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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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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SHING VISION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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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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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I'LL KILL YOU 1986년 オルガスム
1989년 | ENDLESS RAIN 1990년 WEEK END
1991년 Silent Jealousy | Standing Sex / Joker | Say Anything 1993년 Tears
1994년 Rusty Nail 1995년 Longing ~跡切れたmelody~ | Longing ~切望の夜~
1996년 DAHLIA | Forever Love | CRUCIFY MY LOVE | SCARS 1997년 Forever Love(Last Mix)
1998년 THE LAST SONG 2008년 I.V.
2011년 Scarlet Love Song -BUDDHA MIX- | Jade 2015년 BORN TO BE FREE
2023년 Ange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argin-top: -5px; color: #ff0d13; min-width: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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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 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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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0d13> 출신지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장르 하드 록, 헤비 메탈, 발라드
레이블 EMI
소속사 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활동 1982년[1] ~ 1997년
2007년 ~ 현재
멤버
[ 펼치기 · 접기 ]
YOSHIKI(드럼 & 피아노)
Toshl(보컬)
PATA(기타)
HEATH†(베이스 기타)
SUGIZO(기타 & 바이올린)
HIDE†(기타)
TAIJI†(베이스 기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The Official X Japan Website)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멤버3. 일대기4. 음악 특징5. 여담
5.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5.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5.3. 사건/사고5.4.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6. 영화
6.1. We are X6.2. Junk story6.3. HURRY GO ROUND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7.2. 앨범
7.2.1. 정규7.2.2. 라이브7.2.3. 컬렉션7.2.4. 리마스터7.2.5. 사운드 트랙
8. 라이브 콘서트 목록
8.1. 개별 문서가 있는 라이브 콘서트

1. 개요

일본비주얼계 록밴드.

2. 멤버

멤버 일람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현 멤버[2]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TAIJI HIDE
전 멤버 ATSUSHI[3] TERRY[4] EDDIE
HIKARU[5] TOMO
HALLY[6]
JUN[7]
ZEN[8]
KERRY
SATORU
ISAO[9]
멤버 변동 내역[10]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1982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1984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TOMO
1985년 6월 YOSHIKI Toshl ATSUSHI TERRY EDDIE
1985년 10월 YOSHIKI Toshl TAIJI JUN HALLY
1985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JUN
1986년 1월 YOSHIKI Toshl HIKARU ZEN
1986년 4월 YOSHIKI Toshl HIKARU JUN
1986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1986년 12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SATORU
1987년 1월 YOSHIKI Toshl TAIJI ISAO HIDE
<rowcolor=#ffffff> 1987년 4월 YOSHIKI Toshl TAIJI PATA HIDE
1992년 1월 YOSHIKI Toshl 공석[11] PATA HIDE
<rowcolor=#ffffff> 1992년 8월 YOSHIKI Toshl HEATH PATA HIDE
1997년 12월 31일 X JAPAN 해체
2007년 10월 YOSHIKI Toshl HEATH PATA 공석[12]
<rowcolor=#ffffff> 2009년 5월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2023년 11월 YOSHIKI Toshl 공석[13] PATA SUGIZO

2.1. YOSHIKI

<colbgcolor=#000><colcolor=#ff0d13> YOSHIKI
요시키
파일:XJAPAN-YOSHIKI.png
본명 하야시 요시키 ( )[14]
출생 1965년 11월 2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age(1965-11-20)]세)
공식 사이트 YOSHIKI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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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Toshl

<colbgcolor=#000><colcolor=#ff0d13> Toshl
토시
[15]
파일:XJAPAN TOSHI.png
본명 데야마 토시미츠 (出山 利三)
출생 1965년 10월 1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age(1965-10-10)]세)
공식 사이트 Toshl Official WEBSITE 武士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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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PATA

<colbgcolor=#000><colcolor=#ff0d13> PATA
파타
파일:XJAPAN-PATA.png
본명 이시즈카 토모아키 (石塚 智昭)
출생 1965년 11월 4일, 일본 치바현 치바시 ([age(1965-11-04)]세)
공식 사이트 PATA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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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HEATH

<colbgcolor=#000><colcolor=#ff0d13> HEATH
히스
파일:external/visualioner.files.wordpress.com/320.jpg
본명 모리에 히로시 (森江 博)
출생 1968년 1월 22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사망 2023년 10월 29일 (향년 55세)
공식 사이트 HEATH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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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모리에 히로시(森江 博). 1992년 1월 베이스 주자였던 타이지의 밴드 탈퇴 후 약 반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 새로이 영입된 멤버로 히데의 전 여자친구의 애인이라는 인연이 주효하게 작용해 밴드 X JAPAN에 가입하였다. 전 여친의 현 남친을 밴드에 데려오는 히데의 대인배성은 도대체... 타이지의 후임을 뽑는 베이스 오디션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베이스를 연주한 일화는 오래전부터 유명하다.

주로 사용하는 악기는 히데와 같은 페르난데스 회사의 베이스로 워록 프레시전 베이스, 스탠다드 투 프레시젼 베이스를 주력으로 썼으나, 재결합부터는 재즈 베이스를 주로 쓰고 있다.

베이스 라인에 멜로디컬한 부분을 가미하고 화려한 테크니컬 플레이를 선보이는 등 X 내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던 타이지와 달리 베이스의 기본 역할에 충실했던 부분에서 X 가입 당시 타이지와 상당히 많은 비교를 받았다.[16] X JAPAN의 후임 베이스 주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화해 내는 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할 수 있다.[17] 엄연히 완벽주의로 유명한 요시키가 정식으로 주최한 오디션에서 합격한 베이시스트임을 생각할 때, 실력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 힘들다고 평가된다. 다만 타이지가 편곡 부분에 있어서 높은 참여도를 보이는 등,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확실히 어필했던 것에 반해, 자신만의 음악적 어필이 부족하고 세션 베이시스트의 인상이 짙은 히스에겐 아쉽다는 평가가 많은 듯하다. 타이지 탈퇴 전후로 사운드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애초에 타이지와 요시키의 음악적 갈등은 작편곡권 쟁탈전 양상이였고 사운드가 달라진 문제는 오히려 타이지 탈퇴 후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은 요시키가 하고 싶은대로 자신의 음악을 강력하게 하게된 이유가 크다.

합을 맞추느라 늘 요시키 쪽을 바라보면서 연주하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던 이전의 막내 시절[18]과는 달리 재결성 이후로 제법 관록이 붙은 모습이 되었으며 이전보다 뚜렷하게 들리는 베이스 사운드로 팬들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요시키, 토시에 비하면 비중이 여전히 적은 편이지만 이전에 파타와 세트로 공기 취급 당하던 시절보다는 나은 듯하다. 2009년에는 히데에 대해서 요시키와 설전이 있었으며 탈퇴 소동이 일어나면서 아이러니하게 밴드 내 존재감이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SUGIZO까지 가입하면서 17년만에 막내 탈출했다.

X JAPAN으로서의 활동 외에는 솔로로서의 활동 및 파타, 히데 밴드의 I.N.A와 함께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한 바가 있다.

23년 11월 8일, 히스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55세였으며 최근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는데 10월 말 쯤 사망했다고 한다. #

2.5. SUGIZO

<colbgcolor=#000><colcolor=#ff0d13> SUGIZO
스기조
파일:50072-sugizo-x-japan-photoshoot.jpg
본명 스기하라 유네 (杉原 有音)
출생 1969년 7월 8일, 일본 가나가와현 하타노시 ([age(1969-07-08)]세)
공식 사이트 SUGIZO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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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 SEA의 멤버이자, X JAPAN의 재결성 후 히데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타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합류하였다. 1969년생으로 X JAPAN의 막내가 되었다. 합류 전부터 히데와 요시키와는 각별한 친분이 있던 사이이다.[19]

광장히 꾸미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 아름다운 저의 몸동작을 보십시오. 참고로 현재 기타 리프를 요시키가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기타 세션은 스기조가 맡고 있다. 기타 실력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파일:Sugizo_kkkkkkkkkk.gif

또한 스기조의 집안(도쿄 교향악단)은 오케스트라를 전공하였다. 아버지는 트럼펫, 어머니는 첼로. 덕분에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학습하였다.

락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YMO와 ジャパン(재팬), RCサクセション(RC섹션)를 본 순간 락 뮤지션을 꿈꾸었다고. 고등학교 2학년 전까지만 해도 놀기만 하다가 운좋게 가입한 교내 밴드에서 여러 가지 테크닉을 구사하며 헤비메탈 분야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7~18살 무렵 자신의 밴드 PINOCCHIO에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꿈꾸며 구매한 첫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고. 밴드 활동 과정에서 작곡을 위해 피아노와 키보드까지 익혔다고 한다. 이후 LUNA SEA에 리드기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가입하였다.

여담으로 개명을 두번이나 하였다. 첫 이름은 杉原 康弘(스기하라 야스히로). 첫 개명 당시는 杉原 悠(스기하라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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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HIDE

<colbgcolor=#000><colcolor=#ff0d13> HIDE
히데
[20]
파일:XJAPAN-HIDEPP2_.png
본명 마츠모토 히데토 (松本秀人)
출생 1964년 12월 13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사망 1998년 5월 2일, 일본 도쿄도 (향년 33세)
공식 사이트 hide official web site [hide-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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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TAIJI

<colbgcolor=#000><colcolor=#ff0d13> TAIJI
타이지
파일:XJAPAN-TAIJIPP_.png
본명 사와다 타이지 (澤田泰司)
출생 1966년 7월 12일,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사망 2011년 7월 17일, 미국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섬 (향년 45세)
공식 사이트 http://taiji-tsglast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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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사와다 타이지(澤田泰司). 동양 최고의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인물로, 멤버들 중 연주력에 있어서 가장 좋은 평을 받았었고 히데와 함께 X의 비주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X 시절 트레이드 마크인 빗자루 머리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21]

X 시절 명곡이라 불리는 곡들은 거의 TAIJI가 손을 댔다. 요시키의 멜로디 메이킹 감각도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없었다면 빛을 못 보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지배적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러닝 타임의 곡들에 엄청난 몰입도를 부여한 것은 타이지의 편곡이다. 요시키의 원곡에 비해 화려하고 정교해진 I'll kill You와 X, オルガスム(오르가즘), 紅(쿠레나이)가 대표적이다.[22]

X JAPAN의 노래는 요시키의 멜로디 작곡 능력과 요시키의 멜로디를 메탈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가 있는 리프로 다듬는 히데의 기타 리프 메이킹 능력, 토시의 특색 있는 보컬 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의 벨런스를 적절히 조절하고 정돈하는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조화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슬랩, 태핑 등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면서도 이러한 테크닉들이 따로 놀지 않고 곡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뛰어난 베이스 플레이어이며[23], 원래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서 그런지 클래식 기타 연주에도 실력이 있어서 기타 세션까지 할 정도이다.[24] X 시절 히데와 파타에게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기타 실력이 뛰어나다. 그의 실력은 내외로 유명하여 X의 탈퇴 직후 곧바로 일본의 전설적 헤비메탈 밴드 Loudness에 곧바로 가입했을 정도다. 라우드니스의 기타리스트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TAIJI를 눈독 들여 놨었다가 탈퇴(사실상 해고) 일주일만에 곧바로 데려와 버렸다. 애용하는 모델은 킬러의 Dagger, Impulse 모델을 사용하다가 시그내처 모델인 Phoenix 베이스를 사용한다. 물론 레코딩시에는 Fender Precision Bass를 애용한다.

요시키의 독재적인 밴드 운영에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멤버였다. 가입 초창기에는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요시키에 반발하여 밴드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Endless Rain이 발라드와 락의 절묘한 궁합으로 히트하고 멤버들이 발라드 곡 작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25] 요시키가 '앞으로 앨범에 들어가는 발라드 곡은 항상 자신만이 작곡한다.'라는 의견에 반기를 들어 <Voiceless Screaming>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멤버들의 참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본래 요시키의 곡으로만 채워질 예정이었던 Blue Blood 앨범에 히데의 곡 <Celebreation>, <Xclamation>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멤버들 중 가장 창작에 비중이 적었던 토시를 위해서 자신이 작곡한 곡은 항상 토시가 작사를 하게 하였다.

결국 요시키와 잦은 마찰을 겪으며 1992년 도쿄 돔 콘서트를 마치고 해고. 공식적인 이유는 음악성 차이였지만 사실은 YOSHIKI의 권고로 인한 해고성 탈퇴였다. 요시키가 혼자 다른 멤버의 두 배가 넘는 인세를 차지하는 데 대하여 항의했던 것이 그 직접적인 이유다.[26] 이미 JEALOUSY 앨범 녹음 들어갈 때부터 사실상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계약처분을 받았다. '스튜디오 뮤지션'이란 말 그대로 앞으로는 X JAPAN의 정식 멤버가 아닌 세션 뮤지션 취급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디 시절 부터 함께 밴드를 이끌던 타이지의 입장에서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철저히 붕괴시키는 계약이었을 것이다. 즉 인세 문제가 나왔을 당시에 이미 요시키는 타이지를 해고 처리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타이지의 문제도 있었다. X의 연습을 빠지고 LOUDNESS친목질을 하러 놀러간 적이 꽤 있었고 당시 타이지는 알콜 중독이었으며 심지어 각성제까지 손을 댔다는 증언이 있기 때문이다. 도쿄 돔 공연에서도 요시키가 타이지에게 "너는 하루만 무대에 오르고 다른 날은 다른 세션 멤버를 쓰겠다"고 했다가 히데가 요시키를 설득하고 타이지 또한 "도쿄 돔 공연 만큼은 3일 전부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다오"라고 부탁해서 겨우 무대에 섰다고 한다. 이후 벌인 해고 소송에서 패배, TAIJI는 LOUDNESS를 거쳐 Cloud Nine 등등. 헤메고 헤메이다 D.T.R의 실패로 생활고를 겪다가 이혼까지 당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폭행을 당하면서 턱이 마비되고 치아가 4개나 부러지고,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비운의 천재였다.

히데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깨달아 재활 후 2000년에 자서전 '전설의 밴드 X의 생과 사'를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복귀했다. 2005년에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지만, 이후 자신의 밴드인 D.T.R을 재결성하여 음악활동을 해왔다. 또한 2010년 8월 15일에는 X JAPAN의 요코하마 라이브에서 게스트로 초청되어 "7인의 X"로 X를 연주하였으며, 요시키와 화해를 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2011년 7월 14일. 미국 사이판으로 향하던 비행기 내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하고 기내 좌석과 창문을 발로 차는 등 난동을 부려 체포되었다가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 병원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되었다가 17일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 락계에서도 칭송받던 베이시스트의 허무한 죽음이였다. 여성 매니저와 관련된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로 불명예스러운 소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마저도 사실관계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 내용과 다르게 자살 시도에 따른 상흔이 없고,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가 타이지인 척 하며 유족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구치소 측에서 검시 결과를 은폐하는 등 부정이 드러나면서 사인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부인 아카츠카 토모미를 비롯한 타이지 유족의 구명활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6년 12월 29일 일본 외무성 재사이판 영사사무소에서 진상규명에 착수한다는 보도를 발표하였다.

유족 중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이 있는데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애니메이션 주제가[27]와 각종 슈퍼전대 시리즈의 엔딩곡을 담당한 Sister MAYO다.


3.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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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 특징

음악적인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 메탈 스타일에 가깝다. 물론 사실상 당시 멜로딕 파워 메탈은 제대로 된 명칭도 갖추지 못한 태동기였지만 헬로윈을 연상시키는 멜로딕 스피드 메탈과 일본식 멜로디와 편곡이 가미된 음악이 되었다.[28]

당시 영미권에서 불어온 일종의 '스피드 메탈' 장르의 음악을 일본 특유의 멜로디로 풀어나가는 음악으로 인디즈 시절을 보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워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메탈 쪽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한 듯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일본 1세대 멜로딕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볼 수도 있다.[29][30]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창조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29분짜리 대곡 ART OF LIFE를 통한 세계 최초의 심포닉 파워 메탈과 시각적 예술까지 강조한 비주얼 락이 있다.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일본의 메이저 음악 시장에 올리고, LUNA SEA, GLAY의 신인 밴드들을 발굴하면서 비주얼계라는 일본 록 특유의 성향을 개척했다는 점, DIR EN GREY부터 NIGHTMARE 등 수많은 후배 밴드, 팔로워를 양산해내고 있는 점, 메탈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인 밀리언 셀러를 달성[31]하고 1992년에는 일본인 아티스트 최초로 3일 연속 도쿄 돔 콘서트를 성사시킨 일화[32],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를 가진 12월 31일 공연을 도쿄 돔에서 1993년 12월 31일부터 1997년 12월 31일 라스트콘서트까지 5년 연속으로 성사시켰다는 점[33] 등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일본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주얼 록[34]의 창시자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 - HIDE
"만일 이들이 영미권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전세계에서 가장 큰 밴드가 됐을 것."
- 진 시몬스, KISS의 멤버
"다른 차원의 록스타"[35]
- 리차드 포터스, 건즈 앤 로지스의 멤버
신화가 된 일본 최고의 록 밴드이자 글램록의 표상. We are X!
애플 뮤직 소개문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열고 이어나가게 되는데 크게 기여를 한 밴드이다. 그 당시 일본 문화에서는 충격 그 자체라고 불리기도 한다.[36] 활동당시엔 평론가들의 평가가 박했던게 사실이긴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일본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메이저시장에 올려 인기를 유지하게 하여 수많은 후배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고평가를 받고 있다.[37][38][39][40][41]

기본적인 구성은 트윈 기타로 기타 솔로 부분을 두 기타가 나누어서 연주하며, 보통 파타가 백킹 부분을 히데가 리딩 부분을 연주하였다. 근데 배킹과 리딩이 분명 따로이긴 한데, 딱히 내용상 큰 차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DAHLIA 같은 경우에는 배킹과 리드의 구분이 없어 음원만 들어서는 누가 PATA이고 HIDE인지 알 수가 없다. 단, 곡에 따라 차이는 존재한다.

유럽 파워 메탈의 사생아라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유럽 쪽에서는 일본의 대표밴드로 인식된다. 특히 요시키가 일본 최고의 작곡가로 여겨지는 듯. 유럽의 유명 밴드인 아노렉시아 널보사, 드래곤랜드[42], 소나타 아티카 등이 X JAPAN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게 대표적인 예. 이는 일본 관객을 고려한 서비스임은 분명하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카테고리안에 묶는 것이 가능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 커뮤니티에서도 X를 통해 유러피언 파워메탈을 듣기 시작했다는 글은 많이 보인다.

반대로 allmusic.com같은 영미권 평론 사이트에서는 그들의 기타리프나 악곡면에서 자신들만의 것은 별로 없으나 괜찮은 밴드라는 애매한 평가를 내린다.[43]

이들의 음악의 장르는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곡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스타일은 존재하는 편이다. 최소한 리더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에서만큼은 스피디한 곡과 발라드곡 모두에서 서정성(혹은 뽕끼라고 부르는 동양적 멜로디)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스타일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리고 앨범마다 사운드도 크게 다른 편이다. 인디 1집은 헤비메탈, 메이저 1집은 파워메탈, 2집은 타이틀곡 외에는 LA메탈, 3집은 인더스트리얼 메탈에 가깝다.

다만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비판도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X JAPAN의 노래는 메탈 아카이브에서는 Heavy/Progressive/Power Metal로 구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공연을 매우 조용히 감상한다고 알려져 있는데[44], X JAPAN의 공연만큼은 매우 열광적이다.[45] 특히나 X의 후렴부분에서는 모든 관중들이 손으로 X표시하면서 점프하는게 압권이다.[46]

현재는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 좋아져서 아치에너미의 일본공연에서는 슬램존을 만들어놓는 관객을 종종 볼 수 있다.

시기 상으로 영미권 메탈이 전성기에 있을 때 일본 내에 등장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음악적으로는 자신들만의 특출난 메탈 리프나 사운드를 가지지는 못했다. 특히 메탈의 인기가 완전히 꺾인 90년대 중반에는 메탈이 거의 배제되고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DAHLIA를 들고 나오기는 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하지 못했고 발라드로서 인기를 끌었다.

5. 여담

  •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 다르게, 의외로 밴드 이름에 하이픈(-)이 없다. 즉 'X-JAPAN'이 아니라 그냥 'X JAPAN'이다. 이마저도 원래 밴드 명칭은 X였다가 후에Japan을 덧붙인 것.
    이러다보니 중장년층 일본 서브컬처를 아는 사람 중에선 아직도 저렇게 아는 경우가 흔하다.
    • 특히 전세훈이 소년 챔프에 연재한 락 판타지 만화 노노보이 초반부에 Z-JAPAN이라는 패러디 빌런이 나오면서 더 잘못 알려진 감이 있다. 물론 비주얼 록, 제이팝 마니아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당시는 일본 음악을 듣기만 해도 왜색이라며 비난받던 시절이었다. 이러다보니 수십만 부를 찍어네던 인기 미디어이던 만화잡지 영향이 더 컸던 것.
    • '엑스 재팬'이라 읽는데, 수학의 [math(x)]절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비주얼 락과 일본 문화가 어느 계층에게서 받아드여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즉, 수학 공식을 평소 접하는 고등학생들과 입시경쟁을 막 벗어난 대학교 초년생들 사이에서 향유되던 문화라는 증례다.
  • X의 총 판매량에 대해서는 왕창 부풀리거나 왕창 줄이는 등 극과 극을 달리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데, 일단 공식적 오리콘 통계에서는 총 판매량이 약 1,117만 장 정도로 추정된다.[47]
  • 국내에선 1990년대 당시 엑스재팬이 무대에서 태극기를 찢고 태웠다는 루머가 퍼진 적이 있었고, 당시의 영향으로 지금도 이런 루머를 믿는 사람이 꽤 존재한다.[48] 국내방송에서 잘못된 정보를 멋대로 방송을 했기 때문에 대중들이 그대로 믿은 것인데, 이에 대해 국내 방송사가 사과방송을 여러 번 했음에도 정설처럼 퍼졌다. 관련기사.
  • 일론 머스크에 인수된 트위터가 이름을 X로 바꾸겠다고 선언했는데, 트위터의 일본 법인이 이 밴드 때문에 법인 이름을 못 바꾸는 거 아니냐는 농담이 떠돌고 있다. 실제로 요시키가 트위터에 'X JAPAN은 우리가 상표등록했다'는 식으로 글을 남겼으며, 트위터 일본 팀의 계정은 ID를 "@TwitterJP"로 유지한 채 표시되는 이름은 그냥 "Japan"으로 바꿨다. 나중에 트위터 아이디는 "@XCorpJP"로 타 국가와 확실히 다른 아이디로 바뀌었다. 제아무리 일론 머스크라도 분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듯..

5.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

  • 12012
    카와 토루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BABYMETAL#
    멤버들이 아닌 프로듀서 KOBAMETAL이 팬이며, 곡 '紅月', 'NO RAIN, NO RAINBOW' 등에서 그 영향이 보여진다. 그 뿐만 아니라 라이브에서도 코르셋을 주요 아이템으로 사용하거나 'We are BABYMETAL' 등을 사용하는 등 많은 오마주를 하고 있다.
  • Blood Stain Child
    기타리스트 Ryu가 팬이었다고 한다. 또한 블러드스테인차일드의 결성 초기엔 음악이 멜로딕 스피드 메탈이었다고 한다.
  • D
  • DaizyStripper
  • Deadman
  • DIR EN GREY
    기타리스트 薫(카오루)는 한 인터뷰에서 학생 시절 뮤직스테이션에 출연한 X의 紅 무대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음을 술회했으며 가장 존경하는 기타리스트로 hide를 꼽곤 했다. 드러머인 신야 역시 YOSHIKI의 영향으로 음악과 밴드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 Distraught Overlord
  • DJ OZMA
  • FLOW
  • GACKT##
  • GALNERYUS
    SYU와 Fumiya는 X JAPAN을 듣고 음악을 시작했다고 하며, SHO도 팬이라고 한다.
  • GLAY#
  • GYZE#
  • Leda
    X JAPAN과 LUNA SEA를 듣기전까진 음악에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특히 X JAPAN은 자신에겐 '바이블' 이라고...
  • LM.C
  • Sadie
    보컬 마오가 팬이라고 한다.
  • the GazettE
    보컬 RUKI와 기타 아오이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둘은 hide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다.
  • MIYAVI
  • Screw
  • SHEJA#######
    엑스재팬을 상당히 좋아하는지, 본인 밴드 VOLCANO 라이브 공연에서 엑스재팬의 곡들을 자주 커버한다. 단, SHEJA의 경우는 엑스재팬과 거의 동시기에 활동한 뮤지션이기에 엑스재팬의 추종자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SHEJA는 본인이 직접 로드매니저를 하며 가르침을 받은 AION의 기타리스트 IZUMI를 음악적 스승으로 언급하고 있다. 물론 SHEJA는 링크된 영상들에서처럼 라이브 공연에서 최근까지 엑스재팬의 메탈 곡들을 꾸준히 자주 연주했고, 무엇보다 메탈 음악을 추구하는 방식에 있어서 요시키식 스피드 메탈과 유사한 측면이 많기에 엑스재팬의 음악을 많이 참고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 Unlucky Morpheus
    Siren과 Fuki가 팬이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Unsraw Yuuki
  • Versailles
    X와 LUNA SEA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며, KAMIJO는 '일본 음악업계에서 X JAPAN의 영향을 받지않은 사람은 없을것'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마티 프리드먼(Megadeth)
    X JAPAN을 듣고 일본의 락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에릭 마틴(미스터 빅)#
  • 오노 마사토시##
    2009년도에 엑스재팬 팬인 멤버들로 구성된 GALNERYUS 합류 전 솔로 활동할 때부터 이미 팬이었다.
  • 코무로 테츠야
    물론 개인적인 친분 빨도 있겠지만 프로듀서로서 요시키는 감히 비교할 엄두도 못 낼 만큼 일본 대중 음악 역사상 역대급으로 큰 성공을 거둔 코무로 테츠야가 음악적으로 유이하게 인정하고 존경하는 천재가 바로 오다 카즈마사와 요시키라고 한다.#[49]

5.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

X 재팬[50]이란 단어가 들어가는데다 1990년대엔 태극기를 찢은 밴드라는 가짜 뉴스의 피해까지 입었음에도, X 재팬은 그 시절 한국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J팝이 리즈 시절을 달리던 90년대에 아무로 나미에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큰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던 밴드가 X JAPAN이었다. 지금도 X JAPAN하면 곡은 몰라도 이름은 아는, 혹은 리메이크 등의 영향으로 대표곡 'ENDLESS RAIN'이나 'Tears'는 들어봤거나 좀 더 깊게 파면 '쿠레나이'도 알아듣는 그 세대 일반인들이 꽤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상당한 팬덤과 인지도가 있었다.

문화적 교류가 일반인보다 수월한 당시 한국 음악 업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X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ENDLESS RAIN'은 90년대 당시 인기에 불이 붙으려 하던 국내 락발라드계에 일본식 락발라드 감성이 이런거구나라는 식의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처럼 표절 시비까지 일 정도로 영향을 받은 곡들이 나오기도 했다.[51] 그 외 Say Anything 같은 곡들도 신문에 언급될 정도로 국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52]

90년대엔 락발라드 붐과 함께 X JAPAN도 인기를 끌면서[53] 당시 국내 팬덤에선 부풀려진 소문들도 꽤나 돌았었는데, 예를 들면 X의 메이저 데뷔 앨범이었던 BLUE BLOOD가 일본에서 네 가구당 한장씩 팔렸다는 얘기나[54] 요시키가 세계 드러머 3위라는 얘기같은게 있었다. 물론 모두 왜곡되거나 날조된 이야기. 이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있기 전 일본 문화에 대한 일종의 신비주의가 불러낸 촌극이었다.[55]

1993년 발매한 "Tears" 라는 곡이 한국 가사로 번안되어 M.C The Max잠시만 안녕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다만 X JAPAN 팬덤 사이에서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하다. 특히 가사의 리메이크에 대한 비판이 큰데,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주 내용인 가사를 흔한 사랑노래 가사로 곡의 의도를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 그 중에서도 멜로 드라마틱한 유치한 뮤직 비디오는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잠시만 안녕이 리메이크 된 계기는 요시키가 M.C The Max의 보컬 이수를 프로듀싱한 적이 있기 때문인데[56], 다만 잠시만 안녕의 개사 사건으로 인해 부친 문제도 얽혀 요시키와의 사이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TraxX노민우도 요시키에게 프로듀싱받으며 Tears를 받았는데, 여긴 엠씨더맥스와는 다르게 한국어로 번역만 하고 키와 템포만 수정하였지만 팬덤 반응은 더 안좋았다. 결정적으로 2절 뒤에 히데의 기타연주 파트가 빠진 것이 한 몫했다.

한국에서 X JAPAN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이나 셀럽으론 문화 대통령으로 불린 서태지[57], SM 엔터테인먼트 창립자 이수만[58], 신화김동완[59], 발라드 가수 조성모[60], 방탄소년단RM, EXO찬열, SUPER JUNIOR희철, 부활김태원,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김종서#, 더 크로스이시하, 영화감독 곽재용[61], 배우 배두나, 이병헌이민정 부부, 이동건, 전지현[62], 감스트 등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샤이니 종현도 중학교 때 X JAPAN과 너바나의 노래를 듣고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걸로 알려졌다. JYJ김재중 또한 2018년 X JAPAN의 팬임을 밝히고 요시키와의 만남을 가졌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 밴드들 중 하나였다. 일본 내에서만 보자면 X JAPAN 보다 훨씬 더 롱런하고 대중적 지지도나 앨범 판매량도 더 우수했던 록 밴드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인기는 X JAPAN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63]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고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문화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X JAPAN이 자국보다 한국에서 평가절상된 걸 알고 신기하다는 식으로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취향 차이를 언급할 때 X JAPAN이 거론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한국만의 취향이 아니라 전세계 록 팬들의 공통된 정서에 가깝다. 그러니까 한국만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유독 X JAPAN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X JAPAN이 인기가 많다는 얘기. 즉 일본인이랑 한국인의 취향만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일본인이 좋아하는 록 음악과 대부분의 다른 나라 록 매니아들이나 대중들이 선호하는 록 음악이 차이가 많고, 한국인의 취향도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아무래도 음악 스타일이 유럽풍 클래식에 가깝다 보니 각 나라별로 취향을 크게 타지 않고 어느 정도 선호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굳이 X JAPAN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해외 록 팬들이나 대중들은 LOUDNESS, ANTHEM, VOW WOW 같은 메탈 밴드들, 그러니까 일본 내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나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에선 B'z나 Mr.Children은커녕 X JAPAN보다 더 못했던 밴드들을 더 선호하고 고평가하지 정작 일본의 국민 밴드들이라고 불리는 B'zMr.Children 등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64] 그래서 설령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일본의 주류 록밴드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한들 일본 본토 취향에 최적화된 이들의 음악으론 해외 무대에서 성공할 공산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일본과 가장 가깝고, 또 문화적 차이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면 적은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도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여튼 일본 대중 문화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밴드들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고 정작 일본의 메인스트림 밴드들은 경쟁력이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갈라파고스화라는 개념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 문화의 특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국과는 달리 미국이나 영국과 같은 음악 강국에서는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저조한 편이다. 물론 아예 인지도가 없는 것은 아니고 상술했다시피 미국 진출을 시도하려고는 했지만 무산되었고 이후로는 해외 진출을 일절 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서구권에서도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의 인지도는 가지고 있다.

5.3.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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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쿄구에 위치한 도쿄 돔에서 관객 5만 명이 동시에 X의 후렴구에 맞춰 점프를 했더니 진도 3의 지진으로 측정됐던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분쿄구에서는 라이브에서 이 곡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BORN TO BE FREE>의 싱글 앨범 커버 사진에 대하여 SNS를 통해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앨범의 커버 사진에 나체의 몸에 목과 팔이 수갑이 채워진 여성의 뒷모습이 실렸기 때문.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성품화 하였다는 지적인데, 반대로 여성이 역사상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결박당해왔기 때문에 사진 속의 여성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며 앨범 재킷은 여성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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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초 요시키 인스타에 문제의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이 사진에서 보컬 토시만 제외되어 있었는데 기사에서는 Toshl와 YOSHIKI의 절연은 물론 X JAPAN의 재 해산이란 이야기까지 여러 불화설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더불어 신곡의 명의가 X JAPAN으로 되어있음에도 객원 보컬인 HYDE를 초청하였기에 이러한 주장이 마냥 스쳐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X JAPAN 해체 당시 HIDE가 제안한 X JAPAN의 재결합 방식(객원 보컬을 초청하며 밴드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요시키는 10여일만에 요시키 채널 독점 인터뷰를 통해 표기 수정[66]을 공지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표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토시는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오해는 지속되는 상황이다.

2018년 9월 28일~9월 30일, 총 3일 동안 紅に染まった夜(붉게 물든 밤)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건은 3일째 라이브 날 전국적으로 강한 태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있었던 일본 전국의 행사와 라이브는 모두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X JAPAN은 관객을 모두 돌려보내고 난 뒤 WOWOW와 요시키채널에서 생중계로 라이브를 진행하였다. 유튜브에서 이 공연의 WEEKEND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파일:1121.png

이 뒤로 이들 명의의 활동이 없어서 간판만 있는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그러다가 2022년 11월 11일에 요시키, 하이도, 스기조, 미야비. 이 넷이 결성한 밴드 THE LAST ROCKSTARS 발표.

5.4.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X 시절 파트 체인지 밴드로, 팬 서비스겸 이벤트성으로 특별히 결성된 밴드.
  • 1988. 12. 31. 엑스타시 서밋
  • 1989. 8. 28. 오사카 비밀라이브
  • 1991. 10. 19. 닛신 파워스테이션
  • 1991. 11. 17. 시부야 에그맨
  • 1992. 1. 5. 파멸을 향하여

총 5회 공연했는데, 상기 라이브에서만 선보였다.참고

6. 영화

6.1. We are X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위 아 엑스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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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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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위 아 엑스#s-|]]번 문단을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위 아 엑스#|]]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위 아 엑스 (2016)
We Are X
파일:위 아 엑스 영화 포스터.jpg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스테판 키작
각본
제작 존 배첵, 다이안 벡커, 조너선 맥휴, 조너선 플랫
주연 요시키
음악 요시키
촬영 기간
제작사 파일:영국 국기.svg 패션 픽처스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주)무브먼트픽처스
배급사 파일:미국 국기.svg 드라프토스 픽처스
파일:영국 국기.svg 네셔널 어뮤즈먼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라이크콘텐츠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2016년 10월 21일
파일:영국 국기.svg 2017년 3월 2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년 5월 25일
상영 시간 94분
제작비
월드 박스오피스 추가예정
북미 박스오피스}
대한민국 총 관객 수 4,839명 (2018년 2월 25일 기준)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상영등급 15세 관람가

6.2. Junk story

1998년 5월 2일 사망한 멤버 hide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에서는 2015년 5월 23일, 국내에서는 2017년 5월 18일에 개봉되었다. hide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사토 후토시(佐藤太)가 감독했다. 생전의 hide를 아는 인물에의 인터뷰나 당시의 영상등을 통해서로 hide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그의 음악·인간성·정신 세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배우 츠카모토 타카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인터뷰 한 인물로는 YOSHIKI, I.N.A, 森重樹一, J, 松本裕士, PATA, JOE, Kiyoshi, CHIROLYN, DIE, kyo, Tetsu, 木村世治, YANA, SEX GEORGE, defspiral, CUTT, 小杉茂, DYNAMITE TOMMY, 에릭 루스트포울이 있다.

영화의 테마곡인 Junk story는 생전에 히데가 직접 작곡한 솔로 앨범 곡이다. https://youtu.be/9xptUx0MTpA

6.3. HURRY GO ROUND

히데 사망 20주년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2018년 5월 26일 발매, DVDblu-ray는 2018년 12월 5일에 발매하였다.
배우인 야모토 유마가 히데의 발자취를 쫓으면서 HURRY GO ROUND의 가사가 적힌 묘비를 보면서 유언과 같은 가사로 인해 사망이 자살인지, 사고인지의 음모론을 파헤치는 과정을 핵심으로 전개된다.

히데가 안치된 미우라 령원을 시작으로 요코스카의 단골음식점, 히데의 소속사 사무실, 히데의 장례식이 열렸던 츠키지 혼간지, LA의 작업실과 거주지, Pink Spider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소, 사망 직전 마지막 회식을 했던 장소에서 그와 함께했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리하는 영상이다.

이 작품에서 HURRY GO ROUND의 유서설을 확인하고자 히데의 당시 매니저이자 동생이었던 히로시의 협조로 방대한 양의 영상과 HURRY GO ROUND의 가사 초안과 그 이후의 가사 메모들을 확보하여 열람할 수 있었으며 HURRY GO ROUND는 히데의 유서가 아닌 사실을 입증한다.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

<rowcolor=#ff0d13> 넘버링 발매일 타이틀 오리콘 판매량 비고 수록 앨범
인디 1985.06.15 I'LL KILL YOU - 1,000장[67] - VANISHING VISION
인디 1986.04.10 オルガスム
오르가즘
- 2,500장[68] - BLUE BLOOD
1 1989.09.01
다홍
주간 5위 313,000장 메이저 데뷔 싱글
1989년 일본유선대상 최우수 신인상 수상
제43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7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89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74위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67위
2 1989.12.01 ENDLESS RAIN 주간 3위 365,000장 제6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21위
3 1990.04.21 WEEK END 주간 2위 298,000장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32위
4 1991.09.11 Silent Jealousy 주간 3위 284,000장 제42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1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58위
Jealousy
5 1991.10.25 Standing Sex / Joker 주간 4위 261,000장 1991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87위
6 1991.12.01 Say Anything 주간 3위 590,000장 1992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33위
7 1993.11.10 Tears 주간 2위 837,000장[2Px] 제44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3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77위
1994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50위
DAHLIA
8 1994.07.10 Rusty Nail 주간 1위[70][71] 752,000장[Px] 제45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4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28위
9 1995.08.01 Longing 〜跡切れたmelody〜 주간 1위 476,000장[Px] -
10 1995.12.11 Longing 〜切望の夜〜 주간 5위 172,000장
11 1996.02.26 DAHLIA 주간 1위 413,000장[Px] -
12 1996.07.08 Forever Love 주간 1위 510,000장[Px] 제4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6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6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47위
13 1996.08.26 CRUCIFY MY LOVE 주간 5위 290,000장[Gx] -
14 1996.11.18 SCARS 주간 15위 155,000장 -
15 1997.12.18 Forever Love(Last Mix)) 주간 13위 163,000장[Gx] -
16 1998.03.18 THE LAST SONG 주간 8위 92,000장 - X JAPAN
17 2008.01.23 I.V. - - iTunes Store 한정 발매 수록 앨범 미정
18 2011.06.08 Scarlet Love Song -BUDDHA MIX- 1위[78] -
19 2011.06.28 Jade - X JAPAN
20 2015.11.06 BORN TO BE FREE - - 제66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21 2023.07.28 Angel - - -

7.2. 앨범

7.2.1. 정규

7.2.2. 라이브

  •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 (1995년 1월 1일 발매)
  • 《LIVE LIVE LIVE TOKYO DOME 1993-1996》 (1997년 10월 15일)[Gx]
  • 《Live Live Live Extra》 (1997년 11월 5일)
  • 《LIVE IN HOKKAIDO 1995.12.4 BOOTLEG》 (1998년 1월 21일)[81]
  • 《ART OF LIFE LIVE》 (1998년 3월 18일)
  • 《The Last Live》 (2001년 5월 30일)

7.2.3. 컬렉션

  • 《X SINGLES》 (1993년 11월 21일)
  • 《B.O.X ~Best Of X~》 (1996년 3월 21일)
  • 《BALLAD COLLECTION》 (1997년 12월 19일)[Px]
  • 《Singles ~Atlantic Years~》 (1997년 12월 25일)
  • 《Star Box》 (1999년 1월 30일)
  • 《PERFECT BEST》 (1999년 2월 24일)[Gx]
  • 《X JAPAN BEST ~FAN'S SELECTION~》 (2001년 12월 19일)
  • 《THE WORLD ~X JAPAN 初の全世界ベスト~》(2014년 6월 17일)[G]

7.2.4. 리마스터

  • 《BLUE BLOOD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 《Jealousy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7.2.5. 사운드 트랙

  • 《We Are X》 (2017년 3월 3일)

8. 라이브 콘서트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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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개별 문서가 있는 라이브 콘서트


[1] 메이저 데뷔는 1989년.[2] 이미 고인이 된 HIDETAIJI 마저도 X JAPAN 멤버들은 그 상징성을 감안하여 전 멤버가 아닌 정식 멤버로 인정하고 있다.[3] 멤버들의 고등학교 1년 선배, 활동방향에 대한 견해차이로 인해 탈퇴.[4] YOSHIKI, Toshi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해온 멤버였으나 TAIJI가 가입조건으로 TERRY를 내보내는 것을 요구했고, YOSHIKI는 고심끝에 TERRY를 해고했다. 이후 TAIJI가 처음 탈퇴한 후에 YOSHIKI가 찾아가 사과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부탁했으나 "요시키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나에게도 프라이드가 있다."라며 재가입을 거절했다. 2002년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5] 음악적 견해로 JUN과 함께 탈퇴.[6] TAIJI가 가입조건으로 데리고 온 멤버[7] 음악적 견해로 HIKARU와 함께 투어 도중 무대에서 탈퇴를 발표했다.[8] 현재 스님이 되었다.[9] 인디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탈퇴하게 되고 PATA가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10] 1987년 밴드 X의 5인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X를 거쳐갔던 멤버들은 정확한 가입시기 및 탈퇴시기를 알 수가 없어 그 당시에 개최되었던 각 공연별 연주자 기록을 참고로 하여 임의로 표를 작성하였다.[11]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별도 계약을 거쳐 끝내 YOSHIKI로부터 탈퇴 의사까지 종용받은 TAIJI가 1992년 1월, 도쿄 돔에서의 무대를 끝으로 X를 떠난 이래 해당 파트는 쭉 공석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었다.[12] 재결성 이후 1998년 5월 2일 의문사한 HIDE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SUGIZO가 참여했지만 당시 SUGIZO는 X JAPAN의 세션 멤버로 고용되었다.[13] 2023년 11월 8일 HEATH 사망 확인으로 공석[14] 한국어로 '임 가수'[15] 2010년까지는 TOSHI라는 명의를 사용했으나 이후 개명. 참고로 Toshl의 마지막 알파벳은 대문자 I가 아니라 소문자 L이다.[16] X의 악곡에서 베이스가 비교적 쉽다고 기술되어있으나, 실제 X의 악곡에서 베이스 파트는 어려운 편이다. 기본적으로 X의 악곡이 빠른 템포의 메탈이고, 긴 러닝 타임 동안 리듬을 유지하면서 중간 중간 멜로디컬한 베이스 라인을 넣어주어야 하기에 난이도가 상당한 편이다. 물론 X JAPAN 체제로 재편되면서, 베이스 파트의 존재감이 줄어들고 기본적인 리듬 파트라는 베이스 파트 본연의 역할을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난이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부분이다. Drain 이나 Scars 같은 악곡에선 인트로의 베이스 파트가 돋보인다.[17] 물론 극히 일부 구간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라고는해도 Silent Jealousy에서의 솔로 파트라든지 X에서의 솔로 파트 연주분들과 같은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 그러나 단시간 안에 모든 곡을 익혀냈고 많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코딩했다고 한다.[18] 대표적으로 1994년의 白い夜에서의 紅. YOSHIKI가 폭주하자 HEATH는 당황하여 YOSHIKI만 바라본다.[19] 히데와 요시키는 후배 밴드를 육성하면서 친분을 나눴고, 이후 요시키는 X JAPAN 재결합 직전 각트의 제안으로 스기조, 미야비와 함께 S.K.I.N을 결성해 함께하였다. 스킨은 미국에서 단 한번의 공연을 마치고 X JAPAN 재결합을 계기로 해산하였다. kiss the sky와 beneath the skin이란 곡은 S.K.I.N 시절 스기조가 작곡하였다.[20] 밴드 활동으로는 대문자를 쓰지만, 솔로 활동으로는 hide라는 소문자를 쓴다.[21]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가 X JAPAN의 비주얼은 모두 히데가 담당했다는 것인데 오히려 X 초기 인디 시절에는 히데가 음악적 부분을 담당했고 타이지가 X의 화장이나 의상 같은 비주얼을 담당했다. 이것은 타이지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공식 팬클럽이라는 Weekend에도 히데의 작품이라고 적어 놓는 오류를 범했다.[22] Vanishing Vision 당시 인터뷰를 보면, 히데가 X에 가입한 후 요시키에게 '紅(쿠레나이) 왜 연주 안 해? 나 이 곡 되게 좋아했는데'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계기로 타이지와 히데가 설득하고, 그들이 멜로디 라인과 드럼 솔로 부분을 제외한 부분을 편곡하기까지 한다. 결국 타이지와 히데의 판단은 적중해서 紅는 그들의 대표곡이 된다. 유튜브에서 쿠레나이 데모 버전을 검색해서 들어보면 이들의 기여도를 알 수 있다.[23] Rose of Pain의 태핑 부분은 굉장하다. 아쉽게도 본인 시그네쳐인 크리미널 베이스를 사용 후에는 프렛 수가 부족하여, 솔로를 듣지 못한다.[24] Jealousy 앨범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에서 그의 클래식 기타 실력을 잠시 맛볼 수 있다.[25] 본래 요시키는 Endless Rain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했으나 타이지가 '그럼 다른 멤버들은 네가 피아노 칠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그리고 메탈 밴드가 기타 솔로도 없는 발라드 곡을 연주하냐'라면서 락 발라드 형식으로 편곡하여 앨범에 들어가게 된다.[26] 당시 타이지는 결혼 비용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였다고 한다.[27] 애니메이션 전체 시리즈 오프닝, 디럭스에서는 오프닝/엔딩.[28] 인디즈 앨범 부클릿에는 스래시 메탈이라고 써있기도...[29] 멜로딕 스피드 메탈의 태동기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Helloween의 초기 음악을 들어보면, 스래쉬 메탈을 연상시키는 강한 리프와 빠른 비트 위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기타 솔로가 가미된 형태로, 후발주자 X는 이와 상당히 비슷한 음악적 접근을 보이고 있었다.[30] 실제로 일본에서 웬만큼 인기가 있는 메탈밴드는 거의 이장르에 포진되어있다. 갈네리우스,라이트브링거 등등.. 이는 현재 진행형. 또한 일본에서의 파워메탈 밴드들 상당수는 X-JAPAN의 영향력이 강한 편이다.[31] X JAPAN의 앨범 판매량에 대해선 이래저래 말이 많은데, 일본레코드협회(약칭 RIAJ) 인증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음반은 메이저 2집 <Jealousy>와 싱글모음집 <X SINGLES>가 있다.# 메이저 1집인 <BLUE BLOOD> 역시 누적 판매량 기준으로 밀리언을 달성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과거 90년대 한국에서 X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다가 00년대 이후 그 거품이 걷히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동안 많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때 보면 전성기 때도 음반 판매량이 겨우 백만장을 한두 번 정도 넘긴 밴드가 무슨 일본을 대표하는 밴드냐는 식으로 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면 메탈 음악을 표방하는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판매량을 기록한 게 맞다. 메탈 팬덤 사이에서 X 보다 음악적으로 더 높게 평가받고, 실제로 음악적 커리어가 대단한 LOUDNESSANTHEM, VOW WOW 등 일본 메탈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레전드 메탈 밴드들도 달성 못한 게 밀리언 셀러다. 물론 X를 위에 언급된 순수하게 헤비메탈과 하드락을 추구했던 밴드라고 보기는 어렵고 사실상 헤비메탈 장르도 표방했던 대중밴드다. 멤버의 변화에 따라 심하게 변화된 음악성도 그렇고 발라드를 꽤 많은 메인 싱글로 내세운 점 등등... 게다가 현재는 헤비메탈과 사이키델릭, 인더스트리얼 등의 락의 하부장르와 교집합을 추구하던 히데와 정통헤비메탈과 하드락의 주도권으 쥐었던 타이지가 모두 사망하면서 더 이상 헤비메탈을 추구할 일은 없어보인다.[32] 1992년 1월의 도쿄 돔 3 Days 라이브뿐만 아니라 1991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던 첫 필름 기그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 수와 동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바이올런스 인 젤러시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 수까지 전부 다 합산하면 근 1년간 동원한 관중의 수가 거의 3~40만 명에 이른다. 물론 이것 역시도 일본 대중음악계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엄청 대단하다 볼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메탈 밴드로서는 독보적인 기록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33] 1992년 12월 31일 도쿄 돔 공연은 그 마이클 잭슨이었고, 1998년 12월 31일부터는O, J-FRIENDS 등 쟈니스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34] 비주얼 계로 불리는 일본 음악 특유의 문화 중 하나로, X JAPAN 말고도 BOØWY, BUCK-TICK, D'ERLANGER, COLOR가 비주얼 록 발생에 기여하였다지만 사실상 히데의 시각적 면모가 기원이다.[35] 원문: "Different level of rockstar."[36] 일부 국내 네티즌들은 X는 거품이고 라우드니스가 일본 현지에서 훨씬 유명하고 대단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상술했듯 대중적 인지도는 X가 훨씬 높다. LOUDNESS야 일본 메탈계의 레전드이지만 X가 라우드니스보다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X는 대중적인 멜로디 구사와 매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메탈을 어필했고, 이런 대중적 행보 때문에 오히려 메탈씬에서는 그 음악성이 평가절하됐던 밴드였다. 누누이 강조했듯 메탈 음악의 인기는 일본 역시 제한적이다. 흡사 아이돌 가수 같은 인기를 누린 전성기 때 X는 메탈 밴드의 테두리에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게 맞다.[37] 일본 대중음악 역사상 메탈 뮤지션 가운데 X JAPAN보다 음악성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밴드들이 있을진 몰라도, 대중적인 인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는 밴드는 별로 없다(아주 없는 건 아니다. 당장 BOØWY와 보위 보컬이던 히무로 쿄스케만 해도 솔로시절 공연마다 도쿄돔이 매진되는 흥행성적을 냈고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만 해도 후일 킷카와 코지와 결성한 컴플렉스로 엄청나게 팔렸다.[38] 그외 전성기적 GLAY도 국내에 팬이 별로 없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중적으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밴드다). 밴드들의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서 그렇지 일본 역시 헤비메탈의 인기는 상당히 제한적이기에 성공한 메탈 뮤지션들조차 메탈 팬들의 생각만큼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 인디 밴드들은 물론이거니 어느 정도 메이저에 진입에 성공한 밴드들조차 금전적 수익이 그리 많진 않아 궁핍한 생활을 하는 뮤지션도 많다. 단적인 예로, 일본 헤비메탈의 전설이라는 ANTHEM의 보컬 사카모토 에이조가 비활동기 때는 수많은 알바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고, 또 90년대 일본 하드록&메탈을 논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언급되는 실력파 밴드 SIAM SHADE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연주력에 있어선 X JAPAN보다 더 뛰어났고 음악성에 있어서도 X JAPAN에 전혀 약하지 않다.[39] 또 메탈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X JAPAN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소프트한 멜로디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엔 상업적으론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 해 고생을 많이 했다(공사장 알바를 뛴 사람은 멤버들과 싸우고 일시적으로 탈퇴한 보컬의 히데키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비주얼 록을 위시한 메탈이란 장르 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인기와 부를 누린 X JAPAN은 뒷소문으로 따라다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제외하고서라도 일단 성공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대단하고 후배 밴드들에게 존경받을 자격은 있다는 얘기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듯, 뮤지션들 역시 오매불망 바라는 건 음악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성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40] 다만 SIAM SHADE가 상업적인 성공을 못 이뤘던 것에는 몇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X JAPAN의 경우 충격적인 비주얼 패션과 초밥집 라이브같은 각종 어그로를 끌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지만 SIAM SHADE는 완전 초창기를 제외하면 비주얼계와는 거리가 아주 많이 있는 밴드에다 앨범을 낼때마다 발라드 싱글넘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X와는 다르게 SIAM SHADE는 헤비메탈, 하드록 위주의 성향이라 당대 트렌드와는 조금 다르게 나가는 편이었고, 두번째로 X JAPAN은 헤비메탈에 클래식발라드가 섞여서 우리나라보다도 록발라드가 더 잘나가는 일본의 성향상 Tears, Endless Rain이 대성공해 X JAPAN들이 늘어났던 반면 SIAM SHADE는 발라드 위주의 넘버가 거의 없고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테크니션이었던 다이타의 기타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하드락 밴드였다.[41] 세번째로는 보컬의 음색이다. TOSHI는 기본적인 음색이 탁한 편이지만 발라드에 어울릴 정도로 부드럽다는 강점이 있다. 초창기에는 성대를 일부러 긁어 락커 이미지를 선보였고 요시키의 무리한 작법으로 인해 점점 목에 부담이 심해져 스크래치를 줄이고 본래의 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돌아온 것에 가깝다. 즉 태생부터 메탈형 보컬보다는 록발라드형 보컬에 가까웠기에 대중들이 요시키 스타일의 멜로디와 토시의 음색에 이끌려 X JAPAN을 선호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네번째로 90년대의 샴쉐이드 소속사인 아뮤즈가 대중음악에선 확실한 밥줄이 있었지만 록계열에서는 90년대 내내 고전했거나 지원이 미비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거대 소속사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뮤즈는 소속가수나 배우가 부진해도 초반에는 거의 지원을 해주지 않는 편.[42] 이 경우는 트리뷰트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보컬 요나스가 팬 서비스로 한 곡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43] 리뷰란에 네티즌들이 직접 리뷰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 이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리뷰를 통째로 지워버리기도 한다.[44] 이건 사실 걸러들어야 할 부분인데,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는 조용히 감상하다가 가수가 호응이나 떼창을 유도하면 그에 맞춰 호응&떼창을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특정 떼창곡이나 가수가 객석으로 마이크를 넘기는 라이브 영상들을 보면 한국인들보다 훨씬 크게 떼창하는 일본인 관객들을 볼 수 있다. '무조건 떼창'이 주류인 한국보다 일본이 관객과 가수가 교감하고 호응하는 방식이 훨씬 다양한 편.[45] 대선배답게 공석에서 라이브를 갖게 되면 관객은 물론 같이 공연하러 온 후배 밴드들마저 소리지르게 된다.[46] 라이브 GIG 영상을 보면, 수 만명이 넘게 들어찬 도쿄 돔에서 모든 이들이 뛰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47] 한때 3천만 장까지 부풀려져 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어디 네티즌의 근거없는 부풀리기가 아니라 3천만 장을 팔았다는 발언 자체는 롤링 스톤지나 영화 We are X 등 여러 매체에서 언급된 바가 있으니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정도로만 알아두자.[48] 다만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를 찢은 밴드였다고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당시 혼재된 루머들이 많았단 소리. 참고로 국내 밴드 노브레인이 2001년 후지 록 페스티발에 출연해 실제로 욱일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49] 재밌는 건, 오다 카즈마사와 요시키 둘 다 업계 전문가들에게 받는 고평가나 후배 뮤지션들에 미친 영향력에 비해 대중적으론 그렇게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코무로 테츠야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일본 음악계의 다른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을 놔두고 두 사람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50] 물론 상기했듯 원래 밴드 이름은 X였다.[51] 사실 인터넷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표절이란 개념도 희박하던 20세기엔 다수의 한국 작곡가들이 그냥 좋다 싶으면 일본 음악 갖다쓰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까진 아예 일본 음악 자체를 리메이크로 정식 구매를 못하다보니 일단 번안곡처럼 받아 쓰되 저작권료는 일본에 주는 편법적인 경우도 있었다.[52] SAY ANYTHING과 ENDLESS RAIN은 일본 가라오케 내에서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곡들이다.[53] 물론 90년대 초중반엔 일본 문화 수입을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었던 사정도 있고 해서, X JAPAN 노래 역시 소수의 팬들에 의해 불법 수입(...) 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때문에 이 당시 인기에 대해선 무슨 차트 순위로 공식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복사본이 수십만장 팔렸다는둥 추억보정이라는둥 오늘날에도 과소평가와 과대평가가 동시에 있는 편이다. 하여튼 1998년 일본 문화 수입이 공식적으로 열리면서 X JAPAN도 합법적으로 앨범 발매 등을 할 수 있게 된다.[54] 이 소문이 퍼진 첫 시발점은 모 언론사의 오보였다고 하는데, X JAPAN의 누적 판매량을 BLUE BLOOD 한 앨범의 판매량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있었다고 한다.[55] 당시 일본 문화를 몰래 즐기던 층들 중엔 중고등학생이 상당수였는데, 아무래도 속주, 고음, 현란한 테크닉 이런걸 더 크게 받아들이기 쉬운 세대들이다 보니 현란한 속주를 선보이던 요시키가 많이 과대평가 받은 측면이 있다. (드럼 실력에서 속주는 한 부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고음병이 워낙 임팩트가 컸지만 비슷한 시기 속주병도 만만찮았다.[56] 엠씨더맥스의 개명 전 이름인 꼬꼬마 문차일드 당시 요시키한테 편지도 보내는 등 친분을 쌓았다.[57] 자신이 개최한 2002ETPFEST에서 히데를 스크린 영상 공연하게 하였으며, 히스와 파타가 dope HEADz로 참가하였고 서태지가 파타에게 일본어로 X팬이었다며 인사했었다. 지금은 유족에게 돌려줬지만 HIDE의 사망 직후부터 그의 기타를 유증받아 한동안 가지고 있었을 정도.
여담으로 서태지가 히데의 팬인 건 학고한 사실이지만, 베이시스트이던 타이지의 예명애서 서태지란 예명을 만들었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진위판정이 불가'하다. 왜냐면 서태지 본인이 정답을 고르지 못하도록 하는 애매모호함을 좋아해서, 여기선 이렇게 말했다가 저기선 또 다르게 말했다가 하며 여러 썰을 만드는 걸 즐기기 때문. 다만 1990년대 락 씬에서 이름에 대한 소문이 있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서태지 문서 참조.
[58] 힐링캠프 출연 당시 그룹 신화 김동완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만은 한동안 'X JAPAN에 꽂혀서 파퓰러 댄스&팝 가수인 신화에게 X JAPAN 같은 파격적인 비주얼을 강요했다'고 한다.# 문젠 그 결과 인기가 폭락하고 욕만 잔뜩 먹었다고... 사실 댄스 가수를 비주얼 록 가수처럼 치장하는 시도는 이미 H.O.T. 때도 몇번 선보인 바 있었다.[59] 신화 초기에 X JAPAN에 꽂힌 소속사 대표 이수만의 강요로 본의 아니게 X JAPAN의 비주얼을 따라 하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실제로도 X JAPAN을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단독 콘서트 때 <Tears>라든지 <Say Anything> 같은 X JAPAN의 히트곡들을 빠지지 않고 자주 부르는 편이다.#[60] 개인적인 친분도 상당해서 요시키에게 조성모 노래 가운데 가장 흉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그대 뿐이어서> 곡을 받아 5집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공연도 종종 함께 했다. 다만 요시키와 조성모의 콜라보레이션은 그리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나름대로 뛰어난 보컬리스트인 조성모에게 토시 창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통에 죽도 밥도 아니게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61] X JAPAN 극팬으로 자신이 감독을 맡은 2000년대 영화 <여친소> OST로 X JAPAN의 최대 히트곡인 <Tears>를 그것도 이례적으로 멜로디만이 아닌 일본어 가사 보컬을 그대로 쓸 정도였다. 요시키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해 공개적으로 "예술가로서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62] 영화 <여친소>에 캐스팅 되면서 X JAPAN 극팬인 곽재용 감독에게 소개받고 꽂혔다는 일화를 언급했다.[63] X JAPAN은 <ART OF LIFE>로 미국 진출을 추진하다 여러 이유로 실패한 뒤로는 딱히 해외 진출을 시도한 적이 없다.[64] 실제 일본의 위상에 비해 이들의 해외 인지도는 처참한 수준이다. 그나마 B'z는 명탐정 코난 주제가로 어느정도 알려져있긴 하다.[65] 이미 VANISHING VISION 앨범 사진도 지금보면 논란이 있다.[66] X JAPAN feat.HYDE를 YOSHIKI feat.HYDE로 수정하였다. 참고로 이 곡엔 SUGIZO도 참여하였다.[67] 싱글 1,000장을 제작하고 지인 및 친구들을 위주로 직접 팔아 매진시켰다.[68] 최초 제작분 싱글 2,500장이 매진되었기 때문에 싱글 추가 제작을 예정하고 있었지만, 녹음에 참가했던 기타리스트 JUN과 베이시스트 HIKARU가 탈퇴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2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더블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800,000장 이상) 인증[70] 싱글차트 2주 연속 1위[71] 월간 7위[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78] iTunes Store 싱글 차트 기준.[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81] 부틀렉은 휴대용 녹음기로 공연 음원을 도청하는 불법 행위이지만 요시키는 이를 역이용해서 앨범으로 발매했다.[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G] 일본레코드협회 현기준 골드 (최소 출하량 100,000장 이상) 인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