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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2001 시즌
투수 이대호 |
경남고를 졸업하고 2001년 롯데 자이언츠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그 해 롯데의 1차 지명은 부산고 추신수가 받았지만, 추신수는 미국으로 건너가 마이너리그를 거친 후 2005년에 메이저리거가 되었다. 추신수의 미국행에 대해서는 당시 롯데 자이언츠 구단의 섭섭한 대우 및 턱없이 낮게 부른 계약금 때문에 여러가지 실망이 겹쳐 내린 선택이라고 하는 설도 있으나, 당시 롯데 자이언츠가 그렇게 막장은 아니었으며 시애틀 매리너스의 계약금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자세한 것은 추신수 문서 참조.
당시 롯데 앞에는 신생 팀 SK 와이번스가 2차 1순위 우선 지명권 3장을 들고 있었는데, 이대호를 거르고 택한 선수가 투수 김희걸, 조형식[1], 내야수 김동건. 이들 중 1군에서 많이 뛴 선수는 투수 김희걸뿐이다.[2]
롯데 자이언츠에 투수로 지명받아 입단했으나 덩치에 비해 구속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구속이 더 떨어지게 되자 타자로 전향했다. 당시 우용득 2군 감독이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타자 전향을 추진했다고 한다.[3] 김명성 감독은 이대호를 투수로 기용할 것이라며 처음에는 타자 전향을 반대했지만 이후 다른 코치들도 이대호의 유연한 타격 폼과 비거리를 보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대호의 타자 전향을 줄기차게 요청했고, 결국 김명성 감독이 승인해서 타자로 전향하기로 했다. 김명성 감독 모르게 타격 훈련을 해왔던 이대호도 무척 기뻐했다고. #관련기사 타자 전향 훈련을 받을 당시에는 2군에서 주로 하위 타선에 배치되었다.
타자로 전향 중이던 그가 1군으로 처음 올라온 계기는 바로 펠릭스 호세. 시즌 막바지인 2001년 9월 18일, 펠릭스 호세가 마산 삼성전에서 소위 참교육 사건을 저지르며 잔여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아 시즌을 마감했고, 이에 우용득 감독 대행이 호세를 1군에서 말소한 후 이대호를 1군으로 처음 불러들였다. 고로 이대호는 호세 때문에 1군에 데뷔하게 된 것이고, 둘 다 롯데 역사의 한 획을 쓴 거포라는 점에서 기묘한 인연이다.
타자 전향 초창기. 이 때 등번호를 64번에서 49번으로 바꾸었다. |
이대호는 호세의 참교육 사건이 터진 다음 날인 2001년 9월 19일 1군에 처음 등록되어 대타로 1군에 데뷔했고, 다음 날 경기에서는 1군 데뷔 첫 안타를 신고했다. 두 경기 모두 마산에서 열렸고, 상대한 팀은 삼성 라이온즈였다. 그래서인지 2022년 이대호의 은퇴 투어 당시 마산에 새롭게 정착한 팀 NC 다이노스는 롯데와의 경기 전에 이대호의 1군 첫걸음이 시작된 곳이 마산이라고 언급하면서 추억을 담은 기록지와 홈 플레이트를 이대호에게 증정하였고, 이대호의 1군 첫 상대 팀 삼성 라이온즈는 포수 마스크를 쓴 이대호 피규어를 은퇴 투어 때 이대호에게 증정했다.
이대호는 2001년 1군 6경기에 출장하여 8타수 4안타 1타점 5할 타율을 선보였지만 애시당초 땜빵으로 콜업된 거라서 더 많은 기회를 받지 못했고, 그래서 시작은 미약했다. 같은 해 입단하여 신인왕을 차지한 동갑내기 우타자 김태균과 달리, 이대호는 관중들과 감독에게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다.
3. 2002 시즌
2002년 데뷔 첫 끝내기 홈런을 치고 난 뒤 |
가뜩이나 팀이 영 좋지 못했던 상황에서 그에게 본격적인 결정타를 가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2002년 시즌 중 자신을 적극적으로 밀어 줘던 우용득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것. 시즌 중반 15연패를 당하며 팀 성적이 나락으로 추락하자, 결국 정식 감독 취임 후 반년만에 옷을 벗게 된 것.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도 이대호의 재능을 알아 보는 눈은 있었는지 취임식 때 이대호가 힘이 좋고 스윙이 부드럽다고 칭찬하며 거포로 키우겠다고 선언하면서 체중을 지적하며 좋은 타자가 되기 위해서는 살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위해 그에게 지시한 것이 쪼그려뛰기[5] 및 사직 야구장 스탠드를 오리걸음으로 오르내리기. 이런 무식한 훈련을 수행당한 이대호는 당연히 무릎 부상을 당했고, 그 후 계속 재활 치료를 해야 했다. 이 때 부상으로 운동량이 떨어지고 실의에 빠진 이대호는 술과 야식, 그리고 쿵쿵따 놀이[6]로 세월을 보내 지금과 같이 30kg 정도 체중이 불었다 한다. 여기에는 자신과 같은 부류인 최준석과 열심히 야식을 먹은 것도 컸다고.[7][8]
그래도 1군 74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278에 8홈런 32타점을 기록해 신인 2년차 + 타자전향 2년차 치고는 공격진에서는 무난한 성적을 거뒀다.[9]
4. 2003 시즌
무릎 부상 때문에 6월에 합류하며 1군 54경기 출장에 그쳤다. 타격 성적은 타율 .243 4홈런 13타점으로 홈런과 타점이 반토막났다. 그럼에도 유망주로서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고, 오프 시즌에 몇몇 구단이 이대호를 탐내기도 했다.
이 해가 이대호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WRC+가 100 미만이 시즌이다.(85.9)
5. 2004 시즌
사진은 2004년[10] 당시 갈매기 마당의 모습. 페레즈, 박기혁 등 추억의 이름들이 보인다. |
이 시기 이대호는 강민호만큼이나 갈마 아재들에게 미친 듯이 까였다. 저 때까지만해도 그냥 힘만 좋은, 얻어걸리는 타자 수준에서 머무는가 싶었다. 하지만 장효조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2004년 정현석 기자와의 대화에서 분명히 저 체격 대비 유연성에서 나오는 타격능력은 머지않아 터질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하였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만루홈런을 기록한 때도 이해이다. #
6. 2005 시즌
이 해부터 10번을 달았다.
2년 연속으로 20홈런을 기록했다. 티율 .266 21홈런 80타점을 기록하며 전년도 대비 교타력에서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다.
KBO 올스타전에 동군 1루수로 선발되었다. 경기에서는 역전 투런홈런을 날려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7. 2006 시즌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06) |
2006년, 날씬했을 때. |
2006년 기록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sWAR* |
122 | 443 | 149 | 26 | 0 | 26 | 71 | 88 | 39 | 55 | 11 | .336 | .409 | .571 | .980 | 192.4 | 6.52 |
그리고 그 피나는 감량의 대가는 이대호를 리그 최정상급 타자로 만들어주었으며, 이때부터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타자로 당당히 자리잡는다. 15kg가량 감량하고 돌아온 이대호는 선구안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면서[12] 타율, 타점, 홈런 세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여 1984년 삼성 라이온즈 소속의 이만수 이후 무려 22년 만의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다른 시즌 같았으면 리그 MVP는 따놓은 당상이었겠으나, 하필 그 시즌에 괴물 신인 투수 류현진이 투수 트리플 크라운을 석권하며 혜성같이 데뷔한 탓에 MVP는 류현진에게 돌아갔다. 여기에 홈런왕이 홈런 30개도 못쳤다고 까인 건 덤. 게다가 류현진을 앞세운 한화는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준우승을 달성했던 반면, 이대호는 팀이 7위라 가을야구도 진출하지 못했던 데다 류현진이 각종 신인기록들을 죄다 갈아치우며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했던 탓에 상대적으로 이대호는 관심이 덜했던 것도 크다. 다만 2006년의 류현진은 2023년 현재까지도 고졸 1년차 신인이 리그를 폭격한 유일한 사례로 남을 만큼 독보적인 선수였으며, 대졸로 범위를 넓혀도 96년의 박재홍(야구) [13]이나 83년의 중고신인 장효조[14] 정도가 아니면 이만한 유례를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당시 엄청난 임팩트를 남긴 선수였기에 류현진의 MVP 수상에는 이견이 없었다.
2006년이 하필 86년과 93년을 잇는 프로야구 사상 최악의 투고타저였던 탓에, 클래식 스탯만 놓고 보면 이대호가 류현진에 비해 임팩트를 주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홈런이 26개로 95년 김상호의 25개에 이은 역대 최저 2위의 기록이었던 데다, 명색이 타점왕임에도 88타점으로 90타점조차 넘기지 못했다. [15] 반면 류현진은 평균자책점이 2.23이었고 18승과 탈삼진 1위를 먹었던 터라…. 이 때문에 투수 트리플 크라운보다 더 어렵다는 평이 많은[16]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고도 상당히 저평가를 받았다. 세이버 스탯이 과거보다 보편화된 2024년 현재에서 보면 이대호는 wRC+ 192를 찍으며 리그를 씹어먹었으며, 이 수치는 이대호가 타격 7관왕을 차지하며 리그 MVP를 수상한 2010년의 wRC+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대호가 얼마나 2006년에 독보적인 타자였는지 알려주는 대목.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출전하다 |
심지어 국가대표에서도 그의 불운은 이어졌는데, 이 해 늦여름에 개최된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에 선발되어 타율 0.409에 10타점(당시 국대 총 타점의 1/4)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 대한민국이 도하 참사를 겪으며 졸전한 탓에 이대호의 맹활약은 또 묻혀버렸고, 이대호는 점차 병역 압박을 받게 된다. 다행히 이 병역 문제는 2년뒤에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하며 해결했다.
8. 2007 시즌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07) |
시즌 요약 짤 |
2007년 기록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sWAR* |
121 | 415 | 139 | 21 | 1 | 29 | 79 | 87 | 81 | 55 | 9 | .335 | .453 | .600 | 1.053 | 194.2 | 7.00 |
2007년에는 2006년의 대활약 때문에 고의사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삼진 수는 2006년과 같은 55개인데 볼넷은 전년도보다 크게 증가한 81개가 되었다. 2007년에도 홈런, 장타율, 출루율 등의 주요 지표가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지난해보다 더 성장하며 여전히 리그 최고의 타자로 군림했으며, 당연하게도 1루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여 2연패를 달성했다[17]. 당시 롯데 타선에서 이대호의 역할이 얼마나 독보적이었는지, 이대호 한 명만 거르면 상대팀 입장에서는 나머지를 편안하게 갈 수 있던 롯데 타선에 이대호와 여덟 난장이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 2006년만 해도 홈런 2위인 펠릭스 호세라도 있어서 이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타선의 밸런스 자체는 정수근[18], 강민호[19], 박현승, 이승화 등이 분발했던 2007년이 오히려 좀 더 나았긴 했다. 이 와중에 5월 22일 경기에서 단순한 뜬공을 놓치면서 패배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팬에게 있어서는 손민한과 함께 8888577이라는 암흑기에 롯데를 견인한 두 쌍두마차[20]이자, 롯데 타선의 상징에 가까운 존재였다. 실제로 이대호가 부진하면 롯데 타선이 전반적으로 무게감이 크게 떨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한 2006년과 타격 7관왕을 찍으며 커리어 하이를 달성한 2010년에만 주목하는데, 사실 타격만 놓고보면 2007년 역시 다른 시즌에 절대 꿇리지 않는 시즌이다. 이 시즌의 wRC+가 무려 194.2로, 2006년과 2010년의 192.4보다 높으며, sWAR*도 7을 돌파하며 2010년의 8.82에 이은 커리어 통산 2위를 찍었다. [21]
9. 2008 시즌
그러나 올림픽 직전 올스타전에서 기적적으로 타격 감각을 회복한 이대호는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경기에서 홈런 3개, 10타점, 0.360의 타율을 기록하였고, 특히 장타율이 0.760에 달하는 등 큰 활약을 보여주며 한국 야구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4강까지 극도의 부진을 보이던 이승엽의 상태를 고려해 봤을 때 이대호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4강 가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4강과 결승에서의 이승엽의 결정적인 홈런으로 인해 묻힌 감이 있다. 사실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국가대표 성적에서 이대호가 이승엽보다 홈런은 적었지만 타율은 월등히 좋았다. 아무튼 여차저차해서 금메달을 따면서 병역 혜택까지 받게 되었다.
2008 시즌은 타율 0.301, 18홈런, 94타점(리그 3위), OPS 0.879(리그 7위)를 기록했다.
10. 2009 시즌
2009 WBC에 출전하여 타율 0.278 5타점 ops 0.829를 기록했다.
시즌에선 3루 수비의 여파인지 4월 10일 기준으로 타율 0.105 0홈런에 그치며 엄청난 타격 부진을 보여주고 있다.[23] 거기다 이대홀 또는 이대호 터널이라 불리울만큼 말도 안 되는 3루 수비를 보여주어 대부분의 롯데팬들은 뒷목을 잡은 채 2009 시즌을 포기한 상태.[24] 4월 26일 LG 전에는 시즌 5호이자 개인 통산 131호 홈런을 터뜨리며, 마해영을 넘어 롯데 프랜차이즈 최다 홈런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다 5월 중순부터 타격감을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6월 중순엔 타율 3할을 잠시 회복하였다가 손바닥 부상으로 다시 2할 8푼대로 떨어졌다. 5월 19일 두산 베어스 전에서는 시즌 10호 홈런을 터뜨리며 6년 연속 두 자릿수 홈런을 달성했다.
2009년 6월 30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이대형의 다이빙캐치 실패와 2루수의 송구 실책으로 인해 '자기가 치고 자기가 홈에 들어오는 플레이'를 보여 주었다.[25] 야갤 등지에서는 인사이드 파크 모텔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2009년 7월 25일에 열린 올스타전 홈런 더비에서는 결승에서 최희섭과 맞붙어 홈런 5개를 기록하며 우승했다. 또한 그와 함께 최장거리 홈런 부문도 수상. 결승전에선 5개 모두 장외홈런을 날리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홈런더비 예선에서 이대호의 장외로 날아간 홈런 타구 중 하나가 당일 무등경기장에 왔던 천하무적 야구단의 김창렬의 차 뒷유리에 적중했다.
8월 23일 사직 LG 트윈스전에서는 개인 통산 150홈런을 달성했다.
2009 시즌은 타율 0.293, 홈런 28(리그 4위), 타점 100(리그 3위), OPS 0.908(리그 11위)를 기록했다.
리그 최상위권 타자의 성적임에도 불구하고[26], 팀 전통(?)에 따라 2010년 연봉이 삭감될 예정이라고. 이에 이대호는 팀 자율훈련 불참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결국엔 6% 인상된 3억 9천만원에 계약했다.
11. 2010 시즌
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2010) |
2010 KBO 리그 MVP |
자세한 내용은 이대호/선수 경력/2010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12. 2011 시즌
KBO 골든글러브 1루수 부문 수상자 (2011) |
자세한 내용은 이대호/선수 경력/2011년 문서 참고하십시오. |
[1] 2001년부터 2007년까지 1군에서 단 25경기만 뛰었던 선수. 2군을 전전하다 2007년 11월 5일 위재영, 강혁 등과 함께 방출되었다.[2] 근데 김희걸은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한 후에도 두꺼운 선수층에 밀려서 1군서 필승조에 끼지는 못했으니...[3] 이승엽을 타자로 전향하게 한 사람 역시 우용득이다. 한참 후인 2022년 5월 14일 경기 수훈 선수 인터뷰에서 이대호는 스승의 날을 맞이하여 자신에게 기억나는 스승님들이 있냐는 캐스터의 즉석 질문에 유망주였던 자신을 꾸준히 기용해준 양상문, 야구에 눈을 뜨게 해 준 로이스터, 그리고 자신을 타자로 전향시켜 준 우용득 이 3명이라고 말하기도 했다.[4] 물론 여기엔 백인천이 시즌 중반 감독 취임 후 사실상의 시즌 포기 형태로 잔여경기를 치른 탓도 있다. 물론 이대호는 신인이라 백인천 밑에서도 기회를 쭉 받았다.[5] 현대 의학의 연구 결과 쪼그려뛰기는 무릎 관절에 부담만 되고 운동 효과는 좋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칼로리를 소모시키는 운동량은 상당하지만 다양한 운동수행 능력을 발달시키는 효과는 미미한 반면, 그 효과 이상으로 무릎 관절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부상을 유발하기 때문에 선수에게나 일반인에게나 좋은 훈련 방법이 아니다. 칼로리 소모할 수 있는 운동은 쪼그려뛰기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칼로리를 소모시킬거면 차라리 다른 운동을 통해 줄이는 것이 효율적이다.[6] 당시 KBS 2TV 일요일은 즐거워의 공포의 쿵쿵따 코너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었고, 자신은 쿵쿵따를 즐겨 봤다고 무릎팍도사에서 술회하였다. 이에 공포의 쿵쿵따 멤버였던 강호동은 바로 쿵쿵따 대전을 시전했으나, 이대호에게 곧바로 발렸다.[7] 후일 KBS 다큐멘터리에서는 동래구 모처에 자신의 친형 이차호와 최준석이랑 해서 셋이 같이 살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 방에 있는 더블 침대 하나에 이대호와 최준석이 같이 누워 잤다고... 최준석의 증언으로는 누가 안쪽에서 자는지를 가지고 경쟁했는데, 숙소에 들어오면 둘 다 씻지도 않고 침대로 달려갔다고 한다.[8] 박명환야구 tv 야구썰전에서 이인구가 언급하기로는, 최준석 역시 이대호와 똑같이 당했던 것으로 드러났다.[9] 지난 시즌에 26홈런을 때려 낸 조경환은 2002년에 삼진 머신이 되어 버린 후 7월에 박남섭 등을 상대로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용병이라고 데려온 제로니모 베로아는 부진하다가 시즌 중도 방출당하는 등 롯데의 공격진이 상당히 부진했다.[10] 조성환이 시즌 초 부상을 당해서 나가리된 것은 2004년 4월 24일 손목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게 유일하다. 그리고 그 해 9월에....[11] 트레이너만 교대로 3명에 약 1천만원의 비용도 들었다.[12] 2004~2005년에도 BB/K 비율이 소숫점 후반대로 나쁜 편은 아니었다.[13] 30-30을 달성하며 혜성같이 데뷔했으나, 리그 최고의 타자는 아니었다. 넘사벽인 이종범을 포함해, 홍현우와 양준혁이라는 거물타자가 그의 앞에 세명이나 더 있었으나, 류현진은 아예 투타 WAR이 1위였다,[14] 장효조 역시 83년에 프로에 데뷔하여 그 해에 리그를 정복했으나, 장효조는 이미 실업야구에서 이름을 날리던 국가대표 타자로, 83년 프로데뷔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27세였다.[15] 어디까지나 투승타타가 진지하게 먹히던 과거의 관점에서다.[16] 트리플 크라운/야구 항목 참조. 한 타자가 고타율과 많은 홈런을 동시에 기록하기란 쉽지 않다.[17] 그리고 이것 때문에 김태균은 '김두표'라는 별명이 또 하나 추가되었다.[18] 술 관련 사고에서 복귀하여 준수한 테이블 세터 역할을 해 줬다.[19] 주전 포수로 뛰며 14홈런을 때리며 가능성을 보여 줬다.[20] 2012년부터는 둘 다 롯데에 없는 상태였다. 손민한은 방출, 이대호는 일본 진출. 그러다 2016년 미국진출 뒤 2017년에 이대호는 롯데로 복귀했다.[21] 2010년이 유달리 높았던건 당시 이대호가 3루수였기 때문에 WAR에서 보정을 받은 것이며, 40타석 가량을 더 소화한 것도 영향이 있다.[22] 선수 본인의 관리 실패도 있지만, 겨울 동안 올림픽 야구 예선 경기에 출장하느라 훈련이 부족했던 면도 있을 듯하다.[23] 2008년에도 올림픽 브레이크 이전, 이후 둘 다 계속 처음에는 잘하다 꾸준히 내려갔다[24] 실제로 꼴찌를 잠시 찍음.[25] 사실 2루수 송구 실책은 실책이라기보다 송구가 이대호에게 맞아 굴절된 것으로 불운에 의한 것이었다. 실책이 있으면 그라운드 홈런이 안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3루타로 기록되었다.[26] 다만 냉정하게 말해 2009년의 이대호는 리그 최상위권 타자는 절대 아니었다. wRC+가 131로 리그 11위에 불과했으며, 장타율도 리그 9위에 불과했다. 이 시즌 이대호의 출루율이 0.377로 리그 20위에 불과한데, 2009년이 타고투저가 심한 해라 타자들의 성적이 전체적으로 매우 잘 나왔던 해인걸 감안하면 이대호는 오히려 기대이하의 성적을 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