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5 00:06:06

한국외국어대학교/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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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임원) 학부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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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이사장
2.1. 초대 이사장 김흥배2.2. 제2대 이사장 이숙경2.3. 제3대 이사장 변형윤2.4. 제4대 이사장 홍일식2.5. 제5대 이사장 백완기2.6. 제6대 이사장 한승헌2.7. 제7대 이사장 이남주2.8. 제8대 이사장 김종철
3. 역대 총장
3.1.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
3.1.1. 초대 학장 안호삼3.1.2. 제2대 학장 박술음3.1.3. 제3대 학장서리 한종원3.1.4. 제4대 학장 권중휘3.1.5. 제5대 학장 최완복3.1.6. 제6대 학장 박술음3.1.7. 제7대 학장 최완복3.1.8. 제8대 학장 조규철3.1.9. 제9대 학장 김동선
3.2.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3.2.1. 초대 총장 김동선3.2.2. 제2대 총장 황병태 정치학박사3.2.3. 제3대 총장 박필수 경제학박사3.2.4. 제4대 총장 이강혁 법학박사3.2.5. 제5·7대 총장 안병만 정치학박사3.2.6. 제6대 총장 조규철 문학박사3.2.7. 제8-9대 총장 박철 문학박사3.2.8. 제10-11대 총장 김인철 정치학박사3.2.9. 제12대 총장 박정운 언어학박사

1. 개요

역대 한국외국어대학교 이사장 및 총장을 설명하는 문서.

2. 역대 이사장

2.1. 초대 이사장 김흥배

2.2. 제2대 이사장 이숙경

2.3. 제3대 이사장 변형윤

2.4. 제4대 이사장 홍일식

2.5. 제5대 이사장 백완기

2.6. 제6대 이사장 한승헌

2.7. 제7대 이사장 이남주

2.8. 제8대 이사장 김종철

3. 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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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CK_LOGO.png 한국외국어대학 학장
초대

안호삼
2대

박술음
3대

(서리)

한종원
4대

권중휘
5대

최완복
6대

박술음
7대

최완복
8대

조규철
9대

김동선
1980년
종합대학 승격
파일:한국외국어대학교 흰색 엠블럼.svg 한국외국어대학교 총장
초대

김동선
2대

황병태
3대

박필수
4대

이강혁
5대

안병만
6대

조규철
7대

안병만
8-9대

박철
10-11대

김인철
12대

박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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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박정운 영어대학 교수가 총장이며 임기는 2026년 2월 28일까지이다.

인적· 물적 자원에 있어 정부에 많은 부분을 의지한 대학답게, 초기에는 주로 문교부에서 파견된 교직원들이 대다수였고, 당연히 학장 및 총장도 정부에서 파견된 명망 있는 교수들이 맡곤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졸업생들이 많이 배출되고, 모교 출신 교수 비율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1] 자연히 처장급 인사들이나 총장 역시 거의 자교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다.[2]

총장은 교수협의회 주도로 운영되는 총장후보추천위원회가 총장 후보 2인을 이사회에 추천하고, 이사회가 그 둘 가운데 한 명을 결정하는 식으로 선출된다. 이사회에 추천할 총장 후보는 교수 전원 직선제 투표를 거쳐 뽑힌다. 1차와 2차에 걸쳐 투표를 한 뒤 최종 1위와 2위를 이사회에 총장 후보로 올리는 식이다. 총장의 임기는 4년이며 연임제로 운영된다.

3.1. 한국외국어대학(1954~1980) 학장

3.1.1. 초대 학장 안호삼

1954.04.20 - 1955.05.09
생몰년도는 1902년1973년. 함경남도 함주 출신이며, 1918년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의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 중퇴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세이소쿠영어학교에 입학하여 대학진학을 준비하던 중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던 중 함흥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고 1923년에 경성고등상업학교(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에 졸업했다. 그해에 춘천고등보통학교(지금의 춘천고등학교) 교유(敎諭)로 피임되어 영어를 담당, 교육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1929년 경성공립제2고등보통학교[3]로 전임되어 1945년까지 재직했다. 광복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던 중 1950년 3월 미국 국무부 초빙 교환교수로 도미하였다가 6.25 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국방부 문관으로서 귀국하여 3년여 동안 미군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1954년 본교 개교와 더불어 초대 학장으로 취임, 1955년까지 직을 맡았으며, 그 이후에도 1958년까지 외대에서 봉직하였다.

3.1.2. 제2대 학장 박술음

1955.05.10 - 1960.06.05
생몰년도는 1902년~1983년. 서울 출신이며, 1남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9년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3·1운동에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퇴학당했다. 당시 외국선교사들과 접촉이 잦았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영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다녔고 졸업 후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현재의 휘문고등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휘문고보 재직 중 1937년 일본문부성 영어과교원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같은 학교 교장직을 퇴임한 뒤 1947년 연희대학 영문과 교수로 부임했다.
6·25전쟁 중인 1952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제자였던 백두진 당시 국무총리 서리 겸 재무부장관의 천거로 사회부장관(현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되어 능숙한 영어실력을 토대로 엔민사처(UNCAC)를 비롯한 해외원조기관 등에 우리 나라의 참상을 호소, 많은 원조를 끌어들이기도 했다. 사회부장관 퇴임 후 1955년 본교 교수 및 학장으로 부임하여 1977년 정년퇴임 때까지 영문법 등을 강의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학장직을 수행하면서도 꼭 강의를 맡아 가르쳤는데, 낱말 하나하나의 기능과 의미를 꼼꼼히 분석, 학생들이 영어문장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하는 데 힘썼다고 한다. 서울캠퍼스에 이 분의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학내에서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

3.1.3. 제3대 학장서리 한종원

1960.6.17.~1961.1.19
1905년멕시코 유카탄 지역으로 이민을 갔으며 한인학교였던 진성국어학교를 다녔다. 그 후 메리다에서 생활하다가 1921년에는 멕시코 시티로 이주하여 신학교에서 공부하였지만, 병으로 인해 그만 두고 메리다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메리다지방회 외교원을 지냈고, 그 뒤에는 교육위원을 맡아서 한인 2세들을 교육하는데 전념했다. 1941년 5월에 멕시코시티로 옮긴뒤, 묵경지방회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태평양전쟁 당시에 한인의 안전 보호와 함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후 묵경지방회는 폐쇄되었으나, 오랜 시간 후 한종원은 직접 묵경지방회를 부활시키기에 이른다. 이에 더해 멕시코 시티의 3대 일간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선전과 한국의 독립운동, 멕시코 한인들의 입장을 게재하는 등 멕시코의 한인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을 장려했다.
그 뒤 멕시코 사범대학을 졸업하고서, 베라크루스의 할라발대학과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등에서 역사학 교수를 지냈다. 1949년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인 김동성과 함께 친선사절로 활동하였으며, 1955년 12월 11일에 귀국하여 본교 서반아어과 주임교수를 맡았다. 1956년에 주미대사 양유찬의 수행원으로 남미 20여개국을 탐방한 뒤, 1960년 6월 17일부터 1961년 1월 19일에 본교 학장서리를 지냈다가 멕시코로 돌아갔다.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재외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장려하고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외교사에도 한 획을 그은 인물.

3.1.4. 제4대 학장 권중휘

1961.1.20.~1961.12.31
항목 참조.

3.1.5. 제5대 학장 최완복

1962.1.1.~1966.1.31
항목 참조.

3.1.6. 제6대 학장 박술음

1966.2.1.~1977.4.19

3.1.7. 제7대 학장 최완복

1977.4.20.~1980.4.19

3.1.8. 제8대 학장 조규철

1980.4.20.~1980.8.8
1937년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외대 최초의 모교 출신 학장으로, 피교육자 및 교육자 생활 기간 동안 파리 제8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스위스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한 기간을 제외하면 줄곧 모교에서 공부하고 모교의 강단에 서 있었던 그야말로 성골 외대인. 1962년 본교 불어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이후 귀국하여 1982년 본교 불어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본교가 종합대학으로 승격되기 전인 1980년 5개월간 학장서리를 역임했으며, 이후 1987년 다시 3개월간 총장직무대리를 역임한 바 있다.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98년 총장선출선거에 출마, 최다득표를 얻었으나 재단분규로 선임이 늦어져[4] 재단이 정상화되어 취임식을 가진 1999년 8월 28일까지 8개월 동안 총장직무대행으로 집무했다. 이후 정식 총장으로 취임, 2002년까지 총장직을 역임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재단문제를 중심으로 한 자잘한 학내 분규로 어지러운 교내 분위기를 그럭저럭 원만하게 수습했다는 평이 많다. 한국불어불문학회장과 천주교 청담동교회 총회장,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3.1.9. 제9대 학장 김동선

1980.8.9.~1981.2.28
193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외대의 마지막 학장이자 초대 총장.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본교 영어과 교수를 지내다가 1980년 학장으로 취임했다. 1984년 퇴임한 이후 부산외국어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바 있다. 정년퇴임하면서 국민훈장 무궁훈장을 수여받았다.

3.2. 한국외국어대학교(1981~) 총장

3.2.1. 초대 총장 김동선

1981.3.1.~1984.2.29

3.2.2. 제2대 총장 황병태 정치학박사

1984.3.1.~1987.12.21
항목 참조.

3.2.3. 제3대 총장 박필수 경제학박사

1988.2.5.~1990.3.17
항목 참조.

3.2.4. 제4대 총장 이강혁 법학박사

1990.4.14.~1994.4.13
생몰년도는 1935년~200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부터 본교 교수로 재직하며 기획실장, 부총장을 거쳐 1990년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994년 학내에서 정원식 총리 폭행사건[5]이 발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된다. 이후 한국공법학회장과 덕성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6년 숙환으로 인해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3.2.5. 제5·7대 총장 안병만 정치학박사

1994.4.14.~1998.2.28
2002.8.24.~2006.2.28
항목 참조.

3.2.6. 제6대 총장 조규철 문학박사

1998.8.24.~2002.8.23

3.2.7. 제8-9대 총장 박철 문학박사

2006.3.1.~2014.2.28
항목 참조.

3.2.8. 제10-11대 총장 김인철 정치학박사

2014.3.1~2022.2.28
항목 참조.

3.2.9. 제12대 총장 박정운 언어학박사

2022.3.1~
항목 참조.

[1] 그도 그럴 것이 특수외국어 학과 같은 경우 자교와 부산외대 외에는 전공자를 배출하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 나듯 외부 인사가 오더라도 부산외대 출신 아니면 해외 대학 출신 정도만 올 수 밖에 없다.[2] 2017년 제 11대 총장 선거에서는 8명 중 6명의 후보가, 2021년 제 12대 총장 선거에서는 후보 6명 전원이 자교 출신이었다.[3] 지금의 수도여자고등학교[4] 이 때 기존 재단 퇴진과 제2건학에 힘썼는데, 총장 선거에서 2위에 그친 교수가 이사회의 개입에 의해 자신을 제치고 총장으로 임명되자 이에 반발하여 본격적으로 이사진 퇴진에 힘을 실어주었다는 것이 중론이다.[5] 이 사건을 계기로 운동권 진영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뒤집힐 정도로 핵폭탄급 사건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정원식 문서를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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