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0:51:34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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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한스게오르크 가다머
Hans-Georg Gadamer
파일:Hans-Georg Gadamer.jpg
출생 1900년 2월 11일
독일국 마르부르크
사망 2002년 3월 14일 (향년 102세)
독일연방공화국 하이델베르크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모교 브레슬라우 대학교
마르부르크 대학교
경력 마르부르크 대학교 교수 (1929–38)
라이프치히 대학교 교수 (1938–47)
라이프치히 대학교 총장 (1946–47)
프랑크푸르트 대학교 교수 (1948–49)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 (1949–68[1])
직업 철학자, 교수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대학 생활2.3. 《진리와 방법》과 두번의 논쟁2.4. 말년
3. 사상
3.1. 해석학적 순환
4.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철학자. 철학적 해석학의 대가로서, 지금의 해석학 체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가다머는 과학주의, 객관주의의 '방법'으로 접근할 수 없는 경험의 세계를 찾아서, 거기서도 진리와 인식이 획득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리고 이 진리의 획득은 '경험'을 '이해'하는 해석학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밝힌다. 하지만 과학의 객관주의적 방법론의 보편적 요구는 이러한 진리,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차단시켜왔다. 따라서 가다머는 과학적 '방법'으로 밝혀낼 수 없는 '진리'가, 생활세계의 '경험'에서 '이해'의 역사성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이런 이해들이 수많이 쌓여온 결과가 지금의 '선입견'과 '권위'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선입견을 통해서만 우리의 철학적, 예술적, 역사적 '이해'를 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예술적, 문학적, 역사적 판단도 개인의 한계있는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해야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학[2]에서는 사실상 고정되고 완벽한 진리란 없으며, 우리의 판단은 선입견과 권위에 의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것 또한 '새로운 경험'에 의해 끊임없이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고, 항상 새로운 경험에 대해 온전한 개방성을 추구해야 된다는 것.[3][4]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1960)》이 출간되면서, 해석학은 1960년대 이후 독일 사상계의 중심적인 논제로 등극했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철학, 문학, 문예비평, 예술, 역사학, 신학, 법학, 사회학, 정치학, 교육학 등에서 수많은 토론들을 만들어냈고, 위르겐 하버마스, 아펠, 베티, 폴 리쾨르, 자크 데리다 등과의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가다머는 1900년 2월 11일, 독일 마르부르크에서 마르부르크 대학총장이자 제약분야 화학교수였던 요한네스 가다머의 아들로 태어나, 개신교 신자로 길러졌다. 자연과학을 선택하라는 아버지의 강요를 거부하고 가다머는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사실 그가 4살 때 어머니[5]를 잃었는데, 성장하면서 느껴지는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상심은 아버지의 자연과학적 연구를 따라 추구하지 않기로 결심하게된 계기였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강압적 교육의 도피처로서, 시적(poetic)이고 거의 종교적인 모습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의지했다고 한다. 게다가 가다머는 22살 때 걸린 소아마비로 인해 많은 고생을 겪었다. 다행히도 이 때문에 1, 2차 세계대전에서의 군복무는 면제되었다.

그는 브레슬라우 대학에 들어가 고전과 철학을 공부했지만, 곧 그만두고 신칸트주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르부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1922년에는 박사학위 논문 《플라톤 '대화편' 속 즐거움의 본질》을 썼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다머는 여름학기 동안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아직 교수직을 받지 못한 촉망받는 젊은 학자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하이데거와 가까워졌고 하이데거가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게 되자, 가다머는 그곳에서 레오 스트라우스, 한나 아렌트 등과 같이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었다. 가다머의 사상에 독특한 특성을 부여하고 그의 초기 신칸트주의적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하이데거의 영향이 컸다. 가다머는 그렇게 에드문트 후설[6]과 하이데거 밑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2.2. 대학 생활

가다머는 1929년 하이데거의 지도 아래서 대학교수 자격[7]을 얻어 1930년대 초반 대부분을 마르부르크에서 시간 강사로서 강의를 하며 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나치가 집권을 하였고, 1933년 5월 나치당에 가입하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당이 해산될 때까지 당원으로 있었던 하이데거와 달리, 가다머는 나치즘에 충성하라는 압박에 대해 침묵했고 제3제국 기간 동안 아무런 정치 활동을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가다머는 22살에 걸린 소아마비 때문에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을 핑계가 있었다. 1933년 무렵에는 계속되는 압박과 감시에 대부분의 독일 대학 교수들이 국가사회주의 교사연맹에 가입하여 히틀러와 독일제국에 대한 충성서약에 서명해야만 했고, 가다머도 여기에 결국 서명한다. 하지만 전후 보고서에서 행적이 깨끗했음이 밝혀졌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이후 라이프치히 대학의 총장에 추천받게 된다.

1933년 나치스 치하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임명된 하이데거가 취임연설에서 "근로봉사, 국방봉사, 학문봉사"를 대학의 이념으로 내세웠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45년 40대의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 총장에 취임한 가다머는 "사물에 대한 객관성, 자기자신에 대한 정직성, 타자에 대한 관용성"의 덕을 대학 이념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가다머의 시대는 1949년 스위스로 떠난 칼 야스퍼스의 후임으로 그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그는 이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옛 동창 칼 뢰비트를 불러들인 데 이어 점차 그 주변에 환 데어 모일렌, 하버마스, 헨리히, 슈패만, 토이니센, 투겐트하트 등 전후 독일학계를 주름잡은 쟁쟁한 석학들을 부르고 또 모이게 했다. 그래서 가다머의 제자이자 논쟁의 적수이기도 한 하버마스는, 하이델베르크라는 도시가 가다머 덕택에 이삼십 년 동안 '공화국의 철학적 중심지'가 되었다고 일컫기도 했다.

2.3. 《진리와 방법》과 두번의 논쟁

1960년 60살의 나이에 그의 대표작 《진리와 방법》을 출간한다. 그 쯤해서 독일일반철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국제헤겔연구후원회를 창설하기도 했다. 또한 1967년에는 하버마스와 논쟁하고, 1981년에는 데리다와 논쟁하는데, 이 두번의 논쟁은 세계 철학계에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킨다.

80년 전후엔 주로 미국의 여러 대학에 초빙되어 강단에 서고 90년 전후에는 이탈리아 RAI공영방송과 더불어 '서양사상의 뿌리'와 '세계의 문화유산'등 주로 젊은이, 일반인을 위한 철학적 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을 정도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2.4. 말년

2000년 2월 11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가다머의 100번째 생일을 기념식과 컨퍼런스로 축하했다. 가다머가 학계에서 했던 마지막 강의는 2001년 여름 가다머의 미국 제자들이 조직한 2번의 해석학에 관한 연례 심포지엄이었다. 2002년 3월 13일 가다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클리닉에서 10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지겔하우젠의 쾨펠 묘지에 묻혔다.

3. 사상

3.1. 해석학적 순환

자연과학의 방법론에 맞서 정신과학[8] 자체를 가능하게 할 지반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다머는 헬름홀츠의 독특한 인식방식을 인용한다. 헬름홀츠는 귀납법을 논리적 귀납법과 예술적-본능적 귀납법으로 구별하고, 전자에서 자연과학의 방법적 특성을, 후자에서 정신과학의 방법적 특성을 본다. 자연과학의 추론 과정은 오성적 사유에 의해 의식적으로 수행된다. 이에 반해 정신과학에서의 귀납적 추론 과정은 무의식적, 본능적으로 일어나는데, 이 귀납법적 수행은 일종의 독특한 감정으로서의 택크트그푸흐(Taktgefühl; 약어:Takt)에 기인한다. 택크트그푸흐[9]는 인간관계나 사교에서의 '요령'이나 '재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방법론적 공부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직관적 경험들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택크트그푸흐는 일종의 교양(Bildung)이라고 볼 수 있는데, 도덕과 예절에 있어서 교양있는 사람 역시 ㅡ방법적으로 습득할 수도 또는 모방할 수도 없는,ㅡ 어떤 직관적 '경험'들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선입견'은 정확한 표상을 위해 극복되어야 할 한계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해 지평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론적인 기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가다머는 이러한 점에서 이성의 계발을 통해 방법론적 진리를 인식하고 과학을 통해 지상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신념을 비판한다. 계몽주의에서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진리 인식을 방해하는 '주관적인 요소', 즉 주관적 고정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권위, 선입견 등이 첫번째 극복대상이 된다. 하지만 가다머는 계몽주의에 의해 부정된 이와 같은 개념들을 복권시킴으로써 우리 자신의 역사성과 유한성을 일깨우고자 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선입견이 없는 이해는 있을 수 없으며, 선입견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이해는 따라서 원래 모두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선입견은 좁은 의미의 편견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에 반영되어 있는 역사적인 유한성을 말한다. 언어를 쓰고 있는 그 누구도 자신이 속한 역사를 부정하거나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만큼, 그런 역사적 지평이 마련해주고 있는 선입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선입견은 이렇게 역사적으로 전승되는 것이므로, 전통을 부정한다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10]

권위의 개념 역시 무조건 비판만 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가다머가 권위를 복권시키는 이유는 계몽주의에 의해 부정된 전통의 중요한 요소들이 우리의 진리 인식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계몽주의의 문제점은 '역사적 한계에 놓여있는 인간'을 너무 쉽게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계몽주의는 인간이 역사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모든 이해에는 선입견이 전제되어 있다"는 가다머의 말처럼 인간의 이해는 그 인간이 살아온 역사적 맥락의 한계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선입견은 우리의 언어에 전승되어 있으므로 언어의 바깥에서는 진리를 구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가다머는 모든 진리가 선입견을 지닌 언어를 통해서 이해되는 유한한 진리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유한한 진리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대화의 과정 속에서 그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는 무한한 진리를 막연하게 상상할 수 있지만, 무한한 진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우리가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은 유한하고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따라서 가다머가 말하는 권위란 절대적인 진리가 보증해주는 힘과 같은 것이 아니라, 유한한 인식 속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권위에 대한 우리들의 '인정'과 '신뢰'를 말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고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틀릴 수 있지만 나보다는 낫기 때문에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 속에서 작동하는 권위는 복권되어야 한다고 가다머는 주장한다.

이렇게 전통, 권위, 선입견의 개념을 복권시키려는 가다머의 기본적인 관점은, 칸트의 미학을 비판함으로써 시작된다. 칸트는 미학에서 가치 판단에 대한 주관성 속에, 모두가 경험적으로 아름다울 것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여러 사람들의 주관적 판단에 공통분모가 있다면 그건 보편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관 속 보편을 '공통감각(sensus communis)'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상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러한 공통감각은 가다머에 따르면 원래 역사적이고 정치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칸트는 공통감각의 '역사적인 내용' 부분은 제외해버리고 '형식적인' 부분만 주장함으로써, 공통감각이 원래 가지고 있는 역사성, 정치성, 도덕성 등을 없애버렸다. 즉, 기본적인 틀만 제시하고 그 안의 내용은 말하지 않는 칸트의 선험적 보편성은 ‘예술적 계기’, ‘감정’, ‘감정이입’ 등을 부수적인 일로 취급하기 때문에 역사성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므로 이를 지양하고 공통감각이 원래 지니고 있는 지위를 복권시켜야 된다는 것이 가다머의 주장이다. 가다머는 '공통감각' 뿐만 아니라 '교양', '판단력', '취미'도 비슷한 논증을 통하여 복권시킨다.

칸트가 미학에서 주장한 주관의 '형식주의'적 보편성[11]은, 근대 이후 정신과학의 그릇된 방법론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낭만주의 해석학과 역사학에서도, 선험적으로 정당화된 순수이성이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빌헬름 딜타이의 '정신과학적 방법으로서의 해석학' 역시 그런 의미에서 계몽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가다머에게 비판받는다. 딜타이는 인간의 역사적인 세계에 대한 접근 방식이 자연과학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잘 지적하고 있었지만, 거기에서도 내용없는 형식적 객관성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잘못된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이러한 예술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서, 예술 작품의 존재 방식이 마치 놀이(Spiel)와 같아야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어떤 놀이에 몰입할 때 주관과 객관의 구분을 의식하지 않는다. 놀이에서는 결코 그 누구도 그 놀이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놀이 자체가 놀이의 주체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시간적인 사건으로서 예술 작품의 의미는 다양한 놀이의 과정을 통해 다양하게 이해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매번 상황에 따라 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감상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이해의 지평 위에서만 예술 작품의 의미를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를 이해(해석)하는 일에 있어서도 칸트식의 '객관적' 접근 방법을 취하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는 다양한 맥락 속에서 그 사건의 의미에 접근하고자 하는 해석자에게 그때그때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나와 전혀 무관한 어떤 대상이라기 보다는 나의 오늘을 있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중적인 역사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즉, 역사적인 사건의 이해란, 해석자에 따라 그 사건의 의미가 제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인데, 다시 그 해석자인 '나'는 시시각각 변하는 역사적인 흐름 속에 놓여 있으므로 물음의 내용이 언제나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실의 상황은 매번 달라짐으로써 매번 다른 물음을 던지게 하고, 매번 다른 물음은 그 사건의 새로운 의미를 드러냄으로써 거꾸로 그 역사적인 사건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나의 해석'과 '역사적 사건'은 '해석학적 순환'을 이룬다.

이로서 의미를 드러내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 자체[12]가 된다. 이는 앞에서 말한 '객관과 주관이 사라진 놀이(Spiel)'와도 비슷하다. 즉, 진정한 역사적 사고는 자신의 역사성을 함께 사유하는 것이며 이를 가다머는 '영향사(Wirkungsgeschichte)'라고 명명한다.[13] 여기서 역사적 사건의 의미는 그 역사성에 한계지어져 있는 개인이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인 동시에, 그 역사 속에 있는 개인이 매번 변하는 상황 속에서 매번 달라지는 해석학적 이해를 통해 '대답'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하나의 역사 놀이가 된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의 전 과정이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해석학의 이해와 과정은 '역사에 대한 질문과 대답의 언어적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언어는 우리가 세계와 만나는 일종의 존재론적 장소가 된다. 우리는 역사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유한한 한계를 지닌 언어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나, 그 진리는 칸트의 주객이원론의 구조 속에서 주체에 의하여 발견되어야 할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 진리는 이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의 언어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감추는 수많은 해석들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4. 여담

  • 그의 사상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교과서에 나오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를 거부하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같은 역사[14]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술 감상에 있어서도, 단지 '순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역사성과 나의 역사성(나의 경험들)이 융합되는 지점에서 끊임없는 해석학적 이해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15] 이런 측면에서 가다머는 하버마스에게 "실증주의적 방법론(교과서 같이 객관적 사실로서의 역사)이 불필요하다는 것이냐"는 지적을 받는다. 물론 가다머는 하버마스와의 대담을 통해서 '방법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 '방법'도 엄밀히 말해서 '전통(선입견)'에 근거한 이해일 뿐이라고 하버마스에게 역공을 펼친다. 언뜻보면 가다머가 논쟁에서 이긴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하버마스의 비판이 그저 틀렸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가다머의 주저 《진리와 방법》에는 대담에서의 주장과는 달리 '방법'에 대해선 거의 논증하지 않고, 오히려 '방법'을 비판하고는 '선입견'을 정당화하는 논증에 대해서만 매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쾨르는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고, 해석학에 있어서 '방법'론적 측면[16]을 '이해'의 측면과 동등한 위치에 올려 놓고자 한다.
  • 그의 102세라는 엄청난 나이 덕분에 칼 포퍼의 진정한 라이벌이라고 농담처럼 불린다. 많은 학문들이 그렇겠지만 그 분야에 대한 경력이 길고 많은 권위자가 있으면, 정말 큰 업적을 이룩한 것이 아닌 이상 그 권위의 상태를 연속성있게 누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포퍼는 과학철학에, 가다머는 해석학 쪽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비교되곤 한다.
  • 내력있는 고전번역가 천병희 교수가 독일 유학 시절에 가다머에게 수학했다고 한다.
  •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 구판에서 가다머를 반동독 서독 인사의 이름으로 몇번 활용했었다.
  • 가다머의 대표적인 저서인 《진리와 방법》의 한국어판은 문학동네에서 발행되고 있는데, 예술의 해석 문제를 다룬 1부는 4인의 철학, 독문학 전공자가 참여하여 지난 1999년에 우선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나머지 2, 3부는 오랫동안 번역되지 않은 채 남겨졌다가 2012년에 이르러서야 고려대 임홍빈 교수의 번역으로 완역되었다.


[1] 1968년 정년퇴임.[2] 가다머가 말하는 '정신과학'은 철학, 예술, 문학 등등의 인문학을 말한다. 여기서 정신 '과학'이라고 한 것에 이상함을 느낄 수 있는데, 독일어로 과학과 학문은 Wissenschaft라는 같은 단어를 쓴다. 따라서 '정신학'이라고 말해도 되지만 한국에서 번역할 때 독문과 출신들이 '정신과학'이라고 번역하였기 때문에 굳어진 것이다. 다만 '정신과학'을 두고, '정신계열 과학(뇌과학)을 말하는 것인가?' 하고 헷갈릴 수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정신과학은 '인문학'을 말하는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3] "경험의 완수라는 것은 앎의 완수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위한 온전한 개방성을 말한다. 절대지의 개념에 맞서 해석학적 성찰이 추구하는 진리는 바로 그런 것이다." (《Gadamer》 p.311 ; 하버마스에 대한 답변 중에서..)[4] 물론 가다머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이해를 말하긴 했지만, 그의 책 대부분에서는 선입견에 대한 근거를 대고 있고, 이를 통해 선입견과 권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5] 어머니, 엠마 캐롤라인 요한나 게이에스는 당뇨병으로 사망했다.[6] 후설은 하이데거를 가르쳤던 교수이자, 하이데거에게 교수자리를 추천한 철학자이다. 현상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하이데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7]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논문 『플라톤의 변증법적 윤리학ㅡ필레보스에 대한 현상학적 고찰』로 교수 자격을 얻었다.[8] 여기서 정신과학은 '인문학'을 말한다. 철학 예술 문학 등등 을 뜻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정신과학은 '뇌과학'이나 '사회과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면 빌헬름 딜타이는 '정신과학'에 '사회과학'을 포함시켰다. 가다머는 이러한 딜타이를 비판한다.[9] 《진리와 방법》 한글번역판에서는 '감지력'이라고 번역했지만, 적절한 번역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독한사전에는 "배려, 신경씀, 세심."으로 번역되어 있다. 문맥상 한국어에 적당한 번역어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독일 발음 그대로 '택크트그푸흐'로 옮긴다.[10] 가다머는 역사가 나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역사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11] 엄밀히 말하면, 주관적 경험에 어떤 '공통된 부분'은 객관적이라고 볼 수 있다는 주장. 이 '공통 부분'은 '합리적 이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다. 이것은 우리가 미술 작품을 볼 때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떤 '순수 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칸트의 미학은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과, 그 순수한 아름다움을 '수동적'으로 감상하는 '관찰자(감상자)'가 있다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다.[12] 물론 이 역사적 사건은 '나'를 포함한다. 역사적 사건은 '나'와 '역사적 사건'의 해석학적 순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13] 《진리와 방법》 임홍배 옮김. p.183[14] 역사속에 포함된 개인의 해석학적 이해를 드러내는 역사를 말한다.[15] 가다머는 이를 '지평융합'이라고 부른다.[16] 리쾨르는 이를 '설명'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