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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토머스 칼라일 Thomas Carlyle | |
출생 | 1795년 12월 4일 |
영국 스코틀랜드 에클페찬[1] | |
사망 | 1881년 2월 5일 (향년 85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역사학자, 작가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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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철학자, 사학자 및 비평가로 이름을 남겼다.2. 학문과 사상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 형식, 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경험론 철학과 공리주의에 도전했다. 또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를 비판하며 개인보다 공동체와 사회, 그리고 엘리트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회유기체설을 주장했고, 이에 기반한 신헤겔주의적 자유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에든버러 대학교 명예총장이었으며, 유명한 저서로는 《영웅숭배론》, 《프랑스 혁명》 등이 있다. 전기 작가로는 프리드리히 대왕과 올리버 크롬웰을 다룬 책도 알려져 있다.그는 개인적으로 딱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적 회의주의와 자유주의에 기반해 영적인 믿음이 해체되는 추세에는 반감을 느껴 과거와는 다른 방식의 합리적인 영적 믿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위에서 나온 대자연과 상징-의복 철학이 이러한 종교학적 사유의 결과로 나온 이론들이다.
그는 매우 엘리트주의적이고 엘리트와 대중의 상호 의무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주의적인 사회를 바랐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영웅들은 마땅히 숭배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중세 시대의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에 이러한 영웅들, 그러니까 엘리트 계급이 위치해야 한다. 엘리트 계급은 현실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며 사회를 진보시키며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한편 대중을 보살피면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러한 사상의 일환으로, 칼라일은 모든 대중에게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교육받고 도덕적인 엘리트적 귀족 계급에 의해 지배받고 엘리트와 민중이 상호의 의무를 다하는 유기적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사회가 건설될때 개인은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논리를 펼쳤다. 19세기 후반부터 유행한 신헤겔주의적 자유주의는 그가 주장한 '의무가 잘 수행되는 집단적 사회 안에서 개인은 가장 자유롭다'는 이론에 기반해 있고, 당대의 한국이나 일본 등 여러 신생국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자유방임주의를 모든 것을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도록 놔두는 '음울한 과학'이라며 혐오했으며, 노동계급을 구원하는 한편 국가와 사회에 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산업의 영웅'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도 도덕적 지성을 갖춘 이들이 '노동의 기사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역사가 점점 쇠퇴하고 있다고 보았으며, 문명은 죽음과 재탄생을 거치며 순환한다고 보았다. 영웅사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역사를 쇄신할 위대한 지도자를 바라는 마음에서 탄생한 것이다.
역사학자로써 역사가 몇명의 영웅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들을 중심으로 연구하는 영웅사관을 19세기 동안 널리 퍼트린 장본인이다. 이런 영웅사관은 20세기에 허버트 스펜서에게 비판받을 때까지 '대중적으로' 주요 역사학 조류로 받아들여졌지만, 학문적으로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역사주의나 휘그 사관[2], 이후에는 과학적 역사학을 표방하는 마르크스주의 사관에 의해 신비주의적이고 비합리주의적이라며 비판받았다.
이러한 보수적이고 집단주의적 사고로 인해, 1,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선구자라고 지목되어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3. 비판
영웅사관과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심지어 우월한 인간들이 더 열등한 인간을 보호하는 노예제도가 자유방임주의보다 훨씬 낫다고 주장해, 존 스튜어트 밀 같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반대로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미국 남부인들로부터는 말그대로 영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또 인종차별과 반유대주의로도 당대부터 이미 악명이 높았다. 근대 자유주의와 산업자본주의를 혐오하고 엘리트 귀족 계급을 추종한 칼라일은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저택이 웰링턴 공작과 같은 영웅적 엘리트 계급들이 거주하는 집과 거의 비슷한 높이를 가졌다는 것을 보고 매우 분노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이 로스차일드 같은 '도둑'[3]들을 싸그리 청소해버려야 한다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자본이 밀집한 하운드스디치(Houndsditch) 거리와 같은 곳들을 거론하며 '냄새나고, 인류의 부와 진보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사는 곳'으로 표현했으며, 반대로 자신과 같은 앵글로-색슨계 영국인들에 대해서는 '용감하고 진실하며 인류를 진보로 인도하는 노르드인'으로 표현하며 대놓고 인종주의적, 범게르만주의적 사고를 드러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 나치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 독일에 그의 작품이 알려진 이래 독일 지성계에서 칼라일은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원회귀론이나 위버맨쉬 이론에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으며, 인종주의나 범게르만주의적 사고, 영웅주의, 집단주의, 반자유주의적 사상은 독일 극우세력에게 흡수되어 나치로 이어진다.
4. 인용구
일반인들에겐 그의 이름이나 작품보다도 "셰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혹은 인도는 포기할 수 있으나 셰익스피어는 포기할 수 없다.)" 란 말로 유명하며, 이 유명한 구절은 바로 《영웅숭배론》에 나온다. 하지만 이는 매우 와전된 것으로, 원 문장은 다음과 같다.'Indian Empire will go, at any rate, some day; but this Shakspeare does not go, he lasts forever with us.'
(직역)-'인도 제국은 어쨌든 사라지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실제로 인도는 1947년 인도 자치령, 1950년 인도 공화국 성립으로 독립했지만 셰익스피어는 영어가 소멸하지 않는 한 영국의 유산으로 남아있을 것이니 맞는 말을 한 셈이다.(직역)-'인도 제국은 어쨌든 사라지겠지만, 셰익스피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5. 일화
- 《프랑스 혁명》[4]이란 작품을 쓸 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그리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도 수년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스 혁명》이란 책의 초고를 완성했다. 그리고 친구이자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보내 이 방대한 양의 원고의 감수를 맡겼는데, 밀이 자리를 비운 사이 하녀가 그 원고를 쓰레기인 줄 알고 몽땅 불태워 버리고 말았다. 친구 밀에게 이 사건을 전해 들은 칼라일은, 물론 심정이야 증오의 말로 책 한권을 가득 채워도 분이 풀리지 않았겠지만, 그를 너그럽게 용서하는 편지를 보내고, 새로이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다. |
3년이 지난 후 1837년, 마침내 완성된 프랑스 혁명을 선보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져 성공하게 되었다는 얘기이다.
- 악필인 것으로 유명해 관련 일화가 있다.
"젠장! 팔자 한번 사납군! 이 인간 원고 피하려고 런던까지 도망쳤는데!"||
위의 <프랑스 혁명> 일화와 연결하면, 밀의 하녀는 칼라일의 악필을 보고 도저히 원고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쓰레기로 여긴 걸 수도 있다.
[1] #[2]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휘그 사관의 크롬웰에 대한 적극적인 긍정적 평가는 칼라일이 크롬웰을 나폴레옹에 비견되는 근대적 혁명가로 칭송한 것에서 영감을 얻었다[3]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금융업, 고리대금업을 하는 이들을 일하지 않고 돈을 강탈하는 도둑이라며 비난했다. 중세주의자였던 칼라일은 이 레파토리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4] 찰스 디킨스는 1859년 11월에 쓴 프랑스대혁명을 다룬 작품 《두 도시 이야기》의 저자 서문에서 "칼라일의 훌륭한 책이 보여준 철학에 뭔가를 더 보태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시절을 이해하는 데 쓰이는 대중적이고 생생한 매체들에는 뭔가를 보태고 싶었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