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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444444><colcolor=#670000,#FFCECE> 시기 | 1216년 (고종 3년) ~ 1219년 (고종 6년) | |
장소 | 한반도 북부 전역, 중부 일부 | |
원인 | 잔여 거란군의 고려 내지 침공 | |
교전국 | <rowcolor=black> 고려 (수세) 승 | 후요 (공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김취려 노경순 신선주 오응부 유돈식 정방보 정숙첨 조충 | 지휘관 [[후요| 大遼 ]] 야율걸노 (후요 국왕)[[후요| 大遼 ]] 아아[[후요| 大遼 ]] 야율금산[[후요| 大遼 ]] 야율금시[[후요| 大遼 ]] 야율통고여[[후요| 大遼 ]] 야율함사 |
병력 | 고려군: 15,000명 | 병력 규모 불명[1] |
피해 | 피해 규모 불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고려의 승리 - 거란 유민들의 항복 | |
영향 | 고려와 몽골 간의 외교 관계 성립 - 몽골의 고려에 대한 과도한 공물 요구 - 저고여 피살 사건으로 인한 고려-몽골 전쟁 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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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3세기 초 흥기한 몽골 제국에게 쫓기던 거란 유민 및 그에 합세한 여진 세력의 3년간(AD 1216 ~ 1219년)의 고려 침입.2. 정의
거란 분파에 의해 세워진 동요의 잔당이 중심이 된 이 세력은 1216년(고종 3년)부터 1219년(고종 6년)까지 고려의 북부 북계, 동계에서 중부 교주도, 서해도, 양광도, 경기, 그리고 수도 개경까지 산발적으로 침공하고 끝내 격퇴되었다. 사실 이 3년간 빚어진 충돌은 역사적으로는 거란의 침입(여요전쟁) 중 국사학계에서 그리 중시되는 주제가 아니며 1218~1219년 강동성 전투과 고려-몽골 전쟁 간의 전후사정으로 다루어지는 편이다. 이는 몽골과 고려의 1차 접촉이 이루어진 강동성 전투의 의의를 제외하면 거란, 여진의 이러한 침략이 고려로선 규모가 좀 더 커진 침입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본 항목이 사용한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이란 정의는 이러한 충돌전개와 강동성 전투의 제반상황을 지칭하기 위한 임시적이고 고식적인 명명일 뿐 그 제한을 벗어난 명칭이 아니다.학계 일각에선 「고려사」, 「고려사절요」등 사료가 기술한 적성세력 거란병(契丹兵)을 '거란 유민' 혹은 '거란 유민군'으로 명명해 서술하려는 관점을 취했다. 이는 12세기 요나라 및 그 직계 서요등 주류 거란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한편 이들이 가진 동요 잔당의 성격을 명확히 하려는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그러나 개별 전투들의 각론에 집중된 소극적 양상이므로 사건 전말의 거시성이나 충돌 상황 전반을 아우르기엔 불충분하며 결정적으로 사료 원문에서 이들을 거란 유민이라고 단 한번도 지칭한 기록이 없다는 문제가 있다. 사서에서는 대체적으로 '거란 여적(餘賊)' 혹은 '거란 유종(遺種)의 침입(난)'이라 서술함으로써 거란의 잔당임을 강조하는 수식을 취한다.
이처럼 공식적이고 학계 일반론으로 합의되어 통용되는 명칭은 없으나, 1960년대 역사서의 경향은 이 충돌을 대요수국의 난으로 지칭했다. 각종 DB에서도 동요 잔당의 침공을 총론 차원에서 접근하고자 할 시 대요수국이란 표제어로 접근치 않으면 전혀 무관한 기록이나 지엽적인 내용밖에 얻을 수 없다.
이렇듯 연표에선 각주나 부연없이 거란 유민 침략 자체는 간략하게 다룰 뿐이나 여몽전쟁 전 고려와 몽골이 접촉하는 계기가 된 전쟁이기에 강동성 전투는 어디서나 반드시 등장한다.
3. 배경
1206년, 칭기즈 칸은 수십년간 이어지던 몽골 부족간의 분열과 전쟁을 종식시키고 몽골 초원에 대한 통일 사업을 완수했다. 그는 지난 100여 년간 몽골족을 박해한 금나라에게 복수를 천명했고[2] 1207년 서하를 공격해 단숨에 제압함으로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뒤 1211년에 본격적으로 금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했다. 금나라 군대는 수적으로 몽골보다 우세했지만 전투종족 몽골제국군의 어마어마한 전투력과 탁월한 전략전술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몽골군은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며 중원을 피로 물들였다.금나라가 이렇듯 몽골의 침략으로 대혼란에 휩싸여있을 무렵, 금나라 치하에서 차별대우받고 있던 거란족은 이틈을 타 요나라를 부흥시키고자 세력을 일으켰다. 야율유가(耶律留哥)가 지휘하는 거란군은 요동을 장악한 뒤 대요국(大遼國)을 건국했다. 이를 동요(東遼)라고 한다. 야율유가는 스스로를 요왕이라 자칭했고 칭기즈 칸에게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하고 함께 금나라를 공격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금나라는 거란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장군 포선만노가 이끄는 수 만의 병력을 파견했다. 그런데 포선만노는 동경에 이르렀을 때 딴 마음을 품고 자신의 나라를 건국해 금나라 조정과의 관계를 끊었다. 국명은 처음에는 동진(東眞)으로 하였으나 후에 동하(東夏)로 바꾸었다.
그러던 중 동요에서 몽골 복속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세력이 야율유가의 동생인 야율시불(耶律厮不)을 추대해 야율유가를 축출하고 대요수국(大遼收國)을 건국했다. 이를 후요(後遼)라고 한다. 이후 후요는 몽골에 대한 충성 맹세를 철회하고 몽골군의 주둔을 거부했다. 이에 몽골은 축출당했던 야율유가를 필두로 자신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약속한 동진/동하와 연합해 후요를 공격했다. 후요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거란 유민들은 남쪽으로 도주해 압록강 건너편의 강변에 이르렀다. 9만에 달하는 거란 유민들이 몽골군의 살육을 피해 살 방법은 오직 고려로 진입하여 재기하는 것 뿐이었다. 이렇게 거란 유민들과 고려 사이 전쟁의 막이 올랐다.
4. 1차 침공
1216년 8월, 아아(鵝兒)와 야율걸노(耶律乞奴)가 통솔하는 거란 유민들이 압록강을 건너 압록강 가운데에 위치한 '대부영'이라는 섬에 포진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북계병마사 독고정에게 다음과 같이 알렸다."너희가 군량을 보내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우리가 반드시 너희의 강토를 침범할 것이다. 내가 훗날에 황색 기를 세우거든 네가 와서 황제의 조칙을 들으라. 만약 오지 않으면 너를 칠 것이다.”
그러나 독고정은 거란 진영에서 황기가 세워진 걸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양식을 보내라는 요구도 전부 묵살해버렸다. 이에 거란 군민 9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의주, 삭주, 창성, 운산, 영변 등 여러 고을을 침략하면서 고려 백성들을 살육하고 소와 말, 돼지를 마구 끌어다 잡아먹었다.
고려군은 이러한 거란 유민들의 침략을 조기에 진압하지 못했는데, 이는 당시 고려 최씨 무신정권 최고의 실권자였던 최충헌의 탓이 컸다. 변방에서 거란군이 압록강 건너편에서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최충헌은 "어찌하여 이러한 사소한 일을 가지고 역기를 번거롭게 하고, 국가를 놀라게 하느냐!"는 반응을 보이며 변방에서 애써 달려와 보고한 사람을 유배보내 버렸고 변방 장수들은 처벌받기 싫어서 "적군이 두세 성을 함락시킨 뒤에 보고하자."며 일부러 늦게 보고를 올렸다.
삭주지방에 살던 양수척이 거란 유민들의 길잡이 노릇을 한 것도 피해를 커지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이의민 집권 시절, 이의민의 아들이었던 이지영이 삭주 장군으로서 떵떵거렸는데, 이지영은 양수척 출신 기생인 자운선을 총애하고 양수척들에게 가혹한 징세를 가했다. 그러다가 이의민이 주살당하고 이지영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면서, 양수척은 "이제야 한숨 돌리겠다."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최충헌은 자운선을 취한 뒤 이지영보다 더 많은 공물을 거둬들였다.
이에 양수척들은 나라를 원망하며 근근히 지내다가 거란군이 쳐들어오자 그들에게 귀순해 앞잡이 노릇을 했다. 그러면서 익명서를 개경에 보내 "기생의 무리를 죽이면 나라를 돕겠다"는 뜻을 알렸다. 이에 최충헌은 자운선, 상림홍을 고향에 돌려보내 양수척들의 마음을 달래려 애썼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여러 고을을 제압하고 약탈을 자행한 거란군은 8월 24일 고려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찰을 보냈다.
"우리 대요는 건국한지 2백여 년만에 여진의 침범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그 후 거의 백년이 지나서 이제 여진에 빼앗겼던 모든 고을을 회복했다. 그러나 파속로의 일개 성이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가 여러 번 쳐서 이제 막 항복을 받았다. 이 지역의 관리들은 종전대로 등용하고 백성들도 여전히 자기 일에 안착하고 있다. 고려도 빨리 항복하라. 항복하지 않으면 곧 대군을 보내 사정없이 살육할 것이다."
물론 이는 허세였지만,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자 고려는 뒤늦게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했다. 상장군 노원순을 중군 병마사, 상장군 오응부를 우군 병마사, 대장군 김취려를 후군 병마사로 삼은 삼군 1만 5천명이 8월 22일 개경에서 출정했다. 이때 고려의 국왕 고종은 병사들을 독려하고 노원순에게 부월을 하사했다. 이후 삼군은 북진하여 9월에 청천강 남변의 조양진에 도착했다.
노원순은 삼군에서 100명의 별초군과 신기군 40명씩 차출해 총 540명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강을 건너 거란군을 공격하게 했다. 고려 특공대는 처음엔 수적으로 밀려서 고전했지만 후군 낭장 정순우의 맹활약에 힘입어 적병 82명의 목을 베고 포로 10명을 획득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삼군은 연주 동쪽에서 적 1백명의 목을 베었고, 서북 열읍의 김공석, 현장 등도 각기 수백 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으며, 서경의 병력도 조양에서 1백 60여 명의 적병을 죽였다. 이어 삼군은 귀주까지 진격, 200여 명을 참수하고 39명을 사로잡았으며 신리에서 190명, 조종수에서 76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거란군은 각지에 흩어졌던 동족들을 모아 개평에서 고려군과 회전을 벌일 태세를 갖췄고 삼군은 도착했으나 적의 기세가 대단해서 감히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때 후군병마사 김취려가 칼을 뽑아들고 말을 채찍질해 기존정과 함께 적군의 진영을 후려치자 거란군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때 거란군이 개평역 북쪽에 군사를 매복했다가 중군을 습격해 상장군 노원순을 비롯한 중군이 위험해졌는데, 김취려가 되돌아서 구원해준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노원순은 적이 만만치 않다고 여기고 밤중에 김취려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밝혔다.
“저들은 군사가 많고 우리는 군사가 적으며, 우군도 이르지 않았소. 당초에 3일 먹을 양식만 준비하였는데 지금 벌써 다 떨어졌으니, 물러가서 연주성(延州城)에 웅거하여 후일의 기회를 기다리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요.”
그러자 김취려가 말했다.
"우리 군사가 여러 번 이겼으므로 투지가 아직 왕성하니, 그 예봉을 이용하여 한 번 싸운 뒤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얼마 후 거란군과 고려군이 묵장(墨匠) 들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는데 고려군이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다만 이 와중에 김취려의 맏아들이 전사했다. 거란군은 묘향산으로 후퇴해 보현사를 불태웠고 삼군은 이를 추격해 2400여 명의 목을 베고 남강에서 거란군 천여 명을 빠뜨려 죽였다. 남은 거란 무리는 밤중에 창주로 도망가면서 여자와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고 가니, 목놓아 우는 소리가 "소 만 마리의 울음소리와 같았다"고 한다.
이때 어떤 거란인이 스스로를 '관가의 사람'이라고 칭하며 김취려에게 가서 요청했다.
"우리들은 귀국의 변경을 침범하였으니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마는, 부녀와 아이들이야 무엇을 알겠습니까. 청하건대, 모두 죽이지 마시고 또 우리에게 육박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곧 날짜를 정해 스스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고려군은 이를 믿지 않고 추격을 계속했고 거란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깃발, 소와 말 등을 확보했다.(다만 거란군이 소와 말의 허리를 찍거나 엉덩이를 찔렀기 때문에 다시 쓸 수 없었다.) 이후 고려군은 연주로 철군해 휴식을 취했다. 그러나 거란 유민들은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제와서 고려를 떠나 도로 돌아간다면 몽골군에게 어육이 될 게 뻔했으니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고려를 공략해 살길을 열어야 했다. 이에 거란 유민들은 추가 침공을 감행한다.
5. 2차 침공
5.1. 개전
1216년 10월, 거란 유민 수만여 명이 압록강을 건너 창주로 쳐들어왔다. 이때 거란군 150명이 창주성문을 돌파하려다 고려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그리고 거란군 2천여 명은 성주의 구천에 이르렀다가 서경군에게 패해 115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철수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참지정사 정숙첨을 행영중군원수, 추밀원부사 조충을 부원수로 삼은 토벌군을 편성해 김취려, 노원순과 합세해 거란 유민들을 섬멸하게 했다. 이때 개경 사람으로서 직업이 있고 없음을 논하지 않고 종군할 만한 자는 모두 소집하고 승려마저 군사로 삼으니 그 규모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그러나 말이 수만 명이지, 실상은 오합지졸이었다.[3] 정예병들은 이미 조위총의 난 때 사라진 지 오래였다. 결국 정숙첨은 함부로 진격하지 못하고 개경 인근에서 가만히 진을 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최충헌의 이같은 삽질은 고려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던 전세가 반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16년 10월 말, 삼군은 거란의 소규모 병력을 쉽게 격파한 뒤 성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거란군은 야밤에 청천강을 건너 서경으로 향했다. 당황한 노원순은 이를 막으려고 추격했지만 위주에서 거란군의 습격을 받고 전사자만 1000명이 넘는 패배를 당했고 이양승 등이 전사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개경에서 이 소식을 듣고 우는 사람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후 거란군은 안정역, 임원역, 참화사, 묘덕사, 화원사를 약탈하고 삼군의 추적을 따돌리고 대동강을 건너 서해도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개경 근처까지 쳐들어왔다.
거란군이 개경 가까이 진입하자, 최충헌은 자신의 가병을 좌경리로부터 우경리까지 사열했는데 그 길이가 2~3리(약 1km)에 달했다. 그리고 창자루에 은병을 달아매어 백성들에게 자랑하게 해 사병을 모집했다. 또한 아들 최우의 가병은 선지교로부터 이령을 지나 숭인문까지 이르렀는데, 기를 세우고 북을 세우면서 전투를 연습했다. 그러나 이는 실상 철저히 최씨정권의 권력을 보위하기 위한 행위였는데 문객 중 거란군을 무찌르겠다고 칭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먼곳의 섬으로 유배보냈다.
또한 최충헌은 자기 집에서 전투를 연습시켰는데, 문의 층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오를 수 없어서 사람이 말을 대신하게 해 사병들이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물러나면서 서로 싸웠다. 또 거란의 장군이 금패를 차고 있는 인형을 만들어서 이를 목베고 군사들이 그 목을 들고 개선하는 연극을 선보였고 기생들을 시켜 봉래산의 선녀가 지상으로 내려와 하례하는
그러던 중 거란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정숙첨은 몸을 일으켜서 군대를 이끌고 흥의역으로 진을 쳤다. 그런데 평주방어군이 합류하려고 온 것을 병사들이 "거란군이다!"라고 오해하고 달아났다.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오직 조충만이 군사를 통제해 혼란을 수습했다. 그후 적이 황해도 염주와 백주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자, 정숙첨 등은 흠의역, 금교역 사이에 진을 쳤다가 다시 후퇴해 국청사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러던 중 평주에서 거란군 두 사람이 사로잡혔는데, 그들이 말하길, "우리 군이 이달 그믐날에 개경을 침범하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최충헌은 이 말을 듣고 신선주, 기윤위 등에게 개경 시내에 군대를 배치하게 하고 최충헌 본인은 군사 수만 명으로 하여금 자기 집을 지키게 했다. 최충헌의 이같은 활약(?)은 백성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특히 흥왕사, 경복사, 왕륜사 등의 여러 절에 소속되었다가 이번에 거란군 토벌을 위해 종군한 중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일찍이 낭장 김덕명이라는 인간이 최충헌에게 아부하여 총애를 얻어낸 뒤 여러 절들을 깨부수고 중들을 요역에 강제 동원한 적이 있었고 중들은 이에 원한을 품고 거란의 침공으로 흉흉한 와중에 기회를 틈타 최씨 정권을 뒤엎기로 작정했다.
1217년 2월, 중들은 새벽에 군영을 이탈해 선의문 밖으로 달아나 "거란군이 벌써 쳐들어왔다."라며 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성 문지기가 열어주지 않자, 그들은 문을 부수고 개경 시내로 들어가 김덕명의 집을 박살낸 후 최충헌의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최충헌의 가병들이 들이닥쳐 중들을 격파했고 뒤이어 도망치는 승병들을 추격해 모조리 쳐죽였다. 이때 죽어간 승려의 수는 8백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숙첨이 하동군으로 귀양갔다. 정숙첨은 최우의 장인인 신분을 내세워 서너 군데에 큰 집을 지었고 원수가 되어서는 군졸들의 뇌물을 많이 받아먹었다. 게다가 그는 최충헌이 약한 군사만 맡기고 거란을 토벌하게 강요하는 걸 원망해 "최충헌이 왕실을 몹시 쇠잔하게 하여 스스로 적군을 불러오다시피 하고, 도리어 나를 보내어 적군을 막으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불만을 터트리다가 이게 발각되고 말았다. 최충헌은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했지만 최우가 간곡히 청해 그만두고 하동으로 유배보냈다.
그러나 반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217년 3월, 전라도 초군별감 홍부는 "전주 군사가 중도에서 제멋대로 난을 일으켜 주의 장리들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진위현(振威縣)[4] 사람 이장대와 이당필, 김례 등이 무리를 모아 현령의 병부와 인을 빼앗고 창고를 열어 촌락에 곡식을 나눠 주니 백성들이 많이 가담했다. 이장대는 스스로를 정국병마사라 칭했고 그의 군사를 의병이라고 이름붙였다. 광주[5], 수주의 군대가 출동해 반란을 진압하려 했지만 오히려 격파당했고 다시 충청도, 양주도의 군대가 출동해 맞붙은 결과 이당필과 김레가 잡혔고 반란군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이후 이장대는 상주로 달아났다가 안찰사에게 잡혀 개경에서 이당필, 김례와 함께 처형되었다.(이장대의 난)
5.2. 태조탄의 참패
고려의 내부사정이 영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을 무렵, 고려군은 거란군이 안주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정숙첨의 후임으로 중군 원수에 임명된 정방보는 5군을 이끌고 태조탄(평북 박천)에 이르렀다. 이때 비가 내리자, 고려군은 거기서 진을 치고 비가 그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데 고려의 장군들은 "거란군이 이 날씨에 쳐들어올 리 없고 군사들이 오랜 행군으로 몹시 지쳤으니 쉬게 하는 차원에서 술이나 마시자."며 술자리를 벌여 즐겼고 방비도 하지 않았다.그런데 어떤 사람이 흰말을 타고 진중으로 갑자기 뛰어들어 깃발을 흔들자, 거란군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갑자기 5군을 에워쌌다. 거란군은 전군을 먼저 격파한 후 중군으로 달려들어 불을 놓아 보루를 불살랐다. 여러 군은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오직 김취려가 이끄는 좌군 만이 버텼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5군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대장군 이의유, 백수정과 장군 이희주가 전사했고 김취려는 중상을 입었으며 전사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을 정도였고 치중, 군량, 무기 등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정방보, 조충, 김취려 등은 달아나 개경으로 돌아왔고 도망치는 군사가 길을 메웠는데, 거란군이 개경 선의문까지 쫓아가서 황교를 불사른 후 퇴각하니 개경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사대는 이 어처구니없는 참패를 초래한 정방보, 조충을 탄핵했고 고종은 결국 정방보, 조충을 파직했다. 이후 거란군은 황해도를 휩쓸고 개경으로 진군했고 최충헌은 개경 일대에 계엄을 선포하고 모든 관리들을 성 밖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그러나 최충헌 본인은 또다시 자기 집에서 꼼짝 않고 수천 사병들의 호위를 받아 지내는 졸렬한 행태를 선보였다.
3월 12일, 거란군이 임진강에 이르렀다. 이에 최충헌은 신선주 등 장군 5명에게 군대를 맡겨 저지하게 했지만, 그들은 19일에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을 위협했지만 도성 안으로 침공하지는 못하고 개경의 성밖 마을들을 휩쓸고 다녔다. 기록에 따르면, "오랑캐가 나라 창고를 점거해 털어먹고는 저장해놓은 것들을 불사르고 여자를 욕보이고 찢어 죽여, 길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으며 사찰은 열에 아홉이 불타 버렸다."고 한다.
5.3. 지지부진한 전쟁
1217년 4월, 거란군 5천여 명이 개성 바로 북쪽인 금교역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 조정은 5군을 새로 편성해 상장군 오응부를 중군병마사, 최원세를 전군병마사, 공천원을 좌군병마사, 오인영을 우군병마사, 유돈식을 후군병마사로 삼았다. 거란군이 최충헌의 고향인 우봉현을 약탈하고 남하해 교주도(현 강원도 영서) 철원을 함락시킨 뒤 원주와 충주를 장악해 약탈과 살상을 일삼자, 조정은 재차 5군을 투입해 이들을 토벌하게 했다. 그런데 5군은 적극적으로 적과 싸우려 하지 않았다. 후군병마사 유돈식이 홀로 출발해 교하로 향하자, 중군병마사 오응부가 사람을 시켜 알렸다.그러나 유돈식은 듣지 않았다.
"사군이 우리와 함께 가서 적을 쳐야 한다."
오응부는 할 수 없이 유돈식을 따라 4군을 이끌고 갔지만 적성에서 적을 보지 못했다. 이에 최충헌이 직접 고종에게 이들의 처벌을 건의했다.
"오군이 머무른 채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군량만 낭비하고 있습니다. 오응부를 파면하고 최원세에게 그를 대신하게 하고 김취려를 전군병마사로 삼으소서."
고종은 이에따라 오응부를 파면했고 나중에 유돈식 역시 탄핵당하자 그의 직임을 면직시켰지만 유돈식이 최충헌의 생질인 점을 감안해 파면은 하지 않았다.
이무렵 태조탄에서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김취려는 명을 받고 전군병마사에 부임해 최원세와 함께 법천사로 진군했다. 그들은 충북 제천의 보리골에서 거란군을 격파해 3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달현에서 거란군과 한바탕 격전을 벌였다.(달현 전투) 이후 5군의 보고에 따르면, 이때 좌군이 패하여 도망쳤지만 중군과 후군이 적의 배후로 밀고 들어가 마침내 거란군을 격파하고 수많은 수의 적의 목을 베어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정 안팽조가 화살을 맞고 개경으로 달아나서 보고하길, "거란군은 고작 2명만 죽었고 나머지 죽은 사람은 모두 우리 군사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선 어느 쪽이 맞는 말인지에 대해 추가 설명이 없다. 다만 확실한 건 거란군이 경기에서 벗어났다는 것 뿐. 거란군은 다시 원주로 진군하여 공격을 가했다. 원주 관민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해 거란군을 아홉번이나 격퇴했지만 결국 10번째 침공에 무너졌고 원주는 그야말로 초토화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쟁이 지지부진하던 사이, 또 반란이 터졌다. 서경병마사 최유공이 군대를 이끌고 5군을 구원하려 했는데, 최광수라는 군졸이 동료들을 선동해 서경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최유공은 사졸들을 등쳐먹기를 좋아해 그들의 원한을 사서 병사들이 자신을 버리고 가는 걸 막지 못했고 그와 함께 서경군을 감독하던 예부낭중 김성은 술에 취해서 일어나질 못했다. 그 후 최광수는 서경에 틀어박혀 무려 '고구려 홍복병마사'를 자칭해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 반란은 최광수와 아는 사이였던 정준유라는 사람이 최광수에게 귀순하는 척하다가 그의 수하 필현보가 소매에 숨겨뒀던 도끼로 쳐죽인 덕분에 조기에 진압할 수 있었다.
한편 김취려, 최원세가 이끄는 5군은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눠 적을 추격해 제천에서 적병을 격파했는데 물에 떠오른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려갔다고 한다. 사흘 후 박달현까지 진군한 고려군의 총지휘관 최원세는 김취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기는 대군이 머무를 곳이 못된다. 산 아래로 내려가 진을 치겠다."
그러자 김취려가 반대했다.
"만약 적이 먼저 고개에 웅거하면 우리가 아래에 있게 될 것이다. 적이 들이친다면 날쌘 원숭이라도 지나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이에 고려군은 고개에 올라 진을 쳤는데, 과연 거란군이 새벽에 고개 남쪽으로 진군해 좌우의 봉우리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군은 최원세와 김취려의 독전에 힘입어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고 거란군은 마침내 크게 무너져 동쪽으로 달아났다.(박달현 전투) 이후 고려군은 대관령까지 쫓아갔는데 병사들이 대관령의 험준한 지형에 겁을 집어먹고 진군하길 거부하는 바람에 주저앉고 말았고 거란군은 그 사이 대관령을 넘어 명주(현 강원도 영동 강릉)로 진군했다.
열흘 후. 고려군은 대관령을 넘어 평창에서 적을 격파하고 명주를 포위한 적도 격파했다. 고려군은 이 기세를 몰아 등주까지 추격했다가 패했고 진주(陣主) 오수정(吳守貞)이 전사했다. 이후 거란군은 북상하여 동계 넘어 여진의 영토로 도망쳐버렸고 고려군은 더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방어진지를 3겹으로 구축하여 거란 유민들과 대치했다. 그런데 그 사이 김취려의 병이 심해지자, 부하들이 "돌아가서 병을 치료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김취려는 거부했다.
"차라리 변경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병을 가지고 수레에 올라 집에서 편안히 지내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나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개경으로 돌아와 병을 고치라는 칙령을 내렸고 왕명으로 귀환해 몇달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렇듯 고려와 거란 유민들과의 전쟁은 추격전 양상으로 전개되면서도 좀처럼 끝나질 않았다. 이때 전쟁을 결정적으로 결판지을 영웅이 등장하니, 바로 지난날 태조탄에서 패배를 초래해 파직당했던 조충이었다.
5.4. 조충의 활약
조충은 일찍이 정방보의 부장으로 참전했다가 태조탄에서 술마시고 놀다 패하는 바람에 파직당하는 굴욕을 당했다. 사람들은 그를 '백면서생'이라고 조롱했지만, 조충은 치욕을 씻기 위해 병서를 읽으며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이 시기 조충은 시를 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萬里霜蹄容一蹶 만리 달리던 준마, 발 한번 헛디디고는
悲鳴不覺換時節 슬피 소리내어 우느라 시절이 바뀐 줄 몰랐네
儻敎造父更加鞭 만일 조보[6]로 하여금 다시 채찍을 가하게 하면
踏躪沙場摧古月 백사장 짓이겨 밟으며 오랑캐를 꺾으리라.
悲鳴不覺換時節 슬피 소리내어 우느라 시절이 바뀐 줄 몰랐네
儻敎造父更加鞭 만일 조보[6]로 하여금 다시 채찍을 가하게 하면
踏躪沙場摧古月 백사장 짓이겨 밟으며 오랑캐를 꺾으리라.
그러던 1218년 3월, 최충헌은 고종에게 궤장을 하사받은 후 4월에 조충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무렵에 병에서 회복된 김취려도 합류하면서 고려군은 본격적으로 거란 유민 토벌에 착수했다. 조충은 우선 7월에 4군을 이끌고 황해도 서흥군에서 510여 명의 적병을 죽이고 9월에 안찰사 이적의 경상도 병력과 합세했다.
이에 거란군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고자 조충을 공격하자, 조충은 좌우군을 길게 늘어서게 한 후 북을 치며 적과 격렬히 싸웠다. 이때 이적의 부하가 적군이 조충의 군대를 포위하여 맹공격을 가하는 모습에 두려워하며 이적에게 퇴각하자고 건의했다. 그러자 이적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군사를 이끌고 전장에 나아갔을 때 오직 적을 만나지 못할까 걱정했다. 이제 적을 만났는데 피한다면 용맹한 자라고 할 수 없다."
그는 곧 군대를 이끌고 돌격을 감행했고 거란군은 조충과 이적에 의해 대패를 당했다. 그후 거란군은 별동대를 보내 고려군의 보급로를 끊으려 했지만 독산에서 박의린에 의해 패배했고 조충이 뒤이어 적의 주력을 섬멸해버렸다.
이에 거란의 왕자 야율금산 등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강동성으로 퇴각해 농성했다. 고려군은 서북면에 흩어진 거란군을 격파한 후 1218년 9월부터 강동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강동성에 주둔한 거란군 숫자가 5만에 달해서 쉽사리 공략되지 않았다. 그러던 때에 뜻밖의 세력이 개입했으니,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
5.5. 몽골의 개입과 강동성 전투
자세한 내용은 강동성 전투 문서 참고하십시오.1218년 12월, 동진의 2만 군대와 몽골군 1만 군대가 국경을 넘어 고려로 진입해 거란군이 점령하고 있던 맹주, 순주, 덕주를 함락시키고 강동성으로 향했다. 고려에 미리 허락을 구하지도 않은 채 3만이나 되는 외국군이 고려를 돕기 위해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연유를 묻는 고려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거란병이 너희 나라에 도망해 있은 지가 3년이나 되었는데도 이들을 소멸하지 못한 때문에 칸께서 군사를 보내어 이를 토벌하니, 너희 나라는 오직 군량을 도우라."
이에 조충이 개경에 어찌해야 할지를 묻자, 조정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대국이 군사를 일으켜 환난을 구제하려고 하니, 그들의 모든 지휘에 따라라."
이후 몽골 원수 카치운(哈眞)[7]은 고려 조정에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이에 김취려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몽골군 진영으로 단독으로 찾아갔다. 카치운은 우선 칭기즈 칸과 동진국의 포선만노에게 절하라고 요구했다. 김취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하늘에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천하에 어찌 두 황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김취려는 동진국의 포선만노에 대한 절은 거부하고 칭기즈 칸이 있는 방향으로만 절했다. 카치운은 그의 이 같은 언행과 아름다고 긴 수염을 갖춘 용모에 감탄하며 나이를 물었다. 김취려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걸 알게 된 카치운은 아예 김취려를 형으로 삼고 자신은 동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수일 후 조충이 찾아가자, 카치운은 조충에게도 나이를 물었다. 이에 김취려가 조충이 자기보다 위라고 대답하자, 카치운은 조충을 형으로 모셨다.[8]
이후 몽골-동진-고려 연합군은 합동으로 강동성을 공격했고, 가뜩이나 식량이 떨어져가는 데다 우두머리끼리 내분을 벌인[9] 거란 유민들은 마침내 마지막 지도자 야율함사(耶律喊舍)가 자살하면서 1219년 2월에 항복했다. 카치운은 거란 포로 중 700명을 고려에게 줬고, 김취려와 조충에게도 15살 소녀 9명을 선물로 보냈다. 그리고 고려로 끌려간 거란족은 집단촌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6. 결과
거란 유민들은 전쟁에서 패해 고려와 몽골제국의 포로로 끌려갔다. 몽골로 끌려간 거란족은 내몽골의 서루지방(西樓地方)에 사민되었는데 이후 대체로 몽골족과 동화되어 정체성을 상실한다. 한편 고려로 끌려간 거란족은 고려 정부에 의해 각지의 황무지에 마을 단위로 사민되어 농경지 간척에 동원되었는데 이 집단촌은 거란장(契丹場)이라 불리게 된다. 이들의 대우는 향, 부곡, 소처럼 천민에 가까웠다. 일부는 백정의 시조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이후 몽골은 "우리가 도와줬으니 우리에게 감사를 표하라."는 명목을 내세우며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마구 수탈했다. 결국 이로 인해 양국간 갈등이 고조되었고 1225년에 저고여 피살 사건이 발생하여 여몽전쟁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7. 대중매체
사극 무인시대에서 다뤘는데, 최종화인 158화가 가까워지는 155화 후반부터 나온다. 후반부 이야기와 제작비 문제 때문인지 전투씬이 매우 영 어설픈 게 흠. 전체적인 내용 자체는 충실히 나오는데, 전투씬은 양측에서 서로 맞붙는 순간 바로 끝. 이러는 상황. 덤으로 거란의 재현은 그야말로 엉망이다. 고려군도 별 차이 없다.8. 관련 문서
[1] 유민이 90,000명이라 하였지만 유민의 속성을 고려해본다면 모두 병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유민 전체수를 생각해 본다면 병력이 적어도 수만은 되었을 것이다.[2] 칭기즈 칸의 조부 암바가이 칸이 금의 해릉왕에 의해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기에 칭기즈 칸 개인적으로도 금나라는 꼭 복수해야 할 대상이었다.[3] 대부분이 노약자들이었다. 용맹한 자들은 죄다 최씨 무인 정권의 사병들이었다.[4] 현재 경기도 평택 지역의 옛 지명이다.[5] 지금의 경기도 광주이다.[6] 주나라 때 말 잘 부리던 사람[7] 칭기즈 칸의 동생 카치운과 동명이인이다.[8] 사실은 두 사람 다 나이를 10살 정도 부풀렸다. 실제 조충은 1171년생으로 당시 47살이었고 김취려는 1172년생으로 46살이었다. 아마도 기선 제압을 위해서 나이를 10살 정도 더 부풀린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카치운은 1166년생이었다.[9] 승상 야율걸노가 야율금산에게 죽었고 야율금산은 야율통고여에게 죽었고 야율통고여는 야율함사에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