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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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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올로고스 왕조
Δυναστεία τῶν Παλαιολόγων
파일:팔레올로고스 왕조 문장.sv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1259년/1261년~1453년
성씨 팔레올로고스(Παλαιολόγος)
창건자 미하일 8세
표어 Βασιλεύς Βασιλέων,
Βασιλεύων Βασιλευόντων
[1]
(임금들의 임금, 통치자들의 통치자)
주요 황제 미하일 8세
안드로니코스 2세
안드로니코스 3세
요안니스 5세
요안니스 6세
마누일 2세
요안니스 8세
콘스탄티노스 11세


[clearfix]

1. 개요

1259년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니케아 제국의 공동황제로 즉위하고, 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해 1261년 8월 15일 로마 황제로 즉위하면서 시작된 왕조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왕조다. 흥망과는 별개로 가장 오래 존속한 왕조이기도 하다.

세간의 평가는 권력투쟁으로 내분을 겪다가 로마를 망하게 한 주범들이라 망할 만해서 망했다는 인식이 있다. 제국을 결정적으로 망조를 들게 만든 요안니스 5세 치세에 벌어진 로마 최악의 내전 중 하나인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생각하면 크게 틀렸다고 볼 수 없다. 이 당시엔 제국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황제를 비롯해 가문 구성원들이 오스만 제국에 편승하고, 도움을 받기위해 여러 영토와 이권을 팔아넘기는등 간신히 버티고 있던 제국의 등을 떠미는듯한 추태가 이어졌다. 그나마 요안니스 5세의 통치가 끝나고 마누일 2세 치세에는 생존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결국 왕조는 최후의 황제이자 로마제국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대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로마 제국과 함께 몰락했다.[2]

2. 기원

팔레올로고스(Παλαιολόγος)라는 성씨를 해석하면 "오래된(palai)[3] 말(언어 : logos)"이 되는데, 이 성씨의 뜻은 분명하지 않다.

팔레올로고스 가문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로마노스 4세 시대다. 니키포로스 팔레올로고스(Νικηφόρος Παλαιολόγος)가 그 시조인데, 그는 만지케르트 전투의 패배 이후 프랑크계 로마인 루셀 드 바이욀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도망치는 바람에 전투에서 패배했다. 루셀의 반란은 후일 황제가 되는 청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진압하게 된다. 이후 미하일 7세는 그를 메소포타미아의 절도사(στρατηγός, 스트라티고스)로 보냈는데, 니키포로스 팔레올로고스는 니키포로스 3세 보타니아티스를 도와 미하일 7세를 내쫓았다.

니키포로스의 아들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Γεώργιος Παλαιολόγος)는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아내이자 훗날 황후가 되는 이리니 두케나의 동생인 안나 두케나와 결혼했고, 동서 알렉시오스의 쿠데타를 도왔다.[4] 쿠데타 과정 중에 아버지와 아들이 군대를 이끌고 수도 시내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니키포로스 3세가 퇴진하면서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하게 된다. 쿠데타 성공 이후 요르요스는 디라히온의 도독(δούξ, 둑스)으로 임명되었고, 로베르 기스카르와 그 아들 보에몽의 침략 때 군대를 이끌며 활약했다. 자세한 내용은 디라히온 공방전 항목 참고. 여담으로 이때 황제 알렉시오스 1세에게 얼마나 자주 보고를 했는지 '쿠로필라티스(Kouropalates)이자 디라히온의 관구장인 요르요스 팔레올로고스'라는 인장 유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황실과 강력한 연결을 가지고 되고 전공도 쌓으면서 이후 팔레올로고스 가문은 중요 명문가가 되었으며,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니케아 제국을 세울 때도 함께하고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역사

3.1. 미하일 8세(1258~1282)

니케아 제국의 총사령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의 아들로, 요안니스 3세의 증손녀인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와 결혼하여 라스카리스 왕조의 인척이 되었다. 젊을 때부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30살 때인 1253년 제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로스 2세의 심한 견제를 받았고, 1256년 역모죄로 몰리자 룸 술탄국으로 망명했다. 얼마 후 테오도로스의 용서를 받고 제국에 복귀했지만,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의 전쟁에 500명만 맡아 출진해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전했으나, 1257년 이피로스군이 테살로니키 성문 앞까지 이르는 걸 허용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1258년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한 뒤 8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가 황위에 올랐다. 황제의 최측근이었던 요르요스 무잘론과 형제들이 섭정단으로 임명되었으나, 테오도로스가 사망한 지 9일 만에 테오도로스의 장례식이 한창이던 소산드라 수도원에서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켜 무잘론 형제를 죽였다. 귀족들은 감옥에 갇혀있던 미하일을 석방시켜 섭정을 맡게 하였고, 그해 12월 요안니스와 함께 공동 황제로 등극하게 했다. 미하일은 빈민들에게 자금을 나눠주고 국유지를 빈농에게 하사해 민심을 샀고, 1259년 9월 아카이아 공국, 아테네 공국, 테살리아, 시칠리아 왕국의 연합군을 상대로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이후 라틴 제국을 향해 수차례 공격을 가한 끝에 1261년 7월 25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8월 15일 환도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성공에 취한 나머지 무리수를 연이어 두기 시작했다. 1261년 12월 25일 11살의 어린 황제 요안니스 4세를 긴급 체포한 뒤 실명형에 처한 후 비티니아의 마르마라 해 디키비제 요새에 감금했다. 또한 니케아 제국을 지방정권으로 격하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아르세니오스 아우토리아노스가 분노하여 미하일을 파문했다. 미하일이 파문을 거두어 달라 청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가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한 뒤 거친 옷을 입고 맨바닥에서 자며 40일 동안 참회했던 것처럼 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미하일은 그가 라스카리스 왕조의 지지자들과 결탁했다는 참언을 믿고 요구를 거부했고, 두 사람은 4년간 대립했다. 미하일은 교황에게 항소를 하겠다고 위협하며 파문을 철회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자, 1265년 5월 공의회를 소집한 뒤 아르세니오스를 폐위하고 프로코네소스 섬으로 유배했다.

미하일의 이 같은 조치에 수많은 성직자와 민중이 반발하였다. 특히 라스카리스 왕조를 선망의 눈길로 바라봤던 아나톨리아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했다. 반면 발칸 반도의 로마인들은 미하일이 자신들을 라틴인으로부터 구원했다고 여겨 그를 지지했다. 이리하여 발칸 반도의 친 팔레올로고스파와 아나톨리아의 친 라스카리스파가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벌어진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장장 50여 년간 이어지면서 막 부흥하려던 동로마 제국의 상승세를 꺾어버리고 도리어 쇠락의 길을 걷게 하였다. 미하일은 잃어버린 인기를 만회하기 위해 발칸 반도 영토의 수복에 나섰으나 라틴 제국을 후원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시칠리아 왕국의 공세에 맞서야 했으며,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여기에 아카이아 공국아테네 공국의 반격도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불가리아 제2제국세르비아 왕국 역시 동로마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 제국 동쪽 아나톨리아에서는 일 칸국에 의해 무력화된 룸 술탄국의 통제에서 벗어난 튀르크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로마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동로마 제국은 사방의 적과 동시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미하일은 이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교 협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서방 교회와의 통합 운동을 전개해 1274년 교회 일치를 선포했으나, 그나마 그를 지지했던 주교와 신자들마저 적으로 돌리는 결과만 가져왔다. 설상가상으로, 1279년 교황 마르티노 4세는 미하일을 파문하고 시칠리아 왕국-베네치아 공화국과 오르비에토 조약을 체결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한 원정을 벌이게 하였다. 이에 미하일은 아라곤 왕국페드로 3세에게 시칠리아를 공격하라고 부추겼고, 마침 1282년 3월 30일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카를루 1세를 따르던 프랑스 군인들이 몰살당하자, 페드로 3세는 즉시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시칠리아 왕국의 페드로 1세'를 칭했다. 카를루 1세는 나폴리로 후퇴한 뒤 시칠리아를 되찾기 위해 아라곤 왕국과 전쟁을 벌여야 했고 남은 생애 동안 로마 제국 쪽은 쳐다도 못보게 된다. 이렇게 시칠리아와 베네치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은 무산되면서 서유럽쪽 전선은 안정화 된다.

시칠리아의 만종으로 서방 세력을 주저앉힌 미하일은 비로소 아나톨리아도 신경쓰기 시작했는데 아나톨리아를 갉아먹는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프리기아 원정을 개시했으나, 트라키아의 파코미오스 마을에서 간질환으로 사망했다. 정교회 수도자들은 정통성 있는 어린 황제에게 실명형을 내리고 평생 유폐시켰을 뿐만 아니라 동서교회 통합정책을 강요한 그에게 강한 반감을 품어서 장례식 집전을 거부하였고, 미하일의 유해는 잠시 암매장되었다가 셀림브리아의 한 교회에 이장되었다.

3.2. 안드로니코스 2세(1282~1328)

안드로니코스 2세는 즉위 후 부친이 저지른 실책을 수습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1282년 12월 25일 교회 일치 정책을 지지했던 총대주교 요안니스 11세를 해임하고, 1285년 블라허나이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방 교회의 필리오케 교리를 부정하는 내용의 신조를 발표하는 등 아르세니오스 분열을 종식하려 했지만, 갈등의 골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총대주교들이 주교들의 대립을 수습하지 못하고 잇따라 사임하는 결과만 야기했으며 아르세니오스 분열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즉위하고 거의 30년이 지난 131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한편, 서방 전선은 세르비아의 맹공으로 위태로워졌다. 1283년,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스테판 드라구틴 형제는 흐리스토폴레 인근의 스트루마 일대의 세르지 일대를 관통하여 에게 해 연안으로 진입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동로마군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요새에 틀어박혔고, 그들은 포로와 재물을 실컷 받아낸 뒤 마케도니아 중부로 후퇴하여 겨울을 보냈다. 그 후 드라구틴은 영지로 돌아갔고, 밀루틴은 1284년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는 데바로, 키체포, 포레시를 점령하여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북부를 공략하였으며, 뒤이어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스트루미카, 프릴레프, 오흐리드, 크로야를 공략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이에 별 대항도 못하다가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협약을 맺고 딸 시모나다를 밀루틴의 왕비로 들이게 하고 나서야 겨우 공세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아나톨리아를 사실상 방치했던 부친과는 달리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우선 궁정을 아나톨리아로 옮기고 장병들을 격려했으며, 명장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를 기용해 투르크군을 무찌르게 했다. 필란트로피노스는 메안드로스 강 계곡에서 투르크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뒀으며, 멘테세 토후국으로 진격하여 멜라노디온 요새를 공략했다. 그러나 그는 1295년 가을에 안드로니코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붙들려 한쪽 눈이 뽑히고 유폐되었으며 그가 사라지자, 아나톨리아의 동로마군은 지리멸렬해졌다. 그와중에 오스만이라고 하는 한 튀르크 부족장이 아나톨리아 북서부 비티니아의 쇠위트에 오스만 베이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뒤 제국령 비티니아를 향해 공세를 가했고 이들의 공세에 의해 급기야 아나톨리아의 대도시인 니코메디아까지 포위되자, 큰아들이자 공동 황제 미하일 9세가 이끄는 동로마 군을 투입했으나 바페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에 고용된 알란 용병대와 민병대가 서로 호흡이 맞지 않는 바람에 패배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2세는 카탈루냐 용병 6,500명을 고용해 튀르크에 맞서게 했다. 이들은 여러 도시에서 튀르크군을 축출했지만, 튀르크인들보다 잔인하고 야만적으로 주민들을 짓밟았고, 안드로니코스 2세의 공동 황제인 미하일 9세와도 여러 번 충돌했다. 급기야 1305년, 그들은 제국을 배신하고 튀르크군과 합세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파괴한 후 아테네 공국과 테베를 정복하고 그곳에 눌러 앉았다. 오스만 1세는 카탈루냐 용병대의 횡포로 제국이 혼란에 휩싸인 틈을 타 아나톨리아 반도를 공격했고 얼마 안가 비티니아 일대 대부분이 오스만 1세와 그의 후계자인 오르한 1세에게 넘어갔다. 설상가상으로, 토도르 스베토슬라프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1304년 대거 남하하여 메셈브리아, 안키알루스, 소조플, 아흐토폴 등을 공략했다. 미하일 9세는 이에 맞서 스카피다 강 인근에서 불가리아군과 맞붙었지만 패배하고 말았으며, 흑해 연안 마저 불가리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가뜩이나 튀르크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불가리아마저 강성해지면 제국을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전 차르 스밀레츠의 형제이며 스레드나 고라 산맥 일대에서 독립된 세력을 꾸리고 있던 라도슬라프, 보이실을 후원해 내전을 일으키려 했다. 라도슬라프는 크란의 데스포티스이자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의 형제인 알다미르와 공모하여 토도르를 타도하려 하였다. 그러나 토도르는 이 음모를 간파하고, 1305년 알다미르를 순식간에 제압하고 라도슬라프의 군대를 격파해 라도슬라프 및 13명의 동로마 장성을 붙잡았다. 라도슬라프는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고, 13명의 동로마 장성은 여전히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토도르의 부친 게오르기 테르테르 1세와 교환되었다. 결국 안드로니코스 2세는 현실을 인정하고 1306년 불가리아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고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전쟁으로 재정이 최악으로 치닫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부친이 애써 구축했던 해군을 해산하여 제노바 공화국에 의존하였고, 군대를 대폭 감축하였다. 또한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고 신민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물려 재정을 복구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신민들은 무거운 세금에 반감을 품었고, 손자 안드로니코스 3세가 이러한 민심을 등에 업고 1321년 할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제1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외세는 이 틈을 타 다시금 제국의 영역을 갉아먹었는데 1326년 4월 6일, 오스만 베이국군이 7년간의 포위 끝에 프루사를 함락하고 수도로 삼았고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는 내전을 벌이는 양자를 지원하면서 이득을 마음껏 챙겼다. 이후 내전은 7년간 간헐적인 전투와 휴전이 반복되다가, 1328년 5월 23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면서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폐위된 후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다 1332년 2월 13일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3. 안드로니코스 3세(1328~1341)

7년간의 내전을 치른 끝에 단독 황제가 된 안드로니코스 3세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보좌를 받으며 제국을 나름 잘 다스렸다. 그는 제국 사회 전반에 만연한 매관매직을 엄격하게 단속하고, 고위 공직자의 탈세를 엄중히 감시했다. 특히 1337년엔 부정부패 단속을 맡은 '보편 법관' 네 명 가운데 세 명을 뇌물을 받은 혐의을 적용해 직위를 박탈하고 유배보냈다. 또한 황제는 외세에게 공물을 납부하며 고분고분하게 대하던 안드로니코스 2세 시절에서 탈피해 강경책을 꺼내들었다. 불가리아 차르 미하일 아센 3세가 트라키아를 침략하자,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보복에 나서 불가리아의 요새 한 곳을 점령했다. 이후 양측은 무력 충돌을 벌이다가 강화 조약을 맺고 향후 2년간 상호간 침략 행위를 금지하기로 했다.

1330년 7월 28일 불가리아군이 벨버즈드 전투에서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에게 궤멸되고 차르 본인도 전사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누이의 명예를 되찾는다는 구실로 불가르족에게 넘겨줬던 메셈브리아와 앙키알루스 등 흑해의 항구들과 국경 주변의 요새 몇 군데를 점령했다. 그러나 1331년 세르비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살해하고 집권한 스테판 두샨이 제국을 침략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그는 마침 자신처럼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와 결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동로마 제국을 침략했다. 이반 알렉산더르는 빼앗긴 흑해의 항구들을 손쉽게 되찾았고, 스테판 두샨은 남쪽의 제국 영토로 꾸준히 밀고 내려갔다.

설상가상으로,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가 1334년에 제국을 배신하고 세르비아 진영으로 넘어갔다. 스테판 두샨은 시르얀니스를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그에게 군대 지휘권을 줬다. 이에 시르얀니스는 1334년 봄에 카스토리아와 그 일대의 요새 여러 곳을 점령해 은혜에 보답했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프란체스 팔레올로고스를 테살로니카 일대의 총독으로 임명해 시르얀니스를 유인한 후 생포하게 했다. 스프란체스는 임무를 완수했지만, 생포하지 않고 현장에서 죽여버렸기에 견책 처분을 받았다가 곧 대 스트라토페다르크의 서열로 승진되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스테판 두샨과 협상한 끝에 세르비아와 헝가리와의 싸움을 제국이 지원해주는 대가로 시르얀니스가 점령했던 영토를 제국이 반환받는 협약에 서명했다. 이후 안드로니코스 3세는 이피로스 전제군주국과 테살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하게 다졌고, 제노바를 상대로 해전을 벌여 뚜렷한 성과를 거두는 등 제국의 위신을 세웠다. 그러나 1341년 6월 열병에 걸려 사망한 후, 제국은 또 다시 내란에 휩쓸렸다.

3.4. 요안니스 5세 vs 요안니스 6세 (1341~1354)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9살의 요안니스 5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어머니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가 섭정하였고,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14세 칼레카스가 보좌하였다. 그러나 총대주교는 칸타쿠지노스의 막강한 권세를 시기했고,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도 칸타쿠지노스에게 제관을 받으라는 권유를 했다가 거절당한 뒤 오히려 칸타쿠지노스를 몰락시키려 하였다. 이들은 황후를 충동질한 끝에, 1341년 9월 23일 칸타쿠지노스가 아카이아 공국과 협상하기 위해 트라키아로 떠난 틈을 타 그를 반역자로 규정짓고 가족을 핍박했다. 그해 10월,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에게 지휘권을 반납하라고 명령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를 거절했고, 1341년 10월 26일 병사들의 추대로 황제 요안니스 6세를 자칭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은 제국에 심각한 내상을 안겼다. 요안니스 6세는 아이딘 공국의 투르크 용병대와 세르비아 왕 스테판 두샨의 후원을 받았고, 요안니스 5세의 섭정단은 이에 맞서 아비뇽에 사절을 보내 교황의 지지를 호소했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에도 지원을 호소했다. 안나 황후는 1343년 8월에 금화 3만 두캇을 빌리는 조건으로 베네치아 측에 동로마 제관의 보석들을 저당잡히는 일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의 노력이 헛되게도 아비뇽, 제노바, 베네치아 어디에서도 구원군이 오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섭정단의 핵심인 아포카브코스가 1345년 6월 11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죄수들을 동원하여 공사를 벌이다가 죄수들의 습격으로 살해당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칸타쿠지노스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먼저 야심 가득한 스테판 두샨이 칸타쿠지노스에게 등을 돌리고 마케도니아 공략에 나섰다. 이에 칸타쿠지노스는 병력의 일부를 빼서 세르비아군을 막아내야 했다. 그리고 우무르의 아이딘 함대는 1344년에 출동한 교황의 동맹군에게 스미르나 항구를 빼앗기고 함대가 파괴되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을 모면하고 내전에서 하루속히 이기기 위해, 칸타쿠지노스는 1345년 초 오스만 베이국의 아미르 오르한과 직접 만났다. 오르한은 칸다쿠지노스의 딸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는 대가로 칸타쿠지노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넘기기로 했다.

이후 오스만 베이국의 지원에 힘입어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 1347년 2월 2일 수도에 입성했다. 이후의 협상 결과, 두 황제는 향후 10년 동안 공동으로 제국을 지배하기로 했고 칸타쿠지노스가 선임 황제의 자리를 차지하기로 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면 두 황제는 동등한 지위를 가지기로 했다.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는 추방되었지만 다른 정치범들은 모두 석방되었고 각자의 재산은 내전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칸타쿠지노스는 1347년 5월 21일 블라케르나이의 성모 성당에서 두번째 대관식을 치렀고, 1주일 뒤 칸타쿠지노스의 막내딸 엘레니 칸타쿠지니도 같은 성당에서 요안니스 5세와 결혼했다.

6년간의 내전 끝에 황제로 인정받은 요안니스 6세는 스테판 두샨의 영토 확장 정책, 1347년의 흑사병, 튀르크군의 침략으로부터 제국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맏아들 마테오스에게 디디모티쿰과 크리스토폴리스 사이, 세르비아의 국경과 면해 있는 트라키아를 보존하는 임무를 맡겼으며, 차남인 마누일에게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를 관장하는 임무를 맡겼다. 또한 그는 함대를 조직하기 위해 돈을 모으려 했지만 겨우 5만 히페르피라만 확보했고, 부자들은 더이상 희생을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외국 상선들이 기존의 갈라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오게 만들기 위해 수입 관세를 대폭 삭감했다. 갈라타를 도맡았던 제노바인들이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348년 8월 소함대를 파견해 황금뿔 주변의 동로마의 선박들에 불을 질렀다. 이에 칸타쿠지노스의 아내 이리니는 차남 마누일, 사위 니키포로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의 항전을 선도했다. 이후 양측은 몇 달 동안 격렬하게 싸웠고, 마침내 제노바는 제국에 전쟁 배상금으로 10만 히페르피라를 지불하며 그동안 불법으로 점유해오던 갈라타 뒤편의 토지를 반환했다. 또한 7년간 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던 테살로니카를 탈환하고,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을 지켜본 후 승자인 제노바와 화평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1352년 무렵, 요안니스 6세는 사위인 요안니스 5세와 대립했다. 이제 스무 살이 된 젊은 황제는 더는 장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요구했다. 요안니스 6세는 이런 사위의 야망을 충족시키지 않으면 내란이 또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트라키아의 큰 몫을 떼어줬다. 그러면서 본래 트라키아를 영지로 삼았던 마테오스에겐 아드리아노폴리스와 그 주변의 영토를 할당했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을 빼앗긴 마테오스는 요안니스 5세를 미워했다. 그러던 1352년 여름, 양자는 또다시 내전을 벌였다.(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요안니스 5세는 군대를 이끌고 처남인 마세오스의 영역을 침범해 아드리아노플을 포위했다. 마세오스가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요안니스 6세는 오르한 1세로부터 상당 규모의 튀르크 병력을 빌려서 아드리아노플로 파견했다. 이에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에 손을 빌렸고, 스테판 두샨은 이를 받아들여 기병 4천 명을 파견했다. 양측은 마리차 강에서 격돌했고, 튀르크군이 세르비아와 불가리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튀르크군은 약탈 허가를 얻고 인근의 소도시와 촌락들을 모조리 약탈했다. 이로 인해 요안니스 6세는 이겨놓고도 인기가 폭락하는 상황에 놓였다.

1353년 4월,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하고, 자신의 아들 마세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대가 끊긴 것은 아니라면서 요안니스 5세의 아들인 안드로니코스 4세에게 상속권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가족을 테네도스 섬으로 추방했다. 그러나 총대주교 칼리스투스는 마세오스의 대관식을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요안니스 6세를 파문한 뒤 총대주교 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며칠 뒤엔 제노바 측의 도움을 받아 테네도스 섬으로 도주했다. 마세오스와 그의 아내 이리니는 1354년 2월에야 비로소 대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1354년 3월 2일, 트라키아에 대지진이 일어나 대부분의 지역이 파괴되었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이 피해를 입었고 생존자들마저 그 뒤에 이어진 눈보라와 홍수로 인해 사망했다. 한때 대도시였던 갈리폴리는 거의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은 폐허로 변했다. 튀르크군은 이 소식을 듣고 가족들을 최대한 거느린 채 트라키아로 이주, 버려진 도시들에 터전을 잡았다. 대다수는 페허가 된 갈리폴리로 갔고, 곧이어 더 많은 튀르크인들이 그곳으로 가서 합류했다. 이리하여 제국은 트라키아를 영원히 잃어버렸다.

상황이 이에 이르자, 요안니스 6세는 사위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테네도스 섬으로 갔다. 그러나 섬 주민들은 그가 탄 배를 받아주지 않았고 사위 역시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1354년 11월 21일, 요안니스 5세는 테네도스 섬을 빠져나와 헬레스폰트를 빠르게 거슬러 가서 마르마라 해로 들어갔다. 11월 22일 이른 시각에 아직 어둠에 잠겨 있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그는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11월 24일 요안니스 5세는 장인과 만나 계속 공동 황제로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음을 깨달은 요안니스 6세는 12월 10일 블라케르나이에서 제관을 내려놓고 황제만 착용하는 예복과 자주색 장화를 벗은 후 은퇴를 선언하고 수도원에 은거했다. 황후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황후복을 벗고 키리아 마르타 수녀원의 수녀가 되었다. 그러나 트라키아에서 거점을 갖추고 있던 요안니스 6세의 맏아들 마테오스는 이에 불복하고 황제를 칭하며 매제인 요안니스 5세에게 맞섰다. 그러던 1356년 말 또는 1357년 초, 그는 세르비아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요안니스 5세는 세르비아인들이 내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며 마테오스를 데려왔다. 이후 마세오스는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는 데 동의하고 그의 아우 마누일이 있는 모레아로 갔다.

3.5. 요안니스 5세(1354~1376)

1354년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된 요안니스 5세는 튀르크 세력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친서방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그 대가로 교황으로부터 지원군을 받기를 희망했지만 정교회를 신봉하는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만 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스만 베이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튀르크의 봉신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든 서방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오기 위해 서유럽 곳곳을 방문하였다. 1366년 6월, 사보이아의 아마데오 6세[5]는 오스만 베이국으로부터 갈리폴리 요새를 탈환하고 동로마 제국에 돌려줬다. 1369년 오스만 베이국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공략했을 때, 요안니스는 로마로 달려가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고백하며 제발 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서유럽의 어느 나라도 동로마 제국을 도와주지 않았다.

1371년, 세르비아 제국마리차강 전투에서 오스만 베이국에게 참패했다. 그 여파로 제국은 붕괴하였고, 세르비아 공국들은 오스만 베이 무라트 1세의 봉신이 되었다. 요안니스 5세는 이 틈을 타 세르비아로부터 세레스를 탈환하였고, 무라트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했다. 이후 서유럽 견문을 마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귀환하던 요안니스 5세는 불가리아 차르 이반 알렉산더르에게 억류되었다. 당시 그의 맏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4세는 부황의 구원 요청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2년간 억류되던 중,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사촌을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출진해 불가리아 흑해 연안의 소조폴과 메셈브리아를 점령하고 바르나까지 공격하였다. 압박감을 느낀 알렉산더르는 평화 협상에 응했고, 요안니스 5세는 18만 플로린을 몸값으로 지불하는 대가로 풀려났다. 아메데오 6세는 메셈브리아와 소조폴을 동로마 제국에 넘기게 하였다. 요안니스 5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뒤 안드로니코스 4세를 폐위시키고, 차남 마누일 2세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이에 격분한 안드로니코스 4세는 쿠데타를 결심했다.

3.6. 요안니스 5세, 마누일 2세 vs 안드로니코스 4세, 요안니스 7세

1373년 5월, 요안니스 5세는 오스만 베이국의 부하로서 아나톨리아 원정에 참가했다. 그런데 그가 수도를 비운 틈을 타 안드로니코스 4세가 무라트 1세의 아들인 사우지와 결탁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하고 금세 진압되었고 격노한 무라트는 사우지를 실명시킨 뒤 요안니스 5세에게 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물론 안드로니코스 4세의 어린 아들 요안니스 7세까지 실명시키라고 요구했다. 요안니스 5세는 명령에 따르면서도 약간의 자비를 베풀었다. 두 부자는 한쪽 눈만 잃은 채 콘스탄티노플에 감금되었으며, 안드로니코스 4세의 제위 계승권은 공식적으로 박탈되었다. 제위 상속자가 된 23살의 마누일은 테살로니카에서 황급히 소환되어 9월 25일에 공동 황제가 되었다.

1376년 3월, 요안니스 5세는 베네치아에게 테네도스 섬을 양도하는 대가로 3만 두카트를 받고, 제관의 보석들을 돌려받기로 했다. 그러자 제노바가 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베네치아가 테네도스 섬을 양도받기 전에 행동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1376년 7월, 제노바인들은 안드로니코스 4세를 감옥에서 탈출시켰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비밀리에 갈라타로 간 후 무라트와 접촉하여 기병과 보병 혼성군을 얻었다. 그는 그 군대로 콘스탄티노플을 한 달 동안 포위한 뒤 뚫고 들어갔다. 요안니스 5세와 나머지 황족들은 금문의 요새에서 며칠 동안 버텼지만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그들을 자신이 얼마 전까지 갇혀 있었던 아네마스 탑에 가두었고, 테네도스 섬을 제노바에 양도했으며, 1377년 10월 18일 아들 요안니스 7세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테네도스 섬의 동로마 총독은 제노바에게 섬을 넘기기를 거부하고, 베네치아의 함선이 오자 기꺼이 섬을 넘겨줬다. 이에 안드로니코스 4세는 신의를 내보이기 위해 제노바가 그 섬을 무력으로 탈취하는 것을 지원해야 했다. 그러나 제노바는 베네치아에게 패배해 끝내 테네도스 섬을 얻지 못했다. 한편, 무라트는 안드로니코스 4세를 복위시킨 뒤, 그를 복위시키는 대가로 갈리폴리를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고 안드로니코스 4세는 이에 따라 1377년 말 갈리폴리를 오스만 베이국에게 헌납했다. 한편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은 아네마스 탑에 3년간 갇혀 있다가 1379년에 탈출하여 무라트 1세의 진영으로 갔다. 마누일은 무라트에게 자신과 아버지를 복위시켜 주면 공물과 군사 지원을 더 늘리고 아나톨리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동로마의 거점인 필라델피아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무라트는 이를 승낙해 군대를 규합했고, 베네치아는 제노바를 선호하는 성향이 강한 안드로니코스 4세를 제거하기 위해 소함대를 파견했다. 1379년 7월 1일,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는 하리시오스 대문을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다시 입성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갈라타의 제노바인들에게 도망쳤다. 1380년, 요안니스 5세와 안드로니코스 4세, 콘스탄티노플과 갈라타는 각각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지원을 받아 내전을 벌였다.(제4차 팔레올로고스 내전) 무라트는 겉으로는 요안니스 5세와 마누일 2세를 지원했지만 암암리에 안드로니코스 4세를 지원해 양측간의 적대 관계가 지속되게 만들었다. 전쟁은 거의 2년간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가, 1381년 4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종결되었다. 안드로니코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되찾고 셀렘브리아를 영지로 삼았고, 그의 아들 요안니스 7세도 장차 아버지를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1385년 안드로니코스 4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7세가 셀렘브리아 영지를 물려받았다.

1390년 4월, 요안니스 7세는 숙부 마누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한 것에 반발해 정변을 일으켜 요안니스 5세를 폐위하고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불과 5개월만에 마누일과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으로 요안니스 5세가 복위하였고, 요안니스 7세는 오스만 술탄국에 망명했다. 거듭된 내전으로 제국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하자, 요안니스 5세는 외세의 침략을 우려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문 중 하나인 '황금 문'을 보강하였다. 그러자 술탄 바예지트 1세가 보강한 부분을 다시 부수지 않으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요안니스는 황금 문의 방어시설을 다시 허물게 하였지만, 이 수모에 심각한 충격을 받고 1391년 2월 사망했다.

3.7. 마누일 2세(1391~1425)

부친 요안니스 5세 사망 후 황위를 물려받은 마누일 2세는 바예지트 1세의 중재를 받아들여 요안니스 7세가 셀렘브리아 영지로 복귀하게 하였다. 그리고 마누일이 후계를 남기지 못할 경우 그가 잇도록 합의하였다. 하지만 얼마 후 마누일이 아들 요안니스 8세를 낳자, 요안니스 7세는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렇게 해서 황실간의 분열을 비로소 종식할 수 있었지만, 오스만 술탄국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졌다. 바예지트 1세는 봉신인 그를 몇 차례 소환했으나 불응하자 1394년부터 1402년까지 8년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였다. 마누일 2세는 난국을 해결하고자 1399년 요안니스 7세에게 도시를 맡기고 십자군 결성을 이루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베네치아, 파리, 런던을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1402년에 귀환하였다. 그의 방문은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사이의 문화 교류를 촉진하는 데는 큰 기여를 했으나, 원래 목적이었던 군사 원조 면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2년, 바예지트 1세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에게 참패하여 포로로 잡히면서 오스만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를 풀고 물러났고, 동로마 제국은 테살로니카와 트라키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수복했으며, 오스만 술탄국에게 바치던 조공도 중단하였다. 요안니스 7세는 섭정 지위에서 물러나 테살로니키 일대를 영지로 삼아 '테살로니키의 황제'를 칭했고, 아들 안드로니코스 5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1407년, 안드로니코스가 사망하자 비탄에 빠진 요안니스도 이듬해 죽으며 2대에 걸친 테살리아 황제국은 소멸되었다. 이후 마누일 2세의 아들 안드로니코스가 테살로니카 총독으로 부임했다. 한편 마누일 2세는 국사를 아들 요안니스 8세에 맡기고 종교와 문학에 심취했다.

그러던 1421년, 요안니스 8세무라트 2세와 무스타파의 내전에 개입해 무스타파를 지지했다. 무라트 2세는 무스타파가 이끄는 반란을 진압한 뒤 쳐들어와서 142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 공격했으며 1423년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유린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당하지 않았으나 마누일과 요안니스 8세는 굴욕적인 조약에 서명해야 했다. 이후 마누일은 수도원으로 들어가 수도자로 지내다 1425년 사망했다.

3.8. 요안니스 8세(1425~1448)와 콘스탄티노스 11세(1449~1453)

요안니스 8세는 1425년 단독 황제가 된 뒤 껍데기만 남은 제국을 어떻게든 유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교황청과 협상해 정교회가톨릭의 우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통합하고 십자군을 일으켜 오스만 술탄국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1437년에 요안니스와 동방 주교들은 교황 에우제니오 8세에 의해 열린 피렌체-페라라 공의회에 참석했고, 동방 교회에 대한 우위를 확인한 교황은 오스만 술탄국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소집했다. 하지만 이 조건을 알게 된 동방 교회 내부에서 통합 찬성파와 통합 반대파의 극렬한 갈등이 벌어졌다.

헝가리와 폴란드의 주도로 결성된 십자군은 오스만 술탄국으로 쳐들어갔으나, 1444년 9월 20일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게 참패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도 십자군에 호응하기 위해 콘스탄티노스가 모레아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십자군을 물리치고 반격해 온 오스만군에게 쫓겨났고, 뒤쫓아온 오스만군은 코린트 지협을 넘어 모레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돌아갔다. 실의에 빠진 요안니스 8세는 1448년 사망하였고, 동생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1451년 새 술탄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결심하고 2년간 대군을 준비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가 도시를 비운다면 에게 해 연안 지대의 황제로 대우해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자, 술탄은 1453년 4월 2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얼마 안 되는 수비대와 시민들의 협조를 받으며 결사 항전했지만, 5월 29일 끝내 함락당하자 황제의 장식을 전부 떼버린 뒤 적군을 향해 달려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동로마의 멸망으로 로마 제국은 2206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멸망했으며,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도로 삼고 제국을 선포했다.

3.9. 멸망 이후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등 명목상의 왕위 요구자들은 항전 끝에 이탈리아를 통해 서유럽으로 망명했고, 이후로도 제위 복귀를 노렸으나 소수의 피난민들 외에는 지지를 얻지 못해서 실패하고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를 마지막으로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마지막 공주 소피아 팔레올로기나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시집가, 러시아가 로마의 정통성을 잇는 제3의 로마를 자칭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4. 황제 목록

4.1. 니케아 제국

니케아 제국의 황제
이름, 별명 출생 즉위 퇴위 비고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23 1259.1.1. 1261.8.15

4.2.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의 황제
이름, 별명 출생 즉위 퇴위 비고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1223 1261.8.15. 1282.12.11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1259.3.25 1282.12.11 1328.5.24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1277.4.17 1294/1295 1320.10.12 공동황제
1차 내전(1321, 1322, 1327~1328)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1297.3.25 1328 1341.6.15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41.6.15 1376.8.12
2차 내전 - 로마 시민전쟁(1341~1350)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 1292 1347.3.31 1354.12.10
3차 내전(1352~1357)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1325 1353 1357 공동황제
4차 내전(1373~1379)
안드로니코스 4세 팔레올로고스 1348.4.11 1376.8.12 1379.7.1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370 1376 1379.7.1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79.7.1 1390.4.14 복위
요안니스 7세 팔레올로고스 1370 1390.4.14 1390.9.17
요안니스 5세 팔레올로고스 1332.6.18 1390.9.17 1391.2.16 복위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 1350.6.27 1391.2.16 1425.7.21
오스만 공위기(1402~1413)
요안니스 8세 팔레올로고스 1392.12.18 1425.7.21 1448.10.31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 1405.2.8 1449.1.6 1453.5.29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1453)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1407 1453 1460 오스만에게 항복
토마스 팔레올로고스 1409 1460 1465.5.12 이탈리아로 망명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1453 1465 1502 마지막 제위요구자

5. 몬페라토 변경백국

Marchesato del Monferrato

5.1. 개요

몬페라토 변경백 굴리엘모 7세(Guglielmo VII del Monferrato)의 딸 비올란테가 이리니라는 이름으로 안드로니코스 2세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후 이리니의 남동생으로 몬페라토 변경백이 된 조반니 1세가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남계 후손이 없어지자 몬페라토 변경백위는 안드로니코스와 이리니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 테오도로스 팔레올로고스(Teodoro I del Monferrato)에게 돌아갔고, 그 후 몬페라토 변경백국은 약 200년간 팔레올로고 가문[6]이 통치하게 된다. 이는 황제의 후계 구도를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선택되었다.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귀족들은 '라틴 야만인'들이 '고귀한 자줏빛 혈통'을 무기로 삼아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강탈할 것을 두려워 했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면도얼굴이탈리아관습으로 나타난 테오도로스는 실제로 동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1533년, 몬페라토의 팔레올로고 가문은 남계 후손이 끊겼다. 몬페라토 변경백 굴리엘모 9세의 딸이었던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가는 만토바 공작이었던 페데리코 2세 곤차가와 혼인하였으며 이로써 몬페라토 변경백위는 곤차가 가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후 1574년 신성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몬페라토를 공국으로 승격하였다.[7]

페데리코 2세 곤차가의 증손녀인 마르게리타 곤차가는 로렌 공작 앙리 2세와 혼인하였는데, 둘 사이에서 태어난 클로드 프랑수아즈는 훗날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신성 로마 황제가 되는 프란츠 1세의 증조모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팔레올로고스 가문과 아주 미약하게나마 연관이 생겼다. 다만 합스부르크 왕가동로마 제국보다는 서로마 제국-신성 로마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1] 바실레프스 바실리온, 바실레본 바실레본톤[2] 어디까지나 IF에 불과한 이야기이지만, 15세기초 오스만 제국은 티무르 제국에게 술탄이 사로잡히고 수도까지 탈탈 털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술탄 자리를 두고 10년에 걸친 내전이 지속되었으므로, 마지막 내전만이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마누일 2세와 같은 열정적이었던 군주의 치세 아래 조금이라도 더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3] 고생대(Paleozoic Era), 팔레오세의 어원이다.[4] 다만 알렉시아스에 의하면 사전에 포섭해놓은 상태조차 아니었고, 쿠데타 당시에도 그렇게 쉽게는 설득되지 않았던 모양이다.[5]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가 이 시람의 고모였다.[6] 팔레올로고스의 이탈리아어 발음[7] 다만 적법한 남계 후손이 끊겼다는 것이지, 후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부계로만 따져도 팔레올로고 가문의 마지막 변경백이었던 조반니 조르조 델 몬페라토(1488~1533)에게는 플라미니오 팔레올로고(1518~1571)라는 사생아가 있었으며 플라미니오 팔레올로고의 3남 4녀의 후손들 중 테오도로를 통해 팔레올로고-오리운디, 페르디난도를 통해 팔레올로기 성씨를 쓰고있는 후손임을 주장하는 가문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특히 팔레올로고-오리운디 같은 경우는 그 계보까지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