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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ביתא ישראלBeta Israel 또는 Ethiopian Jews
아프리카의 베타 이스라엘 또는 에티오피아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흑인 유대인. 이스라엘에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대부분이 이스라엘에 살며 에티오피아와 미국에도 살고 있다. 전세계에 17만 명이 있는데 이스라엘에 약 16만 명, 에티오피아에 약 1천 명이 산다. 미국에 거주하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유학생이나 자영업자 위주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들과 별개로 에티오피아 본토에는 영국령 남예멘에서 건너와 상공업 및 광업에 투자한 소규모의 예멘 유대인 공동체도 존재한다.[1]
에리트레아에서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과 이탈리아 유대인들과 예멘 유대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지만 아라비아반도의 반유대주의 폭동과 멩기스투 공산정권의 국유화 정책 및 에티오피아 내전과 에리트레아 전쟁이 유대인들의 의식주에 매우 큰 타격을 주면서 예멘 유대인들과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1948년부터 1990년대까지 이스라엘 본토로 탈출하는 솔로몬 작전에 참가하여 이스라엘 본토에 재정착했고 재산이 넉넉한 유대인들(이탈리아 유대인들 90%+예멘 유대인들 10%)은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사비를 털어서 북아메리카와 서유럽으로 이민했으며 오늘날의 에리트레아에는 이스라엘 외교관들과 이스라엘 상인들을 제외하고 유대인들이 없다.
간혹 팔라샤(Falasha)라고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는 15세기 즈음에도 쓰인 말로 에티오피아 제국의 예스하크(ይስሐቅ / Yǝsḥaq) 황제가 정복지에서 비개종 유대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며 '땅없는, '방랑자', '이방인'이란 비하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2]
2. 역사
2.1.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유래
전승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시조는 세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만나 동침한 뒤 임신하여 낳은 메넬리크 1세다. 메넬리크 1세가 이후 장성하여 아버지를 찾아갔고구약성서 열왕기 상권 10장 1절에 "세바라는 곳에 여왕이 있었는데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려고 아주 어려운 문제를 준비하여 방문 온 일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일단 이러한 내용은 사실적인 근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설화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관련한 기록은 서기 4세기 이후부터 등장하지만 에티오피아 제국 헌법은 구약에 나온 설명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 메넬리크 1세부터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1892-1975)까지 왕통이 연면했음을 규정했다.
이들의 유래에 관해서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 현대 학설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고대 유대인설로서 기원전 720년경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기원전 587년 경 유다 왕국이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면서 도망친 유대인들이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현재의 예멘에 해당하는 사바 왕국에 거주하다가 기원후 3세기 즈음에 힘야르인들에 의해 사바 왕국이 몰락하자 홍해를 건너 에티오피아에 정착했다는 이론이며 또 다른 이론은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에티오피아 기독교 분파 중 일부가 구약성경 관습을 받아들여 스스로를 유대인이라고 지칭하면서 민족 집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유전자 조사를 통해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과 예멘계 유대인 간 유전적 관계성은 적으면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과 다른 동아프리카 흑인들과 유전적 관계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어[3][4]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것이라면 매우 오래 전에 소규모의 이주가 존재했고 이후 오랜 시간 혼혈이 이루어졌거나 그것이 아니라면 에티오피아인 중 일부가 어느 시점에 스스로 유대인으로 정체화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최신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유전자 중 20%가 청동기 시절 가나안인들과 유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어느 한쪽도 확신할 수 없다. 아무튼 이들은 이르면 4세기, 늦으면 16세기부터 에티오피아에서 거주할 때 다른 흑인들과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며 이스라엘족이라고 자처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희생을 바쳐 제사를 지내는 등 유대인 고유의 풍습을 지켜 왔다.
2.2.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탈출
이스라엘 키리얏 갓, 에티오피아 탈출 도중 사망한 베타 이스라엘의 추모비 |
1970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 영토에서 비유대인 인구의 증가에 불안을 느끼고 유대인 인구의 배가를 위해 세계 각국의 다양한 유대인들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에티오피아 유대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문제는 이를 눈치챈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이 이스라엘의 도움을 받기 위해 걸핏하면 이들을 볼모로 이스라엘에 같잖은 협박을 해 댔다는 것인데 당시 에티오피아가 위낙 돈이 없던 나라였으니 앵벌이 짓을 한 것이다. 이에 이스라엘 정부는 외무부와 이스라엘군, 모사드, 신 베트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조지 H. W. 부시의 협조를 받아[5] 탈출 작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1984년 8천명을 탈출시킨 모세 작전을 시작으로 2013년까지 총 9만 명을 여덟 차례에 걸쳐[6] 이스라엘로 탈출시켰다.[7][8] 그리고 직접 정부 관계자(이스라엘 대통령과 국무총리 및 장차관과 국과장)들이 마중나가 따뜻하게 환영하면서 영웅으로 대접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거주하던 마을은 그들의 독특한 문화 덕분에 온 세계에 관광지로 유명했지만 유대인들이 전부 떠나 버린 뒤에는 거의 그냥 폐허로 전락했다(…). 그래도 에티오피아에 남은 유대인 가운데 에티오피아 국민으로서 눌러앉은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하는데 친족들의 분쟁으로 격분해서 남은 이도 있고 에티오피아 본토에서 예전처럼 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서 남은 이도 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다른 세계의 유대인 네트워크로부터 고립된 상태에서 오랫동안 살아 왔으므로 이스라엘 사회에 통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말도 피부색도 다른 그들은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유무형의 차별을 받게 되었다.[9]
2.2.1. 베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이주한 이유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전승에 따르면 4세기경 에티오피아(당시는 악숨 왕국)가 기독교로 개종할 때 유대인은 동참하지 않고 북서부 산악지대에 시미엔 왕국이라는 독립 왕국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유대인 왕국은 1270년 성립한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와 장기간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10] 전쟁은 일진일퇴를 반복했지만 점점 솔로몬 왕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며 1627년 수시니오스 1세(Susenyos I)에 의해 끝내 완전히 멸망했다. 이렇게 솔로몬 왕조가 유대인 왕국을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유대인은 강제개종 및 언어 사용 금지 등 탄압을 겪었으며 토지 소유권도 박탈당했는데 15세기 초 예샤크 황제 시절과 달리 이번에는 개종 유대인마저 토지 소유권을 부정당했다.그러나 이런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바로 몰락한 것은 아니었으며 수공업을 바탕으로 다시 번성했다. 비록 과장되긴 했지만 17세기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유럽 여행자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유대인은 10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유대인을 결정적으로 몰락시킨 것은 판관기[11]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 역사에서 손꼽히는 대혼란이었다. 원래 상공업을 상대적으로 천시한 에티오피아의 사회적 맥락에서 유대인의 지위는 기독교도보다 낮았지만 지방을 제어하던 중앙정부의 영향력마저 사라지자 거칠 것 없어진 지방 영주들은 유대인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는데 이는 에티오피아 제국으로 통일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에티오피아 통일 이후 유대인의 생활조건은 개선되었지만 에티오피아를 점령한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1938년 제정한 본국의 인종법을 식민지에도 그대로 적용하여 에티오피아 유대인을 탄압했다.
1941년 에티오피아가 해방되고 1961년 에티오피아 제국이 이스라엘을 인정했지만 에티오피아 근대화 실패와 반유대주의 폭력 때문에 유대인의 빈곤은 끝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제국은 외국(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이스라엘)의 원조를 바탕으로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지만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근대화의 낙수효과를 누릴 자그마한 기회조차 없었으며 1974년 집권한 멩기스투의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은 봉건제도와 신분제를 폐지했지만 소련을 본받아 공산주의식 신반유대주의를 수용하면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정책들을 펼쳤다. 따라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에티오피아 사회 그 자체에 불신과 불만을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도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처음부터 호의적으로 받아주진 않았다. 이스라엘 정부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정체성에 대하여 정확한 정보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ODA를 명목으로 에티오피아에 파견한 이스라엘 관료(외교관, 공작원, 기술자, 장교단)들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다양한 현장을 시찰하거나 수많은 자료를 수집하면서 상세하게 조사했다. 당시 그들의 주선으로 국비유학한 에티오피아 유대인 청소년들은 편법으로 이스라엘 국민이 되었고 에티오피아와 이스라엘을 드나들면서 에티오피아와 이스라엘을 연결하는 음지의 협력자로 변신했는데 예멘 유대인들과 의기투합하여 고향의 동포들을 설득하면서 이스라엘 국내의 여론을 움직였다. 때마침 미국 유대인들도 하일레 셀라시에 재위기 에티오피아 제국의 가뭄과 멩기스투 재임기 공산정권의 출현을 계기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하면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어렴풋이 파악했으며 마지막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푸대접한 골다 메이어가 총리직을 사임했다.
골다 메이어의 사임에 때맞춰 이스라엘 관료가 보낸 정보,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압력과 미국 유대인의 로비가 이스라엘 국회로 한꺼번에 들어왔으니 이스라엘 총리들(이츠하크 라빈, 메나헴 베긴, 시몬 페레스)과 국회의장들(이스라엘 예샤야후, 슐로모 힐렐, 이츠하크 샤미르)은 그들의 열망에 진심으로 감동했고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탈출 작전을 본격적으로 실행했다. 이런 과정으로 이스라엘에 귀순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최고위층 관료들의 열렬한 환영에 깜짝 놀랐으며 매우 극진한 대접에 진심으로 감격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한 상호간의 신뢰와 교감을 바탕으로 역사적인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한국에서 홀대받는 사할린 한인의 처지와 매우 다르다고 볼 수가 있겠다.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단순히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국민이 된 것이 절대로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에티오피아에서 벌어지는 박해 때문에 에티오피아 사회 자체를 증오하였으므로 단순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탈출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당대에는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의 알선으로 아디스아바바의 외교공관들을 통해서 미국과 이탈리아 및 소련과 동독으로 떠날 기회가 열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정부도 순전히 정치적인 관점과 문화적인 동기를 바탕으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모셔온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측에서 3D업종의 일꾼들을 원했다면 거액의 국비를 들여서 데려올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그들이 이스라엘에 귀순한 시기에는 하필이면 이스라엘 경제가 매우 지독한 불경기에 시달렸는데 특히 1980년대에 재정착한 사람들은 새옹지마의 심정으로 지중해 다이빙을 고려했을 정도였고 3D업종 취직조차 사치였을 만큼 전국민의 취업이 어려웠다. 게다가 이스라엘 노동법은 자국민에 대하여 서유럽 수준의 사회권을 보장하기 때문에 외국인 노동자가 아니라 자국민 신분으로 엄청난 특혜를 누리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국민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남한에 귀순한 북한이탈주민과 다를 바가 없다.
의식주의 관점에서 단순하게 고려한들 에티오피아 본토에서 머무르는 것보다 이스라엘 본토에서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할 수 있는데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에티오피아는 전국의 절반이 20년간 반란군과 싸우는 격전지로 변했고 경제는 소련과 동독의 원조에 매달렸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관료들은 에티오피아의 두메산골에서 농림업과 수공업에 의존하는 그들의 의식주에 대하여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고 이스라엘로 이주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은 무형의 차별이 있어도 이스라엘 본토에서 사는 것이 생계와 교육과 출세에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비록 오늘날 에티오피아는 괄목할 정도의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빈국이며 교육수준도 낮은 반면[12] 이스라엘에서는 상대적으로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에티오피아 본토의 부유층보다도 잘 살고 있고 교육수준도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13]
2.3. 에티오피아 유대인의 현재
이스라엘 네티봇, 베타 이스라엘을 위한 시나고그 |
1997년에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헌혈하면 정부가 그 피를 전량 폐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항의하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인종차별이 아니냐며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였지만 이스라엘 보건부의 해명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출신자들 중에 에이즈 환자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에이즈 감염율과 보건 실태를 감안하면 틀린 말이 아니라 일단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시위도 사그라들기는 했지만 평소 이스라엘 사회에서 차별받고던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느낀 좌절감과 박탈감을 표출하며 각종 사회 운동에 대거 참여했다. 지금은 에이즈가 확산된 후에 에티오피아에 산 적이 있는 경우 헌혈을 배제하는데 '영유아 시기에 이스라엘로 입국한 경우'까지 에이즈 음성으로 판정되어도 헌혈 배제 대상으로 분류해 인종차별 논란이 남았다. 당연히 이스라엘 보건부와 이스라엘 국회에서 에이즈 문제로 얼굴을 붉히는 일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2013년에는 에티오피아 유대인 여성이 미스 이스라엘에 뽑혀 극심한 반대에 시달리기도 했는데 국외에서는 미스 이스라엘 역사 최고의 몸매와 미모를 가진 여성이라는 평을 받았지만 그놈의 피부색은 여전히 벽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기실 이스라엘 시민사회에서 1960년대에야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예멘 유대인들의 도움으로 이스라엘 국민으로 활보하기 시작했고 1970년대에도 이스라엘 본토에서 흑인 유대인은 낯선 존재였다. 흑인 유대인의 역사에 대하여 이스라엘 학교에서 상세하게 가르친 것도 메나헴 베긴 정권이 들어선 시점부터였다.
이들과 외모, 언어, 혈통이 비슷한 에리트레아 출신 기독교인 난민들이 이스라엘로 대거 밀입국하면서[14]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베타 이스라엘이고 누가 에리트레아 난민인지 혼동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국익의 관점에서 현실적인 이유로 에티오피아의 원수인 에리트레아 난민의 재정착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3. 매체에서
2019년에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The Red Sea Diving Resort>라는 영화에서 이들의 탈출 작전을 다뤘다.[15]## 캡틴 아메리카로 유명한 크리스 에반스가 탈출팀의 리더인 아리 역을 맡은 걸로 유명하나, 영화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나쁘다. 지나칠 정도로 미국인들의 시선에 맞춘, 속되게 말해서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단 평이 다수다.프랑스-이스라엘 합작 영화인 살아남아 출세하라[16]가 베타 이스라엘을 다룬 작품들 중, 가장 좋은 평을 받는다. 2005년 작인 이 영화는 당대의 경험담을 압축해서 극본에 반영했으며, 한국에서도 2010년대에 EBS 1TV를 통해서 방영했다.
무화과나무[17]라는 예술영화(2018년 출품)와 장벽을 마주하면서라는 단편영화(2016년 출품)도 베타 이스라엘인의 삶을 잘 대변했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는다.
세계대전 Z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파트에서 등장한다. 좀비사태를 피해 이스라엘로 피난 온 팔레스타인인 화자가[18] 베타 이스라엘인 군인을 목격하고는, 유대인들 중에서 흑인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한다.
어린이 교육 만화인 보물찾기 시리즈의 이스라엘편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4. 관련자료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에 대한 더 많은 자료는 아셰르 나임(이스라엘 외무부의 국가공무원)의[19] 회고록(잃어버린 부족 구하기)에 나와 있으니 시군구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더 많은 정보를 알 수가 있다. 1990년대 이후의 에티오피아 유대인 출신 이스라엘 지식인들의 입장은 벨라이네쉬 제바디아(에티오피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와 체카 멜라쿠(이스라엘 방송공단의 라디오 방송국장)와 쉴로모 몰라(이스라엘 국회의원)의 기자회견 전문에 나타나 있고 이스라엘 국민으로서 평생을 살아가는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의식주에 대하여 시청각 자료는 이스라엘 공보청 홈피나 유튜브나 플리커에 있다.[1] 2020년대 들어 에티오피아 본토에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인구는 점점 감소하고 있다.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의료 인프라가 빈약한 오지에서 살다가 자연사하는 이들이 많고 30대 이하의 사람들은 이스라엘로 이주하는 이들이 많다.[2] 수단에서는 똑같은 단어가 바까라족 유목민을 대상으로 쓰인다. 물론 당사자들이 들으면 안 좋아하는 말이다.[3] 베타 이스라엘 남성 인구의 41%가 하플로그룹 A(M91)을 보유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해당 유전자는 에티오피아 오모 강 유역 주민들과 나일로트 제족 및 남아프리카의 코이산어족 사이에서 흔한 유전자다. 비교하자면 남수단 내 딩카족 중 62%, 수단 공화국의 누비아인 중 46%, 코이산족 중 44%, 남수단 누에르족 33%, 수단 다르푸르의 푸르족 31%, 케냐의 마사이족 27%, 에티오피아 암하라인 16%, 하우사족 13%, 풀라족 12%, 에티오피아 오로모인 10%, 이집트인 3%가 A (M91) 유전자를 보유한 것으로 나왔다. 하플로그룹 A (M91)은 Y-DNA 유전자로 남성에게만 유전된다.[4] 또한 이스라엘 남성 중 약 18%가 (마찬가지로 Y-DNA) 하플로그룹 E-P2 유전자를 보유한 것으로 나왔는데 해당 유전자는 에티오피아 서남부의 오모어군(Omotic) 부족들에게서 주로 나타나는 유전자다.[5] 당시 그는 미국 하원 국회의원→유엔 주재 미국 대사→중앙정보국장→미국 부통령→미국 대통령을 연속으로 재임했기 때문에 중국의 덩샤오핑에 버금가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발휘하여 미국 국무부와 미국 국방부 및 미국 연방의회와 CIA로 하여금 이스라엘 정부에 협력하라고 지시했다.[6] 대규모 탈출 작전 4회+소규모 탈출 작전 4회[7] 이주 자체는 1948년 이스라엘 독립 당시부터 이루어졌으나 1979년까지 이주한 사람은 500명도 되지 않았다. 대대적인 이주는 이 모세 작전이 시작이다.[8] 물론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은 공짜로 이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으며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한 재정과 무기를 원조받았는데 이 원조물자는 공산정권의 폭정에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를 일으킨 반군 진압에 사용되었다.[9] 이스라엘 유대인 공동체 내부의 인종차별은 미국과 프랑스의 인종차별과 달리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대립처럼 유대교 분파의 교리에 따르는 종파주의 차별의 색채를 띠고 있다. 실제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이 따르는 유대교 분파는 아슈케나짐/미즈라힘/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따르는 유대교 분파와 교리가 다르다. 당연히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이 따르는 유대교 분파도 세파르딤 유대인들이 따르는 유대교 분파 및 미즈라힘 유대인들이 따르는 유대교 분파와 교리가 다르지만 상호 교류의 역사가 깊어 차이가 크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고대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한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정치인들이 자국민으로 인정하는 결단을 내렸지만 한족과 회족의 문화에 동화한 중국계 유대인은 유럽 문화권의 유대인들(아슈케나짐/미즈라힘/세파르딤)과 학연/지연/혈연으로 이어진 연고자들만 자국민으로 인정했을 뿐이다.[10] 중요한 것은 이때 에티오피아에 유대인이 많긴 했어도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 결집하여 행동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샤크 황제(1414~1429)는 유대인 왕국을 침공하여 병합하고 유대교를 억눌렀으며 비개종 유대인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했지만 그런 그와 동맹을 맺은 유대인 정치체들도 있었다.[11] 성경의 판관기에서 따 온 용어가 맞다. 그으즈어는 저머너 머사핀트(ዘመነ መሳፍንት zamana masāfint)이다.[12]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초등학교 입학률이 85%, 중학교 입학률이 31%이며 2018년 기준으로 대학교 입학률은 10%다.[13] 1991년 시점에서 에티오피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의 외교관들은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 가운데 에티오피아 본토에서 고등학교와 전문대학과 대학교를 졸업한 고학력자들이 희귀했다고 회고했는데 에티오피아 정부의 고위급 공직자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이스라엘 본토의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유학을 보내려고 비자를 신청했다 카더라. 에티오피아의 고등교육은 최고 명문대인 아디스아바바 대학교조차 교육의 질이 열악하기 때문에 선진국의 명문대에서 유학한 청년들을 연방정부의 요직으로 중용하는 현실이다. #[14] 에리트레아 출신 무슬림 난민들은 이스라엘보다는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한다.[15] 정확히는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북수단을 경유하여 탈출한 형제 작전을 다뤘다.[16]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수단을 경유하여 탈출한 모세 작전과 그 이후의 일상 생활을 깊이 있게 다루었으며, 라두 미하일레아누 감독이 제작했다.[17] 1991년에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을 경유하여 탈출한 솔로몬 작전과 그 이후의 일상 생활을 깊이있게 다룬 프랑스-이스라엘 합작 영화.로서 알라모르크 다비디앙 감독이 제작했다.[18] 본인은 아랍 민족주의자라 이스라엘 피난에 부정적이었으나,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끌려온 케이스라 밝힌다.[19] 무솔리니 시절의 이탈리아령 리비아에서 태어난 세파르딤 유대인이다. 리비아에서 발생한 1945년 반유대 폭동과 1948년 반유대 폭동에 격분해 제1차 중동전쟁에 참전했으며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를 졸업하고, 이스라엘 외무부 직원으로 일본/케냐/미국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주핀란드 이스라엘 대사→주에티오피아 이스라엘 대사→주유엔 이스라엘 대사→주한 이스라엘 대사를 지냈으며 러시아계 유대인 100만명의 탈출과 에티오피아 유대인 10만명의 탈출에 결정적으로 관여했고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현실을 왜곡하는 유엔 총회 결의안 3379호를 뒤엎고 이스라엘 국가의 화평론을 반영한 유엔 총회 결의안 4686호로 대체하는 업적을 남겼다. 이스라엘 외무부의 에티오피아 소조(小組)에 참가하면서 멜레스 제나위가 이끄는 에티오피아 신정부와 이스라엘 국가의 공수동맹(攻守同盟)에 관여했으며, 정년퇴직한 뒤에도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의 출세를 후원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통과 일본통으로 유명했고 나중에는 에티오피아통과 한국통으로 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