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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시즘은 수수께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절묘한 힘의 균형을 본다. 파시즘은 권위주의를 주장하는 한편 반역을 조직한다.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맞서 싸우면서도, 과거 지배 체계의 복권을 옹호하지 않는다. 강국의 주조자(鑄造者)를 자처하는 듯하나, 그 수단이 도리어 국가 와해를 촉진하므로, 파괴적 당파나 비밀 결사에 견줄 만하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건, 파시즘은 어떤 것이면서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것이며,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파시즘에 관하여 Sobre el Fascismo」(1927)
파시즘의 광풍이 세계를 휩쓴지 7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고 파시즘에 관한 연구는 스페인 내전 이전부터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직까지도 학계에서는 파시즘의 정체에 대해서 완전히 합의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나치즘조차 파시즘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파시즘은 오로지 이탈리아 파시즘과 이를 이념으로 한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을 말할 뿐이며 파시즘을 세계적인 정치현상으로 보는 것은 오류라는 주장이다. 최근에는 파시즘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로, 합의파 학자들의 이론이 기준점으로 사용되고 있다.—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파시즘에 관하여 Sobre el Fascismo」(1927)
파시즘적 세계관이란 무엇인가? 개인에 대한 전체의 우위를 주장하고, 유기체인 전체에 대한 개인의 종속을 당연시한다는 점이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그런데 이는 전체주의 일반의 특징이기도 하다. 파시즘은 대중의 지지 기반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전제주의와 구분되고, 자유주의,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전체주의와도 구분된다. 독재자의 신성한 권력이나 계급적 우위를 부정한 상태에서 전체를 절대시하기 위해 필요한 존재가 ‘민족’이다. 또한 민족의 절대성은 유구한 역사로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흠없고 순결하며 영원한 민족사는 ‘이기적인’ 개인들의 죄를 씻어주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개인들로 하여금 현실 권력에 순응케 하기 위하여 민족의 전통과 역사가 소환되는 것이다.
...
파시즘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파시즘 자체가 일관된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무엇무엇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1945년 이후 부정적 인식이 워낙 강해서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로저 그리핀 등의 학자는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시즘들 사이에 공통된 특징들 속에서 ‘일반적 파시즘’을 구성할 수 있다며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핀은 파시즘을 ‘민족 부활이라는 형태를 띤 일종의 포퓰리즘적 극민족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즉, ‘포퓰리즘적 민족주의’가 핵심이다. 사실 포퓰리즘의 주장은 민주주의 이념과 중복되는 면이 많다. 차이는 대표제 민주주의(간접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생긴다. ‘당파적인 대립이나 부분 이익을 초월한 하나의 국민’을 가정한 후, 스스로 기성정치가와는 달리 국민의 전체 이익을 대표하는 존재로 자처하며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파시즘은 근대적 대중 정치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성격을 지녔다.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원천을 뽑아내는 파시즘의 정치공학이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사실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아야 이해된다. 자유주의는 ‘욕망이 인간 행동의 동기라는 인간관’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근대과학과 개인주의 철학의 영향 속에서 성립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토크빌은 ‘다수는 법률을 만드는 권리뿐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법률을 깨뜨릴 권리까지 갖는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토크빌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새로운 독재 정치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의 애국심은 보편 종교로서 신성시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폭민’(the mob)의 지배를 의미하였다. 1952년 열린 학술대회에서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를 아울러 ‘전체주의’로 규정하였을 때, 이 이념들의 공통점으로 ‘대중적 열광’이 지적되었다. 전체주의 이론은 민주주의를 ‘선의 대명사’로 만들었으나, 자유주의적 우려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권위주의이므로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정부도 전체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군중이 그저 수동적으로 기만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압을 욕망한다’는 진단으로부터 ‘미시파시즘론’이 정립되었다.
파시즘이 내세운 ‘민족’의 의미와 관련하여 또다른 파시즘 전문가 로버트 팩스턴의 견해를 보자. 애국적 국민, 민족적 기원과 계보, 강한 국가를 중시한 것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우파 정치 이념에 공통적이다. 파시즘의 차별성은, 시민들 간의 계약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구현하는 존재로서 국가를 자리매김하여 사적 영역을 모조리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며 개인을 공동체에 종속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 때 파시즘의 지도자들이 대중의 민족적 열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경멸과 좌파에 대한 반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팩스턴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위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파시즘도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1945년 이전의 일본 제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상당 수준의 대중 동원이 가미된 군부 독재’이고, 대중 동원이 가능한 민주주의가 성립되지 못했던 제3세계의 권위주의 통치 체제도 ‘개발 독재’에 불과하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본 제국이나 제3세계 개발 독재의 대중 동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팩스턴이 잘 몰라서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제3세계에서도 ‘의회에서의 영향력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잘 결합하여 성공적인’ 파시즘이 존재했을 수 있다.
그리핀과 팩스턴의 견해에서 고려해볼 문제는 파시즘의 근대적 성격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야만적 행위나 근대로부터의 일탈로만 보는 것은 파시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근대가 무엇인지, 진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기준으로 파시즘의 근대성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역사인식’과 관련해 보면 파시즘이 민족적 동질성 추구를 위해 전통적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독일의 나치즘이 그러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속도와 힘과 기계를 강조하는 근대화에 대한 물신숭배의 형태로 나타난 반면에 독일의 나치즘은 흙과 피를 강조하는 담론이나 중세적인 반유대주의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사는 사회가 전통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파시즘의 민족 담론은 사회주의의 계급투쟁론도 전유한다. 무솔리니는 프롤레타리아를 피억압집단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부르주아 지배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목표로 삼는 대신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 민족이 부르주아 민족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계급이 민족 속에 용해되면서 혁명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에서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독일 나치즘은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 모두 민족주의가 지닌 이방인 혐오증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이다. 즉, 파시즘은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담당했던 역할을 모두 초월한 존재로 민족을 상정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당대인들 역시 파시즘이 전체민족의 이름을 내세운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사회민주당 정부,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국가를 강조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파시즘과 민족주의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 자체가 배타적·침략적 성질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할 때는 막연하게 ‘국가주의와 다른 민족주의’, ‘좋은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 등으로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그가 파시스트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제 시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일본 군국주의의 파시즘적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일본적 파시즘을 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루야마 마사오의 입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마루야마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군국주의가 대중의 격정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무산정당 운동도 존재했다. 그러나 대중 조직이 약한 상태에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었고 유사(疑似) 민주적 형태였다는 입장을 보인다. 서양의 파시즘과 비교하여 가족주의적, 농본주의적 성향을 띠었다는 점도 다르고, 우익 지도자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나 지방 인텔리 계층의 수준이 저열하여 근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고 광신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나치스와 달리 민주주의가 정면으로 부정되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마루야마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급격한 포퓰리즘이 ‘개인’의 존재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반면 근래 일본 내에서는 이 시기 일본을 총력전체제로 재평가하는 인식들이 등장하였다. 제1차대전 이후 독일, 일본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도 국가주의를 지향했고, 1930년대 황도파의 정신주의와 통제파의 계획주의가 나름대로 총력전·총동원체제를 추구했다면서 굳이 따지자면 당시 일본은 파시즘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파시즘 체제의 전체주의와 미국 뉴딜정책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간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파시즘화에 실패했다’는 것도 어떠한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불분명하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파시즘체제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요소들을 추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파시즘이 지닌 특성에 대하여 당대 한국 지식인들이 어떠한 입장을 보였는지 재배열하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파시즘이 특정 시기, 특정 체제에 한정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근대의 양대 산물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와 경합·대립하였고, 민족주의의 형태로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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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 무엇인지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다. 파시즘 자체가 일관된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무엇무엇에 대한 안티테제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 1945년 이후 부정적 인식이 워낙 강해서 ‘진지한’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로저 그리핀 등의 학자는 파시즘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파시즘들 사이에 공통된 특징들 속에서 ‘일반적 파시즘’을 구성할 수 있다며 ‘새로운 합의’를 이끌어냈다. 그리핀은 파시즘을 ‘민족 부활이라는 형태를 띤 일종의 포퓰리즘적 극민족주의 정치 이데올로기’라고 정의한다. 즉, ‘포퓰리즘적 민족주의’가 핵심이다. 사실 포퓰리즘의 주장은 민주주의 이념과 중복되는 면이 많다. 차이는 대표제 민주주의(간접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본다는 점에서 생긴다. ‘당파적인 대립이나 부분 이익을 초월한 하나의 국민’을 가정한 후, 스스로 기성정치가와는 달리 국민의 전체 이익을 대표하는 존재로 자처하며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처럼 파시즘은 근대적 대중 정치의 한 형태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성격을 지녔다.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원천을 뽑아내는 파시즘의 정치공학이 두려움을 갖게 한다는 사실은 자유주의자의 입장에서 보아야 이해된다. 자유주의는 ‘욕망이 인간 행동의 동기라는 인간관’으로부터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는 근대과학과 개인주의 철학의 영향 속에서 성립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미 토크빌은 ‘다수는 법률을 만드는 권리뿐 아니라 자신들이 만든 법률을 깨뜨릴 권리까지 갖는다’는 사실을 통찰했다. 토크빌이 보기에 민주주의는 새로운 독재 정치의 씨앗을 가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대중의 애국심은 보편 종교로서 신성시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폭민’(the mob)의 지배를 의미하였다. 1952년 열린 학술대회에서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를 아울러 ‘전체주의’로 규정하였을 때, 이 이념들의 공통점으로 ‘대중적 열광’이 지적되었다. 전체주의 이론은 민주주의를 ‘선의 대명사’로 만들었으나, 자유주의적 우려가 해소된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의 반대는 전체주의이고 민주주의의 반대는 권위주의이므로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정부도 전체주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군중이 그저 수동적으로 기만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억압을 욕망한다’는 진단으로부터 ‘미시파시즘론’이 정립되었다.
파시즘이 내세운 ‘민족’의 의미와 관련하여 또다른 파시즘 전문가 로버트 팩스턴의 견해를 보자. 애국적 국민, 민족적 기원과 계보, 강한 국가를 중시한 것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우파 정치 이념에 공통적이다. 파시즘의 차별성은, 시민들 간의 계약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구현하는 존재로서 국가를 자리매김하여 사적 영역을 모조리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며 개인을 공동체에 종속시켰다는 데에 있다. 이 때 파시즘의 지도자들이 대중의 민족적 열정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이용하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에 대한 경멸과 좌파에 대한 반감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팩스턴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적 위기가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는 파시즘도 성립할 수 없다고 본다. 1945년 이전의 일본 제국은 ‘국가가 지원하는 상당 수준의 대중 동원이 가미된 군부 독재’이고, 대중 동원이 가능한 민주주의가 성립되지 못했던 제3세계의 권위주의 통치 체제도 ‘개발 독재’에 불과하다고 결론짓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일본 제국이나 제3세계 개발 독재의 대중 동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팩스턴이 잘 몰라서 오해한 것일 수 있다. 제3세계에서도 ‘의회에서의 영향력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잘 결합하여 성공적인’ 파시즘이 존재했을 수 있다.
그리핀과 팩스턴의 견해에서 고려해볼 문제는 파시즘의 근대적 성격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야만적 행위나 근대로부터의 일탈로만 보는 것은 파시즘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근대가 무엇인지, 진보란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를 기준으로 파시즘의 근대성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것이다. 이 글에서 주목하는 ‘역사인식’과 관련해 보면 파시즘이 민족적 동질성 추구를 위해 전통적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이 눈에 띈다. 특히 독일의 나치즘이 그러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속도와 힘과 기계를 강조하는 근대화에 대한 물신숭배의 형태로 나타난 반면에 독일의 나치즘은 흙과 피를 강조하는 담론이나 중세적인 반유대주의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것을 강조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사는 사회가 전통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파시즘의 민족 담론은 사회주의의 계급투쟁론도 전유한다. 무솔리니는 프롤레타리아를 피억압집단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부르주아 지배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목표로 삼는 대신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 민족이 부르주아 민족에서 벗어나는 해방을 목표로 삼았다. 계급이 민족 속에 용해되면서 혁명의 주체가 프롤레타리아에서 민족으로 바뀐 것이다. 독일 나치즘은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주창했다는 점에서 이탈리아 파시즘과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양자 모두 민족주의가 지닌 이방인 혐오증을 이용한 점은 공통적이다. 즉, 파시즘은 근대화 과정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가 담당했던 역할을 모두 초월한 존재로 민족을 상정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당대인들 역시 파시즘이 전체민족의 이름을 내세운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서, 사회민주당 정부,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국가를 강조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파시즘과 민족주의는 잘 구분되지 않는다. 19세기 유럽의 민족주의 자체가 배타적·침략적 성질을 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역사상의 인물을 민족주의자로 규정할 때는 막연하게 ‘국가주의와 다른 민족주의’, ‘좋은 민족주의’, ‘열린 민족주의’ 등으로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그가 파시스트가 아님을 구체적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제 시기 조선 지식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일본 군국주의의 파시즘적 성격은 어떠하였을까? 일본적 파시즘을 논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루야마 마사오의 입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마루야마도 일본의 내셔널리즘과 군국주의가 대중의 격정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인정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비판하는 무산정당 운동도 존재했다. 그러나 대중 조직이 약한 상태에서 ‘위로부터의 파시즘’이었고 유사(疑似) 민주적 형태였다는 입장을 보인다. 서양의 파시즘과 비교하여 가족주의적, 농본주의적 성향을 띠었다는 점도 다르고, 우익 지도자인 도야마 미쓰루(頭山満)나 지방 인텔리 계층의 수준이 저열하여 근대적 합리성이 결여되어 있고 광신적이었다고 평가한다. 나치스와 달리 민주주의가 정면으로 부정되었다는 점도 지적하였다. 마루야마는 기본적으로 개인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자이기 때문에 급격한 포퓰리즘이 ‘개인’의 존재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고 본 것이다.
반면 근래 일본 내에서는 이 시기 일본을 총력전체제로 재평가하는 인식들이 등장하였다. 제1차대전 이후 독일, 일본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도 국가주의를 지향했고, 1930년대 황도파의 정신주의와 통제파의 계획주의가 나름대로 총력전·총동원체제를 추구했다면서 굳이 따지자면 당시 일본은 파시즘화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파시즘 체제의 전체주의와 미국 뉴딜정책의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간의 질적 차이를 무시한다는 비판을 받을 소지가 있다. ‘파시즘화에 실패했다’는 것도 어떠한 의미에서 나온 말인지 불분명하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파시즘체제가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요소들을 추출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따라서 파시즘이 지닌 특성에 대하여 당대 한국 지식인들이 어떠한 입장을 보였는지 재배열하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이다. 파시즘이 특정 시기, 특정 체제에 한정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근대의 양대 산물인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와 경합·대립하였고, 민족주의의 형태로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쳐 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사실 파시즘이 다른 정치 운동들에 비해 유달리 더 복잡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파시즘은 유달리 더 정의 문제에 얽매여 있다. ‘사회주의’나 ‘자유주의’의 경우, 우리는 이것들이 다양한 정황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다른 이데올로기와 겹치는 부분들도 있고, 그리고 활동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인 견해차가 존재함을 쉽게 받아들인다. 우리는 또한, 누가 ‘진정한 사회주의자’ 혹은 ‘진정한 자유주의자’인지에 대한 논쟁이 정치적 동기와 연결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누가 당의 ‘진정한 가치’를 대변하고 누가 그 가치를 ‘배신’했는가를 두고 당이 분열되는 모습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했던가? 결국, 요점은 이렇다. 어떤 정치적 명칭의 궁극적인 의미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지만, 그 명칭이 특정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고 활동가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솔리니가 파시즘을 이야기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고, 그의 견해가 어떻게, 왜 바뀌었으며, 다른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의 견해와는 어떻게 달랐는지를 따져볼 수 있다.
파시즘을 다른 개념과 구분 짓는 유일한 점은, 엄청나게 부정적인 도덕적 함의다. 물론 다른 정치적 명칭도 모욕적으로 쓰이는 일이 있다.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자(liberal)’가 [진보주의자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며, 보수파에 의해] 경멸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칭이든,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파시즘의 경우는 다르다. 그 심각한 부정적 함의로 인해, 파시스트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는 거의 없는 반면, 적에게 파시스트라는 효과적인 낙인을 찍고 싶은 유혹은 강하다. 정치인과 언론인은 정의를 무기처럼 사용하며, 파시즘은 아주 훌륭한 무기다. 어떤 정의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효과적인 비방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학자들의 개입을 요청한다.
-Kevin Passmore. 「파시즘」(이지원 역)
오늘 날에서의 '파시즘'은 사실상의 욕설로 쓰이며[1] 진짜 파시스트라서 쓰이는 말은 대부분은 아니다.파시즘을 다른 개념과 구분 짓는 유일한 점은, 엄청나게 부정적인 도덕적 함의다. 물론 다른 정치적 명칭도 모욕적으로 쓰이는 일이 있다.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자(liberal)’가 [진보주의자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며, 보수파에 의해] 경멸조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칭이든, 그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파시즘의 경우는 다르다. 그 심각한 부정적 함의로 인해, 파시스트로 불리기를 원하는 이는 거의 없는 반면, 적에게 파시스트라는 효과적인 낙인을 찍고 싶은 유혹은 강하다. 정치인과 언론인은 정의를 무기처럼 사용하며, 파시즘은 아주 훌륭한 무기다. 어떤 정의가 ‘객관적’이거나 ‘과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것은 더욱 효과적인 비방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그들은 종종 학자들의 개입을 요청한다.
-Kevin Passmore. 「파시즘」(이지원 역)
따라서 파시즘이 무엇이냐고 단정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포퓰리즘 운동이라는 최소한의 공통점 이외에, 워낙 다양한 정의가 존재하고 용어가 가지는 윤리적 거부감으로 인해 정치적인 이유에서 특정한 정치적 대적자를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일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2]
2. 민족주의 이론
자세한 내용은 내셔널리즘 문서 참고하십시오.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맺은 베르사유 조약의 부당한 조치와, 프랑스군의 점령지역에서 일어난 억압과, 영미권에 의하여 강제된 정치체제에 분노하여 게르만 민족주의(German ethnonationalism)가 크게 고조되었다.
나치의 경우 고대 아리안 종교에 대한 관심과 함께 "게르만 족의 생활 공간 (레벤스라움)," "고유 영토" 등의 개념에 대한 광적인 집착을 보여주며, 나치당은 비스마르크, 프리드리히 대왕, 더 나아가서는 바르바로사 대왕 등을 민족 영웅으로 내세우며 선전에 나섰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은 로마 제국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었고 일천년 동안 유지될 자신의 제국이 로마와 같이 많은 유산들을 남길 것이라는 몽상을 품고 있었다. 일본 제국의 경우 물질주의적 서구에 대항해 이른바 "야마토 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정신주의로 무장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고, 좀 정도가 심했던 황도파의 경우 이른바 쇼와 유신이라는 미명 하에서 천황이 친정을 하는 절대군주제를 주장하기에 이르른다.
이탈리아는 1차 세계대전에서 협상국으로 참전하면 영토와 이권으로 보상하겠다는 런던 밀약에 속아서 독일을 배신때리고, 연합국에 붙어서 전쟁에서 수백만의 사상자와 수십만의 전사자를 희생하며 승전국이 되었지만, 협상국은 약속했던 이권을 축소하거나 주지 않으면서 이탈리아에게 뒤통수를 날렸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에서 민족주의적 분노가 크게 고조되었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 제국의 부활, 지중해의 이탈리아 내해화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다. 각 파시즘의 분파의 공통점은 "외압"으로 부터의 자유에 대한 주창이다. 흔히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권, 나치당의 초기 선전 포스터의 표어 인 "Arbeit, Freiheit und Brot"(일자리, 자유[3] 그리고 빵)으로 알수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외압으로의 자유를 위해 내세운 대안(전쟁)이 역으로 다른 민족을 탄압하는것이었다는 점이다.
파시즘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기회주의적으로 변해왔으며, 여러가지 이념들을 혼합하여 취사선택하는 짬뽕 잡탕의 성격을 가졌지만, 내셔널리즘만큼은 언제나 항상 일관적으로 파시즘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특히 많은 파시즘은 원초주의적인 에스닉 내셔널리즘, 즉 극단적 내셔널리즘 기반했다. 파시즘의 일관되지 않고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인하여 파시즘에 대한 이론 역시 학자마다 다양하지만, 극단적 민족주의는 모든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부분이다. 이로 인하여 일반적 파시즘론에서는 파시즘의 최소치로 내셔널리즘을 포함시킨다.
3. 전체주의 이론
자세한 내용은 전체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유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위해 국가를 부정한다. 파시즘은 국가가 개인의 진정한 실체라는 것을 확인한다. 파시즘은 국가와 개인의 자유가 진지하게 숙고될 수 있는 국가 내에서 유일한 자유를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파시스트에게 모든 것은 국가 안에 있고 국가 밖에서는 아무것도 법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존재할 수 없거나 가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전체주의적이다."[4]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독트린.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독트린.
일찍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조지 오웰이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공통점에 주목했었고, 한나 아렌트가 1951년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하여,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을 본질적으로 동일한 전체주의적 이념이라고 규정하였다. 꽤나 전통적인 파시즘 이론이다. 1970년대에 냉전의 데탕트 시기에 쇠퇴하였다가 1990년대 소련 붕괴로 공산권의 내부자료들과 실상이 알려지고, 당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이 유행하면서 다시 부상하였다. 렌조 데 펠리체-에밀리오 젠틸레 계열의 학자들은 파시즘을 일종의 전체주의 혁명이라고 해석한다. 냉전의 영향을 받았으며, 주로 자유주의 리버럴 성향의 학자들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싸잡아서 '그놈이 그놈이다' 라고 비판하는 식으로 사용된다.
전체주의 이론의 문제점으로 파시즘이 사악한 독재자가 민중을 탄압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위로부터의 독재'를 강조하여 대중들의 수동성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로 인하여, 대중들이 파시즘의 민족주의 프로파간다에 열광하면서 자발적으로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한계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전체주의 이론에서는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철저한 상명하복의 통제가 이뤄진다고 보는데, 실제로는 파시스트 정권 내부에서도 워낙 다양한 출신과 배경의 사람들이 한데 모였기에 다양한 목소리가 있었고, 설령 같은 목표를 추구해도 제각기 다른 이유에 근거하였으며,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다. 무솔리니와 함께한 파시스트인 디노 그란디는 파시즘에 다양한 경향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낡은 살란드라 식의 자유무역론자,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자, 군주론자, 무정부주의자, 공화주의자, 절대적 개인주의자, 상대적 개인주의자,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감성과 태도 면에서 늘 모든 정당의 유산 가운데 가장 좋은 것만을 제 것으로 취하려고 하는 동요하는 자들과 불완전한 자들이 있다.
디노 그란디
디노 그란디
전체주의론도 시기에 따라서 달라져 왔다. 냉전 초기 전체주의 이론과 후기 전체주의 이론은 차이점을 가진다.
퓌레의 파시즘 해석은 전체주의론의 비판적 계승에 기반한다.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외적 유사성에 주목하는 프리드리히Carl Friedrich류의 전체주의론이 냉전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전체주의론의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 있는 퓌레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전체주의론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먼저 퓌레는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전체주의론이 냉전기의 산물이 아니며, 이미 1920년대, 특히 무솔리니의 로마로의 행진 직후부터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학자와 정치가 사이에서 볼셰비즘과 이탈리아 파시즘이 유사한 현상으로 파악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다음으로 퓌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의 차이점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이 둘이 같은 토양에서 발생한 혁명적 운동이라는 점, 반민주주의라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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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타도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두 혁명 세력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공모'야말로 퓌레의 '역사적-발생론적' 전체주의론의 핵심을 이룬다. 좌·우 혁명 세력, 즉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내적 논리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서로가 서로를 잇고 발생시키며 모방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이전에 이들 두 운동은 전쟁이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생겨났다. 둘은 동일한 역사의 자식들인 것이다." 그러나 퓌레는 문제의 발단을 혁명적 좌파 쪽에 둔다. 시기적으로 볼셰비즘의 승리가 파시즘의 출현보다 앞섰다는 점에서도 혁명적 좌파의 책임이 일차적이다. 따라서 볼셰비즘에 반대한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대응적 현상으로서 "보편적인 것에 대한 특수한 것, 계급에 맞선 민족, 국제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저항으로서 출현했다. 파시즘은 그 기원상 공산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공산주의의 수법을 모방하면서 공산주의를 공격한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역사적-발생론적 전체주의론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당위성은 비단 이것만은 아니다. 파시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출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 역시 파시즘이라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그 생명력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퓌레의 분석에 의하면 이 둘은 최소한 1945년에 이르기까지 둘 사이의 변증법 또는 은밀한 '공모'를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면서 제각기 새로운 대안, 희망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파시즘은 몰락한 반면 공산주의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반파시즘의 맹주라는 신화에 힘입은 바 크다. 퓌레에 따르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공산주의의 자기 규정은 단순한 전략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므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적, 즉 민주주의의 타도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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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의 이러한 해석에 놀테는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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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의 《환상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극찬한 역사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연구의 권위자 데 펠리체다. 그에게 이 책은 "지난 10년간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이 금세기 최고의 저서 가운데 하나" 였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이 책의 장점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퓌레의 파시즘, 반파시즘 해석, 나아가 퓌레의 역사관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퓌레나 놀테에 비해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데 펠리체는 1965년부터 1996년 사망 직전까지 약 6,000페이지에 달하는 일곱 권짜리 기념비적인 무솔리니 전기를 출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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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좌파의 헤게모니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논리는 퓌레의 수정주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헝가리 사태를 전후하여 공산당을 이탈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데 펠리체는 1952년 미국의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데모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이 국회로 번질 정도로 적극적인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탈당 이후 두 사람은, 예컨대 홉스봄을 비롯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또한 두 사람의 학문적 출발점 역시 유사하다. 퓌레가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와 파시즘 문제로 나아갔다면 데 펠리체는 프랑스 혁명에 동조한 이탈리아의 자코뱅파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퓌레와 마찬가지로 데 펠리체가 이탈리아 파시즘을 혁명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프랑스 혁명, 특히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찾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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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 데 펠리체, 놀테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탁월한 역사가들이다. 정교한 논리와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들이 이룩한 방대한 업적은 기존의 해석에 대한 과감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이들의 명성에 걸맞은 걸출한 역사학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최소한 프랑스 혁명과 파시즘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이들 세 사람의 저작은 중대한 지적 도전이자 반드시 건너야 할 거대한 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세 역사가에 의해 촉발된 역사학적 논쟁이 역사학계의 테두리를 넘어서 곧잘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연구 분야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현대사의 쟁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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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데 펠리체와 퓌레는 반파시즘의 허구성을 연결 고리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좌파의 지적·문화적·도덕적·정치적 기반을 잠식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의 지적처럼 스탈린주의의 오류와 폭력성이 옹호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 점에서 이들의 연구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김용우, 수정주의 역사학의 세 얼굴, 역사비평 1998년 가을호(통권 4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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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타도라는 동일한 목표 아래 두 혁명 세력 사이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공모'야말로 퓌레의 '역사적-발생론적' 전체주의론의 핵심을 이룬다. 좌·우 혁명 세력, 즉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내적 논리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기원을 지니고 있다. "볼셰비즘과 파시즘은 서로가 서로를 잇고 발생시키며 모방하고 투쟁한다. 그러나 이전에 이들 두 운동은 전쟁이라는 동일한 토양에서 생겨났다. 둘은 동일한 역사의 자식들인 것이다." 그러나 퓌레는 문제의 발단을 혁명적 좌파 쪽에 둔다. 시기적으로 볼셰비즘의 승리가 파시즘의 출현보다 앞섰다는 점에서도 혁명적 좌파의 책임이 일차적이다. 따라서 볼셰비즘에 반대한 파시즘은 기본적으로 대응적 현상으로서 "보편적인 것에 대한 특수한 것, 계급에 맞선 민족, 국제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의 저항으로서 출현했다. 파시즘은 그 기원상 공산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공산주의의 수법을 모방하면서 공산주의를 공격한다."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역사적-발생론적 전체주의론의 관점에서 다루어야 할 당위성은 비단 이것만은 아니다. 파시즘이 공산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출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주의 역시 파시즘이라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그 생명력을 연장시킬 수 있었다. 퓌레의 분석에 의하면 이 둘은 최소한 1945년에 이르기까지 둘 사이의 변증법 또는 은밀한 '공모'를 바탕으로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면서 제각기 새로운 대안, 희망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파시즘은 몰락한 반면 공산주의가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적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반파시즘의 맹주라는 신화에 힘입은 바 크다. 퓌레에 따르면 반파시즘과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공산주의의 자기 규정은 단순한 전략의 차원에서 나온 것이므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적, 즉 민주주의의 타도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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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의 이러한 해석에 놀테는 찬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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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의 《환상의 과거》를 누구보다도 극찬한 역사가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연구의 권위자 데 펠리체다. 그에게 이 책은 "지난 10년간 나온 역사서 가운데 가장 중요하며 의미심장한 것으로서 의심할 여지 없이 금세기 최고의 저서 가운데 하나" 였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이 책의 장점 때문이겠지만 동시에 퓌레의 파시즘, 반파시즘 해석, 나아가 퓌레의 역사관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퓌레나 놀테에 비해 국내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데 펠리체는 1965년부터 1996년 사망 직전까지 약 6,000페이지에 달하는 일곱 권짜리 기념비적인 무솔리니 전기를 출간하여 세계적 명성을 얻은, 파시즘 연구의 최고 권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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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좌파의 헤게모니에 대한 공격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논리는 퓌레의 수정주의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헝가리 사태를 전후하여 공산당을 이탈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데 펠리체는 1952년 미국의 제국주의에 항거하는 데모를 조직했다가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이 국회로 번질 정도로 적극적인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탈당 이후 두 사람은, 예컨대 홉스봄을 비롯한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또한 두 사람의 학문적 출발점 역시 유사하다. 퓌레가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하여 공산주의와 파시즘 문제로 나아갔다면 데 펠리체는 프랑스 혁명에 동조한 이탈리아의 자코뱅파에 대한 연구에서 출발하여 파시즘으로 나아갔다. 퓌레와 마찬가지로 데 펠리체가 이탈리아 파시즘을 혁명적 현상으로 규정하고 그 뿌리를 프랑스 혁명, 특히 혁명기의 공포정치에서 찾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의 산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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퓌레, 데 펠리체, 놀테 모두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탁월한 역사가들이다. 정교한 논리와 치밀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들이 이룩한 방대한 업적은 기존의 해석에 대한 과감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이들의 명성에 걸맞은 걸출한 역사학적 성과임이 분명하다. 최소한 프랑스 혁명과 파시즘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에게 이들 세 사람의 저작은 중대한 지적 도전이자 반드시 건너야 할 거대한 강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들 세 역사가에 의해 촉발된 역사학적 논쟁이 역사학계의 테두리를 넘어서 곧잘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부분적으로는 이들의 연구 분야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현대사의 쟁점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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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데 펠리체와 퓌레는 반파시즘의 허구성을 연결 고리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좌파의 지적·문화적·도덕적·정치적 기반을 잠식하고자 했다. 물론 이들의 지적처럼 스탈린주의의 오류와 폭력성이 옹호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이 점에서 이들의 연구가 설득력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김용우, 수정주의 역사학의 세 얼굴, 역사비평 1998년 가을호(통권 44호) #
4. 제브 스테른헬의 정의
파시즘의 혁명적 성격에 주목하며, 근대성을 넘어선 일종의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으로 보았다. 조르주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신화 이론에 주목하였으며, 민족주의 우파와 사회주의 좌파의 결합이 파시즘이라고 보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신화 이론과 파시즘의 연관성에 대한 스테른헬의 관점은 이후 합의파 학자들에 의하여 이어진다.스테른헬이 볼 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계몽주의의 휴머니즘, 합리주의, 낙관주의의 거부를 전제로 출현한다.
그러나 스테른헬은 계몽주의의 전통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 했던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서의 민족사회주의로 정의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반대하는 제3의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20세기의 새로운 대안인 파시즘은 혁명적이다. 그것이 혁명적인 것은, 계몽 사상의 거부에 뿌리를 둔 공동체적이며 반개인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새로운 정치문화와 세계관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근대 기술과 산업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점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적 · 도덕적 · 정신적 · 정치적 틀을 개조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 파시즘의 혁명성이 있으며 또 거기서 참신함과 매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 만약 계몽주의의 전통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는 제3의 길이라면 그것은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다.
계몽주의의 근대성을 넘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 문화를 요람으로 삼아 자랐다. 스테른헬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기에 프랑스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다른 지역, 특히 이탈리아보다 20년 앞서 출현한 곳"이었으며 그 이데올로기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 플란톤적 의미에서 파시즘의 이데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한 축은 드뤼몽, 바레스, 모라스 등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한 통합적 민족주의, 또는 "종족적 민족주의"이다. 스테른헬이 혁명적 우파로 명명한 이들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로 시작된 대중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우파이고 제3공화정으로 구현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당시의 프랑스 우파는 혁명적 우파의 대두와 함께 두 개로 재편된다. 그 두 개의 우파는, 스테른헬에 의하면, 전통주의에 기반하고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적 우파와 공화정 타도를 외치는 새로운 우파 혹은 혁명적 우파였다.
그러나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우파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후자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적 산물로서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부터 태어난다.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말살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합리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스테른헬은 이러한 '반합리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 가장 정형화된 형태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이론가 소렐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보다는 신화의 힘을 중시하고 인간의 직관과 도덕, 행동주의와 영웅주의를 찬양하면서 기존 질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소렐의 사상과 혁명적 우파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결합하려는 최초의 시도 역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 1911년 악시옹 프랑세즈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소렐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프루동 서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비록 파시즘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곳은 이탈리아지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발상지는 프랑스다.
...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탄생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스테른헬이 우파적 요소보다 좌파적 요소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테른헬이 볼 때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다······파시즘의 역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또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스테른헬이 프랑스 학파의 파시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파시즘의 정의와 관련해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시즘은 우파보다는 좌파적 현상이며 보수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라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좌파적·혁명적 현상인가? 파시즘과 보수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파시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역사가들은 무엇보다도 파시즘과 보수주의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프랑스 학파의 전제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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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에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보수적 측면과 반동적 측면으로 나누고 어느 한쪽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김용우,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한국서양사학회, 2001, 서양사론 68호
그러나 스테른헬은 계몽주의의 전통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려 했던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으로서의 민족사회주의로 정의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 반대하는 제3의 길이라고 보았다. 또한 20세기의 새로운 대안인 파시즘은 혁명적이다. 그것이 혁명적인 것은, 계몽 사상의 거부에 뿌리를 둔 공동체적이며 반개인주의적이고 반합리주의적인 새로운 정치문화와 세계관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근대 기술과 산업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점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의 본질"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지적 · 도덕적 · 정신적 · 정치적 틀을 개조하여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완벽하게 통합될 수 있는 공동체를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 파시즘의 혁명성이 있으며 또 거기서 참신함과 매력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 만약 계몽주의의 전통을 넘어서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려는 제3의 길이라면 그것은 "최초의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다.
계몽주의의 근대성을 넘어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한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태어나 프랑스의 정치 문화를 요람으로 삼아 자랐다. 스테른헬의 표현을 빌리면 이 시기에 프랑스는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유럽의 다른 지역, 특히 이탈리아보다 20년 앞서 출현한 곳"이었으며 그 이데올로기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 플란톤적 의미에서 파시즘의 이데아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한 축은 드뤼몽, 바레스, 모라스 등이 명확한 형태로 표현한 통합적 민족주의, 또는 "종족적 민족주의"이다. 스테른헬이 혁명적 우파로 명명한 이들 극단적 민족주의 세력은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로 시작된 대중의 시대를 배경으로 탄생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우파이고 제3공화정으로 구현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당시의 프랑스 우파는 혁명적 우파의 대두와 함께 두 개로 재편된다. 그 두 개의 우파는, 스테른헬에 의하면, 전통주의에 기반하고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적 우파와 공화정 타도를 외치는 새로운 우파 혹은 혁명적 우파였다.
그러나 이상적 형태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는 혁명적 우파의 '종족적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슴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다. 후자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역사적 산물로서 경제결정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로부터 태어난다. 대중의 상상력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혁명적 변화의 가능성을 말살한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합리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혁명의 주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를 부인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스테른헬은 이러한 '반합리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 가장 정형화된 형태를 프랑스의 생디칼리슴 이론가 소렐의 사상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보다는 신화의 힘을 중시하고 인간의 직관과 도덕, 행동주의와 영웅주의를 찬양하면서 기존 질서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했던 소렐의 사상과 혁명적 우파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결합하려는 최초의 시도 역시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이루어졌다. 1911년 악시옹 프랑세즈 계열의 민족주의자들과 소렐주의자들이 함께 만든 '프루동 서클'은 파시스트 이데올로기를 탄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비록 파시즘이 정치적인 성공을 거둔 곳은 이탈리아지만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발상지는 프랑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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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스트 이데올로기의 탄생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스테른헬이 우파적 요소보다 좌파적 요소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스테른헬이 볼 때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차원을 이루는 것은 언제나 마르크스주의의 수정이다······파시즘의 역사는 마르크스주의를 수정하려는 끊임없는 시도 또는 새로운 사회주의를 향한 지속적인 노력의 역사로 서술될 수 있다." 따라서 비록 스테른헬이 프랑스 학파의 파시즘 해석에 정면으로 도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파시즘의 정의와 관련해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파시즘은 우파보다는 좌파적 현상이며 보수적이라기보다는 혁명적이라는 전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좌파적·혁명적 현상인가? 파시즘과 보수주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는가? 영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프랑스 파시즘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역사가들은 무엇보다도 파시즘과 보수주의를 날카롭게 구분하는 프랑스 학파의 전제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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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에는 급진주의와 보수주의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파시즘을 보수적 측면과 반동적 측면으로 나누고 어느 한쪽이 더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파시즘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반대되는 것들의 종합"이기 때문이다.
김용우, 프랑스 파시즘에 대한 논쟁, 한국서양사학회, 2001, 서양사론 68호
이러한 제브 스테른헬의 파시즘에 대한 정의는 조르주 발루아의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파시즘=민족주의+사회주의.' 마치 수학 공식처럼 제시된 파시즘의 정의는 1926년 1월 말 발루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1926년이라는 시기는 단지 이러한 정식을 공표했다는 의미를 지닐 뿐, 실제로 발루아는 페소가 창설되기 전부터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특히 1911년의 프루동 서클이 이러한 시도를 중심 과제로 삼고 있었다는 데 대해서는 이미 지적한 바 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 비해 더욱 포괄적인 방식으로 발루아가 자신의 운동을 정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프루동 서클에 이르는 시기까지 발루아가 자신의 시도를 군주제적 민족주의와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종합으로 주장한 데 비해 페소 창설 이후에는 이러한 결합 대상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라는 한층 보편적인 개념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발루아는 파시즘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종합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두 운동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발루아가 볼 때 두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반자유주의, 좀더 구체적으로는 반개인주의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기원을 가진 두 운동이다. 이 두 운동 모두 지난 세기의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근본적인 사회 조직들을 재조직하고 재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민족주의가 금융가와 상인의 국제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민족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했다면, 사회주의는 경제적·사회적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농민과 노동자를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또 사회주의가 민족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공동의 기원 때문이다.
발루아에 의하면 두 운동은 반자유주의라는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먼저 '독일 사회주의', 즉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 국제주의의 명분을 전파함으로써 노동 운동에 반애국주의적·반민족주의적 경향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적 전통을 지닌 다양한 사회주의에 국제주의를 전파했고, "민족주의가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처럼 외래의 사조인 마르크스주의가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발루아는 이를 다국적 기업하에서의 임금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은 임금 하락을 막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과 단결해야만 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경시 역시 이러한 "임금의 즉각적인 옹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루아가 볼 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자유주의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경제·사회 체제,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사회·경제적 아나키즘'은 부단히 노동자의 가족을 파괴하고 삶의 근거를 박탈함으로써 이들을 정착할 곳 없는 현대판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발루아에 의하면 노동자들에게 조국과 민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총합이며 상호 부조와 협동의 원천이다. 마치 "아픈 어머니 대신에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이모와 사촌"이듯이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조국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존 근거다. 이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이 자본을 이용하여 어떤 나라에서건 정착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곧 자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국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닐 수 없다." 자유주의는 이처럼 노동자의 존재 근거인 조국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노동자를 국제주의에 물들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발루아에 의하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모두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발했지만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먼저 민족주의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에 철저히 반대함으로써 고립적이며 퇴행적인 경향을 낳았다. 특히 민족주의는 현대 경제의 국제적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경제를 후퇴, 약화시킨다.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민족 문제를 간과했으며, 특히 노동자의 이해 관계를 옹호할 수 있는 '민족적 국가'의 수림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노동 문제의 견지에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동시에 민족 문제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순환론적인 분석에 의존하여 발루아는 19세기의 거대한 두 운동이 각각 일면적 진실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두 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며, 발루아는 둘의 결합이 곧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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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파시즘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고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삶의 견지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한다". 파시즘의 독창성 역시 바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한 데 있다. "파시즘의 위대한 독창성은······19세기에 반개인주의를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두 거대한 경향,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실현하는 데 있다." 발루아에게 파시즘은 한마디로 "사회적 민족주의"이자 "민족적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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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가 볼 때 민족혁명이 전체적 혁명인 것은 그것이 "19세기의 정치·경제·사회 철학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발루아의 주장에 의하면 민족혁명은 공화정에서 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바꾸는 정치혁명과는 다르다. 즉 민족혁명이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개혁의 총합"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의회주의적인 국가가 기반해 있던 가치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적 혁명으로서의 민족혁명은 모든 사적 이해를 민족적 이해에 종속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정신적이며 도덕적이고 지적인 가치관에 복속시킨다." 이 점에서 민족혁명의 가치관은 물질적 자산을 최고의 자산으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발루아가 보기에 민족혁명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자산", 즉 정신적 자산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발루아에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자산은 승리의 정신이며 영웅의 정신이었다. 이 점에서 역시 민족혁명은 "무능함"에 기반해 있는 부르주아 가치관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정신, 영웅의 정신은 전사의 정신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참호 속에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투쟁한 참전 용사들은 개인적 이해 관계를 초월했으며, 또한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 민족적 이해로 뭉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희생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발루아는 이러한 정신 상태를 "전사의 철학"이라 불렀으며 이를 부르주아의 철학이라 할 "금융가의 철학"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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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에게 파시즘은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생산자'로서의 원래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체제였다. 파시즘이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공산주의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경제 체제를 조직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경제 조직은,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생디카적이고 조합적인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해 모든 '생산자들', 즉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보호받을 수 있다. 또한 "생산의 질과 양을 향상시킬 수 있는 노동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두 계급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적 번영을 확보하는 길로 간주된다.
발루아에 의하면 이처럼 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변형된 형태도 아니며 공산주의도 아니다. 파시즘은 노동자들의 지배 체제도 부르주아의 지배 체제도 아닌,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사회·정치 조직의 수립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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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포괄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극복한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질서로서 파시즘은 적어도 발루아에게는, 타락하고 있는 프랑스 민족을 구원하고 새로운 문명 창조의 길을 열어줄 제3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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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렐의 사상이 사회주의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영향은 부분적이었으며 선별적이었다. 따라서 발루아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혼란을 초래하고 페소 이데올로기의 본질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스테른헬이 발루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의 산물로 제시하고 또 그 기원을 사회주의에 두자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난 것과 프랑스의 극우 세력이 스테른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것은 그와 같은 파시즘 정의가 초래한 혼란의 구체적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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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가 코티를 비롯한 대자본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단즌 사실, 그러면서도 페소가 공산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캔페인을 벌인 사실은 그와 같은 발루아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구체적인 예다. 비록 이러한 캠페인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발루아는 일부 생디칼리스트나 공산주의자들, 예컨대 페리괴 시장을 지낸 공산주의자 들라그랑주Marcel Delagrange, 또 다른 공산주의자 로리당Henri Lauridan, 바르디Jean Bardy, 롤랭Jean Gombault Raulin 그리고 소렐의 '신학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가르델Huber Lagardelle등을 페소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점에서 발루아의 파시즘을 프랑스의 보수적 우파와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파악한 수시의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발루아가 파시즘을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양측 모두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려 한 시도가 페소의 약점인 동시에 강점으로 작용했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코티가 페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철회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가 페소의 공산주의자와 노동 세력에 대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제3공화정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시점에서 짧은 시간 내에 2만 5천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록 그 비율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페소 가담자들의 사회 성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제3의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이 갖는 호소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대자본가들이 발루아의 파시즘에서 노동 계급의 저항과 이러한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공화정을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발견했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발루아의 파시즘을 풍요로운 삶과 자본가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특히 페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한 중간 계급의 경우,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계급 간의 조화와 민족적 통합을 통한 경제 발전의 전망을 제시한 페소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발루아의 파시즘은 현실에 적용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집권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혁명적 변화를 기치로 내건 파시즘이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세력과 타협하고 극렬한 인종주의에 호소했으며 점차 혁명성을 상실하고 보수화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용우, 민족혁명과 민족사회주의 : 조르쥬 발루아의 '페소'와 그 이데올로기, 한국서양사학회, 1994, 서양사론 44호
발루아는 파시즘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종합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먼저 두 운동의 공통점에 주목했다. 발루아가 볼 때 두 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반자유주의, 좀더 구체적으로는 반개인주의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같은 기원을 가진 두 운동이다. 이 두 운동 모두 지난 세기의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근본적인 사회 조직들을 재조직하고 재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가령 민족주의가 금융가와 상인의 국제주의에 의해 황폐화된 민족을 다시 회복하고 그것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 했다면, 사회주의는 경제적·사회적 개인주의가 파괴시킨 농민과 노동자를 보호하려 했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또 사회주의가 민족 문제에 관심을 표명한 것은,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공동의 기원 때문이다.
발루아에 의하면 두 운동은 반자유주의라는 같은 기원을 가졌음에도 오랫동안 적대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까닭은 먼저 '독일 사회주의', 즉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들 사이에 국제주의의 명분을 전파함으로써 노동 운동에 반애국주의적·반민족주의적 경향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민족적 전통을 지닌 다양한 사회주의에 국제주의를 전파했고, "민족주의가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처럼 외래의 사조인 마르크스주의가 프랑스 노동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발루아는 이를 다국적 기업하에서의 임금 문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노동자들은 임금 하락을 막기 위해 각국의 노동자들과 단결해야만 했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전파와 민족적 이해에 대한 경시 역시 이러한 "임금의 즉각적인 옹호"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발루아가 볼 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의 더 근본적인 원인은 자유주의에 있었다. 자유주의적 경제·사회 체제,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사회·경제적 아나키즘'은 부단히 노동자의 가족을 파괴하고 삶의 근거를 박탈함으로써 이들을 정착할 곳 없는 현대판 '유목민'으로 만들었다. 발루아에 의하면 노동자들에게 조국과 민족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가족의 총합이며 상호 부조와 협동의 원천이다. 마치 "아픈 어머니 대신에 아이를 돌봐주는 사람이 이모와 사촌"이듯이 확대된 가족으로서의 조국은 가난한 노동자들의 생존 근거다. 이에 비해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계급은 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이 자본을 이용하여 어떤 나라에서건 정착할 수 있으며 또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조국은 곧 자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조국을 지갑 속에 넣고 다닐 수 없다." 자유주의는 이처럼 노동자의 존재 근거인 조국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노동자를 국제주의에 물들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적대적으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발루아에 의하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는 모두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출발했지만 어느 하나만으로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먼저 민족주의는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에 철저히 반대함으로써 고립적이며 퇴행적인 경향을 낳았다. 특히 민족주의는 현대 경제의 국제적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경제를 후퇴, 약화시킨다. 반면 사회주의는 노동자의 국제주의에 입각하여 민족 문제를 간과했으며, 특히 노동자의 이해 관계를 옹호할 수 있는 '민족적 국가'의 수림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처럼 노동 문제의 견지에서 민족주의를 비판하고 동시에 민족 문제에 입각하여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순환론적인 분석에 의존하여 발루아는 19세기의 거대한 두 운동이 각각 일면적 진실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유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진정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문제는 이 두 운동을 결합시키는 것이며, 발루아는 둘의 결합이 곧 그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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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파시즘은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하나의 운동을 형성하고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삶의 견지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합한다". 파시즘의 독창성 역시 바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한 데 있다. "파시즘의 위대한 독창성은······19세기에 반개인주의를 처음으로 실행에 옮긴 두 거대한 경향,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실현하는 데 있다." 발루아에게 파시즘은 한마디로 "사회적 민족주의"이자 "민족적 사회주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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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가 볼 때 민족혁명이 전체적 혁명인 것은 그것이 "19세기의 정치·경제·사회 철학의 완전한 부정"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발루아의 주장에 의하면 민족혁명은 공화정에서 군주제로 정치 체제를 바꾸는 정치혁명과는 다르다. 즉 민족혁명이 전체적인 것은 그것이 "단순한 개혁의 총합"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의회주의적인 국가가 기반해 있던 가치관"의 완전한 파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체적 혁명으로서의 민족혁명은 모든 사적 이해를 민족적 이해에 종속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정신적이며 도덕적이고 지적인 가치관에 복속시킨다." 이 점에서 민족혁명의 가치관은 물질적 자산을 최고의 자산으로 간주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관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발루아가 보기에 민족혁명은 무엇보다도 "보이지 않는 자산", 즉 정신적 자산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발루아에게 이러한 보이지 않는 자산은 승리의 정신이며 영웅의 정신이었다. 이 점에서 역시 민족혁명은 "무능함"에 기반해 있는 부르주아 가치관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승리의 정신, 영웅의 정신은 전사의 정신이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참호 속에서 오로지 조국을 위해 투쟁한 참전 용사들은 개인적 이해 관계를 초월했으며, 또한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 민족적 이해로 뭉쳐 있었다. 이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조국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희생 정신을 발휘함으로써 새로운 도덕을 제시했다. 발루아는 이러한 정신 상태를 "전사의 철학"이라 불렀으며 이를 부르주아의 철학이라 할 "금융가의 철학"과 날카롭게 대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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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루아에게 파시즘은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생산자'로서의 원래의 역할을 완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새로운 체제였다. 파시즘이 이러한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것은 자유주의적이지도 않고 공산주의적이지도 않은 새로운 경제 체제를 조직하려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경제 조직은, 발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생디카적이고 조합적인 제도"로서 이 제도를 통해 모든 '생산자들', 즉 노동자와 자본가는 모두 보호받을 수 있다. 또한 "생산의 질과 양을 향상시킬 수 있는 노동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두 계급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결과적으로 민족적 번영을 확보하는 길로 간주된다.
발루아에 의하면 이처럼 자유주의의 진정한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변형된 형태도 아니며 공산주의도 아니다. 파시즘은 노동자들의 지배 체제도 부르주아의 지배 체제도 아닌,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사회·정치 조직의 수립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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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민족 문제와 사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자본가와 노동자 모두를 포괄하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동시에 극복한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질서로서 파시즘은 적어도 발루아에게는, 타락하고 있는 프랑스 민족을 구원하고 새로운 문명 창조의 길을 열어줄 제3의 대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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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렐의 사상이 사회주의로 정의될 수 있을지는 차치하더라도 그의 영향은 부분적이었으며 선별적이었다. 따라서 발루아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경우 특히 사회주의와 관련하여 혼란을 초래하고 페소 이데올로기의 본질이 왜곡될 위험이 있다. 스테른헬이 발루아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여 파시즘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의 산물로 제시하고 또 그 기원을 사회주의에 두자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이 일어난 것과 프랑스의 극우 세력이 스테른헬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던 것은 그와 같은 파시즘 정의가 초래한 혼란의 구체적 예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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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가 코티를 비롯한 대자본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았단즌 사실, 그러면서도 페소가 공산주의자나 생디칼리스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캔페인을 벌인 사실은 그와 같은 발루아의 주장을 입증해주는 구체적인 예다. 비록 이러한 캠페인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에도 발루아는 일부 생디칼리스트나 공산주의자들, 예컨대 페리괴 시장을 지낸 공산주의자 들라그랑주Marcel Delagrange, 또 다른 공산주의자 로리당Henri Lauridan, 바르디Jean Bardy, 롤랭Jean Gombault Raulin 그리고 소렐의 '신학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라가르델Huber Lagardelle등을 페소에 가담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점에서 발루아의 파시즘을 프랑스의 보수적 우파와 근본적인 면에서 동일한 현상으로 파악한 수시의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발루아가 파시즘을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 운동으로 규정하고 양측 모두로부터 지지를 확보하려 한 시도가 페소의 약점인 동시에 강점으로 작용했다는 점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코티가 페소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철회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 가운데 하나가 페소의 공산주의자와 노동 세력에 대한 캠페인이었다. 그러나 제3공화정이 확고한 기반을 구축한 시점에서 짧은 시간 내에 2만 5천 명의 지지자를 확보했다는 사실, 그리고 비록 그 비율에서는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페소 가담자들의 사회 성분이 다양했다는 사실은 제3의 대안으로서의 파시즘이 갖는 호소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라 생각된다. 예컨대 대자본가들이 발루아의 파시즘에서 노동 계급의 저항과 이러한 저항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공화정을 대신할 새로운 체제를 발견했다면, 일부 노동자들은 발루아의 파시즘을 풍요로운 삶과 자본가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특히 페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한 중간 계급의 경우, 자유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계급 간의 조화와 민족적 통합을 통한 경제 발전의 전망을 제시한 페소 이데올로기에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발루아의 파시즘은 현실에 적용되기도 전에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집권에 성공한 이탈리아와 독일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혁명적 변화를 기치로 내건 파시즘이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지배 세력과 타협하고 극렬한 인종주의에 호소했으며 점차 혁명성을 상실하고 보수화되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김용우, 민족혁명과 민족사회주의 : 조르쥬 발루아의 '페소'와 그 이데올로기, 한국서양사학회, 1994, 서양사론 44호
5. 독점자본주의 이론
자세한 내용은 독점자본주의 이론 문서 참고하십시오.파시즘이 자본가들이 공산주의를 막기 위하여 비밀리에 지원해서 만들어졌으며,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대리인이나 하수인으로 보며, 자본가들이 공산혁명을 막기 위하여 위장전술로 만들어낸 사회민주당이 파시즘의 배후에 있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이다.
문제점으로는 파시즘은 자본주의에 딱히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자본가들의 이윤창출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았다. 파시스트들은 전체주의적 관점에서 자본가들이 민족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는 도구로서만 가치있다고 보았다. 무솔리니는 포드주의적인 컨베이어벨트에 의한 생산방식을 혐오하여 금지하였고, 소수의 숙련된 장인과 도제들이 수작업으로 명품을 만들어내는 생산방식을 '라틴적 생산방식'이라고 부르면서, 이상적으로 보았으며, 이러한 비효율적인 경제구조는 이탈리아가 전쟁에서 패배한 원인이 되기도 하며, 오늘날 이탈리아의 명품산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파시즘과 보수엘리트들의 불안정한 동맹관계를 설명하자면, 파시스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집권하지 못하자, 권력획득을 위해 전통적 보수세력의 협력이 필요했고, 전통적 보수세력은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공산주의를 억제하지 못한다고 보았을때에만 차선책으로 파시즘의 집권을 협력했으며, 전통적 보수엘리트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사회를 유지할수 있다고 보았을때는 파시즘에 대한 지원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파시즘은 전통적 보수엘리트들이 협력하지 않았기에 집권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파시즘과 전통적 보수엘리트와의 연합에서는 파시스트들이 우위에 있고, 자본가가 명령을 받으며 전쟁을 위해 복무하였기에, 상하관계를 완전히 거꾸로 왜곡하였다. 게다가 파시즘은 딱히 자본가와같은 특정계급만의 지지를 받은게 아니라,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계층에서 지지를 받았고,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계층은 프롤레타리아화된 중산층으로 공무원, 교사, 퇴역군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파시스트들의 좌파 분쇄가 많은 자본가를 기쁘게 했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적은 옳다. 그러나 파시즘이 자본의 이익에 복무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힘이 너무나 강력해서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정권이 아닌 한) 어떠한 정권하에서도 번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와 시장이, 이를테면 가정과 소비, 스포츠를 포함한 근대사회의 모든 측면을 좌우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이와 마찬가지로, 가정과 소비, 스포츠 따위가,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이해하는 방식에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는 것 역시 명백한 사실이다. 실제로 자본가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견이 상충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왜 어떤 자본가들은 파시즘이 자신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믿었고,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의 힘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곧 파시즘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다보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즘의 다른 많은 특징을 부수적인 것으로 격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들은 파시즘의 급진적 측면을 과소평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의미의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들은 기성의 행정 엘리트 및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 대항을 '수사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대항의 효과를 바로 보지 못하며, 또한 당의 다른 목표와 상충될 경우 재계의 요구가 간단히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27~28p
또한 자본주의의 힘이 강력하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곧 파시즘에 대한 '궁극적인' 설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려다보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시즘의 다른 많은 특징을 부수적인 것으로 격하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그들은 파시즘의 급진적 측면을 과소평가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는 오직 사회주의만이 진정한 의미의 급진주의자다. 그래서 그들은 기성의 행정 엘리트 및 주류 정치인들에 대한 파시스트 운동의 급진적 대항을 '수사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그러한 대항의 효과를 바로 보지 못하며, 또한 당의 다른 목표와 상충될 경우 재계의 요구가 간단히 무시되었다는 사실을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케빈 패스모어, 파시즘 27~28p
6. 중간계층 이론
파시즘이 부르주아 금융자본의 사주를 받은 도구이며 하수인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인 독점자본주의 이론이 가진 모순과 한계로 인해서 비판받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파시즘이 중산층 집단의 지지를 받았으며, 권력획득의 과정에서 급진사회주의적 반자본주의적 색채를 정리하면서 부르주아 자본계급과 타협하고 협조관계를 형성하였다고 보는 이론이다. 하지만 이 역시 파시즘의 초계급적 민족주의로서의 정체성을 파악하지 못했고, 노동자 집단의 파시즘에 대한 지지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파시즘은 모든 계층과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는 포퓰리즘 운동이라는 관점으로 대체된다.7. 대중 민주주의(포퓰리즘) 이론
자세한 내용은 포퓰리즘 문서 참고하십시오.본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전전 일본 천황제 파시즘과 독일 나치즘 체제 속에서 공히 나타났던 “열광(熱狂)의 정치” 현상에서 찾고 있다. 열광의 정치란 20세기 대중민주주의의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무기력감과 좌절감에 빠지게 된 대중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해결해 줄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정치적 리더십을 갈망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선동적-전체주의적 정치지도자들이 등장하여 “국가와 민족의 신성화”(神聖化)라는 대중조작을 통해 국민들에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심어 주어 국민 전체를 국가와 민족의 신화에 열광하게 만들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정치과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열광의 정치 과정에서 전체주의적 독재자들은 사회혼란이나 위기에 처한 국민들로부터 자신의 정치권력에 대한 동의와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정치적 희생양을 국내외적으로 반드시 찾는다. 그 동안 20세기에 있어서 일본과 독일이 일으킨 무모한 전쟁들의 원인에 대해 히틀러 및 소수 조력자들, 일본 군부라는 한정된 소수자 집단의 비이성적인 일탈행위에서 찾거나, 혹은 당시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 현실에 대한 대응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열광의 정치의 분석이 이러한 기존의 연구들과 가장 차별되는 점은 당시 파시즘과 나치즘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던 독일 국민과 일본 국민들에게도 전체주의적 독재권력의 등장과 이들이 일으킨 전쟁들에 대해서 상당히 중요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박한규, 열광의 정치황제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대한정치학회보, 2008, vol.15, no.3, pp. 121-143 (23 pages)#
박한규, 열광의 정치황제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 대한정치학회보, 2008, vol.15, no.3, pp. 121-143 (23 pages)#
포퓰리즘은 문자 그대로 ‘국민(people)’에 호소하고 ‘국민’을 동원함으로써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때 정치적 목적이 무엇인지는 포퓰리즘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데 중요하지 않다. 대중 동원의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기성 엘리트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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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강력하고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 연구 대상이다. 기실 이탈리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파시즘이라는 전대미문의 포퓰리즘운동의 진앙지였고, 이 파시스트 포퓰리즘운동은 실제로 20년 이상 권좌를 차지한 바 있었다.
장문석, 이탈리아의 ‘정상국가’ 담론과 포퓰리즘 : 파시스트 포퓰리즘에서 ‘포스트모던’ 포퓰리즘으로, 역사비평, 2013, vol., no.105, pp. 157-181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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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강력하고 새로운 형태의 포퓰리즘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 연구 대상이다. 기실 이탈리아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파시즘이라는 전대미문의 포퓰리즘운동의 진앙지였고, 이 파시스트 포퓰리즘운동은 실제로 20년 이상 권좌를 차지한 바 있었다.
장문석, 이탈리아의 ‘정상국가’ 담론과 포퓰리즘 : 파시스트 포퓰리즘에서 ‘포스트모던’ 포퓰리즘으로, 역사비평, 2013, vol., no.105, pp. 157-181 (25 pages)#
아도르노가 대중운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비판하고 있는 지점은 혁명 지도자와 추종자의 동일성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 동일화 작업은 세가지의 특징을 가진다. 첫 번째 특징은 실제의 적대자보다 더 한 이미지를 만들어 적과 동지의 구분을 확실하게 해 집단 내에 연대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렇게 연대감에 의해 조성된 대중 안에서 저항하는 개별적 주체들은 사라지고 집단과 동일화된 주체만이 존재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낙관주의적인 유토피아를 제시해 대중이 초월적 가치로부터 구원이 도래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본인이 속한 연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다른 집단이나 사람들에 대해 논의 과정 없이 비난하는 데에 그친다. 세 번째 특징은 나르시시즘을 기반으로 한 대중이 자신과 지도자를 동일화하면서 다른 주체들에게 자신이 걸린 최면상태를 강요하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지도자와 동일화된 대중이 세 가지의 특성을 거치면서 자신이 속한 집단, 자신과 다른 것을 주장하는 집단, 그리고 비판적 사고를 하게 해주는 이론 등을 사유하지 않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김진애, 대중운동의 파시즘적인 폭력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 철학연구, 2017, vol.144, pp. 141-166 (26 pages)#
일반적인 권위주의 정권들은 광장에 모인 대중에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지만, 파시스트들은 광장에 모인 대중들의 결집된 열정을 고양하여 자신들의 힘으로 삼았다.김진애, 대중운동의 파시즘적인 폭력의 가능성과 그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 철학연구, 2017, vol.144, pp. 141-166 (26 pages)#
파시즘이 민족주의 프로파간다를 통하여, 부르주아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계급을 초월하여, 민족주의로 통합하였다. 따라서 파시즘은 전 계층 모든 대중의 자발적이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일단은 민주적인 절차를 통하여 다수의 동의하에 집권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다만 특정계급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고, 모든 계층을 만족시키려는 대중 정치를 하였기에, 어떤 계층도 확고한 파시즘의 지지세력으로 포섭하지 못하였고, 그래서 모든 계층에서 파시즘에 대한 열광적인 지지가 나타난 것과 동시에, 모든 계층에서 파시즘에 대한 반대가 나타났다.
8. 인민주권론(대중의 국민화)
'대중의 국민화'는 조지 L. 모스 (George L. Mosse)의 파시즘에 관한 이론이며, 동시에 책 이름이다. 파시즘은 단순히 독재자가 민중을 압제하고 세뇌한게 아니라, 18세기에 부상한 인민주권 사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의 절정이었으며, 장 자크 루소의 ‘일반 의지’와 인민주권 사상이 파시즘을 낳는 세속적 정치 종교 형태로 진화하였다고 설명하며, 파시즘은 '대중의 자기 숭배' 라는 정치 종교로 보았다.집권 8년째 베니토 무솔리니는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에 위치한 자신의 위압적인 집무실에 앉아 자신이 이룬 혁명의 본질을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혁명이란 새로운 형태의 정치, 신화와 제의를 창조하는 일이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존의 전통을 새로운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 이용하는 것이다. 축제와 몸짓과 형식을 새롭게 창조해야 하며 머지않아 이 자체가 전통이 될 것이다.' 칼하인츠 슈메어는 최근에야 새로운 정치 양식을 발명한 것이 나치즘의 가장 중요한 혁신이었으며, 정치 행위는 새로운 신화와 제의를 극화하는 일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유럽 파시즘 특유의 대규모 대중 집회, 빼곡히 이어지는 행렬, 다채로운 깃발은 우리에게도 여전히 친숙한 것들이다. 대중 집회가 열렸던 많은 도시들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되었지만, 파시즘이 건설한 건축물의 상당수는 손상되지 않고 남아 그것들이 표상했던 정치 양식을 느끼게 한다.
이런 정치 양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통을 새로운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무솔리니의 말은 어느 정도 옳은 것이었다. 우리가 파시즘 양식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18세기에 부상한 인민주권 사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의 절정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이라는 보편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말이다. 더 이상 왕정이나 군주정이 민중의 자기 표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 이런 인민 주권 개념이 엄밀한 개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 때문이었다. 즉 모두가 하나의 인민으로 뭉쳐 함께 행동할 때 비로소 시민이라는 인간 본질이 실현된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일반의지는 민중이 스스로를 숭배하는 하나의 세속 종교가 되었으며 새로운 정치는 이런 숭배를 유도하고 공식화하려 했다. 민중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데에는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새롭게 자각된 민족의식도 일조했다. 이런 민족의식은 유럽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인민 주권의 이상과 함께 성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은 민중 자체에, 그리고 민중의 일반 의지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기존 왕조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민족의 상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민중 숭배는 곧 국가 숭배로 바뀌었다. 새로운 정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양식을 통해 민중과 민족의 일치를 표현하려 했고, 현실에서 그것은 세속 종교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세기 초부터 줄곧 민족이라는 신화와 상징을 활용하고 민중 스스로 민족 숭배에 참여하게 만드는 의례를 개발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신화와 상징의 창조에 일반 의지의 개념이 활용되었다. 새로운 정치는 일반 의지의 구체적 표현인 의례와 축제, 신화와 상징을 통해 민중을 민족이라는 신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민중"이라는 무질서한 군중은 민족적 신화를 통해 민중의 단합이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대중운동이 되었다.
조지 L. 모스 (George L. Mosse), 대중의 국민화, 26~28p
이런 정치 양식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전통을 새로운 목적에 맞게 변형시켜야 한다는 무솔리니의 말은 어느 정도 옳은 것이었다. 우리가 파시즘 양식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 18세기에 부상한 인민주권 사상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의 절정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시민권이라는 보편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말이다. 더 이상 왕정이나 군주정이 민중의 자기 표상을 대신할 수 없었다. 이런 인민 주권 개념이 엄밀한 개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 때문이었다. 즉 모두가 하나의 인민으로 뭉쳐 함께 행동할 때 비로소 시민이라는 인간 본질이 실현된다는 믿음 덕분이었다. 일반의지는 민중이 스스로를 숭배하는 하나의 세속 종교가 되었으며 새로운 정치는 이런 숭배를 유도하고 공식화하려 했다. 민중의 결속을 굳건히 하는 데에는 보편적 시민권이라는 개념뿐 아니라 새롭게 자각된 민족의식도 일조했다. 이런 민족의식은 유럽의 여러 민족 사이에서 인민 주권의 이상과 함께 성장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민족은 민중 자체에, 그리고 민중의 일반 의지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이야기되었다. 기존 왕조에 대한 충성은 더 이상 민족의 상징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민중 숭배는 곧 국가 숭배로 바뀌었다. 새로운 정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양식을 통해 민중과 민족의 일치를 표현하려 했고, 현실에서 그것은 세속 종교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19세기 초부터 줄곧 민족이라는 신화와 상징을 활용하고 민중 스스로 민족 숭배에 참여하게 만드는 의례를 개발함으로써 가능했던 일이다. 신화와 상징의 창조에 일반 의지의 개념이 활용되었다. 새로운 정치는 일반 의지의 구체적 표현인 의례와 축제, 신화와 상징을 통해 민중을 민족이라는 신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들었다. "민중"이라는 무질서한 군중은 민족적 신화를 통해 민중의 단합이라는 믿음을 공유하는 대중운동이 되었다.
조지 L. 모스 (George L. Mosse), 대중의 국민화, 26~28p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정치사상은 전통 정치 이론의 차원에서 판단될 수는 없다. 그것은 헤겔이나 마르크스 사상 같이 이성적이면서 논리적으로 구축된 체계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이 사실이 파시즘의 정치사상을 살펴보고 그 공허함이나 모호함을 비난한 많은 비판자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파시즘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정치사상을 하나의 체계라기보다는 "태도"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사실 민족 제의에 틀을 제공한 일종의 신학이었다. 그래서 의례와 전례가 그 중심이 되었고 글에 호소할 필요 없는 정치론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조지 L. 모스 (George L. Mosse), 대중의 국민화, 36p
조지 L. 모스 (George L. Mosse), 대중의 국민화, 36p
루소는 자신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개인적인 이기심인 '개별 의지'를 버리고 사회 계약의 당사자로서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일반 의지'에 의하여 사회와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사회적 계약인 국가의 법이라는 '일반 의지에' 복종하여 개인의 자유가 보장받는다고 주장하였으며, 일반 의지에 복종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합의가 깨지고, 국가가 존속 불가능하게 되므로, 일반 의지에 대하여 강제로라도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이것을 '자유를 위한 강제' (forcing to be free) 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하였다.
그런데 루소의 이러한 일반의지라는게 악용될 여지가 매우 다분한 면이 있고, 실제로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공포정치도 일반의지라는 명목으로 단두대 처형과 집단학살을 정당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버트런드 러셀은 '서양철학사'에서 루소를 전체주의 사상의 시조로 간주한다.루소, 민주주의 스승인가 전체주의 창시자인가
국가는 왜 난폭해졌는가? 혁명은 왜 전제주의로 회귀하였는가? 자코뱅의 공포정치에 대한 경험은 프랑스인들로 하여금 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에 근거를 둔 공화국이 그러한 주체들의 억압체로 드러나는가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이에 대해 19세기 사상가 이폴리트 텐(Hyppolyte Taine)은 1789년 프랑스 민중들의 열망을 공포정치로 치닫게 만든 루소이론의 문제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루소의 사상이 공화국 내부의 제 사회조직들 – 사적 관계 - 에 대한 해체를 정당화함으로 인해 국가가 난폭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진단한다. 다시 말해 루소는 국가에게 ‘일반의지’의 구현체라는 절대적인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혁명의 전제주의로의 회귀를 예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루소(J.-J. Rousseau)의 공화국, 혹은 가족과 사회의 부재: 이폴리트 텐(Hyppolyte Taine)의 루소 비판
루소(J.-J. Rousseau)의 공화국, 혹은 가족과 사회의 부재: 이폴리트 텐(Hyppolyte Taine)의 루소 비판
아렌트는 근대 혁명이 ‘하나의 여론’이나 ‘만장일치’에 기초한 보편성을 추구하면서 정치적 자유를 상실한다고 비판한다. 그녀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의 목표와 세계사적 의미를 기존과 달리 ‘다원성과 다양성 존중’에 맞추고, 프랑스 혁명이 공포정치로 전락하면서 본래 목표인 ‘정치적 자유’를 포기하는 이유는 루소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루소에게서 인민의 보편적 기반인 일반의지와, 인민을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동정심이 혁명 과정에서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며 로베스피에르의 자유의 전제정과 공포정치를 야기한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일반의지의 만장일치와 국가이성이 인민의 공적 영역에 대한 진입도 막는다고 한다.
아렌트의 루소 이해를 통한 양심과 여론의 관계
루소에게서 인민의 보편적 기반인 일반의지와, 인민을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동정심이 혁명 과정에서 오히려 ‘자유’를 포기하게 하는 요인이며 로베스피에르의 자유의 전제정과 공포정치를 야기한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일반의지의 만장일치와 국가이성이 인민의 공적 영역에 대한 진입도 막는다고 한다.
아렌트의 루소 이해를 통한 양심과 여론의 관계
루소의 정치철학적 위상은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다. 프랑스 혁명 이후 루소는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주의, 전체주의, 민족주의, 공동체주의, 공화주의 등등 서로 양립되기 어려운 다양하고도 이질적인 정치이념을 옹호하는 이론가로 해석되어 왔다. 1990년대 촉발된 자유주의-공화주의 논쟁은 루소의 정치사상이 지닌 공화주의적 측면을 부각시키는데 기여했다. 루소는 공화국을 법이 지배하는 국가로 정의한다. 일반의지는 법을 제정하는 원천이며, 법은 시민 행복의 대상인 자유와 평등을 추구한다. 본 논문은 법치, 자유, 정치참여의 세 가지 핵심적인 공화주의 개념에 천착하여 루소의 정치사상이 지닌 공화주의적 특성을 밝혀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고대에서부터 포스트모던까지 포괄하는 루소의 사상은 최근의 자유주의-공동체주의-공화주의 논쟁이 잘 보여주듯이, 앞으로도 시대의 요구에 따라 새롭게 해석될 여지를 갖고 있음이 결론으로 제시된다.
루소와 공화주의
루소와 공화주의
9. 대중독재
자세한 내용은 대중독재 문서 참고하십시오.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동유럽 역사가들의 자기 비판적 역사 평가 작업을 문득 떠올렸다. 특히 선명하게 기억에 와닿은 것은, 1996년 “희생자인가 공범자인가?” 라는 제목으로 바르샤바에서 개최된 세미나와 1997년 독일 포츠담에서 열린 “동독-근대적 독재?” 라는 학술 대회였다. 이 작업들이 공유하는 문제 의식은 노멘클라투라의 독재권력이 민중들의 일정한 합의를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는 “합의 독재”(Consensus Dictatorship) 개념으로 압축된다. 민중은 독재 권력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공범자였다는 통렬한 자기 비판이 그 밑에는 깔려 있다. 위로부터의 강압에 의한 폭력적 지배가 독재 권력의 한 축이었다면,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자발적 동의도 독재 권력을 지탱하는 또 다른 축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폭력적인 통치 체제인 나치즘이나 스탈린 체제조차도 힘에 의한 억압뿐만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 동의를 어느 정도 전제했다는 평범한 역사적 사실에서도 그것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101 경찰예비연대 병사들의 대부분은 열렬한 나치당원이 아니라 예비군으로 각지에서 소집된 평범한 독일 아저씨들이었다. 나치즘의 사회적 기반은 소수의 광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평범한 독일인들이었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몰린 엄청난 애도 인파와 그 큰 슬픔의 문결 속에서 깔려 죽은 평범한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흘린 큰 지식인 사하로프의 눈물 또한 “합의독재”의 상징이다. “신경제정책”(NEP)을 유토피아적 기획으로부터의 일탈이라 보고 눈을 흘겼던 소련의 애국 시민들은 자발적 스탈린주의의 기둥이었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7p
가장 폭력적인 통치 체제인 나치즘이나 스탈린 체제조차도 힘에 의한 억압뿐만 아니라 민중의 자발적 동의를 어느 정도 전제했다는 평범한 역사적 사실에서도 그것은 다시 한번 확인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101 경찰예비연대 병사들의 대부분은 열렬한 나치당원이 아니라 예비군으로 각지에서 소집된 평범한 독일 아저씨들이었다. 나치즘의 사회적 기반은 소수의 광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 평범한 독일인들이었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몰린 엄청난 애도 인파와 그 큰 슬픔의 문결 속에서 깔려 죽은 평범한 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의 죽음을 애통해 하면서 흘린 큰 지식인 사하로프의 눈물 또한 “합의독재”의 상징이다. “신경제정책”(NEP)을 유토피아적 기획으로부터의 일탈이라 보고 눈을 흘겼던 소련의 애국 시민들은 자발적 스탈린주의의 기둥이었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7p
독재와 민주주의를 적대적 대칭관계로 파악하는 대조어법의 인식론은 이 용어들을 낳은 서구 정치사상의 오래 된 상식과 충돌한다.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에 따르면, 로마 공화정 당시 한시적인 비상대권으로서 독재가 뜻하는 바는 전쟁 등의 비상사태에 직면하여 자유와 질서를 회복한다는 긍정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독재의 반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정상적인' 헌정체제였으며, 민주주의 반대 역시 독재가 아니라 군주정 혹은 귀족정이었다. 그 뿐만 아니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오늘날의 익숙한 용례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결코 자연스럽거나 마땅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내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를 무시하거나 경원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이후에나 겨우 도입된 보통선거권에서 보듯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전 국민을 동원하기 위한 총력전 체제가 등장한 20세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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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개념사의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하기보다는 독재와 상호 침투했다. '파시즘은 반자유주의적이지만 반드시 반민주주의적이지는 않다'며 나치의 정치적 정당성을 옹호했던 칼 슈미트의 선언적 규정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파시즘은 의회제를 부정할 뿐, 근본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인민이 직접 스스로를 통치하는 직접 민주주의 혹은 '인민이 결정하는 민주주의(decisionist democracty)'를 위해 의회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파괴했다는 나치의 주장이 호소력을 지녔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20세기의 독재에 대한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정치적 대치선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경계가 아니라 결정론적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적 의회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경계에 놓여 있었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제한된 대의제 민주주의의 공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에서 더 잘 발현된다는 설득은 파시즘의 대안적 공공영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논의였다. '유신독재'가 의회 내 반대파에 맞서 체제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주 국민투표에 의지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국민투표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가 결정론적 직접 민주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유신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도 따지고 보면 한국 현대사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파시즘과 민주주의가 상호 침투하는 논리적 가능성은 이미 국민 형성과정에 잠재되어 있었다. 국민 만들기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의지와 욕망을 지닌 '다중'을 단일한 의지와 욕망을 지닌 통일된 인민의 집합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집합적 의지로서의 '일반의지'는 자연스레 '민족의 의지' 혹은 '국민의 뜻'으로 전화된다. 집합적 의지와 욕망을 대변하는 '국민의 뜻'은 그 자체로 '구성하는 권력/제헌권력(constituent power)'이 된다. 그것은 헌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만드는 초월적인 권력이다. 그 자체가 헌법과 같은 혹은 헌법을 초월하는 권능을 가지기 때문에, 국민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나치의 대중 집회에서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모스(George Mosse)의 추측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793년 4월 5일 국민공회에서 행한 바레르(Bertrand Barére)의 연설은 이 점에서 주목된다. 시민 종교로서의 민족주의의 사제였던 그는 이 연설에서 민족/국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코뱅 독재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카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족집게처럼 찍어서 인용하고 있는 바레르의 이 연설은 '주권독재sovereign dictatorship'의 비밀을 슬며시 드러낸 것이었다. '국민의 뜻'에 따라 행사하는 '비상 대권'으로서의 독재는 이처럼 민주주의와 상호 침투되어 뗄 수 없이 결합된 개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자코뱅 독재와 마찬가지로 직접 민주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인류 전체의 진보와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같이 하는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행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반의지'에 입각한 자코뱅 독재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포함하는 더 포괄적 민주적 독재로 읽힐 수 있는 것이었다. 인민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더 낮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작동하는 과도기적인 개념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상호 침투하는 차원이 아니라,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발전단계를 의미하기도 했다. 추상화된 논리로만 따진다면,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과거의 낮은 발전 단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지현,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의어(反意語)인가?, 서양사론, 2013, vol., no.116, pp. 39-63 (25 p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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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개념사의 관점뿐만 아니라 정치사상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결합하기보다는 독재와 상호 침투했다. '파시즘은 반자유주의적이지만 반드시 반민주주의적이지는 않다'며 나치의 정치적 정당성을 옹호했던 칼 슈미트의 선언적 규정에서도 이 점은 잘 드러난다. 파시즘은 의회제를 부정할 뿐, 근본은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인민이 직접 스스로를 통치하는 직접 민주주의 혹은 '인민이 결정하는 민주주의(decisionist democracty)'를 위해 의회 민주주의와 대의제를 파괴했다는 나치의 주장이 호소력을 지녔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20세기의 독재에 대한 세계사적 맥락에서 볼 때, 정치적 대치선은 독재와 민주주의의 경계가 아니라 결정론적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제적 의회 민주주의가 대립하는 경계에 놓여 있었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제한된 대의제 민주주의의 공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려 있는 직접 민주주의의 공간에서 더 잘 발현된다는 설득은 파시즘의 대안적 공공영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논의였다. '유신독재'가 의회 내 반대파에 맞서 체제적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자주 국민투표에 의지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국민투표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가 결정론적 직접 민주주의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유신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도 따지고 보면 한국 현대사만의 고유한 특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파시즘과 민주주의가 상호 침투하는 논리적 가능성은 이미 국민 형성과정에 잠재되어 있었다. 국민 만들기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의지와 욕망을 지닌 '다중'을 단일한 의지와 욕망을 지닌 통일된 인민의 집합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집합적 의지로서의 '일반의지'는 자연스레 '민족의 의지' 혹은 '국민의 뜻'으로 전화된다. 집합적 의지와 욕망을 대변하는 '국민의 뜻'은 그 자체로 '구성하는 권력/제헌권력(constituent power)'이 된다. 그것은 헌법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헌법을 만드는 초월적인 권력이다. 그 자체가 헌법과 같은 혹은 헌법을 초월하는 권능을 가지기 때문에, 국민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다.
로베스피에르가 나치의 대중 집회에서 집과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으리라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 모스(George Mosse)의 추측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793년 4월 5일 국민공회에서 행한 바레르(Bertrand Barére)의 연설은 이 점에서 주목된다. 시민 종교로서의 민족주의의 사제였던 그는 이 연설에서 민족/국민이 자기 자신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코뱅 독재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카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족집게처럼 찍어서 인용하고 있는 바레르의 이 연설은 '주권독재sovereign dictatorship'의 비밀을 슬며시 드러낸 것이었다. '국민의 뜻'에 따라 행사하는 '비상 대권'으로서의 독재는 이처럼 민주주의와 상호 침투되어 뗄 수 없이 결합된 개념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역시 자코뱅 독재와 마찬가지로 직접 민주주의의 한 표현이었다. 인류 전체의 진보와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같이 하는 '보편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가 행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일반의지'에 입각한 자코뱅 독재의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민주주의까지 포함하는 더 포괄적 민주적 독재로 읽힐 수 있는 것이었다. 인민민주주의는 이론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보다 더 낮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작동하는 과도기적인 개념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독재와 민주주의는 상호 침투하는 차원이 아니라,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더 높은 발전단계를 의미하기도 했다. 추상화된 논리로만 따진다면,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로 돌아간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과거의 낮은 발전 단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지현, 독재는 민주주의의 반의어(反意語)인가?, 서양사론, 2013, vol., no.116, pp. 39-63 (25 pages)#
강상운은 일단 독재정치를 단순히 민주주의에 대한 대립항으로 보지 않는다. 카를 슈미트의 주권 이론 등을 이용하여, 특명적 독재가 입법적 독재를 거쳐 무력적 독재로 발전하는 경향이 있음을 규명한다. (일시적) 독재정치와 입헌정치의 양립 가능성을 간파함으로써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은 독재 체제(프롤레타리아독재, 파시즘독재)의 (소수에 대한) 폭력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민주주의를 내세운 독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강상운은 파시즘독재도 대중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중적 독재’라고 지칭한다. 임지현이 학술용어로 ‘대중독재’라는 단어를 정착시킨 것보다 50여 년 앞선 시점이다. 강상운은 파시즘을, 개인주의의 폐해를 넘기 위해 발생한 국가주의, 국민주의이자 전체주의로 본다. 반면 계급독재를 내세우는 마르크스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다. 칼 포퍼 등이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싸잡아 전체주의로 비난한 것과는 다르다. ‘민족공익을 목표로 사리사욕을 배척’하는 파시즘 전체주의를 긍정적으로 보기 위해서, 공산주의는 전체주의가 아니라고 밀어낸 것이다.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해방 이후 파시즘적 역사인식의 정립 과정#
10.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일상적 파시즘, 미시 파시즘)
파시즘이 근대주의라는 인간의 합리성에 기반한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입장이며, 주로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에 의하여 주장된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포스트 모더니즘이 유행할때 많이 퍼졌다. 근대 시민혁명을 통하여 신분사회가 사라지자, 신분을 대신할 새로운 정체성으로 '민족'이 등장하였고, 의무교육, 징병제 등의 근대적 제도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졌다. 즉 민족주의는 근대 모더니즘의 창조물이다. 그리고 파시즘은 근대성의 폭주이다.국내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학자인 임지현 교수가 유명하다. 임지현 교수는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통해 국내 진보진영에게 민족주의 비판 담론을 소개하였으며, '우리 안의 파시즘'을 통해 일상적 파시즘 개념을 주장하였고, 파시즘은 위로부터의 강압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자발적인 동의를 얻어낸 합의 독재인 대중독재 였으며, 따라서 정치적 체제인 파시즘뿐만이 아니라, 민중의 평범한 일상속에도 내면화된 파시즘적 양상의 문화가 만연하다고 주장하였다. 임지현은 오랫동안 한국사회에 스며든 지도자 숭배와 복종의 문화, 가부장주의와 성차별주의, 가정폭력,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 386세대와 같은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성추행 등을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진보진영 내부에도 이러한 파시즘적 모습이 있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내었다.
강준만 교수는 임지현 교수가 정치사회적 파시즘 비판은 외면한 채 '일상 속의 파시즘' 과의 전쟁만을 선포하고 있으며, 일상적 파시즘'이 대안이 없는 '진보 허무주의'라고 비판하였다.# 임지현 교수는 2022년에 우리 안의 파시즘 2.0을 출간하면서, 일상적 파시즘에 대하여 보충하였다.
파시즘의 집단심성이 한국 사회의 결을 이룬다고 볼 수 있는 징후는 수없이 많다. 그것은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긴 목록을 구성한다.
정작 큰 문제는 대안 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사고와 운동 방식조차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사회 고유의 결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는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 “현실 정치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의사 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 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 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한다.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자유롭고 재기 넘치며 신선해야 할 학생 운동조차 행동 양식과 의식 구조는 파시즘의 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일상적 파시즘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들이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10p
정작 큰 문제는 대안 세력으로 자처하는 이들의 사고와 운동 방식조차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 사회 고유의 결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일부 좌파들의 도덕적 폭력은 극우 반공주의의 매카시즘적 폭력과 결을 같이한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 지향적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 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는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 “현실 정치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공간”이라는 사이버 공간의 의사 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 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 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한다.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가장 자유롭고 재기 넘치며 신선해야 할 학생 운동조차 행동 양식과 의식 구조는 파시즘의 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낸다. 일상적 파시즘이 우리 사회의 저변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예들이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10p
더 중요하게는 그러한 이분법이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운동 자체가 파시즘적인 억압기제를 내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감는다는 점이다. 소련과 동유럽의 집권 공산당은 말할 것도 없고, 독일 사회민주당의 관료화된 노조, 1968년의 프랑스 공산당과 노동총연맹, 지도와 연대의 이름으로 노동자 사이의 차별을 지우려고 했던 주류 노동운동의 관행 등에서 진보와 파시즘적 억압관행이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이들 운동이 정치적·경제적 파시즘의 타도에 성공했다고 해도, 새로운 억압기제를 내장한 이상 그것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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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성찰 위에서 진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이들의 변화전략은 상당히 단선적이고, 교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 그 전략은 토대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무한히 복잡한 미시권력의 네트워크이자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 침투한 위계적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특권적 이해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노멘클라투라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렸다. 또 인식의 지평 자체가 생산관계와 제도의 영역에 고정됨으로써,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망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권력의 지배와 착취가 이뤄지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설 자리가 없었다. 특히 토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편향은 문화를 상부구조에 간단히 편입시킴으로써, 상징적 문화구성체와 그 안에서 표명되는 하비투스(habitus)가 사회·경제체제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따라서 더 큰 역사적 규정력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멘클라투라의 독점적 특권에 대한 노동자·농민의 반발은 지도부의 과학적 이론과 역사의 발전법칙에 맞는 노선을 거부하는 미성숙한 계급의식의 표현으로 치부되었으며, 노동자와 농민은 그저 당 지도부의 교화 대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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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의 도덕적 타락과 몰락은 '좋은 헤게모니'를 가진 우리가 '나쁜 헤게모니'를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해 구조와 제도를 바꾸면 사회가 변화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386세대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운동 명망가들의 잇단 성추행과, 가정폭력, 5·18 기념식 전야 운동권 주역들의 광주 룸살롱 음주 스캔들 등이 일간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586세대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이후에 나온 오만과 편견의 결과라기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미 뿌리가 깊게 내려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스탈린주의와 천황제에 기반을 둔 지도자 숭배, 청소년 시절부터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군사주의 문화와 엄격한 위계질서, 카드섹션처럼 일사불란한 학생운동,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든 가부장주의, 공격적 성차별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 일본제국주의의 군사 동원체제에 그 뿌리를 둔 박정희 유신독재의 민족주의적 정신교육, 순수혈통에 집착하는 가부장적 혈통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증 등 파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집단 심성이 한국사회의 결을 이루고 있다는 징후는 586세대의 말과 행동에서 자주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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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라서 문제가 아니라, 반대파에게 '토착 왜구'와 같은 원색적이고 극우적·민족주의적 색깔론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진보 도착증'이 문제인 것이다. (...) 반대파에게 툭하면 '친일파' '민족 반역자' 등의 프레임을 씌우는 색깔론이 문제인 것이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군사독재의 '국가'보안법과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토착 왜구 사냥에 나선 586세대의 '민족'보안법은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반역의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에서 같은 정치적 문법을 구사한다. '민족'보안법이 '국가'보안법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 '친일파 신색깔론'이 일베의 수구적 색깔론과 문법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도 의문이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2.0 , 15~2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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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현실사회주의의 경험에 대한 역사적 성찰 위에서 진보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면, 이들의 변화전략은 상당히 단선적이고, 교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식론적으로 그 전략은 토대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무한히 복잡한 미시권력의 네트워크이자 일상생활의 모든 국면에 침투한 위계적 권력의 메커니즘을 파헤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름으로 특권적 이해의 네트워크를 구축한 노멘클라투라의 권력 독점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버렸다. 또 인식의 지평 자체가 생산관계와 제도의 영역에 고정됨으로써,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망과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권력의 지배와 착취가 이뤄지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이 설 자리가 없었다. 특히 토대를 강조하는 경제주의적 편향은 문화를 상부구조에 간단히 편입시킴으로써, 상징적 문화구성체와 그 안에서 표명되는 하비투스(habitus)가 사회·경제체제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따라서 더 큰 역사적 규정력을 갖는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멘클라투라의 독점적 특권에 대한 노동자·농민의 반발은 지도부의 과학적 이론과 역사의 발전법칙에 맞는 노선을 거부하는 미성숙한 계급의식의 표현으로 치부되었으며, 노동자와 농민은 그저 당 지도부의 교화 대상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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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사회주의의 도덕적 타락과 몰락은 '좋은 헤게모니'를 가진 우리가 '나쁜 헤게모니'를 몰아내고 권력을 쟁취해 구조와 제도를 바꾸면 사회가 변화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면 386세대 운동권의 군사주의와 서열주의, 운동 명망가들의 잇단 성추행과, 가정폭력, 5·18 기념식 전야 운동권 주역들의 광주 룸살롱 음주 스캔들 등이 일간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586세대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은 이들이 행정부와 입법부를 장악한 이후에 나온 오만과 편견의 결과라기보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이미 뿌리가 깊게 내려진 것이라고 봐야 한다. 스탈린주의와 천황제에 기반을 둔 지도자 숭배, 청소년 시절부터 규율과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학교 교육, 군사주의 문화와 엄격한 위계질서, 카드섹션처럼 일사불란한 학생운동, 여성을 내적 식민지로 만든 가부장주의, 공격적 성차별주의와 이성애중심주의, 일본제국주의의 군사 동원체제에 그 뿌리를 둔 박정희 유신독재의 민족주의적 정신교육, 순수혈통에 집착하는 가부장적 혈통주의와 인종차별주의, 민족주의적 과대망상증과 외국인 혐오증 등 파시즘으로 발전할 수 있는 집단 심성이 한국사회의 결을 이루고 있다는 징후는 586세대의 말과 행동에서 자주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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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라서 문제가 아니라, 반대파에게 '토착 왜구'와 같은 원색적이고 극우적·민족주의적 색깔론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진보 도착증'이 문제인 것이다. (...) 반대파에게 툭하면 '친일파' '민족 반역자' 등의 프레임을 씌우는 색깔론이 문제인 것이다. '토착 왜구'나 '빨갱이'는 박멸과 척결의 대상일 뿐 정치적 대화 상대가 될 수 없다.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빨갱이 사냥에 나섰던 군사독재의 '국가'보안법과 민족정기의 이름으로 토착 왜구 사냥에 나선 586세대의 '민족'보안법은 자기와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반역의 프레임을 씌운다는 점에서 같은 정치적 문법을 구사한다. '민족'보안법이 '국가'보안법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다. (...) '친일파 신색깔론'이 일베의 수구적 색깔론과 문법적으로 얼마나 다른지도 의문이다.
임지현, 우리 안의 파시즘 2.0 , 15~20p
본 논문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론을 통해 파시즘의 특성을 살펴본 글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파시즘, 전체주의, 자본주의 등의 정치 형태가 유적(類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거시정치의 측면에서 보다 미시정치의 영역에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다. 파시즘은 미시적 주체화(감염)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 흐름이 국가에 반하는 형태를 띠면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파시즘은 ‘분자적’ 흐름이라기보다 ‘분자적 몰성’을 지닌 ‘미시 편집증’의 흐름이다. 파시즘은 긍정성과 생성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자신과 주변 모두의 파괴로 귀결된다. 이들에 따르면 나치의 경우처럼 ‘파시즘-국가’가 형성된 것은 우발적인 상황이며, 이는 파시즘이 국가장치에 포획된 결과일 뿐이다.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의 주체화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능에 대한 무한 긍정과 동시에 이질적인 힘들을 조합하여 끊임없는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를 통해 살펴본 파시즘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파시즘, 전체주의, 자본주의 등의 정치 형태가 유적(類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파시즘은 거시정치의 측면에서 보다 미시정치의 영역에서만 파악 가능한 것이다. 파시즘은 미시적 주체화(감염)에 의해 만들어진 대중적 흐름이 국가에 반하는 형태를 띠면서 작동한다는 점에서 전쟁기계와 유사하다. 그러나 파시즘은 ‘분자적’ 흐름이라기보다 ‘분자적 몰성’을 지닌 ‘미시 편집증’의 흐름이다. 파시즘은 긍정성과 생성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자신과 주변 모두의 파괴로 귀결된다. 이들에 따르면 나치의 경우처럼 ‘파시즘-국가’가 형성된 것은 우발적인 상황이며, 이는 파시즘이 국가장치에 포획된 결과일 뿐이다.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현실의 주체화에 대한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자신의 역능에 대한 무한 긍정과 동시에 이질적인 힘들을 조합하여 끊임없는 생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파시즘에서 벗어나기 -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를 통해 살펴본 파시즘
능동적 힘에 대한 니체의 주장이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것도 사실이며, 정치철학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좌파에 의해 파시즘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동적 힘이나 공격성에 대한 니체의 언명들이 통째로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아직도 중요한 정치철학적 논의를 제공한다.
들뢰즈는 초기에 니체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었다. 특히 능동적 힘의 긍정은 그 수용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런데 니체에 대한 이 태도가 점차 수정을 겪는다. 들뢰즈(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포함하여)의 미시 파시즘 분석은 이 변화와 수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 들뢰즈는 파시즘의 성격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려 했고, 그를 통해 미시 파시즘의 위험을 경계했다. 미시 파시즘은 도처에 편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미시 파시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 주장은 근본주의적 함정에 빠지는 듯하다. 미시 파시즘론은 모든 미시적인 권력과 폭력까지 미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듯하다. 결국 들뢰즈는 초기에 자기가 가졌던 힘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듯한데, 이 변화는 일정하게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본 논문은 모든 권력과 폭력을 미시 파시즘으로 해석하는 미시 파시즘론의 문제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파시즘이 단순히 미시 파시즘과 등치될 수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통속적인 해석은 파시즘의 핵심이 마치 미시 파시즘적 성격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둘은 서로 분리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
과거에는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는 파시즘과 아예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좌파라고해서 미시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좌익 조직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미시 파시즘을 퍼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G. Deleuze/F. Guattrari,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Minuit, 1980,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김재인역, 새물결, 2001), p. 410.
우익만 파시즘에 빠지고 이념적으로 정의와 진보를 내세우는 좌익은 미시 파시즘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좌익도 자주 미시 파시즘에 빠질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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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모든 미시적인 폭력과 권력까지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파시즘’ 이라는 말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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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도처에 존재할 뿐 아니라 도처에 생성하는 미시 파시즘을 해부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폭력과 권력에 몸담고 있으면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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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폭력이나 권력이 미시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파시즘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맞다. 미시적 차원에서 권력을 사랑하고 폭력을 사랑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그 자체로 미시 파시즘인 것일까? 그것들을 모두 미시 파시즘으로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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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파시즘론은 미시적 권력과 폭력을 모두 미시 파시즘이라고 명명할 뿐 아니라, 미시 파시즘을 그 자체로 파시즘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생기는 혼동과 모호함은 엄청나다.
먼저 ‘파시즘’ 개념의 경우 ‘권력’이나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상황에 있다는 데 주의하자. 무엇보다도 ‘권력’ 개념이 서술적이고도 분석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파시즘’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개념을 역사적으로 혹은 정치학적으로 사용하자면 그것은 20 세기에 등장했던 정치경제적 권력, 특히 부정적으로 폭력적인 양상을 띤 정치권력을 지칭해야 할 터이다. 곧 1930년대에서 시작해 1945년에 종말을 맞이한 독일의 히틀러 정부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 이 두 정부만이 국가차원에서 파시즘적 권력과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존재했던 다른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와 달리, 그 권력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군중의 참여와 동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독재정권과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차원의 군사적이고 억압적 기제가 전면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히틀러 정부와 무솔리니 정부만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규정이 협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파시즘’ 개념은 독재나 전체주의와 구분해서 엄격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고, 그 규정은 상식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쉽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미시 파시즘론의 함정-니체의 능동적인 힘을 너무 꺾어버린 들뢰즈
들뢰즈는 초기에 니체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었다. 특히 능동적 힘의 긍정은 그 수용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런데 니체에 대한 이 태도가 점차 수정을 겪는다. 들뢰즈(가타리와의 공동작업을 포함하여)의 미시 파시즘 분석은 이 변화와 수정의 한 가운데에 있다. 들뢰즈는 파시즘의 성격을 미시적으로 분석하고 규정하려 했고, 그를 통해 미시 파시즘의 위험을 경계했다. 미시 파시즘은 도처에 편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미시 파시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분석과 주장은 근본주의적 함정에 빠지는 듯하다. 미시 파시즘론은 모든 미시적인 권력과 폭력까지 미시 파시즘의 이름으로 비판하고 비난하는 듯하다. 결국 들뢰즈는 초기에 자기가 가졌던 힘에 대한 긍정을 스스로 포기하는 듯한데, 이 변화는 일정하게 시대의 변화를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본 논문은 모든 권력과 폭력을 미시 파시즘으로 해석하는 미시 파시즘론의 문제를 분석하고, 더 나아가 파시즘이 단순히 미시 파시즘과 등치될 수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통속적인 해석은 파시즘의 핵심이 마치 미시 파시즘적 성격에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 둘은 서로 분리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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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는 파시즘과 아예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그런 좌파라고해서 미시 파시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좌익 조직들이라고 해서 자신들의 미시 파시즘을 퍼뜨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유지시키고 배양하며 극진히 여기는 자기 자신인 파시스트,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분자들을 갖고 있는 그러한 파시스트를 보지 않으면서, 그램분자적인 층위에서 반-파시스트가 되기란 참으로 쉬운 일이다.
G. Deleuze/F. Guattrari,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enie, Minuit, 1980, 천개의 고원. 자본주의와 분열증 2 (김재인역, 새물결, 2001), p. 410.
우익만 파시즘에 빠지고 이념적으로 정의와 진보를 내세우는 좌익은 미시 파시즘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좌익도 자주 미시 파시즘에 빠질 것이다. 이념적으로는 좌파를 지향하면서도, 생활 속에서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파시스트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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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모든 미시적인 폭력과 권력까지 파시즘이라고 부른다면, ‘파시즘’ 이라는 말은 너무 무차별적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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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도처에 존재할 뿐 아니라 도처에 생성하는 미시 파시즘을 해부하고 비판하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폭력과 권력에 몸담고 있으면 파시즘적이라고 비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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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폭력이나 권력이 미시적 차원에서 언제든지 파시즘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맞다. 미시적 차원에서 권력을 사랑하고 폭력을 사랑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모두 그 자체로 미시 파시즘인 것일까? 그것들을 모두 미시 파시즘으로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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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 파시즘론은 미시적 권력과 폭력을 모두 미시 파시즘이라고 명명할 뿐 아니라, 미시 파시즘을 그 자체로 파시즘으로 정의한다. 여기서 생기는 혼동과 모호함은 엄청나다.
먼저 ‘파시즘’ 개념의 경우 ‘권력’이나 ‘폭력’의 개념과는 다른 상황에 있다는 데 주의하자. 무엇보다도 ‘권력’ 개념이 서술적이고도 분석적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는 반면에, ‘파시즘’은 그렇지 못하다. 그 개념을 역사적으로 혹은 정치학적으로 사용하자면 그것은 20 세기에 등장했던 정치경제적 권력, 특히 부정적으로 폭력적인 양상을 띤 정치권력을 지칭해야 할 터이다. 곧 1930년대에서 시작해 1945년에 종말을 맞이한 독일의 히틀러 정부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정부. 이 두 정부만이 국가차원에서 파시즘적 권력과 폭력을 행사했을 뿐 아니라, 20세기에 존재했던 다른 독재정권이나 전체주의와 달리, 그 권력의 형성과 발전 과정에서 군중의 참여와 동의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와 달리 독재정권과 전체주의에서는 국가 차원의 군사적이고 억압적 기제가 전면에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얼핏 보면 히틀러 정부와 무솔리니 정부만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는 규정이 협소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파시즘’ 개념은 독재나 전체주의와 구분해서 엄격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고, 그 규정은 상식의 차원에서 접근하기 쉽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미시 파시즘론의 함정-니체의 능동적인 힘을 너무 꺾어버린 들뢰즈
탈현대사상은 어떤 사상보다 니체의 텍스트에 빚을 많이 졌다. 거꾸로 니체 역시 탈현대 사상의 덕을 크게 봤다. 그만큼 이 둘의 관계는 긴밀하고 호혜적이다. 그러나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니체 텍스트에 대한 탈현대적 해석은 여러 가지 점에서 보충되거나 내부적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데리다나 들뢰즈 등이 니체에게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 모색은 되돌아보면 탈코드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 텍스트에는 그 못지않게 가치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보수적 혹은 존재론적 측면도 있으며, 존재론적 힘과 정치적 권력 사이에서도 여러 차원에서 균열과 괴리가 벌어지고 있다. 니체가 강조한 ‘강자’가 새로운 정치를 열어준다고 쉽게 믿기도 힘들다. 그러나 이들 균열과 괴리를 드러내는 것이 무익하거나 해로운 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니체 텍스트를 오늘의 사회의 관점에서 새롭게 읽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적극 참조해야 할 터이다.
니체에 대한 탈현대적 해석을 넘어가기
니체에 대한 탈현대적 해석을 넘어가기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에서는 파시즘을 거시적인 정치적 현상보다는 일상 속의 미시적인 생활양식으로 접근하는 편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관점은 1990년대 전체주의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무언가 폭력적이거나 권위적이거나 집단주의적 요소가 있으면, 개나 소나 죄다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로 몰고 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파시즘 연구자들이 다루지는 않는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파시즘을 '이성에 대항한 반란'으로 보며, 낭만주의와 관념론적 성격에 주목하는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학자들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종주의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주장한 것은 아니라면서, 니체와 파시즘과의 연관성을 세탁하여 변호했다.
미시파시즘은 매우 광범위하고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적용 범위와 구체적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한 미시파시즘은 권력 관계나 억압이 일상적인 차원에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식별하고 분석할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다. 이러한 개념적 모호성 때문에 미시파시즘은 학문적 토론에서 명확한 분석 도구로 사용되기 어려울 수 있다.
또한 미시파시즘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억압적 행동과 권력 관계를 파시즘적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접근은 다양한 억압적 구조나 권력 관계를 모두 '파시즘적'으로 일반화할 위험이 있다. 근본적으로 파시즘은 20세기 초의 역사적 이데올로기이자 정치운동이며, 정치체제이지 인간 심리의 한 영역이 아니다. 파시즘은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정치 체제였는데, 이를 일상적인 권력 관계와 동일시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로 이어질 수 있으며, 파시즘의 역사적 맥락을 무시할 수 있다.
다만 미시파시즘은 20세기 초에 등장한 역사적 정치이데올로기 파시즘을 해석하는 개념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미시파시즘은 전통적인 파시즘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거대한 정치 운동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고, 미시파시즘은 역사적 파시즘을 해석하는 개념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권력 관계 속에서의 파시즘과 비슷한 양상의 논리와 억압을 탐구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즉, 미시파시즘은 1920년대에 탄생한 파시즘의 이데올로기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일상적이고 미세한 차원에서 발생하는 억압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11. 낭만주의 신화, 관념론, 생기론, 행동주의
자세한 내용은 독일 관념론 문서 참고하십시오.파시즘을 일종의 이성에 대항한 반란으로 보는 관점이다.
파시즘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정치, 사회, 문화, 정신적 측면을 거부하고 그 철학적 기반을 공격했으며 자유주의를 대신할 새로운 세계관과 문명의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파시즘은 자유주의의 여러 측면, 그리고 그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인주의, 의회민주주의, 합리주의, 물질주의 모두를 타락과 분열, 대립과 쇠퇴의 원천으로 파악했다.
파시즘은 일차적으로 근대성의 산물이다. 파시즘은 근대성의 산물인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에게 강력한 소속감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 집단을 파괴하려는 모든 경향에 반대한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나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항상 이 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존재 근거를 갖는다. 생래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은 개인주의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은 오로지 가족, 인종,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선적인 존재 가치를 지니며 개인의 자유 역시 이러한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자 파시스트였던 젠틸레Giovanni Gentile의 표현을 빌리면 " '나'의 근저에서 항상 '우리'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조직과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새롭게 창조될 모든 유형의 인간 공동체에도 적대적이다. 파시스트에게 자유주의는 곧 일종의 아나키즘이자 무질서였다.
파시즘은 합리주의 역시 인간 존재의 필수적 전제인 공동체와 조직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합리주의는 19세기를 경과하면서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이 개인의 이성이라고 치켜세웠고, 개인의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공격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인주의적 합리주의는 가족을 파괴하고 조국의 가치를 폄하했으며 인종과 민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인간 공동체는 자연적이며 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초개인적이며 초이성적인 실체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일종의 신비적 실체이며,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끈으로 연결된 그 무엇이다. 이처럼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없는 합리주의는 파시스트에게는 분열적이며 파괴적인 힘으로 비쳤던 것이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본능이며 감정이다. 합리적 태도와 이성적 분석으로는 인간 심성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본능적 욕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파시즘에 의하면, 부분적이며 왜곡된 것이다. 인종이나 민족은 본능으로 연결된 자연적 집단이며, 합리주의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이러한 자연적 집단을 파괴하고 약화시킨다. 인간은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관계 속에서 원천적인 귀속감을 발견하고, 또 산업화와 도시화는 소외된 개인들로 하여금 소속감을 갖게 만든다. 파시즘의 이러한 반(反)합리주의적 경향은 대중을 동원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과학적 사고는 어떤 의미에서는 소수의 전유물이며, 부단한 토론과 논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단합보다는 분열을 낳는다. 대중은 지도자의 신화, 민족의 신화, 폭력의 신화, 혁명의 신화 속에서 단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의회민주주의로는 불가능한 직접적인 정치 참여의 감각을 얻을 수 있다. 파시즘이 다양한 의식, 상징, 속죄양에 대한 폭력, 슬로건 등을 이용하여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반합리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 파시즘은 대중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대표적인 대중주의populism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파시즘에 나타나는 행동주의와 반(反)물질주의 역시 반합리주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합리주의는 부르주아의 가치관이며 상인의 가치관이다. 모든 것을 물질적 이익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이러한 합리주의는 인간을 평범하고 안이한 삶 속에 가두어두며 도덕적·정신적 타락을 초래한다. 이에 비해 파시즘은 활력과 행동을 찬미하며 전투와 투쟁을 중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물질적 이해에 몰두하는 부르주아적 가치관 대신 의무감과 희생 정신, 규율과 용감성, 그리고 집단 의식으로 무장한 영웅적 도덕관을 가져올 것이다.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인간관 및 진보관과 연결되어 있다. 파시스트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거나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보를 믿는 18세기적 진보관에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표현대로 파시즘은 "안이한 삶에 반대하며", 또한 "물질주의적 행복관"을 거부한다. 파시스트가 볼 때 인간의 참된 행복은 '복지'와 동의어가 아니며, 물질적 풍요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는 "인간을 먹고 살찌는 데 만족하는 동물로" 격하시키고 "단순히 식물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불과하다.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행동을 위한 행동, 투쟁을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띤다. 파시스트들은 "삶 그 자체를 하나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또한 파시즘은 이론적 추론에 근거한 닫힌 세계관에 저항하며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이론은 행동에 뒤따르는 것이지 이론이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파시스트에게 삶은 "지속적인 과정이며 끊임없는 생성 그 자체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은 역동성dynamo"이라는 구호를 외친 것도, 대부분의 파시스트들이 스스로를 정당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운동'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행동주의와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은 예측 불가능한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이며 이러한 현실은 오로지 본능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미래파 운동은 쉽사리 파시즘과 연결될 수 있었다. 동시에 파시즘의 이러한 행동주의는 대중사회에 매몰된 개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파악되었고,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은 표현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파시즘이 기본적으로 젊은이의 운동이라는 점 역시 행동주의와 밀접히 관련된다. 파시즘은 낡은 19세기의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저항하는 20세기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새롭고 젊은 운동일 뿐만 아니라 젊음은 무엇보다도 열정과 행동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에게 의회민주주의 체제는 자유주의의 여러 양상, 즉 물질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은 의회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파시스트에게 의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금권 지배 체제이며 인간 사회를 파편화된 개인의 총합으로 여기는 아나키즘이다. 의회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권 쟁탈을 위해 경쟁하는 여러 정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금권과 결탁하며 대중의 의사를 적절히 대변하지 못한다. 파시스트가 볼 때 의회민주주의는 분열의 원동력이며 대중의 욕구를 대변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정치 체제이자 물질주의가 빚어낸 타락과 부패를 의미했다. 또한 의회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엇보다 중시함으로써 외국인의 침투를 초래했으며 이들은 이러한 체제의 보호 아래 민족 속의 민족을 구성하고 정치가를 매수하여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이처럼 파시즘이 계몽주의의 주요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파시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초의 주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로 파악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스테른헬의 견해는 타당성을 지닌다.
김용우, 호모 파시스투스, 28~32p
파시즘은 일차적으로 근대성의 산물이다. 파시즘은 근대성의 산물인 대중사회에서 원자화되고 파편화된 개인에게 강력한 소속감을 부여하려는 시도다. 이런 의미에서 파시즘은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인간 집단을 파괴하려는 모든 경향에 반대한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공동체나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항상 이 공동체와의 연관 속에서 존재 근거를 갖는다. 생래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은 개인주의 이론가들이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에 불과하다. 인간은 오로지 가족, 인종, 민족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우선적인 존재 가치를 지니며 개인의 자유 역시 이러한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지닐 뿐이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관념론 철학자이자 파시스트였던 젠틸레Giovanni Gentile의 표현을 빌리면 " '나'의 근저에서 항상 '우리'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간주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역사적이고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조직과 공동체를 파괴할 뿐 아니라 새롭게 창조될 모든 유형의 인간 공동체에도 적대적이다. 파시스트에게 자유주의는 곧 일종의 아나키즘이자 무질서였다.
파시즘은 합리주의 역시 인간 존재의 필수적 전제인 공동체와 조직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합리주의는 19세기를 경과하면서 개인주의와 결합하여 모든 진리의 판단 기준이 개인의 이성이라고 치켜세웠고, 개인의 이성으로 이해 불가능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가로막는 적으로 간주하고 이를 공격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개인주의적 합리주의는 가족을 파괴하고 조국의 가치를 폄하했으며 인종과 민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그와 같은 인간 공동체는 자연적이며 전통적일 뿐만 아니라 초개인적이며 초이성적인 실체다. 그것은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존재하는 일종의 신비적 실체이며,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끈으로 연결된 그 무엇이다. 이처럼 본능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이해할 수 없는 합리주의는 파시스트에게는 분열적이며 파괴적인 힘으로 비쳤던 것이다.
파시스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다. 인간을 움직이는 힘은 본능이며 감정이다. 합리적 태도와 이성적 분석으로는 인간 심성의 근저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적·본능적 욕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합리주의적 인간관은, 파시즘에 의하면, 부분적이며 왜곡된 것이다. 인종이나 민족은 본능으로 연결된 자연적 집단이며, 합리주의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이러한 자연적 집단을 파괴하고 약화시킨다. 인간은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관계 속에서 원천적인 귀속감을 발견하고, 또 산업화와 도시화는 소외된 개인들로 하여금 소속감을 갖게 만든다. 파시즘의 이러한 반(反)합리주의적 경향은 대중을 동원하는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과학적 사고는 어떤 의미에서는 소수의 전유물이며, 부단한 토론과 논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단합보다는 분열을 낳는다. 대중은 지도자의 신화, 민족의 신화, 폭력의 신화, 혁명의 신화 속에서 단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의회민주주의로는 불가능한 직접적인 정치 참여의 감각을 얻을 수 있다. 파시즘이 다양한 의식, 상징, 속죄양에 대한 폭력, 슬로건 등을 이용하여 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반합리주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점에서 파시즘은 대중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대표적인 대중주의populism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파시즘에 나타나는 행동주의와 반(反)물질주의 역시 반합리주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파시스트 이데올로기에 의하면 합리주의는 부르주아의 가치관이며 상인의 가치관이다. 모든 것을 물질적 이익과 관련지어 생각하는 이러한 합리주의는 인간을 평범하고 안이한 삶 속에 가두어두며 도덕적·정신적 타락을 초래한다. 이에 비해 파시즘은 활력과 행동을 찬미하며 전투와 투쟁을 중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의 물질적 이해에 몰두하는 부르주아적 가치관 대신 의무감과 희생 정신, 규율과 용감성, 그리고 집단 의식으로 무장한 영웅적 도덕관을 가져올 것이다.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인간관 및 진보관과 연결되어 있다. 파시스트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거나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보를 믿는 18세기적 진보관에 회의적이었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표현대로 파시즘은 "안이한 삶에 반대하며", 또한 "물질주의적 행복관"을 거부한다. 파시스트가 볼 때 인간의 참된 행복은 '복지'와 동의어가 아니며, 물질적 풍요에서 행복을 찾는 태도는 "인간을 먹고 살찌는 데 만족하는 동물로" 격하시키고 "단순히 식물적인 존재로" 만드는 데 불과하다.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점에서 파시즘의 행동주의는 행동을 위한 행동, 투쟁을 위한 투쟁의 성격을 띤다. 파시스트들은 "삶 그 자체를 하나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또한 파시즘은 이론적 추론에 근거한 닫힌 세계관에 저항하며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이론은 행동에 뒤따르는 것이지 이론이 행동을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파시스트에게 삶은 "지속적인 과정이며 끊임없는 생성 그 자체다." 무솔리니가 "파시즘은 역동성dynamo"이라는 구호를 외친 것도, 대부분의 파시스트들이 스스로를 정당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운동'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행동주의와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은 예측 불가능한 끊임없는 창조의 과정이며 이러한 현실은 오로지 본능적인 방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의 미래파 운동은 쉽사리 파시즘과 연결될 수 있었다. 동시에 파시즘의 이러한 행동주의는 대중사회에 매몰된 개인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수단으로 파악되었고,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은 표현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아울러 파시즘이 기본적으로 젊은이의 운동이라는 점 역시 행동주의와 밀접히 관련된다. 파시즘은 낡은 19세기의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저항하는 20세기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새롭고 젊은 운동일 뿐만 아니라 젊음은 무엇보다도 열정과 행동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파시스트에게 의회민주주의 체제는 자유주의의 여러 양상, 즉 물질주의, 합리주의, 개인주의가, 정치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파시즘은 의회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파시스트에게 의회민주주의는 부르주아의 금권 지배 체제이며 인간 사회를 파편화된 개인의 총합으로 여기는 아나키즘이다. 의회민주주의 체제 아래에서 정권 쟁탈을 위해 경쟁하는 여러 정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금권과 결탁하며 대중의 의사를 적절히 대변하지 못한다. 파시스트가 볼 때 의회민주주의는 분열의 원동력이며 대중의 욕구를 대변하지 못하는 피상적인 정치 체제이자 물질주의가 빚어낸 타락과 부패를 의미했다. 또한 의회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무엇보다 중시함으로써 외국인의 침투를 초래했으며 이들은 이러한 체제의 보호 아래 민족 속의 민족을 구성하고 정치가를 매수하여 민족의 힘을 약화시키고 파괴한다.
이처럼 파시즘이 계몽주의의 주요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서 파시즘을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초의 주요한 표현 가운데 하나'로 파악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스테른헬의 견해는 타당성을 지닌다.
김용우, 호모 파시스투스, 28~32p
독일 관념론과 관련있는 낭만주의는 자연을 숭배하고 이성을 배척하면서 직관과 감성을 중시했으며, 민족문화에 관심을 가지거나 영웅주의적 성향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며, 예술가의 천재성으로 대중의 평범함을 상쇄하고자 했다.
계몽주의가 이성과 철학의 시대라고 한다면 낭만주의는 감성과 신화의 시대이 다. 낭만주의 사상가들이 추구한 신화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중세 유럽의 기독교 국가였다. 계몽주의는 보편적인 반유대주의에 일상화되어 있었던 근대 유럽인들에게 변화를 촉구하였으나, 칸트와 같은 계몽주의의 대변자조차도 반유대주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낭만주의는 로마-가톨릭 교회와 중세문학의 부활을 도모하면서 독일 민족주의의 출현을 자극하였다. 계몽주의와 낭만주의 모두 당시 독일의 유대인들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없었다. 독일이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았을 때, 독일의 낭만주의는 민족주의에 기초한 정치적 낭만주의라는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나가고 있었다. 피히테와 슐레겔과 노발리스가 독일정신의 기원을 고대 그리스의 신화정신이나 중세 기독교의 국가에서 발굴하려고 시도하면서, 낭만주의자들의 신화적 지향성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칸트가 제기한 정치적 최고선의 이상 요청은 낭만주의자들에 의한 문화적 세계정부의 현실 요청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이성보편주의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가 일상화된 것처럼, 보편의지의 국가 실현이라는 낭만주의적 기획에서도 전체주의와 반유대주의의 기운은 여전히 생동적이다. 피히테의 보호무역국가, 노발리스의 중세유럽국가, 슐레겔의 세계단일국가 개념은 정치적 삶에 대한 유기체 이론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낭만주의자들에게 국가는 “거룩한 신비”로 인식되었다. 낭만주의적 힘은 바로 공통의 언어, 의사소통, 가치를 기반으로 한 이 거룩한 신비의 파괴력에 있으며, 이로써 파시즘은 ‘낭만주의의 후예’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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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는 서구 세계의 삶과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광범위한 근대의 운동이다. 유럽에서 가장 뒤쳐졌던 독일인들의 굴욕감과 자존심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사물의 불변적 구조나 본성 대신에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의지가 최우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신화의 가치를 존중하여 최고의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와 같은 강력한 의지적 주체는 개인을 넘어서서 민족, 국가 등 공동체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낭만주의는 20세기 신화이론의 가장 풍부한 원천이 되면서, ‘전체주의 국가’ 개념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카시러는 낭만주의자들의 전체주의적 견해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순수 문화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열렬한 국가주의자로서 비타협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제국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주의가 세계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독일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거나 시, 예술, 종교, 역사 등의 문화형식들을 ‘전체주의’ 국가에 희생시켜도 좋다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프랑스혁명에 감화를 받았지만 1806년의 나폴레옹 침공 이후 프랑스의 국가철학에 반대하였다. 그는 한 민족국가의 진정한 가치는 군사력보다는 도덕과 문화의 저력에 있으며, 미래의 독일 국가는 권력국가(Machtstaat)보다는 자유의 나라(Reich der Freiheit)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민족국가를 폐쇄적인 보호무역국가로 기획함으로써 칸트의 세계보편주의와 루소의 일반의지를 적용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결과적으로 파시즘과 같이 왜곡된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지적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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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가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과 중세 유럽국가의 신화는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세계정부를 이상으로 열망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국민의 신성성 또는 보편의지가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국가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고심한 결과 새로운 유럽의 부활을 견인할 수 있는 이성국가로서 독일의 민족국가 내지는 독일정신을 강조했을 것이다. 물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전체주의 국가의 건설을 의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서 리하르트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슈미트에 이르는 독일 근대사상의 뒤안길에 전체주의에 대한 세찬 요구가 잇달았으며, 그 반작용으로 반유대주의의 정서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칸트의 이성주의에서조차도 유대적인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피히테의 도덕적 세계질서와 보호무역국가 조차도 유대인의 자유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발리스의 마술적 관념론과 시적 국가론, 슐레겔의 세계단일정부론 역시 유럽의 로마 가톨릭 신앙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비중으로 유대인들의 자유가 보장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낭만주의의 신화 해석: 문화적 정치신학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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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는 서구 세계의 삶과 사고를 근본적으로 바꾼 가장 광범위한 근대의 운동이다. 유럽에서 가장 뒤쳐졌던 독일인들의 굴욕감과 자존심은 프랑스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부터 낭만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사물의 불변적 구조나 본성 대신에 세계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인간의 의지가 최우선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신화의 가치를 존중하여 최고의 지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와 같은 강력한 의지적 주체는 개인을 넘어서서 민족, 국가 등 공동체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낭만주의는 20세기 신화이론의 가장 풍부한 원천이 되면서, ‘전체주의 국가’ 개념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되었다는 입장도 있다. 그러나 카시러는 낭만주의자들의 전체주의적 견해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순수 문화적인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낭만주의자들이 열렬한 국가주의자로서 비타협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제국주의자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국가주의가 세계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독일의 고유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강요하거나 시, 예술, 종교, 역사 등의 문화형식들을 ‘전체주의’ 국가에 희생시켜도 좋다고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프랑스혁명에 감화를 받았지만 1806년의 나폴레옹 침공 이후 프랑스의 국가철학에 반대하였다. 그는 한 민족국가의 진정한 가치는 군사력보다는 도덕과 문화의 저력에 있으며, 미래의 독일 국가는 권력국가(Machtstaat)보다는 자유의 나라(Reich der Freiheit)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자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독일 민족국가를 폐쇄적인 보호무역국가로 기획함으로써 칸트의 세계보편주의와 루소의 일반의지를 적용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피히테의 민족주의는 결과적으로 파시즘과 같이 왜곡된 형태로 전개되었다는 지적들이 나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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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가 추구했던 고대 그리스 문명과 중세 유럽국가의 신화는 개인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세계정부를 이상으로 열망하였다. 그것은 동시에 국민의 신성성 또는 보편의지가 완전하게 실현될 수 있는 국가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고심한 결과 새로운 유럽의 부활을 견인할 수 있는 이성국가로서 독일의 민족국가 내지는 독일정신을 강조했을 것이다. 물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나 초기 낭만주의자들이 전체주의 국가의 건설을 의도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를 거쳐서 리하르트 바그너, 프리드리히 니체, 카를 슈미트에 이르는 독일 근대사상의 뒤안길에 전체주의에 대한 세찬 요구가 잇달았으며, 그 반작용으로 반유대주의의 정서가 한층 더 강화되었다는 사실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칸트의 이성주의에서조차도 유대적인 것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피히테의 도덕적 세계질서와 보호무역국가 조차도 유대인의 자유를 배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노발리스의 마술적 관념론과 시적 국가론, 슐레겔의 세계단일정부론 역시 유럽의 로마 가톨릭 신앙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와 같은 비중으로 유대인들의 자유가 보장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낭만주의의 신화 해석: 문화적 정치신학의 기원
또한 미래주의의 본능과 폭력에 대한 미학적 태도는 파시즘에도 영향을 미쳤다. 파시즘은 논리에 기반하여 이론을 전개한 사상이기 보다는, 장황하고 현학적이지만 살펴보면 무의미한 문구들과 슬로건들을 남발하는 연설로 청중들을 열광시켰다.[5][6] 파시스트들은 이론적 사상가라기보다는 감성충만한 시인에 가까웠다. 단눈치오와 마리네티는 진짜로 예술가 시인이었으며, 단눈치오는 피우메를 점령하여 '음악 공화국'을 다스렸었다.
독일 관념론에서는 이마누엘 칸트의 이성비판과 반유대주의 등이 파시즘과 연관성이 지적되며, 피히테가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독일 민족에게 고함을 통하여 민족주의적 주장을 하였다.
헤겔은 국가를 인륜적 실체로 보았으며, 헤겔의 국가관에 의하면, 개인과 시민들이 모여 만든 개별국가들의 민족정신은 세계정신에게 심판을 받으며, 시대정신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는 절대정신의 자기 실현과정에서 세계사에 의하여 일종의 세계법정처럼 심판받는다. 이러한 헤겔의 세계관은 특정한 나라의 민족정신이 다른 나라의 민족정신에 비하여 우월하다고 볼 수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의지는 인간 행동의 실질적인 추진력이며, 모든 현상은 목적이나 목표가 없이 단지 살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세계와 그 모든 현상은 사실상 의지가 외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도 낭만주의 음악가이다. 독일 민족주의 신화와 관련된 음악들을 만들었으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졌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에서 반유대적 성격과 민주주의 비판, 초인사상, '위대한 정치' 이론에서 위계적 질서와 지배하기에 적합한 자에 대한 언급, 하나의 유럽 등이 거론된다.#1 #2 니체 본인은 인종주의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지만, 나치가 유대인들의 철학을 배격하고 독일의 영웅정신을 내세우면서 니체철학을 많이 차용하였다. 니체의 철학은 논리에 기반하기보다 시적 예술에 가깝다고 비판받는다.
니체는 철학사에서 대표적인 반 민주주의자로 소개된다. 니체가 민주주의 체제하의 시민을 ‘천민’, ‘떼거리’로 칭하며, ‘민주주의적’이라는 말을 ‘천민적’, ‘획일화’, ‘균등화’와 동의어로 본다는 사실, 그리고 민주주의가 위계질서의 해체와 ‘위대한 개인’의 몰락을 초래시킨 주범임을 폭로한다는 점, 그리고 민주주의란 병적 징후인 데카당스의 산물임을 거듭 강조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우리는 그를 ‘반 민주주의자’로 규정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니체의 ‘주인 종’(Herrenrasse), ‘금발의 야수’(Blonde Bestie), ‘사육’ (Züchtung) 그리고 ‘위대한 정치’(Große Politik) 등의 개념을 차용한 ‘국가사회주의’의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폐해를 생각하면 니체는 인권을 핵심 이념으로 삼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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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니체는 귀족제가 가진 기본적 특징을 ‘위계’와 ‘거리의 파토스’로 설명하고, 귀족제적 가치관의 부활이 과다한 평등주의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귀족주의의 긍정적 면만을 보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전개된 귀족주의는 니체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정치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귀족주의가 타락하여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것을 교정할 어떤 장치도 없게 되어 부패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수많은 유혈 혁명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귀족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도 매우 취약했다. 니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귀족제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셋째, 민주주의의 과도한 평등주의가 초래한 문제들을 치유할 대안으로 니체가 제시한 ‘위대한 정치’는 정치 이론으로서 너무 추상적이고, 애매하며, 소박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물론 니체는 ‘위대한 정치’가 현실 정치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정치, 즉 가치관들 사이의 전쟁으로 규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거리의 파토스’를 체현하고 ‘위계’를 확립하는 정신적 귀족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가? 비록 니체가 위대한 정치와 위대한 예술의 공속성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말하지만 위대한 가치를 실현할 정신적 귀족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록 가능하더라도 그들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니체는 정치를 미학화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니체의 민주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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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니체는 귀족제가 가진 기본적 특징을 ‘위계’와 ‘거리의 파토스’로 설명하고, 귀족제적 가치관의 부활이 과다한 평등주의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니체는 귀족주의의 긍정적 면만을 보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역사 속에서 전개된 귀족주의는 니체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적인 정치형태와는 거리가 멀다. 귀족주의가 타락하여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그것을 교정할 어떤 장치도 없게 되어 부패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의 권력을 박탈하기 위해 수많은 유혈 혁명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또한 귀족주의는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데도 매우 취약했다. 니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귀족제의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인류의 지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셋째, 민주주의의 과도한 평등주의가 초래한 문제들을 치유할 대안으로 니체가 제시한 ‘위대한 정치’는 정치 이론으로서 너무 추상적이고, 애매하며, 소박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물론 니체는 ‘위대한 정치’가 현실 정치라기보다는 보다 근본적 의미에서 정치, 즉 가치관들 사이의 전쟁으로 규정했지만, 그가 말하는 ‘거리의 파토스’를 체현하고 ‘위계’를 확립하는 정신적 귀족이 과연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가? 비록 니체가 위대한 정치와 위대한 예술의 공속성을 언급함으로써 그것의 실현 가능성을 말하지만 위대한 가치를 실현할 정신적 귀족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비록 가능하더라도 그들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니체는 정치를 미학화했다는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
니체의 민주주의 비판
특히 20세기는 노동자의 전문성과 지방자치성(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이 맞물린 시기로, 파시즘의 지적 시조중의 하나인 조르주 소렐과 같은 혁명적 조합주의자들은 노동조합의 정치적 중립성(노동조합은 어느 정치적 성향을 강제해서는 안된다.)과 총파업이라는 이름의 신화[7]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대중혁명만을 통한' 사회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이들은 정치에서의 비합리성(의지, 직감력, 감정, 폭력, 신화)을 내세웠으며 이성에 의한 합리주의를 비판했다.
혁명주의자들은 협력주의에 반발하면서 정치에서의 비합리성(의지 직감력, 폭력, 신화)을 중요시하는 최신의 사상적 경향들의 영향을 받았다. 혁명주의자들 중에서도 조합주의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는데, 이들은 총파업을 감행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소유한 노동자들의 기업조합 또는 노동조합을 건설하기를 원했다.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261p
크리스토퍼 듀건, 미완의 통일 이탈리아사 261p
노동계급의 독자성을 확립하려는 이러한 소렐의 노력은 그의 사상에 보기 드문 독창성을 부여했다. 그가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열렬한 옹호자이자 이론가로 부상하게 된 것은 거기서 노동계급의 도덕적, 제도적 독자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사회주의의 전체 미래는 노동자 생디카의 독자적 발전에 달려 있다” 아울러 그의 사상에서 보이는 반합리주의적 경향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정통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적 요소를 비판하고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헤겔의 변증법을 거부한 것은 미래에 대한 합리적인 예상과 전망이 결과적으로는 노동계급의 혁명성을 퇴화시키고 부르주아지의 지적, 제도적 망 속으로 포섭되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소렐이 드레퓌스 사건 이후 제3공화정의 의회민주주의와 장 조레스(Jean Jaurès)식의 의회사회주의, 혹은 그의 표현처럼 “정치적 사회주의”를 비난한 것 또한 노동계급의 부르주아화에 대한 우려의 산물이었다. 아울러 소렐이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에 기반한 낙관주의적 진보관을 “진보의 환상”으로 공격하고 영웅주의적 페시미즘의 복구를 역설한 근본적인 이유는 합리주의적 진보관이 부르주아지의 지배 논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 체제를 사상적으로 미화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소렐의 수정주의에서 나타나는 반합리주의, 반민주주의, 행동주의, 페시미즘, 노동자의 도덕성에 대한 강조, 그리고 혁명적 생디칼리슴 등은 그가 계급투쟁을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정신으로 확립하는 한편 그러한 계급투쟁의 전제로서 노동 계급의 독자성을 확보하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이에 근거한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는 소렐의 마르크스주의에서 하부구조보다는 상부구조를 중요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그에게 있어 노동계급의 통일성은 의식적, 심리적 측면에서 확보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적 통일성은 무엇보다도 생산자, 창조자로서의 노동계급이 갖는 독자적 도덕성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계급투쟁 역시 하부구조의 모순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급투쟁은 의식적, 심리적 영역에서 촉발되어야 하고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소렐이 볼 때 정통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은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이차적이며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그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심리적 측면은 전반적으로 당대의 철학 운동에 초연해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어왔다. 마르크스의 시대의 독일인들은 심리학을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소렐의 유명한 신화이론은 이러한 그의 마르크스주의 수정이 도달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소렐이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폭력에 대한 성찰』의 저자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총파업의 신화이론이며 그의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적 측면들은 이 신화이론에 집약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신화이론을 통하여 소렐은 정통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경제결정론, 과학적 합리성 및 목적론적 경향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렐에게 있어서 신화는 노동자를 곧바로 투쟁에 가담할 수 있게 만들고 ‘직접적인 행동(action directe)’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신화는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신화는 “이미지의 체계(systèmes d'images)”로서 그 구성요소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총체, 또는 “블록(bloc)”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자신의 대의명분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으로 자신의 행동을 전투의 이미지로 상상하면서 거대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렐은 자신의 신화 개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신화와 유토피아를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신화가 의지의 표현이라면 유토피아는 추상적인 지적 산물이다. 즉 신화가 “결정적인 전투에 가담하도록 하는 인민 대중의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으로서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의지의 표현”이라면 유토피아는 “이론가들이 사실을 관찰하고 검토한 다음 하나의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현 사회와 비교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상상적인 제도를 조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둘째, 신화가 기존의 사회를 파괴하려는 전투에 직접 가담하도록 만드는 반면 유토피아는 현 사회 제도를 고치는 개량주의를 낳는다. 소렐의 주장에 의하면 신화의 대표적인 예들은 “원시 그리스도교,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마찌니의 운동에 의해 구성된” 신화들이며 무엇보다도 “생디칼리스트의 총파업, 마르크스의 파국적 혁명론”이다.
소렐이 볼 때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동안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소렐이 목표한 바는 신화이론을 통해 이러한 유토피아적 요소를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거하는 일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측면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엥겔스가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실증주의 또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하찮은 과학(petit science)”에 의존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소렐이 볼 때 핵심 문제는 그러한 추상적 이성에 의해 분석되지 않는 직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신화이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를 즉각적으로 투쟁에 이끄는 일이었다.
이처럼 소렐의 신화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현재의 투쟁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어떠한 목적론적인 경향도 배제한다.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체계적 전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논리는 소렐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소렐의 손에 의해 계급투쟁을 유발하는 상징으로서,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된 것이다. 현실에 대한 합리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사회주의 사회 도래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한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소렐에 의해 오로지 현재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이끄는 심리적이고 본능적인 힘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이 가져올 미래 사회는 현재의 시점에서 전망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게 되었다. 미래 사회는 오로지 노동자들의 혁명적 행동으로 개척되어야 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며 끊임없이 열린 공간으로 남아 있다. 소렐은 비코의 인식론에 근거하여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장차 도래할 사회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역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소렐의 고민은 노동자의 총파업을 어떻게 조직하고 또 그것을 통해 건설할 미래 사회의 구체적인 측면을 예측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유토피아주의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렐이 볼 때 혁명운동은 미리 결정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으며 더욱이 과학적 방식으로 연구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혁명운동에 관한 모든 것은 예측불가능하다” 또한 “역사가 제시하는 모델에 기반하여···투쟁의 성격과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방법에 대한 가설을 구성하려는 노력은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낡은 수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렐에게 있어 총파업의 신화는 현재의 행동을 유발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소렐은 아래에서 자신의 총파업 신화 이론을 요약하고 있다.
신화는 사회주의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즉 신화는 현대 세계에 맞서 사회주의가 전개한 다양한 전쟁들에서 표출된 모든 감정들을 본능적으로 촉발할 수 있는 이미지의 결합체이다. 총파업은 프롤레타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심오하며 또 강력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총파업은 파업 집단에 통일된 이미지를 부여하며 이들을 통합시킴으로써 그와 같은 감정들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격상시킨다. 특정 투쟁에 대한 매우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총파업의 신화는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의 세부 전체에 강력한 색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언어로는 도저히 명료하게 묘사할 수 없는 사회주의의 본능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김용우, 민족주의, 파시즘과 조르쥬 소렐
노동계급의 독자성과 이에 근거한 계급투쟁에 대한 강조는 소렐의 마르크스주의에서 하부구조보다는 상부구조를 중요시하는 경향을 낳았다. 그에게 있어 노동계급의 통일성은 의식적, 심리적 측면에서 확보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의식적 통일성은 무엇보다도 생산자, 창조자로서의 노동계급이 갖는 독자적 도덕성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계급투쟁 역시 하부구조의 모순에서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계급투쟁은 의식적, 심리적 영역에서 촉발되어야 하고 도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소렐이 볼 때 정통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은 이러한 요소들을 무시하거나 이차적이며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데 그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러한 심리적 측면은 전반적으로 당대의 철학 운동에 초연해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어왔다. 마르크스의 시대의 독일인들은 심리학을 거의 연구하지 않았다.”
소렐의 유명한 신화이론은 이러한 그의 마르크스주의 수정이 도달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소렐이 혁명적 생디칼리슴의 이론가로서 그리고 『폭력에 대한 성찰』의 저자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총파업의 신화이론이며 그의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주의가 함축하고 있는 다양한 사상적 측면들은 이 신화이론에 집약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신화이론을 통하여 소렐은 정통마르크스주의에서 나타나는 경제결정론, 과학적 합리성 및 목적론적 경향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소렐에게 있어서 신화는 노동자를 곧바로 투쟁에 가담할 수 있게 만들고 ‘직접적인 행동(action directe)’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신화는 합리적 사고와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심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신화는 “이미지의 체계(systèmes d'images)”로서 그 구성요소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총체, 또는 “블록(bloc)”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신화는 “자신의 대의명분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으로 자신의 행동을 전투의 이미지로 상상하면서 거대한 사회 운동에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렐은 자신의 신화 개념을 명백히 하기 위해 신화와 유토피아를 날카롭게 대비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첫째, 신화가 의지의 표현이라면 유토피아는 추상적인 지적 산물이다. 즉 신화가 “결정적인 전투에 가담하도록 하는 인민 대중의 행동과 감정, 그리고 생각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으로서 “사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의지의 표현”이라면 유토피아는 “이론가들이 사실을 관찰하고 검토한 다음 하나의 모델을 구성하고 이를 현 사회와 비교하려는 시도의 산물이며” 따라서 그것은 “상상적인 제도를 조직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둘째, 신화가 기존의 사회를 파괴하려는 전투에 직접 가담하도록 만드는 반면 유토피아는 현 사회 제도를 고치는 개량주의를 낳는다. 소렐의 주장에 의하면 신화의 대표적인 예들은 “원시 그리스도교,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마찌니의 운동에 의해 구성된” 신화들이며 무엇보다도 “생디칼리스트의 총파업, 마르크스의 파국적 혁명론”이다.
소렐이 볼 때 마르크스주의는 오랜 동안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소렐이 목표한 바는 신화이론을 통해 이러한 유토피아적 요소를 마르크스주의에서 제거하는 일이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합리적 측면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에게 있어서 엥겔스가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실증주의 또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하찮은 과학(petit science)”에 의존해 마르크스의 사상을 도식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으며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 요인이었다. 그러므로 소렐이 볼 때 핵심 문제는 그러한 추상적 이성에 의해 분석되지 않는 직관적이고 심리적인 현상으로서의 신화이론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자본가에 맞서 노동자를 즉각적으로 투쟁에 이끄는 일이었다.
이처럼 소렐의 신화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현재의 투쟁 수단으로 만듦으로써 어떠한 목적론적인 경향도 배제한다.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체계적 전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논리는 소렐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소렐의 손에 의해 계급투쟁을 유발하는 상징으로서, 달리 말하면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하나의 신화가 된 것이다. 현실에 대한 합리적 분석을 토대로 하여 사회주의 사회 도래의 필연성을 입증하려 한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는 소렐에 의해 오로지 현재 이 시점에서 노동자들을 혁명적 행동으로 이끄는 심리적이고 본능적인 힘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이 가져올 미래 사회는 현재의 시점에서 전망하는 것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게 되었다. 미래 사회는 오로지 노동자들의 혁명적 행동으로 개척되어야 할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이며 끊임없이 열린 공간으로 남아 있다. 소렐은 비코의 인식론에 근거하여 인간은 인간이 창조한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장차 도래할 사회는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 존재하는 영역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소렐의 고민은 노동자의 총파업을 어떻게 조직하고 또 그것을 통해 건설할 미래 사회의 구체적인 측면을 예측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것은 유토피아주의의 오류를 저지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소렐이 볼 때 혁명운동은 미리 결정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으며 더욱이 과학적 방식으로 연구될 수 없는 것이다. 즉 “혁명운동에 관한 모든 것은 예측불가능하다” 또한 “역사가 제시하는 모델에 기반하여···투쟁의 성격과 자본주의를 억압하는 방법에 대한 가설을 구성하려는 노력은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낡은 수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렐에게 있어 총파업의 신화는 현재의 행동을 유발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소렐은 아래에서 자신의 총파업 신화 이론을 요약하고 있다.
신화는 사회주의의 모든 것을 포괄한다. 즉 신화는 현대 세계에 맞서 사회주의가 전개한 다양한 전쟁들에서 표출된 모든 감정들을 본능적으로 촉발할 수 있는 이미지의 결합체이다. 총파업은 프롤레타리아가 보유하고 있는 가장 고귀하고 심오하며 또 강력한 감정을 유발시킨다. 총파업은 파업 집단에 통일된 이미지를 부여하며 이들을 통합시킴으로써 그와 같은 감정들을 가장 강렬한 형태로 격상시킨다. 특정 투쟁에 대한 매우 생생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이러한 총파업의 신화는 프롤레타리아의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의 세부 전체에 강력한 색채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언어로는 도저히 명료하게 묘사할 수 없는 사회주의의 본능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김용우, 민족주의, 파시즘과 조르쥬 소렐
프루동 서클이 소렐을 극찬하면서 수용하고자 하는 부분은 소렐 사상의 어떠한 측면이었던가? 《회보》의 기고자들은 소렐의 총파업의 신화 이론, 노동자의 폭력과 영웅주의, 생산자의 도덕, 유토피아에 대한 거부와 반합리주의, 반민주주의와 반자유주의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모라스의 사상과 소렐 사상을 결합하고자 했던 프루동 서클에게는 소렐 사상이 대단히 개방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 그의 생디칼리슴이 자본가의 즉각적인 폐지보다는 자본가의 활력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한 점이 가장 큰 호소력을 지녔다.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운명론적·경제결정론적 입장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합리적 측면이 제거되는 결과를 낳았다. 소렐은 사회주의 사회의 필연적 도래를 예측하는, 이른바 18세기 이래의 '진보에 대한 환상'이 노동 운동의 침체를 초래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에 흡수되는 부르주아화의 주 원인임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소렐은 미래 사회에 대한 합리적 예언을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보고 이를 거부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계급 투쟁의 철학으로 해석했다. 소렐에게 마르크스주의는 합리적 방법으로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정신적·이념적으로 철저한 분리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전개하는 투쟁의 철학이었다. 따라서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자본가의 타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갱생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확고하게 할 뿐 아니라 인도주의에 의해 쇠약해진 유럽의 여러 민족들에게 이전에 지녔던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자본주의를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역할에만 전념하게 만들며 이전의 전투적 성격을 회복하게 한다. 성장하고 있으며 굳건히 조직된 노동 계급은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열성적으로 산업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만약 혁명적이고 단합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유하고 정복에 굶주린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투쟁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조르주 소렐, Réflexions sur la violence(Paris: Marcel Rivière, 1946), 10th ed, 120쪽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머리의 철학이 아니라 손의 철학"으로 수정함으로써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소렐의 시도는, 한편으로는 강건한 부르주아지를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사회를 어떠한 합리적 전망도 무의미한, 열린 가능성으로 남겨놓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김용우, 호모 파시스투스, 135~136p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운명론적·경제결정론적 입장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탄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합리적 측면이 제거되는 결과를 낳았다. 소렐은 사회주의 사회의 필연적 도래를 예측하는, 이른바 18세기 이래의 '진보에 대한 환상'이 노동 운동의 침체를 초래하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이데올로기와 제도에 흡수되는 부르주아화의 주 원인임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소렐은 미래 사회에 대한 합리적 예언을 유토피아적 환상으로 보고 이를 거부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를 오로지 계급 투쟁의 철학으로 해석했다. 소렐에게 마르크스주의는 합리적 방법으로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가 정신적·이념적으로 철저한 분리를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전개하는 투쟁의 철학이었다. 따라서 소렐의 혁명적 생디칼리슴은 자본가의 타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갱생을 필요로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폭력은 미래의 혁명을 확고하게 할 뿐 아니라 인도주의에 의해 쇠약해진 유럽의 여러 민족들에게 이전에 지녔던 활력을 되찾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 될 것이다. 이러한 폭력은 자본주의를 오로지 자신의 물질적 역할에만 전념하게 만들며 이전의 전투적 성격을 회복하게 한다. 성장하고 있으며 굳건히 조직된 노동 계급은 자본가 계급으로 하여금 열성적으로 산업 전쟁에 참여하도록 만든다. 만약 혁명적이고 단합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부유하고 정복에 굶주린 부르주아 계급에 맞서 투쟁한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 완성에 도달할 것이다.
조르주 소렐, Réflexions sur la violence(Paris: Marcel Rivière, 1946), 10th ed, 120쪽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를 "머리의 철학이 아니라 손의 철학"으로 수정함으로써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소렐의 시도는, 한편으로는 강건한 부르주아지를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가올 미래사회를 어떠한 합리적 전망도 무의미한, 열린 가능성으로 남겨놓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김용우, 호모 파시스투스, 135~136p
이러한 관점은 아주 재미난 함의를 가지는데, 통속적으로는 파시즘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라 인식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초가 바로 파시즘이란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은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도, 민족주의에 기반한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민족마다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이, "언어 게임"들이 있고, 그것을 침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파시스트들이 자기네들과 다른 민족보다 민족끼리 섞이는 것을 더욱 싫어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각기 다른 민족들의 고유성을 주장하며 그것들을 침범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보편주의를 전체주의적이라면서 비판하는 것과 상당한 유사점을 나타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반목하는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에 있다.
12. 정치 종교
정치종교는 마르크스주의가 역사발전의 필연으로 공산주의의 승리라는 구원을 믿는 점에서 종교에 가깝다는 지적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도그마에 빠진 교조주의 광신도 종교인처럼 행동해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했는데, 파시즘에도 적용되었다.파시즘은 민족을 신성시하는 세속화된 정치적 종교 라고 보는 입장이다. 에밀리오 젠틸레(Emilio Gentile)가 파시즘은 정치의 신성화라고 주장하였다.Fascism as political religion
이 시대는 정치적으로 유럽에서 고전적인 의회민주주의가 퇴조하고,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그리고 러시아의 스탈린주의와 같은 이른바 전체주의 체제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미 1930년대 오스트리아의 정치 철학자 에릭 푀겔린(Eric Voegelin)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독재체제들이 발휘한 대중적 흡인력과 대중적 지지에 기초한 역동성을 응집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정치종교’ 개념을 이론적으로 차용하였다.
...
‘정치종교’ 개념으로써 강조되는 것은 전체주의적인 체제들이 “정치의 신성화”(에밀리오 젠틸레)를 통해, 다시 말해 국가, 민족, 계급, 인종 등 여러 형태로 상상된 정치공동체의 신격화 및 역사, 혁명, 자유 등 정치적 이념의 절대화, 그리고 신화와 상징 및 정치적 숭배(cult)와 의례를 통해 대중을 체제 내로 통합시켰고 스스로를 적법화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개념은(심지어는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전체주의 체제가 자행한 폭력과 테러의 근저에 놓인 종교적 모티브와 이것의 대중적 호소력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
본격적인 비교사 연구를 위해 이 개념은 보다 세밀한 범주들로 유형화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획일성과 강력한 연대를 갖는 우애회적(fraternalist) 종교, 비교적 느슨하고 관용적인 민족 형성(nation building)의 종교, 그리고 공산주의적 정치종교라는 폴 브루커(Paul Brooker)가 시도한 정치종교의 세 가지 유형화는 하나의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종교를 전적으로 양 차 세계대전기에 나타난 전체주의 체제에 고유한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이 수정되어야 한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정치종교를 “대중의 국민화/민족화”(조지 모스)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정치적 숭배(cult)와 애국주의적인 도덕으로 이해한다면 정치종교야말로 모든 근대민족국가와 민족주의 운동을 위한 정치적 통합 요소로 기능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한 정치종교들의 공통분모는(몇몇 경우를 제외한다면) 민족주의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독재와 정치종교 : 독일 나치즘과 일본 파시즘의 상징의 정치#
...
‘정치종교’ 개념으로써 강조되는 것은 전체주의적인 체제들이 “정치의 신성화”(에밀리오 젠틸레)를 통해, 다시 말해 국가, 민족, 계급, 인종 등 여러 형태로 상상된 정치공동체의 신격화 및 역사, 혁명, 자유 등 정치적 이념의 절대화, 그리고 신화와 상징 및 정치적 숭배(cult)와 의례를 통해 대중을 체제 내로 통합시켰고 스스로를 적법화 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개념은(심지어는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에 이르기까지) 전체주의 체제가 자행한 폭력과 테러의 근저에 놓인 종교적 모티브와 이것의 대중적 호소력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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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비교사 연구를 위해 이 개념은 보다 세밀한 범주들로 유형화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획일성과 강력한 연대를 갖는 우애회적(fraternalist) 종교, 비교적 느슨하고 관용적인 민족 형성(nation building)의 종교, 그리고 공산주의적 정치종교라는 폴 브루커(Paul Brooker)가 시도한 정치종교의 세 가지 유형화는 하나의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종교를 전적으로 양 차 세계대전기에 나타난 전체주의 체제에 고유한 현상으로 파악하려는 시각이 수정되어야 한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 정치종교를 “대중의 국민화/민족화”(조지 모스)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정치적 숭배(cult)와 애국주의적인 도덕으로 이해한다면 정치종교야말로 모든 근대민족국가와 민족주의 운동을 위한 정치적 통합 요소로 기능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다양한 정치종교들의 공통분모는(몇몇 경우를 제외한다면) 민족주의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독재와 정치종교 : 독일 나치즘과 일본 파시즘의 상징의 정치#
괴벨스와 히틀러는 그들이 보기에 기독교가 독일 민족에 끼친 악영향 역시 마찬가지로 유대적 영향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는 기독교가 독일 민족의 도덕과 태도를 망쳐놓았다고 생각했고, 히틀러에게도 기독교의 영상은 점점 더 그의 총체적인 적의 영상, 즉 유대인과 혼합되어 갔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세계 지배도" 반대하려 했다는 것이다. 히틀러는 1937년 2월 22일 '교회 문제 회담' 중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했다. 괴벨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오래전 자신의 작품 《미하엘》에서 밝힌 적이 있었다. 히틀러는 계속해서 "기독교 내부의 유대인" 바울이 이 가르침을 "조작하여" 고대 로마를 무너뜨렸다고 말했다.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분열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사이비 사제들의 절멸"을 계획했다. 이렇게 종교에 대한 최후 투쟁의 시기가 개막되었으나, 나중에 전쟁 초기에 '휴전 상태'로 접어들었다.
아무튼 1937년 당시 제국종교협약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도 탄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반공 노선 때문에 처음에는 나치 정권을 환영했던 가톨릭교회도 나치가 로젠베르크를 통해 계속 교회 내부 사안에 개입하는 데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파셀리 로마 교황청 국무장관이 교회와 관련한 특수한 이해관계뿐 아니라 나치의 강권 통치 자체에 대해서 독일 정부와 외교문서를 교환하였다. 평소 이 정권에 그리 비판적이 아니었던 파셀리는 이러한 외교 문서 중 하나에서 교황은 오늘날 독일에서 어느 정도로 자기 결정권이 제한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서 이 문제의 시정을 요구했다.
가톨릭 성직자와 관련한 괴벨스와 히틀러의 주요 체험은 1937년 1월 30일 일어났다. 히틀러는 권력 획득 4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내각 내 '비당원'을 입당시키고 이들에게 황금 당원 배지를 수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교통우편장관 엘츠뤼베나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엘츠는 입당을 거부하면서, 나치당이 교회를 탄압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었고, '총통 각하'의 해명을 요구했다. 모두가 얼어붙은 듯했다. 사람들은 "마비된 것처럼" 서 있었다. 히틀러는 분통을 터뜨리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그 방을 박차고 나갔다. 괴벨스는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그러한 심각한 무례함"에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은 장관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단합하여 엘츠의 해임을 요청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이내 관철시켰다. "이들은 검은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조국 위에서 더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축복을 독점하는 교회." 어쨌든 내각은 "이렇게 몰래 기어드는 위험"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되었나. 그날 저녁 그는 "몹시 격분한" 히틀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연민에 차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같이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937년 3월 21일 부활절 직전 일요일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 내 모든 가톨릭 성당의 설교단에서 자신의 교서 《심각한 우려를 품고》를 낭독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들은 설교의 내용은 실제로 매우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었다. 이날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교구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국가 형태나 국가 권력의 담지자나 그밖에 다른 인간 사회의 형성의 기본 가치들(이들은 세속적 질서 내에서 본질적이고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을 그들의 세속적 가치 등급으로부터 떼어내 종교적 가치를 위해서도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이를 우상 숭배로 떠받드는 자들은 신이 창조하고 명령한 사물의 질서를 전복하고 위조하는 것이다.
《깊은 근심과 함께》 1937년 3월 21일
이러한 발언은 나치즘을 기독교 대신 종교의 위치로 밀어 올리려는 괴벨스에게는 이단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가 "예언자", "우상", "메시아"여야 하며, 과거 사도들이 그랬듯이 민족은 그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괴벨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를 "기적"과 "징표"와 연관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1937년 제국 전당대회 도중 '총통 각하'가 연단에 올라서는 어느 순간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장면을 관찰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괴벨스는 개인적으로 전당 대회를 "장엄 미사"로 느꼈는데, "거의 종교적 제식"인 돌격대 사열이 이를 "무한히 신비로운 마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기독교의 신이 있는 성당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나치의 신에게 올리는 미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괴벨스가 상황 악화를 원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부터 3월 20일 저녁 늦게 교황 교서의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이러한 '도발'에 대해 '분노와 원한'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때 기독교의 신을 독실하게 신봉했던 괴벨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행사하는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벨스는 하이드리히에게 "이를 무시하고 죽은 듯이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체포 조치 대신 "경제적 압력"으로 대응해야 했으며, 비오 11세의 교서를 인쇄한 모든 성당 관보들은 압수, 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외에 괴벨스는 "침착성을 잃지 말고, 그 도발자들을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모토에 충실했다.
히틀러에게는 다음날까지 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이 일 때문에 밤새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괴벨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술적 이유'에서 교회 탈퇴를 금지했던 히틀러는 일단 '침묵' 전술을 승인했으나, 점점 "과격화"되어 갔다. 3월 2일 괴벨스는 사제들이 "참을성과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제 바티칸을 치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그 '사제들'은 "우리의 준엄함, 강경함, 무자비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541~544p
아무튼 1937년 당시 제국종교협약에도 불구하고 성직자들도 탄압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반공 노선 때문에 처음에는 나치 정권을 환영했던 가톨릭교회도 나치가 로젠베르크를 통해 계속 교회 내부 사안에 개입하는 데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훗날 교황 비오 12세가 되는 파셀리 로마 교황청 국무장관이 교회와 관련한 특수한 이해관계뿐 아니라 나치의 강권 통치 자체에 대해서 독일 정부와 외교문서를 교환하였다. 평소 이 정권에 그리 비판적이 아니었던 파셀리는 이러한 외교 문서 중 하나에서 교황은 오늘날 독일에서 어느 정도로 자기 결정권이 제한되어 있는지를 알고 있다면서 이 문제의 시정을 요구했다.
가톨릭 성직자와 관련한 괴벨스와 히틀러의 주요 체험은 1937년 1월 30일 일어났다. 히틀러는 권력 획득 4주년 기념일을 계기로 내각 내 '비당원'을 입당시키고 이들에게 황금 당원 배지를 수여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교통우편장관 엘츠뤼베나흐의 차례가 되었을 때,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엘츠는 입당을 거부하면서, 나치당이 교회를 탄압하고 있음을 그 이유로 들었고, '총통 각하'의 해명을 요구했다. 모두가 얼어붙은 듯했다. 사람들은 "마비된 것처럼" 서 있었다. 히틀러는 분통을 터뜨리며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고 그 방을 박차고 나갔다. 괴벨스는 곧바로 행동에 돌입했다. 그는 "그러한 심각한 무례함"에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은 장관들을 불러 모아, "우리가 단합하여 엘츠의 해임을 요청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이내 관철시켰다. "이들은 검은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 조국 위에서 더 높은 권력을 지니고 있다. 축복을 독점하는 교회." 어쨌든 내각은 "이렇게 몰래 기어드는 위험"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게 되었나. 그날 저녁 그는 "몹시 격분한" 히틀러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고, 연민에 차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와 같이 선량한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1937년 3월 21일 부활절 직전 일요일 교황 비오 11세는 독일 내 모든 가톨릭 성당의 설교단에서 자신의 교서 《심각한 우려를 품고》를 낭독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들은 설교의 내용은 실제로 매우 적절하게 표현된 것이었다. 이날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교구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했다.
인종이나 민족이나 국가나 국가 형태나 국가 권력의 담지자나 그밖에 다른 인간 사회의 형성의 기본 가치들(이들은 세속적 질서 내에서 본질적이고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을 그들의 세속적 가치 등급으로부터 떼어내 종교적 가치를 위해서도 최고의 규범으로 삼고 이를 우상 숭배로 떠받드는 자들은 신이 창조하고 명령한 사물의 질서를 전복하고 위조하는 것이다.
《깊은 근심과 함께》 1937년 3월 21일
이러한 발언은 나치즘을 기독교 대신 종교의 위치로 밀어 올리려는 괴벨스에게는 이단의 목소리로 들렸다.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가 "예언자", "우상", "메시아"여야 하며, 과거 사도들이 그랬듯이 민족은 그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괴벨스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히틀러를 "기적"과 "징표"와 연관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1937년 제국 전당대회 도중 '총통 각하'가 연단에 올라서는 어느 순간 태양이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장면을 관찰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확고히 하려고 노력했다. 괴벨스는 개인적으로 전당 대회를 "장엄 미사"로 느꼈는데, "거의 종교적 제식"인 돌격대 사열이 이를 "무한히 신비로운 마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기독교의 신이 있는 성당이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나치의 신에게 올리는 미사가 진행되는 것이다.
괴벨스가 상황 악화를 원하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로부터 3월 20일 저녁 늦게 교황 교서의 내용을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이러한 '도발'에 대해 '분노와 원한'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한때 기독교의 신을 독실하게 신봉했던 괴벨스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교회가 신자들에게 행사하는 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벨스는 하이드리히에게 "이를 무시하고 죽은 듯이 있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체포 조치 대신 "경제적 압력"으로 대응해야 했으며, 비오 11세의 교서를 인쇄한 모든 성당 관보들은 압수, 정간 처분을 받았다. 그외에 괴벨스는 "침착성을 잃지 말고, 그 도발자들을 해치울 수 있는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모토에 충실했다.
히틀러에게는 다음날까지 이 소식을 전달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이 일 때문에 밤새 노여워하지 않도록" 하려는 뜻이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히틀러는 처음에는 마찬가지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괴벨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술적 이유'에서 교회 탈퇴를 금지했던 히틀러는 일단 '침묵' 전술을 승인했으나, 점점 "과격화"되어 갔다. 3월 2일 괴벨스는 사제들이 "참을성과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히틀러는 "이제 바티칸을 치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그 '사제들'은 "우리의 준엄함, 강경함, 무자비함을 맛보게 될 것이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541~544p
13. 부정론(기회주의, 허무주의)
파시즘이라는 이념이나 일관된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파시즘이란 무엇인가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파시즘은 그저 권력 획득을 위한 방법론에 불과했으며, 파시즘이 무엇을 추구한게 아니라, 무언가에 반대하는 운동이었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자면, 파시즘은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념이면서,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이념이었다고 규정하는 것이다.부정론은 두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모든 것을 반대하며 파괴하려는 허무주의로 해석하는 관점은 주로 파시즘의 극좌적 성격에 주목하고, 집권을 위해 전통적 보수세력과 타협하는 등 무엇이든지 하는 기회주의로 해석하는 관점은 파시즘의 극우적 성격에 주목한다.
부정론에 대립하는 이론으로 일반적 파시즘 이론(합의파 이론)이 있는데, 파시즘이라는 이념적 실체가 존재한다고 보고, 파시즘의 최소치와 최대치를 규정하여, 어디서부터 파시즘이며, 어디까지가 파시즘인지를 규정하려 하였다.
14. 합의파 이론/일반적 파시즘 이론
새로운 합의란 90년대 로저 그리핀(Roger Griffin)이라는 영국의 정치학자를 중심으로 형성된 파시즘 분석 이론을 가르키는 말이다. 새로운 합의에서는 파시즘에서 나타나는 신화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그리핀은 파시즘의 이런 신화적인 면을 "재생적 국수주의"[8] 라고 표현 했는데 몰락의 길을 걷는 민족 공동체가 머지 않아 탈자유주의적인 질서 속에서 새롭게 부활하게 되리라는 신화적인 믿음에 근거한 극단적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특정한 정치 이념, 운동 등이 여러 환경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을 파시즘이라고 규정하기 위해선 이런 신화적인 특징이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몰락하는 민족을 구원하고자 하는 새로운 엘리트는 극단적인 행위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신화적인 서사를 이용하여 대중을 동원한다.[9]조르주 소렐 이론의 신화란 인간의 감정적인 직관으로만 포착될 수 있으며 그것이 맞느냐 틀리냐는 합리적 추론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이 간극에서 온갖 신화가 탄생한다. 소렐에 의하면 인간은 이런 사실 판단 여부에서 벗어난 것을 믿고싶어 하는 비합리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 신화는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인간 상상력을 장악하고 감정을 자극하여 행동에 나서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소렐에 의하면 신화는 대중의 정서와 감정을 자극하여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선동하여 행동에 나서게 한다.[10]
새로운 합의에서는 이런 신화 이론을 파시즘을 정의하기 위한 최소 요건으로 삼음으로써 파시즘이 체계적인 이념이라는 입장과 파시즘은 실체없는 주장과 구호들의 집합체라는 주장 모두를 거부한다.
쇠락하는 민족이 새롭게 부활하리라는 신화적인 주장은 파시스트들이 민족을 하나의 유기체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민족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공동의 운명을 가지며, 유기체의 부분을 이루는 각 구성원은 사사로운 개인의 삶을 버리고 민족에 스스로를 바쳐야 하며 그래야만 개인의 한계를 초월한 더 높은 실체의 일부가 되어 인정 받을 수 있다. 이점에서 파시즘은 자유주의, 다원주의 등과 양립할 수 없는 국수주의적인 형태를 가진다. 파시스트들의 민족 구원의 신화에선 민족 공동체의 부흥을 위한 합당한 구성원과 그렇지 않는 구성원이 구분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주장을 밀어붙인다. 파시즘 정권에서 자유주의, 개인주의, 마르크스주의, 유대인, 성소수자, 장애인들이 민족 퇴폐의 주범으로 낙인 찍혀 탄압을 받은 것은 이러한 민족 공동체의 신화에서 비롯된 것이다.[11]
파시스트들은 열등한 민족에 대한 탄압을 자행할 뿐만 아니라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 파시스트적 신인류를 만들어 내길 원한다. 신인류는 자유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기존의 인간과는 달리 민족의 구원에 대한 헌신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린다. 1차대전의 참화 속에서 기존 세속사회의 계급 차이를 넘어 민족을 위해 단결하여 폭력으로 조국을 구하고자 했던 인간 처럼 좌파와 우파,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같은 구분이 없이 민족을 위해 헌신하는 제3의 인간형이다. 공동체의 적을 제거하고 신인간을 창조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는 파시스트 민족 신화는 파시즘에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인 특징을 지니게 한다. 이 과정을 위해 파시스트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면에서 인간의 삶을 통제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전체주의적인 수단과 권력을 공공연히 주장하며 자랑스럽게 내세운다.[12] 이 과정에서 계급 정체성이 사라지고 민족 공동체에 대한 신화만 남으므르 파시즘은 다양한 직업 집단과 모든 사회 계급을 아우르는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13]
파시즘은 변화를 위한 급진적인 해결책을 원하므로 필연적으로 혁명적인 성격을 가진다. 파시즘은 역사를 뒤로 돌리고자 하는 단순한 반동세력과는 다르며, 현상 유지를 원하는 자유주의, 보수주의 세력과도 궤를 달리한다. 파시즘은 분명 일종의 근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주의 같은 근대 이념은 부정했지만 근대의 기본적인 자본주의적인 체제와 과학같은 물질적인 성과는 긍정했다는 점에서 "반동적 근대주의(reactionary modernism)"라고 규정될 수도 있다.[14] 파시즘의 이러한 극단적인 융합은 파시스트의 민족 공동체 신화를 위해서 방해되는 것은 모조리 파괴하려 한다는 점에서 능동적 허무주의의 일종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15] 이 점에서 합의파는 파시즘을 기존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를 모두 거부하고 민족공동체의 재탄생을 통해 실현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제3의 위치의 일종으로 분석하고 있다.[16]
15. 우르파시즘
우르파시즘은 여전히 우리 주위를 배회하고 있으며, 때로는 사복을 입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나는 아우슈비츠를 다시 열고 싶어, 검은 셔츠단이 다시 이탈리아 광장을 행진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다닌다면 쉬운 일일 것이다. 삶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르파시즘은 가장 무해한 가면을 쓰고서 되돌아올 수 있다. 우리의 의무는 날마다 세계 어디서든 새로이 등장하는 파시즘을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이다.
— 움베로토 에코, 우르 파시즘 #
움베르토 에코는 파시즘이 단일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몇가지 특징적 요소를 중심으로 응축되는 유기적인 사상이라고 주장한다. 아래의 모든 특징을 충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에세이 우르파시즘(ur-fascism)은[17] 그 특징을 다음 14가지로 나열한다.— 움베로토 에코, 우르 파시즘 #
1. 전통 숭배
파시스트의 전통 문화는 배타적이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신비로운 과거의 역사를 파헤치고 경외하기 위해 온갖 이론과 오컬트 등을 이용하는 것엔 관용적인 극도로 모순적이고 혼합주의적인 특징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파시스트들이 원하는 사실은 이미 잠들어 있는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해석으로 어떠한 지식을 얻을 수도 없으며, 모호한 해석만이 이어질 뿐이다. 율리우스 에볼라가 이 방면에서 악명이 높다.
2. 근대성의 부정
일반적으로 전통주의자들은 과학 기술이 전통적 정신을 해친다고 생각해서 부정적으로 보지만, 과거 나치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은 과학기술을 숭배했다. 이처럼 계몽주의의 유산인 자유주의, 합리주의, 인권 등은 부정하나 그것의 물질적인 산물인 과학과 생산력 등을 긍정하는 것을 반동적 근대주의라고 한다.
3. 행동을 위한 행동 숭배
행동은 지적인 성찰이 있기 전에 이루어져야 하며, 생각은 거세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에코는 이러한 특징이 비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와 연계되어 있다고 한다.
4. 비동의는 반역이다.
비판적 사고는 차이를 만들며, 차이는 근대성의 징후이다. 현대 과학계에서 비동의는 지적 분석과 지식을 향상시키는 방법으로서 존중된다. 파시스트는 비판적 사고가 파시즘의 부조리와 모순을 폭로시킬 것을 두려워 하여 이를 반역죄로 탄압한다.
5. 다름에 대한 공포
파시스트는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를 이용하고 악화시켜 포퓰리즘적인 동의를 이끌어낸다. 공동체 내외부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선동이 대표적이다.
6. 좌절한 계층에 대한 호소
역사적으로 파시즘의 가장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좌절한 중간 계급을 향한 호소였다. 옛 프롤레타리아가 쁘띠 부르주아가 되고 있는 오늘날, 미래의 파시즘은 새로운 다수로 부터 지지세력을 얻고자 할 것이다.
7. 음모론에 대한 집착
뚜렷한 사회적 정체성을 박탈당한 이들에게 파시스트는 일종의 민족주의에 기반한 소속감을 부여한다. 파시스트가 민족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은 국가의 적이다. 따라서 파시스트 사고의 뿌리에는 국제적인 음모에 대한 집착이 있다. 추종자들은 포위당하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나치의 유대인 음모론과, 오늘날 온갖 음모론을 혼합시킨 QAnon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8. 적은 강하면서 약하다.
파시스트는 추종자들의 굴욕감과 원한을 선동하기 위해 강하고 사악한 적을 상정하지만, 그들은 결국 인민의 압도적인 의지에 패배할 것이다. 즉 파시스트 레토릭에서 적들은 강하지만 약하기도 한것이다.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유대인은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초월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유전적 결함을 가진 열등인간이었다.
9. 평화주의는 이적행위다.
파시즘 논리에선 투쟁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며 삶이 곧 투쟁을 위한 것이다. 여기엔 모순이 존재한다. 파시스트들은 민족의 궁극적인 승리를 위하여 영원한 전쟁을 부르짖으나, 최종적으로 승리한다면 적들이 사라짐으로써 영원한 평화가 도래해야 한다. 파시스트들은 이런 모순논리를 해결하지 않는다.
10. 약함에 대한 경멸
파시즘은 대중적 엘리트주의를 주장한다. 모든 시민은 세계에서 가장 우월한 민족이며 당원은 시민들 중에서도 우월하다. 지도자는 자신의 권력이 민주적으로 위임된 것이 아닌 대중의 약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며 대중이 지배 받아야 하는 무력한 존재라 생각한다. 집단은 군사적인 위계질서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상관은 그들의 부하를 멸시한다. 이런식으로 대중적 엘리트주의가 강화된다.
11. 영웅을 위한 교육
모든 신화에서 영웅이란 예외적인 존재이지만, 파시스트는 영웅주의를 일반적 규범으로 만든다. 이 영웅주의에 대한 숭배는 죽음에 대한 숭배와 이어진다. 파시스트는 영웅적인 삶에 대한 최고의 보상으로 선전된 영웅적인 죽음(카미카제 같은)을 갈망한다.
12. 남성성 숭배
영원한 전쟁과 영웅주의는 어려운 일이기에 파시스트는 자신의 권력욕을 성적인 문제로 이전한다. 여성에 대한 업신여김 그리고 동정에서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비표준적인 성적 특징에 대한 비난과 편협함 등이 있다.
13. 선택적 포퓰리즘
민주사회에서 시민은 개인의 권리를 갖지만 양적인 수치에 의해서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에게 개인은 개인으로서의 선천적인 권리가 없으며, 민중은 공통의 의지를 가진 단일체로 여겨진다. 대중은 만장일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는 자신이 민중의 의지의 옳은 해석자임을 자처한다. 여기서 민중이라는 표현은 그저 정치적 쇼에 불과하다. 파시스트는 이 방식으로 기존 기관이 민중의 의지를 대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민주적 기관의 파괴를 정당화한다.
14. 신어
파시스트는 비판적 사고를 억제하기 위해 빈약한 어휘를 사용하고 언어를 통제한다.
[1] 조지 오웰이 이런 말하길. 지금 사회에서의 파시즘은 개새끼와 동의어다."라고 했었다.[2] 심지어 파시즘이라는 말의 오남용 때문에 '파시스트가 아니다'라는 말이 마치 '옹호'처럼 오해되는 부작용까지 일어나고 있다. 가령 로버트 팩스턴 등이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파시스트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프랑코에 대한 옹호인 건 결코 아니다. 프랑코의 폭력성은 정통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를 가볍게 뛰어넘기 때문이다. 같은 원리로, 일제를 파시즘 국가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일제에 대한 옹호는 결코 아니다.[3] 개인 단위의 자유가 아닌 (1차대전 승전국의) 외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4] 전체주의란 표현도 무솔리니의 이러한 정의에서 시작되었다.[5] 이는 당시 마리네티를 위시로 하는 미래주의가 그 당시 쓰이던 언어마저 반동적으로 규정하며 그당시 쓰이던 비유법등을 해체하자고 선언했던 사조였기 때문이다.[6] 다만 그렇게 현 언어체계조차도 반동적이라 비판했지만, 미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시나 선언문에서도 종교, 신적인 존재를 과거에도 유구하게 쓰이던 '별'이라는 말을 주구창장 썼었다.[7] 말 그대로 신화이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면 그것을 통해 총파업 사회혁명을 이루어 지방자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소렐은 자신의 저서에서 신화라는 것을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다고 말한 바 있다, 즉 총파업이든 폭력이든 오직 대중의 자발적인 추동을 이끌 수만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이론은 매우 나로드니키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8] 다Palingenetic는 다시를 뜻하는 그리스어 palin와 탄생을 의미하는 genesis의 합성어[9] Roger Griffin, "Revolution from the Right : Fascism," in David Parker, ed., Revolutions and Revolutionary Tradition in the West 1560-1989(London : Rout-ledge, 1999), p. 187.[10] David Gross, "Myth and Symbol in Georges Sorel," in Seymour Drescher, David Sabean, Allan Sharlin, eds., Political Symbolism in Modern Europe. Essays in Honor of George L. Mosse(New Brunswick : Transacion, 1982), pp. 100-117.[11] Jeremy Noakes, "Social Outcasts in the Third Reich," in Richard Bessel, ed., Life in the Third Reich(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87), pp. 83-96.[12] Benito Mussolini, The Doctrine of Fascism(Firenze : Vallecchi, 1938), p. 14.[13] Detlet Mühlberger, Hitler's Followers. Studies in the Sociology of the Nazi Movement(London : Routledge, 1911), p. 202.[14] Marshall Berman, L'Esperienza della Modernita(bologna : II Mulino, 1985), p. 26, Emilio Gentile, "The Conquest of Modernity : From Modernist Nationalism to Fascism," Modernism/Modernity 1(1993), p. 58[15] Roger Griffin, The Nature of Fascism, p. 47.[16] Zeev Sternhell, Naissance de l'Ideologie Fasciste, p. 11 ; George L. Mosse, The Fascist Revolution, pp. 7-11.[17] 혹은 영원한 파시즘(Eternal Fascism), 한국에선 원형 파시즘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