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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군밤의 왕/개변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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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시아2. 유럽
2.1. 프랑스2.2. 러시아 제국 → 소련(소비에트 자유국 연방)2.3. 대영제국2.4. 독일 제국2.5. 오스만 제국 → 이슬람 공화국2.6. 이탈리아 왕국2.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중유럽 합중국2.8. 스페인
3. 아메리카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4.2. 트란스발 공화국4.3.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4.4. 모로코 술탄국4.5. 아샨티(가나)
5. 전세계

1. 아시아

  • 조청일수호조규
    일본이 청과의 조약을 맺을 때 자립국이 아닌 자주국으로써 맺기 위해 조선을 끌어들여 청과 맞서게 하려고 했는데 청, 일본 어느쪽의 원망도 사기 싫었던 귀남이 조선과 일본은 서양 나라와 같은 자주국이되 청은 대국이니 다른 서양 나라와는 달리 같은 자주지국을 거느릴 수 있다고 제안하였고 자존심만 남았지 실력은 아직 없는 3국이 동의하여 서로를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다음 묘사를 보면 청은 조선에 공사를 파견하였고, 청 조정 내에서는 그냥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만족하는 사람 반, 이 겉치레라도 하지 않으면 천조의 천명이 무너질 테니 놔두자는 사람 반이라고 한다.
  •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디즈레일리 내각과의 물밑 협상으로 극동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은 러시아가 이때다 싶어 조선에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황당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런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불어 더비 백작의 폭로로 국내 여론이 들끓어 디즈레일리 내각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러시아 극동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이러다가 조선인의 두만강 월경이 금지되면 그 날로 블라디보스토크 문 닫을 판국이라 북해도 공화국 투자를 알선해서 손해 보는 바를 벌충해주겠다는 귀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개발은행이 원 역사보다 거의 100년 앞서서 등판하게 됐다.
  • 유영복 국제사법재판
    흑기군에 프랑스군이 참패하는 상황에서 프랑스가 청나라를 은근슬쩍 압박하자 청나라도 흑기군의 지원을 끊어 진퇴양난에 몰린 유영복이 공정한 판결을 내린다면 항복하겠다고 하자 청불 양국에서 판결 관련하여 신경전이 붙었다. 그러자 만국의 공법(公法)에 따라 공동으로 재판하자는 조선측의 제안에 따라 직접적으로 관계된 청국, 프랑스, 조선이 먼저 합류한 후 당사국인 베트남을 초대하고, 겉으로는 자신들과 우애를 맺은 4개국의 일이라며 끼어든 영국,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가 부른 미국, 쪽수에서 불리해질까봐 청나라가 불러온 일본 등 7개국의 법학자 및 철학자들로 구성된 재판부가 조선 한양에 설치되어 약 2년여간 서양 중심의 국제법 뿐 아니라 동양의 관습법에 뒤이어 그 기반이 되는 동서양 철학[1] 등을 위시로 한 대토론을 벌인 끝에 무기 밀수를 제외한 모든 혐의에 대부분 무죄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유영복 본인에 대해서는 월남국 영구 입국금지 및 프랑스에 대한 소정의 배상금 지불을 명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당시 아프리카 식민지를 둘러싸고 유럽 각국의 각축전에서 벨기에측이 조선측의 논리를 이용해서 다른 유럽 국가들을 곤란하게 만들자 이에 프랑스측이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국제사법재판을 대충 처리하고 벨기에측에 대응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를 알아차린 조선측이 프랑스측에게 도움을 주는 대가로 유영복을 풀어준 것에 가깝다. 재판 후 유영복은 동철에 스카웃되어 청나라 내의 철도 개설에 부정적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임무를 맡아 전역을 떠돌고 있다.[2]
  • 동아시아 인터내셔널
    '비유럽적 공산주의'를 추구하여 제2차 인터내셔널에 초청받지 못한 만민공산당이 1889년에 인천에서 일본 공산당을 끌여들어 이른바 '나머지 세상'의 인터내셔널 모임을 개최했다. 만민공산당 대표로 전봉준과 엘러노어, 일본 공산당 대표로 가타야마 센, 사이온지 긴모치가 참가했다. 그리고 경일학당에 머무는 청국인 몇몇, 하와이와 류큐 청년 두서넛도 무슨 일인가 싶어 찾아왔다. 거기에 분란을 일으키라는 옥균의 명을 받고 이완용도 참관했다. 첫 모임에서 유럽처럼 양력 오월 초하루를 노동절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조일 양국에서 모두 쉬는 백중날을 노동절로 지정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 동아시아 유학 만방대회
    상술한 동아시아 인터내셔널 모임에서 이완용의 유도로 '공맹의 말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다.'라는 발언이 나와 유림의 여론이 들끓었고 안 그래도 공산당을 고깝게 여기던 귀남이 이럴 때 선비들이 가만히 있어야 되겠냐며 최익현을 설득하여 공자묘가 있는 취푸에서 조선, 청국, 일본 등 국적불문하고 정학을 닦은 이들이 모여 공자를 기리는 석전대제를 겸해 일종의 대규모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단순히 고준담론 오가는 자리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학통이 다른 사람들끼리 묶었다. 조선에서는 런던 한복판에서 골턴의 우생학을 정면으로 비판한 전우를 필두로 화서, 노사, 한주학원 선비들이 참가하였고, 청국에서는 광서제의 스승 옹동화, 각각 장지동, 이홍장의 추천을 받은 장패륜, 엄복[3] 등이 참가했다. 일본에서는 국학도들이 쓰와노파의 학통을 잇는 후쿠바 비세이 이하 대표단을 보냈고 이 소식을 들은 개화신사들은 고루한 무리가 일본의 학명에 누를 끼친다며 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을 떠밀었다. 거기에 모임 취지에 크게 감명을 받은 나카에 조민도 얼굴을 내밀었다. 그 외에도 류큐와 베트남에서도 사람을 보냈고 공자를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여기는 티베트 불교에서도 흥미를 느껴 승려들을 보냈다.
  • 아주대회
    황란과 북양군과의 갈등 때문에 1896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여긴 귀남이 그렇다면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아시안 게임을 제안했다. 그런데 말이야 같은 아시아지만, 즐기는 것이 모두 달라, 우선 되는 대로 모두 종목으로 집어넣되, 규칙 제정에 시간이 필요하니 4년의 유예를 두기로 했다.
    최익현이 아주대회 논의 과정에서 육예를 재주 겨루는 종목의 기준으로 삼자고 한 것이 밖으로 흘러나가 청은 서예가 당연히 종목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안태훈은 번씨차창과 손을 잡고 옛 수레는 우마를 괴롭히니 농사 같은 필수적인 것도 아니라면 자제해야 하고 자전거는 단정한 옷차림으로는 타기가 곤란하겠지만 자동차는 짐승을 괴롭히지도 않고, 선비다운 품위 있는 옷차림으로 탈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어(御) 종목은 마땅히 자동차 레이스가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저들도 아시아에 속한다고 주장하려는 하와이도 참여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나라들이 떨어져 있으니 마땅히 조정 종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일본과 류큐가 놀랍게도 의기투합하여 검술당수가 종목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 경기 종목
      '예'를 제외한 육예 5종목과 각 참가국이 제시하거나 올림픽으로부터 도입한 31종목, 총 36종목으로 결정되었다.

      • 대회를 열어 화합하는 것 자체가 예이므로 따로 겨루기보다 현대의 페어플레이상과 같이 전 종목에서 누가 가장 반칙이 적은지에 따라 주기로 하였다.
      • 악/서
        유럽의 콩쿠르, 미술 경연과 제도는 별다를 게 없지만, 동양 전통의 음악이 연주되고, 서예 작품이 전시된다는 점이 다르다.

      • 사격술을 겨룬다. 총과 활이 모두 종목에 포함된다.

      • 자동차 레이스인 '어'는 두 개의 세부 종목으로 나뉘어있다. '문세(文勢)' 부문은 드리프트와 같이 매끄럽게 운행하는 모양새를 두고 겨루고, '무세(武勢)'는 스피드와 힘있는 모양새를 두고 겨룬다. 무세 부문이 조금 더 흥미진진하여 관람객에게 인기가 좋다.

      • '수'는 기상 예측의 정확도를 겨룬다. 특정 시간과 지역을 정하여 풍향과 풍속, 기온, 강우 등을 얼마나 정확히 예보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원래는 수학 정리의 증명으로 겨루려 하였으나, 이를 검증하거나 위아래를 가리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고, 더군다나 이미 노씨산학상을 수여하고 있어 필요성에 의문이 제시되었다. 한편 상수(象數) 또한 수라며 날씨 읽는 것을 겨루자 노사학원의 한 선비가 제안하였고, 고·저기압의 조화에 따라 날씨가 결정되니 이는 음양 이치에 맞으며 백성의 삶에도 쓰임이 있다하여 일단 한 번 해보기로 결정되었다.
    • 상급
      1위를 한 선수에게는 예기를 따라 금메달 대신 수창옥(水蒼玉, 물빛의 푸르스름한 옥)에 검은 끈을 단 옥패를 수여하고, 2등부터는 옥에 버금가는 유민(瓀玟), 즉 옥돌에 주홍 끈을 단 패를 수여한다. 한편 귀남은 대회 참가 및 입상을 독려하기 위해 "이 대회에 나아가 이름을 떨치는 이에게는 상급으로 군역을 면해주겠다"라는 강수를 날린다.
    • 역대 대회
      • 1900 나가사키 아주대회
        첫번째 개최지는 일본 나가사키로 정해졌다. 조선은 대회 규칙에서 일본에게 많이 양보를 얻어내는 조건으로 개최지를 양보하였고, 일본은 요시노부의 애국공당이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끈끈하게 연을 맺는데에 필사적이었던 반면, 청과 유구 등 다른 나라들은 그렇지 못한 사정이 크다. 올림픽보다도 성대하게 치러져 많은 관심을 끌었으며, 마상재 경기에서 잠시 해프닝이 있긴 했지만 이후로는 큰 문제없이 행사를 마쳤다. 옥패 수로 조선이 전체 1위를 차지하였으며, 그 뒤로 청과 일본이 2, 3위를 다투는 형세가 되었다.
      • 1904 평양 아주대회
        두번째 개최지는 평양으로 정해졌다. 시암이 새로 참가국이 되었다. 피구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 전 시범으로 도입되었다. 능라도 경기장에서 일천 명의 카드섹션으로 화려한 개회식을 보여주었다. 이를 두고 독자들은 작가가 장난을 살짝 쳤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양 능라도에서, 공산당 당수인 정부수반(전봉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규모 카드섹션 행사를 여는 장면은 마침 현실의 북한이 능라도 경기장에서 대형 카드섹션 행사를 여는 것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군밤조선과 북한은 전혀 다르므로 진지한 의도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작가의 장난이라는 것. 작가 후기에서도 이를 언급한다.
      • 1908 난징 아주대회
        세번째 개최지는 난징으로 정해졌다. 이 대회에서는 조선국이 가장 많은 옥패를 차지하지 못했다.
      • 1913 하노이 아주대회
        원래 열려야 할 1912년에 선수 대부분이 창의단으로 유럽에 가있었기 때문에 개최 시기가 연기되었다. 대신 조청일 삼국이 아주 운운하는 동안 곁가지 되었다는 데 은근한 불만 품고 있던 대남에서 작정하고 준비하여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양위하고 상왕이 된 귀남이 친람하여 조선국 국사단이 모두 분발해서 가장 많은 옥패를 차지했다.
  • 한양 선언
    산동 조차를 꾀하는 독일에 맞서 조선, 대청, 일본 삼국이 한양에서 발표한 공동 선언문. 최대한 바다 건너 사정에 엮이지 않으려 하는 일본과 남은 자존심 지켜가며 조선과 일본의 참여를 이끌어내려는 대청의 밀당으로 약조의 절목을 정함에 있어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천하의 평화'를 위하여 중국 땅에 바깥 군대를 '어지간하면' 더는 들이지 않고 혹 다툼이 생기면 그 안에서 해결한다는 그 요체는 그럭저럭 드러나 있다.
  • 창의단
    귀남의 라디오 옥음 방송 이후 조청일이 구성한 국제 구호단으로, 인력과 곡식을 나누어 대전쟁의 참상을 막아보고자 모였다. 유럽 국가들의 경계와 의심을 피해 본래 이름인 '지전창의단'에서 '지전'을 빼고 국제적십자사의 이름으로 서부전선 각지에 파견되었다. 창의단이 든 적십자 깃발은 전방의 장병들로 하여금 십자군의 재림을 연상케 하여 충격을 주었다. 무인지대에 야전병원이 생기며 사람이 오고가고, 하늘에는 적십자 비행기가 날아다니며 위험상황을 방지하였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군사검열을 피해 우편을 전달하며 전·후방의 실상을 서로에게 알리고, 미국을 끌어들여 재정지원을 빌미로 양측이 협상에 나서도록 했다.
    여담으로, 귀한 쌀로 괴상한 것을 만들어내는 꼴을 더는 못 본 창의단 사람들이 쌀밥을 비롯한 동양 요리를 전수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군에 의해 소시지를 넣은 부대 스튜(Truppen-Eintopf)가 탄생했다.
  • 아주연합 창설
    청과 일본이 조선에게 유엔 평화유지위원회 이사국 자리를 양보받자 유럽협조체의 사례를 따라 동양 국가만의 기구를 창설하고 조선을 상석에 앉히기로 한다. 이는 훗날 청국 등 아시아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목소리 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발판으로 자리매김한다.

1.1.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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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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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류큐 왕국

  • 독립 유지
    대만 침공 당시 청나라와 갈등을 빚은 일본이 조선의 중재로 청나라로부터 타이완의 경작권을 얻는 대신 류큐 왕국 병합을 포기하였다. 다만 이미 있던 일본의 이권은 인정하는 방향으로 합의가 이루어졌고 어차피 사탕수수 농사와 중계무역 외에는 먹고살 길이 그리 많지 않은 나라라서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된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류큐 입장에서 사실상 종속과 실제의 합병은 하늘과 땅 차이겠지만. 그리고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가까운 나라인 조선과 일본에 공사를 파견한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자신들의 독립을 보장해준 조선을 진정한 상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친밀해졌다.
  • 관광업 활성
    대만에서 설탕이 나오기 시작하여 먹고살 길이 사라진 주민들이 그렇게 원수처럼 여기는 가고시마(사츠마)와 일손이 부족하다는 바다 건너 하와이 왕국으로 일거리를 찾으러 떠나고 있다는, 초대 주조선공사로 부임한 코치웨카타 초조의 푸념을 들은 귀남이 관광업을 떠올리고 시범적으로 대원군을 국비지원 효도관광 보냈다. 이는 한국에서 살던 시절 자녀들이 효도관광을 보내주었다고 뻐기던 몹쓸 노인네들을 부러워하던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뒤이어 오경석이 역관들에게 준비를 시키는 과정에서 한성의 손탁호텔을 본떠, 귀한 분들이 유람을 할 때 머물 법한 고급 여관을 짓는 등 투자를 시작했다. 덤으로 류큐에 다녀온 대원군은 난초 그림에 더해 야자수가 있는 바다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며 독특한 그림이 탄생했다.
  • 우후아가리(다이토 제도) 개발
    무인도였던 다이토 제도의 우후아가리(대동섬)에서 인광석이 발견되자 류큐가 재빨리 이곳은 저들 섬이라고 선포하였고, 일본이 일말의 협의도 없는 통보라고 반발했다. 이에 양국의 부탁을 받고 중재에 나선 조선이 이전에 아나키즘 건으로 도움을 줬던 '국제 신디컬리즘(생디칼리슴) 협회'를 끌어들여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시범적인 운영을 부탁해 우후아가리를 어느 쪽 조정도 손수 관할하지 않는 공동개발구역으로 만들었다.

1.4. 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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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대남

  • 제2차 사이공 조약
    청의 개입과 조선의 중재로 외교권을 지켜냈고 조약에 '청국과 월남국은 법국(프랑스)이 월남 강역 내외에 얻은 이익을 존중하며, 법국은 그 이익으로 말미암아 월남 또한 발전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한다.'라는 애매한 구절이 덧붙여졌다.
  • 주권 회복
    타국을 보호령으로 삼거나 식민지로 삼으려면 확실히 백인의 짐을 져야 한다고 베를린 회담에서 결정났기 때문에 프랑스가 1896년에 프랑스령 코친차이나만 남기고 베트남을 해방시켰다.
  • 하노이 아주대회 개최
    대전쟁이 끝난 후 조청일 동양3국과 달리 아시아의 곁가지 취급당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대남이 작정하고 준비하여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1.6. 필리핀

  • 필리핀 임시정부 출범
    1896년, 조선에서 열강들이 식민지 문제를 논의하는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아주대회에 대표단을 파견했던 필리핀 독립단체 카티푸난이 회의에 한몫 제대로 끼려면 정부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고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회의에서 체결된 '문명과 주권, 지배와 자치, 그리고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일반 협정'에 '필리핀 임시정부'의 이름을 올려 필리핀 도독부에서도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마닐라에 무혈입성한 뒤에는 즉각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기날도의 막달로 파벌과 새로운 후원자를 자처한 독일을 믿어보자는 보니파치오의 막디왕 파벌로 갈려 충돌할 뻔했지만 여기에 조선의 권유로 미국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대규모 행정 고문단을 파견하여 갈등이 봉합됐다.
  • 민다나오 섬 분할
    미국의 도움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을 줄이고 싶었던 필리핀 정부가 술루 술탄국에게 민다나오 섬을 동서로 분할하자고 제안했고, 한 번 영국에 데인 적이 있던 술루 술탄국이 이를 받아들였다.

1.7. 하와이 왕국

  • 대검 헌법[4]
    귀남의 조언을 들은 칼라카우아 국왕이 전제군주정을 고집하지 않고 선제적으로 유색인종의 참정권까지 보장하는 개헌을 추진하였다. 이에 후술할 호놀룰루 사건으로 기세가 꺾인 백인 지주들이 한발짝 물러나고 칼라카우아 국왕 역시 양보하여 모두의 참정권을 인정하되 재산 제한을 조정하여 얼추 백인과 비백인이 동률을 이루게끔 합의를 보았다.
  • 호놀룰루 사건
    조선의 주선으로 하와이로 건너가 칼라카우아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하게 된 사이토 하지메와 그의 일도일포류 제자들이 어명을 잘못 전달한 수상 깁슨의 말을 받들어 할라와 한 농장을 습격하여 호놀룰루 소총대 대원 넷을 도륙했다.[5] 이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에 전달되면서 워싱턴 D.C. 조야에 황화론이 불어닥쳤는데 이 사건이 언론계의 두 거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조셉 퓰리처의 자존심 싸움으로 변질되면서 황화론은 흐지부지되고 결국 조선과 일본이 함께 시찰단을 보내 중간에서 하와이의 원주민들과 백인들의 갈등을 조정하는 쪽으로 중재되었다. 한편 언론 싸움 와중 이 사건을 가리키는 구호가 생겼는데, 바로 "진주만을 기억하라."
  • 독립 유지
    호놀룰루 사건으로 기세가 꺾인 샌퍼드 돌이 본국의 지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하와이 병합을 완전히 포기하여 주권국으로 남았다.

1.8. 이스라엘

  • 건국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시오니즘이 태동하며, 루이지애나도, 알래스카도 사고파는데 옛 가나안 땅이라고 안 될 것 없지 않느냐는 시온주의 유대인들과 근대화의 재원이 필요했던 이슬람 공화국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만국연합, 즉 UN을 통해 유대 복지재단이 백 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제외한 팔레스타인의 구매 대금을 지불하고, 이스탄불 공화정부는 팔레스타인 원주민 이주에 협조하고 유대인들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합의를 이루어 시오니스트들의 숙원이었던 이스라엘 건국이 이루어졌다. 단, 아무리 그래도 성지 예루살렘까지 넘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여전히 이슬람 공화국령이다. 그렇지만 메시아가 도래하기도 전에 예루살렘에 진입하기는 조금 그렇다는 종교적인 이유와, 드레퓌스 사건이 원만하게 끝나 원 역사보다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약해 절박하게 예루살렘까지 원할 이유가 없어서 이스라엘 측도 수월하게 예루살렘을 포기했다. 근처의 중동 국가들을 전부 적으로 돌리다시피 한 중동전쟁으로 건국된 원 역사에 비해 깔끔하게 영토 거래로 건국된 국가가 되었기에 20~21세기에도 중동의 화약고 신세가 아닐 것으로 보인다.

1.9. 인도

  • 벵골 분할 무산
    영국이 독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불을 지핀 반식민주의 여론에 화들짝 놀라 벵골 분할을 없던 일로 하였다.
  • 문화대혁명
    원 역사에서 힌두교에 불만을 품었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사람이 사람을 함부로 억압할 수 있게끔 하는 모든 종류의 기제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주장하여 인도 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 인도 연방
    원 역사의 인도 공화국이 아닌 연방 형태의 국가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따라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가 각각 연방의 구성국이 되었을 수도 있다.

1.10. 이란

  • 이란 군사정변
    무스타파 케말의 이슬람 공화국 건국에 자극을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속정부를 천명했다. 이후 이슬람 공화국의 이슬람 종교개혁에 동참해 수니파, 시아파의 화해를 이끌었다고 한다.

2. 유럽

  • 영러협상
    국내정치적 이익이 필요했던 영국 자유당의 애스쿼스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린(레닌)이 조선의 중개로 만나 협상을 추진하여 러시아는 만주 진출을 포기하고 영국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허용하는 빅 딜을 성사시켰다.
  • 페르디난트 1세 즉위 ×
    불가리아 공국의 독립이 늦어져 알렉산더르 대공 사후 불가리아와 오스만의 합의로 원 역사에서 불가리아 왕국의 초대 차르였던 페르디난트 1세 대신 다른 사람이 총독이 되었다. 대 불가리아를 꿈꾸며 호시탐탐 영토 확장의 야욕을 보였던 페르디난트가 즉위하지 않은 결과 불가리아와 다른 발칸 제국 사이의 관계가 원 역사보다 우호적이었다.
  • 발칸 전쟁 ×
    발칸의 제국들이 오스만에게서 독립하고 나서 얼기설기 엮인 정부를 구성하던 중 서로에게 총구를 겨냥하거나 내부다툼을 벌일 새도 없이 대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스만의 침공을 받아 오히려 서로 힘을 합쳐 옛 종주국 오스만에게 대적해야 했다. 그리고 후술할 대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잘 막아내며 역공세도 가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으나 케말 파샤의 활약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정신 못 차리고 서로 싸우면 언제 다시 식민지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오스만에게 좋은 일 해 줄 수는 없다며 자체적으로 발칸 지역 기구를 결성해 세계의 화약고 신세에서 벗어날 기미가 생겼다.
  • 대전쟁
    니콜라 테슬라의 자해공갈 쇼(…)로 흑수단으로 대표되는 세르비아의 과격파가 축출되면서 사라예보 사건은 터지지 않았지만 엉뚱하게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을 계기로 시작되어 1910년에서 1912년까지 진행됐다. 원 역사와 달리 조선의 숱한 개입으로 인해 보어전쟁, 미서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유럽 각국들이 스스로의 무기체계의 발달을 깨닫고 적응하며 교리를 수정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양측이 기관총 앞에 보병을 그대로 던져넣는 구시대적인 전술을 쓴 결과 불과 6개월만에 서부전선에서 무려 200만명 이상의 막대한 사상자가 발생했다. 환산하면 하루에 1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온 셈이다.
    • 동부전선
      독일이 둘로 나뉜 러시아령 폴란드의 주둔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원을 받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를 포함한 러시아령 폴란드의 상당수를 접수했다. 키예프로 반강제로 옮겨진 니콜라이 2세가 페트로그라드 정부와 키예프 정부사이에서 중립(이라기 보다는 애매모호한 스탠스)을 지켰고 백군이나 적군이나 여러 문제 때문에 공세할 여력이 부족했기에 동원된 병력은 서부전선에 버금가지만 그에 비해 큰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쪽도 페트로그라드 정부와 폴란드 군단의 충돌로 수만 명이 죽었고, 서부전선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전투가 꾸준히 벌어져 수십만 가량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 국경 전투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빨리 프랑스가 병력을 소집해 집중시킴으로써 독일의 방어선을 뚫고 알자스 로렌을 수복했다. 이에 프랑스는 여기에 라인란트까지 '수복'해 보불전쟁 리벤지를 하자는 희망회로를 굴린다. 그러나 몰트케 계획에 따라 독일이 마련한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이루어진 방어선에 가로막힌데다 참호선 돌파를 위한 집중포화와 임시편제를 꾸릴 야포와 신형화기 공급이 작전진행속도를 따라가지못해 프랑스는 결국 무려 70만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의 초기 공세에 주방어선의 상당부분을 포기하고 알자스 로렌까지 상실한 후 본토까진 내줄 수 없었던 독일과 겉보기에는 눈부셔 보이는 프랑스의 성과에 서둘러 공세를 벌인 영국도 역시 큰 피해를 입는다. 전선이 알자스-로렌 방면에서 그것도 프랑스의 선공으로 시작됐고, 벨기에에 수많은 콩고인 의용병들이 몰려들어 독일이 침공을 단념했기 때문에 벨기에 강간은 발생하지 않았다.
    • 헬골란트 만 해전
      영국이 프랑스의 겉으로 보이는 선전에 놀라 대륙원정군을 파견할 때 전시내각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이 따로 수송함대를 떼어내기 보다는 함대가 함께 출항해 독일해군을 격멸하자는 의견을 냈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피셔 제독의 의견을 씹고 이를 관철시킨다. 마침내 헬골란트 만에서 미리 함대를 북해로 이동시켜 수적열위를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어뢰 등 검증되지 않은 신기술을[6] 받아들인 도박까지 한 독일해군과 엉성한 작전을 수적우위로 만회하려 하던 영국해군이 격돌하여 독일이 전략적 승리를 거두기는 하나, 독일도 두번 다시 그 승리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영국도 조청일과 남미에 팔려던 군함을 양해 받고 땡겨써야 할 정도로 쌍방이 큰 피해를 입는다.
    • 루멜리아 전선
      페트로그라드든 키예프든 카프카스 방면에는 신경을 쓸 여력이 없다고 판단한 오스만 제국이 루멜리아 전선에 힘을 집중해 루마니아, 그리스, 세르비아, 불가리아로 이루어진 발칸 국가들의 '발칸 동맹'에 공세를 가해 신승을 거두었다.
    • 이탈리아 전선
      로마 제국 시절의 일리리아 속주를 다시 획득하려 몬테네그로에 상륙을 감행하나 말아먹고(…), 프랑스가 주력을 독일 방면에 집중한 틈을 타 사보이를 수복하려 했지만 역시 말아먹어(…), 다른 국가들과 달리 일찍부터 답도 없는 상태에 접어든다.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사상자가 적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 리프 전쟁
      프랑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스페인이 모로코를 침공했지만 술탄과 손을 잡은 원 역사 리프 전쟁의 영웅 압드 엘 크림에게 격퇴당한다.
    • 테살로니카 공세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야심차게 준비한 테살로니카 방면 공세는 알자스-로렌 방어전의 전훈을 재빨리 흡수한 케말 파샤의 오스만군에게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꾸역꾸역 갈아넣어 승리하긴 했으나 손실이 너무 커 상처뿐인 승리로 끝난다.
    • 알프스 전역
      발칸 전선에서 발칸 연합군과 대치를 이어가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테살로니카 공세가 실패하여 여유가 생긴 틈을 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전선으로 파견된다.[7] 거기에 동부전선에서 차출된 독일군을 더해 알프스 남북에서 동시에 공세를 취했지만 영국-프랑스 연합군도 방어전의 전훈을 얻었고 식민지에서 병력을 징병해와 동맹국군은 결국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 콩고 의용군
      프랑스든 독일이든 자국을 통해 상대를 공략할 것임을 직감한 벨기에의 새 국왕 알베르 1세가 자국군의 열악한 사정을 알고 콩고에 병력자원을 요청하였는데 선왕본의 아닌 선의 덕분에 은혜를 갚겠다며 콩고에서 수많은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자원자라고는 해도 보급품에 병력수송에 여러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어 실질적인 전력이라기보다 서류상 병력에 가깝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명목상 병력이 크게 불어난 덕분에 프랑스와 독일 양측이 벨기에 침공을 생각하지 않도록 억제기 역할은 해 주어 중립을 지킬 수 있었다.
    • 갈리폴리 전투
      개전 이후 꼬박 1년이 지나 어느 정도 위세를 회복한 로열 네이비가 오스만 육군이 발칸 반도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공략하고자 하였으나 오스만이 과감하게 남은 여유 전력을 모두 갈리폴리에 투입하여 영국이 준비한 대규모 상륙부대가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나야 했다.
    • 베르됭 전투
      독일이 마타 하리를 버림패로 쓰면서 벌인 역정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어 프랑스의 메츠-베르됭 방면 일부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 니벨 공세
      전쟁의 장기화와 창의단의 활동으로 전선의 사정을 알게 된 시민과 후방의 사정을 알게 된 병사들에게서 염전사상이 일어나자 프랑스가 준비한 공세. 하지만 공세의 입안자 니벨이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염전 분위기에 따른 정치적 압력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작전계획을 널리 알려 독일이 '힌덴부르크 계획'으로 감축한 병력을 요새화로 상쇄하는 등 대비를 하게 되어 공세는 1km당 4만명이라는 전사자를 남긴 채 실패했고, 이에 공세에 참가한 병력들을 중심으로 항명이 발생한다.
    • 루덴도르프 공세
      니벨 공세의 실패와 항명사태를 본 독일의 수뇌부가 원래 시행하려 했던 공세를 확대하여 추진한 공세. 하지만 수뇌부와 달리 병사들 사이에서는 원 역사와 달리 창의단의 도착에 의해 타 부대와 타 진영에서의 염전 분위기를 알고 있어 '힌덴부르크 계획'에 따른 병력감축을 전후복구의 준비로 해석하는 등 종전의 희망을 품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공세실패로 항명이 일어나자 희망은 확신이 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몇 차례의 의미 없는 공격 이후 독일군에서도 항명이 발생하였고, 원역사와 달리 창의단에 의해 전쟁에 회의를 품고 있던 아돌프 히틀러를 선두로 다수의 초급장교들도 여기에 동조해 전 전선에 항명이 일어난다.
    • 포템킨 반란
      내전의 판세가 적군에게 기울어져 백군 수뇌부가 적군에 항복하자 흑해함대가 이에 반발하였으나 포템킨을 필두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흑해함대도 적군에 항복한다.
    • 종전 협상
      니벨 공세와 루덴도르프 공세를 계기로 동맹국과 협상국 양측에서 대규모 항명 사태가 발생하고 국내에서는 반전시위가 벌어져, 결국 양측 모두 전쟁 동력을 상실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키예프 정부의 항복으로 러시아 내전이 종식되면서 러시아가 다시 힘을 되찾았고, 미국이 금융을 바탕으로 유럽 국가들을 압박하기 시작하면서 결국 모두가 반강제로 협상 테이블에 모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전국들이 전쟁 원인을 서로에게 떠넘기며 남탓을 해 협상이 지지부진했지만, 최익현의 설득을 듣고 빌헬름 2세가 왕관을 내려놓는 강수를 두며 대화의 물꼬를 텄고, 이 과정에서 이대로 유럽의 해가 끝나게 둘 수는 없다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유럽이 단결해야 한다는 암묵의 합의가 이루어져 알자스-로렌의 철강과 석탄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전후의 취약한 경제에 부담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군축 합의 등 대타협이 이루어졌다. 전후엔 초기적인 유럽연합이 탄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2.1. 프랑스

  • 파리 코뮌
    비공식 주코뮌 조선공사 최익현, 앙리 뒤낭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원 역사대로 무너지기는 했지만 뒤낭과 최익현이 야로스와프 돔브로프스키를 설득해 코뮌이 붙잡은 포로들과 코뮌 구성원 중 돔브로프스키 휘하 일부 인원을 데리고 빠져나오면서 코뮌 내 강경파의 포로 학살도 정부군의 초강경진압 이른바 피의 일주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파리에 갇힌 민간인들을 위해 조선 정부에서는 파리의 빈집들을 잠시 임대해 그곳으로 대피하게 했다. 그 민간인 중에는 코뮌 구성원도 섞여있었지만 조선 측에서는 눈감아줬다. 프랑스 정부군은 포로는 필요 없다를 외치려 했지만 두 사람이 코뮌 구성원들을 데려오며 인질들까지 무사히 구출해온 탓에 이미 인질들을 무사히 풀어주면 인도주의적으로 대해주겠다며 외교적으로 약속한 것 때문에 무차별 처형으로 외교 망신을 일으키는 대신 이들을 조선으로 정치적 망명을 보내는 식으로 해결한다. 이들 코뮌 주류파는 조선으로 망명하여 조선에 '작은 파리'라는 거주구역을 만들었고 급격히 개화중인 조선에 서구 문화와 서구식 체계를 도입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코뮌 난민의 좌장 격이었던 샤를 벨레가 자서전에 쓸 이야기 한 줄이나 만들어 볼까 해서 나간 참의대부 추거에서 조선인들의 경로사상에 힘 입어(…) 참의대부까지 그대로 당선된 것은 덤. 아울러 프랑스에서는 극동의 준문명국과 거의 평등한 조약을 맺었을 뿐 아니라 다수의 행정관까지 제공한[8] 자신들이야말로 문명개화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고 마구 선전해대는 중. 물론 어쩌다 제공했는지는 조선이나 프랑스나 둘 다 제껴두고 쉬쉬하고 있다.
  • 튈르리 궁의 보존
    원 역사에서 일어났던 파리 코뮌 강경파의 자살행위와 다름없는 요인 살해(대표적으로 파리의 대주교인 조르주 다르부아)와 문화재 반달 행위는 작중에서는 최익현의 노력으로 코뮌군 사령관 돔브로프스키가 조기에 항복함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원 역사에선 코뮌 측의 방화로 불탄 튈르리 궁이 무사할 수 있게 되었다. 작중에서는 튈르리 궁은 그대로 대통령궁으로 사용된다.
  • 1889년 만국박람회
    조선이 조선 국명으로 처음 참가한 1889년 만국박람회도 역사와 비슷하게 개최되었다. 바스티유 습격 100주년을 기념하는 만국박람회라 서구 왕정국가들은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민간의 참여만 있었지만 전 왕조를 뒤엎고 현재 체제가 된 조선과 청은 떳떳하게 참가하였다. 원 역사의 이 박람회에서 프랑스는 세네갈의 현지인을 데려다가 토굴을 짓고 민속적인 모습을 전시했는데 여기서는 식민지의 문명화라는 명분이 널리 퍼진 상태라 현지인을 프랑스인처럼 꾸미고 다른 나라들도 그 유행을 따르는데 치중하였다.
  • 유라시아 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30만 지부상소로 극동의 강국으로 거듭난 조선의 군사력이 밝혀진 뒤에는 허풍 좀 더해 '유라시아 동맹' 이라고도 불린다.
  • 사디 카르노 암살 ×
    대반체제세력 대책이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일으켜 공중분해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원 역사에서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디 카르노가 작중에서는 정상적으로 대통령 임기를 마쳤다.
  • 드레퓌스 사건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처벌받자 오페르트 집안 사돈댁인 드레퓌스 가문[9]의 지원 요청을 받은 오페르트와 조선 측이 여론전에 가담한다. 주프랑스 조선공사로 있던 김홍집은 여론전에서 밀리자 드레퓌스 사건은 독일 간첩들의 조작으로 일어난 일이며, 삼백 명의 간첩단 명부를 확보했으나 신변의 위협으로 밝힐 수 없다는 당당한 선동과 날조를 날려 응수한다. 프랑스를 뒤흔든 이 선동은 군부에서 내부조사를 하며 방첩대(…)에서 진범이 잡히게 되고, 결국 드레퓌스 대위는 여론전과 조르주 피카르 중령의 수사에 힘입어 원 역사보다 훨씬 빨리 무죄로 석방되어 그를 비난하고 비웃던 언론들의 찬사를 받으며 복귀했으나, 안타깝게도 조르주 피카르 중령은 언론의 외면 아래 원 역사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로 좌천되었다.
  • 시온주의
    드레퓌스 대위가 석방된 후 오페르트가 테오도르 헤르츨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오스만 정부의 고질적인 부채를 유대인이 대신 갚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술탄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눌러앉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던졌는데, 이를 들은 헤르츨은 역으로 "루이지애나도, 알래스카도 사고 팔 수 있는데, 가나안 땅이라고 안 되리란 법 없다"며 돈을 모아 팔레스타인 땅을 매입한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수석 랍비의 지지를 받아 유대 복지재단을 설립한다. 그리고 오페르트와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유대인의 사정이 전해지자 귀남이 궁방전의 일부를 빌려주면서, 동유럽 유대인들이 조선으로 이민을 오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조선에 키부츠농협이라는 이름으로 퍼진다.
  • 엘랑 비탈
    을미년 만주출병에서 조선군의 동원체계에 깊은 인상을 받은 전쟁성 장관 오귀스트 메르시에가 전쟁대학 교관 페르디낭 포슈를 통해 신속한 동원령으로 소집한 대규모 병력을 집단으로 운용해, 신속한 공세로 적의 전쟁수행 의지 자체를 공격하는 군사교리를 창안하였다. 원 역사의 엘랑 비탈은 적극적인 공세를 중시하는 교리인지라 이름은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원 역사에서는 왕성한 공격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면, 본작의 엘랑 비탈은 보다 체계적이고 빠른 동원체계를 중시한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엘랑 비탈은 앙리 베르그송이 만들어낸 용어를 인용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살아 숨쉬는 프랑스 국민의 전의로써 적을 굴복시킨다'는 의미로 메르시에가 직접 붙인 이름이다. 참고로 프랑스군 일부 장성들은 정작 조선군이 쏠쏠하게 써먹은 철조망이나 기관총은 하찮은 것으로 판단했다.

2.2. 러시아 제국 → 소련(소비에트 자유국 연방)

  • 조러수호조약
    공식적으로 확정된 바 없던 조·러 간의 국경을 확실히 하고, 두 나라 백성의 교역을 자유롭게 한다는 명분 하에 조러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내용은 내륙을 통한 교역을 허용하고 조·러 백성들이 양국 접경지대에서 통상, 이동, 거주의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다. 협상을 주도한 무라비요프 백작은 조러수호조약을 앞세워 함경도 일대를 차근차근 집어삼킬 속셈이었다. 그런데 예상을 훌쩍 뛰어넘은 조선 농민들의 개척 러시 때문에 오히려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황급히 귀화하고 3년간 정주하지 않으면 종자와 농기구를 제공하지 않겠다고 포고했지만, 그랬더니 대부분의 농민들이 그럼 일만 하다가 겨울에 돌아가겠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농기구 장사를 하기 딱 좋다고 조선인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블라디보스토크 내에 거주지를 갖지 않으면 고용할 수 없게도 해 봤지만 지방 행정이 어설프다 못해 중세적인 구석까지 남아있는 러시아의 지방관들에게 어지간한 평민들도 여차하면 관청에 소장을 쓸 줄은 알 정도로 관을 대하는 데 익숙한 조선인들은 너무나 벅찬 상대였다. 그나마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해서 행정 및 치안을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고 웬만하면 러시아 관청에게 협조하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입장에선 감지덕지할 수준.

    심지어 연해주 개척 소식을 듣고 새로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들도 태반이며 조선과의 교역에만 관심을 가졌다. 결국 원하던 조항이 필요 이상으로 들어갔다며 영국의 반발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녹둔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했을 정도로 김칫국을 마시던 러시아에서 조약을 체결한 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재개정을 간청했다. 물론 조선의 반응은 "응 싫어."
  • 아시아개발은행(Asian Development Bank)
    데즈레일리 내각과의 물밑협상으로 극동에 대한 이권을 인정받은 러시아가 이때다 싶어 조선에 조러수호조약 개정을 비롯해 이런저런 황당한 요구를 내놓았다. 그런데 반침략 연대의 활약과 더불어 더비 백작의 폭로로 국내 여론이 들끓어 데즈레일리 내각의 입장이 난처해졌고 러시아 극동 관계자들 입장에서도 이러다가 조선인의 두만강 월경이 금지되면 그 날로 블라디보스토크 문 닫을 판국이라 북해도 공화국 투자를 알선해서 손해 보는 바를 벌충해주겠다는 귀남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시아개발은행이 원 역사보다 거의 100년 앞서서 등판하게 됐다.
  •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원 역사보다 5년 늦은 1886년에 발생했다. 그리고 차르 암살을 주도한 단체 '인민의 의지' 구성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으나, 일부가 체포되지 않고 조선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그들은 조선의 선의빔을 얻어맞고 붕괴해버렸다. 일단 조선까지는 왔는데 기대했던 러시아 인민의 대각성은 일어나지 않고, 조선의 비밀경찰이 방문해 '당신들이 주장하는 바는 무엇이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공식 문의서를 보내오자 각 파벌들이 자신들의 생각대로 답변하겠다고 내분을 일으켜 결국 며칠이나 논쟁한 끝에 결론을 내지 못하고 각각의 파벌마다 답변을 따로따로 제출하고 자괴. 그리고 이는 러시아를 거쳐 각 유럽 열강들에게까지 전달되어 대반체제세력 대책이 이들을 양지로 끌어내어 내분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10여년간 무수한 혁명세력이 자괴한 모양이다.[10]
  • 연해주 젬스트보(지방의회) 설치
    더 이상 연해주의 경제가 조선에 종속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일부 과격파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 기공식에 참석하기 위해 연해주를 방문한 황태자 니콜라이 2세에게 블라디보스토크의 진실을 고발했는데, 정작 소식을 들은 조선인들이 '노국 나랏님의 자비에 기대어만 있던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귀남 즉위 이래 수십년간 조선에서 익숙한 대로 적극적으로 나랏일에 협조하겠다고 격쟁을 일으켰다. 러시아 지방관들은 연해주의 경제권을 쥔 조선인들이 이제는 정치에까지 손을 뻗으려 한다고 기함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자신이 알던 반정부 시위들의 돌을 던지거나 불을 지르는 과격한 폭력시위가 아니라 꿇어 엎드려 황제에게 애원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당혹해 하면서도 성격대로 우유부단하게 굴다가 우호적으로 대하라고 대충 인정하고 넘어갔다.
  • 유라시아 동맹
    원 역사의 러불동맹에서 조선과 추가로 동맹을 맺는다.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갈등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1차 대회가 당국의 정책 변화로 탄압을 피해 벨라루스민스크에서 조촐하게 열렸던 원 역사와 달리 러시아 제국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국의 감시 하에 당당하게 개최됐다. 그런데 율리 마르토프가 진정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시 노동자뿐 아니라 일반 농민들까지 모두 포용하여야 하고 교회의 개혁적 요소들과도 임시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레닌의 주장에 반발하여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이 더 빨리 그리고 원 역사와 완전히 상이한 이유로 발생했다.[11][12]
  • 《불씨(Iskra)》창간
    원 역사보다 2년 빠른 189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간됐다. 조선 만민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창간호에서 러시아의 개혁과 발전은 '마르크스-전 노선'에 의해 담보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하였다.
  • 붉은 일요일 사건
    스톨리핀과 일린 두 사람의 힘으로 곡물의 생산량이 다섯 곱절이나 늘었음에도 변함이 없는 팍팍한 삶에 의문을 품은 도시 노동자들이 오흐라나 추산 7만, 볼셰비키 추산 30만명이나 자발적으로 거리에 쏟아져 나와 누군가는 헌법을 외치고, 누군가는 의회를 외치고, 어느 얼간이는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만들어 퍼뜨렸다. 이에 니콜라이 2세가 소싯적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서 시위대에 대치하던 군인들에게 사격금지 명령과 더불어 시위대가 요구한 헌법 제정과 의회 설치를 수용함에 따라 시위대가 만족해 민중이 해산하며 시위가 평화롭게 끝났다. 차르도, 사회민주노동당도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시위였지만, 참가자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나와 붉은 일요일이라는 명칭이 된 모양.
  • 두마 개설 & 입헌당 창당
    원 역사에서는 흉흉한 민심에 니콜라이 2세가 떠밀려서 두마가 설립되지만 여기서는 붉은 일요일 사건의 여론과 자애로운 러시아의 아버지 차르로서 두마 설립을 허가했다.[13] 사회민주노동당이 일정한 세를 얻었고 니콜라이 2세를 미사여구로 구워삶은 핀란드도 자치의회 설립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폴란드 쪽은 아직 허가되지 못한 모양. 또한 세르게이 비테가 두마에서 일린과 스톨리핀의 사민노동당에 대항하기 위해 입헌당을 창당했다.
  • 적백내전
    두마 설치 후 사민노동당의 일린(레닌), 스톨리핀의 개혁에 위기감을 느낀 오흐라나, 군부 보수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 세르게이 대공 등의 보수파 귀족들이 1910년 차르 니콜라이 2세를 납치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적백 양군이 대치하게 되나 차르의 중재로 무력충돌은 피한 후 백군은 차르 일가를 데리고 키예프로 가 키예프 정부 성립을 선포한다.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기에 독일의 키예프 정부 지지 선언을 시작으로 마침내 대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격렬한 참호전에 시달리며 수십만단위로 인력이 갈려나가는 프랑스나 독일과는 달리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부는 개혁이 실시되지 않은 지역에서의 격렬한 반발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와 같이 평화적으로 충돌을 해결할 수 있는데 뭐하러 병력을 동원해서 피를 내며 치고받냐는 일부 온건파 볼셰비키 때문에, 키예프 정부는 역시 평화적 해결을 원하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의사로 인해 병력동원이 어려워져 내전은 적백이 단순하게 대치 중인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 소련 성립
    적백내전 도중 일린의 주도로 두마소비에트로 바뀌었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독립을 꿈꾸는 세력들에게 소비에트 설치 및 연방 가입을 조건으로 독립을 허가한다. 이에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본거지를 둔 백군은 내부에서부터의 붕괴를 우려해 차르의 안전을 조건으로 항복함에 따라 적군이 승리하여 소련이 건국된다. 공식국호는 소비에트 자유국 연방(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вободных Государств / Soyuz Sovetskikh Svobodnykh Gosudarstv). 수도는 모스크바이다. 국호는 이래도 그 중심이 되는 국가는 여전히 러시아 제국이며 러시아 황가는 입헌군주로서 소련의 지도자로 위치한다.[14] 핀란드와 발트 3국은 소련의 구성국으로 남지 않고 정말로 독립해서 강역은 주권국가연맹 정도이다. 굳이 옛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놔두고 모스크바로 천도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2.3. 대영제국

  • 반침략 연대(Anti-aggression League)
    디즈레일리와 러시아의 밀약으로 조선을 비롯한 극동이 미끼로 던져진 것에 분개한 전우 이하 영국 유학생들이 동방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글래드스턴과 손을 잡고 원 역사보다 6년 빨리 반침략 연대를 결성했다.
  • 아일랜드 자치법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러시아를 격파한 글래드스턴 내각이 기세를 몰아 원 역사보다 28년 빠른 1886년에 아일랜드 자치법을 통과시켰다.
  • 영일동맹
    원 역사보다 대략 10년 빠르게 조선의 추천(?)으로 일본과 동맹을 맺는다.
  • 드레드노트 건조
    테슬라가 만든 조선산 사격통제장치를 확보한 독일과 동시기에 건조하였다.
  • 조지프 체임벌린 총리 집권
    솔즈베리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던 조지프 체임벌린이 베네수엘라 사태를 계기로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총리가 사퇴하자 원 역사에서 그 뒤를 이어 총리가 된 아서 벨푸어의 뒤통수를 때리고 본인이 총리가 되었다.

2.4. 독일 제국

  • 세 황제의 해 ×
    프리드리히 3세가 조기에 후두암 수술을 받아 후두를 완전히 절개해 비록 벙어리가 되었지만 1888년이 세 황제의 해가 되는 일은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벙어리가 된 후 필담, 병세가 재발하자 타자기로 글을 써 소통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여러 업적을 남기고 1892년 치사량의 모르핀을 주사받고 안락사를 택한다.
  • 자유주의 헌법
    프리드리히 3세가 일찍 죽지 않고 비스마르크를 앞세워 자유주의 헌법을 통과시킨다. 이로인해 비스마르크에게 배신당했다고 여긴 보수파와 원래 사이가 좋지않던 카톨릭,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비스마르크가 재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 독일령 칭다오 ×
    원 역사에서 독일군 주둔의 빌미가 된 거야교안이 청 내부의 혼란이 덜하여 발생하지 않았고, 동아시아 삼국이 협력하여 더 이상 중국 땅에 바깥 군대를 들이지 않겠다는 '한양 선언'을 발표한데다 더 입지가 좋은 필리핀이 먼저 독일에 열릴 기미를 보이고 있어 산동 진출을 포기했다.
  • 독일민족당(Deutschvölkische Partei) 창당
    원 역사에서 1914년에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 정당의 결합으로 결성된 독일민족당이 지지 세력이 필요했던 빌헬름 2세의 개입으로 훨씬 일찍 설립됐다.
  • 수빅 만 조차
    산동 진출을 포기한 대신 입지가 더 좋은 필리핀 수빅 만을 조차하는 데 성공했다.
  • 라임나무 클럽
    조선 공사관의 후원을 받는 클럽으로 독일 내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초당적으로 뭉쳐서 카이저의 "세계정책"을 비판하고 있다. 사민당의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라임나무 클럽에 참여했다. 이름의 어원은 베를린 중심부에 있는 거리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대로(大路)이며, 조선에서 벌였던 청문회나 토론회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다. 참여자들을 억제하기 위해서 빌헬름 2세와 뷜로가 극우인 독일민족당도 소수 참여시켰으나 도리어 거기에 어울린 상황이다.
  • 만국연합(유엔) 평화유지이사회 이사국 지위 획득
    대전쟁 종전 이후 유럽에 배분된 5개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하였다. 원 역사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달리 임기제이지만, 원 역사 G4를 생각해보면 감개무량.
  • 왕정 폐지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한동안 왕정이 유지됐지만, 원 역사의 68운동같은 모종의 파란이 일어난 결과 공화국이 됐다.

2.5. 오스만 제국 → 이슬람 공화국

  • 동방문제
    사사건건 훼방을 놓는 조선을 러시아에게 먹이로 던져주고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영국의 디즈레일리는 언드라시 문서[15]를 받아들이는 시늉만 한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자유화할 생각이 없었고 디즈레일리의 속셈대로 되는 듯 했지만 조선 선비들과 글래드스턴이 주축이 된 반침략 연대에 의해 반전여론이 높아져 결국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채권단[16]이 강제하는 방향으로 화해하게 된다. 그 결과 서구 열강의 개입이 원 역사보다 훨씬 교묘하게 이루어져 반자유주의 여론이 형성되지 않았다.
  • 발칸 지역 자치국 형성
    동방 문제가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와 발칸 제 민족의 자치국 형성이라는 방법으로 해결되었고 베를린 회의의 결과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의 완전 독립과 불가리아의 반독립,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임시 통치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각 자치국은 러시아 등 다른 열강의 지원을 받아 자체 군사력을 키우고 있고 일부 민족주의자는 완전 독립을 꿈꾸는 등 갈등 소지는 남아있는 모양.
  • 아르메니아 학살 ×
    위에서 말한 언드라시 문서가 채택됨에 따라 저도 자치권을 달라는 아르메니아를 강경 진압하지 못하였다.
  • 메소포타미아 석유 개발
    멘델레예프의 석유 개발 제안을 듣고 중동의 오일머니를 한국인들이 벌어왔던 것을 떠올린 귀남이 중동 석유개발사업을 선점하여 부를 조금 나눠받으면 어떨까 생각하여 아르메니아 출신 사업가 굴벤키안을 거간꾼으로 삼아 오스만 제국에 접촉했다. 당초 오스만 제국은 조선이 동방문제에 개입한 것도 그렇고 발칸 자치국들에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공급하는 등 속내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행보를 이어간다며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지만, 조선이 다른 열강을 끌여들여 세력 균형을 맞춘 상태에서 파디샤가 겸하고 있는 칼리파의 권위를 이용하여 페르시아만의 소국들을 개발에 참여시키면 오스만 제국에 도움이 된다고 다시 제안하자 속으로는 서양 놈들까지 데려오는 모습에 치를 떨었지만 아라비아 반도의 사우드 가문이나 하심 가문을 석유 이권을 미끼로 제어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석유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발칸 국가들의 독립
    메소포타미아의 석유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파디샤가 유럽내에서 대규모 유전을 운영하고 있던 왈라키아 몰다비아 연합공국에게 석유기구에 참여하라고 명령했는데 연합공국의 카롤 1세가 거부함으로써 긴장이 일어났고 결국 불가리아의 총리 스테판 스탐볼로프와 카롤 1세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결국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된다.
  • 청년 튀르크당 혁명
    1905년 반란을 일으킨 발칸 자치령들을 토벌하기 위해 투입된 청년 장교들이 오히려 수도로 진격하여 원 역사보다 3년 빨리 헌법을 복원하였다.
  • 이슬람 공화국 건국
    대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오스만은 동방의 병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음을 증명하였지만, 이 나라가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더욱 철저한 세속화와 근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케말 파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제국을 전복시키고 '숭고한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하였다.[17] 그리고 개혁의 발목을 잡는 지나치게 비대한 영토를 과감하게 청산했다.[18] 또한 와하브파를 후원하는 사우드 가문과 앙숙인 하심 가문과 합심하여 세속주의를 종교적으로 정당화했다.

2.6. 이탈리아 왕국

  • 리비아 속국화
    알 헤시라스 회의에서 독일 편에 서는 대가로 원 역사와 달리 전쟁을 치르지 않고 리비아의 '문명화를 위한 파트너'가 되었다.
  • 대전쟁
    원역사에서는 초반에는 중립을 지키다 협상국에 가담했다면 여기서는 전쟁 시작부터 동맹국측에 가담해서 몬테네그로, 사보이아 방면으로 공세를 취하며 그 지역을 취하고 있는 발칸 동맹, 프랑스와 싸웠다. 다만 졸전 전설은 어디 안가 두 전선 다 말아먹고 현타가 와 버렸다…. 그래도 전쟁 초반에 이런지라 사상자가 적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주도한 알프스 공세에도 참전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도 패하며 니벨 공세 때도 프랑스가 아웃 오브 안중 취급할 정도로 존재감이 줄어든다.

2.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중유럽 합중국

  • 연방당 등장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빈에서 인기 있던 빈 시장 카를 뤼거와 폴란드계로 헝가리계를 견제하고자 하던 외무장관 고우호프스키를 끌어들여 독일인이 수위에 서지만 나머지 구성원들은 평등하다는 이론을 가진 연방당을 만들어 밀어주고 있다.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오스트리아가 독일을 지지하는 대가로 독일은 이미 다민족국가라면 각 민족을 동등하게 대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동맹
    원 역사에서는 베를린 회의 이후 명목상으로는 오스만령이지만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게 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여기서 발칸 공국들이 독립할 때 같이 독립했는데 세르비아의 확장을 두려워하여 오스트리아와 여차하면 합병까지 가능한 동맹을 맺게 되었다.
  • 사라예보 사건 ×
    흑수단이 페르디난트 대공보다 먼저 사라예보에 도착한 테슬라의 자해공갈로 와해되어(…) 성 비투스 축일이 무사히 지나갔다. 덤으로 페르디난트 대공이 뒤늦게 성 비투스 축일의 의미를 깨닫고 그 자리에서 해명하여 은연중 반발하던 세르비아계 청년들도 어느 정도는 납득하였다.
  •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개편 성공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대전쟁의 책임을 지고 조기에 물러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중유럽 합중국으로 개편됐다.

2.8. 스페인

  • 쿠바 판매
    끝까지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았던 원 역사와 달리 필리핀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독립시킨 이후 거래를 통해 쿠바를 미국에게 넘겼다.
  • 스페인 제2공화국 성립
    대전쟁의 혼란한 틈을 타고 모로코를 공격했지만 대패한 상황에서 알폰소 13세는 끝까지 퇴위하지 않고 버티려 하다 원 역사보다 대략 15년 빨리 군주정 자체가 무너졌다.

3. 아메리카

3.1. 미국

  • 쿠바 매입
    한양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서 필리핀이 해방된 것을 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예로운 후퇴'를 제의했는데 스페인이 이를 받아들여 매각 논의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스페인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력을 동원해서 쿠바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허스트의 공격에 기를 못 쓰고 있다.
  • 마리아나 제도 확보
    독일이 필리핀 항구를 조차하는 것은 인정하고 마리아나 제도의 자치를 보장하며 장기적으로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조건을 내밀어 북마리아나 제도를 모두 확보했다. 임시 명칭은 차모로 자치령.
  • 미국-필리핀 전쟁 ×
    미국의 대외팽창정책이 온건한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어 미국-필리핀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극동위원회'라는 일종의 행정 고문단을 파견하는 선에서 그쳤다. 괌과 북마리아나 제도가 원래 스페인의 필리핀 부왕령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필리핀이 영유권 행사를 못하게 하려는 게 진의.
  • 러프 라이더
    미국-스페인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러프 라이더가 결성되지 않았다. 그 대신 필리핀에서 부패한 옛 제국과 결탁한 군벌들을 무력으로 응징할 러프 레인저가 탄생했다.
  • 테쿰세의 저주
    원 역사에서 윌리엄 매킨리를 암살한 무정부주의자 레온 촐고스가 '국제 신디컬리즘 협회'가 추진하는 다이토 제도 개발 사업에 합류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 테쿰세의 저주가 매킨리 대에서 깨졌다.
  • 태프트 플랜
    적백내전을 계기로 온 유럽에 대전쟁의 겁화가 덮치고, 조선이 창의단을 보내 국경을 가리지 않고 인도적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 미국에 알려지자 당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런 일에는 미국이 빠질수 없다는 마음 반, 유럽에 큰 빚을 지우겠다는 마음 반으로 측근인 윌리엄 태프트를 보내 유럽 각국에 재정적 지원을 건의한다.
  • 선량한 이웃(Good Neighbor) 정책
    대공황 시기 유럽과 대립하면서 식민지의 현지인들과 연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을 절절히 깨달은 미국이 세계 외교의 무대에서 제대로 된 우군을 만들기 위해 호우선린(好友善隣)을 외치며 중남미와의 연대를 추구하게 됐다.

3.2. 베네수엘라

  • 1902년 베네수엘라 위기
    원 역사에서 베네수엘라 대통령 시프리아노 카스트로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하여 영국, 독일, 이탈리아가 베네수엘라를 해안 봉쇄한 사건. 작중에서도 원 역사처럼 미국의 중재로 막을 내리긴 하였지만, 청국이 이 사태에 개입하려 한 일을 두고 영국과 독일의 뜻이 갈려 영독동맹의 균열이 가시화되었다.

4. 아프리카

4.1. 콩고 자유국

  • 레오폴드 2세의 사유화 실패
    레오폴드 2세가 콩고를 사유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사례를 걸고 넘어지자 이에 프랑스측은 조선측에 유영복을 풀어주는 대가로 조선의 지원사격을 받았다. 원역사에서도 파쇼다에서 전쟁위기를 겪은 바 있었을 정도로 식민지 경쟁이 극한으로 달려가던 상황이라 더 이상의 식민지 경쟁을 막고 싶었던 영국은 프랑스와 조선이 베를린 회담에서 내놓은 논리에 재빨리 탑승하여 프랑스를 밀어주고 여기에 주인공의 선의로 프랑스와의 공동노력으로 조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에 대한 자료까지 현장에 살포되면서 영프독을 필두로 나머지 국가들도 프랑스측의 논리에 동조하여 '실효지배'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현지를 점유하고 있는 정치 세력에 대한 문명화 지원, 그런 노력 성과에 대한 상세한 정보들을 공개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사유화가 무산되었다.

    결국 레오폴드 2세는 오히려 짐덩이가 되어버린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떠넘겼고 미국에서 식민지를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자유주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벨기에 꼴 나고 싶냐"라는 반박에 사용할 정도로 고생하고 있는 모양. 그렇다고 콩고를 포기하고 놓아주면 감당 못할거면서 뭣하러 식민지를 만들었냐고 온갖 비난과 비웃음을 뒤집어 쓸 상황이라 풀어줄 수도 없다. 레오폴드 2세가 백인의 짐을 짊어지고 문명화를 도와주겠다며 콩고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고 유럽인들의 지지와 후원까지 받았었는데 힘들다고 포기하면 '능력도 없는 주제에 나댔다'라거나 '자기 주제도 모르는 약소국' 같은 취급을 받아 국제적 지위와 신용이 폭락하는 것을 넘어 '혹시 사기친 것 아니냐(이게 진실), 우리 후원금 어떻게 썼는지 보자' 같은 의문까지 나올 수도 있다.

    오죽하면 한성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벨기에 특사가 예산을 빨아들이고 있는 콩고를 두고 벨기에의 미래에 드리운 암운의 핵심이라고 하소연할 정도이다. 정작 실제 역사의 '암흑의 핵심'은 콩고 자유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착취와 학대를 고발한 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독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웃음벨이자 사필귀정이다. 이 세계의 암흑의 심장은 자기 취미생활을 위해 벨기에 국민을 착취한 미친 왕에 대한 비판일 듯 작중에서도 언급했듯이, 백인의 짐이 진짜 벨기에의 짐덩이가 되어 버렸다.

    이후 언급을 보면 고무 자동차바퀴가 개발되는 등 고무가 돈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콩고 현지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고생하는 벨기에에 은혜를 갚겠다고 자발적으로 고무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생산량이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19] 그런데도 아직 투입한 자금만큼의 수입은 나오지 않고 있다는데, 원 역사처럼 일 못하면 손목 잘라가며 고무 채취를 강요할 수도 없는데다 주변국의 감시로 인해 그 수익마저 꿀꺽하지도 못하고 콩고에 나눠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1900년대 들어서는 흑자전환 했는지 조금은 숨을 돌렸다고 나오는 상황이다.

    이런 벨기에의 '선의'는 엉뚱하게도 대전쟁이 발발하면서 마침내 보답을 받게 되는데, '은인의 나라 벨기에'를 위해 수많은 콩고인들이 벨기에군에 자원입대 했다. 덕분에 인력은 넘쳐나지만 장비는 턱없이 부족해 갑자기 엄청나게 불어난 벨기에군은 장비도, 보급도, 공장도 모자라 현실적으로 군대를 운용할 능력은 없는 서류상 숫자였지만 독일이 진짜로 벨기에를 침공하면 벨기에는 당연히 협상국에 붙을 테고 영국이 얼씨구나 하고 지원함들을 줄줄이 보내서 물자를 쏟아부어 백만대군을 만들어 끌어올 것이니 독일의 침공을 저지해 벨기에 강간 사태를 방지하는데 한몫 톡톡히 했다.

4.2. 트란스발 공화국

  • 복서의 반란(Boxer Rebellion)
    일거리를 찾아 트란스발을 찾아온 의화단 출신의 청나라 노동자들과 이들에게 권법을 배운 흑인들이 처우개선을 주장하며 일으킨 시위. 영국인들과 보어인들에게 저들끼리 다투어서는 이들에게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어 절로 여러 민족 사이에 세력의 균형이 이루어졌다. 참고로 의화단 운동을 영어로 '복서의 반란'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원 역사와 달리 의화단 운동이 청나라가 아니라 트란스발 공화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물론 원 역사의 의화단 운동이 반외세 운동이었던 것에 반해 여기서는 광산 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을 명분으로 일어난 터라 비백인 계열 노동자들의 노동 운동으로서 역사에 남을 듯하다.
  • 제2차 보어전쟁 ×
    복서의 반란을 계기로 세력의 균형이 유지되고, 원 역사보다 일찍 체결된 러불동맹의 영향으로 영국과 독일이 손을 잡아 제2차 보어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4.3.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
    베를린 회담을 통해 '식민지화=열강의 투자'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아비시니아가 흔쾌히 외교권을 포기한 결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포기한 건 외교권이지 군권이 아니라는 논리로 누가 공급했는지 알 수 없는[20] 기관총과 연발소총으로 무장하고 영국의 지원도 받아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했다. 영국의 아프리카 정책과 협조하여 원정까지 나갈 정도지만 이탈리아에게는 자신들이 야만을 겨우 면한 정도라고 우기면서 할양한 에리트레아 뿐만 아니라 아비시니아 본토에도 투자하라고 을러대고 있는 모양.

4.4. 모로코 술탄국

  • 모로코 위기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독일인의 '삶의 공간'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식민지를 해체한다는 승부수를 던져서 국제 여론을 뒤흔든 빌헬름 2세가 모로코의 주권을 둘러싼 논쟁을 평화적으로 그리고 국제적 선의에 따라 해결하기 위한 회담 개최를 제의하여 이베리아 반도 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알헤시라스에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오스만, 조선, 청, 일본 등이 참여한 국제 회의가 열렸다. 빌헬름 2세는 이번 기회에 삼국협상 정도로는 독일을 억누를 수 없음을 보일 생각이었고, 영국과 프랑스는 이번 기회에 독일이 얼마나 고립되어 있는지 보여줄 생각이었지만 결국 어느 한쪽도 다른 쪽을 압도하지 못한 채 모로코의 주권을 원칙적 수준에서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4.5. 아샨티(가나)

  • 제4차 영국-아샨티 전쟁
    원 역사에서 영국의 황금 해안 총독이 아샨티 왕국의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 왕좌에 앉으려 해서 일어난 "황금 왕좌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영국이 제대로 '백인의 짐'을 지라는 아샨티의 요구를 묵살하고 주권 인정과 유학 등 비용이 적게 드는 당근만 내밀어 국내외적으로 "제4차 아샨티 전쟁"이라고 불리는 논쟁이 일어났다.

5. 전세계

  • 베를린 회담
    이 회담에서 식민지 경쟁을 막고 싶었던 기존 거대 열강,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이 암묵적인 합의로 프랑스에게 지원사격을 해주며 순조롭게 문명화를 이룬 조선의 선례를 들어 열강들이 식민지나 보호령을 갖기 위해서는 백인의 짐을 져서 그 지역들의 근대화를 도와야한다고 결정났다.
  • 만국평화회의
    필리핀에서 호세 리잘을 대표로 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아주대회 준비모임에 참가해 조선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동시에 스페인도 그것만은 참아달라고 솔직하게 부탁해오자 조선 조정은 대회 한 번 열어보자고 했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복잡해졌는지 당황하며 최익현의 제안으로 식민지 독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만국평화회의를 개최하였다. 원 역사에서 제1차 만국평화회의를 제안한 니콜라이 2세가 흔쾌히 러시아 측 특사를 파견하면서 당초 조선의 제안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이탈리아 등 다른 나라들도 참석했다. 필리핀 독립세력은 급히 임시정부를 선언하고 호세 리잘을 (본인의 동의 없이) 부통령 겸 외무장관으로 추대해서 참석시켰는데, 젊은 운동가인 호세는 쟁쟁한 열강의 대표들이 우글우글 모여드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서 뒤에서 지원을 요청해보려고 했지만 조선의 초대로 정식으로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서 식민지 욕심이 가득한 독일은 필리핀에게 새로운 후원자가 되어주겠다고 러브콜을 보냈다. 호세는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총리 김옥균에게 조선은 과연 신사의 나라라며 깊은 감사를 전했고 어어하다 일이 커진 김옥균은 주상에게 휘둘리던 열강 공사들의 심경을 깊이 이해했다.
    특히 멋모르고 백인의 짐을 졌다가 돈이 식민지에 끝없이 빨려나가 몇 해째 적자를 보다 파산하게 생긴 벨기에와 이탈리아가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며 '문명화'의 정의를 공정하고도 객관적으로 내려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여, 본 회의를 통해 식민지 독립의 절차와 요건을 규정한 '문명과 주권, 지배와 자치, 그리고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일반 협정'이 체결되었다.
  • 만국연합(유엔) 결성
    조선의 제안으로 항구적이고 견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고 대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불리도록 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국이 아니더라도 독립적인 군권과 외교권을 지닌 모든 정부가 참가하는 국제기구인 만국연합을 결성했다. 본부는 영세중립국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하며 의사결정과정은 일국 일표가 원칙이지만, 강대국들만 모이는 의결기구 '평화유지이사회'가 별도로 존재한다. 그 대신 평화유지이사회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달리 상임이사국이 존재하지 않으며 유럽에 다섯 자리, 미국과 소비에트 자유국 연방에 각 한 자리, '나머지 세상'에 네 자리가 분배된 쿼터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선출한 11개국으로 구성된다. 출범 당시를 기준으로 평화유지이사회의 구성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21], 이탈리아, 미국, 소련, 오스만,[22] 인도,[23] 대청, 일본[24]이다.
    • 만국통화기금(IMF)
      대공황이 가라앉은 이후 공황 재발 방지를 위해 창설하였다.
    • 만국연합군
      몇 번의 핵실험 이후 이런 위험하고 끔찍한 무기가 상대 진영에 넘어가기를 원치 않았던 유럽과 미국이 핵무기를 관리하고 유사시에 운용할 수 있는 준비태세를 유지할 조직으로 만국연합군을 창설하였다. 연합군은 각 이사국 군대에서 차출되는 소수 병력으로 이루어지며 그 구성은 주기적으로 바뀌는데 핵무기의 개발과 관리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였는지에 따라 달라지게끔 하여 열강 사이의 과학 경쟁이 수십 년간 지속됐다.

[1] 예를 들어 동양적 군신관계의 기본 전제인 충(忠)의 개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2] 말이 설득이지 사실상 유력가들과 연회에서 노는 거라 명예직이라 봐도 무방하다.[3] 베이징 대학의 초대 교장이다.[4] 1887년 미국인 및 미국계 하와이인들이 무장조직 '호놀룰루 소총대'로 칼라카우아 국왕을 협박해 제정한 헌법. 하와이 왕국은 입헌군주제 국가이며 비백인 주민들은 참정권이 없다고 명시했다.[5]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 품지 못하도록 단단히 경고를 해 주라'는 어명을 '호놀룰루 소총대가 무엄한 생각 품지 못하게끔 하라'라고 잘못 번역했다.[6] 청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 어뢰가 실전에 투입된 적이 없었다.[7] 초반에 전쟁의지를 잃어버린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하는 억지력으로도 활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8] 코뮌 출신 회계사들이 호조 관원들에게 서양식 회계를 알려줬고 벨레가 참의대부에 당선된 소식은 프랑스 본토에서도 꽤 화제가 되었다고.[9] 원 역사에서와 같이 작중에서도 사돈관계가 되었는데 드레퓌스 대위와는 성만 같고 혈연 관계는 없는 랍비 명문가이다. 그런데 조선에선 이게 와전되어서 오페르트의 집안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집안과 사돈을 맺은 것처럼 알려져서 오지랖 넓은 조선인들이 볼 때마다 제 일처럼 걱정하다 못해 오페르트가 30년 동안 그렇게 바라던 사직이 이루어졌다.[10] 이 덕분에 원 역사에서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한 프랑스 대통령 사디 카르노와 이탈리아 왕 움베르토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가 목숨을 건졌다.[11] 원 역사에서는 마르토프가 "여러 계층의 인물들이 참여하는 대중 정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 당연하다. 원 역사에서 레닌의 볼셰비키가 전위 정당론을 설파한 이유는 그나마 제국의회 출마 및 당선은 가능했던 독일과 달리 러시아에는 정치적 자유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의 일요일 이후 두마 선거를 제한적으로 실시하기로 결정하자 레닌은 볼셰비키 원로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두마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정했고, 이들은 두마에서 당시 러시아 민중과 볼셰비키의 스피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즉 레닌에게 마르토프는 당시 러시아의 정세에 대한 이해도 없이 독일 사민당의 전례만 답습하자고 주장하던 교조주의자(그의 표현에 따르면 경제주의자)였던 것. 원 역사의 독일보다도 더 진전된 본 세계관의 러시아라면 레닌과 마르토프의 포지션이 바뀌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셈이며, 작가의 높은 이해도를 반증한다.[13] 독일의 빌헬름 2세가 의회에 자기 세력을 심어서 재미를 보는 걸 그와 교류하던 니콜라이도 알고 있었고, 영국과의 협상에서 협상카드로 쓰기 위해서기도 했다.[14] 즉, 위에 어느 무지렁이가 외친 "신께서 보우하시는 차르 폐하 아래의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가 진짜로 실현됐다.(…)[15] 원 역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무 장관 언드라시 줄러가 제안한, 오스만 제국의 자유화를 통한 발칸 평화안을 담은 문서를 말한다.[16] 원 역사에서 OPDA, 오스만 공적 채무 관리국[17] 외부에서는 여전히 투르크나 터키, 조금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이름을 그대로 음독하여 알리예국이라고 부른다.[18] 헤자즈, 바그다드, 바스라, 요르단 강 연안 등은 하심 가문에게 맡겨 소련식으로 독립시켰고, 예루살렘 일대를 제외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 복지재단에 팔아 99년간의 장기상환을 통해 근대화 재원 마련의 수단으로 활용했으며, 이스탄불 정부에서 유지가 가능한 레반트와 모술은 종교의 자유와 자치권을 준 뒤 철저하게 장악했다.[19] 이에 대해 벨기에 정부처럼 싫은데 어쩔 수 없이 뜯기고만 있을 뿐이라면 콩고인들에게 제대로 수혜가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니, '진심으로 백인의 의무를 믿고 있는 이상주의자들'이 달려가서 진심으로 콩고인들을 도왔으리라는 해석이 나왔다.[20] 정확히는 누가 공급했는지는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수준이다.[21] 중유럽 합중국[22] 대전쟁에서의 선전으로 유럽의 병자에서 중동의 패권국으로 거듭났다.[23] 거수기가 필요했던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다.[24] 조선이 양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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