 용사들과 경험이 풍부한 지휘관들이었다. 상식적으로 이 전력을 쥐고 있는데 패배할 수가 없었다. 정난의 변 당시, 10명이 넘는 번왕들이 모두 연왕 주체가 패배할 것이라 예상하고, 건문제에게 복종했다. 오직 영왕만이 울며 겨자먹기로 영락제를 따라 동참했을 뿐이었다.

연왕 주체가 반란을 시작했을 때, 휘하의 병력은 정예였지만, 그 수는 매우 하찮았다. 연왕이 가진 이점은 감군과 금의위의 눈을 속이고 거병하는데 성공하여, 감군과 금의위의 보고를 받지 못한 남경의 조정이 대응할 시간을 빼앗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연왕의 봉기는 황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숙청당하기 싫어서 일으킨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 패배가 거의 기정 사실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연왕은 가공할만한 군사적 역량과 세력 통제력을 통해 남경 조정에 맞섰다.

홍무제가 손자를 위해 만들어준 유산과 명나라의 중앙군은 방자하게 찬위를 하려는 연적(燕敵)을 토벌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연왕 휘하의 정난군을 대파하는 것으로 그 역량을 입증했다. 그러나, 홍무제의 구상을 무너뜨린 것은, "짐이 숙부를 죽였다는 책임을 지게 하지 마라."손자의 이 한 마디였다. 즉, 건문제의 패배는 할아버지를 탓할 게 아니라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에 가까웠다. 만약 건문제가 이경륭을 중용하지 않고, 사령관들에게 불필요하고 오락가락하는 지시를 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의 승자는 연왕이 아니라 건문제였을 것이다.


[1] 어떤 면에서는 노예보다도 더 비참한 상황이었다. 난세의 노예는 적어도 그 노예를 부릴만한 위세의 주인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신분적으로는 비참할지언정 배 굶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난세의 평민들은 당장 먹을 양식부터 걱정해야 했다.[2] 왕조의 통일 여부와 상관없이 서민 출신으로 황제가 된 이들을 선정하자면, 촉한유비, 후량주전충, 후조석륵 등 다수의 인물들이 존재한다.[3] 서수휘와 예문준은 진우량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고, 소명왕 한림아와 유복통도 장사성과 여진에게 급습을 당해 몰락했다. 곽자흥의 아들인 곽천서도 진야의 배신으로 죽었다.[4] 顾祖禹, 청대 강희제 시기의 학자[5] 《명실록》 1353년 6월의 기록에 따르면 총 24명의 용사로, 훗날 모두 공신이 되었다.[6] 다만, 알려진 것과는 달리 원나라 말기에는 황충의 발생이 잦아들고 홍수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원나라 말기에 황하의 범람을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러나, 기존의 자연재해와 조정의 미흡한 대처로 인해 민심 이반이 극심한 상황에서 혹독할 수준의 역병이 원나라를 덮친 데다가 지진까지 거의 매년 일어나고 있어서 원나라의 붕괴 원인으로 자연재해를 지적하는 것은 타당할 것이다.[7] 赵艳华,《明朝洪洞大槐树移民研究》,《金田》, 2014[8] 《Ming state finance before the age of silver Grass, Noa ; Graduation Date》. 2016-02[9] 郑发展,《明清山东移民研究》,《中州学刊》[10] 《THE CAMBRIDGE ECONOMIC HISTORY OF CHINA》, p.391-392[11] 다만 송나라의 숙청은 역대 중국사에서 가장 온건한 숙청이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명예퇴직하면 퇴직금은 섭섭찮게 챙겨주겠다고 쇼부쳐서 사직서 받아내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12] 다만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이 명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명나라와 같은 시기 오스만 제국에서도 반역자 같은 중죄인들한테는 살가죽을 벗기는 박피형을 내렸다.#[13] 다만 이렇게 했음에도 정작 부정부패를 막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옛날의 형벌 제도 대부분이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데 반해, 범죄율 감소에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관리는 봉급만으로 먹고 살기에는 벅찼기에(관료제로 인해 관료는 많은데 이들을 다 만족시킬만한 봉급을 줄 재정이 되질 않았다.) 관료들의 부패는 반쯤 생계형 비리이기도 했다.[14] 이 단어는 원래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는 것을 의미한다.[15]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두 가지가 모두 실려 있다. 그러고는 '(악업은 다 이 할아비가 짊어질 테니) 너는 이 다음에 착한 정치를 하거라.'라며 황태손을 격려한다.[16]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심온을 살려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는 세종에게 태종이 이 가시나무 얘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17] 숙청한답시고 인재풀을 싸그리 날려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한다. 인재가 없으면 나라를 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18] 탕화는 주원장의 성격을 어렸을 적부터 잘 알던 사이였고, 또한 일찍이 벼슬에서 물러나 귀향했기 때문에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주원장은 숙청 대상자들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기에 미리 알아서 물러나거나 해서 위협이 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았다.[19] 서달의 경우에는 숙청의 대상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갑론을박이 많다. 서달은 주원장과는 친하고, 근면성실한 태도와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겸손, 그리고 검소한 생활을 했기에 주원장의 눈에는 그저 친한 신하 내지 친우에 가까웠다. 그래서 서달은 다소 긴장하면서 주시했지, 숙청 대상까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20] 이들 중에 경병문은 정난의 변으로 처형되었고, 곽영은 영락제가 집권하자 조정에서 쫓겨났으며, 고성은 도중에 붙잡힌 이후, 영락제를 도왔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벌을 받지 않았다.[21] 물론 그렇다고 홍무제에게 아무 책임이 없는 건 아니다. 애시당초 홍무제 자신만이 가능한 체제를 세워놨으니 영락제라고 좋아서 환관을 중용한 거라기보다는 환관들이라도 없으면 혼자 힘으로는 답이 없어서 그랬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영락제는 원래 건문제를 쳐서 그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다보니 기존의 관료들을 쓰기도 어려웠다.(건문제에게 연왕을 치라고 한 게 바로 그 관료들이었을 테니)[22] 지금도 중국어에서 대머리를 뜻하는 단어가 바로 광터우(光头)다.[23] 물론 그렇다고 아버지한테 개겼다간 어떻게 될 지는 뻔할 뻔자니 그냥 격분만 했을 뿐 뭔가 하지는 못했지만.[24] 여기에 건문제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가 실행한 번왕 숙청의 최종 목표는 연왕 주체였다. 문제는 그럴 거면 처음부터 기습적으로 주체를 잡아죽인 다음에 다른 번왕을 쳤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하는 바람에 주체에게 명분과 기회를 주게 되었다.[25] 장자 상속 원칙을 무시하며, 억지로 막내아들을 세자로 세운 태조 이성계에 맞서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 이방원과 비슷하게 영락제도 나름대로의 명분은 있었다. 어쨌거나 죄도 없는 번왕을 먼저 공격해온 건 건문제였으니까. 오히려 명분이 아예 없던 쿠데타는 수양대군 이유가 벌인 계유정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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