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8:04:59

아르튀르 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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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est Frenchman
※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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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B0B0B0><colcolor=#202020>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파일:Rimbaud.png
본명 장 니콜라 아르튀르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출생 1854년 10월 20일
프랑스 제2제국 샤르빌
사망 1891년 11월 10일 (향년 37세)
프랑스 제3공화국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시인 → 상인
사조 상징주의
서명 파일:아르튀르 랭보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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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B0B0><colcolor=#202020> 묘소 프랑스 샤를빌메지에르 샤를빌메지에르 묘지
종교 무종교(유신론)[추정]
부모 아버지 프레데리크 랭보
어머니 비탈리 랭보
형제 이자벨 랭보
비탈리 랭보
프레데리크 랭보
동거인 폴 베를렌 (1871년 ~ 1875년) }}}}}}}}}

1. 개요2. 생애
2.1. 활동기2.2. 절필기
3. 작품4. 어록5. 평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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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문학은 모두 상식 차원에서 쓰였지만, 랭보만은 예외다.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는 프랑스시인이다. 빛나는 재능으로 시대를 앞지르는 시를 썼지만 방랑, 방황, 반항으로 점철된 생애를 살았다. 일찍부터 라틴어로 글을 썼을 만큼 재능이 뛰어났으나 지속적인 가출[2]과 이 시대에는 현대보다 훨씬 심하게 탄압받던 성적 지향 등으로 인해 한 번도 안정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30대에 요절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이다.

2. 생애

2.1. 활동기

프랑스 제2제국 동북부 아르덴주 샤를빌[3]에서 군인인 프레데리크 랭보(Frédéric Rimbaud)와 로쉬의 농가 출신 비탈리 랭보(Marie Catherine Vitalie Rimbaud)[4] 부부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프레데리크는 1860년 8월 이후로 아내와 성격 차이로 별거해 랭보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으며,[5] 아버지에 대해서는 부모가 주석 그릇을 집어던지며 심하게 싸웠던 일 정도말고는 딱히 기억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변화가 없는 소도시에서, 가톨릭의 엄격한 규율과 질서를 강요하는 어머니 밑에서 숨막히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1862년 10월 콜레주(시립학교) 드 로사에 입학했으나 1865년 부활절 방학 이후 콜레주 드 샤를빌로 옮겨 총명한 재능을 뽐낸다. 7급으로 입학했는데 몇 달 만에 6급으로 월반을 해서 1866년까지의 1년 만에 두 학년을 한꺼번에 수료할 정도. 이 무렵부터 가톨릭교에서 이단으로 취급되는 책들인 라틴어로 쓰여진 책 등을 탐독하게 된다. 함께 다닌 형 프레데리크[6]도 평균 이상의 성적을 보여줬지만 남동생이 라틴어·그리스어 암송 부문의 상을 모조리 쓸어가는 바람에 빛을 보지 못했다. 형이 6급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동생은 4급으로 또 월반했을 정도니. 하지만 랭보는 강압적인 분위기 때문에 학교를 싫어해, 일부러 수학이나 간단한 나눗셈조차 못 하는 척한다. 아래는 콜레주의 교육 방식에 반발, 랭보가 작성한 글이다.
알렉산드라가 유명했었다는 사실이
내게 뭐 중요한가? 라틴 민족이 존재했는지
안 했는지 아는 것이 내게 대체 왜 중요하단 말이야?
그들이 살았었다 해도
그들은 나를 연금 생활자 정도로 만들었을 테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그들의 언어를 보전해 온 것뿐인데.
내가 선생들한테 뺨을 맞고 그로 인해
고초를 겪을 정도로 잘못한 게 뭐란 말인가.

빌어먹을 그리스어
이 빌어먹을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중략)
걸상에 앉아 바지가
닳도록 공부해봤자 좋은 일도 별로 없고.
빌어먹을!
구두닦이가 되려면 구두닦이 할 자리를 얻어야 하고
시험에 붙어야 해!
당신들에게 할당된 자리들은 구두닦이나 수위나
목축업자 같은 거지.
다행히도 나는 그런 자리는 원하지 않아.
빌어먹을!

에라이, X같다!(출처: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14세이던 1868년 5월에는 황태자의 첫 영성체를 축하하는 라틴어 시를 바쳐 감사장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아카데미의 콩쿠르에서 라틴어로 시를 지어 상을 받는다. 이 해 말 프랑스어로 쓴 <고아들의 새해 선물>은 그의 처녀작이 된다. 이 시는 1870년 1월 2일 '라 르뷔 풀투스(만인을 위한 잡지)'에 발표되었다.

16세가 되던 1870년, 젊고 진보적인 교사 조르주 이장바르[7]가 학교에 수사학 교사로 부임한다. 이장바르는 랭보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주며 좋은 상담자가 되어준다. 랭보는 이 선생님에게 매우 큰 영향을 받게 되는데, 그는 레 미제라블 등 당시 프랑스 문단의 대가 빅토르 위고의 작품들과 고답파(高踏派, 파르나스파) 작가들의 시 등을 소개받으며 본격적으로 문학의 세계에 발을 딛게 된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랭보의 어머니는 왜 아이에게 소설이나 읽히냐며 불평을 토로했다고 전해진다. 이장바르는 랭보와 단순한 스승-제자 이상의 친밀한 관계가 되어, 이후 가출한 랭보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자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 유명한 '견자의 편지'의 수신인이 바로 이장바르이다.

이장바르 선생은 랭보에게 계속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고 대학에 입학할 것을 권유했지만, 랭보는 대학 X까 나는 시인이라고라는 자세로 일관했다. 이즈음 랭보는 견자의 편지를 보내 자신은 시인의 길로 전념할 것을 밝혔다.

5월 24일 랭보는 고답파 시인 테오도르 드 방빌에게 <감각><오필리에><태양과 육체>등의 작품과 편지를 보내고, "고답파의 시인들 틈에 조그마한 공석을 만들어 주신다면..."하고 고답파의 잡지에 이 작품들을 실어줄 것을 부탁하였다.

7월 19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일명 보불전쟁)이 일어나고, 승리를 거듭한 프로이센군은 국경을 돌파하고 파리를 포위하기 직전이 된다. 7월 24일 이장바르는 고향 두에로 돌아가면서 방 열쇠를 랭보에게 주고, 랭보는 방학 내내 그의 하숙방에서 책을 탐독한다. 8월 29일 랭보는 학업을 포기하고, 책을 팔아버리고 파리로 떠나는 가출을 감행한다. 그러나 기차표가 유효하지 않아 운임 부족으로 체포된데다 스파이 혐의를 받아 마자스에 억류되기까지 한다. 9월 5일 이 사실을 이장바르에게 편지로 알리며 도움을 청하고 대신 벌금을 내준 이장바르의 노력으로 9월 8일 석방된다. 이장바르에게 부탁해 그의 이모들인 쟁드르 부인들이 살고 있는 두에로 함께 가서 머무르다가 9월 27일 집으로 돌아오지만, 방랑의 맛을 알게 되어버린 그는 열흘 만에 두 번째 가출을 한다. 이때는 걸어서(!) 벨기에로 갔다가, 샤를르로와, 브뤼셀을 방랑하고 다시 두에로 갔다. 이 동안에 쓴 시가 <술집 '베르'에서><깜찍한 아가씨><찬장><겨울을 위한 꿈><나의 방랑>등이다. 10월 말 랭보의 어머니는 이장바르에게 부탁하여 그를 샤를르빌로 데리고 돌아오게 했다.

불과 4개월 만인 1871년 2월 25일 랭보는 세 번째 가출을 한다. 3월 10일까지 파리를 방랑하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파리 코뮌이 일어난다. 이 무렵 혁명적 열정을 드러내는 말과 글들을 쓴다. 4월 말에 네 번째로 파리로 갔는데, 눈으로 직접 그 실태를 보자 환멸을 느껴 혁명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리고 시를 쓰는 데 열정을 전념하게 된다. 5월 13일에 이장바르 앞으로, 이틀 뒤에 다시 드므니 앞으로 보낸 편지를 보면 이때 랭보는 새로운 시 작법을 개진하가고 있었다.

랭보는 친구 브르타뉴[8]의 소개로 파리에서 한참 인기를 끌던 서정시인 폴 베를렌을 알게 된다.
파일:external/bf97e4628e944d13fcb100b387b636c0e87448e5dd61fee942961dc2bea06fe1.jpg
폴 베를렌과 아르튀르 랭보

9월, 랭보는 스스로 자신있게 여긴 작품 ‘취한 배’를 들고 베를렌을 찾아간다. 자기소개와 함께 시를 보냈고, 당장 파리로 오라는 흔쾌한 초대의 답장을 받자 직접 만나러 간 것. 당시 랭보는 불과 17세로 아직 미성년자였고 베를렌은 그보다 10살 연상이었다. 막 신혼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고 달콤한 행복에 취해있었다.

그러나 랭보에 대한 파리 작가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더럽다'는 말을 하는 작자들도 있었다. 랭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시기 파리를 다녀온 뒤 두 번째로 파리에 대한 환멸을 맛보았다. 이 무렵 랭보의 내면에 숨어있던 동성애 성향이 드러나며 베를렌과 불륜 관계로 발전, 결국 그의 가정을 파탄내고 만다. 그러나 랭보와 베를렌은 문학적 성향은 물론 성격과 기질이 달라도 너무 달라 여러 번 이별과 재결합을 반복한다. 참고로 초기 운문시 대부분이 이 시기에 쓰인 것이다.

1872년 3월 랭보는 베를렌과 일시적으로 헤어져 샤를르빌로 돌아오지만, 5월 베를렌의 편지를 받고 다시 파리로 가게 된다. <눈물><갈증의 희극><아침의 좋은 생각><금의 시대><신혼부부> 등의 후기 운문시가 이 시기에 쓰였다. <일뤼미나시옹>도 이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압생트와 방탕에 빠져 무질서한 생활을 하다 랭보는 도발적인 제안을 한다. 둘이서 일상을 벗어나 유럽 여행을 함께하면서 여행의 영감을 시로 써보자고 했던 것. 그 제안에 솔깃했던 베를렌은 신혼집을 나와 함께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올랐고 그렇게 몇 달씩이나 유럽 전역을 다니게 된다. 7월 함께 벨기에 여행에 나섰으나, 무질서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9월 두 사람은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다 12월 랭보는 다시 베를렌과 헤어져 샤를르빌로 돌아간다. 그러나 한 달만인 1873년 1월 베를렌이 런던에서 병으로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런던으로 돌아간다.

4월 다시 집으로 돌아갔으며, 그 무렵 산문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쓰기 시작한다. 베를렌으로부터 여러 차례 편지가 와서 5월에 또 한번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두 사람 사이는 어색해졌다.

그리고 여행 중 1873년 7월 4일, 두 사람은 심하게 말다툼을 하게 되고, 베를렌은 랭보를 런던에 남겨두고 브뤼셀로 돌아간다. 랭보는 베를렌에게 런던으로 돌아와달라고 편지로 애원한다. 기다리다 지친 랭보는 7월 8일 베를렌의 뒤를 따라 브뤼셀로 간다. 그러나 결국 싸움은 되풀이되고 랭보는 파리로 혼자 떠나려고 하고, 베를렌은 둘이서 또 한번 런던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7월 10일 랭보의 의지가 굳은 것을 본 베를렌은 실망과 술기운에 랭보를 향해 권총을 발사해 왼쪽 손목에 경상을 입히는 지경으로 치닫는다. 베를렌은 상해와 남색 혐의로 감옥에 간다(당시에는 동성애가 법적으로 처벌되는 범죄인 시대였다). 갈 데가 없어진 랭보는 로슈에 있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간다.

다만 베를렌은 그후 랭보와 가끔 편지를 주고 받았고, 감옥생활 중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랭보에게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개무시당한 일이나, 랭보의 친구의 친구와 친해져 역시 편지 교환을 할 때 간간히 '슈투트가르트(랭보가 묵던 지역)의 그 애', '슈투트가르트 놈', '그 기생충' 라는 식으로 지칭하며 소식을 물어봤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베를렌은 랭보보다는 오래 살았지만 랭보 사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죽었으며, 죽기 1년 전까지도 랭보의 시집 편집에 참가했다.

랭보는 결국 19세의 나이에 절필을 선언한다. 문학의 길을 접은 후 그는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 노동자가 된다.

2.2. 절필기

1874년 초에는 새로 알게 된 시인 제르맹 누보[9]라는 스페인 시인과 런던에 머문다. 누보는 4월에 런던을 떠나고, 랭보는 12월 말에 샤를르빌로 돌아간다. 1875년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가서 가정교사 일을 하는데, 이때 출소한 베를렌과 한 번 만나기도 하지만 이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5월에는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걸어서(!) 스위스 등으로 여행을 가고 이탈리아로 간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병으로 쓰러지고 어떤 이탈리아 여성의 간호로 회복된다. 그 달 말에 블린디시로 향하다가 일사병으로 쓰러졌지만 병을 무릅쓰고 파로스 섬으로 건너간다. 6월 15일 리부른의 프랑스 영사에 의해 송환된다. 그 해 겨울 샤를르빌로 돌아온 랭보는 가족과 같이 지내면서 스페인어, 아라비아어, 이탈리아어, 근대 그리스어, 네덜란드어 등을 배운다. 벽장에 짱박혀서 외국어를 습득하려고 밤낮없이 책만 읽었다고.

1876년 5월 19일 네덜란드 식민지 군에 용병으로 지원[10], 6년 계약으로 300프랑을 받는다. 6월 10일 병사로서 자바로 건너가고 7월 23일 바타비아로 옮겨갔으나, 몇 달도 채 안 된 8월 탈영해버린다.(...) 살리티가를 시발점으로 방랑한 끝에 12월 말 고향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877년에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리의 곡마단 통역사가 되고, 스웨덴덴마크를 돌아다닌다. 스톡홀름에서 프랑스 영사관으로부터 송환 명령을 받고 프랑스로 돌아간다. 9월에는 마르세유로 가고, 거기서 알렉산드리아로 떠나지만 도중에 병에 걸려 샤를르빌로 되돌아오고 그해 겨울은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1878년 봄에는 동양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함부르크로 가지만 뜻대로 안 되어 샤를르빌로 돌아온다. 10월에는 또 걸어서 알프스를 넘어 제노바로 가고, 11월 19일 알렉산드리아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 섬으로 간다. 프랑스 상사의 채석장 감독이 되었는데, 이듬해 5월 장티푸스에 걸리며 프랑스의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그 해 겨울도 샤를르빌에서 지낸다.

1880년이 되자 다시 키프로스로 돌아갔으나, 그해 8월 아프리카 아덴으로 가서 마제랑, 비아내이, 바아디 앤드 시 등의 리용 지역 회사의 아프리카·아라비아 지사에 이력서를 내며 전전하다가 결국 커피 선별 및 검량 작업장인 '하림'의 감독관직을 맡았다.

이러면서 한편으로는 밀수업에도 발을 담궈 아덴의 헛간 건물을 하나 사들여 무기 밀수에 가담했다. 유목민들의 카라반 루트를 이용한 무기 거래가 랭보의 주 무역루트였는데, 이때 훗날 에티오피아황제가 되는 메넬리크 2세와 안면을 트기도 했다.

그의 됨됨이 때문에 고약한 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감독관들에게 흔한 별명이었다고 한다. 랭보는 이런 동안에도 가족들로부터 과학 서적이나 실용 서적을 주문해 볼 정도로 독서에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비문학 실용서적만 읽었을 뿐, 문학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기를 선택했는지, 누군가 자신의 과거의 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건 다 헛소리였고 거짓말이었다."라는 식으로 일갈했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 남겼던 시가 일으킨 반향으로 파리에서의 그는 이미 젊은이들에게 대스타가 되어 있었는데 말이다.

1885년 가을에는 하단에서 부바사 사이에 있는 미지의 지역 오가딘을 탐험하고 이 보고서를 파리 지리학회에 제출한다. 이 무렵에는 약간의 재산을 모았었다고. 10월 초 발데 회사에 사표를 내는데, 독립하여 회사를 경영할 수 있을 만큼 성공해 있었다. 프랑스 상인 피에르 라바튀를 만나 공동으로 무기 수입을 하기로 계약한다.

그러나 1887년 무렵이 되자 메넬리크 2세가 에티오피아 일대를 안정시켜 나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거래에서 고압적으로 나오거나 대금을 어음으로 치르는 경우가 많아졌고,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한 랭보는 이익을 위해 더 멀리까지 밀무역을 나가야 했다. 무기 외에도 상아, 커피 등을 매매하지만 사업이 신통치 않고 거친 환경 속에서 한계에 달한 랭보는 류머티즘]에 시달리다가 종양에 걸린다.

1891년 2월 갑자기 오른쪽 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고 일어설 수도 없게 된다. 이는 유전의 영향이 큰 병이었으며 친인척 중 관절염이 악화돼서 사망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랭보는 일기를 쓴 적이 없었으나, 4월부터는 병의 고통을 참아가면서 연필로 여행 일지를 쓴다. 들것에 실려 에티오피아의 헤라(Herar)에서 제알라(Zeliah)까지 후송되었고 여기서 아덴으로 간다. 5월 22일 마르세유에 도착해 콩세프숑 병원에 입원하고, 나흘 뒤엔 무릎의 악성종양이 악화되어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다.[11] 7월 23일 퇴원하여 가족에게 돌아가지만 얼마 안 가 병세가 악화되어 8월 23일 다시 마르세유의 병원에 입원한다. 여동생 이자벨이 성심성의껏 간병을 해주었으나 11월 10일, 3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병원 사무원은 그의 사망을 이렇게 기록했다.
무역업자, 이송 도중에

장례 절차에 쓰였던 비용계산서는 다음과 같다.
6급 장례식.
떡갈나무 납관: 212.60 프랑.
구리판, 상장, 마차 몇 대 등등.
총액 458.11 프랑.

3. 작품

4. 어록

인생이란 우리 모두가 견뎌야 하는 희극이다.[12]
책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13]
책 <지옥에서 보낸 한 철>에서

5. 평가[14]

폴 발레리, 스테판 말라르메 등의 후기 상징주의 작가들과 더불어 프랑스 현대시 구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작 5년이 채 되지 않은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너무나 새롭고 강렬하고 깊이 있는, 가히 천재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들을 남겼다. 폴 클로델은 이를 참다운 계시라고 했고, 초현실주의의 총수 앙드레 브르통은 랭보를 초현실주의 운동의 가장 위대한 선구자로서 추앙했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실존주의, 사회주의 문학에도 그의 작품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그의 시세계는 그가 쓴 편지에 나오는, "시인이란 모든 감각의 거대하면서도 오래된, 이론적인 뒤틀림에 의해 견자(見者)[15]가 된다."는 구절 속에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시인의 최고 경지를 표현한 해당 단어는 그의 시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 랭보는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사물에 대한 접근에서 벗어나 모든 감각이 뒤틀렸을 때 보여지는 새롭고 놀라운 사물의 모습을 시적 이상으로 삼고, 그러한 상태를 표현하는 자만이 '견자'라고 생각한다. 이 시론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세련된 과장법을 음절 단위의 리듬을 통해 전통이 된 프랑스 시에 대한 대담한 반항이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둔 유럽 문명 자체에 대한 문학적 혹은 직관적 회의로서다. 그 두 가지 의미가 하나의 운동으로 행동화된 형식이 초현실주의 문학이다. 프랑스 시는 랭보를 통해 놀람과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문명과 그것을 지탱해 주는 중산층은 조롱당했다.

랭보의 마음속에는 누를 수 없는 자유에 대한 끊없는 갈망, 새로운 변화에 대한 욕구가 용광로 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의 제약이나 구속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 미지의 것, 생동하는 것을 찾으려는 격렬한 충동과 욕구가 있었다. 그가 가출과 방랑, 종교 모독, 동성애, 사회주의에(이쪽은 일시적이긴 했지만) 빠지고 개차반 같은 행동을 하고 다닌 것은 모두 이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유로운 방랑 생활을 통해 초기의 청순한 방랑시 몇 편과 전통과 현실에 매달린 인물들과 제도에 대한 경멸과 조소를 던지는 풍자시(<음악을 따라서>, <교회의 빈민들> 등)도 남겼다. 그러나 시인으로서 문학을 통해 진정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보는 자'가 되어 미지의 세계, 진정한 삶, 절대적인 것을 찾으려 한 것이다.

젊은 랭보는 스스로 보는 자가 되기 위하여 진지하고 피나는 노력을 했다. 알코올과 환각제의 사용, 동성 연애, 무의식 세계의 탐구, 자발적 환상 상태의조작, 심지어 자기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면서까지 미지의 세계, 현실과 환상이 겹치는 새로운 세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의 말대로 큰 병자, 큰 죄인, 큰 저주받은 자가 됨으로서 최고의 지자(智者)가 되어 우주와 절대 세계를 붙잡으려고 했다. 또한 이렇게 자기가 보는 미지의 세계, 환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감각에 통하는 시적 언어를 만들려고 하였다. '향기, 소리, 빛깔 등 모든 것을 요약하는' 언어이다. 그가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부른 이 시도는 일찍이 보들레르가 시도한 것이었으며, 빛깔의 소리를 듣고 소리의 향내를 맡을 수 있는 감각적 언어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랭보는 보들레르의 시도를 극단까지 이어갔다. 그가 이러한 시도에 성공했는지는 제쳐두더라도, 미지의 새로운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결사적 노력, 그리고 새로운 감각을 나타내는 새로운 시적 언어를 창출하려고 한 정신적 노력은 시에 대한 새로운 사명과 방식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

6. 여담

  • 형제자매로 형 프레데리크와 2살 아래의 첫째 여동생 비탈리, 4살 아래의 둘째 여동생 이자벨이 있었다. 비탈리는 17세에 요절했는데[16] 그녀가 남긴 일기는 랭보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이자벨은 랭보의 말년에 간병을 맡고 임종을 지켜서 오빠에 대해 많은 증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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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작 영화 <토탈 이클립스>는 랭보의 전기영화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리즈 시절 중 최전성기 때 찍은 영화인데, 감상평의 대부분은 '디카프리오 훑다 보니 영화가 끝나있었다'. 실제 랭보 역시 청소년 시절 외모가 상당히 빼어났으니 제대로 된 캐스팅이라고 할 수 있다.
  • 영화 말고도 무시무시한 두께를 자랑하는 랭보 전기책 <지옥에서의 한 철>[17]이란 책도 있으니 참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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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는 1872년 6월 폴 베를린이 스케치한 랭보의 초상화다.
  • 사이키델릭 록 그룹인 도어즈의 리드 싱어이자 시인인 짐 모리슨이 랭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반역의 시인, 랭보와 짐 모리슨>이라는 책도 출판되어 있으니 둘의 비슷한 생애를 비교해보고자 하면 읽어보자. 1부는 랭보의 이야기, 2부는 짐 모리슨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 에픽하이의 멤버 타블로가 랭보를 좋아해서 그런지 자주 언급하곤 한다. 자신의 미투데이에 랭보의 사진을 프로필 사진으로 걸어놓는가 하면# 8집 수록곡 중 하나인 '막을 올리며'에서는 "내 삶이 Poetry. 난 숨만 쉬어도 랭보"라는 가사를 썼다.
  • 국카스텐의 멤버 하현우도 랭보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영원 중 일부를 오른팔에 타투로 새겨 놓았을 정도.
  • 랭보를 쐈던 권총경매에서 43만 4500유로(약 5억 4000만원)에 낙찰됐다.#
  • 랭보의 주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이 존재한다.#
  • 프랑스의 TV연속극 "Nick Verlaine ou Comment voler la Tour Eiffel"(닉 베를렌 또는 에펠탑 훔치기, 1976년작)의 주인공은 이름이 니콜라 랭보(Nicolas Rimbaud)이다. 이 주인공은 본업이 도둑인데, 도둑으로 활동할 때 쓰는 가명이 제목의 닉 베를렌.


[추정] 이 기사에 따르면 랭보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한다.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가톨릭 교리와 관습에 비판적이었다.[2] 10대 중반의 나이부터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혐오와 반항심을 누르지 못하고 여러 번 가출을 감행한다. 책을 팔아서, 걸어서, 무임승차로 벨기에와 프랑스를 방랑하였으나 매번 붙잡혀서 집에 돌려보내지기를 반복했고, 다른 곳으로의 탈출 기도와 방랑생활에 대한 동경은 일종의 숙명이 되었다.[3] 現 샤를빌메지에르·Charleville-Mézières. 북프랑스와 벨기에의 국경에 있는 소도시이다.[4] 혼전성은 '퀴이프(Cuif)'.[5] 어머니가 랭보와 그의 형, 첫째 여동생을 데리고 샤를르빌의 부르봉 거리에 있는 낡은 집으로 이사해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막내 여동생 이자벨은 여기서 태어난다.[6] Jean Nicolas Frédéric Rimbaud.[7] Georges Alphonse Fleury Izambard, 1848년 12월 11일 ~ 1931년 2월.[8] Paul-Auguste Bretagne, 1837년 3월 21일 ~ 1881년 10월 30일.[9] Germain Nouveau 1851~1920.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인이지만 스페인으로 귀화해 살았다.[10] 그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에 방문할 목적으로 지원했다.[11] 여동생 이사벨이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에 따르면 오른쪽 엉덩이께부터를 모두 절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랭보는 수술 이후에 의족을 착용하길 원했고 실제로 그에게 맞는 의족이 제작되어 오기도 했지만, 곧 병세가 악화되어 실제로는 한 번도 착용해보지는 못했다고 한다.[12] 원문 "La vie est la farce à mener par tous."[13] 원문 "Je me crois en enfer, donc j'y suis."[14] 해당 문단은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북피아판의 김재욱 역자 해설을 참조하였다.[15] Voyant, 투시자라고도 번역.[16] 1858.6.15~1875.12.15[17] 랭보가 유일하게 출판한 시집인 <Une saison en enfer>와 동명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