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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몽전쟁 시기 고려의 여몽전쟁 수행에 대한 평가 문서. 판단은 각자가 해야하지만 이 문서에서는 2가지 상반된 시각을 각자의 입장에서 풀어썼다.2. 편집 시 주의점
- 사실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서술을 한다.
- 원 간섭기의 고려는 원 제국의 실질적 제후국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 원 간섭기의 고려는 원 제국의 괴뢰국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 명목상 제후국이고 실제로는 조공국인 조선과, 실질적 제후국인 원 간섭기의 고려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한다.
3. 고려의 여몽전쟁 수행 옹호론
몽골의 주력은 남송 정복을 목적으로 투입되어 고려를 공격한 몽골군의 수는 5만 이하였으므로 최씨 정권이 군사 체계를 잘 조직하여 군세를 규합하고 정예병들을 앞세워 대몽 항쟁에 나섰다면 몽골의 침략을 막아내는 훨씬 나은 결과를 만들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초반의 패전으로 중앙군의 전력이 사실상 바닥이 났지만 아예 밑바닥까지 드러나버린 고려 말기에 비하면 훨씬 나은 상황이었으므로 군대를 재조직해서 항전한다면 역전을 노려볼 수 있었으며 강화도 천도로 수뇌부가 안전해졌으므로 더욱 다양한 전략과 작전술, 전술을 펼칠 수 있었다. 그 고려 말기에서도 홍건적의 난 때 남부지방 일부에서 징병한 병력만 해도 20만이 넘어갔으니까. 하지만 고려의 전 국토가 전란에 휩싸여 피폐해졌고 고려는 몽골의 속국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 최씨정권은 자신들의 사치와 향락을 깊이 즐겼으므로 비판받아 마땅하다.그러나 최씨 정권이 아예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당시 고려의 상황이 파탄 국가(failed state)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이미 문벌귀족의 부패[1]로 인해 고려에는 많은 문제점이 생겼고, 이후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고려 중앙군은 5군에서 3군으로 축소되었으며, 묘청의 난으로 인해 고려군은 더욱 축소, 약화되었고 조위총의 난으로 고려군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여몽전쟁을 시작하였고 전쟁 막바지에 백성들과 지방군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중앙에서 보낸 관리들을 살해하며 몽골군에게 항복하긴 했으나, 자그마치 30여 년에 걸쳐 9차례나 계속된 전쟁이었다. 고금의 어느 국가의 백성들일지라도 그런 전쟁에는 지칠 것이며 지배층들의 내분과 지방통제의 실패로 거의 자동문 수준으로 자동문이 열러 국가가 멸망한 호라즘, 초반에 주력군이 패전한 이후로는 어지러운 내부와 외부사정(남송과의 전쟁과 거란족의 반란 등 정신이 없던 상황)으로 인해 일부지역에서의 승전을 제외하면 지리멸렬한 모습만 보여주다가 멸망한 금의 경우를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대단한 것이다. 오히려 전쟁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최광수의 고구려 부흥 운동, 신라 부흥 운동 등이 일어날 만큼 확실히 한 민족의 국가라는 인식이 약했던 고려가 이처럼 참혹한 전란에도 국토가 사분오열되지 않은 것이 고려가 당시 행정 체계가 완전히 파탄 난 국가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것이다.
제2차 침입 당시에 최우는 미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버티다가 총 사령관이 살해당한 몽골군이 철수하는 틈을 타 북계 병마사 민희에게 가병 3,000명을 주어 홍복원을 토벌하고, 홍복원의 식솔들을 사로잡았으며, 북부 여러 주현(州縣)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그리고 제3차 침입 때는 희경과 명준을 파견해 개주에서 몽골군을 격파했으며, 4년간 버티다가 1238년 겨울에 강화를 제의했고, 1241년 신안공 왕전의 사촌 형인 영녕공 왕준을 왕자로 가장시켜 몽골에 볼모로 보냈다. 그리고 5차 침입 때 고려 왕이 강도를 나와 승천부(昇天府)에서 몽골 사신과 회견했으며, 고려 왕자 안경공 창을 몽골에 보내 항복을 표시했다. 또한 제7차 침입에선 1256년 6월 이천에게 수군 200명을 맡겨서 온수현에 상륙해 몽골군 수십 명을 죽이고 주민들을 구출했으며, 그 해 10월에는 애도에서 몽골군이 애도에 상륙하자 별초군을 출격시켜 몽골군을 모조리 도륙했다. 그 기간 동안 정부에서는 몽골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운 인물들에게 벼슬을 주고, 방어에 성공한 지역을 승격시키는 포상 조치도 취했다.
또한 전쟁 극초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몽항쟁은 지방군과 민중들의 손에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2차 전쟁 때 몽골 사령관 살리타이를 죽인 것은 일반 백성과 스님들이 중심이 된 처인성 전투인데, 적국의 사령관이 죽어 전쟁이 다 끝나는 마당에야 병력을 동원한 것을 공적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몽골군이 철수한 뒤 점령당했던 북부의 여러 주현 대부분을 수복하고 몽골에게 투항한 반역자들을 토벌하는 것은 반드시 수행해야 할 과제였다. 만약 이 반역자들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제2, 제3의 홍복원이 연이어 출현할 것이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지 못해 국력이 날로 쇠약해질 것이다. 따라서 몽골군이 철수한 뒤 후일을 대비해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영토를 회복한 것은 최씨 정권이 적절한 조치를 내려 세운 공적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예병들은 강화도에만 주둔시키고 현지 사정에 어두운 장수 몇몇을 보내서 전력이 약한 지방군과 더불어 방어를 일임한 것이 무책임하다는 주장도 있는데, 사실 당시 최씨 정권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당시 고려는 여몽전쟁 초반 안북성 전투로 주력군이 야전에서 대패하여 몽골군과 제대로 된 야전을 치를 수 없었기에 방어에 용이하고 몽골군이 기피하는 수전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강화도로 천도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남은 정예 병력을 내보내 야전을 벌였다가 또 패퇴하여 국가 기간 병력이 아예 모두 무너지거나 몽골군이 강화도 방어가 취약해진 틈을 노려 상륙하면 고려 왕조는 그대로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몽골군이 철수 후 휴식기가 있었다지만 수세적인 전략을 취하며 이미 국토가 많이 황폐해져서 귀주 대첩 때처럼 대군을 결집하기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중앙군이 무너진건 고려정부와 최씨정권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벌귀족들의 부패와 타락,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으로 인해 이미 고려군은 여몽전쟁 전에 알아서 무너져 있던 상황이었다. 남부지역에는 일부 무사들과 호족들의 사병들을 중심으로 필요할 때 급조해서 만드는 주현군을 제외한 고려의 중앙군과 주진군을 포함한 실질적 상비전력들은 거의 모두 북쪽에 있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일들로 인해 이들이 완전히 거병파와 충성파로 나뉘어 싸우다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는 경군에 해당하는 5군이라는 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은 흔히 국사책에서 나오는 2군 6위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조직이며, 오늘날로 치자면 동원사단에 해당하는 존재이다. 이들은 전시에만 제대로 가동하는 조직인데, 평시에는 기간요원만 있지만 전시에는 이 5군 내에 6위의 중앙군과 지방의 주진군, 주현군 등을 징발, 배속하여 전-후-좌-우-중의 5군을 만들어서 출진하였다. 이 5군을 지휘하는 존재들은 병마사, 지병마사, 도병마사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원수, 부원수, 도지병마사들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고려 5군과 별무반은 고려 내의 내전과 문벌귀족들의 부패와 타락,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조위총의 난으로 인해 이미 고려군은 여몽전쟁 전에 알아서 무너져 있던 상황이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고려 경군의 주력 5군은 3군으로 축소되었고, 묘청의 난으로 인해 일부 지방군들까지 엮여 같이 약화되었으며, 조위총의 난에서는 대부분의 상비전력들이 엮여져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고려 수군도 이 때 매우 큰 타격을 입어서 여몽전쟁은 물론이고 한참 나중인 진포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기 전까지 지리멸렬해지고 말았다.
그 얼마 안 남은 고려 경군의 나머지 원정병력들인 3군의 잔여병력마저 여몽전쟁 초기에 와해되면서 고려군은 정말 밑바닥까지 추락하고 말았으며 이 때 손상된 군사력은 14세기말 멸망할 때까지 사실상 복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 고려가 겪던 문제는 집권세력이었던 최씨 정권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국가의 딜레마가 중앙에 군사력이 집중되면 수도 이외의 영토들이 적의 침략에 취약해지고, 그렇다고 전선에 군사력을 집중하면 현지 사령관이 반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가 북송이고 후자의 예로는 당나라의 절도사 난립과 위화도 회군을 들 수 있다. 고려는 중앙집권이 잘 된 조선과 달리 봉건제 국가에 가까웠고 더구나 대몽항쟁 당시에는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데다가 방어에는 용이하나 육지에서 떨어진 강화도를 수도로 삼았으므로 더더욱 전 국토와 군사력을 제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중앙에서 정예군을 차출해 타 지역으로 보냈다가 그 병력을 손에 쥔 사령관이 마음을 달리 먹고 반기를 들면 고려는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휩쓸리고 말 것이었다. 그렇다고 군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군사에 감놔라 대추놔라 식으로 참견한다면 아테네와 조선과 남북전쟁 당시의 미국과 같이 스스로 망할 것이다.
몽골 제국은 금, 호라즘 왕국, 서하, 남송, 키예프 공국. 아바스 왕조 등 수십 개의 국가들을 잔혹하게 짓밟았고 현지 지배층의 씨를 말린 바 있다. 금나라는 징기스칸의 등장 이전 몽골인들에게 가혹한 탄압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원한을 샀고, 호라즘 왕국은 이유 없이 몽골 상인들을 학살하거나 사신들에게 수모를 줬으니 자업자득이라 해도 서하와 남송, 키예프 공국, 아바스 칼리파조는 몽골에게 이렇다 할 원한을 산 적이 없었지만 몽골에게 완전히 소멸당했다.[2] 심지어 서하의 경우 칭기즈칸이 자기가 죽은 후 서하 왕과 귀족들이 항복하면 몰살해버리라는 유언을 남겨 현재까지도 서하인의 후손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3] 이런 몽골의 군대가 비록 주공이 아니었다고는 하나 한두 차례도 아니고 아홉 차례나 쳐들어온 것은 그 나라를 단순히 속국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볼 수는 없다.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이현이 최항에게 보낸 편지를 드는데 몽골 측이 적국인 고려 사신에게 자신들의 속마음을 정직하게 말해줄 리 만무하고, 결정적으로 이러한 증언을 한 고려 사신 이현은 신용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된 뒤 1253년 7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앞잡이가 되어 고려의 약점을 밝히고 이에 대한 계책을 몽골 지휘관에게 알려줬다.
"우리나라 도읍이 섬에 있어서 세금과 공물이 모두 육지에서 나옵니다. 대군이 가을이 되기 전에 들어간다면, 도성 사람들은 세금과 공물을 받지 못해 위급하게 될 겁니다."
몽골군은 이를 받아들여 고려 사람들이 가을 추수를 하기 전에 초토화시키고 강화도를 말려죽이는 작전을 펼쳤다. 게다가 그는 몽골군이 가는 곳마다 따라가면서 항복을 권유했고 몽골군이 천룡산성(충청북도 충주시)를 장악했을 땐 스스로를 달로화적이라 칭하고 주변 주민들을 통제하고 약탈을 벌였다. 특히 이 인간은 은세공품을 매우 좋아해 약탈한 은비녀만 한 상자에 가득찼다고 한다.
그러다가 몽골군이 물러날 무렵, 이현은 고려 조정이 감히 몽골에게 협조한 자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강화도로 돌아와 계속 관리 노릇을 하려 했다. 그러자 최항은 이현을 곧바로 체포해 그의 아들 5명과 함께 저잣거리에서 처형했다. 이 때 백성들은 지나가면서 이현의 시체의 입을 걷어차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이 흉악한 놈아! 몇 사람의 은과 비단을 먹어치웠느냐?"
요약하면 실제로 벌어진 몽골의 잔혹한 학살과 파괴 행위와 이현이란 자의 추악한 모습 등을 고려할 때, 몽골이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한 이현의 편지 내용은 전혀 신빙성이 없다.
몽골군이 강화도 앞바다보다 훨씬 폭이 넓은 황하와 양쯔 강을 건너서 금과 남송을 정복했고, 바다 건너 인도네시아로 원정을 간 적도 있으며, 실제로 강화도는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게 손쉽게 함락되었다는 것을 근거로 당시 몽골은 강화도를 점령할 능력이 있었으나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기에 하지 않은 것이라는 주장은 여러 가지로 잘못된 주장이다.
우선 근본적인 강과 바다의 차이를 간과하였다. 강은 추운 겨울에 얼지만, 바다는 소금물이므로 결빙점이 낮아 얼지 않는다.[4] 따라서 겨울이 되면 걸어서 도하하기 쉬운 강과 달리 강화도 앞바다는 반드시 배를 띄워야 도하할 수 있다.
그리고 몽골군이 도하에 성공한 사실들만 보고 주변 상황이나 시기는 아예 무시하였다. 황하 도하 당시 금나라는 당시 남송과의 전쟁과 거란족의 반란 등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몽골군의 도하할 때 방어하지 못했고, 장강에 있던 남송과 원나라와의 양양 공방전에서는 수십 만의 원나라군이 1267년에서 1273년까지 무려 6년에 걸쳐 공격한 끝에 그것도 완전히 군사적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포위, 고립시켜 항복을 받아낸 후에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남송을 제외하면 고려를 포함하여 몽골에 맞서던 모든 나라들이 항복 또는 멸망하여 몽골은 고려를 5만 이하의 병력으로 침공할 때와는 달리 수십 만에 달하는 모든 나라의 군사력을 양양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음에도, 이 때조차 몽골군은 어떤 물도 쉽게 건너며 그 물을 끼고 싸우는 저항군을 손쉽게 분쇄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일본, 인도네시아 원정을 간 것도 남송을 멸망시키고 물에 익숙한 한족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후의 일로 대몽항쟁 한참 후의 일이다.
몽골군은 대몽항쟁 당시 수전에 능숙하지 못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세계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몽골이 원래 살던 곳은 바다 없는 내륙 지방으로 빨래를 하지 않고 물에 배설을 하면 사형에 처하는 등 물에 대한 여러 가지 금기가 있을 정도로 몽골인들은 물에 익숙한 상황이 아니었다. 대몽항쟁 후반기인 7차 침입 당시 조도 해전과 압해도 해전에서 크지도 않은 두 섬에 주둔한 소수의 지방군과 주민들에게 패한 사례가 대표적이다.[5] 압해도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알겠지만, 압해도는 목포와의 거리가 지척이고,[6] 면적 역시 광주광역시 동구와 비슷한 49.12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하다.[7] 이런 곳을 공략하는 데 군선 70여척을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몽골군은 고려군 함선과 섬 곳곳에 실린 투석기 때문에 공략을 포기했을 정도로 당시 몽골군의 해전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훗날의 삼별초나 양양성처럼 강화도의 중앙정부를 고립시키고 공략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또한, 당시 고려 수군의 함선은 중국의 함선들보다 내구성이 좋았기에 중국의 함선을 동원한다고 하여도 강화도에 상륙하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고려 중원 정복 이전에 압록강 유역, 두만강 유역, 요동 해안, 연해주 해안에서 살았던 덕분에 수전에 능숙했던 여진족과 만주족의 경우와는 너무나도 다르다.[8]
결정적으로 이 주장은 대몽항쟁 당시 강화도의 방어력을 너무 경시하였다.[9] 강화도 앞바다의 물살은 매우 거세서 날씨가 나쁘면 당시 기술로는 보름에서 최대 1달 동안이나 해로가 끊길 정도였다. 또한 당시 강화도는 현재 지형과 다르게 개간이 덜 되어 평야가 극히 적었고, 육지와 가까운 곳은 대개 협곡이어서 상륙이 불가능했으며, 그나마 상륙이 가능한 곳은 갯벌이어서 몽골군의 기마들이 지나가기가 매우 힘들었다. 또한 고려는 강화도 주변 지역의 나무들을 모조리 베서 몽골의 상륙 작전 수행 자체를 어렵게 하였고, 강화도에 삼중으로 된 견고한 방어성을 쌓았으므로 강화도는 결코 몽골군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점령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본래 상륙전이란 전투 중 가장 어려운 방식의 전투로 오늘날에도 해병대가 왜 세계 어느 국가에서도 정예 대접을 받는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완벽한 상륙 작전이라는 칭송을 받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조차 독일군의 저항으로 연합군은 많은 인명 손실을 치렀다. 그로부터 30년 전에 벌어진 갈리폴리 상륙작전 때는 현대식 상륙 작전의 개념이 제대로 잡혀있지 않아 수십 만 명에 달하는 장병들이 목숨을 잃고 실패하였는데 13세기엔 말할 것도 없다.
방어진을 공략한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대가 아무 저항 없이 도망가는 상황이 아니고서야) 지속적으로 군사들을 투입하여 방어군을 분쇄해야 하는데, 그 방어진이 물에 둘러싸여 있다면 공격자로서는 일단 그 물을 건너야 하므로 후속군 투입이 원활하지 못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냉병기 시절에는 성을 방어하기 위한 해자(垓子)를 팠던 것이다. 인공 호수인 해자만 있어도 성 공략이 어려워지는데, 그보다 더한 바다로 둘러싸였다면 공략의 어려움은 몇 배는 더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고 베네치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등 숱한 정복 전쟁을 성공시키며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들며 '정복자'라는 별명이 붙은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드 2세도 1480년 강화도보다도 작은 로도스 섬을 공략하지 못했고, 명군으로 칭송받는 슐레이만 1세도 1522년에 700명 밖에 안되는 구호기사단 수비병이 지키고 있는 로도스 섬 공략 과정에서 2만~6만의 군사들을 잃으며 싸우다가 교섭을 통해 그들이 항복하고 떠나게 함으로써 간신히 로도스 섬을 접수할 수 있었다.[10] 수백 명 밖에 안되는 기사단이 지키는 섬 하나를 최전성기의 대제국이 맹공을 퍼부었는데도 이 지경인데, 전술했듯이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 자체가 어렵고, 설령 상륙했더라도 수만 명의 정예 고려군이 지키는 삼중 방어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는 것은 천하의 몽골군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약하자면 당시의 강화도는 '바다로 둘러싸여 후속군 투입의 어려움' + '갯벌과 협곡이 많아 상륙 자체가 어려움' + '정예 고려군 수만 명이 지키는 삼중의 방어성'이 종합된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것이다. 전술했듯이 이현이 강화도를 속전속결로 함락시키는 전략이 아니라, 자급자족이 안 되는 섬의 약점을 이용해 고사시키는 전략을 제시한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그나마도 몽골 수군이 약체였던 문제로 실행되지가 못했다.[11]
몽골군이 마음만 먹었으면 강화도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는 잘못된 생각은 대몽항쟁 수백 년 뒤 병자호란 때 너무 어이없이 강화도가 함락당한 사실 때문이 크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강화도 함락은 인조를 보위해 강화도에 들어갔어야 할 조선 최정예 중앙군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방어병력이 없었고, 내부 성곽도 허물어져 농성 준비 자체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지 강화도가 쉽게 도하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인조는 국방 문제에서만큼은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무능한 군주로, 자기가 먼저 격문을 보내놓고도 다시 사과하는 국서를 누가 전달하냐로 반년을 끌면서 청나라에게 전쟁 준비 기간을 줘놓고 자신은 아무것도 안 했던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이따위로 전쟁준비를 했다면 강화도건 콘스탄티노플이건 세버스토폴이건, 혹은 그 어떤 역사속의 난공불락의 요새건 제대로 방어가 가능할 턱이 없다.
그리고 '고려가 몽골의 배후를 노릴 수 있는 남송과 연계하는 외교적 행보라도 취했어야 했는데 고려의 최씨 정권은 단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라는 주장도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무리가 있는데, 정강의 변 이후로 고려는 남송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금나라에게 신하의 예를 표했다. 남송은 이러한 고려의 태도에 격노했고, 한때는 수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12]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의종 2년인 1148년에는 지지용(智之勇)이란 자는 이심(李深), 송나라 사람 장철(張喆) 등과 함께 남송이 고려를 공격하면 내응하려고 하다가 사형당했다.[13] 그 후 두 나라는 서로 국교를 단절하고 남남처럼 지낸지 오래였고, 당시에도 남송은 타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는 사실상 쇄국 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감정적인 측면을 배제해도 남송은 성을 쌓고 몽골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에 급급한 수세적 입장이라 고려에 지원군을 보내거나 고려로 몽골군이 몰려갈 때 반대편에서 공격하는 기각지세를 기대하기 어려워서 고려가 남송에 사신을 보내도 군사적 실익은커녕 되려 몽골의 침략 명분만 제공하고 마는 것이었다. 실제로 몽골은 칭기즈 칸 시절 금선종이 중도 대흥부에서 방어가 용이한 카이펑으로 천도하자 금나라가 전쟁 의사를 드러냈다며 전쟁을 재개하여 중도 대흥부를 공격하여 함락했고, 먼 훗날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일으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고 '성을 보수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수도를 천도하거나 성을 보수하는 것조차 전쟁 의사로 간주하던 것이 당시의 기준이었고, 오늘날에도 적대국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조차 군사적 적대 행위와 동일하게 간주하는데[14] 하물며 몽골의 적국인 남송과 실익을 기대하기 어려운 군사 동맹을 맺으려 했다면 이는 되려 몽골의 침략을 불러들이는 실책으로 봐야 한다. 물론 남송이 금에게 빼앗긴 고토 회복을 위해 장수 맹공(孟珙)을 앞세워 북벌을 한 전적이 있으니 양면전선을 몽골에게 강요할 여지가 아예 없지는 않았고, 훗날 남송의 40여 년에 걸친 항쟁을 보고 남송의 군사력이 생각보다 강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몽골을 상대로 공세를 취한 건 맹공이 있을 때가 유일하고 비교적 선전한 40년 항쟁은 몽골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인구와 장강이나 사천 분지를 끼고 싸우는 지형적 이점, 몽골의 내부 황위 갈등 등으로 남송에게 방비할 시간을 준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
일본에는 외교 활동을 했는데 실질적으로 무신정권이 맺은 유일한 동맹국은 송나라가 아닌 실은 가마쿠라 막부였다. 정치적 형태도 꽤 비슷했고, 최우의 경우는 가마쿠라 막부 즉 지금의 일본과 외교에 진전을 보인 사신에 대해 특별대우를 해줬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가 지원을 받으려고 했던 곳 역시 가마쿠라 막부였다. 그래서 일본의 현재 역사 교과서에선 무신정권에 대해선 꽤 긍정적인 평을 내린다. 무신정권에서 40년 간 강화에서 몽골군과 싸워 버티고 삼별초가 도중에 일본에 서신까지 보낸 상태에서 반란을 일으킨 덕택에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전때 태풍과 더불어 이런 시간차 덕택에 소 뒷걸음질치다 쥐 잡은 격이 되었다. 반대로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에선 무신정권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는데, 일본은 이를 역이용해 이 시절을 미화한다.
물론 최씨 정권의 사치와 향락을 보면 정예군들이 강화도 수비에만 동원된 것이 전술한 군사적 이유보다 정권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의심이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목적이 무엇이었건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서 버티면서 조정과 왕실을 유지하고 때때로 몽골군과 싸우면서 상황이 안 좋아질 때 몽골에 항복 사절을 보내면서도, 공을 세운 이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부락을 현으로 승격시키는 등 사기를 진작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육지로 파견나온 고려 중앙군과 각지의 고려 지방군은 자신들의 목숨과 주민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민중은 30년간 그야말로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다. 최씨 정권이 공에 비해 과가 너무 크므로 대몽 항쟁을 통해 국체를 지켜낸 주체라 할 수 없다 말할 수 있어도, 고려는 왕실과 조정을 지켜낼 난공불락의 강화도 방어체계를 마련했고, 내륙에서는 고려군과 민중들의 만만찮은 저항이 있었으므로 몽골은 결코 고려를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또한 왕이 끝까지 입조하지 않고 왕의 친척을 왕자라고 속였으므로 비판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이다. 그 논리대로라면 수 양제가 고구려 영양왕에게 입조를 요구했지만 영양왕이 입조하지 않았고 이에 수 양제는 200만이 넘는 대군을[15]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그렇다면 영양왕은 입조를 거부해 병란을 초래했으니 비난받아야 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인들 중 영양왕에게 "왜 입조하지 않았냐?"며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춘추 전국 시대 때 초나라 왕이 진나라와 회견하러 갔다가 붙들려 진나라로 끌려가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일이 있었고, 구정의 왕이 왕망의 초대를 받고 회견장으로 갔다가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이렇듯 왕 같은 높은 신분의 사람이 함부로 타국에 갔다가 억류 또는 살해당한 사례가 역사상에 많이 있어서 왕을 비롯한 국가 최고 권력자들은 함부로 자국을 떠나지 않았다.[16]
사대로 유명한 신라와 조선에서 왕 또는 왕위 계승권자가 직접 중국에 찾아간 예는 김춘추를 제외하면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항복한 왕을 죽이고 지배층을 모조리 학살해버리는 몽골이다.[17] 이런 몽골을 믿고 고려에서 수천km나 떨어진 곳으로 왕이나 왕자를 보내는 것은 최씨 정권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안 했을 것이다. 또한 함부로 왕자를 보냈다가 당나라가 김인문을, 원나라가 덕흥군을 앞세웠듯이 몽골 제국이 그 왕자를 고려의 왕으로 삼아서 내전을 유도한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문관들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운 것이 알다시피 강동성 전투 때 조충과 김인경은 문관 출신에 지휘관으로 공을 세웠건만 홀대받았고, 그로 인해 아버지의 일에 불만을 품은 조숙창이 투항을 했다는 점만 봐도 문관의 홀대도 생각보다 매우 심했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것은 분명 문관에게 적잖은 책임이 있고, 박훤이 최우에게 붙은 간신이기는 하다. 하지만 박훤을 제외한 나머지 문관들은 일반 열전에 들어있으며, 박훤도 최항 형제를 죽이려고 했었다. 애초에 문관이 바깥에 나가 싸우고 군권을 틀어질 경우 전쟁이 특기가 아니라 전사할 가능성이 높고, 조충처럼 승전하더라도 홀대를 받거나 심지어는 숙청당해 목숨을 잃을 위험성이 높았다.[18] 더욱이 김방경과 뒤늦게나마 손을 잡아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기여를 했다.
여몽전쟁의 모든 책임을 고려나 최씨 정권에게 전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런 식이라면 그 어느 누가 왕이든지, 어떤 집단이 권력을 잡았든지 모든 실수와 모든 행동을 꼬투리 잡아서 비난을 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트집 잡히지 않을 완전 무결한 존재와 집단이 되어야 한다는 건데 이건 억지이다. 여몽전쟁을 야기한 세력은 몽골 제국이며, 한반도를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세력 역시 몽골 제국이다. 고려 정부가 잘못한 것은 별개로 비판해야 할 일이다. 원 세조가 말하듯이 원종이 말이라도 걸어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눈물겨운 투쟁의 역사로 인해 고려가 복속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비판론자들은 고려가 몽골을 상대로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고 비난하지만, 당시 고려는 그렇게 하기엔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고려는 오랜 평화기간동안 문벌귀족들의 부패로 인해 중앙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떨어지고 있었고 중앙정부 내부마저 대립이 격화되어 결국 무신정변이 발발했다. 이후 고려는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나게 되고 중앙정부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무신집권자가 피를 피로 씻는 권력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어 중앙정부의 국가 장악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게 된다. 이 혼란을 여몽전쟁 직전에서야 그나마 안정화 비슷한 것이라도 이루어 낸 상황인데, 비판론자들은 이런 때에 당대 최강의 몽골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전쟁을 하지 말아야 했다던가 열심히 싸워야 했다는 것 외에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몽골에게 계속 쥐어짜이면서 노예로 살든가 얼마 안남은 주력군들을 모두 모아 애산 전투처럼 모두 싸우다 죽으라는 것 밖엔 없다. 당시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를 한 것은 최씨정권이 정권을 잡지 않았더라도 고려 수뇌부라면 누구나 골랐을 수 밖엔 없다. 고려 정부가 할 수 있는 선택지 가운데 가장 실행 정도가 가장 높으며 당장 거란과의 전쟁에서 자칫 잘못했으면 고려 수뇌부가 거란군에게 잡힐 뻔한 과거도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전쟁 수뇌부들을 안전한 곳에 둘 필요가 있었다. 만약 고려 조정이 몽골군에게 육지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와해된다면 군대를 재조직해 외적에 대항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백제와 고구려 발해, 후대의 남명의 사례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비판론에 임용한 교수의 저서 내용이 실려있는데, 임용한 교수는 여말선초 정치제도사가 그 전공일 뿐이며, 심지어 같은 시대라도 자신과 전문 분야가 아니면 신뢰도가 떨어진다. 임용한 교수가 전쟁사에 대해 내놓은 책들은 전문성이 떨어진다. 임용한 박사는 한국사, 본래 조선 정치제도 전공자다. riss로 국내학술지논문을 검색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사가 들어간 논문도 본래 전공인 여말선초 정치사와 관련된 부분이며 군사가 들어간 저술서도 하나의 사건에 대해 개인생각과 감정을 쓴, 역사책이라기 보다는 평전 또는 에세이에 가깝다. 예를 들어, 임용한의 저서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있다.
"실수로 열어놓은 쪽문, 주스티아노의 부상, 이 연속된 우연이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의 원인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비잔틴 제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이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에는 부가 넘쳤다. 부유하고 편안했던 그들은 비잔틴 제국 초기부터 힘든 전쟁은 용병을 고용해 맡겼다.(중략) 부와 편안함의 유혹에 빠지면 전쟁이나 경쟁과 같아 험하고 피곤한 작업에서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 역사가 알려준 진리다."
"1453년 최후의 해에 콘스탄티노플은 인구가 많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1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있었다. 이 정도 인구면 병사가 최소 20,000명은 나오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포위전에 가담한 병사는 3,000명 뿐이었다. 여기에 각국에서 용병과 자원병을 받아 총 7,000명을 채웠다. 그러니 체력이 고갈될 수 박에 없었다.(중략) 포위전이 지속된 한달 반 동안 시민들은 사역이나 조금 도왔을 뿐 성당에서 울부짖고만 있었다."
그러나 이 문구들은 제국을 어떻게든 살려보려 노력하던 황제들과 로마제국의 국민들의 저항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다. 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 제국은 경제적으로 추락해버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시기 때 쯤에는 평상시에는 돈없어서 용병도 상비군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고 전시에도 성벽조차 제대로 지킬만한 병력을 동원하지도 못했다. 냉병기라도 함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검이나 활, 창, 폴암, 그리고 각종 방어구들을 근대적 공장도 없는데 짧은 시간 안에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그리고 말기의 동로마 황제들은 이 난국을 만회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친히 서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원조를 호소하기도 했고, 오스만 제국의 술탄들의 봉신을 자처하면서 어떻게든 제국의 생명을 연장시키려 노력했으며, 발칸 반도에서 강성해지고 있던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과 연계하여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최대한 지연시키려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팔레올로고스 내전이라는 희대의 삽질을 벌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마냥 아무것도 안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또한 임용한은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때 시민들이 성당에서 울부짖고만 있었다고 폄하하지만, 실제로는 시민들은 벽을 보수하고 망루에서 경계임무를 맡았지 아무것도 안한 건 절대 아니었으며, 시민들이 하기아 소피아 성당으로 몰려간 것은 함락된 직후 적의 마수로부터 피신하려고 몰려간 것 뿐이었다.
또한 임용한 교수는 고려가 부마국인 것을 주제로 삼은 부분에서 '부마국이라는게 어디있는가? 유럽끼리는 그럼 죄다 장인과 사위 관계인데 그럼 죄다 부마국인 것인가?'라고 주장하지만[19], 이건 근본적으로 서양의 정치와 통치, 지배체제와 왜 법률이 그렇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고 동양의 조공책봉체제를 이해를 못한 이야기다.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번국의 관계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임을 인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중국은 건국 초기에 여러가지 수단과 방식으로 확인하려 들었고 자기 기준에 안맞으면 바로 해당국가가 멸망하든지 자기가 멸망하든지 둘 중 하나가 멸망할 때까지 전쟁을 걸거나 온갖 갈등을 빚어냈다. 그 예가 수당과 고구려이고 명과 고려다.
다시 여몽전쟁으로 돌아온다면 몽골 전체에 "고려, 쟤네들은 만만치 않은데?" 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원세조 쿠빌라이가 황제에 오를 수 있던 결정적인 원인이 훗날 원종(고려)이 되는 고려의 태자가 쿠빌라이에게 고개를 숙인 일로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당시 쿠빌라이는 당태종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의 태자가 나에게 왔다며 크게 기뻐하고 그에 대한 보답으로 고려는 고려의 풍속을 인정하고 존중하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 또는 세조구제(世祖舊制) 약속을 받아내어[20] 훗날 원나라가 완전히 고려를 합병하려 할 때 선황제(쿠빌라이)께서 하신 약속을 어기실 거에요? 하고 버티며 국체를 지켜낼 수 있었다. 쿠빌라이가 고려를 통해 황위에 오를 수 있는 위상을 얻고 그로 인해 국체를 보존할 수 있는 약속을 받아내어 끝내 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고려라는 국가의 틀을 지켜낸 것은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만만찮은 저항을 보여줘 당시 몽골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결정적으로 원세조 쿠빌라이는 황위에 오르고 나서도 카다안의 침입때 고려가 어려움을 격자 그에 관해 말하면서 몽골의 고려 정복이 쉽지 않았었다고 솔직히 인정하였다.
"너희 나라는 당(唐) 태종(太宗)이 친정(親征)하였어도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고, 또 우리나라 초기에 귀부(歸附)하지 않아서 우리가 정벌하였지만 또한 쉽게 이기지 못하였다. 지금 이 조그만 도둑을 어찌 그렇게 심히 두려워하느냐?”라고 하니, 오인영이 “옛날과 지금의 나라의 융성함과 쇠함이 같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황제가 야간 공격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고려사》 충렬왕 17년 2월
《고려사》 충렬왕 17년 2월
그리고 2차 이후 여몽전쟁 자체를 "어차피 종속국이 되거나 심지어 멸망했을지도 몰랐을 텐데 가만히 있었으면 같은 종속국 상태라도 물적 인적 손실을 보전할 수 있었지 않냐"로 평가하는 것도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하다. 몽골 제국 초기에 몽골과 전쟁을 한 국가들 중에는 처음에는 몽골에게 항복했으나 요구한 무역 조건이 지나치게 가혹하여 전쟁으로 이어진 경우가 서하를 비롯하여 적지 않다. 설령 1차 침공 이후 고려가 저항 없이 몽골의 요구 조건들을 수행하려 했어도 고려 내부의 불만이나 몽골 측의 트집 잡기로 고려와 몽골이 다시 무력 충돌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고 그렇게 되었을 때 고려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여기에 더해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의 규모는 3만이라지만 그 병력은 후방 2선급 부대가 아닌 정예군급이었다. 처인성에서 화살맞고 전사한 살리타이부터가 당시 몽골의 황제를 시위하던 장군들 중 하나이며 신임 받던 장군 중 하나였다. 기록에 있는 살리타이의 한자 기록상의 이름은 '찰라역아태할아적'(札刺亦兒台割兒赤)으로 강동성 전투에 참전한 잘라(札刺)와 같은 사람이다. 살리타이가 고려에 온 이유는 단순한데 칭기즈 칸이 일생의 대사업인 금나라 정벌을 시작한 이후 동북아시아 지역을 잘라이르(札刺亦兒) 부족의 무칼리(木華黎)에게 알아서 정벌하라고 시키고 자신은 호라즘 정벌에 나섰기 때문이다.[21] 즉, 살리타이는 몽골의 명장으로 이름높았던 무칼리가 남긴, 강도높은 실전경험을 숱하게 겪은 군대를 이끌고 이후 고려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애초에 금나라는 몽골 제국이 생기기도 전부터 몽골족이 이를 갈고 복수를 꿈꿔왔던 원수 중 원수고,[22] 약체화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당대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던 만큼, 이런 나라와의 주 전선을 담당한[23] 무칼리와 그 휘하의 몽골군은 그 위상을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다. 이런 정예군이 남송과 대규모 전면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3만씩이나 쳐들어왔다는 건 몽골도 동하와 고려의 규모를 생각해 볼 때 상당히 많은 자원을 투입해서 공격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많은 비판론자들이 간과하는 사실인데, 이 시절 몽골의 대군 동원방식은 본군이 진격해서 침략국에서 몽골에 신종하는 세력들을 동원해 군세를 불리는 동원법을 주로 사용했다. 장자원정대나 훌라구 원정대도 이런 식으로 현지에서 병력을 모집해 대군을 만들었고 금나라,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투항한 현지 군벌들을 동원하며 본군의 규모의 두배 이상의 대군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이안사나 홍복원 정도를 제외하면 무신정권이 현지 협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반란군이나 내부 세력에 대한 숙청은 열심히 돌린 탓에 몽골도 현지 병력을 징발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못해 본대인 3~5만 정도만으로 고려와 지속적인 전쟁을 해야 했고 이것이 몽골이 고려 전선에서 고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원종이 협상이라도 해 볼 수 있던 것은 일부에선 극도로 부정하겠지만 고려정부와 최씨정권이 30년 동안 몽골과 항쟁을 했고, 타이밍을 잘 잡아 몽골이 내전을 벌이던 와중에 편을 잘 잡았기 때문이다.[24] 그렇게 싸워도 굴복을 안 하던 적대국가가 제발로 자기에게로 와서 항복을 하니 쿠빌라이가 기뻐하고 좋아했던 것이며, 원종과 대화에서도 이 말이 나온다. 물론 이걸 무신정권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말이다. 항복하러 가는 도중 몽케 칸이 사망한건 어쩌다 우연히 그런거긴 하다.
결론적으로 몽골의 침입으로 수많은 제국과 왕조가 갈려나간 판국에, 베트남이나 이집트, 일본, 인도처럼 몽골군의 침입을 격퇴하지는 못해도 국체만큼은 보존했다는 사실로써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4. 고려의 여몽전쟁 수행 비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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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국사 교과서에서는 고려가 30년 동안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제국의 침략을 막아낸 자주성이 매우 강한 나라로 묘사하며 마치 고려가 치열하게 40년 동안 몽골과 대결한 것처럼 서술했지만, 이는 엄밀하게 말해서 역사 왜곡이다. 국사 교과서만 보면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이 마치 주도적으로 대몽 항쟁을 했고 그 결과로 내정 간섭은 받되 고려라는 국체는 지켜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첫째, 최씨 정권은 몽골로부터 고려를 수호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당시 고려의 최씨 정권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정권을 지켜내는 것에만 급급했을 뿐, 나라를 위하는 모습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급하게 사신을 보내서 항복하겠다고 하고는 몽골 측에서 항복을 이행할 때 지켜야 할 조건들을 제시한 뒤 믿고 철군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합의 내용을 파기하고 다시 버티는 식이 계속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최씨 정권은 몽골군이 쳐들어왔을 때 정예병들을 최전선에 내보내 전력을 강화한 것도, 전국에 흩어진 군세를 규합하여 효과적으로 항쟁한 것도 아니었다. 수십 년 동안 계속된 최씨 정권의 대몽 항쟁의 실상은 주도적으로 몽골군과 악전고투를 벌이며 고려라는 국체를 지켜내는 모습이 아니라, 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이 살육당해도 아랑곳없이 그저 강화도에 짱박혀 항복만 무기한 연기하는 것일 뿐이었다. 세계를 휩쓸던 잔혹한 몽골군에 맞서 살기 위해 지방군들과 백성들은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고, 미처 방어진지로 피하지 못한 백성들은 잔인무도한 몽골군에게 살육당하고 있는 와중에 자신들이 있는 강화도에다 갖가지 나무들을 실어와서 넓은 원림을 조성하고 넓은 집을 지었으며, 잔치를 벌이고 격구를 구경하던 것이 최씨 정권의 실태였다. 12세기 때만 하더라도 고려에는 30만 이상이나 되는 정규군이 분명히 있었다고 추정되는데도[25] 최씨 정권은 이 수십 만의 중앙군을 전쟁에 거의 내보내지 않았고 강화도 주변에서 정권을 엄호하는 역할만 수행하게 하였다.
고려는 여몽전쟁 이전 후삼국통일전쟁, 여요전쟁, 여진 정벌 당시 군권을 일원화하고 군세를 규합하여 10~30만의 군세를 규합하여 전쟁에 나선 바가 있으며, 훗날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는 원의 간섭과 부원배들의 전횡,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국력이 많이 피폐해진 상황에 수도 개경까지 홍건적에게 함락당했지만, 20만의 대군을 규합해 홍건적을 패퇴시키고 개경을 수복하였다. 그런데 여몽전쟁 당시 최씨 정권은 정부의 중앙군과 사병을 막론하고 최전선에서 외세와 싸워 국가를 지켜야 하는 정예 병력들을 단지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수단으로만 사용해 버렸고, 이것은 결국 고려군의 질적 하락을 가져와 여몽전쟁의 여러 전투에서 패주했다.
둘째, 최씨 정권은 군사적, 행정적으로 무능했다. 고려 중앙군인 2군 6위 체제가 사실상 최씨 무신 정권 때 유명무실화되면서 고려의 중앙군은 장부 숫자의 형태로만 존속되거나, 최씨 정권의 사병 집단이나 삼별초로만 운용되는 실정이었다. 다시 말해서, 정권을 경호할 목적의 경호 부대만 충실히 조직해놓고, 국가를 지키는 목적의 전투 부대는 유명무실화시켜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 당시 전선에 앞장서야 하는 정규군이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26] 그나마 유명무실하더라도 있는 중앙군과 지방군, 삼별초 및 최씨 정권 사병 집단이 힘을 합쳐서 조직적으로 대항해도 모자란 상황에서 전혀 연계가 되지 않았다. 국지전에서 성과를 보였다는 삼별초의 행동만 보더라도 국가의 정규군인 중앙군이나 지방군과의 협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형태였다. 중앙군, 지방군, 최씨 정권의 사병 세력이 전혀 연계되지 못하니 조직력은 기대할 수 없고, 거란의 침입을 격퇴했을 때처럼 대규모 전면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욱이 산성방호별감이라는 현지의 지리 등 주변 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보내는 것은 지역 방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다.
셋째, 최씨 정권의 외교술 부재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고려가 몽골의 배후를 노릴 수 있는 남송과 연계하는 외교적 행보라도 했어야 하나, 고려의 최씨 정권은 단 한 번도 그런 시도를 한 적이 없다. 중국 역대 통일 왕조 중 군사력이 가장 약한 나라였다는 남송은(금나라에 화북 지방을 뺏긴 순간부터 반쪽이 되긴 했지만) 국력에서 몽골에 비해 현격한 열세를 보였지만, 그래도 국운을 걸고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며 결국 45년 간의 항전 끝에 1279년 애산 전투에서 남송의 어린 황제 이하 전원이 바닷물에 투신 자살을 하면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오히려 남송이야말로 황제, 조정 신료들, 백성들이 마지막까지 합심하여 끝까지 몽골군과 싸웠으니 숭고한 항쟁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수 있지만, 고려의 경우는 능력도 의지도 없는 집권 세력이 몽골에게 거짓 항복을 반복하였고, 그 결과 백성들이 학살당하는데 정부는 방관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의 반복 뿐이었다. 국가가 전혀 백성들을 돌보지 않으니 1250년대에 들면 아예 고려의 백성들이 몽골군을 환영하기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고려가 금과 사대 관계를 맺고 송과의 관계가 악화된 지 이미 오래였으므로 남송과의 연대는 불가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공동으로 강대한 적을 두고 있는 입장이라면 사이가 나쁘더라도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남송이 금나라의 화친 제의를 거절했듯이 감정을 앞세워 고려의 연대 제안을 거부할 수는 있으나, 시도해서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해보는 것과 시도할 생각과 의지가 없어 시도해보지 않은 것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남송으로서도 맹공이 북송 영토를 수복하려던 것으로 봐서 고토 수복 의지가 있었고 설령 공격 의지가 없어도 당시 고려와 연계하여 몽골에 양면 전선을 강요하면 방어가 수월해지므로 동맹 성사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음에도[27][28] 아무 시도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문제가 큰 사항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려와 남송의 정복이 종료된 후 침략의 목표가 일본이 되었듯이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막부나 최소한 일본 서부의 지방 영주들과 군사적 동맹을 시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최씨 정권은 남송, 일본의 막부, 일본 서부의 지방 영주들 등 군사 동맹을 맺고 몽골을 견제할 여지가 있는 대상이 많았음에도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았다.
고려군이 세계 최강 몽골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의 대부분은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고려 지방군과 그 지역의 민중들이 살기 위해 자체적으로 한 것이다. 대몽 항쟁에서 널리 회자되는 박서와 김경손의 귀주성 전투도 수천 명에 불과한 고려 지방군이 이루어낸 것이고 승려 김윤후가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으로 유명한 처인성 전투도 고려의 민중들과 몇 안 되는 지방군이 이뤄낸 업적이다. 70일 동안 몽골군과 치열하게 싸웠던 충주성 전투 또한 민중들과 소수의 지방군이 해낸 것이었다.
고려가 비록 속국화되었으나 금이나 남송처럼 멸망하지 않고 국체를 보전하여 원의 부마국이 된 것도 고려의 자주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 교과서만 보면 마치 강화도가 천해의 요새인 것처럼 인식되기 쉽지만, 강화도 앞바다의 폭은 압록강의 폭과 비슷한 정도인데 몽골군은 황하, 장강, 볼가 강, 다뉴브 강 등 강화도 앞바다보다 훨씬 폭이 넓은 강은 물론이고 배를 타고 인도네시아 원정까지 갔다. 따라서 강화도를 점령할 마음이 있었다면 한족이 포함된 해군을 동원해서라도 건넜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강화도는 몽골이 작정하고 들어갔다면 5년 이상 버티긴 힘들었을 것이다. 또 몽골은 남송 침공 때 배후에 고려가 있어서 그 싹을 잘라놓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지 아예 작당하고 정복할 의도로 고려로 들어온 것이 아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속국으로 만들어놓고 요리해먹으려 했을 뿐이다.
실제로 《고려사》 <열전> -최충헌- 부 '최항' 편에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이현이란 인물이 최항에게 보낸 편지 속에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는 게 드러나 있다.
“제가 원나라에 두 해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그들이 하는 일을 살펴보니, 전에 듣던 소문과 판이하게 달라 사람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만물의 생명을 사랑하고 아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와 올해에 내린 조서에서 제시한 조건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데, 어째서 육지로 나와서 맞이하지 않습니까? 원나라의 황제께서 노하여, ‘너희 나라는 짐이 인명을 아끼고 보호하는 뜻을 모르니 군대를 보내 죄를 묻는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만약 왕업을 존속시키려고 한다면, 어찌 한두 사람을 육지로 내보내 항복하는 것을 주저합니까? 지금 동궁(東宮)이나 안경공(安慶公) 같은 종실이 육지로 나와 영접하면서 사정을 잘 이야기한다면 군대가 거의 퇴각할 듯하니, 바라건대 공께서는 잘 생각해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몽골은 고려를 정복할 의도가 없었고, 그저 항복만 하고 몽골 밑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나라를 존속시켜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현 이전에 몽골에 인질로 갔던 영녕공 왕준 또한 같은 뜻의 편지를 최항에게 보낸 바 있다. 만약 최항이 정말로 자주성이 강한 사람이라서 몽골 밑으로 들어가기 싫었다면 응당 정규군을 보내서 몽골군과 맞서 싸우는 게 옳다. 그런데 최항은 국가의 역량을 규합해 효율적으로 몽골군과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항복도 하지 않으면서 상황만 더욱 악화시켰다.
다시 말해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어 존속하게 된 것은 대몽 항쟁의 결실이 아니라 몽골이 고려를 멸망시킬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거기다 이후에 쿠빌라이가 칸의 자리에 오르는데 고려의 원종이 지지해 준 것도 한 몫 했기에 존속할 수 있었던 것 뿐이다. 40년 간의 대몽 항쟁에 의한 결실로 고려가 존속하게 되었다는 건 그저 소설에 가깝기도 하다. 굳이 고려의 노력으로 망하지 않았다면 차라리 원종이 판단을 잘 해서 쿠빌라이에게 줄을 서서 존속했다고 하면 되겠지만 최씨 정권의 항쟁은 의미가 없다.
대몽 항쟁의 불꽃으로 묘사되는 삼별초의 난도 세간의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1270년에 무신 정권의 최후 집권자 임유무가 숙청되면서 무신 정권이 타파되자 원종은 무신 정권의 사병 집단인 삼별초를 혁파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삼별초는 승화후 왕온을 왕위에 앉히고 별도의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민심을 끌어모으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반몽 카드를 꺼내든 것 뿐이었다.
당시의 고려는 대몽 항쟁이 아니라 몽골이 고려의 멸망을 전쟁 목적으로 삼지 않고 남송의 멸망을 주된 목적으로 삼았기에 멸망하지 않은 것이다. 그 증거가 고려를 공격하러 온 몽골군의 규모가 5만 이하였다는 것이다.
문관들의 애국심 부재도 문제점이다. 대몽항쟁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문관이 보이지 않는다. 정안의 경우는 자신의 재산을 전비에 충당하기보단 대장경 만드는데 많이 쏟아부을 지경이었다. 이장용의 경우는 황실의 편에 서기 급급했고 류경의 경우도 이규보처럼 무신정권의 눈치만 봤다. 애초 유승단도 강화천도를 반대한 정도면 애초에 문관들도 바깥에 나가 싸웠어야 화친을 결정하든 전쟁을 수행하든 우선 그 실상을 보고 택했을 것이다. 앞전에 조충과 김인경이 받은 홀대를 보면 문관이 바깥에 나가 싸워 공을 세워도 대접받을 수 없었던 문제이나, 무신정변이 일어난 것은 문관들의 책임이 적지 않고, 그걸 깨닫고 전쟁에 나가서 김경손을 비롯한 장수들과 같이 싸우고 연계해야 했지만 그럴 의지가 없었기에 연계는 도저히 안 되는 상황이었고 김경손은 결국 문관들의 도움조차도 받지 못한 채 숙청되어야 했다.
이 전쟁 속에서 몇십 년만에 군권을 쥐고 그 군권을 쥠과 동시에 황실을 기반으로 하여 문관들이 힘을 키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버렸고, 류경이 잠시나마 실권을 쥐었으나, 정작 전쟁에 참여해 군권을 쥔것이 없기에 이후 김준에게 실권을 뺏기게 된다. 거란 유민들의 침입 때 조충이나 김인경 등은 정숙첨이 해임되자 그 공백을 채워 강동성전투를 쉽게 풀었으나, 여몽전쟁때 문관들 중에는 조충과 김인경 같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나 여몽전쟁 도중 간신 열전에 실린 유일한 인물은 문관 출신인 박훤으로 그것도 문관 출신이었고 대집성보다 더 간신배였다. 최우의 공적을 크게 부풀린 인물로 최우의 미화를 위해 쓴 책이 무려 대여섯권에 이르렀다. 대장경을 만드는 것을 최우가 했다던가 강화천도 이후에 최우의 실정들을 죄다 미화로 만든 것도 결론적으로 박훤이라는 간신배 덕택에 이루어진 것이다.
사실 대집성의 경우는 <간신 열전>에 올리려고 했는데, 《고려사》에서 그냥 병풍 처리해버린 것도 박훤이라는 간신배가 대집성보다 더했기 때문이다. 신흥창을 세워 지역의 민심을 얻었다곤 하지만, 문제는 최우에 빌붙으며 권세를 휘둘렀고, 권신이자 최충헌 다음의 간신배라고 불릴 최우를 망친 장본인도 바로 박훤이었다. 그 신흥창 설립도 결과적으로 최우가 했던 온갖 민심이반 행위에 대한 면피용이었다. 애초에 최우의 의중을 빨리빨리 알아챘다. 김덕명도 행적으로만 보면 <간신 열전>에 올랐어야 하나 박훤과 비교하면 죄질이 약하다. 여몽전쟁 시기 처음으로 <간신 열전>에 오른 인물이 문관이라는 점을 볼 때 비록 한 명이긴 하나 그 한 명이 타락만 봐도 당시 문관들의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임용한 교수가 여몽전쟁의 참상을 소개하며 당시 고려 조정의 안이한 대책을 비판한 대목이다.
…… 생산자인 농민은 굶주리고, 기생 계급인 귀족들은 호의호식하는 모순이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이는 사유 재산과 계급이 생긴 이래로 지속된 모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순도 지배층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척이라도 할 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층이 지배층이 될 수 있는 첫째 의무는 국방과 국가 운영이다. 그런데 지배층은 요새로 도망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너희도 알아서 도망치라고 한다. 군대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 논과 밭을 불태우고 섬이나 산성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그리고는 곡식이 부족하니 너희는 술도 마시지 말고, 쌀밥도 먹지 말고, 그 쌀을 세금 수송선에 실으라고 말한다.
이것도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착한 백성들은 감내할 수 있다. 귀족들이 좀 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늘 그래왔던 것이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든다. 이 이상한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략이 없다. 상대가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훌륭한 전략의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치기는 커녕 지금도 확장 일로에 있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그럼 강한 나라에는 무조건 굴복하라는 말이냐?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벗 삼아 벌이는 저항은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저항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과 저항의 논리는 다르다.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 몽골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보장도 없는 전쟁, 사람들은 점차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대몽 항쟁 기간은 몽골군이 최초로 침공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여년으로 잡는다. 이 기간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닌데, 몽골군은 한 번 침공하면 평균 6개월 ~ 7개월 정도 돌아다녔으므로 전쟁이 벌어진 기간만 계산하면 11년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몽골과의 30년 전쟁이 과장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7년 전쟁이지만 일본군이 내륙을 전전한 기간은 첫 해 뿐이다. 더욱이 이 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밞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 그들의 탁월한 기동력과 약탈욕을 감안하면 대몽 전쟁은 이 땅에서 벌어진 그 어떤 전쟁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이었다. 다만 침공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일정한 형식과 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 정부의 대몽 전략이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 측의 이론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정기간만! 지배층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는 항구적으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몇 년에 한 번씩 가을에서 겨울 동안만 피난 생활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이론을 한 꺼풀만 넘기면 대몽전략의 추악한 일면이 또다시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귀족들은 강화에서 편하게 살았지만, 산성과 섬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의 생활은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통의 본질이 아니다. 산성과 섬으로 피난할 수 있는 주민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군현 가까이에 산성은 많다. 아니, 군현마다 가까운 산성이 없는 곳이 없다. 충주의 충주산성, 단양의 적성, 통주의 동림성, 의주의 백마산성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략 요충이 이런 곳에 있다. 이곳에 군현의 식량을 비축하고, 주민을 잠시 집단 이주시킨다. 좋은 방법이지만 이런 성은 다 길가에 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려면 구주성 전투나 죽주산성 전투처럼 몽골군과의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피난의 대상이 된 성은 이런 성이 아니다. 산성에는 군현과 가까운 산성이 있고, 말 그대로 산악 깊숙이 자리잡은 피난용 산성이 있다. 피난용 산성으로 우리가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이 설악산의 권금성, 두타산의 두타산성, 월악산의 덕주산성 등이다.
하지만 이런 산성이 없는 고을이 더 많다. 있다 해도 심산유곡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며칠씩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장기간 거주할 식량도 땔감도 없다. 평소에 식량을 비축해 놓을 수도 없으므로 들고 걸어가야 하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한 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양은 잘 해야 1주일치가 고작이다. 미리미리 군현의 식량을 옮겨두고 이주를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인근 고을의 일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섬도 마찬가지다. 남해안과 서해안에 섬이 많은 것 같지만 작은 섬은 몇 백명을 받기도 벅차다. 큰 섬도 내륙의 주민이 한꺼번에 몰리면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을 수송할 배도 없다. 고려 시대에 대형 전함은 50명 ~ 100여명 정도를 태웠다. 고려 수군은 그런 전함을 100척 ~ 300척 정도 보유했다. 이 배와 작은 배들을 해안 군현에 나누어 할당하고, 민간의 배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한 번에 하나를 실어나를 수 있는 인원은 하루에 500명이 채 못 될 것이다. 1만 명의 주민이 좀 더 깊은 섬으로 가려면 20일이 걸린다. 물론 20일 내내 날씨가 좋다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결국 이론과 같은 소개 작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섬이나 산성으로 피하라는 명령은 식량이 떨어진 병사에게 식사를 충분히 한 뒤 기운을 내서 싸우라는 명령과 똑같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단에 불과하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섬에 들어가 장기 거주 하는 사람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 관청과 주민 일부와 군대다. 식량을 섬에서 다 조달할 수 없으므로, 세금 걷듯이 외부에서 징발하기도 한다.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공을 당하자 여러 성의 사람들이 위도(葦島)로 들어가서 방어했다. 섬에는 10여 리쯤 되는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었지만 조수의 피해를 우려해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방경이 둑을 쌓고 파종하게 하자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으로 여겼으나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는 또한 우물이 없어서 항상 육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했는데 그 때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김방경이 빗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자 그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이 기록이 말해주듯 위도는 여러 군현의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방파제를 쌓고 개간하기 전까지는 식량도 부족했고, 물은 바깥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국가의 행정 기구와 소관 지역의 일부 백성과 군대가 정착한 것이다. 이처럼 관청과 일부 백성, 군대가 주둔하는 섬은 몽골군은 요격하는 군사 기지도 되지만, 국가가 주변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직접적 힘이며, 들어온 백성은 인질이기도 하다.
피난지에서의 장기 거주가 불가능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먼 섬에 있는 정부에게는 세금을 내고, 가까운 섬에 있는 관청에게는 물자를 조달한다. 막상 몽골군이 닥치면 알아서 잠시 피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탁상공론이다. 몽골군의 평균 이동 속도는 하루에 50km다 이것은 평균치고, 단기간에는 하루에 100km 이상도 가능하다. 반경 100km 이내의 몽골군의 이동 상황을 누가 탐지하고, 누가 알려주며, 누가 노인과 어린이를 끌고 식량을 메고, 그들보다 빨리 안전 지대로 달려갈 수 있는가?
피난, 소개 전술, 청야 작전이라는 것도 국가가 제대로 된 방어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 거점을 마련해서 전투를 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몽골군은 이 땅을 자기 땅처럼 돌아다니고, 척후도, 경보장치도, 달아날 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이 오면 그들보다 빨리 몽골군이 오지 못할 곳으로 피난하라는 이야기는, 나는 모르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의 공문서식 표현에 불과하다.
앞에서 한 말을 수정해야겠다. 대몽 항쟁에는 이기기 위한 전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술 자체가 없다. 그들이 말한 전술이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몽골군의 2차 침공부터는 전쟁이 사라진다. 정부군도 없고, 전선도 없고, 하다 못해 조직적인 유격 전술조차 없다. 당시의 기록이 조금만 더 충분하게 남아 있다면 누군가가 이 전쟁을 '전쟁 아닌 전쟁'이라고 기록한 문서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닐까? 기록을 보면 간간히 전투도 있었고, 정부는 끊임없이 장수를 파견하지 않았는가? 맞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지역군이 단독으로 싸운 전투다. 최소한 주변 지역의 병사들이 소집되거나 합동 작전을 펼친 경우조차 없었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한 경우도 있다. 이때 파견하는 장수의 명칭이 산성 방어 별감, 산성 수호 별감, 방어사 등등이다. 명칭으로 보면 전형적인 유격전 지도 방식 같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하면 지역군을 조직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전제가 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끝까지 싸운 성은 구주성과 자주성 두 곳 뿐이다. 막상 몽골군이 왔을때 항전 의지를 보이거나 버틸 수 있는 성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이런 형편은 정부 측 사람들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수호별감을 파견했다고 해서 이들이 싸우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싸움을 기대한다면 군사 요충에 여러 지역의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조직적인 전개가 있어야 한다. 박서의 구주성 전투도 여러 고을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여 이루어낸 성과다.
간혹 야별초가 성의 군사를 지휘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사례도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파견 역시 전투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다. 전술이 없고, 전쟁은 알아서 하라고 지방민에게 떠넘겼다고 해서 정부 스스로 이를 공포하고 분리 독립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던 몽골군이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기간보다는 없는 기간이 더 많았다. 정부는 이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지방군의 조직이 관리되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실제로 전란이 길어지면서 몽골에 투항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몽골과 접경지대에 있던 군현과 토호들은 아예 몽골의 영토로 귀속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산성보호별감은 일반 행정을 계엄 체제로 바꾼 형태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더욱 백성들은 섬이나 피난용 산성으로 자유롭게 도피할 수도 없었다. 30여년이라는 계엄 기간 동안 백성들은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성으로 이주하기도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때면 국가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거대한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출현하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홀로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고, 산성으로 마을로 옮겨다니며 살았던 것은 국가라는 조직의 협력과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없다. 관리는 먼저 도망가고, 주민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누구는 깊은 산 속이나 섬에 들어가서 산다고 하지만 그런 기회란 적고도 희귀하다.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 혹은 마을과 산성에서 소나기를 만나듯 탐욕스런 몽골군을 만난다.
하지만 강화도로 오면 이 모든 현상이 남의 나라 이야기다. 강도에서는 오늘도 술과 쌀밥이 부족함이 없다.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그들은 의연하다. 나라가 설마 망하기야 하겠는가? 몽골군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도 산성의 백성들처럼 도망쳐야 할지 싸워야 할지, 항복한다고 해도 아내와 딸을 빼앗기지 않을지, 노예로 끌려가지는 않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게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우리처럼 섬이나 깊은 산중의 성으로 피신하라고.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이 얼마나 긍정적인 인식인가! 정말 "나라가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만 받을 뿐이지.
《전쟁과 역사》, 임용한 저, pp.157 - 167
그러나 이 모순도 지배층이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척이라도 할 때 봐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지배층이 지배층이 될 수 있는 첫째 의무는 국방과 국가 운영이다. 그런데 지배층은 요새로 도망치고, 백성들을 향해서는 너희도 알아서 도망치라고 한다. 군대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 논과 밭을 불태우고 섬이나 산성으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그리고는 곡식이 부족하니 너희는 술도 마시지 말고, 쌀밥도 먹지 말고, 그 쌀을 세금 수송선에 실으라고 말한다.
이것도 몽골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전쟁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착한 백성들은 감내할 수 있다. 귀족들이 좀 더 좋은 곳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도 늘 그래왔던 것이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이 든다. 이 이상한 전쟁은 이기기 위한 전략이 없다. 상대가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것도 훌륭한 전략의 하나이기는 하다. 하지만 원나라는 지치기는 커녕 지금도 확장 일로에 있다.
물론 이런 반론도 가능하다. 그럼 강한 나라에는 무조건 굴복하라는 말이냐? 눈에 보이지 않는 희망을 벗 삼아 벌이는 저항은 위대하다. 그렇지 않다면 이 땅에서 벌어진 수많은 저항은 맹목적인 것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과 저항의 논리는 다르다. 백성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 몽골군이 물러난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준다는 보장도 없는 전쟁, 사람들은 점차 궁금해진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대몽 항쟁 기간은 몽골군이 최초로 침공한 1231년부터 1259년까지 30여년으로 잡는다. 이 기간 내내 전쟁이 벌어진 것은 아닌데, 몽골군은 한 번 침공하면 평균 6개월 ~ 7개월 정도 돌아다녔으므로 전쟁이 벌어진 기간만 계산하면 11년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몽골과의 30년 전쟁이 과장이라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임진왜란의 경우도 7년 전쟁이지만 일본군이 내륙을 전전한 기간은 첫 해 뿐이다. 더욱이 이 전쟁은 몽골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몽골군이 고려 땅을 짓밞고 돌아다니는 전쟁이었다. 그들의 탁월한 기동력과 약탈욕을 감안하면 대몽 전쟁은 이 땅에서 벌어진 그 어떤 전쟁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운 전쟁이었다. 다만 침공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고 일정한 형식과 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화 정부의 대몽 전략이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부 측의 이론에 따르면, 일정 기간 동안 피하기만 하면 되었다. 일정기간만! 지배층이 솔선수범하지 않는다고 함부로 비난하지도 말 것이다. 우리는 항구적으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몇 년에 한 번씩 가을에서 겨울 동안만 피난 생활을 하면 된다. 하지만 이 이론을 한 꺼풀만 넘기면 대몽전략의 추악한 일면이 또다시 드러난다.
그동안 우리 역사책에서는 이 전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귀족들은 강화에서 편하게 살았지만, 산성과 섬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의 생활은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고통의 본질이 아니다. 산성과 섬으로 피난할 수 있는 주민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군현 가까이에 산성은 많다. 아니, 군현마다 가까운 산성이 없는 곳이 없다. 충주의 충주산성, 단양의 적성, 통주의 동림성, 의주의 백마산성 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략 요충이 이런 곳에 있다. 이곳에 군현의 식량을 비축하고, 주민을 잠시 집단 이주시킨다. 좋은 방법이지만 이런 성은 다 길가에 있다. 이곳에서 거주하려면 구주성 전투나 죽주산성 전투처럼 몽골군과의 전투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때 피난의 대상이 된 성은 이런 성이 아니다. 산성에는 군현과 가까운 산성이 있고, 말 그대로 산악 깊숙이 자리잡은 피난용 산성이 있다. 피난용 산성으로 우리가 제일 쉽게 접할 수 있는 성이 설악산의 권금성, 두타산의 두타산성, 월악산의 덕주산성 등이다.
하지만 이런 산성이 없는 고을이 더 많다. 있다 해도 심산유곡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며칠씩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게다가 그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고, 장기간 거주할 식량도 땔감도 없다. 평소에 식량을 비축해 놓을 수도 없으므로 들고 걸어가야 하는데, 옛날에 사람들이 한 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양은 잘 해야 1주일치가 고작이다. 미리미리 군현의 식량을 옮겨두고 이주를 한다고 해도 이 역시 인근 고을의 일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다.
섬도 마찬가지다. 남해안과 서해안에 섬이 많은 것 같지만 작은 섬은 몇 백명을 받기도 벅차다. 큰 섬도 내륙의 주민이 한꺼번에 몰리면 감당할 수 없다. 사람들을 수송할 배도 없다. 고려 시대에 대형 전함은 50명 ~ 100여명 정도를 태웠다. 고려 수군은 그런 전함을 100척 ~ 300척 정도 보유했다. 이 배와 작은 배들을 해안 군현에 나누어 할당하고, 민간의 배까지 동원한다고 해도 한 번에 하나를 실어나를 수 있는 인원은 하루에 500명이 채 못 될 것이다. 1만 명의 주민이 좀 더 깊은 섬으로 가려면 20일이 걸린다. 물론 20일 내내 날씨가 좋다는 가정 하에서 그렇다.
결국 이론과 같은 소개 작전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섬이나 산성으로 피하라는 명령은 식량이 떨어진 병사에게 식사를 충분히 한 뒤 기운을 내서 싸우라는 명령과 똑같다. 전형적인 책임 회피 수단에 불과하다.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면 섬에 들어가 장기 거주 하는 사람은 주민 전체가 아니라 관청과 주민 일부와 군대다. 식량을 섬에서 다 조달할 수 없으므로, 세금 걷듯이 외부에서 징발하기도 한다.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으로 있을 때, 몽고군의 침공을 당하자 여러 성의 사람들이 위도(葦島)로 들어가서 방어했다. 섬에는 10여 리쯤 되는 경작이 가능한 평지가 있었지만 조수의 피해를 우려해 개간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방경이 둑을 쌓고 파종하게 하자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으로 여겼으나 가을에 곡식을 많이 수확해 그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는 또한 우물이 없어서 항상 육지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했는데 그 때 적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잦았다. 김방경이 빗물을 모아 두는 저수지를 만들자 그 걱정거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 고려사 김방경 열전
이 기록이 말해주듯 위도는 여러 군현의 사람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방파제를 쌓고 개간하기 전까지는 식량도 부족했고, 물은 바깥에서 조달해야 했다. 결국 국가의 행정 기구와 소관 지역의 일부 백성과 군대가 정착한 것이다. 이처럼 관청과 일부 백성, 군대가 주둔하는 섬은 몽골군은 요격하는 군사 기지도 되지만, 국가가 주변 군현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는 직접적 힘이며, 들어온 백성은 인질이기도 하다.
피난지에서의 장기 거주가 불가능한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는다. 먼 섬에 있는 정부에게는 세금을 내고, 가까운 섬에 있는 관청에게는 물자를 조달한다. 막상 몽골군이 닥치면 알아서 잠시 피하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도 탁상공론이다. 몽골군의 평균 이동 속도는 하루에 50km다 이것은 평균치고, 단기간에는 하루에 100km 이상도 가능하다. 반경 100km 이내의 몽골군의 이동 상황을 누가 탐지하고, 누가 알려주며, 누가 노인과 어린이를 끌고 식량을 메고, 그들보다 빨리 안전 지대로 달려갈 수 있는가?
피난, 소개 전술, 청야 작전이라는 것도 국가가 제대로 된 방어 전선을 형성하고 방어 거점을 마련해서 전투를 할 때 가능한 이야기다. 몽골군은 이 땅을 자기 땅처럼 돌아다니고, 척후도, 경보장치도, 달아날 수단도 없는 상황에서 몽골군이 오면 그들보다 빨리 몽골군이 오지 못할 곳으로 피난하라는 이야기는, 나는 모르겠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말의 공문서식 표현에 불과하다.
앞에서 한 말을 수정해야겠다. 대몽 항쟁에는 이기기 위한 전술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전술 자체가 없다. 그들이 말한 전술이란, 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몽골군의 2차 침공부터는 전쟁이 사라진다. 정부군도 없고, 전선도 없고, 하다 못해 조직적인 유격 전술조차 없다. 당시의 기록이 조금만 더 충분하게 남아 있다면 누군가가 이 전쟁을 '전쟁 아닌 전쟁'이라고 기록한 문서를 분명히 발견할 수 있을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말이 아닐까? 기록을 보면 간간히 전투도 있었고, 정부는 끊임없이 장수를 파견하지 않았는가? 맞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투는 지역군이 단독으로 싸운 전투다. 최소한 주변 지역의 병사들이 소집되거나 합동 작전을 펼친 경우조차 없었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한 경우도 있다. 이때 파견하는 장수의 명칭이 산성 방어 별감, 산성 수호 별감, 방어사 등등이다. 명칭으로 보면 전형적인 유격전 지도 방식 같다. 정부에서 장수를 파견하면 지역군을 조직해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에는 전제가 있다.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끝까지 싸운 성은 구주성과 자주성 두 곳 뿐이다. 막상 몽골군이 왔을때 항전 의지를 보이거나 버틸 수 있는 성은 극소수라는 것이다. 이런 형편은 정부 측 사람들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산성수호별감을 파견했다고 해서 이들이 싸우기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싸움을 기대한다면 군사 요충에 여러 지역의 병사들을 집결시키는 조직적인 전개가 있어야 한다. 박서의 구주성 전투도 여러 고을의 장수와 병사들이 모여 이루어낸 성과다.
간혹 야별초가 성의 군사를 지휘하여 몽골군을 물리쳤던 사례도 있지만,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들의 파견 역시 전투가 목적이라기보다는 국가가 행정력과 지배력을 놓지 않으려는 시도다. 전술이 없고, 전쟁은 알아서 하라고 지방민에게 떠넘겼다고 해서 정부 스스로 이를 공포하고 분리 독립을 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던 몽골군이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기간보다는 없는 기간이 더 많았다. 정부는 이 평화기(?)에 세금과 주민에 대한 관리권까지 포기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또한 지방군의 조직이 관리되지 않으면 반란이 일어날 위험이 크다. 실제로 전란이 길어지면서 몽골에 투항하는 지역이 늘어났고, 몽골과 접경지대에 있던 군현과 토호들은 아예 몽골의 영토로 귀속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산성보호별감은 일반 행정을 계엄 체제로 바꾼 형태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더욱 백성들은 섬이나 피난용 산성으로 자유롭게 도피할 수도 없었다. 30여년이라는 계엄 기간 동안 백성들은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는 성으로 이주하기도 하면서 살아야 했다. 그런 때면 국가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거대한 제국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몽골군이 출현하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홀로 내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이 관리의 명령에 복종하고, 산성으로 마을로 옮겨다니며 살았던 것은 국가라는 조직의 협력과 지원을 기대했기 때문인데, 그것이 없다. 관리는 먼저 도망가고, 주민들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누구는 깊은 산 속이나 섬에 들어가서 산다고 하지만 그런 기회란 적고도 희귀하다.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 혹은 마을과 산성에서 소나기를 만나듯 탐욕스런 몽골군을 만난다.
하지만 강화도로 오면 이 모든 현상이 남의 나라 이야기다. 강도에서는 오늘도 술과 쌀밥이 부족함이 없다. 장마가 아무리 길어도 그들은 의연하다. 나라가 설마 망하기야 하겠는가? 몽골군이 눈에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도 산성의 백성들처럼 도망쳐야 할지 싸워야 할지, 항복한다고 해도 아내와 딸을 빼앗기지 않을지, 노예로 끌려가지는 않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러게 예전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몽골군이 오기 전에 우리처럼 섬이나 깊은 산중의 성으로 피신하라고.
오랑캐 종족이 완악하지만 어떻게 물을 뛰어건너랴. 저들도 건널 수 없음을 알기에 와서 진치고 시위만 한다오. 누가 물에 들어가라 명령하겠느냐. 물에 들어가면 곧 다 죽을 텐데. 어리석은 백성들아, 놀라지 말고 안심하고 단잠이나 자거라. 그들은 응당 저절로 물러가리니 나라가 어찌 갑자기 무너지겠는가. ─ 동국이상국후집 권 5 고율시 89수
이 얼마나 긍정적인 인식인가! 정말 "나라가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만 받을 뿐이지.
《전쟁과 역사》, 임용한 저, pp.157 - 167
요약하자면 대몽 항쟁 시기는 세계를 휩쓸던 외세에 맞서 국체를 지켜낸 영광의 시기가 아니라 지도층의 무능, 도덕적 해이, 의무 방기 등으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적의 칼날에 무의미하게 살해당하던 참담한 시기였던 것이다.
5. 결과
5.1. 제후국이 되다
5.1.1. 위상의 격하
결국 고려는 몽골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1259년에 훗날 원종이 되는 태자가 몽골에 입조하게 되면서 사실상 여몽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그 이후로도 고려 무신정권은 계속해서 개경 환도를 반대하면서 버텼고 결국 1270년에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 임유무가 처형당하면서 무신정권이 붕괴된 후에야 개경 환도를 하며 전쟁이 완전히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부터 고려는 황제국에서 몽골로부터 주권의 제약을 받는 제후국으로 격하되어 몽골의 간섭을 받게되었다.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이전 중국 왕조들 혹은 이후 조선과 명나라, 청나라와의 외교 방식이었던 전통적인 조공-책봉 외교 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전통적인 조공, 책봉 관계는 중화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천하의 중심에 중화(中華)가 있는데 중화의 임금은 천제의 아들인 천자이고 이 천자가 천제의 명을 받아 하늘 아래 모든 세상인 천하를 다스리는데 이것을 천자 혼자 다스리기엔 너무 넓다. 그래서 중화의 바깥에 있던 사이(四夷)들에게 일정한 지역을 떼어주어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 조공-책봉 외교 방식의 골자다. 물론 이건 중국인들 혼자만의 망상에서 나온 산물이지만 어쨌든 그 사이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중화에 조공을 하고 자신들이 중화의 일부라고 해주기만 하면 중화는 받아먹은 조공품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내려서 달래고 사이들의 임금에게 책봉을 내리고 자치를 허용하는 식이었다. 그리하여 외국의 임금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형식적으로 관직과 중국의 한 지방의 제후라는 직함을 받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형식적이었기에 실제 나라를 다스리는 건 그 나라의 임금들이고 중국의 황제는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해주는 것 외에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조공-책봉 관계는 형식적인 절차였고 그 외국들은 말로만 속국이었을 뿐 실상은 독립된 주권을 행사하고 독립된 통치를 하는 독립국이었다.
반면,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조금 다르다. 양국의 관계는 일단 조공-책봉 관계의 연장선상에서 출발한 것은 맞다. 몽케 칸의 사후 몽골은 왕위 계승으로 전쟁이 벌어졌는데 그 때 싸움을 했던 두 파벌은 아리크부카를 위시로 한 유목계 본지파(本地派)[29]와 쿠빌라이를 위시로 한 농경계 한지파(漢地派)[30]였다. 그런데 이 두 파벌 간의 싸움에서 농경계 한지파가 승리했는데 이들은 "한족은 한족의 법으로 통치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고려에도 적용되어 양국 간의 관계는 한족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조공-책봉 관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전 중국 왕조들과는 다르게 실질적으로 주권에 제약이 가해졌다는 것이다. 이전의 중국 왕조들은 서로 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사이가 형식적으로라도 중국의 일부라고 인정해주고 조공을 바치면 중화는 더 많은 하사품을 보내 답례하고 형식적으로 중국의 제후로 임명해주고 그 외에 어떠한 터치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몽골은 고려를 향해 주권에 제약을 가했다는 게 다르다.
그로 인한 결과가 발생한 것이 바로 충렬왕-충선왕 때와 충숙왕-충혜왕 때 있었던 중조(重祚) 현상이다. 중조라는 것은 왕이 2번 즉위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고려의 주권이 몽골 제국에 의해 제약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의 삼국시대 국왕들이나 이후의 조선 국왕들이 중국으로부터 형식적으로 제후 작위를 받은 것과 달리 고려 국왕은 진짜로 몽골의 제후였기 때문에 이렇게 몽골의 칸에 의해 폐립되었던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 밖에 왕실의 용어와 주요 관제들이 격하된 것 또한 고려의 위상이 추락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정동행성을 통한 내정간섭 역시 고려가 몽골 제국에 의해 주권이 제약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왕의 시호에 대대로 충(忠)자가 붙게 된 것 역시 마찬가지다.
5.1.2. 그러나 국체를 부정당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려는 훗날의 일제강점기와는 달리 몽골의 직할 영토로 편입되거나, 국체를 실질적으로 부정당하지는 않았다.대표적으로 백지원이[31] 자신의 저서 완간 《고려왕조실록》에서 식민지였다는 주장을 펼쳤는데 고려는 앞서 말했듯이 주권의 제약을 받은 몽골의 제후국이긴 했으나 국체를 부정당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몽골은 고려를 엄연히 '외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지 자국의 일부로 여기지 않았다. 원나라의 역사서인 《원사》와 《신원사》에 고려는 <외국 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즉, 몽골 입장에서 고려는 아무리 자국에 복속되었던 나라라고 해도 기본적인 인식은 '외국'이었던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은 1259년에 고려의 항복을 받아낸 후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하라.(不改土風, 불개토풍)"
는 지침을 내렸다. 이것을 세조의 옛 제도라는 뜻으로 세조구제(世祖舊制)라고 부른다. 만약 고려가 아예 국체를 부정당하고 몽골 영토가 되었다면 세조구제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또 14세기에 들면 부원배들의 '입성책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입성책동이란 쉽게 말해 "고려를 몽골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달라."는 것이다. 입성책동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고려가 내정간섭은 받았을지언정 몽골과는 별개 국가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아울러 고려에 설치되었던 정동행성 역시 형식적인 내정간섭 기관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려가 그 입성책동을 막아내는데 썼던 카드가 바로 앞서 언급한 세조구제다. 또 1310년에 원무종 보르지긴 카이샨이 고려 충선왕에게 보낸 조서에 이런 말이 있다.위 조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몽골은 고려를 별개의 사직이 있고 별개의 국왕이 다스리는 별개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몽골인들의 인식에 전세계에 나라는 단 2개 뿐인데 하나는 몽골이고 나머지 하나는 고려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몽골은 고려를 '우리의 제후국이지만 별개 국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고려가 몽골의 내정간섭을 받았고 몽골에 의해 국왕이 폐립되었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독자적인 사직 즉, 왕씨 왕실이 여전히 유지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고려 국왕을 폐위시켰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왕씨 왕실 사람으로 이어야 했던 것이다. 만약 고려가 일각에서의 주장대로 몽골의 영토였다면 몽골이 아무나 고려 국왕으로 임명했겠지만 자기 입맛에 따라 폐립했다고 하더라도 굳이 왕씨 왕실을 존속시키면서 왕씨 왕실로 왕위를 이어나간 이유는 고려는 몽골의 지배를 받지만 별개 국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가 국체를 보존했다고 해서 자주적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원종은 고려가 반독립 상태의 제후국이 되었을망정 어쨌든 나라를 유지시키는데 성공했다.
또 원 간섭기의 원나라의 횡포는 종속국 치고는 그리 큰 것은 아니었다. 몽골은 자신이 복속시킨 나라들에게 6사(六事)라고 하여 6가지 의무를 다할 것을 강요했는데 그 의무는 다음과 같다.
1. 납질(納質): 인질을 보낼 것.
2. 조군(助軍): 군대를 보내어 몽골의 정벌을 도울 것.
3. 수량(輸糧): 몽골군에 군량을 조달할 것.
4. 설역(設駅): 역참을 설치할 것.
5. 공호수적(供戸数籍): 호구 수를 조사하여 바칠 것.
6. 치달로화적(置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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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조군(助軍): 군대를 보내어 몽골의 정벌을 도울 것.
3. 수량(輸糧): 몽골군에 군량을 조달할 것.
4. 설역(設駅): 역참을 설치할 것.
5. 공호수적(供戸数籍): 호구 수를 조사하여 바칠 것.
6. 치달로화적(置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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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이라고는 납질밖에 없다. 《고려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량, 공호수적은 1259년에 고려가 몽골과 강화를 맺은 이후부터 몽골 측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했던 사안이었지만 원종은 그때마다 "전쟁 통에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 불러모으는 중이라 호구 집계가 안 되고 있다."는 둥 "전쟁 통에 논밭이 쑥대밭이 된 데다 흉년까지 겹쳐서 농사가 잘 안 되고 있다."는 둥 갖가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며 버텼다. 그러다가 1278년에 들어서 쿠빌라이 칸이 충렬왕에게 "호구 조사 같은 것은 자체적으로 하도록 하라."고 하며 공호수적 요구를 철회했다. 이제현 역시 몽골 조정에 "고려의 재정은 몽골에 비하면 구우일모에 불과하여 아무런 보탬이 안 된다."는 표현까지 쓴 표문을 올리며 버텼고 끝내 고려의 입장이 관철되었다.
치달로화적 역시 1278년에 쿠빌라이 칸이 충렬왕에게 "다루가치를 꼭 둘 필요가 있겠는가? 그대가 스스로 알아서 잘 하도록 하여라."고 하였고 그 이후로 더 이상 다루가치의 존재는 언급되지도 않는다. 설역 역시 원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요구되었지만 고려는 역시 차일피일 미루며 시간을 질질 끌었고 결국 제풀에 지친 몽골은 역참 설치 요구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정복 사업에 군사를 제공하는 조군 역시 2차례의 일본 원정 이후로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상 고려에 제대로 관철된 것은 납질 하나뿐이었다.
이렇듯 몽골은 국혼을 통해 고려 왕실을 몽골 황실의 일부로 묶어두는데 성공했고 그를 통해 고려를 제후국으로 격하시키고 관제 역시 제후국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등 고려 사회의 상부 구조를 지배권에 넣는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하부 구조에 있어서는 극도로 제한적인 영향력만을 행사했을 뿐이었다. 우선 호구 조사와 조세 수납부터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몽골은 고려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고려는 이것들까지 다 허용하면 몽골에 벌거숭이로 다 보여주게 된다고 하여 절대 허용하지 않고 완강히 반대하였다. 또 몽골은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인 토지제도와 노비제도를 손보려 했지만 그 때마다 권문세족들이 득시글거렸던 고려 조정에서 앞서 언급한 '세조구제'를 들어 저지시켜버렸다. 그렇기에 몽골의 영향력은 정치적인 부분에 국한되었을 뿐 고려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몽골이 지속적으로 물자를 수탈했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역시 대부분 패전 직후에 국한된 것이었다. 공녀 문제 역시 과장된 측면이 좀 있는데 차출 자체는 원종~공민왕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대부분은 충렬왕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고 충렬왕 이후로는 간간이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숫자 역시 기록 상으로 집계되는 것은 700명 남짓한 수준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던 몽골의 물자 수탈과 공녀 차출은 대부분 충렬왕 이전 시기에 있었던 일이다. 고려가 제후국이면서 부마국인 동시에 전쟁의 패전국이기 때문에 겪게 된 것이다. 패전국인 이상 승전국에 전리품을 뜯기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리고 충렬왕 이후에 들어서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런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고려에 흉년이 들면 몽골에서 식량을 보내 원조하기도 했다.
2차례 일본 원정에서 고려군이 강제 징용 당했다는 식의 반응도 있는데 1274년 1차 일본 원정의 경우는 어느 정도 옳지만 1281년에 있었던 2차 일본 원정의 경우는 좀 다르다. 1274년의 1차 일본 원정의 경우는 무리하게 배를 만들라고 하거나 징발하게 해서 당시 고려 백성들이 고통을 입는 등의 피해 상황이 사서에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281년의 2차 일본 원정은 좀 다르다. 이 때는 충렬왕이 직접 고려가 참전할 것을 몽골에 청했고 7가지 조건을 몽골이 들어줄 것을 요구했는데 그 조건은 이렇다.
1. 현재 탐라를 수비하고 있는 아군을 일본 정벌군에 보충할 것.
2. 고려군과 한족군의 병력을 줄이는 대신 토리티무르[闍里帖木兒]를 시켜 몽골군을 더 징발하여 출정시킬 것.
3. 홍다구의 직임을 더 높이지 말고 전공을 세운 이후에 포상할 것과 토리티무르와 고려국왕에게 동정성사(東征省事)의 지휘를 맡길 것.
4. 고려의 군관(軍官)들에게 모두 패면(牌面)을 내려줄 것.
5. 중국 연해지역민들을 뱃사공과 선원으로 충당할 것.
6.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해 백성들의 애로 사항을 파악할 것.
7. 고려 국왕이 친히 합포현으로 가서 군마(軍馬)를 검열한 다음 파병할 것
그리고 몽골은 이 7가지 조건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고려군의 피해를 줄이고 고려에서 설치고 다녔던 역적 홍다구의 입지를 약화시키는데 성공했으며 고려 군관들로 하여금 패면을 받아 몽골군과 동등한 직위로 격상시킬 수 있었다. 1274년의 고려군은 몽골군에 징집당한 외인부대였다면 1281년의 고려군은 그래도 동맹국의 군대로 수준이 격상되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여전히 차등이 있었지만 형식적으로라도 그렇게 지위를 격상시킬 수 있었다. 또 당시는 고려 입장으로서도 일본 원정은 나설 필요가 있었다. 왜구들은 신라시대 때부터 해안가를 노략질하며 피해를 끼친 데다 고려에 들어서도 고종 때부터 지속적으로 노략질을 하였다. 왜구 토벌을 위해서 일본 원정은 나설 필요가 있었고 또 충렬왕 본인 역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일본 원정에 나설 필요가 있었다. 1274년의 일본 원정과 1281년의 일본 원정 당시 상황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5.2. 부마국이 되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은 《고려사》를 보면 분명히 원종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은 다음과 같다.(1270년 2월) 갑술일에 왕이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국혼을 청하였다.(甲戌王上書都堂請婚)
- 《고려사》 권 26 <세가> 26 원종 2
- 《고려사》 권 26 <세가> 26 원종 2
쿠빌라이 칸이 억지로 국혼을 강요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려 원종이 먼저 국혼을 제안했고 몽골은 그걸 받아준 것 뿐이다. 고려로서는 생존을 위해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됨으로서 얻게 된 장점과 그로 인해 생겨난 단점을 모두 알아두어야 한다.
5.2.1. 긍정적인 면
고려가 몽골에 국혼을 제안한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그나마 몽골을 향해 자주적인 목소리'라도 내기 위한 방책이었다. 즉,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길 선택한 궁극적인 이유는, 고려가 몽골의 제후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된 이상 고려가 얻을 수 있는 국익을 최대한으로 얻어내고, 몽골의 내정간섭을 그나마 줄여보려는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부터가, 특혜라면 엄청난 특혜였다. 못 믿겠지만 사실이다.[33] 몽골은 중국과는 달라서 황금씨족이 아니면 절대로 아무하고나 통혼하는 일이 없었다.[34] 그만큼 순혈주의에 집착했던 자들이었다. 칭기즈 칸이 처음으로 혼인관계를 맺은 것은 옹기라드(Onggirad)와 이키레스였으며, 이후에 옹구드(Onggud), 오이라드 등도 있었다. 이들 부족들은 칭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군사적 지원을 보냈고 스스로 몽골에 귀부(歸附)하였던 세력들이다. 그런데 고려는 어떠한가? 고려는 앞서 말했듯이 무신정권이 대대로 몽골을 상대로 온갖수법으로 전쟁을 질질 끌고 나갔던 나라다. 《고려사》에는 쿠빌라이 칸이 1260년에 고려 원종에게 보낸 조서에 "현재 하늘 아래 아직도 우리에게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다만 너희 나라(고려)와 송나라뿐이다."라고 말할 정도이다.[35]
그렇게 항복한다고 말만 해놓고 빨리 항복을 안 하고 개겼던 나라가 고려와 남송이었는데 남송은 결국 1279년에 군대를 풀어서 밟아버렸지만 고려는 부마국이 되는 특혜를 입은 것이다. 그러니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된 것은 오히려 특혜를 입은 것이지 손해를 입은 게 아니다. 이렇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국혼을 받아준 것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원종의 지지 덕분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보은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국혼이 이루어지면서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가 되었고, 이것은 고려의 입지가 강화되는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원종부터 그 위상이 달라졌다. 원종이 쿠빌라이 칸의 사돈이 되었기에 몽골 입장에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 그 기록이 역시 《고려사》에 나와 있다.
(1269년 11월) 계해일에 왕이 흑적(黑的) 등을 위해 잔치를 열면서 그들을 상좌에 앉히자 그들은 이렇게 사양했다. "지금 왕태자께서 이미 황제의 따님과 약혼하셨으니 국왕께서는 이제 황제의 부마 대왕(駙馬大王)의 부친이십니다. 그러니 황제의 신하인 우리가 어찌 국왕과 대등한 예우를 받겠습니까? 국왕께서 서쪽을 향해 앉으시면 우리는 북쪽으로 향하여 앉겠습니다. 국왕께서 남쪽을 향해 앉으시면 우리는 동쪽을 향해 앉겠습니다."(癸亥王宴黑的等使坐上座黑的等讓曰今王太子已許尙帝女我等帝之臣也王乃帝駙馬大王之父也何敢抗禮王西向我等北面王南面我等東面)
《고려사》 권 26 <세가> 26 -원종- 2
《고려사》 권 26 <세가> 26 -원종- 2
이렇게 고려 원종은 쿠빌라이 칸의 사돈이 되었기에 몽골 신료들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지위로 격상되었다. 사위인 충렬왕 역시 마찬가지다. 《고려사》를 보면 1274년에 충렬왕이 즉위했을 때 몽골의 사신이 조서를 전달하였고 충렬왕이 술잔을 돌리자 사신은 충렬왕에게 절을 올리고 공손히 받아 마신 다음 다시 절을 올렸다. 그런데 같이 참석했던 다루가치는 꼿꼿하게 서서 마시고 충렬왕에게 절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오히려 사신이 다루가치를 꾸짖었다.
"왕께서는 천자의 부마이시거늘 어찌 늙은 놈이 감히 이런 짓을 하는 것이냐? 돌아가서 천자께 아뢰면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다루가치는 본래 몽골에서 속국의 정치를 감독 및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들인데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되었기에 이제 더 이상 옛날 같은 위세를 과시하지 못하고 약화되었던 것이다.[36] 또 몽골은 국가의 대소사를 쿠릴타이란 회의를 통해 결정하는데 이 쿠릴타이엔 칸의 사위도 참석이 가능했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의 사위이기에 당연히 쿠릴타이에 참석할 자격이 주어졌으며 이를 통해 고려의 입장을 밝히고 국익을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다루가치 역시 충렬왕 이후로는 사라졌으며 지속적으로 요구해 오던 호구 조사 역시 몽골이 자진 철회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역적 최탄 등이 팔아먹었던 동녕부를 1290년에 반환받았고, 또 삼별초의 난으로 인해 상실하게 된 탐라총관부를 1301년에 반환받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1294년에 쿠빌라이 칸이 승하했을 때 고려인들은 예외로 장례식장에 참석할 수 있었다. 몽골의 장례 법도엔 오로지 몽골인만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했지만 유일하게 고려인들만은 참석이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왕을 호종했던 신하들은 비록 가마꾼과 같은 천인이라도 빈전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고 《고려사》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충선왕은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몽골 황실 내에서도 상당히 서열이 높았다. 원무종 보르지긴 카이샨이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쿠빌라이 칸의 외손으로서 황실 내 상서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충선왕이 강력하게 지지해준 덕분이었다. 이에 무종은 그에 대한 보답으로 충선왕에게 심양왕의 작위를 부여해 고려 국왕이 만주 지역까지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었기에 가능해진 일들이었다. 갖가지 문제점들은 있었지만 다루가치를 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폭넓은 자치를 보장받게 된 것, 만주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게 된 것, 고려 역적들이 팔아먹은 땅을 일부라도 반환받게 된 것 등은 모두 고려 국왕이 몽골 칸의 사위가 되었기에 그 지위를 인정받아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5.2.2. 부정적인 면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긍정적인 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면도 있게 마련이다. 몽골 간섭기 당시 충선왕부터 그 이후로 고려의 왕자들은 몽골 황실의 외손이 되었는데 그들은 태어나면 반드시 외가인 몽골에서 성장, 교육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6사 중 입질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모 잡히듯이 끌려간 왕자들은 한자로 질자(質子)라고 하고 몽골어로는 투르칵(turqaq))라고 불렀다. 엄밀히 말하면 분명히 이는 볼모였지만 고려와 몽골이 국혼을 통해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남도 아니고 너희 고려 왕자들 외할아버지인데 외할아버지가 손자들 보살피고 가르치는 게 뭐가 잘못됐냐?"는 식으로 입질이 정당화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그 덕분에 충선왕~공민왕까지 고려 국왕들은 이름이 2개가 되었다. 하나는 고려 이름이고 하나는 몽골 이름이었다. 국왕들의 이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앞의 이름이 고려 이름이고 뒤의 이름이 몽골 이름이다.
- 충선왕 : 왕장(王璋)/왕이지르부카(王益知禮普花)
- 충숙왕 : 왕만(王卍)/왕아라트나슈리(王阿刺訥忒失里)
- 충혜왕 : 왕정(王禎)/왕부다시리(王寶塔實里)
- 충목왕 : 왕흔(王昕)/왕파드마도르지(王八思麻朶兒只)
- 충정왕 : 왕저(王胝)/왕미슈간도르지(王迷思監朶兒只)
- 공민왕 : 왕전(王顓)/왕바얀테무르(王伯顔帖木兒)
이들은 사실상 말이 고려 국왕들이고 고려 사람들이지, 어린 나이부터 몽골에서 자라고 몽골식 교육을 받은 재몽교포들이나 다름 없다. 게다가 혈통적으로도 대를 내려갈수록 고려가 아닌 몽골계에 가까웠다.[37] 그 뿐 아니라 아무리 세자 시절에 고려 여인과 혼인하였다고 하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반드시 몽골 공주와 혼인해야 했고, 정비 자리도 당연히 몽골 공주의 자리였다. 그리고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황실의 일족으로 편입되었기에, 왕후가 된 몽골 공주들은 시호 역시 몽골 황실의 작위를 우선하게 되어 '왕후'라는 시호가 붙지 않고 '공주'라는 시호가 붙었다. 제국대장공주, 계국대장공주,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 덕녕공주, 노국대장공주가 '왕후'라 기억되지 않고 '공주'라 기억되는 것도 이 영향이 크다.
그리고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황실과 한 집안으로 묶였기 때문에 국왕의 폐위, 복위가 용이해졌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생겼다. 황제가 왕자를 태자로 세웠으나 태자가 제대로 일을 못하면 폐위시키고 다른 아들을 태자로 세운 것과 같이, 장인인 몽골의 칸이 "나는 내 사위 고려 세자를 믿고 국왕으로 책봉해줬는데 일을 똑바로 못해서 폐위시킨다."는 명분이 생기게 된 것이다. 다른 왕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중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 사망사건으로 인해 수시로 몽골 조정에 불려가 문책을 당한 것도[38] 충혜왕이 폐위당해 귀양을 가게 된 것도 새어머니이자 몽골 공주인 경화공주를 강간했기 때문이었다.[39]
또 앞서 언급한 심양왕 자리 또한 후에 들어선 고려 왕위 계승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충선왕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충선왕이 1298년에 잠시 즉위했다 폐위된 후 몽골에서 머무는 동안 형인 강양공(江陽公)의 아들이었던 왕고를 아들처럼 아끼고 사랑하였는데 사랑하는 조카에게 뭔가 선물을 주고 싶었던 마음이 화를 불렀다. 1313년에 충선왕이 고려 정치에 신물을 느껴 이제 아주 양위하기로 결정을 하고 양위를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고려 국왕은 아들인 충숙왕에게 물려주었지만 심양왕 자리는 조카인 왕고에게 각각 따로 물려주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이로 인해 충숙왕~공민왕 때까지 약 50년 동안 고려 왕과 심양왕 간 대립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때 몽골은 고려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하여 일부러 심양왕을 고려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처음에는 몽골 측에서 충선왕에게 답례로 준 선물이었던 심왕이 나중에는 고려의 성장을 옥죄는 족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특히 앞서 말한 심왕 왕고는 고려 국왕 자리까지 차지할 욕심으로 지속적으로 충숙왕을 참소해 충숙왕이 몽골 조정에 수시로 강제 호출당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갖가지 이점을 얻기도 했지만 반대 급부로 입게 된 손실도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렇게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는 결국 폐가입진이라는 초유의 혈통 부정 사태로 이어졌고, 끝내 500년 고려왕조의 문을 닫고 조선왕조가 개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몽골 황실의 부마국으로 나름 예우를 받으며 지냈던 점은 오히려 한족 왕조인 명이 들어서자 고려는 물론 조선 개국 초까지도 잠재적인 친몽골세력으로 의심받으며 명 태조의 노골적인 견제와 막무가내적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이 견제책의 일환이었던 철령위 사태와 이에 대응한 고려의 출병은 위화도 회군을 야기했고, 이런 역사를 익히 아는 조선 조정은 명말청초의 격변기 속에서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친명노선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부정적인 면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면, 충렬왕~공민왕까지 고려 - 몽골 부부를 보면 대체로 아내 쪽이 남편보다 더 먼저 죽었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충혜왕의 아내 덕녕공주만이 대략 60세 정도에 죽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40세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했다. 충숙왕의 마지막 왕후인 경화공주도 남편의 임종을 지켜보긴 했지만 남편과 나이 차이도 많았고 남편보다 고작 5년 더 살았을 뿐이라 역시 40세를 못 넘었다. 제국대장공주의 경우는 남편 충렬왕보다 23년이나 연하였지만 겨우 39세의 나이에 요절했고 남편보다 11년이나 먼저 죽었다. 계국대장공주 역시 남편 충선왕보다 10년 정도 연하였지만[40] 많이 잡아봤자 3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보다 10년이나 더 먼저 죽었다. 충숙왕 역시 늘그막에 맞아들인 경화공주를 제외하고 복국장공주와 조국장공주는 모두 20세도 채 되지 않아 죽었다. 노국대장공주 역시 공민왕보다 9년이나 더 먼저 죽었다. 공민왕이 20세에 결혼했고 그녀가 죽었을 당시 36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보면, 노국대장공주 또한 많이 잡아봤자 30대 중반에 죽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덕녕공주를 제외하고 나머지 몽골 출신 공주들이 40세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것에는 향수병과 풍토병 등이 꼽힌다. 당장 제국대장공주만 해도 친정에 갔다 온 뒤 궁에 핀 작약꽃을 보고 고향 생각이 나서 한참을 흐느껴 울다가 그대로 병이 나서 죽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또 몽골의 환경과 고려의 환경은 전혀 다르다. 아무래도 건조한 몽골에서 살았던 공주들이, 덥고 습한 여름이 있는 고려에서 적응하는 것은 꽤나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물과 토질이 맞지 않은 곳에서 살게 되었다 보니 역시 병을 빨리 얻게 되어 죽은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남자들 평균 수명이 여자들보다 더 짧아서 보통은 여자들이 남편을 먼저 저승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고려 - 몽골 부부는 특이하게 남자들이 아내를 먼저 저승으로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1] 여몽전쟁 전인 여진정벌당시에도 멀쩡한 중앙군이 있는데도 보병중심인 별무반을 따로 편성하였는데 교과서의 내용과 달리 학계에서는 실제로 별무반의 주력은 기병이 아닌 보병으로 보고 있다. 기병부대인 신기군의 경우 문무산관 및 주민, 부민, 군민, 현민 중에서도 말을 가진 사람들을 징집하여 편성했다지만 귀족 및 관료들은 사실상 징집이 어려웠고 만만한게 일반 백성인데 농경정주사회인 고려에서 일반백성들이 말을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은 높지 않은 것으로 보기 때문에 대규모 기병양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란 것이다. 항마군의 경우에는 승도 위주로 편성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사원에 소속되어 경작하던 농민들이 징집대상이었다. 신보군의 경우에도 주부군현에서 20세 이상의 과거를 보지 않는 남자들을 징집한 것이므로 사실상 별무반은 여진 정벌을 위하여 거국적으로 일반 백성들을 징집하여 편성한 쪽에 가깝다. 이로 인해 당시 고려 정규군 조직의 문제나 또는 동원체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해석도 있다.[2] 그나마 이들도 죄가 있다면 서하는 몽골을 배신한 죄, 남송은 힘을 합쳐 금나라를 멸망시킨건 좋았는데 정강의 변을 망각하고 몽골에 선빵을 때린 것 정도[3] 정확히 말하면 DNA상으로 씨가 마른게 아니라 많이 죽기도 했으려니와 가장 큰 문제는 서하인이 타민족과 동화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서다.[4] 북극해, 남극해, 발트해 같이 매우 추운 지방이나 프랑스 혁명 당시 네덜란드가 댐을 터뜨려 프랑스군을 막으려 할 때 쏟아진 바닷물이 수심이 얕아서 얼어서 방어에 실패한 적이 있으나, 통상적으로 바다는 겨울에 얼지 않는다고 일컬어진다. 더군다나 강화도 앞바다는 물살이 매우 빠른 편이므로 겨울에 배 없이 건널 정도로 얼 가능성은 0이다.[5] 다만 아주(牙州. 현재의 아산 지역.) 해전처럼 고려군이 소수였던 전투에선 고려군이 지기도 했다. 다만 아주 해전은 http://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limit=20&page=1&pre_page=1&codeIds=PERIOD-0-3&searchTermImages=%EC%95%84%EC%A3%BC&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95%84%EC%A3%BC&searchKeywordConjunction=AND상 상륙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므로 소수의 고려 수군과 몽골 육군의 전투였을 가능성도 있다.[6] 압해대교의 길이는 3.5km, 그나마도 교량부만 따지면 고작 1.4km에 불과하다.[7] 그나마도 현재 상황으로는 임야가 이 면적의 1/3 가까이를 차지한다. 섬 자체의 생산량이 그리 크지 않았을 테니, 당시 최우의 해도 입보책으로 다소 무리한 인구를 수용했을 가능성을 감안하더라도 당시 압해도에 있던 주민과 고려군의 수가 그닥 많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지금 인구조차 못 채웠다.[8] 물론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한족 출신 투항자들 덕분에 수전에 능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당시 한족 출신 투항자들이 실제 역사보다 훨씬 적거나 아예 없었다고 해서 청군이 강화도 점령을 포기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애초에 만주족은 몽골족마냥 물을 무서워하는 민족이 아니었으니 말이다.[9] 애초에 왕조국가에서 방어력이 허술한 곳으로 천도했다면 천도를 주장한 사람의 목은 남아나지 않았을것이다.[10] 당시 슐레이만 1세의 오스만군은 18만~20만 명이었고 400여 척의 함선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수비 측은 기사 703명에 주민들을 모두 포함해서 6,703명이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약 30배의 차이가 났던 것이다. 출처 - 영어 위키백과[11] 반대로 항복 후 몽골로 갔다가 다시 도망나온 윤춘은 몽골이 압해도조차 공략이 불가능함을 논하면서 섬 안에서 농사를 짓는 계책을 말한다. 이현의 전략을 무효화시키는 계책을 제시한 것이다. 물론 최항은 그닥 유능하지 않아서 내륙민인 청주 주민을 강압적으로 섬으로 옮기는 뻘짓을 저질렀다.[12] 황잠선이라는 자가 남송 고종에게 그렇게 주장했다고 한다. 당연히 당시 남송의 상황으로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13] 아이러니하게도 지지용의 조상이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현종을 호위했던 충신인 지채문이다. 조상은 고려가 멸망할 뻔한 국난에도 끝까지 왕을 지켰으나, 후손은 고려를 멸망시키려 한 것이다.[14] 미국이 대만에 무기를 파는 것을 중국이 경계하거나 러시아가 이란이나 시리아에 무기를 판매하는 것에 이스라엘이 경계하는 것이 그 예다.[15] 전투병이 113만 3,800명이고 보급을 담당하는 군사의 수는 전투병의 배에 달했다고 분명히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16] 심지어 직접 출성항복하는 것조차 크게 다를 건 없어서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로 알려진 최명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출성항복만은 피하려고 고군분투했다. 출성항복은 "나는 졌고 너님이 내 운명을 결정지으셈" 이라 하는 것이라서 받아들이는 측에서 어떻게 처분하냐에 따라서 항복하는 당사자와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주화파로 알려진 최명길이 청나라와의 강화는 피할 수 없다고 여겨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추진한 반면 출성항복만은 극구 피하려 했던건 이것 때문이었다. 그냥 강화만 하면 좀 체면은 구겨도 나라는 존속되지만 출성항복을 하면 나라가 망할 지 말 지는 그냥 받는 측이 결정하기 때문이다.[17] 세계 각지에서 처음부터 싸우지 않고 순순히 항복해버리는 나라는 몽골이 그대로 받아주었지만, 고려는 이미 여러 번 항전 의사를 밝혔기에 이런 경우 몽골은 대체로 가혹하게 정벌하였다.[18] 실제로 삼별초의 난때 여러 문관들이 납치를 당해 죽을 뻔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문관들도 꽤 많았다.[19] 비판론 첫부분의 토전사 링크에도 해당 내용이 나온다.[20] "의관은 본국 풍속을 따르고 위아래로 모두 고치거나 바꾸지 말라(衣冠從本國之俗 上下皆不更易). 의심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毋自疑懼)."(원고려기사 1260년 세조황제 원년 6월)[21] 무칼리 일족이 요양행성에 자리를 잡게 된 것도 이 이유다.[22] 몽골족의 2대 칸 암바가이 칸을 타타르와 함께 잔혹하게 죽였고, 이렇게 지도자를 잃은 몽골족이 분열돼서 약체화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애초에 칭기즈 칸이 젊은 시절 메르키트에게 지독하게 당하고 알탄이나 다리타이 같은 친족들에게 배신만 당하는 삶을 살아왔던 것도 몽골족의 분열 때문이니, 금나라는 칭기즈 칸 입장에서 보면 타타르와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의 비극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다.[23] 2차 정벌 때는 칭기즈 칸이 직접 오기는 했지만, 1차 정벌 때부터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동원된 베테랑은 무칼리다.[24] 아리크부카 쪽이 아닌 쿠빌라이에게 항복한 것이 단순한 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쿠빌라이가 자리를 잡은 입지와 아리크부카의 거지같은 인간성에 쿠빌라이의 손을 들어줬다고도 추측할 수도 있다.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25] 북송의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 병력 수가 30만이었는데 고려 때에는 그보다 2배가 더 늘었다고 적혀 있다.[26] 이 때문에 삼별초의 반란 때 고려 조정은 정규군을 신규 재편성해야 하는 초유의 군사 제도 재건 사태가 벌어진다.[27] 더욱이 몽골은 남송을 이미 먹어치우려고 작정했기에 남송은 싸우기 싫어도 살려면 싸워야 하는 처지였다.[28] 한국사만 봐도 서로 왕을 죽이고 죽이던 고구려와 백제가 막판에 가서는 신라 견제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동맹을 맺었으며, 나당전쟁에 이르러서는 그 백제 유민들과 고구려 유민들이 자기 나라를 멸망시킨 신라와 손을 잡기도 했다.[29] 이들의 근거지가 본래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이어서 본지파라고 불렀다.[30] 이들의 근거지가 한인 즉, 옛 금나라의 땅이었던 상도 개평부여서 한지파라고 불렀다.[31] 그러나 이 사람은 정식으로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한 학자가 아니라, 그저 저술가일 뿐이다. 참고한 서적들도 죄다 2차 사료들인 대중용 인문 도서들 뿐인 데다가, 무엇보다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인 《조선왕조실록》을 가리켜 조작되었다며 안 믿는다는 소리를 떡하니 늘어놓는 모습을 본다면 한자로 적힌 1차 사료들을 제대로 읽고 해석할 능력을 갖추었는지조차 의문이다. 한 예로 백지원은 자신의 책인 《조일전쟁》에서 삼국지의 유비가 어머니한테 줄 차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버젓이 적어 놓았는데, 그건 《삼국지》 원문에 없으며 일본 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내용이다.[32] 고려를 뜻한다.[33]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일이지만, 조선 태종 때 "명나라 황제에게 공주가 있는데 조선의 세자와 결혼시키면 어떨까?"라는 얘기가 나왔을 때 하륜이 "올ㅋ 그거 좋은데? 고려 때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특혜 누렸잖아" 라고 반응했다. 즉 부마국은 일반 국가와는 격이 다르다. 게다가 혼인으로 맺어진 소위 '장인과 사위 관계'니, '장인'인 몽골이 '사위'인 고려를 남들과 똑같이 대해주면 그건 그것대로 어색하다.[34] 비단 몽골뿐 아니라서 유목민은 혈연에 많이 집착했다.[35] 물론 이는 허세가 좀 들어간 말로, 하늘 아래 신하로 복종하지 않는 나라는 두 나라 말고도 더 많이 있어서 사실 과장된 표현이었다.[36] 다루가치는 몽골의 일개 관리에 지나지 않지만 고려의 왕은 몽골 대칸의 사위니까 다루가치 따위와는 격이 다르다.[37] 당장 할아버지대에 몽골에 항복했다면 손자대 국왕은 25%의 고려 핏줄과 나머지 75%의 몽골 핏줄을 갖게 된다. 반원정책을 펼친 공민왕도 혈통적으로는 몽골 피가 진하게 흐르는 인물이었다. 정확히는 8분의 3인 37.5%가 몽골 피로 형 충혜왕과 함께 고려 여성에게서 태어난 왕이였다. 실제로 가장 몽골 피가 짙게 흐른건 충혜왕과 공민왕의 아버지 충숙왕으로, 75%가 몽골 혈통이었다.[38] 충숙왕의 아내 복국장공주가 갑자기 죽었는데, 그 때 충숙왕이 부부싸움 끝에 복국장공주를 때려죽였다는 의혹이 불거져서 그렇다. 현재의 정설은 '복국장공주는 시집오기 전부터 이미 지병을 앓고 있었는데, 그 지병이 발병하여 급사했다'는 것이다.[39] 충선왕 역시 귀양을 갔지만, 이미 그는 고려 국왕을 양위한 이후 몽골 내부의 정치적인 문제로 귀양을 간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40] 계국대장공주의 생년은 미상이다. 다만 부친 보르지긴 카말라가 1263년 생인 걸 감안하면 아무리 빨리 잡아도 1280년대 생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1275년생인 충선왕보다 5년 이상 연하라고 봐야 한다.