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4-16 19:15:10

고조우


파일:고조우.jpg

1. 개요2. 생애와 업적3. 저서

1. 개요

顧祖禹, 1631~1692

청나라 초의 역사학자, 지리학자. 강소성 무석 사람으로 는 경범(景范)[1], 단오(端五), 는 완계(宛溪), 별호는 상숙인(常熟人)이다. 청나라 초기 고증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하나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의지가 매우 강한 학자였다고 알려져 있다.

2. 생애와 업적

고조우는 명나라 말기인 숭정 4년(1631년)에 태어났다. 고조우의 나이 14세에 명나라청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자 고조우의 부친인 고유겸(顧柔謙)은 상숙(常熟) 우산(虞山)에서 은거하며 애통해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당시 아버지 곁에서 살던 그는 이 때문인지 내심 반청복명의 마음을 품게되었다. 1674년 삼번의 난이 발생하자 고조우는 복건성으로 가서 경정충의 막료가 되어 반청복명의 이상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삼번의 난이 실패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면서 독서와 역사지리 관련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이후 1686년에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를 편찬하라는 강희제의 칙명이 청나라 관료 서건학(徐乾學)에게 내려지자, 고조우의 명성을 흠모했던 그가 고조우를 초빙하였고 덕분에 고조우는 《대청일통지》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서건학이 조정에 천거하고자 하였으나 고조우는 이를 거절하고 은거하며 저술활동에 매진하다 강희 31년(1692년) 세상을 떠났다.[2]

그의 걸작《독사방여기요》는 그의 나이 29세인 1659년부터 저술하기 시작하여 20년 만인 1678년에 완성하였다. 이 과정에서 21사(史)를 모두 독파하고 100여 종의 지방지(地方志)와 기타 지리지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여기에 자신의 경험을 첨가하여 중국 역사지리 연혁을 상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역도원(酈道元)의 《수경주(水經注)》와 고염무(顧炎武)의 《천하군국리병서(天下郡國利病書)》와 함께 중국 3대 지리서로 손꼽히며 일부 내용에 오류는 있으나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정신에 입각해 국가와 민생에 중요한 군사‚ 정치‚ 경제지리, 자연지리를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독창적인 역사지리관을 정립하였다.

특히 그는 연혁지리(沿革地理)와 군사지리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겼는데 역사적 기록과 지리적 정보를 종합한 연구 방식으로 후대 지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3. 저서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3]
  •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 여도요람(輿圖要覽)
  • 완계집(宛溪集)

[1] 자(字) '경범(景范)'은 근래 사람들이 '경범(景範)'으로 쓰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 같다고 한다. 요장(姚樁)의 《만학재문집(晚學齋文集)》 권6 〈고처사조우전략(顧處士祖禹傳略)〉에는 "고조우(顧祖禹), 자는 경범(景范)이다. (...) 조우가 태어날 때 그의 아버지 고유겸(顧柔謙)이 (아들이) 송나라 범조우(范祖禹) 같은 사람이 되기를 꿈꾸었기 때문에 이를 따라 이름과 자를 지었다."라고 한다.[2] 화희민(華希閔)의 건륭(乾隆) 《무석현지(無錫縣志)》 고씨본전(顧氏本傳) 따른 고증.[3] 편찬 작업에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