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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 체코 |
1. 개요
오스트리아와 체코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 체코는 보헤미아 공국-보헤미아 왕국 시절 신성 로마 제국의 구성국이었으며, 1526년 이후부터는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체코에서는 합스부르크 지배를 흑역사 취급하는 경향이 강하다.2. 역사적 관계
2.1. 중세
대 모라비아 왕국은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위치해 있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은 서슬라브의 일파인 모라비아인이 세웠다. 대 모라비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 프랑크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프랑크 왕국의 지배하에서 서슬라브족이 게르만화되었고 가톨릭을 받아들였다.프랑크 왕국이 서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누어진 뒤에는 체코 일대는 동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스트리아 일대에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을 설치하였으며, 보헤미아 공국도 신성 로마 제국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보헤미아 공국은 보헤미아 왕국으로 격상되었고 오타카르 2세는 오스트리아 공국의 바벤베르크 가문이 절손된 틈을 타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손에 넣었고,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까지 집어삼켰다. 점점 독일인이 아닌 이방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은 스위스 호족에 불과했던 한미한 집안 출신의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4세를 독일왕으로 선출했고, 새로이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즉위한 루돌프 4세는 오타카르 2세를 압박했다. 오타카르 2세는 루돌프 1세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루돌프 1세에게 패사하였고, 루돌프 1세는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자신의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분봉하고 막내딸 유타를 오타카르 2세의 아들 바츨라프 2세와 결혼시켰다. 루돌프 1세 사후 독일왕 알브레히트 1세로 선출된 알브레히트는 조카 바츨라프 3세가 암살당하자 자신의 맏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시켰으나 처남 케른텐의 하인리히를 앞세운 보헤미아 귀족들의 저항을 받았고 결국 루돌프 3세가 일찍 병사하고 알브레히트 1세 본인도 조카 요한 파리키다에게 암살당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의 보헤미아 지배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후 보헤미아 왕국에는 룩셈부르크 왕조가 들어섰고 카를 4세는 자신의 딸 카타리나를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와 결혼시켰으며, 카를 4세의 막내아들 지기스문트는 딸 엘리자베트를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5세와 결혼시켰다. 지기스문트가 아들 없이 사망하면서 알브레히트는 독일왕이자 보헤미아 국왕,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으로 선출되어 룩셈부르크 왕조의 유산을 흡수했으나 아들 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고 라디슬라우스가 어린 나이에 죽으면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유대는 다시 끊어졌다.
2.2. 근세
보헤미아 왕국은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 사후 폴란드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의 장남 브와디스와프를 새 국왕 블라디슬라프로 선출했고, 블라디슬라프는 마차시 1세가 죽자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선출되어 3국의 국왕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울라슬로 2세의 아들 루드비크 국왕이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패사하면서 처남이자 매형이었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400여 년 동안 보헤미아를 지배했다.초창기 페르디난트 1세, 막시밀리안 2세는 보헤미아의 후스주의를 인정하기도 했으나 정작 프라하를 거주지로 삼았던 루돌프 2세는 후스주의를 배격하면서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의 관계는 냉각되었다. 30년 전쟁 직후 합스부르크 제국은 가톨릭과 유대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종파를 보헤미아 내에서 금지시켰고,[1] 개신교 교파들은 지하 교회 형태로 잔류하다가 서서히 사멸하였다. 30년 전쟁 직후 들어온 가톨릭 사제들은 거의 외국인이었으며, 가톨릭 교회는 체코 내에서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권위로 해석되었다. 이는 오늘날 체코인들의 탈종교 성향/회의주의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30년 전쟁 이후 의회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고 실질적으로는 거의 소집되지 않는 현상이나, 합스부르크 제국 여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기득권을 채가는 것을 보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등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저항하려 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인들이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옹립한 것에 분개하여, 보헤미아 왕국과 귀족들을 고깝게 여겨 점점 천시해 이후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점점 발언권을 잃었다.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는 1749년 빈에서 보헤미아 왕국의 국정이 처리되도록 하여 보헤미아 왕관령을 사실상 해체시켰고 보헤미아는 점차 오스트리아에 종속되어갔다. 체코인 학생들은 초등학교에서는 체코어로 공부하고, 중학교에서부터는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만 공부해야만 했는데, 이는 체코어를 존중하는 조치가 아니라, 독일어를 배우기 전 자신이 알고 있는 모어로 문자 해독을 해야 독일어로 된 수업을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정책이었다.[2] 민족주의 체코 사학계에서는 합스부르크 지배 시기를 보헤미아인 인구를 대체한 독일인 이주와 독일화, 경제 침체를 이유로 암흑시대로 취급한다.
2.3.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를 자칭하자 프란츠 2세는 지금까지 느슨한 동군연합이었던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트리아 중심의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선포하였고 보헤미아 왕관령이었던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 오스트리아령 슬레스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으로 전락했다.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등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분할안이 나오면서 오스트로슬라브주의에 입각한 체코인의 자치권 운동이 있었으나 1848년 혁명이 진압당하면서 소수 의견으로 전락했다.한 편 1867년 대타협으로 헝가리 왕국이 성 이슈트반 왕관령으로 격상되어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전 분야에서 주권을 회복하고 크로아티아 왕국도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되어 상당한 자치권을 누린 반면 보헤미아 왕국은 여전히 시스라이타니아의 구성원에 불과했다. 체코인들은 스스로 노력하여 제국 내에서 입지를 다졌는데,[3][4] 대표적인 사례로 헝가리 왕국에 헝가리어로 공연하는 극장들이 정부 예산으로 건립되는데 비해, 보헤미아에서 체코어로 된 연극은 극장에서 공연조차 못하게 막자 대타협 이듬해인 1868년 체코인들이 정부 지원 없이 기부금만으로 프라하에 국립 극장을 건설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체코인들은 빈 정부에 보헤미아 왕국의 자치를 청원했으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97년 체코어 사용 확대를 허용하다가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들의 반발을 초래한 것을 계기로 체코인들의 자치권 확대 요구를 계속 묵살하는 정책을 유지하였다.
헝가리 왕국과 다르게 체코의 자치권이 확대되지 못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헝가리 민족주의의 중추는 지주 귀족 계급으로[5] 의회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 반대로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농촌이나 소상인 자녀들 중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들로 상당수가 목사나 사제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내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에 비해 정치 권력이 부족했다.[6] 헝가리 귀족들이 헝가리 민족주의를 주도하던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반 당시는 이미 보헤미아의 귀족 계급은 상술된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인으로 대체되거나, 아니면 독일화된 지 수세대가 지난 시점이었다.
2.4. 20세기
체코 민족주의의 부흥은 보헤미아 왕국의 하층민들이 중산층, 상류층에 진입함으로서 상술된 악조건을 극복하며 본격적으로 힘을 얻게 되었다. 1900년 오스트리아 의회에 진출한 체코인 의원이 43.1%는 농민 출신이었고, 36.5%는 노동자 출신이었다. 이러한 신분 상승은 체코인들 스스로 만든 제도의 결과였다.체코 민족주의의 부흥의 결과 20세기 초반 빈에는 체코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시민 인구가 10만여 명에 달했고, 이는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사이의 긴장 관계를 증대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는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비롯한 슬라브계 민족주의자 5만여 명을 반역자로 몰아서 처형하였으며, 체코인을 포함한 슬라브계 신민들의 시민권을 추가로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일대에서는 식량이 징발되어 오스트리아 본토로 이송되었다. 이는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를 중심으로 한 체코인 민족주의자들이 오헝 제국 내 자치권 확대가 아닌 완전 독립을 추구하게 되는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였다. 상당수의 체코인 군인들은 러시아 제국 같은 협상국으로 탈영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기 이른다. 한 편 식량 강제징발에 반발하는 모라비아 지역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체코인 군인들이 명령을 거부하자,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유혈 사태가 격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맹국이 패배하고 협상국이 승리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생제르맹 조약을 계기로 보헤미아 왕국을 포함한 보헤미아 왕관령은 독립했다.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는 .1918년 10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를 인정한 이후 1919년부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였다. 체코는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한 슬로바키아인과 연대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건국되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재집권을 막기위해 귀족 제도를 폐지시켰다.[7] 하지만 체코에 속했던 주데텐란트는 독일계 주민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의해 합병되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의 점령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주의 국가가 되고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 되었다.
냉전 시절에 양국의 교류는 제한되었다. 80년대에 동구권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동독 주민들이 동서독 통일 이전에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통해 서독으로 대거 이주했다. 탈냉전 이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진 뒤에도 체코는 오스트리아와 교류, 협력하고 있다.
2.5. 21세기
체코가 2004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면서 양국은 유럽연합회원국이 되었다. 체코의 유럽연합 가입 이후, 양국의 교류가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로 일하러 가는 체코인들이 많은 편이다. 체코와 오스트리아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경제적으로도 양국은 협력하고 있다.3. 문화 교류
역사적/지리적 이유로 양국은 문화교류가 활발하다. 프라하 대학교는 근현대 오스트리아 역사에서도 무척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 당시 체코인 대다수는 독일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었고, 오늘날에도 독일어는 체코에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내에는 체코어 화자들이 일부 존재한다. 음식 문화에서 체코는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 주변국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9세기 초 오스트리아 제국 당국이 극장에서 체코어 공연을 금지시키는 정책을 취하자, 체코인 민족주의자들은 체코어로 된 연극을 공연하는 유랑 극단들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체코 인형극의 기원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의 역사적 인물들 중 그레고어 멘델, 지그문트 프로이트 등 현 체코 출신인 몇몇은 체코에서도 자국의 인물로서 기리는 경우가 있다.
4. 교통 교류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 도로, 철도 등이 존재한다. 그리고 양국은 솅겐 협정에 가입했기 때문에 무비자로 입국가능하다.5. 관련 문서
- 오스트리아/외교
- 체코/외교
- 유럽연합
- 오스트리아/역사
- 체코/역사
- 오스트리아/경제
- 체코/경제
- 오스트리아/문화
- 체코/문화
- 오스트리아인 / 체코인
- 독일어 / 체코어 / 천주교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6. 외부 링크
[1] 이는 심지어 오스만 헝가리보다 훨씬 더 억압적인 종교정책이었다.[2] 유사 사례로 청나라가 동튀르키스탄을 강점하면서 위구르 어린이들을 중국어 기숙학교에 집어넣고 강제로 한문을 가르쳤는데, 기숙학교에서 공부한 학생들이 위구르어도 못하고 중국어로 제대로 못하고 중국어로 이름만 간신히 쓰는 결과가 나타나,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고 모조리 폐교되었던 사례가 있다.[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체코인은 독일인(오스트리아인), 헝가리인 다음 위상이었고 폭넓은 자치를 허용받은 크로아티아인보다도 높았다.[4] 보헤미아의 체코인 인구 거의 대부분이 체코 민족주의나 친독일 성향과 관계 없이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5] 헝가리 귀족들은 19세기 초반 농노 해방으로 권력과 기득권을 상실한 이후 과거 자신들의 농노였던 루마니아인이나 슬로바키아인 등과 자신들을 차별화할 대안이 필요했기 때문에 헝가리 민족주의에 광적으로 매달렸다.[6] 이는 체코 민족주의자 대다수가 자유주의에 경도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체코인 부르주아지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자유주의를 대표하던 집단으로 취급되기도 했다.[7] 이 귀족 제도 폐지로 손해를 본 가문이 리히텐슈타인 가문이다. 원래 오파바 일대에 막대한 영지를 부동산 형태로 소유하고 있었으나 귀족 제도 폐지와 더불어 부동산을 몰수당하여 정착한 곳이 오늘날의 리히텐슈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