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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드 살

성 프란시스 드 살에서 넘어옴
C.O., O.M.[1]
프랑수아 드 살
François de Sales
파일:살레시오.jpg
<colbgcolor=#343c4b,#343c4b><colcolor=#dcd3b5,#dcd3b5> 출생 <colbgcolor=#ffffff,#191919>1567년 8월 21일
신성 로마 제국
사보이아 공국 안시 살 궁전
사망 1622년 12월 28일 (향년 55세)
프랑스 왕국 리옹
학력 클레르몽 콜레주[2] (수사학, 인문학 / 이수)
파도바 대학교 (법학, 신학 / 학사)
파도바 대학교 (법학, 신학 / 석사)
파도바 대학교 (법학, 신학 / 박사)
직업 성직자(주교), 작가
종교 가톨릭
소속 오라토리오회, 미님회[3]
사제 수품 1593년 12월 18일
주교 수품 1602년 7월 5일 보좌 주교 임명
1602년 12월 8일 교구장 임명 및 주교 수품
재임 기간 제45대 제네바교구장 주교
1602년 12월 8일~1622년 12월 28일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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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가톨릭 제네바교구장
44대 45대 46대
클로드 드 그라니에 (1578년 12월 15일~1602년 9월 17일) 프랑수아 드 살 (1602년 12월 8일~1622년 12월 28일) 장 프랑수아 드 살 (1622년 12월 28일~1635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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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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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43c4b,#343c4b><colcolor=#dcd3b5,#dcd3b5> 칭호 <colbgcolor=#ffffff,#191919>교회학자(너그러운 박사)[4]
성인명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언어별 명칭]
라틴어: 프란치스쿠스 살레시우스
(Franciscus Salesius)
프랑스어: 프랑수아 드 살
(François de Sales)
이탈리아어: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
(Francesco di Sales)
독일어: 프란츠 폰 잘레스
(Franz von Sales)
스페인어: 프란시스코 데 살리스
(Francisco de Sales)
포르투갈어: 프란시스코 데 살리쉬
(Francisco de Sales)
영어: 프란시스 드 살
(Francis de Sales)
네덜란드어: 프란시스쿠스 판 살레스
(Franciscus van Sales)
폴란드어: 프란치셰크 살레지
(Franciszek Salezy)
일본어: 후란시스코 사레지오
(フランシスコ・サレジオ)
시복 1661년 1월 8일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주례
시성 1665년 4월 8일
교황령 성 베드로 대성당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주례
상징물 예수 성심, 가시 면류관,
축일 1월 24일[5]
12월 12일[6]
수호 작가, 기자, 청각장애인
}}}}}}}}} ||
문장
파일:살레시오주교문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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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으리라)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인생의 전환점2.3. 사보이아로 귀향2.4. 사제 시절2.5. 제네바교구 주교 시절2.6. 죽음과 기적
2.6.1. 드 살의 심장
3. 영향
3.1. 사후 공경3.2. 그의 이름을 딴 장소들
4. 어록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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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부아[7]주교이자 작가.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프랑수아 드 살이지만, 한국에서는 가톨릭교회 측에서 표기하는 이름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로 익히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어로 발음하면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Francesco di Sales)가 된다.

그는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인문학신학 지식이 풍부했다. 또한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을 지녀 성별과 계급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예의를 갖춤과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 그리고 곤경에 처한 여성을 성심성의껏 도와주어 훗날 신사 성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차분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달변가였으며 뛰어난 작문 능력까지 지니고 있어 영적 지도와 형성에 관한 다양한 글들을 저술했는데, 대표적으로 <신심 생활 입문(Introduction à la vie dévote)>이 있다.

가톨릭에선 성인이자 교회학자로서 공경하며, 성공회에서도 성인으로 여긴다. 다만 축일이 다른데, 가톨릭과 잉글랜드 성공회에서는 1월 24일, 미국 성공회에서는 12월 12일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프랑수아 드 살[8]1567년 8월 21일사보이아 공국의 유복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역의 영주인 프랑수아 드 살[9], 어머니는 당시 가장 전도유망한 판사이자 발리에르 지역과 부아시 지역의 영주인 멜키오르 드 시오나즈의 외동딸 프랑수아즈 드 시오나즈다.

그의 아버지는 6남매 중 장남이었던 드 살을 최고의 판사로 키우고 싶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명석했던 드 살은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다양한 교육들을 받았으며 8살 때는 안시 지역의 카퓌생 콜레주[10]에 다녔다.

2.2. 인생의 전환점

파일:프랑수아드살12살.png
12살 때의 프랑수아 드 살
1578년 드 살은 파리에 위치한 예수회중등교육기관이었던 클레르몽 콜레주에서 수사학인문학을 공부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승마, 펜싱, 사교춤 등도 배웠다. 당시 주변 인물들의 말에 따르면, 드 살은 똑똑하고 호감 있게 생긴 인물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항상 침착하고 과묵하며 내성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사람들과는 잘 어울렸다고 한다.

1586년 드 살은 예정설에 관한 토론에 참여했고, 토론이 끝난 후 그는 자신이 죽으면 설마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묘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 두려움은 같은 해 12월까지 지속되었고 이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그는 몸져눕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1587년 1월, 그는 결국 파리 생에티엔데그레의 오래된 성당을 찾아 성모상 앞에서 메모라레[11]를 읊으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그 순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겠노라 마음을 먹어 곧바로 미님회라는 수도회에 들어갔다.[12]

클레르몽 콜레주를 졸업한 그는 파도바 대학교에 입학해 그곳에서 법학신학을 공부했다. 파도바에서 그는 당시 12살이었던 남동생 갈루아 드 살과 함께 생활했고, 자신의 영적 지도자를 예수회 사제인 안토니오 포세비노로 택했다.

2.3. 사보이아로 귀향

1592년 드 살은 법학신학 전공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는 우선 안코나의 로레토 지역에 있는 산타 카사 대성당으로 순례길에 올랐다. 그곳을 방문한 뒤 그는 사보이아로 돌아갔다.

고향에 돌아온 드 살은 장남이자 가문 계승자로서 일단은 빌레로제 지역의 영주 지위를 받았으며, 샹베리 지역의 의회에서는 그가 변호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드 살의 아버지는 그동안 자신의 아들을 위하여 국회의원 자리를 미리 확보하고 부유한 귀족 집안의 영애를 신붓감으로 점찍는 등 이리저리 물밑 작업을 해 왔는데, 정작 이러한 혜택을 받아야 할 당사자 드 살은 이를 거부하며 사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들이 정계 및 법조계에 진출하여 승승장구하기를 바랐던 아버지는 이에 대해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한편 드 살의 사촌 형이자 제네바교구 소속 성당의 주임신부였던 루이 드 살은 그의 굳센 의지를 알아채고, 당시 교구의 주교였던 클로드 드 그라니에에게 그를 주임신부로 임명할 것을 부탁했다. 덕분에 드 살은 1593년, 사촌 형이 가지고 있던 직책을 양도받음으로써 사제로 임명되었다.

2.4. 사제 시절

당시 가톨릭을 위협했던 칼뱅주의자들이 제네바에서 군림하고 있었다.[13] 그로 인해 제네바교구의 주교는 남쪽으로 약 32km 떨어진 안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드 살은 안시 대성당을 포함한 교구 내의 모든 교회를 찾아가 강론을 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의 목소리는 굵고 톤이 풍부했으며, 다소 느릿느릿하고도 신중한 말투를 지녔다고 한다. 아울러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단어들을 사용하며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은 피하고 보편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미덕, 의무사항 등의 주제를 중심으로 짧고 깔끔한 연설을 구사했다고 한다. 당시 드 살은 비록 27세에 불과했지만, 그의 노력과 유능함에 감탄한 안시 대성당의 사제단들과 신자들은 그를 존경했으며, 그 결과 드 살의 입지는 더욱 높아졌다.

1594년,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스위스인이 오랫동안 소유하다가 사보이아 공국으로 편입된지 얼마 안 된 샤블레(Chablais)[14]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제네바교구 주교에게 요청했다. 혼란스러운 국면에 칼뱅주의자들이 득세한 샤블레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은 누가 봐도 어렵고 위험했지만, 이 일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드 살밖에 없었다. 그는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사촌 형 루이와 함께 여정을 떠났다. 그들은 알랭주 요새를 근거지로 삼고 대부분 거주민들이 칼뱅주의자들인 토농레뱅 지역을 중심으로 돌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았다. 해당 지역의 목사들은 드 살을 주술사라며 비난하며 칼뱅파 신자들을 선동했고, 이로 인해 그는 매번 위협을 받았다. 드 살은 토농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어느 과부의 집에 하숙했는데, 한번은 무장한 남자들이 들이닥치자 그녀가 드 살을 숨겨 준 일도 있었다. 한편, 드 살의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걱정되어 그에게 린넨과 돈을 보냈는데, 드 살은 그것들을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며 선교 활동을 펼쳤다. 그의 종교적 가르침은 개신교 신자들로부터 들키지 않고자 개별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틈틈이 소책자들을 썼으며 이것들은 나중에 수집되어 <논쟁(Les controvers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샤블레 선교 활동은 진전이 이루어졌고 무려 7만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파일:프랑수아드살과앙리4세.jpg
퐁텐블로 궁전에 앙리 4세의 앞에서 설교하는 성 프랑수아 드 살 (Saint François-de-Sales prêchant à Fontainebleau devant Henri IV)
화가 미상, 베지에 페니탕 블뢰 성당
1599년, 드 살은 제네바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후 그는 외교 사절로서 로마파리를 오가며 교황 클레멘스 8세프랑스 국왕 앙리 4세 간의 동맹을 맺도록 주선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앙리 4세는 “제네바에서 오신 이분은 독실하고 학식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독실할 뿐만 아니라 신사 그 자체입니다. 매우 드문 조합이죠”라며 드 살을 격찬했다.

2.5. 제네바교구 주교 시절

1602년 클로드 드 그라니에 주교가 세상을 떠나자, 드 살은 제네바교구주교로 서임되었다. 그의 교구는 효율적인 조직 시스템과 열성적인 성직자, 그리고 신실한 평신도들로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졌는데, 이는 드 살이 주교로서 일군 업적 중 하나다.

드 살은 자신의 교구에서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는 데에 적극적이었던 카푸친 수도회와 긴밀히 협력했다. 카푸친회 수사들은 소규모인 자신들의 수도회를 지원한 드 살에게 감사함을 표하고자 1617년 일종의 명예 수도자 직위를 부여했다.

어느 날, 드 살이 에비앙에 있을 때였다. 드 살의 눈앞에 갑자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때 순교를 갈망했던 것처럼, 그대도 순교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허나 나처럼 그대도 순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 자신만의 순교적 수단이 되어야 하느니라.”
이 일을 겪은 후, 드 살은 자신의 마음을 다잡은 뒤 더욱 독실한 삶을 실천했다. 주교로 지내는 동안 그는 가난한 사람의 선량한 친구이자 놀라울 정도로 강한 인내심과 온화한 성품, 그리고 해박한 지식과 함께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 탁월한 강론 능력을 지닌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드 살은 신앙 생활과 더불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교양을 다룬 작가로도 활동했는데, 그의 저서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바로 <신심 생활 입문>이다. 종교 및 교양 서적들은 주로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을 위하여 쓰였던 당시로선 흔치 않게, 이 책은 평신도들과 일반 여성들을 위하여 쓰였다. 그는 또한 신비주의 작품인 <신애론(Traité de l'Amour de Dieu)>[15]을 남겼다.
파일:방문수녀회.jpg
성녀 잔 드 샹탈에게 방문 수녀회의 규칙서를 주는 성 프랑수아 드 살 (Saint François de Sales donnant à sainte Jeanne de Chantal la règle de l'ordre de la Visitation)
노엘 알레 作, 생루이앙릴 성당
1610년 6월 6일, 드 살은 안시를 거점지로 삼아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 수녀[16]와 함께 기존 수도회의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젊은 수녀들, 병약한 신체나 나이로 인해 수도회에서 거절당한 여성들, 그리고 생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과부들을 도와주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를 설립했다. 그는 해당 수녀회에 일원이 된 여성들이 비교적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하고 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기존 수도회에서 강조했던 영구적인 금욕과 장기적인 금식을 없애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도를 시행했다.

2.6. 죽음과 기적

파일:드살의무덤.jpg
프랑수아 드 살의 묘소
안시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대성당
1622년 12월, 프랑스 왕국 국왕 루이 13세를 만나기 위해 아비뇽으로 가던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드 살에게 동행을 부탁했다. 자신의 건강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던 드 살이었지만, 고통을 참고 곧바로 아비뇽으로 향했다.[17] 한겨울의 기나긴 여정 도중 안시에 들른 드 살은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에 이번이 인생 마지막 여정이 되리라고 짐작했는지 자신의 모든 소유물들을 안시에 둔 채 다시 국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아비뇽에 도착한 드 살은 매우 분주했는데, 그는 국왕과 공작, 그리고 주변 귀족들은 물론 아비뇽의 여러 그리스도교 단체들에게 설교와 조언을 했다.

그렇게 아비뇽에서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건강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드 살은 자신의 거처로 가지 않고 리옹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건물에 있는 정원사의 오두막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는 여전히 고통을 참으면서 꾸준히 기도를 하고 수녀들을 가르쳤다[18]. 사도 요한의 축일인 12월 27일이 되자 그는 수녀회 성당에서 설교를 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나 이내 몸을 추스른 뒤 다시 설교를 이어 갔다. 하지만 설교를 마치자마자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는 드 살은 주변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정원사의 집으로 가 결국 침대에 몸져누웠다. 그 다음 날인 12월 28일 임종을 앞둔 그는 “저는 주님께 모든 소망을 두었고, 주님께선 저의 염원을 들어주어 저를 고통의 구렁텅이와 죄악의 늪으로부터 꺼내 주실 겁니다.”라고 반복하다가 갑자기 예수의 이름을 부르더니 끝내 세상을 떠났다.

한편 같은 시간, 그르노블에 머물고 있던 잔 프랑수아즈 드 샹탈 수녀는 드 살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기도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 목소리를 듣고 처음에 놀랐으나 이내 잘못 들은 것이라고 여기고선 기도를 계속했다. 며칠 뒤, 드 살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드 샹탈 수녀는 그 목소리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으며 몇 날 며칠을 울었다.

12월 29일 드 살의 죽음을 알게 된 리옹의 주민들이 정원사의 집으로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그의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자 몰려들어 의사들이 그의 유해를 밖으로 꺼내느라 애를 먹었다. 의사들이 부검을 하자 드 살의 쓸개에서 33개의 담석이 발견되었다. 수녀들은 그가 그동안 아픈 티를 내지 않아 이렇게까지 몸 상태가 안 좋을 줄 몰랐다고 말하자 의사들은 놀랐다.

드 살의 유해는 1623년 1월 24일 안시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성당에서 안장되었고, 그의 유해가 입고 있던 옷은 평소 그를 깊이 공경하던 리옹 주민들이 조각낸 후 서로 나누어 가져갔다. 아울러 그의 심장과 안시에 두고 간 유품들은 리옹 주민들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리옹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건물에 보관되었다. 그의 유해와 유품들이 보관하고 있던 장소에서 다양한 기적 사례들이 보고되었다.

이에 1632년 교황청의 관계자들이 해당 기적들을 조사하고자 수녀회 성당을 찾았고, 우선 그가 들어 있는 관을 열어 보기로 했다. 관을 여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교황청 관계자들과 수녀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바로 관 속에 누워 있는 드 살의 유해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전혀 부패되지 않아 마치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손과 팔은 여전히 탄력이 있었으며 관 내부에서는 기분 좋은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안시의 주민들은 성당 앞에서 줄을 이루었으며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드 살의 유해를 보고 경탄을 했다. 한편 경외심을 느낀 교황청 관계자들은 일단 자신들을 포함한 그 누구도 유해를 만질 수 없도록 제한 조치를 내렸다. 시간이 지나고 모두가 떠난 그날 밤, 그르노블에서 안시로 막 도착한 드 샹탈 수녀는 곧바로 그의 유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동안의 감사함과 반가움의 표시로 그의 손을 잡고 싶었으나 접촉 제한 조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다음 날 교황청 관계자들은 드 살과 드 샹탈 수녀의 특별한 관계를 알게 되어 그녀에 한해서만 접촉 제한 조치를 풀어 주었다. 이에 드 샹탈 수녀는 자신의 은인이자 친구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축복의 의미로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때 그녀가 잡고 있던 드 살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녀의 손과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고, 이 장면을 목격한 드 샹탈 수녀와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수녀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6.1. 드 살의 심장

파일:드살의심장.jpg
드 살의 심장이 들어 있는 황금 보관함
의사들의 부검을 통해 꺼낸 드 살의 심장은 처음엔 리옹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 성당에서 보관하기로 했다. 드 살의 심장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부패되지 않고 혈색을 유지했으며, 그의 심장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여러 기적들을 선사했다. 대표적으로 드 살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의 심장을 보호하기 위한 황금 보관함을 기부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13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리옹의 방문 수녀회 성당을 방문했는데, 그곳에 놓인 그의 심장을 가까이 보자 기적적으로 건강이 호전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프랑스 혁명이 발발해 혁명 주동자들이 성당과 수도회 건물들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다니자 리옹에 있는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의 수녀들은 그의 심장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 이를 우선 만토바로 옮겼다. 이후 심장은 수녀들과 함께 티롤 지방을 전전하다가 보헤미아 지방까지 이르렀으며, 1801년이 되어서야 베네치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후 112년이 지난 1913년에 교황 비오 10세가 심장을 트레비소의 성모 마리아 방문 수녀회로 이전하도록 지시함으로써 현재까지도 그곳에 남아 있다.

3. 영향

3.1. 사후 공경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드문 영성”앙리 4세
사부아의 보석” – 교황 바오로 6세
“하느님의 사랑을 잘 아는 박사”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위대한 스승” – 교황 베네딕토 16세
“그의 융통성과 선견지명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 교황 프란치스코
드 살은 살아생전뿐만 아니라 사후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그의 제자이자 친구였던 뱅상 드 폴은 드 살의 영성과 작문, 특히 그의 저서 <신심 생활 입문>과 <신애론>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장 외드[19]도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성모 성심을 모범적으로 표현한 드 살의 글들로부터 자신의 신심을 발전시키는 데에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피에르 마리 메르미에[20]는 드 살을 본받아 1838년 프랑수아 드 살 선교회를 설립했고, 루이 브리송[21]은 드 살과 샹탈 수녀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의미로 프랑수아 드 살 수사회와 프랑수아 드 살 수녀회를 창설했다.

조반니 보스코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드 살을 본받아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그의 존경심은 드 살의 라틴어식 이름을 딴 살레시오회를 창설함으로써 발현되었다.[22]

드 살은 1661년 1월 8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복되었는데, 이는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시복식이었다. 그리고 4년 뒤인 1665년 4월 8일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시성되었고, 축일은 그가 안시에 안장된 날인 1월 24일로 지정되었다.

1877년 드 살은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고,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기자수호성인이 되었다. 그는 또한 청각장애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는데, 생전에 청각장애인들에게 설교를 하고자 종교적인 용어들을 수어로 바꾸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3.2. 그의 이름을 딴 장소들

4. 어록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인내해야 합니다.”
“사랑의 척도는 자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과 관계없는 덕() 중에서 먼저 택할 것은 훌륭한 덕이지 남의 이목을 끄는 덕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자기애가 강하면 더욱 상처를 받습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는 척하는 것은 쓸데없는 허세에 불과합니다.”
“분노는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미움으로 변하기 때문에 이를 쉽게 물리칠 방법을 찾기 어렵습니다. 또한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가 잘못된 것인 줄도 모르고 끝없이 그릇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지 말고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찰해야 함에도 섣불리 남을 판단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행위입니다. 판단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락에 너무 빠지지 마십시오. 아무리 건전한 놀이라도 그것에 애착하면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오락을 금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락을 위한 오락이 될 정도로 정신이 팔리거나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질투는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불신과 부정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불완전하고 안정감이 없으며, 신뢰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질투로 사랑을 드러내려는 것은 미련한 짓입니다. 질투가 사랑의 외적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표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의 순수성과 품성을 잴 수 있는 척도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 데서 생기는 반면에 질투는 그 사람을 불신하는 데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기분에 따라 제멋대로 판단하므로 우리가 그 비위를 맞추기는 불가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분노하는 것은 용기 때문이고, 자신이 탐하는 행동은 절약 정신 때문이라 하며, 아부하는 것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마치 벌집을 망가뜨리는 거미와 같은 존재입니다.”

5. 관련 문서



[1] 미님회(Ordo Minimorum) 소속.[2] Collège de Clermont. 1563년에 설립된 예수회 교육 기관으로 현재 프랑스의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인 리세 루이르그랑의 전신이다.[3] 제3회(tertius ordo)로서 소속. 참고로 제3회란 수사 혹은 수녀로서가 아닌, 세속에서 수도회의 정신과 생활 방식에 따른 삶을 사는 일반 신도로서 소속된 것을 일컫는다.[4] Doctor Caritatis[5] 가톨릭, 잉글랜드 성공회 축일.[6] 미국 성공회 축일.[7] 그가 활동했던 사부아 지역은 현재는 프랑스 영토이나 당시에는 현대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의 영토였다. 사보이아 공국은 프랑스어권과 이탈리아어권에 걸쳐 있었으나 1563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이 토리노천도하면서 이탈리아 국가로 완전히 자리잡았다.[8] 본래 ‘국립국어원 고유 명사 지침 5-3 가) 관사나 접두사(예: des, du, la, le, les)는 그 뒤의 이름에 붙여 쓴다' 조항에 따라 ‘드살’이 맞으나, ‘드 살’로 띄어 쓰는 것이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관용적 예외로 인정된다. 이탈리아어 이름은 프란체스코 디 살레스(Francesco di Sales).[9] 결혼 후에는 장인으로부터 부아시 지역을 할양 받고 프랑수아 드 부아시로 개칭했다.[10] 여기서 콜레주(Collège)는 당시의 고등학교를 의미한다.[11] 성모 마리아에게 비는 기도문으로 ‘성 베르나르도의 기도’라고도 불린다.[12] 제3회(tertius ordo)로서 소속. 참고로 제3회란 수사 혹은 수녀로서가 아닌, 세속에서 수도회의 정신과 생활 방식에 따른 삶을 사는 일반 신도로서 소속된 것을 일컫는다.[13] 1526년 제네바 시는 지역을 통치하던 사보이아 가문과 가까운 주교의 지배권을 박탈한 대신 시의회가 출범했고, 1532년 칼뱅주의자들을 포함한 다수 종교개혁 진영의 인물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1535년 가톨릭 미사를 일체 금지하고, 1536년 종교개혁 이념을 공식 채택함으로써 완전히 개신교 지역으로 변모된 상태였다.[14] 현재의 에비앙레뱅 일대.[15]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16] 29살에 사고로 남편을 잃은 과부였으나, 드 살의 설교를 듣고 대단히 감명을 받아 수녀로서의 길을 걸은 인물이다.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로 불린다.[17] 생애를 잘 읽어보았다면 알겠지만 드살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와 가까운 사이였다. 아픈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공작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던 것.[18] 이에 대한 일화로 어느 수녀가 드 살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그는 종이에 큰 글씨로 ‘겸손’이라고 써서 답했다.[19] Jean Eudes. 프랑스의 사제이자 예수와 마리아 신도회의 설립자. 가톨릭은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 한국 가톨릭에서는 성 요한 에우데스로 불린다.[20] Pierre-Marie Mermier, 1790~1862.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프랑스 제2제국의 사제. 자신의 일생 대부분을 안시에서 보냈다.[21] Louis Brisson, 1817~1908. 프랑스의 사제. 가톨릭은 그를 복자로 공경하고 있다.[22] 요한 보스코의 모국은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었고, 드 살의 모국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전신인 사보이아 공국이었다. 요한 보스코는 자연스럽게 모국의 성인인 드 살을 존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