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8 19:20:18

23-F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쿠데타의 배경3. 쿠데타의 발발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대응5. 결과6. 평가
6.1.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쿠데타
7. 기타
7.1. 그날의 흔적7.2. 이후 군부의 쿠데타 모의7.3. 자작극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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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1년 스페인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 23-F라는 말은 스페인어2월 23일을 의미하는 23 de febrero[1]의 약자다. 1930년대 호세 산후르호 장군의 쿠데타 미수를 산후르호의 이름을 따 산후르하다(Sanjurjada)라고 부르듯 쿠데타 주동자인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 1932~) 스페인 헌병대(Guardia Civil: 과르디아 시빌) 중령의 이름을 따 테헤라소(Tejerazo)라고 부르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중남미에서는 쿠데타가 딱히 자랑스러울 건 없지만 고유의 정치적 전통(...)으로 여겨졌다. 다른 나라의 쿠데타와 비교하면 황당하지만 저렇게 정부 기관을 장악하기도 전에 선언부터 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을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2][3]라고 부르며 개별 쿠데타 사건을 두고 그 주동자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전통이 있다. 프랑코 정권을 낳은 스페인 내전의 발단이 된 1936년 여름 쿠데타의 경우 일단 개인이 주도한 것도 아니고[4] 저렇게 쿠데타를 한다고 선포하고 사건을 터트린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쿠데타가 실패하고 장기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프로눈시아미엔토에 해당되지 않는 예외적인 사건으로 분류한다. 반대로 23-F 쿠데타는 전통적인 이베리아 반도 및 중남미권의 쿠데타 행동 양식과 비슷하여 마지막 프로눈시아미엔토로 보기도 한다.

2. 쿠데타의 배경

스페인 내전으로 정권을 장악해 스페인을 철권통치하던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프랑코1975년 11월에 사망하고 스페인의 권력은 프랑코에 의해 옹립된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에게 넘어가 1931년에 폐지되었던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지 않고 프랑코 시대의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추진했다.[5]

프랑코 정권 말기에 수상을 맡았던 카를로스 아리아스 나바로(Carlos Arias Navarro)가 1976년 7월에 국왕의 압력으로 퇴진하면서 스페인의 민주화는 가속화되었다. 후임 수상에 임명된 아돌포 수아레스는 민주주의 체제 수립에 박차를 가해 1977년 4월에는 그동안 불법이었던 스페인 사회노동당스페인 공산당을 합법정당으로 인정했다. 그 결과 스페인 내전 이후 소련에 오랫동안 망명[6]해 있던 라 파시오나리아[7]로 유명한 전 공산당수 돌로레스 이바루리 등의 구 공화국의 유력인사들이 귀환하기도 했다.

1977년 11월에 열린 총선에서는 수아레스 수상이 이끄는 민주중도연합의 단독 정권이 수립되었다. 민주주의로의 급속한 이행으로 다른 유럽 국가들은 이를 스페인의 기적이라 부르며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러한 수아레스 수상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의 민주화 개혁에 대해 프랑코 총통의 추종자들을 주축으로 한 군 내부의 우파 성향 장성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게다가 공산당의 합법화나 ETA테러[8], 20%가 넘는 실업률 등으로 인해 우파 진영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사독재의 부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따라 1977년 11월 군부 내 우파의 대표적 인사인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Jaime Milans del Bosch) 육군 중장과 피타 데 바이가 해군 중장이 하티바(Jativa / Xativa)[9]에서 회동을 가지고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한 뒤 국왕을 앞세운 소위 구국내각을 구성해 의회 권한을 축소하고 군부 독재 정권을 수립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978년 11월에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 헌병 중령과 사엔스 데 이네스트리자스 헌병 중위가 수아레스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 계획인 '갈락시아 작전(Operación Galaxia)'을 추진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테헤로 중령은 반란모의 혐의로 징역 11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갈락시아 작전의 불발 후 군부 내 우파 세력의 쿠데타 모의는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스페인 국내에서는 군부의 쿠데타 소문이 끊이지 않아 불안감이 고조되었다.

3. 쿠데타의 발발

파일:tejerobarriopedroblog.jpg

[10]

징역 11개월을 살고 풀려나와 다시 헌병군 중령으로 복귀[11] 안토니오 테헤로는 1981년 2월 23일 200명의 치안 경비대를 이끌고 스페인 하원 의사당에 난입해 350여 명의 하원의원과 정당 대표, 수아레스 수상과 다수의 내각 각료들을 인질로 잡았다.
"¡Quieto todo el mundo!" (아무도 움직이지 마라!)
의사당에 들이닥친 테헤로가 외친 첫 마디.
마침 이날은 수아레스 수상이 사의를 표명하고 레오폴도 칼보소텔로 부수상을 신임 수상으로 선출, 지명하려는 날[12]이었기 때문에 의사당에는 거의 모든 하원의원들이 모여 있었고 신임 수상의 선출과정을 생중계하기 위해서 방송국과 신문 기자들도 모여 있는 상황이었다. 오후 6시 23분 테헤로 중령은 의사당에 난입한 뒤 하원의원들에게 모두 엎드리라 고함을 지르고 쿠데타에 가담한 헌병들이 CETME 자동소총기관단총을 난사하자[13] 거의 모든 하원의원들은 의석 탁자 밑으로 엎드렸다. 야당 사회노동당펠리페 곤살레스[14] 서기장은 동료의원에 밀려 넘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돌포 수아레스 수상과 스페인 공산당의 산티아고 카리요(Santiago José Carrillo Solares) 서기장은 "내가 왜 니들 말을 들어야 하냐?"면서 엎드리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거기에 당시 팔랑헤당, 군부 출신으로 프랑코와도 함께 활동했던 수아레스 내각의 부수상이었던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Manuel Gutiérrez Mellado)도 같이 있었다.

사실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는 반체제 인사로 숱한 고생을 겪어 쿠데타에도 눈 깜짝 안 하고 패기롭게 있을 수 있었다. 스페인 내전 시기부터 최전선에서 싸우며 망명 시기에는 공산당 당수로서 숱한 암살, 테러 위협에 시달리다가 강산이 3번하고도 반 바뀐 뒤에야 모국에 돌아왔던 카리요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살아 보지도 못했던 시대로 역주행하려고 드는 철부지들이 고까웠을 것이다. 일단 테헤로 중령에 비해 20년 가까운 연장자여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광기의 시대를 겪었고 그 자신이 내전 도중인 1936년 12월 마드리드에서 공화파가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수감되어 있었던 프랑코파 정치범과 우익계 민간인들을 들판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처형한 파라쿠에요스 감옥 학살(Matanzas de Paracuellos) 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15] 정치인으로서든 사형 집행인으로서든 테헤로에게 겁 먹을 이유는 없었다. 반면 테헤로 중령은 1932년생으로[16] 20살이 되었을 1952년을 기점으로 해도 프랑코 정권의 빈곤이나 문화 탄압은 겪어 보았어도 공포정치와 피비린내나는 자국민 대학살 숙청이 정점을 이루었던 1940년대에는 열 살배기 어린아이였다.

한편 수아레스 수상은 프랑코 정권 시절 RTVE(스페인 국영 방송사) 사장을 맡는 등 테크노크라트로 성장한 우익 인사였지만 성품이나 정치적 성향에서는 온건한 인물로 민주화에 대한 신념은 확고한 사람이었고 그만큼의 배짱은 있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좌우익 대립이 험악한 스페인 정치판에서 양쪽 모두 어느 정도 존중하는 초당적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수아레스 수상은 아버지, 삼촌부터 내전 이후 콩밥 먹었던 마드리드 인근 아빌라의 공화파 가정 출신으로서 프랑코 정권이 살아 있을 때는 프랑코주의자들에게 순종했지만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공공연히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필요성을 역설했다. 덕분에 프랑코 정권의 인사였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확실한 신념을 가진 엘리트로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게 낙점되었고 수상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프랑코 정권 하에서 성장했지만 프랑코주의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재임 시기부터 유난히 당시 좌파로 분류되던 언론들의 눈치를 많이 보고 망명 후 돌아온 주로 정치적으로는 좌파 성향의 지식인들과 친밀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사석에서는 내 본심은 사회민주주의자요라고 종종 말하기까지 했다. 23-F와 수아레스 수상에 대한 서적 중 베스트셀러인 한 순간의 해부학(Anatomia del instante, 2009)의 저자 하비에르 세르가스의 평에 따르면 어떤 사상이든 한 번도 진실하게 믿어 본 적이 없고, 그렇기에 또 그 시대에 필요했던 위대한 인물이라 평했다. 이 쿠데타가 터졌을 당시의 수아레스 내각은 레임덕으로 인해 이미 해산되었고 차기 수상에게 인수인계하던 시절이라 수아레스 수상은 스페인 정치판, 언론 전반에서 까이고 욕 먹고 있었지만 여기서 제대로 된 지도자다운 배짱을 제대로 각인시켜 결국 2007년 안테나 3 방송국에서 진행한 가장 위대한 스페인인은 누구인가란 설문 조사에서 5위를 먹는 기염을 토했다.[17]

또 당시 의사당에는 프랑코 정권 당시 관광장관과 정보장관, 영국 대사를 지냈고 프랑코 사망 직후 민주화 전환기 당시 내무부 장관직을 지내기도 했던 마누엘 프라가 인민동맹(Alianza Popular, AP) 대표도 현직 하원의원 신분으로 있었는데, 프라가 본인은 사상적으로는 골수 프랑코주의자이긴 했지만 어떤 형식으로든 의회민주정의 필요성은 인정하고 있었다. 당장 하원의원 직책 가지고 군부에 개입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는 쿠데타에 대해 "이게 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군인으로서 할 짓이냐, 프랑코 각하가 살아 계셨어도 이런 무법패악질이 인정받을 리 없다!"라는 어조로 항의했다.[18]

그리고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수상은 육군 중장이자[19] 당시 군부 최선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새까만 후배인 헌병들이 강제로 자리에 앉히려 하는 등의 모욕을 당했다. 당시만 해도 징병제가 살아 있었기 때문에 경직된 군사 문화를 체감하고 살았던 스페인인들이 저런 광경을 생중계로 보고 충격에 빠진건 덤. 사실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군인 → 내전 참가 테크를 착실하게 밟아나가던 팔랑헤 원년 멤버였으나[20] 스페인의 민주화를 추진하는 문민 내각에서 부수상에 임명되어 수아레스 내각이 추진한 군부 개혁의 실무를 맡아 군내 사조직의 정치적 기득권화를 막는데 앞장섰기 때문에 당시 군부 핵심 파벌이 배신자로 간주하고 찢어죽이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는 점에서 사실 헌병들의 행동이 마냥 충격적인건 아니었다.

물론 구티에레스 메야도 본인이 공개 석상에서 이를 인정한 적은 없지만 말년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민주화, 현대화가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인들과 교류하며 생겼던 심정 변화를 토로하곤 했다. 말년에는 젊었을 때 쿠데타에 가담하여 제2공화국을 무너뜨렸던 것에 대한 죄책감을 확실히 느꼈으며 이에 기반한 회개 의식에서 수아레스 수상과 정치적으로는 물론, 사적으로까지 상당히 친밀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팔랑헤당 원년 멤버, 프랑코 정권 개국공신, 군부 최선임이라는 막대한 배경을 지닌 거물급 인사였던지라 단신으로 스페인군 내 사조직 전체와 대적할 수 있었고 짬밥에서든 계급에서든 경력에서든 인망에서든 꿇릴 게 하나도 없던 그는 무장병력을 대동하고 의사당에 난입한 테헤로 중령을 마음껏 갈궈대며 쿠데타를 방해했다. 테헤로 중령은 급기야 헌병들을 시켜 구티에레스에게 총구를 들이대고 등 뒤에서 어깨를 붙잡아 찍어 누르려고 했으나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총리는 위축되기는커녕 도리어 헌병들을 뿌리치며 감히 지금 누구한테 손을 대느냐고 일갈하며 필리버스터(.....)를 시전했다.

이윽고 테헤로 중령의 격발을 시작으로 모든 헌병들이 일제히 천장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지만 구티에레스 메야도 부수상은 도리어 두 손을 옆구리에 올리며 어이없다는 제스처를 취했는데[21] 옆에서 이를 계속 말리던 수아레스 수상이 "친구로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으니 나를 봐서라도 앉아 달라."고 호소한 끝에 결국 자리에 앉았다. 이 장면들은 고스란히 TV를 통해 스페인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와 같은 시각에 하이메 미란스 델 보슈(Jaime Milans del Bosch) 육군 중장이 이끄는 전차부대가 발렌시아마드리드로 난입해 마드리드에 있는 RTVE(스페인 국영 TV방송국)을 점령했다.

하지만 행동대장 격이었던 테헤로가 무력으로 의회를 점거하고 미란스 델 보슈가 발렌시아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다른 사단장들을 설득할 동안, 국왕과 문민 정치인들과 협상하는 역할, 즉 쿠데타의 정치적 브레인이자 주동자 중 가장 높은 직책인 육군참모차장에 있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Alfonso Armada Comyn) 장군이 예측했던 바와는 반대로 사상적인 차원에서든, 제도적인 차원에서든, 표현의 형태로든 스페인 정계에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이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프랑코 정권 출신의 민간 정치인 동지들에게 버림받은 순간 쿠데타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대응

쿠데타가 일어나던 당일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친구인 이그나시오 카로와 함께 스쿼시 게임을 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부관이 테헤로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하자 국왕은 즉시 게임 약속을 취소하고 자신의 군사 참모들을 소환하여 스페인 전역에 명령을 내려 자신이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즉시 자신의 참모진을 소집하여 상황 통제에 나섰다. 한편 아르마다는 마드리드 군관구와 스페인 최정예부대인 제1기계화사단 '브루네테'의 지휘부에게 자신이 이미 국왕의 밀명을 받아서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는 갖은 거짓말로 이들을 포섭한 상태였는데 아르마다의 허풍을 미심쩍어하던 이들은 왕실과 비밀리에 접촉하여 국왕이 쿠데타를 지휘할 준비는 고사하고 이미 퇴근해서 친구와 게임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아르마다가 구라를 친 걸 간파해서 줄줄이 이탈하는 등 쿠데타는 시작부터 삐걱댔다.[22]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측근인 제23대 몬데하르 후작 니콜라스 코토네르 기병대장은 마드리드로 진주하는 반란군 기갑사단에 전화를 걸어서 국왕의 의도를 알리고 이들 대부분을 병영으로 복귀시켰으며 호아킨 발렌주엘라 중장은 마드리드 인근에 주둔한 공수부대의 충성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합참의장 아그나시오 알파로 아레구이 중장은 국왕에게 군대가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그러면 문민정부가 무너지고 군부가 다시 나라를 장악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거부했다. 대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사태에 대응하기 위한 비상내각을 수립, 장관과 차관들을 소집한 후 당시 코르테스(의회) 밖에 있어 무사했던 내무장관 프란시스코 라이나를 불러다 임시 내각수반에 앉혔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헌병대 사령관인 아란부루 트페테 장군과 페르난데스 캄포 장군을 통해서 테헤로를 설득하려 했지만 테헤로는 위에 적혀 있듯이 왕도 상관도 아예 안중에 없었고 오로지 보슈의 명령만 따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에 오후 8시 후안 카를로스는 보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보슈는 존엄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했다는 궤변만 늘어놓으면서 역시 후안 카를로스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보슈는 몰래 발렌시아에 주둔한 공군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 이들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이들은 모두 국왕과 함께 사관학교를 졸업한 국왕의 측근이라 보슈에게 협조하기는커녕 자초지종을 국왕에게 보고하면서 충성을 재확인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본토와 발레아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등 각 지역에 주둔한 10명의 지역 주둔군 사단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쿠데타에 동조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이때 사단장급 장성들 대부분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사관학교에 다니던 시절 알게 되어 친해진 인물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국왕의 명령을 따랐고 쿠데타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다.[23] 당연히 각 지역 주둔군은 압도적으로 국왕에게 충성했다. 오죽하면 극우 성향으로 '수꼴 장군'으로 악명 높았던 카나리아 제도 사령관 곤잘레스 델 예로 장군까지도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을 정도. 하지만 일부 장군들은 국왕의 전화를 회피하면서 몰래 보슈와 접촉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슈의 발렌시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 사령부들은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았다.

여기에 운도 따라 줬는데 세비야의 제2군관구 사령관인 페드로 메리 고르돈 장군은 초강경 극우파로 명성이 자자했고 매우 높은 확률로 쿠데타에 가담할 것으로 여겨졌으나 하필 전날 위스키를 퍼마시고 만취하는 바람에 사태가 끝날 때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그 틈을 타 제2군관구 참모장인 구스타포 우루티아 장군이 세비야 군정장관 마누엘 프랑코 장군과 민정장관 호세 마리아 산츠 파스토르과 합심하여 제2군관구 명의로 국왕에 대한 충성을 공식 선언했다.

발레아레스 제도 군관구 사령관 마누엘 데 라 코레 파스콸 역시 보슈의 절친한 친구로, 쿠데타에 합류할 타이밍만 재고 있었으나 초강경 극우파로 알려진 카나리아 군관구 사령관 델 예로 장군이 뜬금없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걸 보고 주저하며 다른 관구장들 눈치만 살피다가 끝내 가담하지 않았다. 델 예로가 변절한 이유도 기가 막힌데, 하필 군부 우파 내에서 라이벌 관계인 보슈가 자기를 무시하고 거국내각의 수장으로 코민 따위의 애송이를 옹립해 혼자서 다 해쳐먹으려하는 데 반감을 가져 자신에게 이득이 안되는 쿠데타에 전면 반대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한편 세계 각국에서 후안 카를로스 1세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는데 프랑스 대통령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벨기에 국왕 보두앵, 모로코 국왕 하산 2세,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후안 카를로스 1세에 대한 지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가 가장 바라던 미국은 침묵을 지켜 그를 실망시켰다. 또한 후안 카를로스는 카탈루냐와 바스크의 자치정부 지도자들과도 접촉하여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음을 알렸다. 쿠데타군이 자기 자신의 대의명분에 도취돼서 국왕이 국제적, 국내적 지지를 결집하는 것도 가만히 내버려뒀을 정도로 쿠데타군의 계획은 엉망진창이었다.

한편 당시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소장이 쿠데타의 일원이라는 것은 원래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는데 쿠데타군의 좌충우돌 뻘짓 끝에 곧 국왕에게 코민도 한패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에 9시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다른 장군들을 소집하여 아르마다 장군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아르마다는 사태의 심각성을 볼 때 모든 정당을 통합한 거국내각을 수립하고 자신이 책임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아르마다를 감시하란 어명을 받은 가베이라스 장군은 아르마다에게 그 제안은 국왕에게 직접 해 보라고 권했고 아르마다가 이 제안을 국왕에게 상주하자 후안 카를로스는 절대로 그러한 제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아르마다는 왕궁에서 알현을 요청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아르마다 장군의 의도를 간파하고 이를 거부했다.

어차피 테헤로가 계속 쿠데타군을 이끌고 코르테스를 무장점거하고 있으면 거국내각이고 뭐고 없는 상황에서 일단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아르마다 장군에게 국왕의 이름을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우선 테헤로부터 설득하라고 했다. 이에 아르마다는 이제 자기가 스페인 정부의 수장이 될 거란 희망에 부풀어서 테헤로에게 외국으로 망명시켜줄테니 이쯤에서 그만두라고 했고 덕분에 테헤로는 빡돌아서 당장 아르마다 장군을 코르테스에서 내쫓아버렸다.(...)



테헤로 중령이 투항을 거부한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그날 밤 직접 스페인 육군 원수 정복을 입고 특별방송을 내보내 시민들에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반란군이 국영방송국을 점령했기 때문에 방송진을 부를 수 없어 이 계획은 지연되었으나 국왕의 측근들의 개입으로 9시가 되자 쿠데타군이 방송국에서 철수하였고 11시가 되어 방송 관계자들이 가까스로 입궐할 수 있었다. 국왕은 자정부터 대국민 특별방송을 녹화, 쿠데타 세력에 맞서 민주주의를 지킬 것임을 천명했다. 또 미란스 델 보슈 육군중장에게 쿠데타군의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해당 방송은 새벽 1시 23분부터 방영되었다. 국왕이 새벽이 되어서야 방송을 내보낸 것이 쿠데타가 확실히 실패했다는 증거를 확인하느라 머뭇거렸단 설명이 많았는데 사실은 그냥 기술적으로 불가능해서였다. 군부의 의회 난입으로부터 단 7시간도 안 되어 쿠데타 시도가 군부의 완패로 종결되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참고로 7시간 진압이 얼마나 짧은 거냐면, 인류 역사상 가장 황당한 쿠데타로 평가받는 1982년 케냐 쿠데타가 쿠데타 시작 6시간 만에 진압당했다.
MENSAJE DE SU MAJESTAD EL REY
국왕 폐하 대국민 성명

Al dirigirme a todos los españoles, con brevedad y concisión, en las circunstancias extraordinarias que en estos momentos estamos viviendo, pido a todos la mayor serenidad y confianza y les hago saber que he cursado a los capitanes generales de las regiones militares, zonas marítimas y regiones aéreas la orden siguiente:
은, 현재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상황에서, 전 스페인 국민 여러분들께 최대한 침착하고 안심하시기를 짧고 간결하게 당부드리며, 육군·해군·공군 참모총장들에게 다음과 같은 군령을 하달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Ante la situación creada por los sucesos desarrollados en el Palacio del Congreso y para evitar cualquier posible confusión, confirmo que he ordenado a las Autoridades civiles y a la Junta de Jefes de Estado Mayor que tomen todas las medidas necesarias para mantener el orden constitucional dentro de la legalidad vigente. Cualquier medida de carácter militar que, en su caso, hubiera de tomarse deberá contar con la aprobación de la Junta de Jefes de Estado Mayor.»
하원의사당에서 일어난 사건과 관련하여 발생 가능한 여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짐은 행정 당국과 합참에 이 헌법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만일 (어떤) 군사적 조치가 취해질 필요가 제기될 경우 합참의 승인이 있어야 합니다.

La Corona, símbolo de la permanencia y unidad de la patria, no puede tolerar en forma alguna acciones o actitudes de personas que pretendan interrumpir por la fuerza el proceso democrático que la Constitución votada por el pueblo español determinó en su día a través de referéndum.
조국의 영속과 단합의 상징인 국왕은 스페인 국민이 투표로 승인한 헌법상의 민주적 절차를 무력으로 방해하려는 의도를 띤 어떠한 행동도 용인할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왕당파다!(¡Hoy todos somos monárquicos!)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폐하 만세!
스페인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

이 방송으로 스페인 전역에서 공포에 질려서 잠들지 못하고 국왕의 반응을 기다리던 수백만명의 스페인 시민들은 마침내 안심할 수 있었고[24] 국왕을 위해 행동했니 어쩌니 구라를 치고 있었던 쿠데타 세력의 거짓말도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아르마다는 군부가 국왕에 반기를 들 것이라고 협박하면서 내무장관 라이나를 찾아가서 자신이 일단 비상 군사정부의 수장이 되어야 테헤로를 복종시킬 수 있다고 궤변을 늘어놓았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보슈 장군에게 2번째로 전화를 걸어서 자신이 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선언을 했으니 이제 돌이킬 수 없으며 즉각적으로 군대를 철수시키고 테헤로를 항복시키지 않으면 쿠데타의 모든 책임을 보슈에게 묻겠다고 최후통첩을 날리면서 어떤 쿠데타도 국왕 뒤에 숨을 수 없고, 자신은 퇴위하지도, 스페인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보슈는 마지막으로 쿠데타로 인해 국왕이 얻을 이익에 대해서 설득해보려다가 끝내 항복하여 자신의 선언을 취소하고 모든 병력을 발렌시아 시내에서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지지도, 어떠한 명분도 사라졌고 사단장들도 모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편으로 돌아가 최후의 내전 루트도 완전히 막혀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쿠데타에 참여한 헌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의사당 밖으로 도주했다. 이젠 쿠데타고 뭐고 다 틀렸음을 깨달은 테헤로 중령은 아르마다 장군을 중재자로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헛된 꿈을 꾸고 있던 아르마다를 공개적으로 망신시키기 위해서였다. 이후 아르마다 소장 명의로 발표한 중위 이하의 헌병대원들이 기소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4일 정오에 인질로 잡고 있던 하원의원들을 석방한 뒤 아르마다와 함께 경찰에 항복했다.[25]

여담이지만 하원의원들의 전면적 석방 직전에 풀려난 수아레스 수상은 즉시 사르수엘라 궁전으로 입궐하였고 마침 쿠데타 세력을 대표해 중재를 하러 입궐한 아르마다 장군과 마주쳤다. 근데 하필 아르마다 장군의 직책이 육군참모차장이었고 국왕의 심복이었으며 국왕을 대표해서 테헤로와 협상하러 코르테스 안까지 들어왔고 그때 쿠데타군이 와해되어 가던 시점이라, 수아레스는 아르마다 장군이 쿠데타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계속 국왕과 내각에 충성을 지킨 것이라고 착각하고 "지금까지 믿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리고 이 촌극을 지켜보던 국왕은 수아레스 수상에게 아르마다 장군이 반란자가 맞다고 확인해준 후 오전에 내각회의를 소집해 내각 각료들에게 아르마다가 바로 쿠데타의 주동자임을 알렸다. 그렇게 국왕의 포고가 끝나자마자 수아레스 수상은 가베이라스 장군에게 즉시 아르마다를 체포하라고 지시했고, 아르마다가 국왕을 쳐다보자 수아레스는 "무엄하다! 어딜 감히 용안을 보려 드느냐! 날 똑바로 봐라!" 라고 일갈했다고.

5. 결과

프랑코 사후에도 여전히 유리한 다수이던 스페인의 프랑코 지지 세력을 회생불능 수준으로 몰락시킨 사건. 적어도 프랑코 독재 당시 수준의 극우 파시즘 세력은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져 결코 재기하지 못하게 되었다.

당초 쿠데타 세력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를 바탕으로 구국내각을 구성해 군사독재를 부활시킬 작정이었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반대로 결국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사건 이후 군부의 위신은 추락했다. 23-F 이후로도 군부가 쿠데타를 도모하는 일은 몇 번 있었지만 기도 단계에서 발각되었고 얼마 못 가 사회노동당이 집권하여 숙군작업을 펼침으로써 스페인의 민주화는 확고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숙청이라고 해 봤자 불건전한 사상들을 그냥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살게 되어야 했던 정도밖에 안 되어서 지금도 스페인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스페인에서도 말이 많이 나오곤 한다. 반대로 해석하자면 그만큼 숙군이 제대로 되지 못했는데도 쿠데타 동력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쿠데타를 일으킨 미란스 델 보슈 육군중장과 안토니오 테헤로 중령, 아르마다 소장은 국가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최종심에서 테헤로 중령과 보슈 육군중장은 30년형, 아르마다 소장은 26년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테헤로 중령은 스페인 단결당(Solidaridad Española)이라는 정당을 창당하고 1982년 총선에 옥중출마하기도 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테헤로 중령이 1996년에 석방된 것을 마지막으로 모두 석방되었다.

쿠데타 주동자인 테헤로 중령은 석방된 후 고향인 말라가에서 미술가로 살고 있고,[26] 2024년 현재도 생존 중이다. 석방 이후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망언들을 내뱉으면서 자기합리화를 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조용히 생활하는 중. 미란스 델 보슈 중장은 1991년에 사면되어 조용히 마드리드에서 살다가 1997년에 뇌종양으로 사망했고 아르마다 소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1988년에 사면을 받아 석방된 이후 갈리시아에서 조용히 살다가 2013년에 사망했다.

6. 평가

하비에르 세르카스를 비롯한 현대 스페인의 지식인, 언론인들은 좌우익 상관 없이 민주적 과정에서 벗어난 정권 찬탈 시도는 인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스페인 내전기와 프랑코 독재를 상징했던 세명의 거두[27]가 힘을 합쳐 몸으로 쿠데타를 막았던 진정한 스페인 민주주의가 탄생한 순간이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6.1.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쿠데타

쿠데타 주동자들의 내부 결속은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쿠데타 발발 전만 하더라도 계급과 정계, 왕실과의 연줄로 쿠데타의 주동자 노릇을 했던 알폰소 아르마다 코민 장군은 막상 본인이 쿠데타의 주동자이면서도 테헤로, 미란스 델 보슈와 전혀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르마다는 민주주의 체제를 역행하는 것엔 관심도 없고, 다만 후안 카를로스의 전직 개인 교사이자 비서로서 누리던 총애와 관심을 수아레스 수상이 빼앗았다는 지극히 사소한 개인적 원한으로 쿠데타를 결행한 것이다. 테헤로와 보슈가 위대하신 카우디요 프랑코 동지께서 세우신 위대한 스페인(...)을 의회정치, 민주주의, 계몽주의로 타락시키려고 하는 유대-볼셰비키-프리메이슨에 대항하여 1936년의 성전을 다시 일으키려던 와중에 아르마다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카리요의 공산당만 빼고 펠리페 곤잘레스의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나머지 정당들을 규합해 좌우파를 막론한 거대 정당 정치인들과 차기 정권에서 군부의 지분에 대한 협상을 하고 있었다.물론 그 차기 정권이란 걸 자기가 쿠데타로 만들 계획이라는 내용은 쏙 빼놓고

아르마다는 태생부터 직업은 군인이지만 실제 하는 일은 궁정의 고위 귀족에 가까웠던 왕가와의 연줄을 통해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한 귀족 정치군인 가문 태생으로, 일반적인 보수 우익 수준의 반공 의식을 제외한다면 뚜렷한 정치적 지향점도 없고 민주정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지만 그걸 또 막는다고 국가적 난리를 칠 마음은 없는 구시대 엘리트 기회주의자였다. 게다가 본인의 정치적 영향력도 프랑코 정권 말기 차기 후계자로 내정받았던 후안 카를로스의 비서 겸 개인교사로서 생긴 연줄이었으니 아르마다 입장에서 뭔짓을 하던 국왕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건 그냥 자살 수준으로 멍청한 짓이었다. 미란스 델 보슈는 사상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반대했으나 근왕주의적 관점에서 민주정을 반대했기 때문에 민주정을 전복하고 싶어했지만 이를 이루려고 국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반면 테헤로는 국왕이 프랑코 각하의 유지에 반하며 민주주의를 도입하려고 들면 국왕도 때려잡아야 할 빨갱이에 불과하다는 골수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았기 때문에 국왕의 호소가 발표된 다음에도 한동안 점거를 풀지 않았다.

쿠데타 주동자들은 쿠데타가 터진 그 순간까지 자신들이 동상이몽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고 테헤로가 하원의사당을 점거해 놓으니 아르마다는 멀리서 전화로 "수고했네. 이제 내가 민간 정치인들과 협상을 할 테니 자네는 물러나 있게."라는 식으로 나오자 아르마다는 물론, 아르마다와 마찬가지로 멀리서 전화로 자신을 통제하려고 했던 보슈에게까지 뻗대면서 결국 쿠데타 자체를 주도했던 두 상급 지휘관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하비에르 세르카스는 이를 두고 "아르마다는 수아레스의 타도를 목표로 하고 의회민주정과 국왕은 그대로 두는 쿠데타를 꿈꿨고 보슈는 의회민주정은 전복하겠지만 국왕은 건드리지 않는 쿠데타를 꿈꿨으며 테헤로는 민주정을 전복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에 국왕이 쿠데타에 반대한다면 국왕까지 폐위하려는 쿠데타를 상상했다"고 하며 어찌 보면 영화 라쇼몽이 생각나는 동상이몽 때문에 쿠데타가 틀어졌다고 표현했다.

현대 스페인의 우익은 왕당파가 다수지만 우익이라고 해서 스페인 보르본 왕정이 이미 두 번 날아 갔다가 군사 독재자들과 카우디요 프랑코 덕분에 어거지로 돌아왔다는 역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70-80년대만 하더라도 테헤로처럼 보르본 왕가도 빨갱이라는 식의 문자 그대로 골수 극우 파시스트들도 꽤 있었다. 이들을 상대하기 위해 수아레스 수상과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사후 몇 년 동안은 군부에게 선거나 의회는 장식일 뿐 국정 주도권은 여전히 군부에 있으니 안심하라는 메세지를 끊임없이 보내야 했고 결국 뒤늦게 군부 내 파시스트들이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 걸 깨닫게 되자 이런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쿠데타를 계기로 이렇게 군부에서 왕실로도 성이 안 차는 골수 파시스트들이 줄줄이 몰락해서 스페인 민주정은 극우파의 위협에서 한풀 안전해질 수 있었다.

7. 기타

7.1. 그날의 흔적

파일:Congreso_de_los_diputados,_disparos_del_techo,_Madrid,_España,_2015_09.jpg

지금도 스페인 하원 의사당 안에 가면 천장에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 보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1981년 2월 23일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을 상기시키기 위해 보존되었다.

7.2. 이후 군부의 쿠데타 모의

F-23 이후 스페인에서는 1997년까지 3건의 내란음모 사건이 있었다.

1982년에는 총선 하루 전인 10월 27일에 스페인군 내 일부 세력이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10월 1일에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후 1985년 국군의 날에 폭탄을 터뜨려 스페인 정부의 수뇌부를 암살하려 했지만, 쿠데타를 모의한 군인들도 이 계획을 포기했다. 당시 국군의 날 행사에는 후안 카를로스 1세, 총리 펠리페 곤살레스는 물론 왕가, 국방부장관, 국방참모총장도 살해 대상에 포함되었다. 덤으로 해당 행사에는 하원의장, 상원의장, 대법원장, 헌법재판소장, 법무부장관도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만약 실현되었더라면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 사고급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1985년의 쿠데타 모의는 국가기밀로 취급되어 2000년대 초까지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고, 쿠데타를 모의한 군인들은 그 어느 누구도 체포되지 않았다.

이후 1997년 펠리페 곤살레스는 스페인에 새로운 쿠데타 시도가 있다고 폭로했고, 이후 스페인에서 쿠데타 시도는 포착되지 않고 있다.

7.3. 자작극 음모론

한편 스페인 일각에서는 이 사건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자작극, 다시 말해 친위 쿠데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의 저명한 작가인 호세 루이스 데 비라젠가 후작 등은 이 쿠데타에 후안 카를로스 1세와 연관이 있는 은행가나 가톨릭 교회 인사 등의 민간인들이 후원하고 있었음을 들어 의혹을 보냈다. 이런 자작극 의혹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긍정도 부정도 하고 있지 않다고 전해졌다. 일단 후안 카를로스가 스페인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이런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경력이니 이게 사실이면 후안 카를로스뿐만 아니라 제3차 보르본 복고 왕정 전체의 정통성과 명분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스페인 정국 전체를 시궁창 대혼란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 의혹이지만 그 민감성도 워낙 절대적이다 보니 아직은 의혹 수준에 머물 뿐이다.

그리고 상술한 하비에르 세르카스를 비롯한 다른 이 사건에 대한 전문가,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의견은 "국왕이 쿠데타를 원했으면 진짜로 이루어지고도 남았다"는 것이다. "국왕의 의중은 그냥 악세사리에 불과하고 프랑코 독재 체제 부활을 추구했는데 이 와중에서 국왕이 반대한다면 국왕도 쳐버릴 파시스트들이 그런 자작극에 넘어가고도 지금까지 아무런 폭로도 없었을 리가 있냐"며 가치 없는 루머로 취급한다.


[1] 영어로는 February 23rd이며, 한국식 표현을 빌리면 "2.23 군사반란" 정도 된다.[2] 영어 pronouncement과 동계어다. 원래 프로눈시아미엔토는 스페인어로 단순히 선언이나 선고 등을 의미했으나 정치적 용어로 바뀌게 되었다.[3] 보통 프로눈시아미엔토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 1. 어느 유력한 군 장교가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다. 2. 이후 잠깐동안 반응을 살핀다. 3-1. 군부나 정치권, 국민여론 등 사회유력집단의 반응이 호의적이라면 굳이 들고 일어날 것도 없이 알아서 혹은 국왕의 승인과 같은 절차를 통해 권력을 얻는다. 3-2. 반응이 좋지 않으면 해외망명을 하거나 형사재판을 받고 불명예 제대한다. 즉, 프로눈시아미엔토는 일반적인 쿠데타에 비해 정치적 여론전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4] 프랑코는 쿠데타와 내전 초기에는 공화국과 좌파에 반대한다는 것만 빼고는 딱히 구심점이 없었던 국가군 진영의 유력 지도자 중 하나일 뿐이었다.[5] 실제로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에게 후계자 교육을 시키면서도 정작 정치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조언을 하지 않았다. 이에 후안 카를로스가 정치에 대해서도 가르쳐달라고 말하자 프랑코는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방식은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6] 스페인, 포르투갈, 중남미 국가의 민주화 인사들은 소련 등 공산권에 망명하는 일이 잦았다.[7] La pasionaria. '열정의 꽃'이란 뜻이다.[8] 20세기 말을 넘어 21세기 초반까지 바스크 지역은 무장 독립 투쟁을 이어나갔다.[9] 발렌시아 주 발렌시아 시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소도시. 산성이 유명하다.[10] 중간에 총소리가 들리니 주의.[11] 반란모의는 여러 국가에서 중범죄로 규정하며 사형 및 그에 준하는 높은 형량을 선고하지만 테헤로는 11개월만 살고 풀려나 중령으로 복귀했는데 재판 당시(1980년) 스페인 군부와 사법부에는 테헤로에 공감하는 골수 프랑코주의자(Franquista, 프랑키스타)들이 많아 민주정의 기반이 취약하여 테헤로와 같은 자들에게 중형을 때릴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12] 정확히는 과반 찬성을 가결 조건으로 했던 2월 21일 1차 투표가 과반 미달로 부결된 후 2차 투표가 예정된 날이었다.[13] 한 명은 심지어 의원들이 착석해 있는 자리를 향해 기관단총을 갈기기까지 했다. 다행히 조준 사격은 아니었다.[14] 1년 후인 1982년 총선에 승리하여 수상으로 취임해 1996년까지 집권했다.[15] 본인은 부정했지만 당시 역사적 기록과 교차 증언을 참고하면 카리요가 지휘했던 사건이란 게 거의 확실하다. 학자들에 따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천 단위 이상의 규모라고 한다.[16] 같은 시기 태어난 한국의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갑이다.[17] 해당 설문조사에서 1위는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이고 2위에서 4위까지 각각 미겔 데 세르반테스, 따지고 보면 스페인 사람도 아닌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소피아 왕비가 차지했다. 1위에서 5위 중에 세르반테스와 콜럼버스를 뺀 3명이 결국 프랑코 정권 말기와 민주화 과정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에서 현대 스페인 사회의 역사 인식에서 내전, 프랑코 독재, 민주화의 경험이 가진 비중을 가늠할 수 있다.[18] 수아레스 수상과 마누엘 프라가는 모두 스페인의 정치 지형에서 우파로 평가되는 인물이지만 둘은 이념이 다르다. 마누엘 프라가가 창당한 인민동맹은 오늘날 스페인 우파 주요 정당인 인민당(스페인 전 수상인 마리아노 라호이의 정당)의 전신인데, 인민동맹 자체부터 사상적으로 프랑코주의자들 중에서 테헤로보단 덜 과격한 통합 팔랑헤 內 온건파 인사들이 제대로 된 내부 합의도 없이 어물슬쩍 현대적 보수주의 우익 정당으로 탈바꿈한 정당이다 보니 그 후신인 인민당에는 아직도 골수 프랑코주의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며 이로 인해 초당파적 포용력은 아돌포 수아레스 수상과 옛 중도민주연합에 비해 훨씬 부족하다는 평이 중론이다. 그런 점에서 수아레스는 마리아노 라호이 전 수상보다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초당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배포가 큰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19] 스페인군의 계급은 일반적인 서방권이나 소련 같은 나라하고는 달리 사실상 중장이 최선임이었다. 왕정까지는 중장이 사복군인 최선임이었고 스페인 내전 때는 그냥 장군의 계급이 소장, 준장(국민진영, 참고로 프랑코가 소장이었다.)/그냥 장군(공화진영)인 적도 있었다가 내전이 끝나고 중장 계급이 신설되었다. 물론 중장 위에 capitan general로 원수계급도 있긴 한데 이건 그냥 국왕 전용이었다. 국왕이 아닌 사람이 원수가 된 사례는 세 케이스인데 하나는 죽어서 명예직으로 추서되는 거고 둘째는 왕을 대신해서 1차 카를로스 전쟁 당시의 자유주의 진영의 에스파르테로 섭정같은 실세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다. 참고로 마누엘 구티에레스 메야도는 이후 서거 당시 국왕을 빼면 마지막으로 스페인 육군 원수에 추서되었다.[20] 팔랑헤는 1934년 세워졌고 이 사람은 1935년에 가입했다. 1936년에 스페인 내전이 터지기 전까지 팔랑헤의 규모는 미미했다.[21] 물론 메야도 본인이 산전수전 다 겪은 군부의 실세였던데다 1912년 4월생으로 당시 만 69세가 되기 직전의 고령이었던 터라 애초부터 쿠데타 군인들의 총질을 전혀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22] 당시 브루네테 사단장이던 호세 후스테 페르난데스(José Juste Fernández) 장군은 과거 주 이탈리아 스페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나간 적이 있었는데, 이때 1967년 그리스 쿠데타와 그 이후의 역쿠데타 시도로 콘스탄티노스 2세가 축출당해 소피아 왕비(67년 당시는 잠재적 계승자(후안 카를로스)의 부인 신분)가 콘스탄티노스 2세의 첫 망명지였던 로마로 와서 남동생을 만날 때 수행한 적이 있었다. 이때 소피아 왕비는 페르난데스 장군에게 스페인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그런데 아르마다는 스페인 장군들에게 국왕도 국왕이지만 특히 왕비가 자신의 편에 있으며 자신의 손을 붙잡고 군부가 희망이라면서 궐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소설을 지어서 유포하고 다녔다. 남동생이 쿠데타로 쫓겨난 것을 본 소피아 왕비가 군인들의 지지를 확보하는데 더 적극적일 것이라는 뇌피셜에서 나온 거짓말로 보이지만 문제는 후스테 페르난데스 장군은 소피아 왕비가 보인 군사 쿠데타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을 직접 본 적이 있었던지라 아르마다의 주장에 대해서 몹시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국왕이 스쿼시 게임 하러 가셨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속았다!"고 부르짖었다고 전해진다.[23] 참고로 후안 카를로스 1세를 사관학교로 보내 군사 교육을 받게 한 인물이 바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역설적이게도 프랑코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군 내 인맥을 탄탄하게 만들어 준 게 나중에 쿠데타를 막아내고 프랑코 이후에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로 변화하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24] 스페인 작가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로페스는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쿠데타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벌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교정으로 달려갔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없었다고 회고했다.[25] 이때 이미 가베이라스 장군의 헌병대에 체포당했던 아르마다는 쿠데타군의 무장해제 및 상황 종료를 알리는 문서를 순찰차 본네트 위에서 서명했고 서명 직후 그 차에 태워져 다시 연행되었다.[26] 여담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도 생전에 수준급의 그림 실력을 뽐냈다.[27] 공산당, 공화주의자 - 카리요, 독재 정권의 테크노크라트 - 수아레스, 열정적인 프랑코주의자인 퇴역 중장 구티에레스 메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